実体論批判としての縁起=空
- 小川一乗『大乗仏教の根本思想』を読む -
실체론 비판으로서의 연기 = 공
-오가와 일승 '대승 불교의 근본 사상' 읽기 -
제가 오랜 세월, 그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만, 문제의식으로서 가지고 있는 것은, 석존의 불교(근본 불교)가 친무의 불교(진불교)에 어떻게 계승되어 갔는지를 알아내고 싶다는 것이다 . 이 문제 의식에서이 책을 읽으면 많은 제안이 있습니다. 다만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불교개론서라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저자에게는 명확한 사상적 입장이 있기 때문이다. 이 책 전서에도 "불교를 교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 원점을 사상적으로 추궁해보고 싶다"고 하는 대로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책은 아마도 편향된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원래 불교 그 자체가 편향의 체계가 아닌가.
서장 「불교의 현상을 묻다」에 있어서는, 불교가, 시대의 경과와 지역 전파에 따라 변용해 갔던 사실을, 「수용이 아니고 변모」 「불교의 습속화이며 비불교화해 간다 길”이라고 파악된다. 이 관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대승불교운동으로 해도 그것은 불교의 '발전진화'라고 평가할 수 없다. 종교는 과학이 아니기 때문에 발전 진화는 있을 수 없다. 「원시불교」(primitive buddhism)라는 말이 있지만, 이것은 석존의 불교를 primitive라고 하는 것으로, 모독이 되어 버리고 있다. 나는 '대승비불설'에 서지는 않지만 대승불교가 힌두의 사상에 오염된 곳에서 출발하고 있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저자는 약간 돌면서 "대승 불교가 되어, 결과적으로 인도에서 불교가 소멸해 버리는 결과를 가져오는 원인이 만들어졌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 "원인"이란 민간 신앙에 환영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오늘의 우리의 과제이기도 하다.
일본 불교의 현상에 대해서도, 습속화·토착화를 정착과 혼동해, 그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불교자(승려)가 많은 것에는 포기할 수 있다. 불교 의식이 신도적인 타마시즈메·타마후리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는 일본에 있어서, 「불교는 영혼을 부정한다」를 상식으로서 가지고 있는 일본인이 도대체 얼마나 있다고 하는 것인가. 여기서 일본에서는 불교의 형식은 있어도 불교의 마음(사상)은 매우 일부에만 존재한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유럽 쪽이 불교는 정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서장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친무리가 '본원·념불'이라는 말로 표현한 불교의 높이와 용수가 '하늘'으로 표현한 불교의 높이와 석존이 '연기'로 설한 불교의 높이는 같습니다. 시대와 함께 점차 높아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것입니다. 단지 그 사이에 높은 것을 낮게 해 버린, 습속화된 불교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시 높이로 올려간 (...) 파와 같은 것이 불교의 역사입니다.
조금 튀긴 다리를 취하는 것 같지만, 삼자가 같은 높이,라고 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역시 최고봉에 위치하는 것은 석존이다. 거기서부터 점점 타락해 가는 것을, 류수나 친무루는 바탕으로 돌려보려고 했다, 다만 그것은 각각의 시대나 사회 및 선행하는 불교 교리에 제약되고 있기 때문에, 완전히 원래대로 돌려줄 수 있었던 것은 아니. 親鸞는 말법이라는 제약(=역사적 사회적 조건) 속에서 진실의 불교를 추구했지만, 그것을 석존의 깨달음과 같은 수준으로 보는 것은 반대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나는이 책에서 많은 제안을 받았으며 배웠습니다. 저자는 상당한 부분을 나누고, 난해로 여겨지는 하늘의 사상의 해명에 대하고 있다. 이 근처, 과연 인도 불교학의 배학답게, 설득력을 가지고 논리 전개되고 있다. <공>이란 무엇인가, 많은 사상가나 불교학자가 해설을 실시하고 있지만, 내가 아는 한에서는, 명쾌하고 평이하게 풀어내고 있는 것은 본서가 제일이다. 그러한 명쾌함·평이성이 가능한 것은 저자 자신의 사상이 명확하기 때문일 것이다. 즉, 에지=공이란 「반실체론」이라고 하는, 이 일점에 집약된다. 이 연장선상에, 영혼·윤회전생·梵我一如...과 같은 비불교에 대한 비판이 전개되지만, 그것은 날카롭고 명석이다.
하지만 불성사상(여래장사상)에 대한 평가가 되면 갑자기 애매하게 되는 것이 나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불성」이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의 원어가 밝혀짐에 의해, 「불이 되는 원인」, 불이 될 가능성이라고 하는 의미인 것이 명확하게 된 것입니다. 「불이 될 가능성」이라고 하는 것처럼 최초로 일본어 번역한 것은 나입니다만, 부처가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불성 사상입니다.
이 원어는 dhAtu이다. 그것을 "인" "가능성"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많은 문제가 있다. 보통 dhAtu는 "계"로 한역된다. 이것은 로쿠네·육경·육식을 아우른 18계라든지, 지수화풍 공식의 6계라든지, 욕계·색계·무색계의 3계라고 하는 것이다. 의미는 영역보다는 요소 범주이며, 영어 사전에서는 우선 element라는 번역어를 주고 있다. 또한 동사 어근도 dhAtu라고 한다. 하지만 buddha-dhAtu(불성)나 dharma-dhAtu(법계)라고 하는 경우의 dhAtu는 단순한 요소가 아니라 "근원적 요소"라고 이해한다. 마츠모토 사로 선생님은 「기체」라고 번역되어 있다. 즉 부처와 법을 낳는 근원이라는 것이다. buddha-dhAtu가 "불성"이라는 것은 부처가되는 근원적 요소가 인간의 마음에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며, 이것을 전제로 한다면 그것이 성불의 가능성이라고 파악할 수 있다.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 전제 자체, 즉 근원적인 것이 존재한다는 사상이 반불교적이라는 것이 불성사상·여래장사상비판론이다.
엔기=공=반실체론이야말로 불교라고 인정하는 저자에게는, 이 전제를 냉정하고 비판적으로 재검토해 주셨으면 한다. 게다가, 「가능성(possibility)」은 필연성의 부정임에 주의하고 싶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부처가 될 가능성이란 부처가 될지도 모르거나 만들지 않을지도 모른다 (인만으로는 결과를 낳지 않고 인연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라는 것이다. 선불교가 불성을 성불의 가능성으로 풀지 않는 것은 그런 모호한 것은 곤란하기 때문에, 같다. 필연적이어야 한다. 그 의미에서도(저자가 말하는 대로 불성 사상을 성불의 가능성으로 풀어도), 불성 사상은 진불교와는 다르지 않다.
다음으로, 또 다른 문제점은 "비 본래 자기"와 "본래 자기"의 관계이다.
저자의 정의에서는, 본래적인 자기와는 길게 하고 비어 있는 자기 존재의 진실, 이것에 대해서 비본래적인 자기란, 자신의 존재를 확실한 것으로 그것에 고집하는 자기의 본연의 자세를 말한다, 라고 한다. 여기까지는 좋다고 제4장 「즉의 불도」에서는, 이들 2자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명된다.
비본래적인 자기와 공이라는 본래적인 자기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따로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즉'의 관계로서 있다. 종이 앞뒤보다 더 밀접한 '즉' 관계에 있다. (중략) 그러한 관계에 있어서, 본래적인 자기로부터의 끊임없는 부름이라고 하는 것을 본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비본래적으로 밖에 살 수 없는 우리에 대해서, 본래적인 자기로부터의 끊임없는 호소를, 본원이라고 할 것입니다.
두 사람이 왜 ‘즉’ 관계에 있는지 설명은 본서를 주의 깊게 읽어 보아도 보이지 않는다. 「말할 필요도 없이」로 정리되어 버리고 있지만, 이것이야말로 「즉」의 논리의 해명에 가장 중요한 열쇠인데. 이것은 내가 상상하기 위해 A라는 존재의 a1이라는 존재와 a2라는 존재를 대비하여 A라는 사실에서 a1 즉 a2라고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 같은 기분 한다. 그렇다고 하면, 이것은 동어 반복이기 때문에, 의미가 없는 언명이다. 모순되는 두 사람을 중재하려면 형식 논리학을 넘어 변증법 논리학을 사용해야합니다. 용수는 물론 변증법을 몰랐지만 천재적인 통찰력으로 변증법의 논리를 구사했다. 그러나 저자는 용수로부터 결론만을 받아 논리의 내용을 검토하는 것을 게을리하고 있다.
또한, 여기에서 갑자기 본원을 꺼내도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본래적인 자기로부터의 호소를 본원이라고 한다」라고 하는 것은, 경문의 어디에 근거가 있는 것인가. 이런 정서적인 혼자서의 정의에서 출발하여 진불교가 대승불교의 공의 논리를 계승하고 있다고 해도 곤란한 것이다.
그리고 대승불교의 기본 테제인 '생사 즉도반', '번뇌 즉보제'에 대해서도 비본래적 자기=생사, 본래적 자기=열반이라는 도식을 적용한다면 어쨌든 간단하게 '즉불도' 완성되겠지만, 나는 친무지가 그런 평판인 이해를 하고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저자는 '즉의 불도'와 대비하여 '전의 불도'(예를 들어 유식학파라고 하는 전식득지)를 꼽아 '알기 쉽지만 리얼리티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단순히 류키가 즉 세상이 굴러 있다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남는다. 친 줄무늬에서도,
「전악성덕」(교행신증총서)라는 문언이 있다. 전화라는 것은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계기가 아닐까.
이것은 나의 편견일지도 모르지만, 저자는 아무래도 여래 창고 사상에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되고 밖에 없다. 그것은, 어딘가에 인격적인 아미다 부처가 있고, 그 인격적으로 상정된 부처가 우리에게 어떠한 소원을 걸고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나 속에서 솟아오르는 소원, 본래적인 자기로부터의 외침이, 비본래적으로 살아있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호소해 오는, 그것이 아미타불의 본원입니다.
라는 언명 가운데 나타나고 있다. 물론 저자는 실체로서 여래장을 상정하고 있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언명으로부터는, “아미타님이라고 해도, 결국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양심과 같은 것이 아닙니까”라는 소박한 종교 부정론이 도출되어 버린다 우려가 있는 것이 아닌가. 여기에는 타력의 중요한 의의를 찾아내는 것이, 불행히도 할 수 없다.
이런 식으로 나에게는 많은 의문이 있으며, 그들은 내 이해력 부족으로 인한 것일 수 있습니다. 저자의 오가와 1승 선생님에 의한, 본서와 거의 같은 내용의 강의를, 나는 한때, 마네오 오타니파 나고야 교무소의 「성전 강좌」에서 받은 적이 있어, 그 기회에 이러한 의문을 직접 부딪히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이 강좌에서는 질문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카에스가에스도 유감이다. 또 기회가 있을까.
본서 데이터/『대승 불교의 근본 사상』오가와 이치카 저, 법장관 간, 1995년, ISBN4-8318-7832-4, A5판, 460+27페이지, 6932엔(부가세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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実体論批判としての縁起=空
- 小川一乗『大乗仏教の根本思想』を読む -
私が長年、そして現在もそうであるが、問題意識としてもっているのは、釈尊の仏教(根本仏教)が親鸞の仏教(真仏教)にどう受け継がれていったのかを突き止めたいということである。この問題意識から本書を読むと、多くの示唆がある。ただし一般的な意味での仏教概論書というわけにはいかない。それは、著者には明確な思想的立場があるからだ。本書前書きにも、「仏教を教理的に説明するのではなく、ひたすらその原点を思想的に追及してみたい」とあるとおりである。ある種の人々にとっては、本書は多分に偏向しているように思われるだろうが、私にしてみれば、偏向のない概論書ほどたいくつなものはない。そもそも仏教そのものが偏向の体系ではないか。
序章「仏教の現状を問う」においては、仏教が、時代の経過と地域伝播にともなって変容していった事実を、「受容ではなくて変貌」「仏教の習俗化であり非仏教化していく道」と捉えられる。この視点はひじょうに大切である。大乗仏教運動にしても、それは仏教の「発展進化」と評価することはできない。宗教は科学ではないのだから、発展進化はありえない。「原始仏教」(primitive buddhism)という言い方があるが、これは釈尊の仏教をprimitiveであるとしているわけで、冒涜になってしまっている。私は「大乗非仏説」に立つものではないが、大乗仏教がヒンドゥーの思想に汚染されたところから出発している事実を見落とすべきではない。著者はやや遠回しに、「大乗仏教になって、結果的にはインドから仏教が消滅してしまう結果をもたらす原因が作られた」と述べているが、その「原因」とは、民間信仰に迎合したことなのだから、これは今日の私たちの課題でもある。日本仏教の現状についても、習俗化・土着化を定着と混同して、それを肯定的に評価している仏教者(僧侶)が多いことにはあきれる。仏教儀式が神道的なタマシズメ・タマフリのようなものだと思われている日本において、「仏教は霊魂を否定する」ことを常識として持っている日本人がいったいどれだけいるというのか。ここ日本においては、仏教の形式はあるにしても、仏教のこころ(思想)は、きわめて一部にしか存在しない。中国も同様だろう。むしろヨーロッパのほうが仏教は定着しているのかもしれない。
序章において、著者は次のように述べる。
親鸞が「本願・念仏」という言葉で表現した仏教の高みと、龍樹が「空」として表現した仏教の高みと、釈尊が「縁起」として説いた仏教の高みは同じなのです。時代とともに次第に高くなっているのではなく同じものなのです。ただその間に高いものを低くしてしまった、習俗化された仏教があるわけです。それをまた高みに上げていった(...)波のようなものが仏教の歴史なのです。
少し揚げ足をとるようだが、三者が同じ高み、ということはないだろう。やはり最高峰に位置するのは釈尊である。そこからどんどん堕落していったものを、龍樹や親鸞は元に返そうとした、ただしそれはそれぞれの時代や社会および先行する仏教教理に制約されているわけだから、完全に元に返せたはずはない。親鸞は末法という制約(=歴史的社会的条件)の中で真実の仏教を追求したが、それを釈尊の悟りと同じレベルと見なすことには私は反対である。
前述のように、私は本書から多くの示唆を受けており、学ばせていただいている。著者はかなりの部分を割いて、難解とされる空の思想の解明にあてているが、つまるところそれは、釈尊の説いた縁起にほかならない。このあたり、さすがにインド仏教学の碩学らしく、説得力をもって論理展開されている。空とは何か、多くの思想家や仏教学者が解説を行っているが、私が知る限りでは、明快にかつ平易に解き明かしているのは本書が随一である。そのような明快さ・平易さが可能であるのは、著者自身の思想が明確であるからだろう。すなわち、縁起=空とは「反実体論」だ、という、この一点に集約される。この延長線上に、霊魂・輪廻転生・梵我一如...のような非仏教に対する批判が展開されるが、それは鋭く明晰である。
しかしながら、仏性思想(如来蔵思想)に対する評価となると、とたんに曖昧としてしまうのが、私には理解できないことだ。
「仏性」ということばは、サンスクリットの原語が明らかになることによって、「仏となる因」、仏となる可能性という意味であることが明確になったのです。「仏となる可能性」というように最初に和訳したのは私ですけれども、仏となる可能性を持っているということが仏性思想なのです。
この原語とはdhAtuである。それを「因」「可能性」と理解するのは、多いに問題がある。通常、dhAtuは「界」と漢訳されている。これは、六根・六境・六識をあわせた十八界とか、地水火風空識の六界とか、欲界・色界・無色界の三界だとかのことである。意味合いは、領域というよりも要素・カテゴリーであり、英語の辞書では最初にelementという訳語を与えている。また、動詞語根をもdhAtuという。しかし、buddha-dhAtu(仏性)やdharma-dhAtu(法界)という場合のdhAtuは、単なる要素ではなく「根源的要素」であると私は理解する。松本史朗先生は「基体」と訳されている。すなわち、仏や法を生み出す根源ということである。buddha-dhAtuが「仏性」であるというのは、仏なる根源的要素が人間の心に内在しているということであって、このことを前提とするならば、それが成仏の可能性ととらえるのも無理ではないだろう。しかしながら、その前提自体、すなわち根源的なるものが存在するという思想が反仏教的である、というのが仏性思想・如来蔵思想批判論なのである。縁起=空=反実体論こそが仏教であると認める著者には、この前提を冷静かつ批判的に捉え直していただきたい。さらにいえば、「可能性(possibility)」は必然性の否定であることにも注意したい。一般的にいえば、仏になる可能性とは、仏に成るかもしれないし成らないかもしれない(因だけでは結果を生み出せず縁が必要とされるから)、ということである。禅仏教が仏性を成仏の可能性と解しないのは、そんな曖昧なものでは困るから、ということらしいが、事情は真仏教でも同じで、阿弥陀仏の誓願を信ずるならば、凡夫が成仏するのは必然でなくてはならないのだ。その意味でも(著者のいうとおり仏性思想を成仏の可能性と解するとしても)、仏性思想は真仏教とは相いれない。
次に、更なる問題点は、「非本来的な自己」と「本来的な自己」との関係である。著者の定義では、本来的な自己とは縁起にして空なる自己存在の真実、これに対して非本来的な自己とは、自分の存在を確実なものとしてそれに固執する自己のあり方をいう、とされる。ここまではよいとして、第4章「即の仏道」では、これら二者の関係について次のように言明される。
非本来的な自己と、空であるという本来的な自己というのは、言うまでもなく、別々にあるのではなくて、「即」の関係としてある。紙の表裏よりももっと密接な「即」の関係にある。(中略)そういう関係において、本来的な自己からの絶え間なき呼び掛けというものを本願といったのでしょう。非本来的にしか生きられない私たちに対して、本来的な自己からの絶え間なき呼び掛けを、本願といったのでしょう。
二者がなぜ「即」の関係にあるのかの説明は、本書を注意深く読んでみても見当たらない。「言うまでもなく」で片づけられてしまっているが、これこそが「即」の論理の解明に最も重要なカギなのに。これは、私が想像するに、Aという存在のa1というありかたとa2というありかたを対比して、Aであるという事実においてa1即a2である、と言っているに過ぎないような気がする。であるとすれば、これは同語反復なのだから、意味のない言明である。矛盾する二者を媒介させるには形式論理学を超えて、弁証法論理学を用いる必要がある。龍樹はもちろん弁証法を知らなかったが、天才的な洞察力で弁証法の論理を駆使した。しかし著者は龍樹から結論だけを受け取って、論理の中身を検討することを怠っている。
更に、ここで唐突に本願を持ち出されても、困惑するしかない。「本来的な自己からの呼び掛けを本願という」というのは、経文のどこに根拠があるのか。こういう情緒的な、ひとりよがりの定義から出発して真仏教が大乗仏教の空の論理を継承していると言われても、困るのだ。
そして、大乗仏教の基本テーゼである「生死即涅槃」「煩悩即菩提」についても、非本来的自己=生死、本来的自己=涅槃という図式をあてはめるならば、いともかんたんに「即の仏道」のできあがり、なのだろうが、私は親鸞がそのような平板な理解をしていたとは思わない。著者は、「即の仏道」と対比して「転の仏道」(例えば、唯識学派でいう転識得智)を挙げて、「分かりやすいけれどもリアリティをもたない」という。しかし、単純に龍樹が即で世親が転である、といえるのか疑問が残る。親鸞においても、
「転悪成徳」(教行信証総序)
「罪障功徳の体となる
こおりとみずのごとくにて
こおりおおきにみずおおし
さわりおおきに徳おおし」(高僧和讃)
という文言がある。転化ということは、やはり無視し得ない大切な契機ではないだろうか。
これは私の偏見かも知れないが、著者はどうやら如来蔵思想に冒されているのではないか、と思われてしかたない。それは、
どこかに人格的なアミダ仏がいて、その人格的に想定された仏が私たちに、何らかの願いをかけているというのではないのです。私のうちからわき上がってくる願い、本来的な自己からの叫び声が、非本来的に生きている私たちへ絶え間なく呼びかけてくる、それが阿弥陀仏の本願なのです。
という言明のうちに現れている。もちろん、著者は実体としての如来蔵を想定しているのではないことは分かる。しかし、このような言明からは、「阿弥陀様といっても、結局のところ、私たちの心の奥にある良心のようなものじゃないですか」という素朴な宗教否定論が導き出されてしまうおそれがあるのではないか。ここには他力の重要な意義を見いだすことが、残念ながらできない。
このように、私にとっては疑問点は多々あり、それらは私の理解力不足によるものかも知れない。著者の小川一乗先生による、本書とほぼ同一内容の講義を、私はかつて、真宗大谷派名古屋教務所の「聖典講座」で受けたことがあり、その機会にこれらの疑問を直接ぶつけてみたいと思ったが、この講座では質問は受け付けてもらえなかった。かえすがえすも残念である。またの機会があるだろうか。
本書データ/『大乗仏教の根本思想』小川一乗著,法蔵館刊,1995年,ISBN4-8318-7832-4,A5判 ,460+27頁,6932円(税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