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내림’은 영적 세계와의 만남
조흥윤 (한양대․종교인류학) () 승인 1991.01.17
한국문화는 신명․신들림의 문화…내림굿을 서양의 잣대로 재면 곤란
어느 무당이 집안에 꾸며놓은 신당에서 손님을 맞아 무꾸리(점복)를 한다. 어떤 문제로 찾아왔는지, 사주가 어떤지 묻고 엽전을 占床에 던지더니 갑자기 진저리를 치며 얼굴 모습이 달라진다. 그리고는 그 문제의 성격이 어떤 것인데 어찌어찌 하라고 일러준다. 무당의 집에서 흔히 보는 장면이다. 이렇듯 신들려 무꾸리하는 것을 神占이라 하고, 그런 무당을 용하다 하여 많이들 찾는다.
무당이 단골네 가족과 함께 굿을 벌이는 굿당에서도 신내림을 두루 볼 수 있다. 매 거리마다 그 거리를 주관하는 신령이 모셔진다. 무당이 해당 신령의 신복을 입고 음악에 맞춰 춤을 추다가 돌연 “쉬이-”하며 멈춘다. 신이 내린 것이다. 그러면 祭家집 사람들은 신내린 무당 앞에 서서 손으로 비는 모습을 지으며 무당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신령의 말을 귀담아 듣는다. 이것을 ‘空唱내린다’ 또는 ‘공수준다’고 한다.
降神은 ‘신내림’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위에서 무꾸리와 굿의 경우를 들어 강신의 구체적인 모습을 살펴보았다. 강신이 가장 강렬하게 드러나는 것은 내림굿이다. 내림굿이란 신들린 사람을 무당으로 태어나게 하는 굿이다. 무당 후보자는 내림굿에서 자신에게 내린 신령의 이름을 밝히고 말문을 열어야 한다. 그런 신령을 무당의 몸주라 하거니와, 애기무당은 몸주의 도움으로 그 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신점을 보아준다.
그밖에 굿하는 도중에 단골집안의 식구나 이웃이 굿판에 나와 신복을 입고 춤추는 대목이 있는데, 그때 격렬하게 춤을 추다 신이 내리는 수도 많다. 이는 비전문가의 신내림이라 할 터이고, 그에 비해 무당은 강신의 전문가인 셈이다. 그런데 巫의 이러한 강신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지가 중요한 문제이다.
일제시대 때 한국巫 연구의 대가로 평가받아온 일본인 학자 아키바(秋葉륙)는 평양에서 22세 처녀의 내림굿을 관찰한 바 있다. 그녀가 미친 듯 뛰며 춤추다가 무거운 神항아리를 입으로 물더니 입술이 거기서 떨어지지 않았다. 아키바는 강렬한 그 모습을 내내 잊지 못했다. 요즈음 무연구가들도 내림굿에서 무당 후보자가 요란스럽고 격렬하며 처절한 모습을 보여야 그것을 대단한 줄 아는 형편이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원래 ‘큰무당’이 될 후보자는 대부분 점잖고 품위있는 강신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던 것이다.
1930년말 이래 오랫동안 시베리아 샤머니즘 연구가로 명성을 떨친 올마르크스는 샤머니즘, 곧 巫를 “북극의 히스테리”로 파악했다. 그에 따르면 혹독한 추위․식량부족․고립된 생활 등 생존을 위협하는 북극의 열악한 환경조건으로 인하여 신경증과 정신병적 반응을 보이는 것이 무당이라는 것이다. 강신을 일종의 정신병으로 이해한 것이다. 뒷날 그는 그의 오류를 인정하고 “무당이 모든 인간 가운데 가장 정상적인 존재”라고 밝혔다. 실제로 무당들은 신내림과 정신병을 엄연히 구분하고 있다.
“무당은 가장 정상적인 인간”
기독교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서양 문화의 눈으로 보면 무와 강신현상은 처음부터 마귀의 장난이자 원시종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서양의 안목을 그대로 본받아 신내림을 ‘서양의 잣대’로 재서는 곤란하다.
강신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무와 무당에 대한 오해․편견 따위를 버려야 한다. 무는 귀신을 섬기는 원시종교가 아니라 조상과 영적 세계를 믿고 신령과 인간과 자연과의 조화를 꾀하는 종교이다. 무당은 그 종교의 사제에 다름 아니다. 강신은 영적 세계와의 어떤 교류가 되는 것이다. 종교학의 용어를 빌자면 바로 종교체험이다. 어느 종교나 그런 종교체험이 그 종교문화에 걸맞게 일어나고 있다.
예로부터 무를 신봉해온 한국문화는 신내림문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한국문화의 모든 면모에는 신들림이 역연하고 한국사람에게는 신명이 대단하다. 이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회상황에서는 신내림과 신명이 온전히 살아나지 못하고 이상한 방향으로 표출되게 마련이다. 인간의 창조적․조화적 역량의 개발이 요구되는 시대에 맞는 강신의 바른 이해가 선행돼야 한다.
조흥윤 (한양대․종교인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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