공(空) 의미의 세 차원
승인 2003.02.19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는 절대자유
공사상(空思想)은 초기 불교의 연기설(緣起說)을 재해석하여,
붓다의 기본 입장을 보다 명확하게 밝힌 대승불교의 핵심적인 종교철학 사상이다.‘
공(空)’이라는 용어는 ‘sunya’(텅 빈)라는 형용사나 ‘sunyata’(공한 것, 空性)이라는 명사의 번역어이다.
초기경전(初期經典)에는 ‘공’이라는 용어가
주로 무상(無常)과 무아(無我)를 통찰한 결과 얻어지는 삼매(三昧)의 상태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대승불교에서 공의 개념은 보다 다양하게 전개되었는데
대승경전의 모체인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과 그 주석서인 〈대지도론(大智度論)〉에는 공의 의미를 다음과 같은 여덟 차원(十八空)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1. 내공(內空): 인식의 주관인 몸과 마음의 요소, 즉 감각 지각 사고 인식의 작용을 일으키는 요소가 다 공함을 말한다.
2. 외공(外空): 인식의 대상이 되는 외적 객관이 공함을 말한다.
3. 내외공(內外空): 이것은 앞의 두 가지를 함께 부정한 것이다.
4. 공공(空空): 공도 또한 공함을 말한다.
5. 대공(大空): 시방(十方)과 허공 등의 공간이라는 관념을 부정하는 것이다.
6. 제일의공(第一義空): 제일의는 궁극적 진리의 본체인 진여(眞如)나 열반 등을 말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최고의 진리상도 사실은 공하다는 의미이다.
7. 유위공(有爲空): 인연에 의해 생성된 모든 현상의 존재들은 변화하고 언젠가 사라지는 것이다.
8. 무위공(無爲空): 인연에 의해 생기지 않는 허공, 열반 등과 같은 무위법도 공하다.
9. 필경공(畢竟空): 불교 외의 사상에서 말하는 실유관(實有觀)이나 불교의 나와 법에 집착하는 실유관 등을 모두 부정한다.
10. 무시공(無始空): 시간적으로 세간이나 중생, 모든 사물에 어떤 시작이 있다는 관념을 부정함이다.
11. 산공(散空): 현상계는 인연에 의해 생성되므로 인연의 화합이 없어지면 공하게 된다는 것이다.
12. 성공(性空): 일체 존재 요소의 자성(自性)이 공이라는 의미이다. 인연에 의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본래의 실체가 공하다는 것이다.
13. 자상공(自相空): 성공(性空)은 불성과 진여는 본체가 그대로 공함을 말하는 총상(總相)이라면 자상공은 온갖 만물의 개별적인 존재성인 별상(別相)을 부정함이다.
14. 일체법공(一切法空 ): 앞에 말한 일체 제법의 공함을 통틀어 말한 것이다.
15. 불가득공(不可得空): 인식론적으로 무엇을 알고 얻을 것이 있다는 관념조차 있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16. 무법공(無法空) : 현상의 모든 법이 이미 없어진 상태를 말한다.
17. 유법공(有法空): 현상은 인연에 의해 존재하는 가유(假有)일 뿐 그 본질은 공하다는 것이다.
18. 유법·무법공(有法·無法空): 시간적 존재뿐만 아니라 공간적 존재까지도 모두 공함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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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공의 교설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세 차원으로 나누어 해명해 볼 수 있다.
첫째, 존재론적으로
공은 모든 실체의 무자성성과 연기성을 의미한다.
인연에 의해 생성된 모든 현상의 존재들은 변화하고 언젠가 사라지는 것이다.
제법은 인연에 의해 존재하는 가유(假有)일 뿐 그 실체(substance)는 공한 것이다.
그러므로 시방(十方)과 허공 등의 공간 관념이나, 중생이나 모든 사물에 어떤 시작이 있다는 시간관념도 공하다고 한다. 이러한 공의 연기론적 의미를 공의(空義)라고도 한다.
둘째, 인식론적 차원에서 볼 때
공은 얻을 것도 없고 얻어야 할 진리(法, Dharma)라는 관념도 없다.
무엇을 알고 얻을 것이 있다는 관념조차 있을 수 없다.
이를 무소득공(無所得空) 또는 불가득공(不可得空)이라고도 한다.
깨달을 법이 없기 때문에 진리를 구하고 얻고 깨달을 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도 또한 공하다(空空)고 한다.
이것은 모든 존재의 요소가 다 공하다고 하면 공이라는 것은 존재할 것이라는 공의 실재화와 관념화의 오류를 논파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평등일미(平等一味)한 제법의 진실상을 공성(空性)이라고도 한다.
셋째, 종교적으로
공의 진리는
무명과 번뇌를 타파하고 희론을 적멸케하는 수행 방법이다.
이러한 공의 목적과 효용을 공용(空用)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공의 체득에 의해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는 절대 자유와 테두리 없는 마음을 얻는 것이다.
여기에서 대승 보살 윤리의 근본이 되는
자타불이(自他不二)의 동체자비(同體慈悲)와 무연자비(無緣慈悲)의 실천이
필연적으로 따르게 된다.
동국대 불교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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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타불이
[自他不二, Jatabuli]
나와 남이 둘이 아니라는 것. 이것은 또 궁극적으로는 공 (空)인 인연법을 뜻하며, 여기에서 동체대비 (同體大悲)라는 불교 특유의 자비관이 나오는 동시에 일반적인 개념의 사랑과 구별된다. 다시 말해 자타불이 (自他不二)는 곧 자타불이 (自他不異) 또는 주객불이 (主客不二)인 동시에 우주의 법칙을 말함. 일반적인 개념의 사랑은 대개 인본주의 사상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덕행 (德行)으로, 불교의 동체대비 사상이 뜻하는 우주적 개념이 내포되어 있지 않다
Non-duality or non-discrimination of the I and the not-I, this and that, you and me, the view that sees the whole universe as One: Hence the great compassion of One-root or One-body, not just humanitarian love or compassion. Cf. (Bulibeop) Non-duality, (Yeon-gi) Dependent origination or aris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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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공부
자비(慈悲)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다. .
.법현스님-열린선원원장
온누리 2007. 12.
자비(慈悲)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다.
불교에 자비가 없으면 어떤 느낌일까?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니까 사랑을 강조하는 기독교 와는 사뭇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교리 비슷한 자비가 없어도
뭐 그리 달라질 것이 없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뜻밖에도 적은 숫자가 아님을 보고 놀란다.
싯다르타가 삶의 변화 속에서
어쩔 수 없이 겪어야만 하는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내 인생의 전부나 다를 것이 없는 숨(呼吸) 살피는 공부를 했다.
그 결과 안정과 평화와 통찰지(洞察智)를 얻었고
존재와 발생의 원리라 할 수 있는 연기(緣起)의 묘리를 알게 된 것을 깨달음이라 부르고
그 때 부처님이 되었다고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깨달음을 얻기만 하면 부처가 되고
깨달음을 얻는 데는 자비가 충분조건일지언정
필요조건은 아니라는 생각들을 많이 하는 것 같다.
하지만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랄 수 있는 연기(緣起)는
어떤 것도 홀로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라
물질과 인연을 맺는 마음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부처님이 수행자이던 시절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자타카(본생 이야기)에 도도히 흐르는 정신은 바로
나와 직, 간접적으로 인연을 맺고 있는 모든 존재를 향한 사랑이다.
그것을 우리는 자비라 부르고 있으며
그것이 깨달음을 이루는 필수 요인이며
피안(彼岸) 즉 깨달음에 이르는 바라밀(婆羅蜜)이라 한다.
한편 자긍심에 가득한 불자들은
불교의 자비는 사랑함(慈),연민함(悲),기뻐함(喜),평화로움(捨)의 준말이므로
기독교의 사랑보다는 네 배나 가치가 있는 덕목이라 착각하기도 한다.
그 말을 쓰는 동네가 달라서 약간의 뉘앙스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보아도 그것은 최고의 가치이며
무게 차이가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홀로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연기의 가르침을
윤리적인 측면에서 이해할 때
다른 존재가 바로 나임을 아는 동체자비(同體慈悲)임을 확인할 때 더욱 그렇다.
우리는 요즈음 매우 많은 사건들을 만나고 있다.
신 정아-변 양균씨 이야기,버마의 민주화이야기와 스님들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
남북정상 이야기와 서해 그리고 납북자 이야기,
두타스님 이야기,조계종 스님들 이야기,
조계-태고의 다툼 속에 헐리는 천년고찰 안정사이야기 등이
눈과 귀를 통해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다.
그 어느 하나를 보아도 문제를 해결하기가 쉽지 않은 것들이다.
따라서 적당히 모른 체하고 넘어가면 될 것이다.
나하고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으므로.
하지만 우리는 아니 나는 부처님의 길을 충실하게 따르고 제대로 가고자 서원한 수행자로서
뚜렷이 살펴보고 엄밀히 반성할 때
어느 한 곳에도 나의 마음이나
몸의 힘이 가 닿지 않은 곳이 없음을 느끼고 전율할 때가 많다.
한 번도 만나 본 적도 없는 분들도 있지만
신문이나 방송 또는 행사장이나 그 어떤 곳에서
스치고 지나간 인연이라도
나와는 오랜 인연이 있음을 생각할 때 소홀히 생각할 수가 없다.
그래서 설사 나쁜 일을 한 사람이라고 밝혀졌다 할지라도
나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나무랄 수가 없다.
특히 약자의 입장이 되어버린 이들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어디에 서 있든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마음을 기울여서
그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이 무엇 때문이든지 헤아려주고
보살펴 주며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믿는다.
두타스님만 해도 그렇다.
그렇게 성자인 것처럼 추켜세울 때는 우리 사람 같고
문제가 있다니까 본래 우리가 아니었다는 식은 곤란하다.
우리 불교의 지도자들이 중국이나 태국, 미얀마나 스리랑카 등에 가서 한
수행자답지 못한 무자비한 이야기는 참으로 부끄러운 이야기이다.
그것이 계율(戒律)을 입에 담지 않아도
‘인연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라!’ 하신
아니 인연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깨달음 속에서
‘인연 없는 중생마저 사랑하라!’ 하신
무연자비(無緣慈悲)를 떠올릴 때
‘나는 그런 적이 없는가? 그럴 가능성은 없는가?’ 반성하게 된다.
자비(사랑)가 없으면 아무 것도 없다.
사랑이 없으면 깨달음도 없다.
부처님의 깨달음도 중생을 향한 자비가 없다면 빛이 바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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