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사랑한 세계인’ 문선명 탄생 100年이 남긴 것
“오직 평화만을 이야기한 종교지도자”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입력2020-01-29
2020년은 고(故) 문선명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총재 탄생 100주년(1월 30일·음력 1월 6일)이다. 논쟁적 종교지도자이자, 평화운동가로 활동한 93세 삶은 파란만장했다. 한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통일원리를 설파했으며 특유의 카리스마적 설득력으로 세계인을 사로잡았다. 소련의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만나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화해를 시도했고 북한의 김일성 주석과 만나 한반도의 평화를 놓고 담판했다. 사상적 혼란기에 세계질서가 갖는 한계를 극복하는 대안사상으로 통일원리 통일사상 두익사상을 주창했다.
문선명, 한학자 총재.“나는 이름 석 자만 말해도 세상이 와글와글 시끄러워지는 문제 인물입니다. 돈도 명예도 탐하지 않고 오직 평화만을 이야기하며 살아왔을 뿐인데 세상은 내 이름자 앞에 수많은 별명을 덧붙이고 거부하고 돌을 던졌습니다. 내가 무엇을 말하는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고 그저 반대부터 했습니다.”
탄생 100년을 맞은 고(故) 문선명(1920~2012)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총재는 2009년 출간한 자서전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의 서문에 이렇게 적었다. 논쟁적 종교지도자이자, 평화운동가로 활동한 93세 삶은 파란만장했다. ‘떠들썩한 인물’이라는 말마따나 엇갈린 평가가 따라붙었다. 종교, 인종, 나라가 하나 되는 평화세계를 강론했다.
문선명 총재는 1920년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태어났다. 1954년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통일교)를 설립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1952년 완성한 교리서 ‘원리원본’을 통해 종교관을 구체화했다. 각국에 흩어진 교회를 신령과 진리로 통일해 하나의 세계를 만들고자 했다. 개신교계는 우상화, 현세주의 등을 문제 삼아 통일교를 이단(異端)으로 몰아세웠다.
교리와 관련한 논쟁이 끊이지 않았는데도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은 20세기 한국에서 탄생한 종교 중 가장 성공했다. 66년이 지난 현재 세계 194개국에 1000여만 명(통일교 추산)의 신도를 둔 종교로 급성장했다.
문선명 총재는 20세기 한반도가 배출한 몇 안 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메시아라 했던 한국인 종교 운동가’(뉴욕타임스), ‘1970년대를 휩쓴 논쟁적 종교의 지도자’(LA타임스), ‘수천 쌍 합동결혼식의 주재자’(영국 가디언), ‘거대 기업제국의 창시자’(타임)라는 평가가 해외에서 나왔다.
한국이 세계의 중심, 통일원리 설파
1992년 8월 25일 서울올림픽주경기장에서 열린 3만 쌍 국제합동축복식.1954년 창설 이후 “한국이 세계의 중심 국가이며 하나님의 뜻이 한국을 중심으로 이뤄진다”는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원리는 1950~70년대 한국 청년들의 가슴을 간질였다.
문선명 총재는 1958년 일본, 1959년 미국에서 각각 포교에 나서면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뒀다. 1960년 이후 축복결혼을 통해 일본인 1만여 명이 한국인과 결혼했다. 워싱턴포스트는 2012년 문 총재 타계 직후 “아직도 워싱턴에서 그의 영향력은 상당하다”고 보도했다.
1976년 9월 워싱턴광장에서 열린 문 총재 강연에 30만 명 가까운 인파가 몰려 미국 종교계에 충격을 줬다.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문 총재를 ‘1976년,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미국에서 신도 수가 빠르게 늘어난 것은 개인주의화한 미국인에게 가정과 공동체의 가치를 제공한 덕분이라는 평가가 있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은 교육, 언론, 학술, 스포츠, 예술, 산업 등 다양한 영역에서 다채로운 활동을 벌이면서 영향력을 키웠다. 세계일보, 용평리조트, 일화, 성남일화천마축구단, 선원건설, 세일여행사 등이 속한 통일그룹도 운영한다. 미국 일간지 워싱턴타임스, 일본 일간지 세카이닛포, 유니버설발레단, 리틀엔젤스예술단이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계열이다. 선문대, 청심국제중고교, 선화예술중고교, 경복초교도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문선명 총재는 타 종교를 아우르는 평화운동에도 나섰다. 1966년 초교파협의회를 창립하고 세계종교회의를 개최했다. 1985~87년에는 미국 목사 5000여 명을 한국으로 초청해 초(超)종교 활동을 전개했다. 2001년 9·11사태 이후에는 중동평화를 위한 초종교 세미나와 평화행진을 개최했다.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경기 가평군 HJ천주천보수련원에 청심탑(높이 33m, 폭 11m)이 우뚝 서 있다. 탑에는 아홉 개 장면으로 나뉜 고(故) 문선명 통일교 총재의 일대기가 돋을새김으로 꾸며져 있다. HJ천주천보수련원은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신도에게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다. 한 일본인 신도는 “하나님의 참사랑을 느낄 수 있는 곳”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8월 17일 문선명 총재의 생애를 추모하는 7주기 행사가 가평의 청심평화월드센터에서 열렸다. 굿럭 조너선 전 나이지리아 대통령, 하이메 파스 사모라 전 볼리비아 대통령, 각국 전·현직 국회의장·장관 12명, 국회의원 12명 등 정치·경제·종교지도자를 비롯한 3만여 명이 자리를 메운 가운데 7주기 행사가 거행됐다. 문 총재의 아내인 한학자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총재의 서신도 낭독됐다.
“동에서 서로, 남에서 북으로, 저는 미친 듯이 세상을 품으려 다녔습니다. 입안이 헐고, 다리가 붓고, 서 있을 수조차 없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저는 쉴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님과의 약속, 아무리 뜻이 힘들어도 내 대에서 끝을 보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기필코 제가 이뤄드리겠다. 그것을 위해서 저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라며 수없이 다짐하며 살아왔습니다. 당신이 사무치게 그리울 때면 달을 벗 삼아 대화하며 아버님의 성체를 앞에 두고 제가 했던 약속 ‘생이 다하는 날까지 천일국을 이 땅에 정착시키겠다’는 그 결의를 되뇌며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살다 보니, 벌써 성화 7주년이 됐습니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은 2020년 1월 30일(음력 1월 6일) 문선명 총재 탄생 100주년과 한학자 총재 탄생 77주년을 맞아 성대한 기념행사를 개최한다. 4월 8일(음력 3월 16일)은 문선명, 한학자 총재의 성혼 60주년 기념일이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은 다채로운 ‘탄신 100주년’ 기념행사를 마련했다.
‘월드서밋 2020’ 2월 2~7일 킨텍스서 개최2월 2~7일 ‘월드서밋 2020’이라는 명칭으로 △월드서밋 2020 총회 △세계평화정상연합(ISCP) 총회 △세계평화종교인연합(IAPD) 총회 △제4회 선학평화상 시상식 △공생·공영·공의를 위한 세계평화컨퍼런스 △세계평화언론인대회 △세계평화경제인대회 △세계평화학술대회 등이 경기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린다.
공생·공영·공의를 위한 세계평화컨퍼런스에는 전·현직 정상과 부통령, 총리, 장관, 국회의원, 종단 지도자, 학자, 언론인, 경제인 등 120개국에서 각계 지도자 6000여 명이 참석해 세계평화를 논의한다. 월드서밋 2020 총회와 세계평화정상연합 총회에는 6000여 명의 각계 지도자가 참가해 문선명 총재의 사상을 재조명한다. 청심평화월드센터에서 64개국 3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인터넷 생중계를 통해 194개국에서 참여하는 ‘2020 천지인참부모 효정 천주축복식’도 예정돼 있다.
문선명 총재만큼이나 짧은 기간에 인류 문화사에 영향을 끼친 인물을 찾아보기 어렵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많은 세계인이 그의 이름 석 자를 기억한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은 문 총재의 생애를 이렇게 설명한다.
“성인(聖人) 대부분이 기득권 세력으로부터 몰림을 당한 것처럼 문선명 총재도 박해를 받았다. 문 총재가 자신들이 가진 지위를 내놓지 않으려는 기득권층이 아닌 소외층의 편에 서서 새로운 길을 제시하다 보니 박해가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예수나 소크라테스가 동족의 고소와 재판에 의해 사형을 당한 것처럼 조국은 문선명 총재를 멀리했다. 특히 예수가 유대교로부터 ‘이단자’로 취급받고, 반체제 인사로 몰려 죽음의 길을 간 것처럼 기독교단으로부터 ‘이단’으로 몰리면서 수난을 겪었다. 그렇다면 문 총재는 왜 수많은 박해 속에서도 오뚝이처럼 일어서서 앞을 보고만 달려간 것인가.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그것은 일찍이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고, 그 하나님의 한이 무엇인지를 절절히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한을 대신 짊어지게 됐고, 하나님을 모든 판단 기준으로 삼으면서 살아왔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에 미쳐 살 수밖에 없었고, 그 한을 풀어드리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선명 총재는 하나님이 ‘영광의 하나님’이 아니라 ‘한과 슬픔의 하나님’이라고 봤으며 하나님 해방을 화두로 삼고 한평생 전력투구했다. “세상에 기적은 없다. 기적은 만드는 것”이라고 여겼다. 하나님의 역사를 믿는 동시에 인간이 해야 할 책임을 강조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을 철두철미 믿고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특유의 설득력으로 세계인을 사로잡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과의 회담.문선명 총재는 종교지도자면서 평화운동가였다. ‘하나님 아래 인류 한 가족’이라는 대전제 아래 평화운동을 이끌었다. 1965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제34대 미국 대통령을 만나 세계정세와 종교 문제를 놓고 요담한 것을 시작으로 타계할 때까지 세계를 누비면서 평화운동을 이어갔다. 문 총재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만났을 때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나는 아이젠하워에게 3대 조건을 실천하라고 말했습니다. 역사적인 문제, 종교적인 문제, 사상적인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물었습니다. 면담이 끝난 후 내가 가겠다고 하니까 그는 아쉬워하면서 2층으로 다시 데리고 가서 자기의 생활관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고는 자기 일생일대에 잊지 못할 기념품을 내게 주었습니다. 또한 처칠, 스탈린 같은 사람들과 어떻게 했다는 것 등을 자랑하기도 했습니다.”
문선명 총재는 1971년 12월 18일 미국 워싱턴에 도착해 7대 도시 강연에 나섰다. 하나님의 섭리국가로서 미국의 각성과 공산주의의 위협을 논했다.
1972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재선을 위해 워싱턴 워터게이트 빌딩의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사무실에 도청장치를 설치했다가 발각되면서 사임 압력이 커지자 1973년 11월 30일 ‘사랑하고 용서하고 하나 되라’는 요지의 ‘워터게이트 선언’을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에 발표했다. “미국이 세계적 영도력을 상실할 경우 국제공산주의가 득세할 수 있기 때문에 지혜롭게 이 위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문 총재는 1974년 2월 1일 백악관 대통령집무실에서 닉슨 대통령과 요담했다. 훗날 문 총재는 이렇게 회고했다.
김일성과 담판 남북 화해 물꼬 터
1991년 김일성 북한 주석과의 회담.“내가 닉슨을 지지한 것은 닉슨 개인을 지지한 것이 아닙니다. 닉슨 대통령의 직(職)을 지지했습니다. 이것은 미국 국민이 앞으로 알아야 할 문제입니다. 나라의 주권자가 새로운 정책을 세우고 그 나라의 운명을 정할 때는 특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지했습니다. 닉슨이 있었으면 월남과 크메르가 저렇게 안 됐습니다. 내가 예상한 그대로 됐습니다.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무기를 전부 다 공산 세계에 몽땅 넘겨주는, 이런 국가적 수치가 되는 놀음을 했다는 것은 민주 세계를 지도하는 국가로서 참패라는 것입니다.”
평화운동가로서 문선명 총재의 삶에서 하이라이트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과 김일성 북한 주석과 요담한 것이다. 문 총재는 평화세계 실현을 위해서는 무신론을 앞세우는 공산주의 세력의 확산을 막아야 한다고 봤다. 국제승공연합, 남북통일운동국민연합 등의 기구를 세워 남북 통일운동에 매진했고, 미국을 중심으로 남북미통일연합(CAUSA)과 중남미통일연합(AULA) 등을 창설해 국제적인 공산주의 방어 전선을 펼쳤다. 이 연장선상에서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을 만난 것이다.
문선명 총재는 1990년 4월 11일 소련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만나 한국과의 수교, 한반도 통일, 소련 내에서의 종교자유 확대 문제 등을 논의했다. 문 총재는 이 자리에서 무신론적 유물론의 미래는 멸망밖에 없으므로 유물론을 폐기하고 종교를 중심한 영적 가치관의 부활을 시도하라고 고르바초프 대통령에게 권고했다.
문선명 총재는 김일성 주석을 만나 남북 화해의 물고를 텄다. 북한을 떠난 지 40년 11개월 만에 북한 당국의 공식 초청을 받아 1991년 11월 30일 북한 땅을 다시 밟았다. 문 총재에게 김 주석은 원수 중의 원수라고 할 수 있었으나 잃어버린 형제를 찾아가는 마음으로 방문길에 올랐다.
문선명 총재는 방북 첫날 환영 만찬에서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 노동신문은 문 총재의 거동을 대서특필했다. 만수대의사당 연설 때는 땀을 흘리고 책상을 치면서 호령하듯 주체사상의 한계를 지적하는 등 열변을 토했다. 평양 한복판에서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목숨을 건 것이나 다름없었다. 박보희 전 세계일보 사장은 “손에 땀을 쥐고 온몸이 오그라드는 느낌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문 총재는 “주체사상을 버리고 하나님주의를 중심 삼고 내 말만 들으면 통일이 될 수 있다”고 김 주석을 설득하기도 했다.
문선명-김일성 회담 이후 남북 당국 간 대화가 급물살을 탔다. ‘남북 간 화해와 불가침, 그리고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에 남북이 서명했으며, 현안이던 핵 문제와 관련해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이 이뤄졌다.
사상적 혼란기에 주목받는 두익사상
1990년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과의 회담.공산주의가 붕괴했으나 세계에 평화는 찾아오지 않았다. 문선명 총재는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를 아우르는 ‘통일사상’을 대안으로 내놓았다. 특히 두익사상(頭翼思想), 즉 하나님주의는 하나님 중심의 진리와 사랑을 핵심으로 하는데, 우익(右翼)이나 좌익(左翼)이 아니라 더 높은 차원에서 양자를 포용하는 머리사상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가치관에 의해 좌익사상인 공산주의로부터는 증오심, 투쟁심 및 물질주의를 제거하고, 우익사상인 민주주의로부터는 이기주의, 자기중심주의를 제거함으로써 양자를 화해시키고, 공동으로 하나님과 인류의 숙원인 이상세계의 실현을 향하여 전진할 수 있도록 이끌어내자는 것이다. 인류의 부모이자 모든 종교의 최고 중심인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갈등을 겪는 국가와 민족, 종교를 화해시켜 인류 한 가족의 이상을 실현하자는 게 두익사상의 근본 취지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은 문선명 총재의 삶을 이렇게 설명한다.
“문선명 총재가 인류 역사에 큰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남다른 소명의식과 집념, 그리고 누구도 뒤따를 수 없는 초인적 능력 덕분으로 볼 수 있다. 문 총재가 어느 한 분야에도 시선을 뗄 수 없었던 것은 인류 구원과 세계평화 실현이라는 짐을 양어깨에 스스로 졌기 때문이다. 문 총재는 자신이 말한 것은 몸소 실천했다. 그래서 수많은 업적을 거둘 수 있었다. 다시 말하면 문 총재가 인류에게 남긴 업적이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것은 말과 행동이 동반됐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문 총재는 언제나 섭리의 최전선에 섰다.
문 총재는 평화세계를 이루기 위해 평생 세상의 낮고 구석진 곳을 찾아다녔다. 세계 기아(飢餓) 문제를 해결하고 불우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이웃을 돕기 위해 남미의 오지와 춥디추운 알래스카에서 고깃가루(피시파우더) 공장을 세우고 학교를 만들었다. 그들에게 낚시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학업의 기회를 제공했다.
“행동하는 선각자”소련의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만나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화해를 시도했고 북한의 김일성 주석과 만나 한반도의 평화를 담판했다. 또 도덕적으로 무너져가는 미국에 가서 청교도 정신을 일깨우는 소방수 노릇을 하며 세계의 분쟁을 막는 일에 골몰했다. 이슬람교도와 유대인의 화합을 위해 테러가 난무하는 팔레스타인에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유대교와 이슬람교, 기독교인 수천 명을 한자리에 모아 화해의 광장을 마련하고 평화행진을 벌이기도 했다. 문 총재만큼 세계평화를 위해 광폭행보를 보여준 성직자를 찾아보기 어렵다. 문 총재는 그야말로 행동하는 선각자였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은 “문선명 총재가 주창해 온 ‘통일원리’ ‘통일사상’ ‘두익사상’이 문명사적 대전환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기존의 세계질서가 갖는 한계를 극복하는 대안사상으로 새롭게 평가받고 있다”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의 빛을 밝혀온 문 총재의 생애를 알고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은 인류의 몫이 아닐 수 없다”고 했다.
신동아 2020년 2월호
입력2020-01-29
2020년은 고(故) 문선명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총재 탄생 100주년(1월 30일·음력 1월 6일)이다. 논쟁적 종교지도자이자, 평화운동가로 활동한 93세 삶은 파란만장했다. 한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통일원리를 설파했으며 특유의 카리스마적 설득력으로 세계인을 사로잡았다. 소련의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만나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화해를 시도했고 북한의 김일성 주석과 만나 한반도의 평화를 놓고 담판했다. 사상적 혼란기에 세계질서가 갖는 한계를 극복하는 대안사상으로 통일원리 통일사상 두익사상을 주창했다.
문선명, 한학자 총재.“나는 이름 석 자만 말해도 세상이 와글와글 시끄러워지는 문제 인물입니다. 돈도 명예도 탐하지 않고 오직 평화만을 이야기하며 살아왔을 뿐인데 세상은 내 이름자 앞에 수많은 별명을 덧붙이고 거부하고 돌을 던졌습니다. 내가 무엇을 말하는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고 그저 반대부터 했습니다.”
탄생 100년을 맞은 고(故) 문선명(1920~2012)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총재는 2009년 출간한 자서전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의 서문에 이렇게 적었다. 논쟁적 종교지도자이자, 평화운동가로 활동한 93세 삶은 파란만장했다. ‘떠들썩한 인물’이라는 말마따나 엇갈린 평가가 따라붙었다. 종교, 인종, 나라가 하나 되는 평화세계를 강론했다.
문선명 총재는 1920년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태어났다. 1954년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통일교)를 설립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1952년 완성한 교리서 ‘원리원본’을 통해 종교관을 구체화했다. 각국에 흩어진 교회를 신령과 진리로 통일해 하나의 세계를 만들고자 했다. 개신교계는 우상화, 현세주의 등을 문제 삼아 통일교를 이단(異端)으로 몰아세웠다.
교리와 관련한 논쟁이 끊이지 않았는데도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은 20세기 한국에서 탄생한 종교 중 가장 성공했다. 66년이 지난 현재 세계 194개국에 1000여만 명(통일교 추산)의 신도를 둔 종교로 급성장했다.
문선명 총재는 20세기 한반도가 배출한 몇 안 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메시아라 했던 한국인 종교 운동가’(뉴욕타임스), ‘1970년대를 휩쓴 논쟁적 종교의 지도자’(LA타임스), ‘수천 쌍 합동결혼식의 주재자’(영국 가디언), ‘거대 기업제국의 창시자’(타임)라는 평가가 해외에서 나왔다.
한국이 세계의 중심, 통일원리 설파
1992년 8월 25일 서울올림픽주경기장에서 열린 3만 쌍 국제합동축복식.1954년 창설 이후 “한국이 세계의 중심 국가이며 하나님의 뜻이 한국을 중심으로 이뤄진다”는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원리는 1950~70년대 한국 청년들의 가슴을 간질였다.
문선명 총재는 1958년 일본, 1959년 미국에서 각각 포교에 나서면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뒀다. 1960년 이후 축복결혼을 통해 일본인 1만여 명이 한국인과 결혼했다. 워싱턴포스트는 2012년 문 총재 타계 직후 “아직도 워싱턴에서 그의 영향력은 상당하다”고 보도했다.
1976년 9월 워싱턴광장에서 열린 문 총재 강연에 30만 명 가까운 인파가 몰려 미국 종교계에 충격을 줬다.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문 총재를 ‘1976년,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미국에서 신도 수가 빠르게 늘어난 것은 개인주의화한 미국인에게 가정과 공동체의 가치를 제공한 덕분이라는 평가가 있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은 교육, 언론, 학술, 스포츠, 예술, 산업 등 다양한 영역에서 다채로운 활동을 벌이면서 영향력을 키웠다. 세계일보, 용평리조트, 일화, 성남일화천마축구단, 선원건설, 세일여행사 등이 속한 통일그룹도 운영한다. 미국 일간지 워싱턴타임스, 일본 일간지 세카이닛포, 유니버설발레단, 리틀엔젤스예술단이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계열이다. 선문대, 청심국제중고교, 선화예술중고교, 경복초교도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문선명 총재는 타 종교를 아우르는 평화운동에도 나섰다. 1966년 초교파협의회를 창립하고 세계종교회의를 개최했다. 1985~87년에는 미국 목사 5000여 명을 한국으로 초청해 초(超)종교 활동을 전개했다. 2001년 9·11사태 이후에는 중동평화를 위한 초종교 세미나와 평화행진을 개최했다.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경기 가평군 HJ천주천보수련원에 청심탑(높이 33m, 폭 11m)이 우뚝 서 있다. 탑에는 아홉 개 장면으로 나뉜 고(故) 문선명 통일교 총재의 일대기가 돋을새김으로 꾸며져 있다. HJ천주천보수련원은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신도에게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다. 한 일본인 신도는 “하나님의 참사랑을 느낄 수 있는 곳”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8월 17일 문선명 총재의 생애를 추모하는 7주기 행사가 가평의 청심평화월드센터에서 열렸다. 굿럭 조너선 전 나이지리아 대통령, 하이메 파스 사모라 전 볼리비아 대통령, 각국 전·현직 국회의장·장관 12명, 국회의원 12명 등 정치·경제·종교지도자를 비롯한 3만여 명이 자리를 메운 가운데 7주기 행사가 거행됐다. 문 총재의 아내인 한학자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총재의 서신도 낭독됐다.
“동에서 서로, 남에서 북으로, 저는 미친 듯이 세상을 품으려 다녔습니다. 입안이 헐고, 다리가 붓고, 서 있을 수조차 없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저는 쉴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님과의 약속, 아무리 뜻이 힘들어도 내 대에서 끝을 보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기필코 제가 이뤄드리겠다. 그것을 위해서 저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라며 수없이 다짐하며 살아왔습니다. 당신이 사무치게 그리울 때면 달을 벗 삼아 대화하며 아버님의 성체를 앞에 두고 제가 했던 약속 ‘생이 다하는 날까지 천일국을 이 땅에 정착시키겠다’는 그 결의를 되뇌며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살다 보니, 벌써 성화 7주년이 됐습니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은 2020년 1월 30일(음력 1월 6일) 문선명 총재 탄생 100주년과 한학자 총재 탄생 77주년을 맞아 성대한 기념행사를 개최한다. 4월 8일(음력 3월 16일)은 문선명, 한학자 총재의 성혼 60주년 기념일이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은 다채로운 ‘탄신 100주년’ 기념행사를 마련했다.
‘월드서밋 2020’ 2월 2~7일 킨텍스서 개최2월 2~7일 ‘월드서밋 2020’이라는 명칭으로 △월드서밋 2020 총회 △세계평화정상연합(ISCP) 총회 △세계평화종교인연합(IAPD) 총회 △제4회 선학평화상 시상식 △공생·공영·공의를 위한 세계평화컨퍼런스 △세계평화언론인대회 △세계평화경제인대회 △세계평화학술대회 등이 경기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린다.
공생·공영·공의를 위한 세계평화컨퍼런스에는 전·현직 정상과 부통령, 총리, 장관, 국회의원, 종단 지도자, 학자, 언론인, 경제인 등 120개국에서 각계 지도자 6000여 명이 참석해 세계평화를 논의한다. 월드서밋 2020 총회와 세계평화정상연합 총회에는 6000여 명의 각계 지도자가 참가해 문선명 총재의 사상을 재조명한다. 청심평화월드센터에서 64개국 3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인터넷 생중계를 통해 194개국에서 참여하는 ‘2020 천지인참부모 효정 천주축복식’도 예정돼 있다.
문선명 총재만큼이나 짧은 기간에 인류 문화사에 영향을 끼친 인물을 찾아보기 어렵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많은 세계인이 그의 이름 석 자를 기억한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은 문 총재의 생애를 이렇게 설명한다.
“성인(聖人) 대부분이 기득권 세력으로부터 몰림을 당한 것처럼 문선명 총재도 박해를 받았다. 문 총재가 자신들이 가진 지위를 내놓지 않으려는 기득권층이 아닌 소외층의 편에 서서 새로운 길을 제시하다 보니 박해가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예수나 소크라테스가 동족의 고소와 재판에 의해 사형을 당한 것처럼 조국은 문선명 총재를 멀리했다. 특히 예수가 유대교로부터 ‘이단자’로 취급받고, 반체제 인사로 몰려 죽음의 길을 간 것처럼 기독교단으로부터 ‘이단’으로 몰리면서 수난을 겪었다. 그렇다면 문 총재는 왜 수많은 박해 속에서도 오뚝이처럼 일어서서 앞을 보고만 달려간 것인가.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그것은 일찍이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고, 그 하나님의 한이 무엇인지를 절절히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한을 대신 짊어지게 됐고, 하나님을 모든 판단 기준으로 삼으면서 살아왔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에 미쳐 살 수밖에 없었고, 그 한을 풀어드리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선명 총재는 하나님이 ‘영광의 하나님’이 아니라 ‘한과 슬픔의 하나님’이라고 봤으며 하나님 해방을 화두로 삼고 한평생 전력투구했다. “세상에 기적은 없다. 기적은 만드는 것”이라고 여겼다. 하나님의 역사를 믿는 동시에 인간이 해야 할 책임을 강조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을 철두철미 믿고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특유의 설득력으로 세계인을 사로잡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과의 회담.문선명 총재는 종교지도자면서 평화운동가였다. ‘하나님 아래 인류 한 가족’이라는 대전제 아래 평화운동을 이끌었다. 1965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제34대 미국 대통령을 만나 세계정세와 종교 문제를 놓고 요담한 것을 시작으로 타계할 때까지 세계를 누비면서 평화운동을 이어갔다. 문 총재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만났을 때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나는 아이젠하워에게 3대 조건을 실천하라고 말했습니다. 역사적인 문제, 종교적인 문제, 사상적인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물었습니다. 면담이 끝난 후 내가 가겠다고 하니까 그는 아쉬워하면서 2층으로 다시 데리고 가서 자기의 생활관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고는 자기 일생일대에 잊지 못할 기념품을 내게 주었습니다. 또한 처칠, 스탈린 같은 사람들과 어떻게 했다는 것 등을 자랑하기도 했습니다.”
문선명 총재는 1971년 12월 18일 미국 워싱턴에 도착해 7대 도시 강연에 나섰다. 하나님의 섭리국가로서 미국의 각성과 공산주의의 위협을 논했다.
1972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재선을 위해 워싱턴 워터게이트 빌딩의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사무실에 도청장치를 설치했다가 발각되면서 사임 압력이 커지자 1973년 11월 30일 ‘사랑하고 용서하고 하나 되라’는 요지의 ‘워터게이트 선언’을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에 발표했다. “미국이 세계적 영도력을 상실할 경우 국제공산주의가 득세할 수 있기 때문에 지혜롭게 이 위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문 총재는 1974년 2월 1일 백악관 대통령집무실에서 닉슨 대통령과 요담했다. 훗날 문 총재는 이렇게 회고했다.
김일성과 담판 남북 화해 물꼬 터
1991년 김일성 북한 주석과의 회담.“내가 닉슨을 지지한 것은 닉슨 개인을 지지한 것이 아닙니다. 닉슨 대통령의 직(職)을 지지했습니다. 이것은 미국 국민이 앞으로 알아야 할 문제입니다. 나라의 주권자가 새로운 정책을 세우고 그 나라의 운명을 정할 때는 특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지했습니다. 닉슨이 있었으면 월남과 크메르가 저렇게 안 됐습니다. 내가 예상한 그대로 됐습니다.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무기를 전부 다 공산 세계에 몽땅 넘겨주는, 이런 국가적 수치가 되는 놀음을 했다는 것은 민주 세계를 지도하는 국가로서 참패라는 것입니다.”
평화운동가로서 문선명 총재의 삶에서 하이라이트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과 김일성 북한 주석과 요담한 것이다. 문 총재는 평화세계 실현을 위해서는 무신론을 앞세우는 공산주의 세력의 확산을 막아야 한다고 봤다. 국제승공연합, 남북통일운동국민연합 등의 기구를 세워 남북 통일운동에 매진했고, 미국을 중심으로 남북미통일연합(CAUSA)과 중남미통일연합(AULA) 등을 창설해 국제적인 공산주의 방어 전선을 펼쳤다. 이 연장선상에서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을 만난 것이다.
문선명 총재는 1990년 4월 11일 소련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만나 한국과의 수교, 한반도 통일, 소련 내에서의 종교자유 확대 문제 등을 논의했다. 문 총재는 이 자리에서 무신론적 유물론의 미래는 멸망밖에 없으므로 유물론을 폐기하고 종교를 중심한 영적 가치관의 부활을 시도하라고 고르바초프 대통령에게 권고했다.
문선명 총재는 김일성 주석을 만나 남북 화해의 물고를 텄다. 북한을 떠난 지 40년 11개월 만에 북한 당국의 공식 초청을 받아 1991년 11월 30일 북한 땅을 다시 밟았다. 문 총재에게 김 주석은 원수 중의 원수라고 할 수 있었으나 잃어버린 형제를 찾아가는 마음으로 방문길에 올랐다.
문선명 총재는 방북 첫날 환영 만찬에서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 노동신문은 문 총재의 거동을 대서특필했다. 만수대의사당 연설 때는 땀을 흘리고 책상을 치면서 호령하듯 주체사상의 한계를 지적하는 등 열변을 토했다. 평양 한복판에서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목숨을 건 것이나 다름없었다. 박보희 전 세계일보 사장은 “손에 땀을 쥐고 온몸이 오그라드는 느낌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문 총재는 “주체사상을 버리고 하나님주의를 중심 삼고 내 말만 들으면 통일이 될 수 있다”고 김 주석을 설득하기도 했다.
문선명-김일성 회담 이후 남북 당국 간 대화가 급물살을 탔다. ‘남북 간 화해와 불가침, 그리고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에 남북이 서명했으며, 현안이던 핵 문제와 관련해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이 이뤄졌다.
사상적 혼란기에 주목받는 두익사상
1990년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과의 회담.공산주의가 붕괴했으나 세계에 평화는 찾아오지 않았다. 문선명 총재는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를 아우르는 ‘통일사상’을 대안으로 내놓았다. 특히 두익사상(頭翼思想), 즉 하나님주의는 하나님 중심의 진리와 사랑을 핵심으로 하는데, 우익(右翼)이나 좌익(左翼)이 아니라 더 높은 차원에서 양자를 포용하는 머리사상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가치관에 의해 좌익사상인 공산주의로부터는 증오심, 투쟁심 및 물질주의를 제거하고, 우익사상인 민주주의로부터는 이기주의, 자기중심주의를 제거함으로써 양자를 화해시키고, 공동으로 하나님과 인류의 숙원인 이상세계의 실현을 향하여 전진할 수 있도록 이끌어내자는 것이다. 인류의 부모이자 모든 종교의 최고 중심인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갈등을 겪는 국가와 민족, 종교를 화해시켜 인류 한 가족의 이상을 실현하자는 게 두익사상의 근본 취지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은 문선명 총재의 삶을 이렇게 설명한다.
“문선명 총재가 인류 역사에 큰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남다른 소명의식과 집념, 그리고 누구도 뒤따를 수 없는 초인적 능력 덕분으로 볼 수 있다. 문 총재가 어느 한 분야에도 시선을 뗄 수 없었던 것은 인류 구원과 세계평화 실현이라는 짐을 양어깨에 스스로 졌기 때문이다. 문 총재는 자신이 말한 것은 몸소 실천했다. 그래서 수많은 업적을 거둘 수 있었다. 다시 말하면 문 총재가 인류에게 남긴 업적이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것은 말과 행동이 동반됐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문 총재는 언제나 섭리의 최전선에 섰다.
문 총재는 평화세계를 이루기 위해 평생 세상의 낮고 구석진 곳을 찾아다녔다. 세계 기아(飢餓) 문제를 해결하고 불우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이웃을 돕기 위해 남미의 오지와 춥디추운 알래스카에서 고깃가루(피시파우더) 공장을 세우고 학교를 만들었다. 그들에게 낚시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학업의 기회를 제공했다.
“행동하는 선각자”소련의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만나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화해를 시도했고 북한의 김일성 주석과 만나 한반도의 평화를 담판했다. 또 도덕적으로 무너져가는 미국에 가서 청교도 정신을 일깨우는 소방수 노릇을 하며 세계의 분쟁을 막는 일에 골몰했다. 이슬람교도와 유대인의 화합을 위해 테러가 난무하는 팔레스타인에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유대교와 이슬람교, 기독교인 수천 명을 한자리에 모아 화해의 광장을 마련하고 평화행진을 벌이기도 했다. 문 총재만큼 세계평화를 위해 광폭행보를 보여준 성직자를 찾아보기 어렵다. 문 총재는 그야말로 행동하는 선각자였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은 “문선명 총재가 주창해 온 ‘통일원리’ ‘통일사상’ ‘두익사상’이 문명사적 대전환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기존의 세계질서가 갖는 한계를 극복하는 대안사상으로 새롭게 평가받고 있다”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의 빛을 밝혀온 문 총재의 생애를 알고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은 인류의 몫이 아닐 수 없다”고 했다.
신동아 2020년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