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변화 시대 인간의 위상 – 다른백년
조성환의 [K-사상사]
기후변화 시대 인간의 위상조성환 2022.07.29 0 COMMENTS
“지구민주주의는 생태학적 관점에서 지구 가족의 일원이고, 우리가 동물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 (Vandana Shiva, “Earth Democracy : Sustainability, Justice, and Peace” (2019)
벌레가 사람을 먹는다
서래 : 개미가 사람을 먹어요?
해준 : 맨 먼저 똥파리가 나타나요. 낮이건 밤이건 10분 안에 도착해요. 피와 분비물을 먹은 다음에 상처나 인체의 모든 구멍에 알을 낳아요. 거기서 구더기가 나오면 그걸 먹으려고 개미가 모이죠. 그 다음에 딱정벌레하고 말벌들…. 그것들이 사람을 나눠 먹습니다.
최근에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 <헤어질 결심>에 나오는 대사이다. 형사 해준(박해일)의 집을 방문한 피의자 서래(탕웨이)는 벽에 붙어있는 수많은 시체 사진들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이 사진들은 해준이 아직 해결하지 못한 ‘미결’ 사건들의 목록이다. 그 수많은 미결 사진 들 중에서도 특히 서래의 시선을 끈 것은 <죽은 시체의 눈동자 위에 개미들이 기어다니는 장면> 이었다. 그것을 보고 기이하게 생각한 서래의 물음에 해준이 친절하게 답하는 장면이다.
이 대사가 왜 들어갔는지는 잘 모르겠다. 영화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분석하는 설명도 아직 보지 못했다. 다만 지구학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핵심적인 문제를 건드리고 있다. 비록 시체이기는 하지만, 인간이 다른 종(種)의 먹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기 때문이다. 이 단순한 사실은 유학을 지구학적 차원으로 ‘경장(更張)’하려고 할 때에, 더 나아가서는 현대 한국철학을 정립하려고 한다면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 왜냐하면 유학의 핵심은 인간에 대한 정의이고, 그것도 동물과 구분되는 인간만의 특징을 인(仁)이라는 정서로 추출해낸 것인데, 그 인(仁)이 놓치고 있는 인간의 위상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플럼우드의 붕괴의 체험
최근에 나는 <헤어질 결심>의 이 장면과 비슷한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그것은 1년 전에 어느 학술대회에서 의뢰받은 발표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그 학술대회는 2021년 11월 18일에 서강대학교 신학연구소 주최로 기획된 <성 이냐시오 회심 500주년 기념 학술대회>였다. 가톨릭 대학으로서는 대단히 의미있는 행사였다. 게다가 대회 주제는 <지구위기와 대전환>이다. 실로 지구인문학을 테마로 한 학술행사가 모교에서 열리는 것이다. 나로서는 설레지 않을 수 없는 무대였다. 그러니만큼 무엇을 얘기할까 고민이 많이 됐다.
마침 동료연구자인 허남진 박사가 옆에 있어 자문을 구했더니, 대뜸 호주출신의 철학자 발 플럼우드(Val Plumwood, 1939~2008)의 논문을 추천해 주었다. 그것은 「인간의 연약함과 먹이가 된 경험(Human Vulnerability and the Experience of Being Prey)」(1995)이라는 글이었다. 이 짧은 논문에서 플럼우드는 자신이 10년 전에(1985) ‘악어의 먹이’가 될 뻔한 경험을 소개하고 있었다. 더 놀라운 점은 그 때 깨달았던 철학적 통찰을 지구학적 차원에서 풀어내고 있었다. 사진 출처: 서강대학교 신학연구소 홈페이지
악어의 먹이가 되다
플럼우드의 체험은 유정연이 2015년에 쓴 「악어의 먹이」(『맘울림』 38호)에 한글로 번역되어 있다. 그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악어가 (내가 타고 있던) 카누를 공격해서 크게 요동칠 때 완전 무방비 상태였다. (…) 나는 필사적으로 노를 저었지만 공격은 계속되었다. (…) 처음부터 그 녀석은 나를 먹이로만 보고 다가 온 것이다. (…) 그(=악어의) 아름다운 반점이 찍혀 있는 금빛 눈이 곧장 나를 쏘아봤다. (…) 황금빛 눈이 홍미롭다는 듯이 번득였다. (…) 물속에서 솟아나온 악어의 날카로운 이빨에 정신이 나가버릴 것만 같았다. 그때 악어는 붉고 뜨거운 다리들로 내 몸을 잡아채서,질식할 듯 축축한 암흑 속으로 휘몰아 끌어당겼다. (…)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악어의 공격이) 갑자기 멈췄다. 내 발이 강바닥에 닿았고, 수면 위로 머리가 떠올라 기침이 터져 나왔다. 나는 숨을 빨아들였고 놀랍게도 살아 있었다. (…) 왼쪽 허벅지가 뜯겨져 지방과 힘줄과 근육들이 보였고 온몸이 아프고 무감각했다.
-발 플럼우드・유정연, 「악어의 먹이」, 75-79쪽.
이 글을 읽는 순간 나는 19세기 동학사상가 해월 최시형의 “하늘이 하늘을 먹는다(以天食天)”는 설법이 떠올랐다(『해월신사법설』「以天食天). 최상위 포식자인 인간도 동물의 먹이가 될 수 있다는 플럼우드의 통찰은, “하늘이 하늘을 먹는다”는 최시형의 설법을 새롭게 읽을 수 있는 시점을 제시해 줬기 때문이다. 즉 “인간이 동물을 먹는다”는 통상적인 해석을 넘어서 “동물도 인간을 먹는다”는 뜻으로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최시형이 다른 곳에서 말한 “전체의 이치[全的理諦]”(『해월신사법설』「三敬」) 개념은, 실로 이러한 먹고 먹힘의 관계가 살생이나 죽임이 아니라 자연 전체의 이치임을 설파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래서 나는 허남진 박사에게 공동 발표를 제안했다. 허박사는 플럼우드 쪽을, 나는 동학 쪽을 맡자고 한 것이다. 그래서 나온 원고가 「먹음/먹힘의 지구학적 의미: 동학의 식천(食天)사상과 그리스도교의 성찬의례를 중심으로」였다. 아직 정식으로 발표는 하지는 못했지만, 조만간 논문으로 완성할 예정이다(이하의 플럼우드 논의는 이 때의 발표문에 기초하고 있다).
악어의 <눈>으로 보다
플럼우드가 남다른 점은 자신의 체험을 개인적 차원에 한정시키지 않고, ‘인간’이라고 하는 거시적 지평 위에서 철학적으로, 종교적으로, 그리고 지구학적으로 분석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음식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근본적으로 수정하자. 우리 자신을 타자들을 위한 음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자신을 생태적 관점에서 다시 상상하고, 다른 동물들과의 연대를 확인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다.
– Val Plumwood, The Eye of the Crocodile, 2012, p.18.
여기에서 플럼우드는 인간에 대한 이해는 “최상위 포식자”에서 “타자의 음식”으로 바꿀 것을 제안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생태적 관점’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울러 그런 관점에서 인간을 바라볼 때 다른 존재와의 연대가 가능해진다고 말한다. 이것은 철학적으로 말하면, 생태 위기에 대한 <인식론적 처방>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우선 플럼우드가 악어와의 조우를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이동했다는 사실이다. 즉 종래에는 인간만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다가, 이제는 인간 이외의 존재(nonhuman)의 관점에서 인간을 상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일종의 포스트휴먼적 관점에서 본 인간관이다. 그리고 나서 내린 결론은 “인간도 먹이가 될 수 있다”는 새로운 인간관이었다.
이것은 마치 서두에서 소개한 <헤어질 결심>에서 서래가 시체의 사진을 보고 “개미가 사람을 먹나요?”라고 물었던 장면을 연상시킨다. 이 사진을 보았을 때 서래는 ‘개미’의 관점에서 인간을 보는 시점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시점은 “파리, 개미, 떡정벌레, 말벌이 시체를 나누어 먹는다”는 해준의 설명을 듣고 보다 선명해졌을 것이다.
관점의 이동
이와 같은 관점의 이동에 대한 강조는 이미 『장자(莊子)』에서부터 나오고 있었다. 시카고대학의 비교철학자 브룩 지포린(Brook Ziporyn)은 『장자』에 나오는 “대붕의 소요”를 관점의 이동으로 해석한 적이 있다. 즉 바다 속의 물고기 곤(鯤)이 하늘을 나는 붕(鵬)으로 변신하는 장면은 ‘관점의 이동’을 우화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거대한 새 붕(鵬)은 거대한 물고기 곤(鯤)이 변화한 것이다. 이것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반대편의 관점을 대표한다. 이것이야말로 장자에게는 문제의 핵심이다. 즉 관점이 다른 관점으로 이동하는 방식이다.
But this bird is actually a transformation of the enormous fish, kun, which represents the most antithetical perspective imaginabl . And this, for Zhuangzi, is the heart of the matter: the way perspectives transform into other perspectives. (https://hackettpublishing.com/zhuangziphil)
가장 최상위 포식자인 인간이 가장 연약한 생물인 개미의 먹이가 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요즘과 같이 바이러스가 인간을 공격하는 팬데믹 상황이라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지만 – .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바이러스의 관점에서 인간을 바라보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개미의 관점에서 인간을 생각하지 않는다. 지포린 교수의 해석을 빌리면, 시체의 사진은 우리에게 정 반대편에 서 있는 개미의 관점에서 우리를 바라볼 것을 촉구하고 있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인간이 아닌 ‘자연’의 시선에서 인간을 보는 것이다.
지포린 교수의 해석에 의하면, 장자가 지향하는 최고의 인간(至人)은 관점을 ‘자유자재로’(=소요) 전환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것의 구체적인 사례로 『장자』의 「제물론(齊物論)」에 나오는 ‘조삼모사(朝三暮四)’ 이야기를 들고 있다. 원숭이 조련사가 원숭이의 입장에서 조련 방법을 바꾸었다는 얘기다. 최근에 서양에서 나오는 인류학적 성과는 이러한 제안이 추상적인 허언(虛言)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에두아르도 콘의 『숲은 생각한다』(2013)는 ‘재규어’의 관점에서 인간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장자(莊子)는 관점의 이동이 자유로우려면 어느 하나의 관점에 고착되어(fixed) 있으면 안 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하나의 관점에 고착되어 있는 상태를 ‘성심(成心)’이라고 하였다(「제물론」). 반대로 성심에 사로잡혀 있지 않은 상태를 장자철학에서는 ‘허심(虛心)’이라고 개념화할 수 있다. 허심은 “아무런 관점이 없다”는 뜻이라기 보다는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관점을 이동할 수 있는 ‘시선의 유연성’이 확보된 상태를 말한다.
장자의 입장을 플럼우드나 에두아르드 콘과 연결시켜 해석해 보면, 생태 위기는 인간이 그동안 인간만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 원인이었다고 진단할 수 있다. 즉 오랫동안 문명의 편의에 익숙해 있던 인간이 자연의 관점을 망각했기 때문에 생긴 결과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아렌트 식으로 말하면, 자신의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인간예외주의
플럼우드는 인간이 자연의 관점에서 바라보지 못하는 원인을 ‘인간예외주의(human exceptionalism)’에서 찾았다. ‘인간예외주의’란 지구상에서 인간만이 예외적인 존재라는 뜻이다. 마치 유학에서 인간은 동물과 달리 인(仁)이 발현될 수 있다고 주장하듯이, 서구 문명도 인간을 자연과 구별짓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는 것이 인간예외주의에 담긴 함축이다.
죽음과의 두 차례의 대면은 나로 하여금 서구의 일반적인 죽음의 서사 방식에 강력하게 불만을 품게 만들었다. 하나는 그리스도교의 일신론 전통이고, 다른 하나는 근대의 무신론 전통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두 전통은 모두 환경위기를 가속화시키는 ‘인간예외주의’와 초분리주의를 계승하고 있다.
Two encounters with death led to my becoming radically dissatisfied with the usual western selection of death narratives – both Christian-monotheist and modernist-atheist. I think both major traditions inherit the human exceptionalism and hyper-separation that propels the environmental crisis.
– Val Plumwoon, “Tasteless: Towards a Food-based Approach to Death” (2008)
여기에서 플럼우드는 생태위기를 초래한 철학적 원인을 인간예외주의와 초분리주의에서 찾고 있다. 즉 인간과 자연을 분리시키고(separate), 인간을 비인간(nonhuman)과는 다른 예외적(exceptional) 존재로 본 것이 문제였다는 것이다. 나아가서 이러한 사고는 서양의 그리스도교 전통과 근대 계몽주의의 죽음 이해에 반영되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리스도교 전통과 근대 과학기술
참고로 서구 근대적 사고가 생태 위기의 원인이라는 플럼우드의 진단은 일찍이 한나 아렌트가 1958년에 지적한 바가 있다.
인공세계의 창조자인 제작인은 언제나 자연의 파괴자였다…. 신이 창조한 자연을 파괴함으로써만 인위적 세계는 건설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진우・태정호 옮김, 『인간의 조건』, 2013, 197쪽)
인간이 도구를 만들고 기술을 창조할 수 있는 것은 인간만의 특권이자 탁월성이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인간의 조건’으로서의 자연에 대한 파괴를 동반한다는 것이 아렌트의 생각이다. 왜냐하면 아렌트가 말하는 인공세계는, 자연에 ‘포함’되는 세계가 아니라, 말 그대로 자연과는 별도로 인위적으로 구축된 세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로부터 유를 창조할 수는 없듯이, ‘인공’을 만들려면 필연적으로 ‘자연’을 재료로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화석 연료가 없으면 전기를 쓸 수 없듯이 말이다. 그래서 인공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자연은 줄어들기 마련이다.
한편 그리스도교의 인간관이 생태 위기를 초래했다는 비판은 일찍이 역사학자 린 화이트(Lynn White)가 1967년에 지적한 바 있다.
하나님은 인간을 이롭게 하고 인간이 다른 피조물을 지배하도록 하기 위해 이 모든 것을 계획했다. (…) 기독교는 인간과 자연의 이원론을 확립했을 뿐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자연을 착취하는 것은 신의 뜻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 린 화이트 지음, 이유선 옮김, 「생태계 위기의 역사적 기원(The Historical Roots of Our Ecologic Crisis)」, 『계간 과학사상』 창간호, 1990년 봄, 290쪽.
린 화이트가 보기에는, 그리스도교의 성경에 나타난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서로 먹고 먹히는 상호적 관계가 아니라, 이원론적으로 단절되어 있고, 게다가 자연은 인간의 목적을 위한 수단적 존재로 간주되고 있다. 이러한 진단은 생태 위기를 서양의 과학기술이 아니라 종교전통에서 찾고 있다는 점에서 당시로서는 새롭고 파격적인 지적이었다. 추측컨대 이 논문은 서구 사회에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을 것이다.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어떻게 다시 설정할 것인가?” “성경에 나타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어떻게 재해석할 것인가?” 등의 물음이 대두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런 물음에 대한 학문적 응답이 ‘생태신학’의 등장이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한나 아렌트와 린 화이트는 서양의 대표적인 두 전통, 즉 그리스도교와 그 토대 위에 성립한 근대 문화가 생태 위기를 초래하였다고 보고 있다. 이로부터 생태 위기에 대한 플럼우드의 진단도 기본적으로 이들의 관점 위에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두 전통을 ‘인간예외주의’라는 개념으로 담아낸 것이다. 인간예외주의는 인간이 가장 높은 곳에 서서 인간 이외의 존재를 내려다 보는 인간중심적인 시선을 고착화시켰을 것이다.
인간은 피식자(被食者)가 될 수 없는가?
그렇다면 이러한 인간예외주의는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이 글의 주제인 먹이나 죽음과 관련된 사례로는 무엇이 있을까? 플럼우드는 그것을 서양의 장례 문화에서 찾고 있다.
나는 서구의 인간 우월주의 문화가 인간을 동물과 동일한 먹이사슬에 두는 것을 강하게 부정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 자신이 다른 동물을 위한 먹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인간의 죽음과 장례 풍습에 많이 나타나 있다. 관례상 튼튼한 관은 토양 동물들이 활동하는 표층보다 한참 아래에 묻었고, 무덤을 덮은 석판은 다른 동물들이 시신을 파내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서구인이 시신을 다른 동물 종들의 먹이가 되지 않도록 지키는 방식이다. (…) 인간이 먹이 사슬 밖과 그 너머에 있다는 사실은, 인간을 상호의존하는 먹이사슬의 일부가 아니라 그 사슬의 주인이자 외부 조정자로 보게 한다. 동물들은 인간의 먹이가 될 수 있지만, 우리 인간은 결코 동물들의 먹이가 될 수 없다.
– 발 플럼우드・유정연, 「악어의 먹이」, 82쪽.
여기에서 플럼우드는 석판 무덤의 풍습은 “서로 먹고 먹히는” 자연의 이치로부터 인간을 제외시키려는 문화를 대변한다고 분석하고 있다. 거기에는 인간은 결코 동물의 먹이가 될 수 없다는, 아니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인간예외주의’적 사고가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에서는 타자의 관점에서 인간을 바라보는 시점은 나오기 어렵다. 뿐만 아니라 거기에는, 한나 아렌트의 표현을 빌리면, “인간이 구축한 인공세계”에서만 살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 돌로 만든 관 자체가 인간과 자연을 분리시키려는 인공적 환경이기 때문이다. (“인공세계를 가진다는 점에서 인간 실존은 모든 동물의 환경과 구별된다.” 이진우・태정호 옮김, 『인간의 조건』, 2013, 51쪽)
비인간의 눈으로 보는 인간
만약에 우리가 플럼우드의 비판을 받아들인다면, 그리고 한나 아렌트나 린 화이트의 지적에 공감한다면, 우리는 인간관을 재조정할 필요를 느낄 것이다. 즉 종래에 인간과 비인간(nonhuman)의 차이를 강조했던 인간관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것과는 정반대의 시점, 즉 인간과 비인간이 겹치는 부분에도 눈을 돌릴 수 있는 관점의 이동이 요구된다. 생태철학자 티모시 모튼(Timothy Morton)이 『생태적 사고(The Ecological Thought』(2010)에서 갈파했듯이, “생태적 사고란 상호연관과 관련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을 비인간과의 상호연관 속에서 재정의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인간 이외의 존재와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이말로 생태적 세계를 구축하는 첫 걸음이 될 것이다.
가령 유학의 예를 들면, “측은히 여기는 마음, 남을 사랑하는 마음”을 유학에서는 인(仁)이라고 하고, 그 마음은 인간만이 발현될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인(仁)은 인간의 본질이 된다. 그런데 이 정의에는 인간이 비인간의 먹이가 될 수 있다는 가장 기본적인 자연의 원리는 빠져 있다. 인관과 비인간의 수많은 유사점은 배제하고, 단 하나의 차이만 부각시켜서 인간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본래 ‘정의(定義)한다’는 행위 자체가 이러하다. A와 A 아닌 것을 구별하기 위한 것이 정의(definition)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 A와 A 아닌 것의 공통 토대는 버려지게 된다. 차이만 부각되기 때문이다. 마치 서구중심주의자들이 자유나 합리성을 근대적 가치로 규정하고, 그것이 ‘유럽에만’ 있다고 논리를 전개했듯이 말이다. 이 경우에 유럽과 비유럽의 공통점은 간과되고, 그 사이에는 <위계>가 성립하게 된다. 한나 아렌트나 린 화이트가 서구 전통에서 인간과 자연의 위계가 성립하고 있음을 간파했듯이, 근대 유럽은 그것을 서구와 비서구에 그대로 적용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유학에서는 인간과 비인간의 <위계>를 ‘윤리성’을 기준으로 설정하였다. 그러나 전통적 개념에서 ‘윤리倫理와 ‘도덕道德’는 구분된다. 도덕은 윤리와 달리 ‘천지도덕’, 즉 최시형의 표현을 빌리면 ‘전체의 이치(全的理諦)’의 차원에서 인간을 바라보는 입장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장철학적으로 말하면 ‘도덕성’의 차원에서는 인간과 자연의 구분은 희미해진다. 그것을 나타내는 개념이 무위(無爲)와 자연(自然)이다.
인류세 시대 인간의 정의
인간을 비인간의 관점에서 다시 보고자 할 때, 그리고 그러한 관점에서 인간을 새롭게 정의하고자 할 때, 참고가 되는 것은 <생명평화무늬>이다. 사진출처: https://ggc.ggcf.kr/p/5f4910f30c724d41309124b9
생명평화무늬는 지리산살리기운동을 주도한 한살림의 이병철 선생이 2003년에 한글디자이너 안상수 선생에게 부탁하여 탄생한 ‘멋지음(design)’이다. 이 상징의 의미에 대해 멋짓는 사람 안상수 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심볼 가운데를 중심으로 오른쪽은 네발 달린 생명이고 아래는 사람이고 왼쪽은 물에 사는 생명입니다. 이 물고기 모양은 하늘에 사는 생명인 새의 몸뚱이가 됩니다. 해와 달은 생명의 우주적 속성을 그린 겁니다. 생명은 하나로 이어져 있는 한 몸입니다. 우주생명의 유기적인 전일성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돼지가 아프면 사람도 아프게 되고, 물이 오염되어 물고기가 죽으면 사람도 죽고, 닭이 폐사되면 사람에게도 영향이 있다는 겁니다. 사람 생명은 다른 생명의 희생 속에서 생명을 유지해 나가지요. 그러니까 다른 생명 속에 우리의 생명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무늬 가운데 위는 푸나무인데, 사람은 모두 풀의 열매, 풀잎, 풀뿌리, 풀 줄기를 먹고 살고 있습니다. 사람은 맨 위에 있는 만물의 영장이 아니라, 맨 아래에서 다른 생명을 모시는 존재라는 겁니다. 이것이 우주가 보내는 신호입니다. 이 메시지를 받아서 잘 따라가는 것이 평화입니다.
– 안상수, 「개벽과 디자인」『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86, 2020년 12월, 506쪽.
이 무늬에는 인간이 다른 존재와 단절되어 있는 예외적 존재가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심지어는 그들의 도움을 받아서, 즉 그들을 먹음으로써 살아가고 있다는 “먹고 먹힘”의 관계가 잘 표현되어 있다. 인간의 머리가 중심에 위치해 있지만 그것은 다른 존재보다 우월함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역으로 모든 존재가 상호 의존 관계에 있다는 <공통의> 사실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흰색으로 텅 비어 있다. 노장철학적으로 말하면 ‘허심’의 상태인 것이다. 그 허심의 상태에서 관점이 인간 이외의 존재로 향하고 있다. 그래서 비인간 존재와의 연결과 연대가 가능해진다.
「천명도」 안의 「생평도」
바로 이런 점이 「천명도」와 「생평도」(=생명평화무늬)의 차이이다. 똑같이 인간이 중심에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천명도」에서는 인간이 만물의 영장으로 설정되고 있지만, 「생평도」에서는 인간을 중심으로 만물과의 연결이 강조되고 있다. 그렇다면 「천명도」 안에 「생평도」를 집어넣으면 어떨까? 그렇게 되면 천지와 대기 안에 인간과 만물이 연대하고 있는 그림이 될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인류세 시대의 인간의 위상, 인(仁)의 정의는 이런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원래 인(仁)의 반대인 불인(不仁)은 ‘무감각’, ‘마비’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인(仁)은 ‘생명의 얽힘에 대한 자각’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 자각이 생겼을 때 비로소 비인간 존재에 대한 ‘존중(敬)’의 마음이 생기게 되지 않을까?
이것을 플럼우드는 식사할 때에 갖추는 피식자(皮食者)에 대해 예의(禮)로 예를 들고 있다.
복잡한 인간 존재가 고기 덩어리에 불과하다는 것은 충격적인 몰락이었다. 나는 인간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음식 이상의 존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우리는 먹힐 수 있지만 먹히는 존재 이상이다. 예의 바르고 생태적인 식사는 이 두 가지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 발 플럼우드・유정연, 「악어의 먹이」, 83쪽.
동학적으로 말하면 “식천(食天)의 행위를 할 때 식고(食告)의 예를 갖추라”는 말이 될 것이다. 결국 ‘먹는’ 행위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고 있다. “먹어야 살고 죽으면 먹힌다!” 플럼우드의 인간관은 이 단순한 진리에서 출발한다. 맹자와 논쟁한 고자(告子)의 표현을 빌리면, ‘식색(食色)’은 인간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먹느냐, 또는 먹이를 <어떻게> 대하느냐로 인간과 비인간이 나뉜다는 것이 플럼우드와 동학의 생각이다. 식탁의 음식을 단순한 고기로 볼 것인가? 아니면 하늘로 볼 것인가? 이와 같은 응물(應物)의 태도에 의해 인간의 인간다움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유학적으로 말하면 “과연 ‘음식’에 대해서도 사단의 감정이 발현될 수 있느냐?” 라고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자신도 먹힐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사양지심(생명의 양보)의 발현이 될 것이고, 반대로 자신이 먹는 존재에 대해 느끼는 감사의 마음은 측은지심(천지은혜)의 발로에 해당할 것이다. 그리고 얼마만큼 먹을 것인가를 판단하는 것은 시비지심(지구적 정의)의 발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지구적 차원에서 사단이 발현될 때 비로소 지구의 생명평화가 유지된다는 것이 「생명평화도」와 플럼우드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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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의 바다 공동체
조성환
원광대학교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HK교수. '다시개벽' 편집인. 지구지역학 연구자. 서강대와 와세다대학에서 동양철학을 공부하였고,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에서 '한국 근대의 탄생'과 '개벽파선언'(이병한과 공저), '하늘을 그리는 사람들'을 저술하였다. 20∼30대에는 노장사상에 끌려 중국철학을 공부하였고, 40대부터는 한국학에 눈을 떠 동학과 개벽사상을 연구하였다. 최근에는 1990년대부터 서양에서 대두되기 시작한 ‘지구인문학’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일관된 문제의식은 ‘근대성’이다. 그것도 서구적 근대성이 아닌 비서구적 근대성이다. 동학과 개벽은 한국적 근대성에 대한 관심의 일환이고, 지구인문학은 ‘근대성에서 지구성으로’의 전환을 고민하고 있다. 양자를 아우르는 개념으로 ‘지구지역학’을 사용하고 있다. 동학이라는 한국학은 좁게는 지역학, 넓게는 지구학이라는 두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심을 바탕으로 장차 개화학과 개벽학이 어우러진 한국 근대사상사를 재구성하고, 토착적 근대와 지구인문학을 주제로 하는 총서를 기획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