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공(空)사상과 노자사상의 비교 / 이병욱
기자명 이병욱 입력 2008.07.15
이병욱 lbw33@hanmail.net
1. 서론
세계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서로 가까이 있는 두 나라 사이에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는 드문 것 같다. 차라리 거리가 먼 나라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지만, 가까이 있는 나라와는 감정의 골이 깊은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일본에 대해 국민감정이 좋지 않다. 서양인의 눈으로 보자면, 우리나라나 일본은 동아시아 문화에 속해 있고 상당부분에서 공통점도 있건만, 그러나 우리나라와 일본은 좋게 말해서 가깝고도 먼 사이이고, 달리 말하자면 견원지간(犬猿之間)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일상사에서도 발견된다. 이해관계도 없고 서로 만날 일도 없는 사람과는 원수 맺을 일도 없다. 그에 비해 자주 만나는 사람과는 친해질 수도 있지만 그로 인해 오히려 다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험악한 관계가 되기도 한다. 이처럼 가깝고도 먼 사이는 철학이나 사상분야에서도 적용된다. 불교와 노자사상은 동양사상으로서 서로 닮은 점이 많다. 그래서 중국철학의 흐름에서 보자면 노자를 포함한 노장(老莊)사상과 불교사상이 동일하다고 말하는 주장도 적지 않게 있지만, 그에 비해 상대편의 사상에 대해 서로 비판한 일도 적지 않다.
나는 이렇게 서로 공격을 했다는 점이 불교와 노자사상이 서로 다르다는 증거가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와 일본이 동아시아문화에 속해 있고 그에 따라 서로 공통점이 많이 있는데도 서로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은 것처럼, 불교와 노자사상도 공통점이 많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관계에서는 차이점이 부각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불교와 노자사상이 공통점은 무엇이고, 어떤 점에서 차이가 있는지 검토하고자 한다. 이 분야의 선행연구가 상당히 있지만 자세한 소개는 생략하고, 다만 필자의 견해를 중심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2. 불교의 공(空)사상
불교사상의 흐름은 커다란 물줄기에 비유할 수 있다. 인도불교의 흐름은 크게 4단계로 나누어서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초기불교, 부파불교, 대승불교, 밀교로 나누어진다. 그 가운데 부파불교에 속하는 상좌부가 동남아시아로 전해져서 동남아시아 불교의 중심이 되었고, 대승불교는 중국문화권에 전해져서 중국, 한국, 일본, 베트남에서 꽃을 피웠다. 밀교는 티베트에 전해졌다. 현재 서구에서는 이 3가지의 불교가 서로 경합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불교의 전개과정은 복잡하기 때문에 어느 한 부분을 잡아서 불교를 대표한다고 하기 어렵다. 하지만 노자와 불교를 비교하기 위해서는 중국문화권에 속하는 대승불교와 비교하는 것이 더 편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대승불교라고 해도 그 경전이 많다. 어떤 경전을 기준으로 해서 노자와 비교할 것인지 문제가 된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대승불교의 공(空)사상을 대표할 수 있고, 노자사상과 친연성이 있는 《금강경(金剛經)》과 《반야심경(般若心經)》을 선택해서 검토하고자 한다.
1) 공(空)사상의 대한 설명
바둑을 둘 때 옆에서 훈수를 두면 그 때는 자신의 실력보다 더 수가 잘 보인다고 한다. 그 이유는 아마도 이기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승부에 대한 욕심이 없으므로 평소보다 수가 더 잘 보이는 것이다. 이는 불교의 공(空)사상에도 적용할 수 있다. 공(空)은 집착의 마음을 비우고 본래의 청정한 마음을 되찾는 것이고, 그 마음상태에서 윤리적 행위를 한다면, 헤아릴 수 없는 복덕(福德)을 받을 수 있다. 여기서는 공(空)사상에 대해 3단락을 나누어서 접근하고자 한다.
(1) 공(空)의 의미
공(空)은 이 세상 모든 것이 집착할 만한 것이 아님을 꿰뚫어 보았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점을 《반야심경》에서는 관자재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5온(五蘊)이 모두 공(空)한 것을 비추어 보고 모든 재앙을 건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는 《반야심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5온은 다섯 가지 쌓임이라는 의미이고, 5온은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서 5온은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이다. ‘색’은 물질과 육체를 가리키는 것이고, 수·상·행·식은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 4가지를 더 자세히 구분하면, 수(受)는 고통과 즐거움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작용이고, 상(想)은 사물의 이미지를 받아들여 그것이 무엇인지 판단하는 기능이며, 행(行)은 마음이 가는 길이라는 의미로서 의지작용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식(識)은 수·상·행의 기초가 되어주는 마음작용이다. 다시 말하면, 수·상·행이 일어날 수 있도록 근거가 되어주는 마음의 터전이 식(識)이다. 따라서 5온이 공(空)하다는 것은 세상만물과 우리의 몸과 마음이 집착할 만한 것이 아님을 직관(直觀)하였다는 의미이다.
(2) 중도(中道)로 표현된 공(空)
앞에서 말한 공(空)은 중도(中道)로 표현할 수 있다. 이 중도는 일반적으로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非有非無〕라고 표현되는데, 《반야심경》에서는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며〔不生不滅〕,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不垢不淨〕,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다〔不增不減〕라고 한다. 이 표현이 의미하는 바는 공(空)이란 모든 개념과 분별을 넘어서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 모든 판단을 단순화하면, ~이다·~아니다라고 할 수 있고 공(空)은 이 두 가지를 넘어선다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중도로 표현된 공(空)은 모든 개념과 분별을 넘어선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경지에서 보자면, 불교에 집착해서도 곤란하다. 물론 처음에는 불교의 가르침에 충실히 따라야 하겠지만, 불교의 깨달음을 얻기 위한 마지막 단계에서는 불교의 가르침조차 집착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것도 부처님의 경지에서 보자면 어쨌든 분별이고 집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반야심경》에서는 초기불교의 기본적 개념인 5온·12처(十二處)·18계(十八界)·12연기(十二緣起)·사성제(四聖諦)·성인(聖人)의 지혜도 부정된다. 그리고 부정하는 이유는 이러한 개념이 의미가 없어서가 아니고, 불교의 가르침에 충실히 따르다 보면 마지막에는 불교의 가르침도 넘어서야 하기 때문이다.
(3) 공(空)의 다른 표현: 청정한 마음을 일으키는 도리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공(空)사상은 《금강경》에서는 청정한 마음을 낸다는 것으로 바뀌어서 표현된다. 여기서 말하는 ‘청정한 마음’이란 빛깔〔色〕에 집착해서 생겨난 마음도 아니고, 소리·향기·맛·촉각·법(法: 관념의 대상)에 집착해서 생겨난 마음도 아니다.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고 생겨난 마음이 바로 청정한 마음이고 이것이 바로 공(空)이다. 그리고 이러한 청정한 마음을 얻었을 때, 언어에 대한 집착이 사라진다.
일반적으로 범부는 언어와 실제가 서로 대응한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의자’ 같은 단어는 언어와 그 실제가 일치한다. 그러나 ‘황금의 산’이란 말은 개념으로는 존재하지만, 그 개념에 상응하는 실제의 사물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범부는 ‘황금의 산’이란 말을 들으면, 그 말에 상응하는 대상이 실제로 존재할 것이라고 믿고, 그것에 집착하여 그것을 구하기 위해 애쓴다. 만약 황금의 산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해도 그러한 사실이 사람들에게 알려진다면, 사람들이 황금을 얻기 위해서 황금의 산에 몰려들 것이기 때문에 순식간에 황금의 산은 없어질 것이다.
따라서 중생이냐 부처냐 하는 차이는 언어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부처는 언어에 대해 집착하지 않는다. 다만 언어란 사물의 실제를 왜곡하는 것이지만, 언어를 통하지 않고는 진리를 전달할 수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언어를 사용할 뿐이다. 이것이 바로 《금강경》에서 말하는 즉비(卽非)의 논리이다. 이것을 《금강경》에서는 “A는 A가 아니다. 그러므로 A라고 한다”라고 표현한다. 이 말을 다시 풀이해보자. A라는 단어는 중생이 집착하는 것과 같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A는 A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언어를 통하지 않고서 진리를 전달할 수는 없으므로 일단 부정해서 집착심을 없앤 다음, 그 단어를 사용한다. 그래서 “그러므로 A라고 한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대목을 《금강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보살이 불국토를 장엄(莊嚴)하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인가 하면,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장엄이 아니니, 이것을 장엄이라고 이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수보리야! 모든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청정한 마음을 내야 할 것이다. 곧, 빛깔〔色〕에 집착해서 마음을 일으키지 말고, 소리·향기·맛·촉각·법(法: 관념의 대상)에 집착해서 마음을 일으키지 말라. 다만 집착하는 바 없이 마음을 일으켜라!(應無所住 而生其心)” (《금강경》〈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
2) 공(空)사상의 활용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덤비는 병사는 도저히 이길 수 없다. 그저 오로지 마음속에서 죽어도 좋으니 무조건 전쟁에서 이기겠다고 한다면 어느 누가 이 병사를 감당하겠는가? 그래서 옛말에 살려고 하면 죽고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오히려 산다고 하였으리라. 이 말은 공(空)사상에도 적용할 수 있다. 공(空)을 자각하고 그것에 의지해서 윤리적 행위를 할 때 윤리의 극치를 이룰 수 있다. 모든 사심(私心)을 이기고 순수하게 윤리적 행위를 실천할 때 그 행위는 더욱 빛나는 법이다.
이러한 점에서 《금강경》에서는 위에서 말한 청정한 마음, 곧 공(空)에 기초해서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착한 행동을 할 것을 권하고 있다. 예를 들면, 보시는 남에게 자신의 재산을 주는 착한 행동이지만, 단순히 보시만을 행하지 말고, 이러한 착한 행동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한다. 이는 윤리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해 《금강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시 수보리야! 보살은 법(法 : 대상)에 대해 머문 바〔집착하는 바〕 없이 보시를 행해야 한다. 말하자면, 빛깔〔色〕에 집착하지 않고 보시를 행해야 하고, 소리·향기·맛·촉각·법(法:관념의 대상)에 집착하지 않고 보시를 행해야 한다. 수보리야! 보살은 이와 같이 보시를 행해야 하니, 상(相: 모습)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금강경》〈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
그러면, 왜 모습에 집착하지 않고 보시를 행해야 하는가? 그 이유는 그렇게 보시를 행하면, 그 결과 얻는 복덕(福德)이 헤아릴 수 없이 많기 때문이다. 허공을 헤아릴 수 없듯이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 모습에 집착하지 않는 보시)의 복덕도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무주상보시의 복덕이 헤아릴 수 없는 정도로 많은 이유는 이러한 보시를 행하면 보시를 행하는 사람이 복덕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을 《금강경》에서는 “복덕을 받지 않는다〔不受福德〕”라고 말한다.
3. 노자(老子)의 사상
노자의 생애에 대해서는 《사기열전》에서 소개하고 있다. 노자는 초(楚)나라 고현(苦縣) 여향(?鄕) 곡인(曲仁) 마을〔里〕 사람이다. 성은 이(李)씨이고, 이름은 이(耳)이다. 자(字)는 백양(伯陽)이고, 시호는 담(聃)이다. 주나라 수장실(守藏室)의 사관(史官)이었다. 공자가 주나라에 가서 노자에게 예(禮)를 물었다고 한다. 노자는 도덕을 닦고 그 학문은 스스로 몸을 숨기고 이름 내지 않는 것〔無名〕에 힘썼다. 주나라에 거주한 지 오래되었는데, 주나라가 쇠퇴하는 것을 보고, 마침내 주나라를 떠났다.
국경의 관문〔關〕에 이르자 관령(關領)인 윤희(尹喜)가 말하기를 “선생님은 숨어 버리려고 하시니, 저를 위해서 억지로라도 책을 저술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노자는 상·하편의 책을 저술하였는데, 그것은 도덕의 의미를 말한 5천여 언(言)의 분량이었다. 그리고 나서 떠나 버렸는데, 아무도 그가 죽은 곳〔所終〕을 알지 못하였다. 하지만 사마천이《사기열전》을 쓸 때에도 노자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說)이 있었다.
그래서 초나라 사람인 노래자(老萊子)가 노자라고 하기도 하고, 주나라 사람인 태사담(太史?)이 노자라고 《사기열전》에서 소개하기도 한다. 이처럼 여러 사람이 노자일 가능성이 있으므로 《노자》라는 저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노자》라는 책이 여러 사람에 의해서 작성되었을 가능성은 있지만, 단일 관점이 유지된 것으로 간주하고자 한다. 그래야 철학적 분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선, 노자사상은 도(道)의 체(體)와 용(用)으로 구분할 수 있다. 도(道)의 체(體)는 불교의 공사상과 공통점이 있지만, 도(道)의 용(用)은 불교의 공사상과 관련이 적으므로 이 점에서 보자면 불교의 공사상과 노자사상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1) 노자사상의 근본 : 도(道)의 체(體)와 용(用)
《노자》에서 말하는 도(道)의 체(體)는 고요하고 고요한 것이어서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것이지만, 도(道)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에 비해 도(道)의 용(用)은 일반적으로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는 모든 변화는 극단에 이르면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계절의 변화를 보자. 봄에서 여름으로 진행되면서 무척 더워지지만 이 무더위가 계속되진 않는다.
더위가 한창이면 더 이상 진행되지 않고 이제 점점 날씨는 서늘해진다. 또한 가을에서 겨울로 진행되면서 무척 추워지지만 이 추위가 계속되는 것은 아니다. 어느 정도에서 정점을 찍고 나서 이제 봄으로 방향을 바꾼다. 이처럼 날씨는 극단에 이르면 더 이상 진행하지 않고 원래의 상태로 다시 돌아온다. 이러한 것을 일반화해서 말하자면,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 곧 모든 변화는 극단에 이르면 결국에는 다시 돌아온다는 것이 된다. 이러한 도(道)의 체(體)와 용(用)은 《노자》 25장에서 잘 나타난다.
어떤 물건이 혼연히 이루어져 천지보다 먼저 생기었다. 고요하고 고요해서 홀로 서서 고쳐지지 않고 두루 다니지만 위태하지 않으니 천하의 어머니라 할 만하다. 나는 그 이름을 알지 못하지만 이름하여 도(道)라 하고 억지로 그것을 이름하여 대(大)라 한다. 대(大)는 가는 것이고, 가는 것은 멀어지고, 멀어지는 것은 돌아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道)는 위대하고, 하늘은 위대하며, 땅은 위대하고 왕(王)도 위대하다. 이 땅에 네 가지 위대한 것이 있는데 왕(王)은 한 가지에 속할 뿐이다. 따라서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으며, 하늘은 도(道)를 본받고, 도(道)는 자연(自然)을 본받는다.1)
위 인용문에서는 도(道)의 체(體)와 용(用)을 모두 말했다. 도(道)는 천지보다 먼저 생긴 것이고, 고요하고 고요한 것이다. 그것은 변하지 않는 것이지만〔體〕, 만물에 두루 작용하는 것이다〔用〕. 따라서 천하의 근본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의 이름을 알 수 없는 것이지만 도(道)라고 이름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위대한 것이라고 억지로 이름한다. 이 위대한 것은 작용하고, 작용해서 움직이는 것은 계속 움직여서 멀리까지 활동하고, 그러다가 너무 멀어지면 다시 돌아온다. 이것이 도(道)의 작용이다. 이 세상에 네 가지 위대한 것이 있는데, 왕(王)은 그 한 가지일 뿐이다. 따라서 왕(王)도 자연(自然)의 법칙에 따라 처신하고 정치에 임해야 한다. 여기에 노자의 인생관과 정치사상도 아울러 함축되어 있다.
그러면 초점을 도(道)의 체(體)에 맞추어 보자. 《노자》 1장에서 도(道)의 체(體)에 대해 가장 잘 묘사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언어로 도(道)를 표현할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고 나아가 유(有)와 무(無)가 서로 다른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도(道)를 도(道)라 말할 수 있으면 항상한 도〔常道〕가 아니고 이름을 이름할 수 있으면 항상한 이름이 아니다. 무(無)를 천지의 처음이라 이름하고, 유(有)를 만물의 어머니라 이름한다. 그러므로 항상 무(無)에서 그 묘함을 관찰하고자 하며, 항상 유(有)에서 그 가장자리를 관찰하고자 한다. 이 두 가지〔有·無〕는 같은 것이지만, 〔세상에〕 나와서는 이름을 달리하였다. 〔有와 無가〕 같은 경지를 현(玄)이라 하는데, 현묘하고 또한 현묘하니 〔이것이〕많은 묘(妙)의 문이다.2)
위 인용문에 따르면, 도(道)는 무(無)와 유(有)가 같은 경지를 말하는 것이고, 이것이 현(玄)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도(道)는 유(有)와 무(無)를 벗어난 자리이다. 이 자리는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자리이다. 그런데 무엇 무엇이라고 이름한다면, 그것은 유(有)와 무(無)의 어느 한쪽에 떨어진 것이다. 그래서 도(道)를 도(道)라고 말할 수 있으면 그것은 이미 진정한 도〔常道〕가 아닌 것이고, 어떠한 이름도 그것을 이름할 수 있으면 그것은 이미 진정한 이름〔常名〕이 아닌 것이다. 필자는 이 대목이 《금강경》에서 말하는 즉비(卽非)의 논리 곧 “A는 A가 아니므로 A라고 이름한다”고 하는 것과 통하고, 또한 《노자》 1장에서 도(道)는 유(有)와 무(無)가 같은 경지라고 말한 것은 《반야심경》의 중도(中道)의 표현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중도는 비유비무(非有非無)인데 이는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라는 말이고, 이를 다른 각도에서 접근하자면, 이미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므로 유(有)와 무(無)는 서로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유(有)에도 벗어나고 무(無)에도 벗어났으므로 이제는 거꾸로 유(有)와 무(無)에 걸리지 않고 유(有)와 무(無)가 대립되지 않는 광활한 정신적 경지에 이른다는 말이다. 이러한 《노자》 1장의 내용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또한 《노자》 1장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노자》의 다른 부분에서도 확인될 수 있는 것이다. 《노자》 56장에서는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도(道)를 도(道)라고 하면 이미 진정한 도〔常道〕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하는 셈이고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는다. 《노자》 56장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 그 입을 막고〔塞其兌〕 그 눈과 귀를 닫고〔閉其門〕, 그 날카로움을 꺾고 그 어지러움을 풀고, 그 빛과 화합하고〔和其光〕 그 티끌과 함께 한다〔同其塵〕. 이것을 현동(玄同)이라 한다. 그러므로 친(親)하게도 할 수 없고 소원〔疏〕하게도 할 수 없으며, 이롭게 할 수도 없고 해칠 수도 없으며, 귀(貴)하게도 할 수 없고 천(賤)하게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천하의 귀함〔貴〕이 된다. (《노자》 56장)
위 인용문에 따르면, 도(道)를 체득한 사람은 인식기관을 단속하고 자신의 날카로움을 뽐내지 않고 자신의 혼미함을 잘 풀어버리며, 자기 내부에 있는 광명과 화합하여 중생과 같은 모습을 취한다. 따라서 도(道)를 체득한 사람은 친하게도 할 수 없고 소원하게도 할 수 없으며, 이롭게 할 수 없고 해롭게도 할 수 없으며, 귀하게도 할 수 없고 천하게도 할 수 없는 경지가 펼쳐진다.3)
한편, 《노자》에서는 도(道)를 닦는 방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제시하지는 못하지만, 그 단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공부를 하면 지식이 쌓인다. 매일 영어단어를 10개씩 외운다면 일년이면 상당한 단어를 암기할 것이다. 하지만 도(道)를 닦는다는 것은 이처럼 쌓아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면의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 마음을 비우고 비워서 완전히 비우면 그 때에는 모든 활용이 텅 빈 마음에서 나온다. 예를 들면, 야구경기에서 투수가 공을 잘 던지겠다고 어깨에 너무 힘을 주면 자기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오히려 평상의 마음을 되찾으면 자기 컨디션을 회복될 수 있는 것과 같다. 이러한 내용을 《노자》 48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학문을 하면 날로 늘어나고 도(道)를 행하면 날로 줄어든다. 줄어들고 줄어들어 무위(無爲)에 이르러 함이 없지만 하지 않음이 없다〔無爲而無不爲〕. 그러므로 천하를 취함에 항상 일 없음으로 하니, 일 있음에 미치면 천하를 취할 수 없다.4)
위 인용문에 따르면, 도(道)를 닦는 방법은 비우는 것이다. 그래서 도(道)를 닦는 사람은 자신의 내면을 덜고 또 덜어서 어떠한 인위적 조작이 없는 경지에 이른다. 그리고 이 경지에서는 인위적 조작을 없애어서 모든 것이 순전히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2) 노자의 인생관
앞에서 말한 도(道)의 체(體)와 용(用)은 노자의 인생관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앞에서 도(道)의 체(體)는 현묘하고 현묘한 것이어서 유(有)와 무(無)가 서로 같은 경지라고 했는데, 노자의 인생관에서는 이 관점을 받아들여 유(有)와 무(無)에 구애되지 않고 이 둘을 넘어설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도의 용(用)은 모든 변화는 극단에 이르면 처음의 상태로 돌아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인데, 이것을 인생사에 적용해서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약자도지용(弱者道之用)의 논리를 편다.
(1) 대립되는 관념을 넘어선다.
《노자》 2장에서는 서로 대립되는 개념을 넘어설 것을 말하고 있다. 예를 들어 모든 사람이 모두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이 있다면 그 반대편에 추함이 있을 것이고, 이렇게 서로 대립되는 개념이 존재하는 한,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노자》 2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천하사람들은 모두 아름다운 것이 아름다운 줄 알지만, 이는 추악한 것이고〔惡〕, 모두 착한 것이 착한 것인 줄 알지만, 이는 불선(不善)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유(有)와 무(無)는 서로 생기는 것이고, 어려움〔難〕과 쉬움〔易〕은 서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길음〔長〕과 짧음〔短〕은 서로 나타내는 것이고, 높음〔高〕과 낮음〔下〕은 서로 의지하는 것이고, 음성(音聲)은 서로 화답하고, 앞〔前〕과 뒤〔後〕는 서로 따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은 무위(無爲)의 사(事)에 처하고 말 없음〔不言〕의 가르침을 행한다. 그 결과 만물이 일어나더라도 말하지 않고〔萬物作焉而不辭〕, 생기더라도 소유하지 않으며〔生而不有〕, 행위하였지만 믿고 의지하지 않으며〔爲而不侍〕, 공(功)이 이루어지더라도 머물지 않는다〔功成而不居〕. 오직 머물지 않았으므로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노자》 2장)
위 인용문에서 말하고 있는 대립된 개념, 곧 유(有)와 무(無), 어려움〔難〕과 쉬움〔易〕, 길음〔長〕과 짧음〔短〕, 높음〔高〕과 낮음〔下〕, 앞〔前〕과 뒤〔後〕는 서로 관계 맺어진 존재이다. 하지만 진정 가치 있는 것은 이런 상대적인 것을 벗어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아는 성인(聖人)은 상대적인 세계인 유(有)와 무(無)를 넘어서는 무위(無爲)의 사(事)에 처하고, 말 없는〔不言〕 가르침을 행한다. 그래서 성인의 공덕은 사라지지 않는다.
《노자》 2장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노자》의 다른 부분에 의해서도 확인된다. 《노자》 11장에서는 유(有)와 무(無)가 서로 짝하고 있음을 예를 들어 밝히고 있다.
30개의 바퀴살〔輻〕은 하나의 바퀴통〔퇶〕과 함께 한다. 그 무(無)에 짝해서 수레의 용(用)이 있다. 진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들 경우, 그 무(無)에 짝해서 그릇의 용(用)이 있다. 문과 창을 뚫어서 방을 만들 경우 그 무(無)에 짝해서 방의 용(用)이 있다. 그러므로 유(有)로써 이익을 삼는 것은 무(無)로써 용(用)을 삼았기 때문이다. (《노자》 11장)
위 인용문에서는 어느 하나의 사물이 이루어질 때, 그 무(無)에 기초해서 그 용(用)이 존재한다고 한다. 이처럼 《노자》에서는 무(無)와 유(有)가 서로 짝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노자》 27장에서도 나타난다. 여기서는 착한 사람은 착하지 못한 사람의 스승이고, 착하지 못한 사람은 착한 사람의 바탕이 된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어느 한쪽도 소홀하게 할 수 없다.
잘 가는 것〔善行〕은 수레바퀴 자국이 없고, 잘 말하는 것〔善言〕은 허물이 없고, 잘 헤아리는 것〔善計〕은 계책을 쓰지 않고, 잘 닫음〔善閉〕은 문빗장이나 열쇠가 없어도 열 수 없는 것이요, 잘 맺음〔善結〕은 밧줄로 묶지 않아도 풀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은 항상 사람을 잘 구하므로 사람을 버리지 않으며, 항상 사물을 잘 구하므로 사물을 버리지 않는다. 이것을 습명(襲明 : 밝음을 계승함)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착한 사람〔善人〕은 착하지 못한 사람〔不善人〕의 스승이요, 착하지 못한 사람〔不善人〕은 착한 사람〔善人〕의 바탕〔資〕이다. 그 스승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그 바탕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비록 지혜롭다 하더라도 크게 미혹한 것이다. 이것을 요묘(要妙)라고 한다. (《노자》 27장)
위 인용문에서는 착한 사람은 착하지 않은 사람의 스승이고, 착하지 않은 사람은 착한 사람의 바탕〔資〕이라고 한다. 따라서 착한 사람은 물론이고 착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해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 여기서 자(慈)가 나온다. 그래서 성인(聖人)은 항상 사람과 사물을 잘 구한다. 이 경지에서 잘 가는 것〔善行〕, 잘 말하는 것〔善言〕, 잘 헤아리는 것〔善計〕, 잘 닫는 것〔善閉〕이 펼쳐진다.
(2) 돌아오는 것은 도의 움직임이다〔反者道之動〕
앞에서 모든 변화는 극단에 이르면 되돌아오는 경향이 있는 것이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이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이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의 이치를 인생사에 적용한다. 인생사에 적용되면 이 때는 ‘약자도지용(弱者道之用)’이라고 한다. 이는 모든 변화는 극단에 이르면 되돌아오는 경향이 있으므로 강한 것은 이미 극단에 이른 것이어서 이내 멸망할 것이고, 약한 것은 아직 발전할 조짐이 있는 것이므로 궁극에는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의미이다. 《노자》 22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굽으면 온전하고, 굽히면 바르게 되고, 오목하면 가득 차고, 더러워야 새롭게 되고, 적어야 얻을 수 있고, 많으면 미혹된다. 따라서 성인(聖人)은 하나〔一〕를 안아서 천하의 모범이 된다. 스스로 나타내지 않으므로 밝고〔明〕, 스스로 옳다 하지 않으므로 드러나고〔彰〕, 스스로 자랑하지 않으므로 공(功)이 있고, 스스로 자랑하지 않으므로 길게 된다〔長〕. 다만 싸우지 않으므로 천하에서 함께 싸울 수 있는 존재가 없다. 옛사람이 “굽으면 온전해진다”고 말한 것이 어찌 빈 말이겠는가? 진실로 온전해진다면 만물이 돌아올 것이다. (《노자》 22장)
위 인용문에서 “굽으면 온전하다”고 한 것은 일종의 역설이다. 이러한 역설이 가능한 것은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과 ‘약자도지용(弱者道之用)’에 근거했기 때문이다. 굽은 것과 곧은 것을 비교하면 당연히 곧은 것이 좋은 것이다. 하지만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의 입장에서 보자면, 곧은 것은 이미 변화가 상당히 진행된 것이고, 굽은 것은 이제 변화가 시작되려는 것이다.
따라서 곧은 것은 이내 변화가 극단에 이르러 퇴보할 것이지만 굽은 것은 아직도 발전할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굽으면 온전할 수 있는 것이고, 곧은 것은 오래가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모난 돌이 정맞는다”는 말과 통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오목하면 가득하고, 더러워야 새롭게 되고, 적어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이는 노자의 특유의 논법이다.
우선, 강한 것이 약한 것을 이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노자의 주장에 주목해 보자. 강한 것은 오래가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회오리바람은 강력한 바람이지만 아침 내내 불지 못하고 소나기도 거친 빗줄기이지만 하루 종일 내리지는 못한다. 그에 비해 보슬비는 가는 빗줄기이지만 오랫동안 내릴 수 있다. 이 점을 《노자》 23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희언(希言: 적은 말)이 자연스럽다. 회오리바람은 아침 내내 불지 못하고, 소나기는 하루 종일 내리지 못한다. 이것은 누가 하는가? 천지(天地)이다. 천지도 오래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사람이겠는가! 그러므로 도(道)에 종사하는 사람은 도(道)에서는 도(道)와 함께 하고, 덕(德)에서는 덕(德)과 함께 하고, 잃음〔失〕에서는 그 잃음〔失〕과 함께 한다. 도(道)와 함께 한다는 것은 도를 즐기고 얻는다는 것이고, 덕(德)을 함께 한다는 것은 덕을 즐기고 얻는다는 것이고, 잃음〔失〕을 함께 한다는 것은 잃음을 즐기고 얻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이 부족하면 〔이러한 이치를〕 믿지 않는다. (《노자》 23장)
위 인용문 내용처럼 회오리바람은 아침 내내 불지 못하고, 소나기도 하루 종일 내리지 못한다. 이것은 천지(天地)가 주관하는 것인데, 천지도 오래하질 못한다. 하물며 인간이겠는가? 그래서 도(道)에 종사하는 사람은 도(道)에서는 도(道)와 함께 하고, 덕(德)에서는 덕(德)과 함께 하고, 잃음〔失〕에서는 잃음과 함께 한다. 그래서 도(道)·덕(德)·잃음〔失〕을 즐기고 얻는다. 이처럼 도(道)에 종사하는 사람은 자연스런 흐름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의 이치에서 배운 교훈을 인간사(人間事)에 적용해 보자. 우리는 스스로 자랑하고 내세우기 좋아한다. 또 자기의 말이 옳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회오리바람이 오래가지 못하고 소나기가 잠깐 동안에 지나가듯이, 자신을 강하게 내세우는 것은 결국 오래 가지 못한다. 강한 것은 이미 극단에 이른 것이다. 이런 것을 추구하는 사람은 곧 몰락의 경지에 이를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노자》 24장에 소개되어 있다.
발끝으로 서면 오래 서지 못하고, 큰 걸음으로 활보하면 오래 걷지 못한다. 스스로 드러내면 밝지 못하고, 스스로 옳다 하면 드러내지 못하고, 스스로 자랑하면〔伐〕 공(功)이 없고, 스스로 내세우면〔矜〕 오래가지 못한다. 〔이러한 것들은〕 도(道)에서는 남은 음식이요, 군더더기 행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만물〔物〕은 〔이러한 것들을〕 혹 싫어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도(道)가 있는 사람은 〔스스로 드러내고, 스스로 옳다 하고, 스스로 자랑하고, 스스로 내세우는 것에〕 처하지 않는다. (《노자》 24장)
또한 이번에는 자연에서 배운 이치를 상대방을 다루는 전술에 응용해보자. 바둑에서 먼저 큰집을 만들면 반드시 승부에서 진다고 한다. 왜냐하면, 중간에 만족하고 더 이상 노력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내용을 《노자》에서는 말하는 것이다. 또 《노자》에서는 상대방을 망하게 하려면, 먼저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주어서 상대방을 만족하게 한다는 전술을 편다. 그러면 상대방은 만족해서 더 이상 노력하지 않을 것이고, 그 때는 가만 두어도 스스로 멸망할 것이다. 《노자》 36장에서는 이러한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장차 거두어들이려고 한다면 반드시 억지로 펴게 해주고, 장차 약하게 하려면 반드시 억지로 강하게 해주어야 한다. 장차 없애려고 한다면 반드시 억지로 흥하게 해주고, 장차 뺏으려고 한다면 반드시 억지로 주어야 한다. 이것이 미묘한 밝음〔微明〕이다. 부드럽고 약한 것이 굳세고 강한 것을 이기니, 마치 고기가 연못을 벗어날 수 없는 것과 같다. 〔따라서 국가를 통치할 때〕 국가의 이로운 기구〔利器〕는 사람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 (《노자》 36장)
위 인용문의 내용은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과 ‘약자도지용(弱者道之用)’의 응용이다. 그래서 거두어들이고 약하게 하고 없애려고 하고 뺏으려고 한다면, 정반대로 펼치게 하고 강하게 해주고 흥하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 관점을 국가통치에도 응용하고 있다. 국가의 이로운 기구는 사람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정치사상에까지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과 ‘약자도지용(弱者道之用)’을 확대하겠다는 말이다.
이제 노자는 정치의 영역까지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의 논리를 구사한다.5) 천하에서 가장 강한 것과 천하에서 가장 부드러운 것이 충돌하면 어느 것이 이길까? 상식적으로 보자면, 당연히 강한 것이 이기겠지만, 노자의 논법에 따르면 정반대의 결론이 나온다. 가장 강한 것은 이미 충분히 변화한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발전할 가능성이 없는 것이고, 가장 부드러운 것은 이제 막 발걸음을 내딛은 것이기 때문에 발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그래서 가장 부드러운 것이 가장 강한 것을 이긴다고 노자는 주장한다. 이 내용을 《노자》 43장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천하의 지극히 부드러운 것이 천하의 지극히 견고한 것을 몰아내고, 형상 없는 것이 틈 없는 데 들어간다. 그래서 내가 무위(無爲)의 이익됨을 안다. 말 없는 가르침〔不言之敎〕과 무위(無爲)의 이익을 천하에서 당할 수 있는 것이 드물다〔天下希及之〕. (《노자》 43장)
4. 결론: 불교와 노자사상의 비교
이 글에서는 불교의 공(空)사상과 노자사상을 비교하였다. 불교의 공사상과 노자사상에는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 우선, 노자가 말하는 도의 체(體)와 불교의 공사상에는 공통점이 있다. 불교의 공사상은 세상만물과 우리의 몸과 마음, 그 어느 것도 집착할 만한 것이 없음을 통찰하는 것이고, 이는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우리 안에 있는 청정한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기도 하며, 이것을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라는 중도(中道)로 표현할 수 있다. 중도는 논리와 언어를 벗어났다는 의미이고, 청정한 마음을 회복하면 논리와 언어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리고 노자의 도(道)의 체(體)는 이름할 수 없는 것이지만 억지로 이름한 것이고, 또한 도(道)의 체(體)는 유(有)와 무(無)가 같은 경지인 것이다.
이 유(有)와 무(無)가 같은 경지라는 말은 해석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필자는 이 말을 불교의 중도의 의미로 파악하고자 한다. 불교의 중도는 무(無)와 유(有)의 극단을 부정하는 것인데, 만약 이 부정의 정신에서 현실세계로 내려온다면, 그 때는 무(無)이면서 유(有)인 경지로 전개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유(有)와 무(無),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정신적 경지이므로 이번에는 무(無)도 좋고 유(有)도 좋다고 할 수 있고, 이러한 정신적 경지를 《노자》에서는 유(有)와 무(無)가 같다고 말했다. 또한, 《노자》 1장에서 도(道)를 도(道)라고 말할 수 있으면 항상한 도가 아니라는 표현은 《금강경》의 즉비(卽非)의 논리와 연결점이 있다.
또한 노자의 인생관에서도 도의 체(體)에 근거한 대목은 불교의 공사상과 공통점이 있다. 《노자》 2장에서는 세상 사람이 모두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은 추악한 것이라고 한다.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이미 추악한 것을 상대로 펼쳐진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아름다움이라면, 아름다움과 추악함이라는 2원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는 상대적 2원관에서 벗어나서 자유롭게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불교의 《금강경》에서도 공(空)을 자각하고 그것에 의지해서 윤리적 행위를 하면 그 때 최고의 복덕이 생긴다고 말한다. 이 말을 《노자》에 맞추어서 보자면, 2원성을 넘어서서 윤리적 행위를 실천하면 엄청난 복덕이 생긴다고 할 수 있고, 《노자》 2장의 표현으로 바꾸어서 말한다면 “머물지 않으므로 사라지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이상의 내용이 공통점이었다면 차이점도 분명히 존재한다. 불교사상의 전반을 통틀어본다고 해도 《노자》의 도(道)의 용(用)을 말하고 있지 않다. 도의 용(用)은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 약자도지용(弱者道之用)을 내용으로 하는 것인데, 이는 사물의 변화가 극단에 이르면 처음의 상태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강한 것은 이미 발전한 것이므로 이내 쇠퇴하고, 약한 것은 더 발전할 여지가 있으므로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불교사상에서 발견할 수 없다.
불교와 노자사상을 비교하면, 공사상이라는 점에 일정 부분 공통점이 있다고 해도 불교사상에서는 이 공사상이 중관학파, 유식학파, 여래장사상, 천태종, 화엄종, 선종에서 더욱 활짝 꽃을 피우고 있다. 이 점에서 노자사상보다 불교사상이 더 깊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노자사상에서는 도의 용(用)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어떻게 처신할 것인지 구체적 지침을 제시해준다.
이 점에서 보자면 노자사상이 불교사상보다 더 삶에 밀착한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노자사상은 불교사상에 비해서 현실적 응용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불교와 노자사상에는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 하지만 이 두 사상은 거의 2000년 이상을 서로 교섭해 왔다. 그러므로 이제 와서 이 두 사상의 우열을 따지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 아니라고 본다.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불교사상의 장점을 더욱 발전시키면서, 한편으론 노자의 지혜를 수용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
이병욱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졸. 고려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ㆍ박사 과정(동양철학). 박사학위 논문으로는 〈천태지의 철학사상논구〉(고려대 대학원 철학과, 1995년)가 있으며, 저서로는 《천태사상연구》(경서원, 2000년), 《고려시대의 불교사상》(혜안, 2002년), 《에세이 불교철학》(운주사, 2003년), 《인도철학사》(운주사, 2004년), 《천태사상》(태학사, 2005년) 등이 있다. 현재 고려대, 강원대, 중앙승가대 강사로 있다.
이병욱 lbw33@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