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31

15 [[문선명, 현대사 격변기에 탁월한 정세인식으로 성공하다 - 오마이뉴스

문선명, 현대사 격변기에 탁월한 정세인식으로 성공하다 - 오마이뉴스

문선명, 현대사 격변기에 탁월한 정세인식으로 성공하다개신교는 이단자로 폄하... 한편에선 국제 평화운동가로 인정하기도
09.03.15
백찬홍(zskmc)

공감29

문선명 총재 자서선 출간으로 기독교계 반발 확산



▲ 지난 10일 김영사가 펴낸 통일교 문선명 총재 자서전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표지
ⓒ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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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통일교) 문선명 총재가 지난 10일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라는 이름으로 자서전을 출간했다. 국내 유수의 출판사인 김영사가 출간을 맡았는데 출간과 동시에 개신교를 중심으로 반대여론이 들끓고 있다.
여의도순복음교회를 배경으로 하는 <국민일보> 측은 12일 기사 '교계 거부감 확산…출판물 보이콧 움직임'과 13일자 사설 '크리스천들 기대 저버린 김영사' 등을 통해 문총재의 자서전 출간에 대해 강한 불쾌감을 표시했고 교회언론회, 한국기독교통일교대책협의회 등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에 대해 <세계일보>는 14일 '출판자유를 억압하는 건 언론 정도가 아니다'라는 사설을 통해 국민일보측이 문총재의 자서전을 펴낸 김영사를 비난하는 것은 헌법상 기본권인 출판의 자유를 제약하는 것이며 불편부당한 보도원칙에 어긋난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세계일보>는 또 <국민일보>의 증오와 분노 일변도의 그 옹졸하고 편협한 자세는 기독교 정신에도 위배된다고 덧붙였다.

한 인물의 자서전을 두고 언론이 공방전을 벌이는 것은 유래가 없는 것으로 문 총재의 삶이 그만큼 굴곡진 삶이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문 총재 스스로 자신의 이름 석 자만으로도 세상이 시끄럽다고 밝힐 만큼 그 스스로도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사실 개신교 권에서는 문 총재를 구세주를 참칭한 인물로 주로 이단종파의 교주로 비난하고 있지만 삼자의 눈으로는 볼 때 그는 한국인으로는 드물게 일본, 미국 등 해외에서 성공한 종교인이자 정치인이라고 할 수 있다.

문 총재가 국내활동보다 해외로 눈을 돌린 것은 개신교를 중심으로 제기되는 이단시비와 당국의 압박 때문이었다. 결정적 계기는 이승만 정권 시절인 1955년 이른바 이대-연대사건 때문이었다. 통일교 신자가 된 교수와 학생 건으로 학내가 시끄럽자 기독교학교였던 연세대와 이화여대는 학교설립정신에 어긋난다며 이들을 파면시키거나 제적시켰고 문 총재는 사법당국에 의해 구속당했다.

당시 통일교를 공격하는데 앞장선 인물은 이화여대 박마리아 부총장으로 그는 1960년 3·15 부정 선거 때 부통령으로 당선된 이기붕 씨의 부인이었다. 연대-이대사건으로 구속된 문선명 총재는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무죄를 선고받았기는 했지만 문 총재는 기독교장로가 대통령인 한국에서 제대로 활동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해외, 우선 가까운 나라인 일본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1958년 일본에 진출한 통일교는 일본당국의 의심과 감시를 피하기 위해 대외적으로 강력하게 반공적 입장을 표명했다. 1960년대 들어 통일교는 일본에 안착하게 되는데 이 당시 일본은 안보투쟁이 격렬하던 시기였다.

통일교의 강력한 반공·반좌파노선은 일본사회당·전공투(전학공투회의)·총평(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 등을 중심으로 한 좌파·반체제 세력의 격렬한 저항에 골몰하고 있었던 일본정부의 감시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70년대 미국 주류종교의 견제에도 미국 포교활동 성공

일본에서 성공을 거둔 통일교와 문선명 총재는 1970년대 미국 공략에 나섰다. 
72년 2월 뉴욕 등 7대 도시 1차 순회강연을 시작으로 1974년 말까지 모두 4차에 걸친 전미순회강연을 펼치면서 미국 내 기반을 다져나갔다. 그사이 백악관 앞에서 워터게이터 사건으로 궁지에 빠진 닉슨 대통령을 지지하는 데모와 금식기도를 벌이기도 했다.

문선명 총재가 활약하던 60년 말에서 70년대 초 미국은 민권·여성 등 진보운동이 시들어가고 보수주의가 힘을 얻으면서 정체성이 재정립되던 시기였다. 이때 유사·신흥종교들이 등장했는데 이때 가장 유명한 종파는 짐 존스가 이끄는 인민사원과 통일교였고 뉴에이지도 새로운 정신운동으로 부상했다.

1960년대 중반 출범한 인민사원은 1978년 존스 자신을 비롯한 1천여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자살하는 비극적 종말을 맞이했지만 통일교는 막강한 경제력과 로비력을 통해 주류종교나 언론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대응해 살아남았다.

당시 언론들은 자신들이 원조한 국가의 신흥종교가 미국 내에서 인기를 누리는 것이 못마땅하게 생각해 통일교도를 가리켜 문총재의 추종자라는 뜻으로 무니시트(Moonist)라고 비야냥 거렸지만 통일교는 국가와 사회로부터 소외된 많은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포교활동을 전개해 상당수의 신자를 확보했다.

그 결과 1976년 9월 워싱턴 광장에 30만에 가까운 인파를 동원해 미국 종교계에 충격을 주었고 이 일로 미국의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1976년 그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하기도 했다. 문 총재는 미국에서 기반을 다지는 동안 국내에 돌아와 박정희 정권과도 교감을 갖고 1970년대 민주화운동이 거세게 진행될 때 1975년 6월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구국세계대회'를 개최했다.

70년대 박정희 정권은 북베트남군이 미군을 축출하고 베트남을 통일하자 이를 역이용해 긴급조치 등을 통해 유신체제를 공고히 하던 시기였다. 통일교 주도로 열린 '구국세계대회'는 박정희 정권의 비호아래 60개국 1천여 명의 대표들과 백만에 가까운 인파가 참여해 성황을 이루었다.

이때 문선명 총재는 '세계 속의 한국'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통해 신앙의 조국인 한국을 수호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므로 만일 북한이 대한민국을 무력침략하게 되면 즉각 세계의 모든 통일교인들은 대한민국의 의용군으로 참전해 신앙의 조국인 한국을 지킬 것이라고 선언하며 통일교가 '반공'과 '애국'의 보루라고 역설했다.

1970년대 주류 개신교 역시 반공을 표방하며 박정희 정권 지원을 위해 구국기도회를 개최했던 것을 감안하면 통일교와 개신교는 종교적으로 서로 반목했지만 정치적 노선은 같았다고 할 수 있다. 적과 적이 반공의 우산 아래 암묵적으로 동맹을 맺은 것이다. '구국세계대회'의 성공으로 이승만 정권 이래 국내에서 활동거점을 찾지 못했던 통일교는 박정희 정권 하에서 합법적으로 국내 포교에 나설 수 있게 되었다.

코리아게이트 사건과 탈세연루로 큰 타격 받기도

미국에서 승승장구하던 문 총재와 통일교는 70년대 말 이른바 '코리아게이트' 사건으로 일대 위기를 맞았다. 1970년대 중반 미국의회가 한국정부의 인권탄압에 대한 청문회(프레이저 청문회) 등을 통해 압박을 가하자 박정희 정권은 이를 무마하기 위해 로비스트 박동선을 내세워 미정가에 거액의 자금을 제공했다.

이 사건은 1976년 <워싱턴포스트>를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미국 의회와 정부는 청문회를 개최해 관련자들을 소환했다. 당시 소환자 중에는 주미대사관 무관출신이자 문선명 총재의 보좌관이었던 박보희씨도 포함되었다. 2년여에 걸친 의회 조사기간 동안 박보희씨는 모두 4차례 소환되었고, 프레이저 의원은 통일교회와 한국정부간의 의혹을 집중적으로 제기했다.

박보희씨는 공개증언에서 자신은 애국자이자 통일교인이며 반공주의자로서 행동했을 뿐이며, 자신을 한국 중앙정보부 요원으로 몰아가는 것은 용공주의자들의 음모라고 반박했다. 박씨의 패기만만한 의회 증언은 애국적 감정을 불러일으켰고, 당시 수세에 몰렸던 박정희 정권의 대국민 홍보도구로 활용되기도 했다.

2007년 4년 외교부가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당시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도널드 프레이저 위원장은 전직 주미 대사관 간부의 증언 등을 토대로 박보희씨가 대사관 외교행랑을 이용, 대통령, 외무부장관, 중앙정보부장에게 직접 보고 하는 체계를 갖고 있다고 믿고 청문회를 추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미국 언론들은 통일교와 한국 정부의 결탁 의혹을 연이어 보도하면서 의회의 조사활동을 거들었다. 특히 <뉴욕타임즈>는 박정희 정권이 월남전 참전대가로 미국정부로부터 얻어낸 M16공장(통일산업)을 건설할 때 박보희씨가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사업지원을 협의했으며 통일교 산하기관인 승공연합회가 공무원 교육을 했다고 보도했다.

코리아게이트 사건은 1978년 10월 중순 미국의회가 조사보고서를 내고 3명의 민주당 의원을 징계하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코리아게이트 사건으로 언론의 도마에 올랐던 문선명 총재와 통일교는 이번에는 1980년, 제40대 미국 대통령 자리를 노리는 로널드 레이건과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했다.

문 총재의 지시를 받은 박보희씨는 대선 기간 중 레이건을 만나 문 총재가 설립한 언론사 <뉴스월드>가 레이건을 지지하고 있다고 밝혔고, 투표 당일 레이건 후보가 350명 이상의 선거인단을 확보해 '압도적'으로 승리를 할 것이라고 과감하게 예측 보도했다.

이 기사는 당시 여론 조사기관이나 선거 전문가, 언론이 카터의 승리를 예상한 것을 뒤엎는 것으로 레이건 진영을 흡족하게 했다. 결과적으로 레이건의 대승으로 끝나자 문선명과 통일교는 레이건의 정책수행을 돕기 위해 1982년 보수우익신문인 <워싱턴 타임즈>를 창간했다. <워싱턴 타임즈>는 유력지인 <워싱턴 포스트>에 비해 영향력은 보잘 것 없었지만 레이건은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는 <워싱턴 포스트>를 견제하는 데 활용했다.

문 총재는 또한 레이건 정권이 남미에서 추진하고 있던 좌파 저지활동을 남미지역 통일교 신자들을 통해 측면 지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문 총재와 통일교의 노력에도 문 총재가 탈세혐의로 수감되면서 통일교는 미국에서 또 한 번 구설수에 오르게 되었다.

1982년 7월 뉴욕 지방법원은 뉴욕체이스 맨해튼 은행에 예금했던 160만 달러의 자금이 면세에 해당하는 종교단체기금이 아니라 문 총재 개인돈으로 간주해 탈세죄를 적용해 문 총재에게 1년 6개월의 실형선고를 내렸다. 이 일로 그는 북한에서 두번의 수감생활(46년, 48년)한 것을 포함해 모두 여섯 번째 감옥생활을 하게 되었다.

통일교 측은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결국 문 총재는 13개월간 수감생활을 한 후 석방되었다. 탈세사건으로 미국 활동이 여의치 않자 문 총재는 1985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귀국한 후 그가 시작한 일은 전두환 정권에 저항하던 학생운동에 맞불을 놓기 위해 1986년 남북통일학생연합(통학련)을 결성한 일이었다.

1990년대 동구권 붕괴 후 김일성 면담 등 평화운동 참여

1987년에는 '남북통일국민연합'을 창설했고, 1989년에는 <세계일보>, <전교학신문>을 연이어 창간했다. 특히 <전교학신문>은 많은 지면을 전대협을 중심으로 한 진보학생운동을 비판하는 데 할애했다.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전 세계적으로 이념의 시대가 종말을 고하자 문 총재는 평화운동의 대변자로 나섰다. 이 당시 노태우 정권도 전향적인 북방정책을 통해 러시아와 수교(1990년)하고 북한과 역사적인 '남북기본합의서'(1991년)를 체결하는 등 평화무드를 조성했다.

1990년 4월 문선명 총재는 모스크바에서 소련 해체의 주역인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을 만나고, 1991년에는 40년간의 반공운동을 청산하면서 북한의 김일성 주석과 면담하기도 했다. 북한의 김일성 주석과 문 총재가 만난 것은 북한 입장에서는 경제난을 해소하기 위해 외부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이었고, 문 총재는 시대상황에 따라 어떤 기업보다 먼저 북한과 관계를 맺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때 김일성 주석과 문 총재 간에는 금강산 개발 건이 오갔으나 결국 개발권은 강원도 통천이 고향인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막대한 물량공세를 펼치면서 획득했다. 금강산 개발권을 놓친 통일교는 북한과 합작회사인 평화자동차를 설립해 자동차를 생산하고, 평양에서 보통강 호텔을 운영하면서 문 총재의 고향인 정주에 평화공원을 세우는 일을 진행했다.

현재 문선명 총재는 지난 2001년 짓기 시작한 약 8백만평의 거대한 통일교 단지를 중심으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가평 통일교 단지에는 문 총재가 생활하는 본궁, 실버타운, 국내 최대 규모의 수련시설인 청아캠프, 통일교의 성지로 불리는 천주청평수련원, 청심병원, 청심신학대학원대학교, 청심 국제중·고교 등이 세워져 있다.

문 총재는 지난 1월 30일 천주청평수련원에서 90세 생일잔치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는 1천여 명의 축하객이 참석했고,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90년 된 산삼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문선명 총재는 자신이 80년대부터 제안한 '한일해저터널'건설에 매진하고 있다. 그의 꿈이 이루어질지는 모르지만 그가 살아온 궤적으로 볼 때 죽는 날까지 포기하지는 않을 것 같다. 개신교도들에게는 이단자로 공격받지만 추종자들에게는 메시야로 존중받는 인물, 종교인으로는 드물게 굴지의 사업체를 운영하고 박보희, 곽정환 같은 탁월한 참모를 통해 통일교를 국제조직으로 키워낸 그의 리더십은 인정할만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문 총재와 통일교가 조직보전과 발전을 위해 60~80년대 박정희·전두환 독재정권과 결탁해 반독재·민주화운동을 용공세력으로 규정해 공격한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런 점에서는 기독교 보수 세력과 하등 다를 바 없다. 

문 총재가 평화운동의 대부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과거 자신의 과오를 인정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정치·사회적 변혁기에 교묘한 줄타기로 살아남아 부와 권력위에서 군림하는 그저 그런 종교인에 불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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