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28

[[ '신비철학' 井筒俊彦 이즈쓰 토시히코

1773 밤 
'신비철학'이즈쓰 토시히코


이즈쓰 

인문학 아카데미 1978

편집 : 타니 세이이치 협력 : 사토 슈 · 마츠모토 마사오
장갑 : 마츠미 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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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쁨과 슬픔은 되돌아온다. 때로는 갑자기 고통이 온다. 저것은 왜? 마음이나 영혼이 얕고 있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왜 얕은가? 희로애락이라고 하지만, 키도도 아이라크도 작은 가시를 전사의 창처럼 휘둘러 오기 때문에, 처치가 없다. 외인과 내인이 어디서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아무래도 설명하기 어렵다.
 이것은 고금 동서의 철인이나 시인을 휘두르는 큰 문제였다. 키드 아이라크에 애증을 더해 육정, 원한을 더해 칠정, 다윈은 더욱 경멸·혐오·공포·경탄을 계상했다. 감정과 의식의 얽힌 아이는 이렇게도 귀찮은 큰 문제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풀어내지 않는다. 만일 마음이나 영혼이 우리가 평소 '의식'이라고 생각하는 무언가로 구성되어 있다고 해도, 그 의식의 정체나 작용은 유감스럽지만 아직 알 수 없다.

 심리학이나 뇌과학과 인지과학은 이를 해명하기 위해 일어나고 있지만, 몇 가지 유력한 가설을 제공하면서도 결정타가 결여된 채로 있다.
 그렇다면 철학은 어떨까. 철학이야말로 의식의 본질의 해명을 목표로 만들어졌을 텐데, 도중에 여러 번 망설인 상처나 과오의 ”수리”에 논의의 힘을 많이 빼앗기고 있어 아직도 개선이 올라가고 있다 아니. 철학하는 행위 그 자체가 「의식의 언어화의 프로세스」에 확실히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자가 약제의 문제인 것이 오히려 자기 착착을 굳게 하기도 되어 왔다. 그래서 철학에는 변명이 두드러진다.

그렇다면 종교는? 신앙이야말로 애처와 괴로움으로부터의 해방을 목표로 한 것이기 때문에, 유력한 해답을 가지고 있을 것 같다. 코퍼스도 많이 아카이브되어 왔다. 기도와 명상은 의식의 과정에 어떠한 궁극적인 양상을 가져온 것일까, 그 체험이나 수행 등 다양한 종교 행위의 성과를, 철학이나 인지 과학은 최대의 친구로 할 수 없는 것일까 . 확실히 할 수 있다. 물론, 그렇게 생각되어 왔다. 그래서 오리게네스(345 밤), 임제의현(550 밤), 스피노자(842 밤), 쇼벤하웰(1164 밤), 윌리엄 제임스, 니시다 기타로(1089 밤), 버크슨(1212 밤), 칼 발트 등 많은 종교자와 철학자들이 그 일에 대한 사색을 되돌아왔다. 하지만 뭔가가 없어졌습니다. 

이런 가운데 이상과 같은 큰 문제가 정리되지 않았던 이유를 이즈쓰 토시히코는 연구자나 지식인'신비'를 향해 오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계속 생각해 왔다. 

바닥의 ​​모르는 늪처럼 인간의 의식은 소름 끼치는 것이다. 그것은 기괴한 것들의 서식하는 세계. 그 깊이에, 도대체, 어떤 것이 숨어 숨어 있는지, 사실은 아무도 모른다. 거기에서 어떤 것이 나타나는지 누구에게도 예상할 수 없다.         「의식과 본질」보다

 それなら宗教は? 信仰こそは哀しみや苦しさからの解放をめざしたのだろうから、有力な解答をもっていそうである。コーパスもたくさんアーカイブされてきた。祈りや瞑想は意識のプロセスに何らかの究極的な様相をもたらしてきたのではあるまいか、その体験や修行などのさまざまな宗教行為の成果を、哲学や認知科学は最大の友人にできないのだろうか。きっとできるにちがいない。むろん、そう思われてきた。
 だからオリゲネス(345夜)、臨済義玄(550夜)、スピノザ(842夜)、ショーベンハウエル(1164夜)、ウィリアム・ジェームズ、西田幾多郎(1089夜)、ベルクソン(1212夜)、カール・バルトなど、多くの宗教者や哲学者たちがそのことについての思索をくりかえしてきた。しかし、何かが欠けてきた。
 そうしたなか、以上のような大問題が片付いてこなかった理由を、井筒俊彦は研究者や知識人が「神秘」に向き合ってこなかったからではないかと、ずっと思ってきた。
 底の知れない沼のように、人間の意識は不気味なものだ。それは奇怪なものたちの棲息する世界。その深みに、一体、どんなものがひそみ隠れているのか、本当は誰も知らない。そこからどんなものが立ち現れてくるか、誰にも予想できない。          
『意識と本質』より



東西の叡智を操る異才

井筒俊彦が晩年を過ごした北鎌倉の自邸書斎。30以上の言語を使いこなせるため、あらゆる言語の文献が本棚に並んでいる。
「井筒俊彦全集」特設サイト(慶應義塾出版)より

 이즈쓰의 유저는 '의식의 형이상학: '대승기신론'의 철학'(중공문고)이다. 77세 때 '중앙공론'에 연재를 비롯해 세 번째로 절필해졌다. 그러므로 책이 된 것은 사후의 일이었다. 만년의 이즈쓰가 여래장을 설한 대승기신론에 도달한 것은 매우 상징적이고, 옳은 일이었다고 생각된다. "좋은 일"이란 무엇인가.

 여래장은 불교가 오랫동안 추적하고 있던 신앙의식의 궁극의 본질을, 동양사상이 어떻게 간주하고 있었는가 하는 근본적인 견해의 하나를 나타내고 있었다. 인도 유래에서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에서의 교상 판석을 하고, 드디어 화엄처럼 오로지 아시아적으로 양성된 사고방식이다. 이즈쓰 카즈히코는 “중생의 마음이 그대로 대승이다” “거기에는 아라야식으로서의 본각이 움직이고 있다”고 썼다.

 여래장(tathagata-garbha)이라는 산스크리트의 원어는, 그대로 번역하면 「여래는 태아로서 묵고 있다」라는 의미가 된다. 모든 중생은 여래를 태아로 자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상이다. 본각은 본래의 각성(카쿠쇼)의 것으로, 『대승기신론』에서는 우리에게 처음부터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나중에 일본에 와서 천대본각사상이 되었다.
 아라야식(아요야식) 쪽은, 대승불교가 「행」을 통해서 도달한 최심의 의식 상태를 말한다. 이즈쓰는 아라야식이라고 썼다. 안식·이식·비식·혀식·신식·의식·마나식(말나식)의 한층 더 안쪽에 숨어있는 제8번째의 심층 의식이 아라야식이지만, 의식 상태를 벗은 것이라고도 되고 있다.

 태아에게 여래가 싹트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대승기신을 살짝 가면 아라야식이 일어나 여래의 경애가 마치 태아 무렵부터 거기에 머물고 있던 것처럼 실감할 수 있다고 설고 있다. 그것은 「본각의 드러나기」라고 하는 것이라고 설고 있다.
 이즈쓰 카즈히코는 왜 대승기신이 아라야식이나 본각에 이르는지 그 생각을 하려고 했다. 거기에 여래장의 극치, 대승신비주의의 극치가 출입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이것은 '정말의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즈쓰는 만년이 되어 처음으로 대승기신론의 본각에 다가온 것이 아니다. 이것은 어린 시절부터 쭉 변함없이 「의식의 제로 포인트」혹은 「존재의 제로 포인트」로서 탐구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모든 현상의 제로 포인트로서의 "진여"는 문장 글자 그대로, 표면적으로는, 단 하나의 그림자조차 없는 존재의 "무"의 극처이지만, 그것은 또한 반면, 모든 것 비현실적, 불가시의 본체이며, 일체 만물을 포장하고, 그 자체에 내재하는 근원적·전일적 의미에 의해 모든 존재자를 드러낼 잠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다. 이 의미에서 그것은 존재와 의식의 제로 포인트 동시에, 존재 분절과 의식의 현상 자기현현의 원점, 즉 세계현출의 궁극의 원점이기도 하다
이다.                     
"의식의 형이상학"에서



『의식의 형이상학』(중공문고)


의식의 구조 모델

A는 표층 의식을, 그 아래는 모두 심층 의식을 나타낸다. 최하의 한점은 의식의 제로 포인트. 그 다음 C는 무의식의 영역. 전반적으로 무의식적이지만 B 영역에 접근함에 따라 의식화에 대한 태동이 점차 나타납니다. M은 「상상적」이마주의 장소. B영역에서 성립한 「원형」은, 이 M영역에서, 다양한 이마주로서 생기고, 거기서 독특한 기능을 발휘한다.


전일적 「진여」의 개략도

A공간은 절언 절상의 비현상에서의 「진여」, B공간은 현상적 존재계에 전개된 차원에서의 「진여」. A는, 원래 코토바가 되지 않는 것은 물론, 마음에 생각 그릴 수 없는 「진여」의 형이상적 극한을, 무리하게 공간적 표상으로 나타난 것이며, B는, 언어와 의식이, 「아라야 「식」을 토포스로서 연계함으로써 생기는 유전생멸의 사물이 구성하는 형이하적 세계를 표시한다.

 다시 이즈쓰 카즈히코의 사색의 계보를 되돌아 보면, 초기의 '신비 철학'에 모든 목적이 예고되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 저작의 원형은 1949년의 「신비철학-그리스의 부」(철학수도원)이다. 

이 책에는 이통 철학의 거대한 발현 장치가 헤르메스 지나 그노시스 지와 같이 담겨 있었다.
 이즈쓰 카즈히코는 그리스 철학을 처음부터 아라야식이나 본각처럼 읽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그것을 뭔가를 교란시키거나 숨기거나 하는 신비 사상의 특질의 드러난 것으로 간주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 이렇게 생각하게 한다.
 일본의 논단에서는, 이즈쓰 카즈히코는 이슬람 철학의 연구자, 혹은 「의식과 본질: 정신적 동양을 요구해」(이와나미 문고 외) 등으로 대표되는, 뛰어난 동양 철학의 연구자로서 알려져 왔다 . 나도 처음으로 읽은 이통 책은 '이슬람 탄생'(인문서원→중공 문고)과 '이슬람 철학의 원상'(이와나미 신서)이며, '의식과 본질'과 '의미의 깊이에: 동양 철학의 수위」(이와나미 문고)였다.
 그러나 이통은 이슬람 연구에 착수하기 오래전의 전전에 도전한 그리스 철학의 해석에서 이미 그 후의 탐구의 원점을 명시하고 있었다.
 보통 그리스 철학은 플라톤( 799 밤 )의 아이디어에 기초한 이념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291 밤 )의 자연학을 밑바닥으로 한 형이상학에서 정점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통은 그 전에 '이념을 해치는 것'이나 '원래 형이상적으로만 꺼낼 수 있는 영혼의 체험'이 그리스 철학의 곳곳에 있었을 것에 생각을 놓고, 이것을 디오니소스 신과 같은 야만적이고 (반리성적이고) 아시아적이며 (비 지중해적 인) 광분을 떠나지 않는 앰비 밸런스 신의 개입과의 관계에서 더 깊게 사색해야한다고 느꼈다.
 또 보통 그리스 철학이 신비주의적인 양상을 모색하는 것은 오르페우스교나 피타고라스주의 등의 특별한 예외를 제외하면 고대 로마기에 들어 프로티노스가 등장해 거기에 새로운 플라톤주의가 퍼진다 에 의해 새롭게 플라토니즘의 발전계에 신비 철학의 징후를 맡는 것인데, 이통은 그렇지 않고, 이미 밀레토스 ​​학파의 대두 속에 자연 신비주의가 흔들리고 움직여, 신비를 부정한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도 본인 하지만 어떻게 부정하려고 해도, 닦을 수 없는 신비철학의 종자(슈지)가 거래하고 있었다고 봤다.
 이즈쓰 카즈히코는 "철학은 말하자면 진리를 성체로 성립하는 곳의 고차의 밀의종교인 것이다"라고 썼다. 진리가 성체였고, 그 탐구는 밀의(오르기아)에 한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꽤 보기 드문 견해이지만, 젊은 『신비철학』은 그 일을 호소하고 싶었다. 그러나 당시 많은 논자들은 원래 그리스 철학을 '신비 철학'이라고 묶는 것 자체가 이상한 견해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우물통의 발상은 심하게 치우치거나 오컬틱한 것으로 달리고 있을 것이라고 보고, 이것을 전혀 평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논자들의 쪽이 훨씬 좁은 것이었다.
 그리스 정신이 서정시에서 자연 철학으로 전환하는 중간에 자연신비주의 체험을 두려고 하는 내 입장은 반드시 많은 독자를 만족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아철학의 신비주의적 기원――이런 주제는 어떤 사람  그들을 쓴웃음조차 할 것이다. (중략) 다시 니이최, 로데의 옛날로 돌아가려고 할까. (중략)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깊은 확신으로 그리스 철학 성립에 대한 신비주의 체험의 결정적 의의를 다시 다시 고창하려고 하는 것이다.       
『신비철학』 쇼와 22년의 서문부터




은근한 이즈쓰 토시히코 붐

'의식과 본질'은 오랫동안 이와나미 문고의 롱셀러였지만, 최근 이즈쓰 토시히코의 대표작이 잇달아 이와나미 문고에서 복간했다. 「신비 철학」 「의미의 깊이에」 「코스모스와 안티 코스모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에서 흘러나온 신비주의의 복류수

왼쪽: 만물의 근원을 무한한 아페론[apeiron]에게 요구해, 이 신적이고 불멸의 근원으로부터 모든 개념이 대발생해 왔다고 생각한 밀레토스 ​​학파의 아낙시만드로스 .

오른쪽 : 모든 대립을 통합하는 절대자로서 <한자 [to hen]>에서 <지지[nous]>가 유출한다고 생각한 신플라톤주의의 코조 프로티노스.

 당연히 그리스 철학의 흐름은 균일하지 않다. 시기에 따라도 유파에 의해서도 꽤 다채롭다. 개성적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간단하게는 안내할 수 없지만, 굳이 조잡하게 압축해 보면, 우선은 호메로스( 999밤 )가 말한 이야기, 제우스 일족이나 오룽보스의 신들의 혼잡한 질투심한 신화, 소아시아의 강한 여신들을 둘러싼 제압 전승 등 등이 선행적으로 지중해 연안을 교차하면서 나아갔다. 그리스 신화의 신들은 거의 모든 것이 의인화되어 있었다.

 그들이 섞인 인과는 이윽고 고대 그리스 독특한 신인교신적인 세계관과 자연관과 인생관이 되어 그것을 배경으로 이오니아에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 등의 자연철학이 태어나 거기에 헤라클레이토스, 아낙사고라스, 알케라오스가 이어져, 그것이 피타고라스 학파와 팔메니데스와 제논 등의 엘레아 학파를 출현시켰다.

 이런 식으로 된 것은 일찍 그리스 알파벳이 확립한 것이 크다. 셈어계의 페니키아 문자에 모음을 더해(페니키아 문자는 22의 자음 문자만), 전 6세기에는 범용성을 발휘했다. 이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과 전해 들은 것을 「시」나 「문」에 옮길 수 있었다. 그리스 철학은 훨씬 표기 언어와 함께 있었던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어학에 능통하고, 그리스어에도 통효하면서 아츠타 이통은 그리스 철학의 언어 사고의 맥락을 쫓아, 거기에 이중 다중의 「의미의 분절」이 비틀어지고 있는 것에 주목하도록(듯이) 되었다.

 분절 된 것 (예 : 꽃)은 그 자리에서 무분절
귀가하고 또 순간에 무분절의 에너지가 전체를
들고 꽃을 분절 낸다. 이 존재의 차원 전환은 순간적
사건이기 때문에 현실에는 무분절을 분절이 이중
사본에 겹쳐 보인다. 그것이 즉 "꽃의 과시"
라고 하는 것이다.           
"의식과 본질"에서




만신

손에 칸타로스(와인글라스)를 들고, 헤르메스와 대화하는 디오니소스.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지방에서 전래한 집단적 광란의 제의에 의해 숭배되고 있던 풍요신과, 소아시아의 플류기아, 류디아 지방에서 전래한 수목과 과수의 정령 등이 습합해 성립한 거친 신.

 그리스 신화는 고대 그리스인에게 코스모스(우주)라는 틀과 자연의 맹위(아라시와 바다의 힘)의 어느 정도인지를 알렸다. 그 코스모스나 자연력은 어떤 이유로 생긴 것일까.
 탈레스 등의 밀레토스 ​​학파의 자연 철학은 코스모스(질서)를 성립시키고 있는 원리의 의문(우주는 무엇에서 생기는 것인지)에 대답하려고 하는 것이며, 헤라클레이토스 등의 철학은 자연력의 본성을 숙려하려고 한 것이었다.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을 '물'로 간주하고, 헤라클레이토스는 '불'과 '흐름'으로 간주했다.
 거기에 '수'와 '비례'에 주목한 수학적 사고가 더해져 신비적인 조화가 존중되었다. 팔메니데스 등이 모든 추리를 '논리'로 설명할 것을 제안되면, 엠페도클레스가 이상의 가설의 이것을 종합해, 우주의 4원소설을 정리해, 그러한 구성 요소는 결합(비리아)과 분리 (네이코스)를 바꾸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레우키포스나 데모크리토스는 구성 요소는 더 작은 물질로, 더 이상 분할할 수 없는 원자(아톰)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견해를 모두 모으면 아무런 일관성도 없다. 그것은 이상한 것이 아닐까 하고, 프로타고라스, 고르기아스, 프로디코스, 히피어스는 이것저것 이리굴을 뒤집어 백가 쟁명을 되풀이했다. 소피스트의 시대이다.

 대략은 이상이 서구 철학사에서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이라고 일괄되는 것으로, 시대적으로는 아테네가 페로포네소스 전쟁으로 피폐해, 소피스트 후의 논의만이 교제되는 시대까지의 것이 된다 . 거기서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의 「어느쪽도 어느쪽」방식의 논란의 불모를 폭파하는 것이 「지의 사랑」(필로소피)이라고 호소했다. 젊은 플라톤이 이 견해에 영향을 받아 순화시키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체계화에 착수했다. 그러나 '어느쪽도 어느쪽'은 그리스어의 분절 사고에 얽혀 온 것이기도 했다.
 소크라테스 이후, 그리스 철학은 차분히 우주(코스모스), 이념(이데아), 영혼(푸슈케), 운동(듀미나스), 질료(휴레), 형상(에이드스) 등을 정의하면서, 일반적으로는 자연학(피직스) )과 형이상학 (메타 물리학)을 구축합니다. 그러나 이즈쓰는, 거기에 이중 다중의 분절을 잔향시키고 있었을 것이다 「신비 사고」가 너무 빠져 있는 것, 일찌기 그러한 "뜻의 신비"와의 만남에 의해 사색이 비약하거나 심화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더 주목해서는 안 될까 생각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플라톤이 코스모스의 로고
근거를 세우고 있었던 같은 아테나이의 도시에서 비극
시인들이 디오니소스적 안티코스모스의 엑스터
틱한 열정과 그 광란을 엄청난 형태로 연극
화했다. 게다가 그리스 비극은 이 안티 코스
모스로서의 혼돈을 외부에서 코스모스를 공격하는 무질서
서, 부조리성이 아니라 코스모스 그 자체,
구조에 내장 된 내발적 자기 파괴의 에너지
기로서 그린 것이었다.          
"코스모스와 안티 코스모스"에서




고대 그리스의 세계 모델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와 우주. 16세기에 그려진 것. 중앙에 '지구(yearth)' 그 표면에 '물(water)' 그 위에 '공기(aer)' '화(fier)' 그리고 달, 수성, 금성, 태양... 위에 '투명한 창포(cristalline firmament)'의 구가 있고, 최상부에 '제일동자(primum mobile)'가 존재하고 있다.

 이즈쓰 카즈히코가 전망한 것은 그리스 철학을 코스모스에 의한 용기성이나 질서성 속에서만 해석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때로 코스모스(질서)를 위협하는 카오스(혼돈)의 동향에 접촉한 의식이 그리스 철학이 오늘에 가져온 원동력이 된 것은 아닐까 보이기 때문이었다.

 각지에서도 아테네에서도 행해진 디오니소스의 제전의 와중에 있어, 고대 그리스의 정신이나 의식은 「프로메테우스」 「안티고네」 「오이디프스 왕」 「미디어」 「바코스의 신녀」라고 하는 바로 영혼이 터질 수 있도록 그리스 비극 (트라고디아)로 결실했다. 거기에서는 나중에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중시한 체계적이고 순조로운 코스모스관이 아니라, 거칠고 술 좋아하는 디오니소스(박카스=바코스)에 달려가는 것 같은 일탈이나 폭언이 격렬한 영혼의 慟哭으로 약해지고 있었다 .

 이즈쓰 토시히코는 그것을 「디오니소스적 안티 코스모스」라고 파악해, 그러한 일탈과 광란과 심화가, 실은 그리스 철학의 저변에 소용돌이치는 신비력을 역상시켜 온 것이며, 그것이 후의 프로티노스들의 신비 철학(신플라톤주의)을 마련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 것이었다.
 많은 연구자들은 이러한 관점이 그리스 철학의 중심을 관철하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런 대담한 견해를 한 것은 아폴론적 우주관에 대한 디오니소스적 광란을 대비시켜 ​​그리스 비극의 '심층의 굉장함'을 선보인 니체( 1023 밤 )나 엘빈 로데인지, 그렇지 않으면 그노시스, 그리스도 교신비주의, 중세 유대의 카바라 사상, 바로크적인 오컬티스트들뿐이었다. 그러니까 그런 견해를 그리스 철학사의 밑바닥으로 하는 것은 이상하다, 라고 이통의 책을 장사 떠났다.
 그만큼 일반 그리스 철학사로부터 하면 파천황한 견해였던 것이다. 다만 이즈쓰 카즈히코도 자신의 사상이 니체 등에 준하고 있다는 것은 더욱 강조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즈쓰 카즈히코의 「의식의 제로 포인트」는 분명히 안티 코스모스로부터 조사되고 있었다.

 이즈쓰의 이러한 기획(신념)을 최초로 지적한 것은, 내가 아는 한에서는 나카자와 신이치( 979밤 )였다. 1991년에 「이즈쓰 토시히코 저작집」(중앙 공론사)이 간행되었지만, 그 제1회 배본 「신비 철학」의 끼워넣은 떡에 나카자와는 「창조의 출발점」을 써, 이즈쓰의 의도 를 간결하게 말했다. 나카자와는 이렇게 썼다.

 “그리스 신비 철학은 디오니소스 신의 충격 속에서 발생한 것이다. 을 근저로부터 흔들었다” “그리스에 있어서의 신비철학의 기원은, 동시에 서구형이상학의 기원의 장소이기도 하다.처음에 그것에 깨달은 것은 니체이지만, 이즈쓰 카즈히코는 이 책에서, 완전히 다른 방법으로, 그 조건을 들여다 보였던 것이다.”
 
바로 그럴 것이다. 단문이었지만 나카자와의 지적은 맞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통의 「다른 방법」이나 「약간의 일」은 그 후에도 오랫동안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 또 니체나 로데와의 차이나 그노시스와의 관계도 그 후에는 거의 논의되지 않았다.

 이즈쓰 카즈히코은 너무 돌비한 연구자였을까. 그렇지 않을거야. 종교나 철학의 편에 '원래 돌비'가 듬뿍 출입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덧붙여서, 조금 후에는 되지만, 와카마츠 에이스케나 안도 레이지도 이즈쓰 카즈히코의 이 발견과 의도를 강조했다. 와카마츠에는 『이즈쓰 카즈히코: 지치의 철학』(게이오 요시카쿠대학 출판회・2011)이라는 뛰어난 이츠츠 평전이나 이즈쓰 카즈히코 팬을 모은 「이츠쓰 슌히코 잔마이」(게이오 요시카쿠 대학 출판회)가 있어(그 후에 『영성의 철학 'KADOKAWA에서도 이즈쓰를 잡았다), 와카마츠·안도의 두 사람에게는 탄생 100년도의 수첩 '이즈쓰 카즈히코'(가와데 서방 신사·2014)가 있다.

 내가 본론에서 분류하는 것은 시적 상상력 또는
신화 형성 상상력으로 심층 의식이있는 특수한 다음
원래 나타나는 원형 (아키 타입) 모양을,
물건의 실존하는 보편적 「본질」로서 인정하는 일종의 상징
주의적 '본질'론의 입장이다. 그노시스, 샤마
니즘, 탄트라, 신비주의, 등등, 동양 철학의 영역
에서 현저한 위치를 차지하고, 그 확산은 크다. 무엇
어쨌든 솟아오르고 의식의 어두운 깊은 층
미안해, 거기에 이상한 심상의 그림 패턴은 그려
형적 "변질". 그 세계를, 무 "본질"주의의 선은
전혀 모른다. 아니면 아무래도 전혀 문제가되지 않습니다.
네.                      
"의식과 본질"에서




와카마츠 에이스케에 의한 이츠츠모토

비평가로 시인인 와카마츠 에이스케씨는, 지금까지 많은 장소에서 이즈쓰론을 전개해 왔다. 와카마츠씨의 최초의 이즈쓰 체험은, 『신비철학』의 시작 부분의 일절 「유바쿠타루 과거 수천년 때의 그분보다, 4주의 잡음을 부드럽게 압도하면서 어떤 거대한 것의 목소리가 이 가슴에 다가오는 것에 충격을 받았을 때였다고 한다.

 이즈쓰 카즈히코는 다이쇼 3년(1914)에 도쿄에서 태어나 구제 아오야마 학원 중학에서 기독교에 접했다. 좀처럼 좋아하지 못하고 예배 중에 구토했다고 한다. 적당한 감수성이다. 니시와키 준사부로( 754야 )의 쉬르레아리즘의 생각에 끌려 더 문학을 목표로 하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반대에 있어 게이오의 경제에 들어갔다. 동급에 카토 모리오·이케다 야사부로가 있었다.
 경제학부의 강의는 지루하지 않고, 도중부터 동경의 서쪽 옆이 있는 영문과로 돌아가서, 모두 서쪽 옆 정령을 받았다. 구약 성경에 흥미를 느끼자, 간다의 어학교에서 코츠지부조로부터 히브리어를 배워, 역사 속의 언어에 관심을 가졌다. 선배의 세키네 마사오의 감화를 받아 아랍어로도 잡았다. 이즈쓰 카즈히코의 어학재능은 유명했고, 요즈음 러시아어·고전 그리스어·라틴어의 단기 습숙도 시도했다.
 쇼와 2년에 졸업 후에는 문학부의 조수가 되었지만, 군부에 밀려 나와 중근동의 요인의 통역을 하거나, 쇼와 14년(1939)에는 오카와 슈메이에 부탁되어 만철계의 회교권 연구소에서 방대한 아랍어 문헌을 읽고(마에시마 신지가 동료에 있었다), 일본 내일의 이브라힘과 비키예프에게 어학과 이슬람 철학을 배우고, 일찍 이슬람 지식의 안쪽을 들여다봤다. 쇼와 16년에 주로 이븐 루슈드(아벨로에스)를 논의한 「아라비아 사상사」(흥화전서)를 간행했다.
 전후가 되자마자 『아라비아 철학』을 정리했다. 이를 맡은 것은 빛의 서방을 주재하고 있던 우에다 미츠오로, 이 우에다가 쇼와 24년(1949)에 『신비철학―그리스의 부』의 집필을 의뢰했다. 우에다는 「과학과 철학」이라고 하는 잡지를 창간하거나, 철학 수도원 로고스 자유대학을 열거나, 신비파의 하르트만이나 페히너에 경도하는 것 같은 인물로, 이나가키 아리호( 879밤 )를 기상시키기도 했다 .
 게이오의 교단에 서게 되어 ‘언어학 개론’을 강의하면서 ‘아랍어 입문’ ‘노서 아문학’ ‘마호멧’ 등을 썼다. 쇼와 28년(1953)의 『러시아적 인간』(홍문당)이 참신했다. 이통은 나중에 「자신은 철학자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언어학자인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을 말한다면 언어 철학자일 것이다.
 이듬해 교수가 되어, 쇼와 34년에는 레바논에 반년 체재, 다음 해에는 이집트의 카이로, 시리아의 알레포를 방문해, 몬트리올에서는 마길 대학의 이슬람 연구소에서 이슬람 철학에 잡았다. 이 해외 경험은 곧 '꾸란'의 신역 작업에 투영됐다.

 쇼와 42년(1967)은 53세. 처음으로 엘라노스 회의에 초빙되어 그 후 거의 매년 참가했다. 엘라노스 회의는 루돌프 오토의 부름으로 시작된 체류형의 자유로운 컨퍼런스로 종교학·신화학·심리학·신비학 등을 8일에 걸쳐 둘러쌌다. 올가 프레이베 캡타인이 스위스 아스코나 근처 마조레 호반 별장을 제공했다. 윤( 830야 ), 유대신비주의 연구의 역기의 태두 겔쇼 쇼렘, '의식의 역사'를 자랑하는 에리히 노이만( 1120야 ), 아나키즘도 연구하고 있던 하버트 리드, 스즈키 오오츠키( 887 밤 ), 세계 신화에 밝은 조셉 캠벨( 704 밤 ), 하이데거의 프랑스어 번역자로 그노시스 같은 신비주의에 강한 앙리 코르반 등이 참가했다. 코르반은 융에 신경이 쓰여 24회나 발표자가 됐다.

 엘라노스 회의는 다방면에서 영적 리듬을 논한 헬메틱한 지적 회의이다. 오컬티즘에도 정면 왔다. 당초 융의 분할이 컸던 것이다. 이즈쓰 몰후, '동양철학의 구조: 엘라노스 회의 강연집'(게이오 기학 대학 출판회)이 간행되고 있다.

 종래의 언어학이, 어쩌면 평판인 「의미」의 견해
만족스러운 경향이있는이 학문은 코토바
"의미"기능을 논술의 대상으로 다룰 때,
바 자체를 주로 사회 관습적으로 코딩
시스템화되어 작동하는 차원으로 제한
하는 성향을 갖기 때문이다. "시니피에" "시니프
"이안"과 같은 더 엄격한 기호 학적 술어 도입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황은이 점에 관한 한 조금 변합니다.
모르겠다. (중략) 컨벤셔널한 「의미」
부상고찰의 중심이 된다. 컨벤셔널한 의미의
프레임을 돌출하는 것은 "뉘앙스"이다.   
(중략) 파롤의 차원에서 화자의 현장
장의 개인적 '의미'이다. (중략) 이렇게하려면 표
층적 '의미'만 생각하는 것이다. 이 표층주의가 나에게
는 불만이었다.                 
"의미의 깊이에"나중에



엘라노스 회의 참가자의 얼굴 흔들림

왼쪽 상단에서 시계 주위에 루돌프 오토, 게르쇼무 숄렘, 에리히 노이만, 하버드 리드, 스즈키 오오츠키, 조셉 캠벨, 앙리 코르반, 밀차 아리아데


엘라노스 회의

(왼쪽) 원탁을 둘러싼 엘라노스 회의 참가자. 「엘라노스」는 고전 그리스어로 「만찬」의 뜻. 8일간에 걸친 대회에서는 참가자들이 침식을 함께 하고, 각각이 가져온 테마에 대해 2시간의 강의를 실시했다. 1933년부터 1988년까지 열렸다.

(오른쪽) 제10 강연 「이마쥬와 이마쥬 부재의 사이」의 때의 이츠쓰 슌히코. 53세에 엘라노스 회의 회원이 되어, 노장 사상으로부터 선불교, 화엄, 유교, 수묵화, 하이쿠, 샤머니즘에 이르기까지 동양의 사상을 종횡무진으로 전 12회 강연해, 세계에 이통의 ​​이름을 알렸다.


엘라노스 회의의 어머니·캅스타인

1933년부터 죽는 1961년까지 엘라노스 회의를 주최한 오르가·프레베·캡스타인. 1920년에 아스코나의 사나트륨에 입원했을 때, 경치 좋은 당지를 마음에 들고, 나중에 「카사 엘라노스」라고 불리는 별장을 구입했다. 당지에서 인도 철학이나 명상에 개안한 뒤 독일의 저작가 루트비히 달레스나 신비주의자 알프레이트 슈러들과 교류해 신비주의에 경도했다. 리처드 윌헬름에 의해 번역된지 얼마 안된 '이케이'와 융의 '원형 사상'을 접해 동양과 서양을 연결하는 장소를 구상했다. 1930년경 미국 로드아일랜드를 물었을 때 신비주의 저자 앨리스 베일리의 지자를 얻어 1930-32년에 공동 개최한 신비주의자들의 교류회가 엘라노스 회의의 전신이 되었다.

카사 엘라노스의 벽에 걸려 있던 그림의 비밀

인생에서 가장 깊은 것은 이미지에 의해서만 말할 수 있다고 믿은 캡스타인이 1926-1934년 무렵, 신비한 직감과 환각, 계시를 중시하고 그렸다 
명상 회화 그룹의 일부. 당초 엘라노스 회의의 회의실에 꾸며져 참가자들로부터 찬반양론을 불러 신지학에 대한 맹목적인 기울기를 볼 수 있는 화법을 융에서 통렬하게 비판받아 제거됐다. 1934-38년경부터는 융으로부터 조언을 받으면서 화풍을 전환해, 융파의 분석 심리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면서 내적 진실과 외적 세계, 그리고 심리적 과정과 창조적인 차원의 융합을 목표로 했다.


윤 심취자의 성지가 된 별장

(왼쪽) 칼 융. 융 신화의 원형 개념은 엘라노스의 기초 이론이 되는 등 실질적인 엘라노스 회의의 개념이었다. 
(오른쪽) 융이 현지 석공의 협력을 얻어 취리히 호반의 볼링겐 마을에 스스로 건설한 은거관 <보링겐의 탑>. 

엘라노스 회의 참석자였던 미국의 실업가 폴 & 메리 멜론 부부가 인문학적인 연구를 지원하는 볼링겐 기금을 창설하는 계기가 된 융과의 회합도 당지에서 잡혔다. 기금을 바탕으로 출판된 叢書에는 『이케이』, 융 『심리학과 연금술』, 스즈키 대졸 『선과 일본 문화』와 조지 루카스가 『스타 워즈』를 구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셉 캠벨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이 포함된다. 필란솔로피에 의한 대형 파트로네지의 대표 사례로 말해지는 위업이다.

 어린 시절부터 어학의 천재였던 이즈쓰에게는, 말은 표층적으로는 어떻게도 바꿀 수 있는 것이라고 느껴지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고대어나 종교 언어나 시가 문예의 말 걸음에 내재하는 다양한 분절력 이나 숨은 함의에 주목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쇼와 43년(1968)에 게이오를 퇴관해, 마길 대학의 이란 지부 개설에 따라 테헤란에 이주한 이통은, 10년 정도 그의 땅에 있어 쇼와 54년에 발발한 이란 혁명의 그대로를 받아 귀국 하지만, 그 무렵부터 이러한 "언어적으로 파고 든다"는 생각을 연마하면, 이것을 이슬람 철학 · 기독교 · 카바라 · 동양 철학 · 불교 · 노장 철학 · 유교 등의 사고 언어군에 맞추고, 차례차례 에 저작을 잡기 시작했다. 노자의 영역 등도 시도했다. 엘라노스 회의의 자극은 컸다.
 따라서 귀국 후의 「이슬람 탄생」(인문서원)을 시작으로, 「이슬람 철학의 원상」 「이슬람 문화」 「의식과 본질」 「의미의 깊이에」 「코스모스와 안티 코스모스」 「초월의 말」 (모두 이와나미 서점)이 차례차례로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잡은 것이 대승기신론으로 넘어간 '의식의 형이상학'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그 후, 논문·단행본·번역의 것을 포함해 “이통 슌히코 저작집” 전 11권 및 별권의 대담·고담집이 되어 있다.

 나는 이것들을 골고루 읽은 것도 아니고, 또 정독한 것도 아니지만(이즈쓰의 문장은 맛이 없고, 읽기 어렵다), 저작집 제9권 「토요 철학」에 이전부터 신경이 쓰여져 있던 「수피즘 라고 언어 철학」이라는 논문이 있기 때문에, 오늘 밤은 그것을 소개하고 이즈쓰 신비 철학의 진골정에의 오마쥬로 하고 싶다.
 1983년에 일본 학사원에서 연구 보고한 것으로, 이듬해 「사상」에 게재되었다. 특이한 수피 사상가 아이누 하마다니의 심층 의미론을 다루고 있다. 나는 이것을 읽었을 때, 이통의 말에 대한 잡는 방법은 편집 공학과 몇몇 부분에서 겹치고 있다고 느낀 것이었다.

 경전의 코토바의 흐름의 리듬에, 우리의 내생
의 리듬을 맞추면서, 수피는 '꾸란'
계속 읽으십시오. 종종 "코란"의 영혼이라고도합니다.
신적 게시물의 숨결이 그의 "영혼"의 이름에서 스며들어
간다. 원래 아랍어에서는 "영혼"(너스)이 "숨
불어 (나파스)와 밀접한 의미 론적 연결
하나. (중략) 즉, 관상자의 내부 상태는 하나님의
「기식」과 합치해, 변질해 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내적 상태가 변질됨에 따라 이번에는 반대로 '꾸란'
의 코토바 자체가 내적으로 변질해 간다. '꾸란'은
보통 신자의 읽는 '꾸란'과는 닮아도 비슷하지 않다
물건이 되어 버린다.              
「창조 불단」보다


 이슬람 종교 사회에서는 일정한 수행하여 얻을 수 있는 의식바실라라고 한다. 바실라는 일반 아랍어로는 「시각」을 의미하지만, 수피즘의 술어로서는 「정신적인 눈」이나 「내관」을 의미한다. 때로 수묵 산수의 화론에 말하는 「골법」등의 의미도 가진다.

 수피들은 이 바실라의 설명을 요구하면 곧바로 대답하지 않는다. 어긋나거나, 흔들리거나, 뒤틀린다. 그러나, 그렇게 어긋나거나 꼬이거나 하고 있는 말투는, 이즈쓰가 보는 곳, 「언어 이전」의 체험이 가져오는 중요한 말이 날아가고 있는 것이 많다. 이 비말의 존재는 이슬람 철학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형의 지식을 팔사파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일판 또는 히쿠마트라고 한다. 히쿠매트지치(wisdom)이다. 대승불교로 말하면 플라주냐(반청=지혜)에 해당한다.

 바실라는 근원의 의식에 관계되는 비로고스적 혹은 초로고스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근원의 의식은 실제의 수행 체험이나 신비 체험이 선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쏟아져 온 것으로, 거기 이외에서는 발출하지 않는다. 수피란 바로 거기에 뿜어져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이즈쓰는 잭 데리다가 로고스 중심주의 세계상을 디컨스트럭션 하려고 하는 시도를 가로로 보면서 거기에 니체나 로데가 지적한 것처럼 고대 그리스에 비로고스적 초로고스적인 사고가 싹트고 있다 일, 또 처음부터 신의 로고스 등을 세우지 않았던 대승불교나 선 등의 예를 끌어오면서, 수피가 가진 신비주의의 독단장을, 할라지를 통해 소개하는 것이다.

 9세기 바그다드에 활약한 할라지는 페르시아에서 태어난 수피로 이단의 죄로 처형됐다. 그 할라지가 ‘나’의 본질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해 남겼다. 신비주의의 체험 속에서는 나의 「아」는 확실히 「나」에 틀림없지만, 그것이 「여의」에 너무 가까이 끌려가고 있기 때문에, 「의의 아」인가 「우의 아」 의지는 모르게 되면.
 이 기묘한 상황은, 수피즘에서는 무나저트(시원한 남녀의 목언)라고도, 때로는 샤타하트(진취 망언)라고도 불리고 있는 것으로, 잘 일어나는 것 같다. 보통 이상한 심경을 나타내는 말이 될 수 있는데, 즉 오르기아 같은 것인데, 이통은 거기에 수피 독특한 다층적 다의성이 출입하고 있다고 간주했다.
 이는 불교에서 말하면 '반야심경'의 '색 즉시공·공 즉시색'과 같은 것으로, '하늘'과 '색'을 나누지 않고 동시에 보고 있다는 것에 해당한다. 한쪽은 「하늘」을 보는 것이 다른 쪽의 「색」을 보게 되어, 「색」을 보면서도 「하늘」을 본다. 그런 식으로 보면 무엇이 좋은가. 뭔가 중요한 것을 알 수 있을까.

 이의 의의를 12세기 수피인 아이누 르 코자트 하마다니가 해명하고 있다고 이즈쓰는 설명한다. 무언가를 아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다의적인 채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하마 다니는 이것을 수피즘 특유의 의미 다층의 구조로 꺼내 이성의 영역에 머무르는 코토바에 대해 이성 건너편의 영역으로 약동하는 코토바야말로 바실라가 암시하는 신비의 다의성을 풀어 라고 풀었던 것이었다.

 하마다니는 이것을 타샤브프라고 명명한 것 같다. 수직으로 흔들리는 부정성, 불안정성, 불결정성, 모호성, 동요성이라는 것 같다.
 나는 편집 공학을 에피크로스의 원자가 세로로 벗어나 낙하해 간다는 발상에 힌트를 얻어 조립 시작했지만, 그것은 슈피에 의해, 또 이즈쓰 토시히코에 의해, 매우 확고한 것으로서 종횡 자유롭게 감지되고 있다 그 때문이다. 그 후 이런 이슬람적인 신비의 다의성은 오히려 다신다불의 일본의 '견해'로야말로 해명하는 것이 재미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즈쓰가 탄탄하는 이슬람 신비가

12세기 전반에 활약한 이란의 신비가 아이누 르 쿠자트 하마다니. 이성적인 지에 의한 학문에 의문을 안고, 아흐마드 가자리에 제자들이. 가자리로부터 신비의 초이성적 영역을 회득한 하마다니는 나중에 독자적인 의견을 주장했다. 그러나 보수적인 정통파 신학자나 법학자들에게 원한 결과, 이라크 셀주크 조재상의 손으로 약간 33세로 이단자로 처형되었다.

수피의 신비 건축 '샤 루크네 아람'

파키스탄 무르탄에 있는 수피의 성인 샤 루크누딘의 영묘(12세기 초). 명칭은 룩누딘의 칭호 '세계의 기둥'을 의미한다. 높이 33미터의 돔의 외벽은 청색 유리를 끼운 상감(조암)으로 장식되어 있다. 무르탄은 많은 수피의 사당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별칭 '성자의 거리'라고도 불린다.

신과의 합일을 목표로 하는 수피즘

수피즘은 순나파 세속에서 벗어나 금욕과 고행을 거듭하는 소수의 운동으로 시작되어 12~13세기 사회적 혼란기에 이슬람 세계의 전역에 퍼졌다. 하나님과 일체가 되는 무아의 황홀을 목표로 하는 수행으로서, 하나님의 이름을 반복적으로 주창 집중하는 '주클'이나 음악에 맞추어 회전을 반복하여 하나님과의 합일을 목표로 하는 '섬머'가 있다.

(도판 구성 : 테라다이라 켄지 · 니시무라 토시카츠 · 야타 히데코 · 이가사 준코 · 마키노 고에 히사 · 우메자와 미츠유 교정 : 야다 히데코 · 이다 마사히코, 키 편집 : 요시무라 아키키)


⊕ 『신비철학』⊕

∈∈서문

∈∈ 제일부 그리스 신비 철학

∈∈ 제1장 소크라테스 이전의 신비철학
∈(1) 디오니소스 신
∈(2) 크세노파네스 Xenophanēs
∈(3) 헤라클레이토스 Hērakleitos
∈(4)

∈∈ 제2장 플라톤의 신비철학
∈(1) 서
∈(2) 동굴의 은유
∈(3) 변증법의 길
∈(4) 아이디어 관조
∈(5) 사랑(에로스)의 길
∈(6) 죽음의 길

∈∈ 제3장 아리스토텔레스의 신비철학 
∈(1) 아리스토텔레스의 신비주의 ∈
(2) 아이디어적 신비주의의 부정

∈∈ 제4장 프로티노스의 신비철학 
∈(1) 프로티노스의 위치 
∈ ( 2) 프로티노스의 존재론체계

∈∈〔부록〕그리스의 자연신비주의――희장철학의 탄생
∈각서
∈제1장 자연신비주의의 주체
∈제2장 자연신비주의적 체험――절대 부정적 긍정
∈제3장
∈제4장 지성의 여명 
∈제5장 허망의 신들 
∈제6장 새 세기――개인적 나의 자각
∈제7장 장 핀다로스의 세계――국민 전통과 신사상 ∈ 제 10장 두 개의 영혼관 ∈제11장

∈∈해설……………나토미 신류

∈∈사람 이름 색인


⊕ 저자 약력 ⊕
이 통 슌히코(이즈츠 토시히코)
1914년, 도쿄 출생. 언어학자, 철학자, 이슬람학자, 동양사상연구자, 신비주의 철학자. 게이오 기학 대학 명예 교수. 문학 박사, 엘라노스 회의 멤버, 일본 학사원 회원. 어학의 천재라고 불리며 대부분의 저작이 영문으로 쓰여져 있다. 아랍어, 페르시아어, 산스크리트어 등의 30개 이상의 언어를 유창하게 조종하여 일본 최초의 '꾸란' 원전역 간행, 그리스 철학, 그리스 신비주의와 언어학 연구 등으로 실적 다수. 이슬람 수피즘, 힌두교의 후지일 원론, 대승불교 및 철학도교의 형이상학과 철학적 지혜, 후기에는 불교사상·노장사상·주자학 등을 시야에 담아 선, 밀교, 힌두교, 도교, , 그리스 철학, 유대교, 스콜라 철학 등을 횡단하는 독자적인 동양 철학의 구축을 시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