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29

초자연으로의 회귀, 신내림 < 삶과 마음 < 칼럼 < 기사본문 - 정신의학신문

초자연으로의 회귀, 신내림 < 삶과 마음 < 칼럼 < 기사본문 - 정신의학신문
정신의학신문 : 온안 정신건강의학과의원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신병神病은 무당이 될 사람이 신내림을 받기 전 앓게 되는 병을 말한다. 무당이
될 어떤 소질이 있는 사람에게 발생한다는 이 병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갑자
기 알 수 없는 원인에 의해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는 것으로 발병한다. 다양한 신체
증상을 호소하는 환자들은 이곳저곳 수많은 병원을 돌아다녀 보아도 원인이 밝혀
지지 않고 의학적으로 치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때쯤 문복問卜을 하거나
굿을 해 무당으로부터 신병이라는 진단을 받게 된다. 신병의 치료는 내림굿이라
는 입무 의례를 통해 어떤 강하고 선한 귀신을 불러내려 신병을 일으킨 나쁜 귀신
을 쫓아냄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그 대가로 당사자는 자신이 원치 않더라도 그
강한 귀신을 평생 몸주수호신으로 모시며 무당으로 살게 된다. 강신무降神巫
무당이 되어 다른 사람들을 치유하는 운명을 지게 된다.
잘 알려진 배우 정호근씨나 박미령씨와 같은 경우에도 이러한 신내림을 통해 무속
인이 되어 활동하고 있다고 방송을 통해 밝힌 바 있다. 정호근씨와 같은 경우 큰
딸과 막내아들을 잃은 뒤 신내림을 받게 되었고 박미령씨 역시 오랜 시간 신병을
앓다가 무속인으로 전향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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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초자연적 정신신체 현상에 대한 각자의
입장에 따라 무척 달라질 수 있다. 

신 귀신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부분과 이것이
사람에게 씌이는-빙의되거나 내림 받을 수 있는가에 대한 부분 그보다는 애초에
이것이 논의가 가능한 부분인가에 대한 것까지 명쾌한 답을 내릴 수 없는 부분들로
가득 찬 영역이다. 안 그래도 과학과 인문학의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현대 정신의학에 입장에서는 토속신앙에서 설명하는 이 현상에 대한 접근이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다. 애당초 종교인으로 귀의하면 치료되는 이 현상이 과연
의학적 접근을 필요로 하는 병disorder disease인지에 대한 사실조차도 불분명
하다. 그러나 이러한 신내림의 과정은 사실 당사자가 괴로워하고 원치 않는 경우가
많으며 정신적 원인이 분명한 경우가 많아 정신의학에서는 신병을 문화관련 증후
군의 일종으로 조심스레 분석하고 있다.

정신역동적으로 신병의 기제는 주로 투사projection로 설명된다. 투사는 자신이
감내하거나 해결하기 힘든 내적 갈등을 외부의 탓으로 돌리는 방어기제이다. 잘
되면 내 탓 안되면 조상탓과 같은 맥락의 방어기제인 투사는 사실 주변에서도 무
척 흔하게 볼 수 있다. 더 받아들이기 쉽고 더 해결하기 쉬운 외적요인의 탓으로
돌려 버리는 경우들 말이다. 신병의 경우엔 내적갈등과 심리적 괴로움이 시름시
름 앓는 증상과 같이 신체화somatization되고 이 신체화 된 갈등은 귀신이 들
린 탓이라는 신내림을 거부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투사projection 된다는 것
이다. 감당하기 힘든 갈등이 초자연적 존재와 초자연적 현상으로 투사된다. 설명과
해결을 본질적으로 거부하는 초자연적 영역으로 갈등이 던져진다. 그리고 그렇게
갈등을 던져내 버린 주체는 괴로움을 한결 덜어내게 된다. 무거운 현실적 고민에
대한 설명과 해결의 어려움에서 방황하던 주체가 초현실적 신내림을 받을 것인가
에 대한 선택이라는 보다 받아들이기 편한 고민으로 전향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
다.

영화 곡성에 대한 인터뷰에서 나홍진 감독은 신과 악마와 같은 초현실적 존재 오
컬트나 종교적 객체를 끌어들인 이유에 대해 아래와 같이 이야기했다.
세상에 어떠한 불행을 겪은 분들이 있지 않느냐. 사건 사고 소식을 보면 현실의
범주 안에서는 결론이 나 있다. 우리는 그분들이 어떻게 해서 불행을 겪었는지
알지만 왜 그분이 당해야 하는지는 모른다. 곡성은 여기서 시발된 영화다. 나는
현실적인 범주 밖에서 이야기를 풀어야 했다. 선과 악이 존재해야 했고 신이 등장
해야 했다.
인생은 공평하지 못하고 불행과 재앙의 방문은 피해자의 선악이나 잘잘못을 구별
할 눈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운명처럼 흘러가는 인생의 굽이에서 고난과 죽음은 그
저 던져진다. 거기에는 어떤 의미도 개연성도 인과율도 본질적으로는 존재하지 않
는다. 그저 인생이란 원래 그러한 것이다. 그러나 그 불행의 당사자로서는 이 무
자비한 불행의 추첨에 걸려버린 현실이 너무나 억울하다. 그 공허함을 받아들이기
도 온전히 나의 잘못으로 화살을 돌리기에도 너무나 분이 찬다. 어쩌면 곡성의 나
홍진 감독은 추격자 황해 같은 영화를 통해 무차별적인 눈먼 폭력으로 드러낸바
있던 삶의 공허를 받아들이는 방법으로 초현실로의 도피를 제시하고 싶었던 것
이 아니었을까 싶다. 삶의 괴로움을 초자연적 영역으로 투사하는 방법 말이다.

그러나 신병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나의 문제를 어쩔 수 없는 신의 문제로 돌
려버리는 미숙한 투사적 방어기제라고 진단하는 정신분석의 설명은 다소 잔인하
다. 인정하고 싶지 않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갈등을 겸허히 받아들일 것을 잔인
하게 강요한다. 현실의 공허함과 나의 무력함을 잔인하게 직면시킨다.
해가 갈수록 삶이 팍팍해지고 사건사고가 끊임없이 뉴스를 오르내리는 삭막한 현
실에서 초자연에 해답을 구하는 자세는 어쩌면 도리 없는 선택이 될지도 모르겠다.
또한 그것이 그렇게 잘못된 선택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것을 비난하기엔 각자의 삶
이 너무 각박해지고 있다. 다만 쉴 새 없이 휘청거리고 넘어지고 부딪히고 마는 각
자의 여정에서 필요한 것은 나를 정말로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그
것을 딛고 일어설 수 있게 나를 이끌어주는 나의 해답은 무엇인지를 돌아볼 마음의
여유가 아닐까 싶다. 뭣이 중헌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