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28

이즈쓰 토시히코와 신비주의 - 공空이라는 체험

신비주의와 이즈쓰토시히코 - 안쪽의 길을 찾아

안쪽의 길을 찾아
부처를 찾는 여행


신비주의와 이즈쓰 토시히코
2020/10/25 




내가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말은 일본어밖에 없다. 하지만 세계에는 말의 천재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많다. 그 한 사람이 '꾸란'을 일본어로 번역한 이즈쓰 토시히코라는 사람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철학자이자 종교학자이기도 하다. 30개국어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아주 믿을 수 없는 이야기다.

소문에서는 각국의 대사관원을 집에 불러 가르쳐 주었는데, 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본인은 사람에게 의지해 말을 배운 적은 없다고 말하고 있으므로, 아마 직접 가르쳐 주었을 것 타노는 학생 시절과 아랍어 선생님의 몇 명 정도이고 나머지는 독학일 것이다. 그 저서의 대부분을 영어로 썼기 때문에, 당초는 일본보다 서양에서의 평가가 높았다. 이 점은 스즈키 오오츠키와 비슷하다.

저는 물론 그런 천재가 아니고, 게다가 게으르니까, 모처럼 인도에 있다는데 언제까지나 영어 일상회화조차 만족스럽게 말할 수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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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즈쓰 토시히코가 쓴 많은 책은 전세계 종교의 신비주의를 주제로 하고 있다. 신비주의는 많은 종교에 있으며 이슬람교에서는 주류는 아니지만 수피즘이라는 종파가 그렇다. 인도의 바라몬교에는 그것과는 달리 주류의 하나인 가이일여를 주창한 베단타 학파가 있고, 중국에도 도교라는 이것도 주류의 노장 사상이 있다. 기독교에서는 이 사상은 하나님의 절대성을 침해하는 것으로서 이단 취급되는 것 같지만, 전통적 신학에서도 사람인 그리스도와 하나님은 일체라고 인정하기 때문에, 역시 그것을 안에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있을까.

그럼 불교는 어떨까. 불교는 신비주의?

일반적으로는 밀교가 불교에 있어서의 신비주의라고 말해지겠지만, 이 문제를 논하기 전에 우선 신비주의라는 사상을 명확하게 정의해 두어야 한다. 
광사원에 의하면, “신·절대자·존재 그 자체 등 궁극의 실재에 어떠한 방식으로 귀일융합할 수 있다는 철학·종교상의 입장”이라고 정의되고 있다. 

불교는 일반적으로 그러한 "궁극의 실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이 정의로부터 하면 불교는 신비주의가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대승불교의 기둥 중 하나인 <공>이라는 체험〈空〉という体験은 신비주의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은 일상의 현실을 변용시키는 체험이기 때문이다.

 Kojien 사전의 정의의 실수는, 신비주의의 본질을
  • 궁극의 실재에 귀일융합한다」라고 파악한 점에 있다. 
  • 그것은 "궁극의 체험에 귀일융합하는 것"이라고 정의해야 했다.

이즈쓰 토시히코는 이와나미 신서의 '이슬람 철학의 원상'이라는 책 속에서 
신비주의를 엄밀히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지만, 
통속적인 심령 현상이나 오컬티즘과 구별하기 위해 10 페이지 정도를 나누어 수피즘의 측에서 그것에 대해 면밀히 말하고 있다. 그것을 조금 난폭하게 나 나름대로 요약하면,

1. 소위 현실 또는 현실은 다층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존재세계가 다층적이라는 것은 우리 평소의 경험세계는 현실의 표층밖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그 안에 다른 현실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포착하는 의식도 다층적이며, 현실과 의식의 층은 일대일에 대응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과 의식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2. 그리고 의식과 현실이 다른 것이 아니라 일대일 대응 관계를 가진 하나의 다층/복합적 구조체라면, 우선 의식이 깊은 층을 열지 않으면 현실의 깊은 층도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일상의 의식은 계속 변화하는 일상의 표층적 현실을 쫓는 만큼 바쁘다.

3. 그러므로 그를 위해서는 조직적 방법적인 특별한 수행에 의해 의식의 방식을 바꿔야 한다. 선종의 좌선, 힌두교의 요가, 송대 유자의 조용한 좌, '장자'의 좌망 등, 이들은 모두 세부 사항에서 다르나 그 본질은 모두 의식의 심층을 여는 방법이다. 이러한 방법론을 가지고 있는 종교/철학적 입장을 <신비주의>라고 부른다.


그리고 나는 해석한다. 그렇다면, 대승불교의 근본인 <공>도 大乗仏教の根本である〈空〉も보다 깊은 체험으로서의 의식의 변경이기 때문에, 불교의 본질도 이즈쓰토시히코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신비주의의 하나인 것은 분명할 것이다.

하지만 대승불교에서는 일반적으로 공이라는 체험 空という体験을 체계화해 말하지는 않는다. 특히 선종에서는 “공은 언어화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직접 체험할 수 밖에 방법은 없다”고 한다. 원래 용수도 <공>이라는 개념을 일정한 범주를 가진 <진리>로 적극적으로 주장한 것은 아니고, 절대적 진리가 실재한다고 주장하는 타학파를 논박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사용하고, 그 과정에서 임시 소메의 존재를 의미로서 고정화해 버리는 말도 부정했기 때문에, 그 해석도 말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선종이 주장하는 그 사고방식으로는, 하늘과 인기는 어디까지나 다른 것이 되어 버려 정말로 하나의 것이 될 수 없다, 라고 생각하고 있다. 용수가 『중론』을 말로 쓴 것처럼, 나도 하<공>을 언어화해 보고 싶다.私も空を言語化してみた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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では仏教はどうだろう。仏教は神秘主義か。

一般的には、密教が仏教における神秘主義だと言われるだろうけど、この問題を論じる前にまず神秘主義という思想を明確に定義しておかなくてはいけない。広辞苑によれば、「神・絶対者・存在そのものなど究極の実在になんらかの仕方で帰一融合できるという哲学・宗教上の立場」と定義されている。仏教は一般にそのような「究極の実在」を認めないので、この定義からすれば仏教は神秘主義ではないと言われるだろう。でもはたしてそうだろうか。私はそうは思わない。大乗仏教の柱の一つである〈空〉という体験は神秘主義だと私は考えている。なぜなら、空は日常の現実を変容させる体験であるからだ。広辞苑の定義の間違いは、神秘主義の本質を「究極の実在に帰一融合する」と捉えた点にある。それは「究極の体験に帰一融合すること」と定義しなければいけなかった。

井筒俊彦は岩波新書の『イスラーム哲学の原像』という本の中で、神秘主義を厳密に定義することは不可能だと言っているけど、通俗的な心霊現象やオカルティズムと区別するために10ページくらいを割いてスーフィズムの側からそれについて綿密に述べている。それを少し乱暴に私なりに要約すると、



1.いわゆる現実、あるいはリアリティは多層的構造を持っている。存在世界が多層的であるということは、私たちの普段の経験世界は現実の表層にしか過ぎないのであって、その奥に別の現実が潜んでいる、ということだ。そしてそれを捉える意識もまた多層的であり、現実と意識の層は1対1に対応している。とは言え、現実と意識は別なものではない。

2.そして意識と現実とが別のものではなく、1対1の対応関係を持つ1つの多層/複合的構造体であるなら、まず意識の深い層を開かなければ現実の深い層も現れない。でも日常の意識は変化し続ける日常の表層的現実を追いかけるだけに忙しい。

3.なのでそのためには、組織的方法的な特別な修行によって意識のあり方を変えなくてはいけない。禅宗の座禅、ヒンドゥー教のヨーガ、宋代儒者の静坐、『荘子』の坐忘など、これらは皆細部において違っているだけで、その本質はすべて意識の深層を開くための方法である。そしてこのような方法論を持っている宗教/哲学的立場を〈神秘主義〉と呼ぶ。



と私は解釈する。そうであるなら、大乗仏教の根本である〈空〉もまた、より深い体験としての意識の改変のことなのだから、仏教の本質も井筒俊彦の言う意味での神秘主義の一つであることは明らかだろう。

でも大乗仏教では一般的に、空という体験を体系化して述べることはしない。特に禅宗では「空は言語化できないのでそれを直接体験するしか方法はない」としている。もともと、龍樹も空という概念を一定のカテゴリーを持った〈真理〉として積極的に主張したわけではなく、絶対的真理が実在すると主張する他学派を論駁するための方法論として使い、その過程で仮そめの存在を意味として固定化してしまう言葉も否定したので、その解釈もいわれのないものではない。でも禅宗が主張するその考え方では私は、空と縁起はあくまでも違ったものになってしまいほんとうに一つのものにすることはできない、だろうと思っている。龍樹が『中論』を言葉で書いたように、私も空を言語化してみた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