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와 희론(1)
승인 2003.04.09
“연기(緣起)는 세간의 무수한 속설로는 접근할 수 없다.” 나가르주나의 〈중론송(中論頌)〉 귀경게에 나오는 이 구절은 대승불교(大乘佛敎) 사상의 핵심을 건드리는 말입니다.
‘세간(世間)의 무수한 속설로는 접근할 수 없다’는 말은 한역(漢譯)에서는 흔히 ‘희론적멸(戱論寂滅)’이라는 멋들어진 말로 옮기고 있습니다.
‘적멸(寂滅)’이야 ‘소멸된다’ ‘없어진다’는 뜻이기 때문에 이해하기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좀 복잡한 문제는 제가 ‘세간의 무수한 속설’로 풀이한 ‘희론(戱論)’이라는 말에 있습니다.
이 말은 대승불교 사상을 총체적으로 파악하는데 아주 중요한 용어이기 때문에 2회에 걸쳐 자세하게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희론’은 범어 ‘쁘라빤짜(prapaa)’의 한역인데, 이는 어근 pra-pa 또는 pra-pac (상세히 설명하다;흩뜨리다)에서 나온 명사형입니다. 원래는 현시, 전개, 확장, 확산, 확대, 다양화, 상세한 설명을 뜻하는 말인데, ‘흩뜨리다’는 뜻이 우세했는지 점차로 철학적 영역에서는 ‘현상’ ‘현상계’ ‘환상’을 뜻하는 말로 쓰이고, 희곡에서는 ‘어리석은 말’을 뜻하게 됩니다. 대승불교를 주요한 모태(母胎)로 삼은 한역에서는 ‘희론(戱論), 허위(虛僞), 망상(妄想)’과 같이 좋지 않은 뜻으로만 쓰입니다.
한역만 보아도 대승불교에서 ‘쁘라빤짜’를 상당히 안 좋게 보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지요? 아마도 ‘흩뜨리다’라는, 어근의 뜻을 살려서, 무언가 진상을 꿰뚫지 못하고 언저리로만 얼쩡거리는, 알갱이를 꿰차지 못하고 모호하게 흩뜨리는 말이라는 뜻으로, ‘희론’이라 옮긴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연기를 왜 ‘희론적멸’로 표현했는지 〈중론송〉의 다음 게송(偈頌)을 대비시켜 생각해보면 그 의의가 좀더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업(業)과 번뇌(煩惱)가 소멸함으로써 해탈(解脫)이 있다. 업과 번뇌는 분별심(分別心, vikalpa)에서 생기고 분별심은 희론(戱論, prapaa)에서 생기지만, 희론은 공성(空性)에서 소멸한다.“(18-5)이 게송에서 공성(空性)은 연기(緣起)와 같은 말입니다. 〈중론송〉에서는 “‘연기’ 바로 그것을 우리는 ‘공성(空性)’이라 말한다. 〈중략〉”(24-18)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업이나 번뇌는 생사윤회(生死輪廻) 세계를 가리키기 때문에, ‘희론’은 생사윤회의 원인(原因)을 가리키는 것으로 풀이되고, 연기(緣起)와 대극적(對極的)인 자리에 놓입니다. ‘분별심(分別心)’이란 말이 나왔으니 유식사상(唯識思想)에 빗대어 설명해보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유식사상에서는 우리 마음을 표층적(表層的) 영역과 심층적(深層的) 영역으로 나눕니다. 심층 영역에 해당하는 마음이 소위 ‘알라야식’이지요.
그런데 유식사상의 용어법을 보면, 표층마음과 심층마음을 같이 싸잡아서 곧 우리의 오감각(五感覺)과 의식(意識), 마나식, 알라야식을 전부 ‘위깔빠(vikalpa)’ 곧 ‘분별심’이라고 부릅니다. ‘분별심’은 생사윤회의 대해에서 헤매고 있는 우리 중생(衆生)의 마음을 뜻합니다. 흥미로운 일은 ‘분별(分別)’이란 말로 중생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 마음의 현 상태까지 그려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분별’이라 하면 여자-남자의 분별, 적-친구의 분별 등 수많은 차별상(差別相)이 언급되겠지만 이 모든 분별은 나와 대상의 분별 곧 주관(主觀)-객관(客觀)의 분별(分別)로 통합될 수 있습니다. 유식사상에서는 이 분별심을 근본적으로 변혁시키지 못하는 한, 주관과 객관으로 경계선이 그어진 분별심이 있는 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없고 이 때문에 업과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가르주나는 이 분별심이 희론에서 생긴다고 하는군요. 왜 그럴까요? 이 문제에 대해서 해결의 실마리를 던져주는 것이 바로 짠드라끼르띠입니다. 그는 ‘희론은 말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희론이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와 무언가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음을 말하고 있지요? 이 즈음에서 언어의 어떤 점이 생사윤회와 관련되는지 캐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