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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7/11

한국信연구소, 이신(李信) 사상 주제 학술논문 공모 < 에큐메니안

한국信연구소, 이신(李信) 사상 주제 학술논문 공모 < 알림 < 보도 < 교계·교회 < 기사본문 - 에큐메니안

한국信연구소, 이신(李信) 사상 주제 학술논문 공모
창립 5주년 맞아 문명 전환기의 신학 재구성할 기회 마련
이정훈
업데이트 2025.07.09 



한국신학의 토착화와 문명전환 담론을 선도해 온 한국信연구소(소장 이은선 교수)가 창립 5주년을 맞아 ‘이신(李信)의 사상’을 주제로 학술 논문을 공모한다. 이번 공모는 고(故) 이신 목사의 신학과 실천을 재조명하고, 그의 사상이 오늘날 문명 전환의 시기에 갖는 신학적·문화적 의의를 되새기고자 기획되었다.

이신 목사는 한국 교회에서 보기 드문 전방위적 사상가이자 실천가였다. 전남 돌산 출신으로 
  • 미국 밴더빌트대학에서 ‘전위 묵시문학 현상’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귀국 후 신학자이자 목회자, 문화운동가로서의 삶을 살아갔다. 
  • 1970년대 서울 산동네 빈민 지역에서 ‘그리스도의 교회’ 환원운동을 실천하며 
가난한 이들과 함께 복음의 의미를 다시 묻던 그의 삶은, 오늘의 한국 교회가 놓치고 있는 신학적 상상력과 윤리적 책임을 일깨운다.

특히 이신 목사는 ‘묵시(默示)와 영(靈)’, ‘슐리얼리즘(Surrealisme)’과 같은 독특한 개념들을 성서 해석과 한국 사회 현실에 창조적으로 결합시킨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토착화 신학과 비서구적 신학 담론의 선구자로서, 당시 한국 신학계 안팎에서 이단적이라고 여겨졌던 주제들을 과감히 탐구하며 ‘개벽적 기독교’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고자 했다.

이번 논문 공모는 이신 목사의 1차 저술과 기존 연구를 토대로 다음의 개념들을 창의적으로 탐구하는 논문을 모집한다. 주요 주제는
  •  ‘묵시와 영성’,
  •  ‘슐리얼리즘’, 
  • ‘토착화와 기독교 환원운동’, 
  • ‘한국 信學’, 
  • ‘개벽적 기독교’ 등이다. 

한국신학의 미래를 모색하는 신학자, 대학원생, 현장 목회자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기대된다.

논문 분량은 A4용지 기준 20매 이내이며, 응모 마감은 2025년 11월 20일이다. 선정된 논문에는 소정의 상금이 수여되며, 연구소 학술지 게재 및 향후 출판 지원도 검토된다. 응모자는 논문을 이메일(leeus@sejong.ac.kr)로 제출하면 된다. 기타 문의는 010-8887-6618 또는 010-9097-1921로 가능하다.

한국信연구소 측은 “오늘날 전 지구적 위기와 한국 사회의 문명사적 전환기를 맞아, 이신 목사의 신학적 상상력과 급진적 실천이 새롭게 조명될 필요가 있다”며, “이번 공모가 그 사상을 계승하고 재해석하는 출발점이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또한 “지난해 李信 償에 사회적 실천 분야에 더해 학술 영역을 첨가”했으며 “올해 역시 두 영역에서 적임자를 찾고자 한다.”고 강조했다.




이정훈typology@naver.com










2025/07/05

환상과 저항의 신학 - 이신(李信)의 슐리얼리즘 연구

환상과 저항의 신학 : 알라딘


환상과 저항의 신학 - 이신(李信)의 슐리얼리즘 연구 
현장아카데미 (엮은이)동연출판사2017-09-22



화가이자 신학자의 길을 걸었던 초현실주의자 이신 박사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서. 이신 박사 사후 30년에 그를 다시 조명하여 연구서를 내는 것은 그의 신학 속에 있는 창조성과 함께 평생 추구했던 저항의 신학이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은 2017년에 되새겨야 할 프로테트탄트 정신과 시의적절하기 때문이다.

신학과 예술의 접점이 더욱 요청되는 시점에서 이신의 작업은 더욱 주목될 뿐만 아니라 초현실주의 신학에 근거, 그리스도교 환원운동을 시작했고, 한국교회의 개혁 방안을 제시하였으니 종교개혁 500년을 맞는 시점에서 교회사적 의미 역시 중요하다.


나는 왜 오늘도 여전히 이신(李信)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는가? < 에큐메니안

나는 왜 오늘도 여전히 이신(李信)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는가? < 에큐메니안

나는 왜 오늘도 여전히 이신(李信)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는가?
한국교회 에큐메니즘의 전개와 李信 신학 1
이은선 명예교수(한국信연구소, 세종대)

업데이트 2018.10.27 

이 글은 원래 작년 종교개혁 5백주년을 맞이해서 그 전해 돌아가신 지 35주기가 되는 선친 이신(李信, 1927-1981) 목사님을 기리면서 펴낸 글을 근간으로 한다(김성리 외, 『환상과 저항의 신학: 이신(李信)의 슐리얼리즘 연구』, 동연, 2016). 이렇게 1년이 지나서 다시 여기에 가져와서 약간의 보완과 더불어 소개하고자 하는 것은 그 때 성찰된 생각들이 또 다른 5백년을 향하고 있는 한국 교회와 사회를 위해서 좀 더 공유되었으면 하는 바램에서이다. 물론 개인적인 선친의 이야기이기도 해서 꺼려지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이번에 그분의 묘소를 일산기독묘지에서 충청도 괴산의 소수로 이장하면서 그의 생과 사상이 한국적 신학의 유산으로서 좀 더 보편적으로 해석되고, 다양하게 다루어졌으면 하는 소망을 가졌다.

이 책이 나온 후 1년간의 변화를 생각해 보면 나 개인적으로는 그동안 재직하던 대학을 조금 일찍 떠나서 한국여성신학자로서 ‘聖․性․誠의 여성통합학문’을 염두에 두면서 여러 궁리 끝에 <한국信연구소>라는 이름을 내세우게 되었다. 여기서도 나는 ‘信’이라는 이름을 가져왔는데, 그것으로써 육신의 아버지 이신(李信)을 기리고 이어간다는 의미도 있지만, 더 나아가서는 오늘 우리 시대 인류 삶의 문제가 바로 이 ‘믿음’과 ‘신뢰’, ‘공감’과 ‘상상’, ‘환상’의 문제에 집약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보다 통합학문적인 탐구와 성찰을 통해서 우리 믿음의 가능성을 다시 찾아내는가 라는 점에 집중하고 싶었다. 그것은 이제 오늘 우리의 ‘신학’(神學)은 ‘신학’(信學)의 물음이 되어야 한다는 표현으로서 어떻게 우리가 서로 간에 좀 더 신뢰할 수 있고, 믿을 수 있으며, 깊이 공감하고, 또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과거와 미래를 상상하고 환상하면서 보다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을까의 물음을 묻고자 하는 의식이다. 나는 이신의 삶과 신학, 시와 그림이 바로 이와 유사한 생각 속에서 배태되었고, 그래서 오늘 우리 시대에도 그 문제의식과 탐구의 길이 결코 녹슬지 않았다고 본다.

이신 목사/신학박사(1927.12.25-1981.12.17)

오늘 한반도의 삶에서 남북의 통일과 평화가 절체절명의 관건이 되었다. 그 일에서 중국과 미국, 일본과 러시아 등, 한반도 주변 우리 시대 최고 강국들의 각축이 심하다. 이미 이 한반도에서 그 각축이 일제식민지와 6.25전쟁이라는 끔찍한 비극을 불러왔고, 잘못하면 다시 한 번 유사한 위기 앞에 놓여있는 상황에서 한국의 천주교는 로마의 교황을 찾아가고, 개신교는 미국 교회에게 SOS를 친다. 그런 노력의 한 편에서 남한의 한 정당은 정부가 9월 평양공동선언과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합의서를 의결한 것에 대해서 위헌소송을 제기하며 크게 반발하고 있다. 우리의 이러한 행보들이 앞으로 어떤 열매를 맺어낼 것인지 매우 주목되는 상황이다.

이런 모든 일을 염두에 두면서 이신의 신학을 다시 한 번 소개하고 싶었다. 물론 당시 그의 시대는 오늘 우리의 구체적인 상황과는 많이 다르고, 그 시대적, 신학적 한계에 이어서 또한 나의 해석에도 치우친 면도 많이 있겠지만 그래도 함께 공유하며 더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이 시작하는 말의 마무리로서 나는 지난 2011년 이신의 30주기를 기리는 말로 썼고, 지난 여름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노회찬 의원을 생각하며 다시 패북에 올렸던 언어를 가져오고자 한다. 이 말의 원 출처는 스위스의 페스탈로치인데, 그는 18세기 프랑스 대혁명 전후의 민중의 고통을 가장 근본적으로 완화시킬 수 있는 토대로서 바로 우리 인간성 안에 내재한 초월에 대한 깊은 믿음을 발견한 사람이었다. 그것으로써 그는 당시 국가교회로부터 파면을 당했고, 모두로부터 배척과 비웃음을 받았지만 그는 그 믿음과 저항, 환상의 행보를 고독으로 맞서면서 나아갔다.

“나는 여기 그 이상을 원했던 한 인간을 알고 있습니다. 그 안에는 순진과 무구의 기쁨이 놓여 있었고, 아주 소수의 죽을 운명의 인간만이 알고 있는 인간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의 가슴은 친절을 위해서 만들어졌고, 사랑과 신뢰는 그의 본성이었으며, 가장 은밀한 내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세상의 작품이 아니었고 세상의 어느 구석에도 맞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그를 발견하고서 그의 죄 때문에, 또는 다른 사람의 죄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를 쇠망치로 부숴버렸고, 마치 미장이가 쓸모없는 돌을 보통인 돌로 쓰려고 깨는 것과 같이 그렇게 깨버렸습니다. 
  • 그는 깨어지고 죽어가면서도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보다 인간에 대한 믿음을 더욱 가지고 있었고, 
  • 소수의 죽을 운명의 인간만이 알고 있는 한 목적을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 그는 일반적으로 소용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또한 그 자신도 그것을 원하지 않았지만 
  • 바로 자신의 목표를 위해서는 어떤 다른 사람보다도 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미주 1)


1. 이신의 ‘믿음’(信)에 대하여

이신에게 있어서 제일 소중했던 것은 ‘믿음’을 지키는 일이었던 것 같다. 그는 젊은 시절 자신의 이름을 부모님들이 지어준 이름(李萬修)에 더해서 ‘믿을’ 신(信) 자(字)의 이신(李信)으로 할 정도로 ‘믿음’을 사는 일에 집중하였다. 그가 제일 소중하게 생각한 말이 “신뢰의 그루터기”라는 말이었다고 생각하는데,(미주 2) 그는 왜 그렇게 ‘믿는다’는 일을 중요하게 여겼을까?

우리가 전해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일제 강점기에 부산에서 상업학교를 마치고 은행에 취업했다가 그만두고,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울로 올라와서 감리교신학대학에 입학했다. 믿음의 학인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믿음을 찾아 나선 그의 행보는 더 이어져서 6.25가 발발하고 고향 전라도로 내려가서 그곳에서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환원운동’을 만나면서는 속해있던 감리교회를 떠난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의 교회 환원운동에 헌신하게 된다.



후일 1980년경 『기독교백과사전』을 위해서 쓴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환원운동의 전개」라는 역사서술에 보면, 그는 이러한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환원운동도 한국 가톨릭교회의 시발과 마찬가지로 한국인 스스로의 선행된 자각에서 비롯되었음을 밝힌다. 그 서술에 따르면 한국 개신교에서의 ‘그리스도의 교회’ 운동은 신앙에서 다양한 교파나 그 교파에서의 신조를 따르기 보다는 원래 초대 교회의 순수한 믿음을 회복하는 일이 긴요하다고 보고, 그것을 깨달은 소수자에 의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일본 식민지 시절의 혹독했던 상황에서 감리교회나 구세군에 속해있던 소수 목회자의 자각이 있었고, 그것이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 환원운동과 연결되면서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가 본격화되었다고 밝힌다.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는 일제 말기에 집단적으로 신사참배에 참여하는 것을 가까스로 면하고서 해방 이듬해에 이때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순수성과 일치를 주장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여 다음과 같은 선언문(「기독(基督)의 교회 합동선언문」)을 발표했다고 한다(1946.8월).

“우리 기독의 교회는 신약 시대에 그리스도께서 창립하신 교회로 돌아와서 각각 분열된 기독교에서 신약 시대의 기독의 교회로 같이 돌아오도록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지(聖旨)를 순응하여 합동 통일 운동을 선언하노라. 신자는 말씀에 비추어 각각 교파에 속한 자가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인데 각각 속한 단체의 헌법 규칙을 존중시하고 분열됨으로 다투고 있으니 성 바울이 기록한 성경 말씀에 위반되는 것은 구구한 설명을 요하지 않는다. ... 다시 조선 교회의 실정을 살펴보면 우리 조선 각 교파가 악마 왜정 시대에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日本 基督敎 朝鮮敎團)이라는 명칭으로 합동 통일한 사실이 있었다. 그러면 악마에게 굴복하여 신사 참배의 합동 통일은 하면서도 주님 말씀인 성경의 교훈대로 각 교파 신도의 통일을 부인할 수 있을까? 만일 부인한다면 성경 말씀인 주님의 성지를 반역하는 일이다. 삼가 조심하라. 그런즉 합동 통일함에는 어떠한 방법으로 할 것이 아니라 신약 시대의 교회로 돌아가자, 신약 시대의 교회를 찾으면 신약성경에서 찾자.”(미주 3)


여기서 분명히 서술된 대로 어떻게 이제 막 식민지 처지에서 벗어난 변방의 한 미약한 나라의 교회가 그것도 그 복음을 전해 받은 지도 얼마 안 되는 어려운 처지에서 교회 전체의 2천여 년 역사를 모두 뒤로 돌리는 일을 생각하게 되었을까? 어떻게 그들은 기독교 초대교회의 ‘원형’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창하게 되었으며, 신약성서의 ‘그리스도의 교회’가 가르쳐준 대로 다시 그 본래적 하나 됨과 교회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고 호소하게 되었을까? 이러한 일은 오늘 한국 개신교가 오랜 분열과 갈등을 뒤로 하고 다시 여러 형태의 에큐메니즘을 말하는 시점에서도 어려운 일이다. 특히 오늘날 한국과 한국 교회가 크게 성장하여 더 이상 서구 교회나 교파나 교단 등에 좌우되지 않고 개별적으로 개체 교회의 존재 가능성이 훨씬 커진 상황에서도 힘든 일인데, 이신은 이 일을 이루는데 온 힘을 쏟으면서 자신의 믿음의 일을 수행해 나갔다.

그래서 더욱 묻게 된다.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신약성서 히브리서의 유명한 언명인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11:1)가 지시하는 대로 몸은 현재에 있으면서 그의 의식으로는 과거의 어떤 ‘선험’이나 ‘원형’에 대한 뚜렷한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거나 아니면 지금 뚜렷이 보이지는 않지만 앞으로 미래에 이루어질 어떤 일에 대한 확고한 상(像)을 가지고 있어서 그 일의 성취를 위해서 애쓰는 것을 말한다. 

믿음은 이렇게 지금/여기에 있으면서 과거와 미래, 이미 있음과 아직 아니의 공간을 통합하고, 아니 그보다 그 시공간 자체를 창조하는 일인지도 모르기 때문에 인류 동서의 많은 성찰적 지성들은 이 믿음이야말로 진정으로 인간 고유의 일이고, 마치 ‘언어’처럼 인간에게 고유하게 ‘선험적’으로 놓인 어떤 “선험성”을 말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인간 존재의 “신적 속성”을 지시하는 것이라는 의미이겠다.(미주 4) 
그래서 이 믿음을 가리키는 동아시아의 언어인 ‘신’(信)도 ‘인간’(人)과 ‘언어’(言)의 합성어로 이루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믿음의 일은 여느 보통의 인간사의 일과는 달리 현재를 떠나는 일이기 때문에 주로 현재에 몰두하는 일반 사람들로부터 잘 환영받지 못한다. 오히려 배척을 당하고, 미움을 받으며, 몰이해와 배타 속에서 소외를 겪는다. 이신은 인간 삶에서 참으로 소중한 일이 ‘믿음’을 지니는 일이고, 그것이 인간 삶에서 그렇게 근본적인 일(“그루터기”)이기 때문에 거기서의 자유, “신앙적 주체성”을 찾는 일이야말로 참으로 긴요한 일이라고 보았다. 그는 그 일을 위해서 많은 고통을 겪었고, 고독하고 빈한한 삶을 살았다.

그의 딸로 태어나서 어른이 되고 보니, 특히 오늘날과 같이 외부적으로 드러나는 신앙생활의 유무와 상관없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실질적인 유물론자가 되어서 살아가는 초자본주의 시대에 살다보니 사람들이 그 드러나는 것 이전 또는 너머에 있는 ‘진실’을 위해서, 아직 그 의미가 분명하지 않고 잘 보이지 않는 어떤 ‘뜻’을 위해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실감한다. 오늘의 물질주의와 자본주의 시대에는 그러한 믿음의 일을 위해서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자신에게 돌아올 물질적 이득과 소득을 포기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이라는 것을 더욱 깨닫기 때문에 나는 아버지의 삶을 반추해 보면서 나 자신은 그러한 믿음을 거의 못 배운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생전에 그가 많이 좋아했고, 그래서 주저 두 권을 번역해내기까지 한 러시아의 사상가 N. 베르댜예프(1874-1948)에 따르면 오늘 우리 시대는 온통 부르주아지의 노예성에 사로잡혀 있는 시대이다. 
그것은 ‘돈’과 ‘자아’에의 노예성인데, 여기서 인간은 세상에 깊이 뿌리를 박고 스스로 서 있는 이 세상에 만족하고 있다. 부르주아는 세계의 허영과 허무함에 대해서는 무감각하며, 경제적 발전의 무한을 인정하나, 그가 인정하려는 무한은 그가 인식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의 것일 따름이라고 지적한다.(미주 5) 이신은 이러한 부르주아 사회의 깊이 없음과 불신, 자아에의 집중을 비판하면서 다시 인간 존재의 선험성과 초월성을 강조하며 그 세계에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어냈다. 그런 아버지의 삶을 반추하면서 나는 그가 어떻게 그러한 믿음에 이르게 되었을까를 묻는다.

인간 의식의 고양을 한껏 추구했던 20세기의 인지학자(人智學者) 루돌프 슈타이너(1861-1925)는 “어떻게 하면 더 높은 인식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어린 시절에 너무 일찌감치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공부에 내몰린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 오히려 더 물질에 집착하고, 믿음과 상상력이 떨어지고, 빈약하고 이기적인 사람이 된다고 지적하였다. 몸과 선한 의지로 세상에 튼실하게 발을 딛고 서기 전에 서둘러서 추상의 세계로 내몰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온갖 현실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믿음으로 사셨던 아버지 이신은 어린 시절, 특히 그 어머니로부터 몸과 마음과 감정을 잘 배려 받았기 때문에 그 일이 가능해졌는가?

사실 내가 알고 있는 우리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아주 조금이고, 그 분은 원래 할아버지의 첫 부인이 낳은 아이들이 모두 죽자 속임수로 다시 결혼한 할아버지로 인해서 힘든 삶을 사셨다고 한다. 그 가운데서도 4남매의 양육을 위해 혼신을 다하시다가 6.25 전쟁의 와중에 급작스럽게 돌아가신 분이었고, 그 속에서 첫 자손으로 태어나신 아버지가 성인이 되어서 믿음의 전회를 감행했던 일들도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매우 어려운 시기에 이루어진 것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더욱 이러한 질문을 한다. 그러면서 나는 생각하기를, 이것은 어쩌면 앞에서 언급한 인간 ‘언어’에 대한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믿음’이라는 것도 나라는 주체의 능동성보다는 그보다 먼저 내가 믿어지는 선험성과 수동성이 함께 하는 것이고, 이 수동적이면서도 능동적이고, 강요당하면서도 자유로운 두 가지 속성, “서로 반대되는 두 성질의 통일성”이기 때문에 믿음이 “신적 속성”을 가지는 것이 아닌가 여겼다.
“믿음은 우리에게 앞서 주어진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믿음을 갖기 이전부터 이미 믿음의 대상이었다. 인간은 자신이 대상이 되었던 그 믿음을 통해서 어떤 대상을 믿을 수 있다.”(미주 6)




“인간은 자기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라 앞서 주어진 자유로 인해 자유로운 존재다.”(미주 7)


이신은 이 믿음으로 해방 직후의 극심한 혼란기에 직장을 그만두고 신학을 택했고, 6.25전쟁의 와중에 어머니를 잃고 가족이 흩어지는 경험 속에서 가난한 ‘그리스도의 교회’로 들어갔으며, 그 교회에서도 외국 선교사들과 성서해석과 성령 이해의 차이로 그나마 안정된 자리를 떠나야 했다. 40대의 늦은 나이에 어린 자식들과 부인을 두고 미국 유학길에 오른 일, 돌아와서도 여전히 안정과 안위대신에 산동네 무허가촌의 궁핍한 삶에 머물렀고, 나중에는 그 거처도 유지할 수 없게 되자 지방의 산골로 내려가신 일. 이런 모든 일들이 그의 믿음의 선택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당시 미국 유학까지 한 박사였지만 주변에는 항상 가난한 민중과 학벌이 높지 않은 변방의 목회자들뿐이었다. 심지어는 병이 들어 위급한 상황이 되었지만 병원에 가는 대신 기도원으로 들어가셔서 그곳의 한 좁고 허름한 방에서 돌아가셨다. 그러면서도 그는 ‘천은’(天恩)을 말하며 가족들에게 잘 지낼 것을 당부하고 기쁜 모습으로 가셨다.

어디에서 그런 믿음의 지속하는 힘이 나왔으며, 어디에 근거해서 그는 그런 어려운 가운데서도 읽고, 쓰고, 선포하고,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는 일을 그만두지 않으면서 또 동료들을 모아 세상의 달라짐과 교회의 변화를 위해서 끊임없이 시도하는 삶을 살 수 있었을까? 이 모순된 상황이야말로 그의 믿음이 단순한 그의 의지가 아니고 ‘신의 의지’이고, 그 믿음이 ‘신적 기원’을 가진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비록 오늘날의 우리는 이 기원을 갖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내 앞에 먼저 주어진 것에 대한 의식을 잘 하지 못하면서 모든 것을 자아의 주관으로 돌리고, 그래서 신도, 전통과 권위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

하지만 그래도 이 믿음이 하나의 ‘기적’(a miracle)처럼 보이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마치 한나 아렌트가 인간 삶을 어쩔 수 없이 ‘조건 지어진 존재’(the human condition)로 보지만 그 삶의 활동 중에서 인간에게 가장 고유한 것은 “행위”라고 하면서 그 행위는 “결과의 예측불가능성”과 “과정의 환원불가능성”, 그리고 “작자의 익명성”이라는 불행한 요소를 가짐에도 불구하고 인간 역사를 가득 채우는 “기적”이라고 본 것과 유사하다.

미주
(미주 1) J. H. Pestalozzi, Auswahl aus seinen Schriften, Bd.1, Hrg. von A.Bruelmeier, Bern/Stuttgart 1977, p.278-279.
(미주 2) 李信 지음, 『슐리얼리즘과 영靈의 신학』, 이은선․이경 엮음, 동연, 2011, 300쪽.
(미주 3) 같은 책, 346쪽.
(미주 4) 막스 피카르트, 『인간과 말』, 배수아 옮김, 봄날의 책, 2013, 17쪽.
(미주 5) 니콜라스 A. 베르댜예프, 『노예냐 자유냐』, 이신 옮김, 늘봄, 2015, 244쪽. 이 책은 원래 이신이 돌아가시기 2년 전인 1979년 가을에 번역 출간되었던 것을 2015년 필자에 의해서 다시 수정 보완되어서 출판사 늘봄에서 재간되었다.
(미주 6) 막스 피카르트, 같은 책, 33쪽.
(미주 7) 같은 책, 1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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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선(한국信연구소, 세종대 명예교수)

업데이트 2018.11.03 



2. 믿음의 ‘고독’(性)에 대하여

믿음의 행위는 결과를 예측하기 어렵고, 과정을 다시 뒤로 돌릴 수 없으며,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과거나 미래와 관계하는 일이므로 현실에서 많은 장애와 어려움을 만난다. 그것은 시간과 시대를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런 믿음의 삶에서 ‘가족’은 어떤 의미가 될까? 믿음 삶의 또 다른 근거일까 아니면 한없는 장애와 걸림돌일까? 우선은 믿음의 사람에게도 가족은 자신의 길을 가는데 가장 가까이에서 위로를 주고, 이해와 힘을 주는 지지대와 기반이라고 여겨졌을 것이다. 그래서 바로 그 가족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이해를 얻지 못하고 비난 받는다면 그 실망과 좌절은 가장 클 것이다.

아버지 이신의 경우도 그러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그는 신학대학을 가기 위해서 아버지와 심한 갈등을 겪어야 했고, 그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부모님을 통해서 혼인하게 된 아내와 자신의 생각을 깊이 나눌 수 없다고 여겼을지 모른다. 두 분은 서로 무척 애틋해 하셨지만 자주 다투셨다. 사실 아버지 이신은 부인뿐 아니라 자식들에게도 찬찬히 길을 설명하고 그들의 의견을 듣고 이끄는 분이 아니었다. 자신 동생들과 자식들의 삶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중요한 선택들을 주도하셨지만 갈등이 있었고, 반목도 있었다. 그런데 내가 어른이 되어서 가족을 꾸리고 나름의 뜻을 붙들고 살려다 보니 아버지 이신의 고통과 좌절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을 더 잘 상상해 볼 수 있다. 이렇게 믿는 자가 겪는 어려움 중에서 가까운 가족들로부터 받는 괴로움이 제일 큰 것이었을 것이라고 상상해 본다면 믿는 자는 그래서 참으로 ‘고독한’ 자이고, 그런 면에서 고독을 가장 친한 친구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는 것 같다. ‘가족’이라는 것은 사실 믿는 자로 하여금 가장 강하게 ‘현재’에 함께 할 것을 요구하는 자이고, ‘일상’을 청하는 존재이므로 그 충돌을 잘 예상할 수 있다.


이신은 1970년대에 저술한 신학 논문「고독과 저항의 신학-키에르케고르와 본회퍼 신학의 비교 연구」에서 키에르케고르를 초월자 앞에서의 열정과 믿음의 삶을 위해서 “세상의 그 어떤 고독과도 비교할 수 없는 고뇌가 따르는” 삶을 산 자로서 소개하고 있다.(미주 1) 많이 회자되듯이 키에르케고르는 어느 날 인지하게 된 자신 가계(아버지) 내의 ‘죄’에 대한 첨예한 의식으로 깊이 사랑하던 약혼자와의 결혼도 포기하고, 자신의 이름을 숨기면서 철저한 고독 속에서 신앙의 의미와 기독자의 믿음이 무엇인가를 밝혀내는 일에 몰두했다. 믿음을 지니고 산다는 일은 과거와 미래를 여기 지금에 가져와서 그 의미성을 현재적으로 살아내는 일이기 때문에 이 신앙의 “동시성”으로 인해서 일반적인 합리성에 균열을 일으키고, 스캔들을 일으킨다. 이신은 두 사상가를 특히 이러한 ‘신앙의 동시성’이라는 개념으로 풀어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와 동시대에 사는 것처럼 그의 믿음과 다시 그에 대한 믿음을 우리 시대에 우리 각자의 신앙으로 재현하는 일이고, 그러기 위해서 지독한 고독과 고통도 참아내야 하는 일이라고 키에르케고르는 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이란 그저 값싼 은총이 아니라 아주 값있는 것이고, “영원한 심각성”을 지니는 일이라고 본 것이다:
“기독교는 영적인 것이다. 영적이란 내면성이요 내면성은 주체적인 것이요 주체적인 것이란 근본적으로 열정적인 것이다. 그 최고 정점은 영원한 행복 속에 있는 무한한 인격적인 열정적 관심 그것이다.”(미주 2)


이렇게 키에르케고르는 신앙을 위한 고독을 기독교의 정수로 이야기했지만 오늘날 이 고독을 따르려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히려 어떻게든 거기서부터 벗어나고자 하고, 그것은 질병과 연약함으로, 그 반대로 유대와 친밀과 소속은 선과 강함으로 찬양된다. 하지만 오늘 우리 인류의 삶이 이제 전통적 의미에서의 생물학적 가족적 삶마저도 심하게 흔들리고 있고, 유기체와 비유기체(로봇)의 구분도 점점 더 모호해지는 상황으로 들어가면서 인간적인 고유함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의 물음 앞에 적나라하게 노출되고 있다면, 오히려 고독과 단독자로서의 삶을 새롭게 의미화해서 또 다른 차원의 생명적 삶을 탄생시키는 계기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즉 오늘날 참된 믿음이 매우 드물어졌고, 그래서 무엇이든 지속하고 약속할 수 있는 힘이 실종된 상황에서 ‘고독’으로 단련되어 몰두할 수 있고, ‘익명’(anonymity)을 견뎌낼 수 있는 더 높은 차원의 해방된 정신과 영적 자유의 정신으로의 고양을 말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의 삶이 고독을 피할 수 없는 상황으로 들어섰다면, 아니 그 고독이야말로 우리 정신의 더 높은 고양(신앙의 동시성)을 위해서 긴요하기까지 하다면, 키에르케고르나 이신의 믿음을 위한 고독의 메시지를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할 필요가 없는, 그와는 반대로 오히려 정신의 참된 자유와 영적 성장을 위해서 받아들일 수 있는 가르침으로 삼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믿는 자의 고독에 대한 이야기는 ‘죽음’과 ‘영생’에 대한 이야기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이신은 1980년 6월부터 1981년 12월 세상을 뜰 때까지 순복음신학교를 통해서 관계 맺게 된 순복음 교회 청년 선교지 <카리스마>에 「카리스마적 신학」이라는 독특한 글을 연재하셨다. 오랜 동안 그가 생각해 왔고, 마침 그것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고자 했지만 충분히 펼치고 가지 못한 새로운 조직신학으로서의 “영(靈)의 신학”, “초현실주의 신학”에서 그는 삶과 죽음을 논한다. 거기서 그는 밝히기를, 사실 사람은 “생리적으로 종족적으로 혈통적으로”는 오히려 죽지 않고 영속적으로 목숨을 이어가는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생물학의 유전법칙에 의해서 그의 유전인자는 계속적으로 자손이나 종족 등을 통해 이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참 죽음이란 바로 그의 “인격”이 죽는 것을 말하는데, 그에 따르면 사람은 인격적인 존재로서 그것은 “생리적인 법칙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이어서 이것은 유전적으로 부모에게서 물려받는 것이 아니요 그 근원이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순전히 정신적인 영역이요 자유의 영역으로서 말하자면 영원한 곳에서 날아 들어옴이요 그 인간이 갖는 독특성이요 유일회적인 것”이라고 서술한다.(미주 3)

이신은 인류 문명의 과학적 성과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니라 과학으로 아직 들추어내지 못한 ‘인격’과 ‘영’과 ‘초현실’의 차원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죽음 이해도 달라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생물학적인 죽음은 이제 “생리적으로” 허구이기 때문에 염려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인간에게 있어서 진정한 죽음인 인격의 죽음에 대해서 관심해야 하는 시대가 온 것임을 밝히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의 믿음에 대한 강조와 고독을 받아들이는 입장, 몸은 불사하지만 오히려 인격의 죽음을 말하는 모든 이야기가 오늘 ‘인공지능’(AI)과 ‘초인간(transhuman)’을 말하는 시대에 더욱 의미 있게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을 여기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돋아나고 또 자라는 생리적인 것의 죽음이 아니라-어차피 이런 생리적인 것은 죽지 아니하는 것이고-그러한 인격의 무한한 가능성의 요소의 멸절滅絶이요 알기 쉽게는 역사적 시간적으로는 그 영원한 씨(種子)가 한 번도 싹터보지 못하고 무서운 혹한 때문에 고사枯死하는 것이요 생존경쟁의 싸움터에 한 번도 써보지 못한 무한한 위력을 가진 불발탄인 것인데 사실은 누구나 다 이런 인격의 영원성을 갖고 있는데도 생존경쟁의 하찮은 이런 일 저런 일 때문에 한 번도 써보지 못하고 아깝게 사장死藏되어버리는 것이요 또 이어가는 이 역사의 휘몰아치는 추위 때문에 한 번도 인격의 아름다운 싹을 틔워보지 못한 채 시들어버리고 마는 것이다.”(미주 4)


앞의 아렌트도 오늘날 사람들이 “영원성”(eternity)에 대한 관심을 모두 잃어버리고 너나없이 모두가 자신의 생물학적 생명에만 관심하는 노동자가 되어버렸다고 지적하였다.(미주 5) 또한 이와 유사한 근대 부르주아 인간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베르댜예프에게서 확실하게 들을 수 있는데, 그에 따르면 부르주아는 자기를 초월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존재이다. 왜냐하면 초월은 그가 지상에 정착하려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며, 그래서 그에게서의 신앙과 종교는 “항상 유한한 종교이며, 유한에 연결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에게 종교의 질은 그것이 이 세상의 조직에 헌신하는 봉사, 이 세상에서 그의 지위의 보존에 대한 봉사에 의해서 측정된다.”(미주 6) 베르댜예프는 이러한 부르주아 인간의 문제는 단순히 사회구조의 문제가 아니라 “영혼의 구조의 문제”라는 것을 강조하는데, 그에 의하면, “부르주아는 피안적 세계의 존재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종말과 최후의 심판에 대해서 아무런 감각도 없다. 그들은 종말과는 인연이 없는 무리들”이기 때문이라고 비판한다.(미주 7)


그런데 사실 서구 역사에서 우리는 이미 플라톤에게서 매우 유사한 관점의 이야기를 들었다. 즉 그가 이상국가를 세우기 위해서 넘어야 하는 세 가지의 파도로서 그 중 그 하나를 ‘처자공유’를 통한 생물학적 가족주의를 넘어서는 일로 지적했다면, 베르댜예프나 이신의 삶과 죽음, 인격에 대한 이야기도 이와 유사한 흐름 속에 놓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신은 사람이 생리적으로 사는 것은 “다만 생식하고 번식하는 것으로 이어가는 삶”이라고 지적했는데, 베르댜예프는 그의 『인간의 운명』에서 이와 유사하게 ‘속’(屬, genus)을 통한 생명의 연속은 “임신을 통해 계속되는 삶을 알 뿐 영원한 삶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일종의 성적(性的) 범신론”이라고 비판했다.(미주 8) 여기에 대해서 베르댜예프는 “인격”personality)이라는 개념을 한없이 고양시켜서 바로 그렇게 생리적으로 계속되는 세계의 삶에 대해서 인격은 “침노”해오며, “돌입”해 와서 그 세계를 “정복”하고 “초극”하는 또 다른 “우주”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그 인격이란 “우주의 일부가 아니고 오히려 우주가 인격의 일부이며 그 질”이고, “인격은 예외이지 법칙이 아니다.”라고 선포했다.(미주 9)

나는 이 이야기들에서 모든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남성가치 위주의 형이상학적 이원론의 흔적을 본다. 물론 베르댜예프 자신도 분명히 밝히기를 자신의 인격주의는 헤겔의 일원론보다는 칸트의 이원론에 더 가깝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19세기 이후의 서구 생철학이 세계 이해에 나름으로 기여했지만 그것은 “우주적이며 사회적인 과정 속에 인격을 해소시킨다”. 대신에 자신의 인격주의는 그에 비해서 그 안에 “모순과 역설”을 담지한 “종말론적 전망”이고, “신비”라는 것이다.(미주 10) 그는 분명한 어조로 “신적-인간성의 이 신비를 동일철학, 일원론, 내재론의 빛 아래서 이해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하며, “신-인성God-humanity에 관한 진리는 교의적 신조나 신학적 교리도 아니며 경험적 진리 곧, 정신적 체험의 표현이다”라고 언명한다.(미주 11)

이렇게 베르댜예프나 이신이 강조하는 믿음의 종말론적 성격과 인격적 신비의 의미를 나 자신도 어느 정도 동의하는 바이며, 특히 오늘날은 온갖 과학주의의 비등으로 정신이 철저히 객체화되고, 기계화의 위험 앞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인격’과 ‘정신’이라고 하는 것이 특히 지금 이곳의 ‘몸’의 현실이 없으면 ‘힘없는’ 또는 ‘잔인한’ 관념일 뿐이며, 우리가 지금 논하고 있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도 잘 불러오지 못한다는 것을 그의 ‘딸’로서, 그리고 동아시아의 ‘여성’과 ‘엄마’로서 경험해왔기 때문에 순전히 그저 그들의 입장에 동의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미주 12) 아니 어쩌면 이신 자신도 이러한 인격과 자유와 자기초월에의 한없는 비상과 가치매김에도 불구하고 여기 이곳의 현재로부터 더 온전히 벗어나지 못해서 무척 괴로워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는 유학 시절에 고국에 남기고 간 병든 딸이 죽자 「딸 ‘은혜’(恩惠) 상(像)」이라는 시를 지으며 고통스러워했고, 그 이전에 6.25이후 모두 돌아가신 부모님을 대신해서 동생들을 돌보아야 했으며, 가족들의 생계와 네 자녀의 교육을 위해서 죽을 때까지 몸으로 고생하며 가족적 삶을 지켰다. 그 덕분에 우리는 대학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나는 그처럼 신학자가 되어서 그의 생각을 밝히고 이어가는 일을 고민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오늘 우리 시대가 눈에 보이는 것에만 몰두하고, 대신에 ‘믿는다’는 것이 아주 드물어지고 어떻게든 고통과 아픔은 피하려 하고, 그래서 ‘죽음’은 더욱 외면당하고 억눌려지는 상황에서 진정으로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영생’과 ‘부활’이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해서 다시 관심을 촉구하고 대면하도록 초대한다. 이신은 인격성의 핵심인 자유는 “고난을 감내하고 고통을 견디는 능력”이며, “고뇌에 대한 능력이 없으면 인격이란 있을 수 없다”는 말을 자신의 삶으로 전한다. 그의 믿음의 고독은 “출발”이라는 제목을 가진 다음의 시에서도 잘 드러나는데, 나로서는 그것을 감당하기가 너무 힘들다:

<출발>

운명을 전당잡고
풍진을 긁어모아 새로운 조형을
마련하려고 적막한 공지(空地)를 향해 출발하나
지평이 너무 낮고
하늘이 묵념만 반복하니
행려자의 가슴은
더욱 심연의 주변만 맴돈다.

길이 아무리 멀어도
자연이 전설을 고수하는 한
초속(超速)의 물체가
시간을 침식하는 논리는
심야의 기적 소리마냥
요란스럽게 굴러가고
증명이 불가능한
이 시대의 예언이
과학의 고독 때문에
오히려 찰나적 충동 속에서
질풍처럼 전달된다.

사색이 어떤 지점으로 고양되면
불투명한 풍토가
비극의 대안(對岸)을 환상적 토질로
변모케 하고
시대적 풍조 때문에
권력을 세낸 무리들이
몽롱한 달그림자 속에서
새로운 투쟁을 계획한다.

이때 그렇게 오랫동안
기도하는
새 풍토에의 출발이
마지막 기적 소리 때문에 결단을 내리고
정오의 태양을 쪼이며
빈손마저 뿌리치고
홀로 떠난다.
그러면 가로수의 그늘이
명상의 은거지를 마련한다.(1968/8/8)(미주 13)


미주
(미주 1) 李信 지음, 『슐리얼리즘과 영靈의 신학』, 193쪽.
(미주 2) Soeren Kierkegaard, Concluding Unscientific Postscript,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68, p.33, 李信 지음, 『슐리얼리즘과 영靈의 신학』, 190쪽 재인용.
(미주 3) 李信 지음, 『슐리얼리즘과 영靈의 신학』, 306쪽.
(미주 4) 같은 책, 309쪽.
(미주 5)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같은 책,
(미주 6) 니콜라스 A. 베르댜예프, 『노예냐 자유냐』, 252쪽.
(미주 7) 같은 책, 252쪽.
(미주 8) N. 베르쟈에프, 『인간의 운명』, 이신 옮김, 현대사상총서, 1984, 322쪽.
(미주 9) 니콜라스 A. 베르댜예프, 『노예냐 자유냐』, 이신 옮김, 28-30쪽.
(미주 10) 같은 책, 8-12쪽, 44쪽.
(미주 11) 같은 책, 58-59쪽.
(미주 12) 이은선, 「한국 페미니스트 그리스도론과 오늘의 기독교」, 『한국 생물生物여성영성의 신학』,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2011, 97쪽 이하.
(미주 13) 이신 지음, 『李信 詩集 돌의 소리』, 이경 엮음, 동연, 2012, 33-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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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06

알라딘: 神學(신학)에서 信學(신학)으로 - 참 인류세를 위한 한국 信學 이은선

알라딘: 神學(신학)에서 信學(신학)으로


神學(신학)에서 信學(신학)으로 - 참 인류세를 위한 한국 信學 
이은선
(지은이)모시는사람들2024-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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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6쪽

책소개
오늘 우리 사회와 인류 문명이 맞이하고 있는 위기 상황에서, 한국 신학(神學)을 신학(信學)으로 전회해야 함을 주장하며 우리 믿음과 신앙의 물음을 정직하고 성실하게 성찰하는 숙고의 성과를 담아냈다. 포스트 근대, 인류세의 현재 상황에서 신앙과 영성에 대한 지성적 성찰과 통합학문적 인식을 통해 ‘학(學)으로서의 신학(信學)’을 이야기한다. 이는 저자가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 삶의 진정한 문제와 관건은 믿음과 신뢰의 문제라는 문제의식에서 지속적으로 신학(神學)이 신학(信學)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인식을 심화하고 확장시켜 온 결과물이다.

책은 인간 정신과 자유에 대한 이해와 성찰을 담은 1부와 성(誠)과 효(孝), 동학(東學), 역중인(易中仁) 등의 동아시아적 사유가 인류문명의 믿을 만한 보편적 토대가 될 수 있음을 역설하는 2부, 한국 신학(信學)이 주장하는 ‘신학(神學)에서 신학(信學)으로’의 전회가 어떻게 우리의 새로운 신(神) 이해와 예수 이해, 영(靈) 이해 등을 통해서 표현될 수 있는지를 드러내고자 하는 3부로 구성된다. 오늘 우리 인간 안에 하느님 모상이 여전히 있다는 것을 믿고, 하느님과 더불어 세계 구원의 길에 나설 것을 다짐하고 주장하고자 하는 책이다.


목차


책을 내며

제1부 사유와 신학

1장 사유와 신학(信學, Fideology)의 성찰을 시작하며
믿음의 학, 신학(信學)
한국적 여성신학(女性神學)의 신학(信學)
니콜라스 A. 베르댜예프의 『노예냐 자유냐』와 더불어
한국적 ‘여성신학’(信學)이 추구하는 것

2장 인간이 진정 인격(人格, personality)인가?
수수께끼로서의 인간 인격
자연과 사회의 일부가 아닌 세상 밖에서 침노해 오는 인격
인격주의와 리기(理氣), 리일분수(理一分殊) 그리고 만물의 본성[性理]
인격과 역(易), 그리고 창조적 행위력[性]
마무리 성찰

3장 인격이란 무엇인가?
인간 존재의 근본 힘으로서의 인격
인격과 이성
인격과 개인
인격과 영혼과 육체
마무리 성찰―성·명·정(性·命·精)의 삼신일체(三神一體)와 인격

4장 왜 오늘 다시 인격(人格)인가?
한없이 무시당하는 인격
왜 다시 실존인가?―인격과 실존
고뇌하고 환희를 느끼는 실존과 인격의 신적 보증
자아주의의 위험과 인격, 초인격
마무리 성찰―한국적 인학(仁學)과 신학(信學)

5장 참된 인격주의와 휴머니즘의 차이는 무엇인가?
인간학적 이해에서의 수직적 긴장
근대 휴머니즘의 한계와 초월자
인격과 성격, 사명의식, 동경과 사랑 그리고 죽음
마무리 성찰―인간공학 대 인학(仁學)과 신학(信學)

6장 존재와 자유
가장 근원적인 인격의 노예성
존재에의 노예성과 자유
존재와 사유
단독자와 특수자로서의 인격의 자유
언어와 자유
마무리 성찰―사기종인(捨己從人)으로서의 인간 실존의 자유

7장 신과 자유
신에 대한 의인(擬人)론적, 의사(擬社)론적 노예성
자유와 신비로서의 신과 만남
신정론과 무신론에 대해서
범신론에 대해서
한국 신학(信學)이 말하는 우리 안의 초월적 백신
마무리 성찰―에티 힐레숨과 우리 신앙의 미래

8장 자연과 자유
자연이란 무엇인가?
자유(freedom)에 대극하는 자연(nature)에 대한 인간 노예성
우주에의 매혹과 인간 노예성
세계 과정의 목적론적 해석과 인간 노예성
‘자연의 종말’이 아닌 ‘좋은 인간세(good Anthropocene)로’의 길
한국 신학(信學)의 인학(仁學)과 인동설(人動說)
마무리하는 말―자연으로부터의 탈노예성에 대한 극진한 예, 예수 선언

9장 사회와 자유
‘개인’과 ‘인격’의 차이와 사회에 대한 인간 노예성
사회 유기체론과 인간 노예성
가족, 부권사회, 교회와 모권제
사회적 노예성으로부터의 창조적 해방과 종말
보편과 구체, 보편의 독점과 객체화에 대한 저항
마무리 성찰―후천개벽의 종시(終始)에서 비롯되는
또 다른 자유와 평등, 평화

10장 자아와 자유
모든 인간 노예성의 내면적 뿌리, 자아에의 노예성
에고이스트의 사회 순응주의
개인주의의 노예성과 공포와 분열
인격주의와 창조적 인격의 보편적 사명
통합성[誠]과 타자성[敬], 지속성[信]의 인격을 지향하는 한국 신학(信學)
마무리 성찰―우리의 ‘오래된 미래’를 살피며 자아에의 노예성 극복하기

제2부 참 인류세를 위한 토대 찾기

1장 정의(正義)와 효(孝)
1. 오늘 지구 삶의 불의한 정황
2. 인간 도덕행위[義]의 토대와 출발점으로서의 효(孝)
3. 세계 보존의 토대로서 가족적 삶[仁]과 효(孝)
4. 믿음[信]과 사유[思]의 실행으로서 효(孝)와 인간 사명[命]
5. 우리 존재의 선험성으로서 효(孝)

2장 21세기 인류 문명의 보편적 토대로서 성(誠)과 효(孝)
1. 21세기 지구 삶의 위기와 성(誠)
2. 우리 삶의 부인하려야 할 수 없는 존재 근거로서 ‘탄생성’과 성(誠)
3. 우리 현실 삶의 생명 조건으로서 ‘다원성’(plurality)과 성(誠)
4. 미래 생명의 지속 가능성으로서 믿음의 ‘상상력’과 성(誠)
5. ‘간괘’(艮卦)의 이상과 포스트휴먼

3장 참 인류세 시대를 위한 이신(李信)의 영(靈)의 신학
1. 코로나 팬데믹 현실과 이신의 영(靈)의 신학
2. 이신의 ‘영(靈)의 해석학’과 묵시문학
3. ‘하느님은 영이시다’―이신의 하느님과 한국 信學(신학, fideology)
4. ‘신뢰의 그루터기’―이신의 예수와 한국 인학(仁學, humanology)
5. ‘복음은 예수가 우리와 함께하심’―이신의 성령과 동학적 불연기연
6. ‘영원에의 전진’―이신의 부활과 한국적 종시론(終始論)
7. 참 인류세 시대와 한반도

4장 역·중·인(易·中·仁)과 한국 신학의 미래
1. 전도서의 하느님과 때[歷]
2. 역(易)과 존재, 그리고 살아 계신 하느님
3. 중(中)과 사유[心思], 그리고 믿음[信]
4. 인(仁)과 세계, 그리고 공동의 삶
5. 인(仁)을 체득하는 공(公)의 방법
6. 한국 사상의 회통성과 새 그리스도로지

5장 퇴계 사상의 신학(信學)적 확장
1. 21세기 신실재론의 등장과 퇴계 사상
2. 퇴계 사유의 출발처로서 ‘천즉리’(天卽理)와 그의 실재론(理動)
3. 타자의 실재와 함께 하는 ‘성즉리’(性卽理)와 역동하는 마음[理發]
4. 퇴계 사유의 절정으로서 ‘정즉리’(情卽理)를 향한 ‘경천’(敬天)의 길[理到]
5. 참 인류세 세계를 위한 퇴계 ‘신학’(信學)의 의미
6. 온 세계의 참된 리화(理化)를 지향하는 신학(信學)

제3부 사유하는 신학(信學)으로의 돌파

1장 위기 시대에 한국 여성그리스도인이 믿는 예수
1. 흔들리는 우리 삶의 터전―민족, 가정, 소유권과 관련해서
2. 세 가지 주제와 관련해서 예수가 답인가?
3. 오늘도 여전히 진화 중인 ‘메시아’(그리스도)와 ‘신’(神) 이해
4. 오늘의 가족 위기와 예수
5. 우주생명 진화의 법칙으로서 자발적 자기비움과 그리스도의 도(道)
6. 생명을 낳고 살리는 여성의 길, 생명 진화의 법과 한국 여성그리스도인의 삶

2장 한국적 여성신학의 부활과 성령 이해
1. 시작하며
2. 트라우마 렌즈와 성토요일의 발견
3. 성토요일의 성령론과 요한복음의 부활 증언
4. 램보 성토요일 성령론의 한계와 불철저성
5. 聖·性·誠(성·성·성) 여성신학의 복수론적 그리스도론과 부활 이해
6. 마무리 성찰―‘구원하는 자기’의 한국 여성신학적 해석

3장 비신화화를 넘어 한국적 비케리그마화를 지향하며
1. 도올 김용옥의 『마가복음 강해』를 읽으며
2. 도올이 이해한 ‘복음’(유앙겔리온)과 마가 유앙겔리온의 고유성
3. 도올 비신화화 이해와 그 불철저성
4. 도올 부활 이해의 자기 모순성
5. 비신화화에서 비케리그마화로

4장 한국信연구소의 지향과 동서 믿음의 통합학으로서 한국 신학(信學)
1. 왜 한국信연구소를 시작하려고 하는가?
2. ‘한국적’(Korean)이라는 것
3. ‘여성주의적’이라는 것
4. ‘믿음의 통합학’이라는 것
5. 내 소원은 진정 착한 사람이 많아지는 것[所願善人多]

5장 인류세와 한반도 종교
1. 시작하며
2. 지구 지질대의 새 이름 인류세
3. 함석헌의 하느님 존재 증명과 우주의 시작
4. 일반과학적 진화론의 ‘역(逆)순’으로서 함석헌 ‘정신’[理]이해
5. 인류세 이해의 새로운 토대와 함석헌의 정신과 영[理·靈]
6. 리기(理氣) 통합적 문명 이해와 종교
7. 참 인류세를 위한 지향과 한반도 종교의 역할
8. 마음속 사랑[仁]의 불을 지닌 인동설(人動說)의 시공으로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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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P. 56 베르댜예프는 우리 시대에 인간에 관한 초월적 차원을 다시 지시하기 위해서 ‘인격’이라는, 이미 지극히 일상화된 세속 언어를 가져오면서도, 어떻게든 그 초월적 기원과 말로 다할 수 없는 이원적 모순성과 신비[神]를 표현할 수 있을까 고투하면서 ‘정신’[靈, the spiritual]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이와 유사하게 한국의 고(古) 사상도 성·명·정(性·命·精)이나 심·기·신(心·氣·身) 등의 세 쌍의 말을 가져와서 그중에서도 리(理)나 천(天)보다 훨씬 더 인간적이고 세계내적인 성(性)이나 심(心)이라는 언어로써 인간 존재의 최고의 신적 차원[三神]을 그려내고자 했다. 즉 일반 서구 기독교 사상으로부터의 고유성을 드러내 주는 러시아 사상가 베르댜예프나 중화 문명권에서 또 다른 독자성을 드러내는 한국 고(古) 사상은 훨씬 더 오묘하고 농축적인 형태로 하늘과 땅, 초월과 내재, 신과 인간, 정신과 물질, 지성과 감성 등의 두 차원을 연결하고 관계 맺게 하려고 고투한 것을 말한다. 거기서 인간의 역할, 인극(人極), ‘그냥 인간’(仁)은 그 핵심으로서 둘 사이의 긴장성을 하나로 화합해 가는 역할을 맡는다는 의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신인’(神人, Homo-Deus)의 출현을 기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접기
P. 74 21세기까지의 서구 기독교적 존재론을 다시 한번 크게 전복시키고자 한 독일 탈근대주의 사상가 페터 슬로터다이크(Peter Sloterdijk)는 그의 2009년 저술 『너는 너의 삶을 바꾸어야 한다(Du mußt dein Leben andern)』에서 인간 삶에서 어떤 경우에도 온전히 벗어날 수 없는 “수직적 긴장”에 대해서 말한다. 그것은 인간 문화가 지속적으로 권위와 계급을 탈신화화하고 해체해 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서 계속 나름의 비교와 등급, 선택을 말하는 위계 의식의 구속력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을 지시하는 것이다. 즉, 인간과 그 삶은 강한 평등주의적 에토스에도 불구하고 항상 ‘더 높은’ 또는 ‘더 깊은’ 것에 관한 관심과 의식을 가지고 사는 것을 말하는데, 비록 그 수직적 긴장의 내용이 달라질 수 있지만, 이 비교의식, 항상 더한 것을 추구하고 더 높은 것을 바라는 척도들의 실재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지적이다. 그래서 켄 윌버 같은 사상가도 우주 존재자 전체를 ‘더’ 공평하게 자리매김하기 위해서 하이라키(hierarchy, 계층적 위계 체제)를 다시 가져오지는 않았지만, 대신 각 상위 차원이 하위 차원을 초월하고 동시에 포괄하는 ‘홀라키’(holarchy, 계층구조)라는 새로운 위계론을 말했고, 여기서 베르댜예프가 말한 인격의 신적 보증이라는 언어도 나는 바로 그러한 인간 이해에서의 수직적 긴장의 실재가 표현된 것이라고 본다. 다시 말하면 인격에 대한 최고의 보증을 위해서, 최종의 증거는 여전히 ‘신’(神)이라는 언어를 통하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다고 보았으므로 그러한 내적 아이러니를 감수한 것이라고 보는 의미이다. 접기
P. 112 오늘 신(神) 부재와 믿음[信]의 어려움과 코로나19 팬데믹과 같은 범 인류적 문명 위기 상황에서 에티 힐레숨의 신비와 기적의 신앙이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특히 절망과 좌절 속에서 앞길을 헤쳐 나갈 힘을 크게 잃고서 방황하고 있는 한국 젊은이들에게 이 힐레숨의 이야기는 참된 ‘초월적 백신’으로 역할할 수 있다. 오늘 인류는 점점 더 큰 불확실과 지금까지 공동체 삶의 기반이 총체적으로 흔들리는 큰 위기에 봉착했고, 거기서 전통의 절대자, 기계론적인 구원의 신은 참으로 무력하고 인간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깊은 아시아적 내재 영성과 초월의식과 많은 접점을 보이며, 그러나 그때까지 자신이 속해왔던 전통 고유의 인격적 신앙의 역동성과 친밀성, 주체성을 간직하고 있는 힐레숨의 신앙 이야기와 인간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믿음은 우리에게 진정 참된 자유의 신앙적 길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접기
P. 196 오늘 우리 시대의 불의와, 자연과 사물에까지 뻗친 조작과 왜곡, 훼손 앞에서 주로 맹자의 언어를 들어서 어떻게 이 난국의 대한 해법을 찾을 수 있겠는가를 살펴보았다. 바로 맹자가 살았던 시대처럼 오늘 우리 시대는 세계의 힘 있는 국가들이 다시 군웅할거 하는 시대가 되었고, 특히 오늘 한반도를 중심으로 그 일이 더욱 고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우리는 원치 않게도 남북으로 나뉘어 부모형제도 서로 소통하지 못하고 그 생사 여부도 알지 못하는 시간과 더불어 두세 세대를 보내고 있다. 그렇게 인간 삶의 기초가 되는 가족과 가정의 삶이 파괴되면서 거기서 이어지는 남북한 사회 내부의 악과 국제적 관계에서 우리의 처지는 그 비참함과 목소리 없음이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예전 우리나라, 동이족의 나라는 맹자가 인류 삶의 모범으로 지극한 효의 성인으로 끊임없이 내세우는 순 임금의 출발지였다고 한다. 그런 맹자의 정신이 한민족의 정서를 제일 잘 대변하고 있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특히 부모를 잘 섬기고 서로 모여서 음식과 즐거움을 나누며 격려하는 가족과 친족, 마을 공동체가 잘 발달한 나라로 이름이 높았다. 중국이나 일본 등의 이웃나라들에서보다 『효경』이 특히 교육과정에서 중요시되었다는 것도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하지만 오늘의 현실은 세계에서 자살률 1위와 특히 노인자살률과 청소년 자살률이 높고, 출산율이 세계 최저라는 상황인데, 그것은 우리의 삶이 어느 정도로 피폐해져 있는가를 잘 드러내 준다. 접기
P. 228 19세기 후반 한국의 역학자 김일부(金一夫, 1826-1898)는 그 간괘를 중시하면서 여성의 일, ‘곤도’(坤道)의 일이 우선되는 후천개벽의 『정역』(正易)을 제시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페미니즘 시대에는 여성과 남성의 역할이 단지 겉으로 드러난 신체적 조건에 따라서 결정되고 한정할 수 없는 시대이다. 그러므로 이제 인간 누구나의 보편적 도로서 그 곤도에 잘 부합되는 효(孝)와 성(誠)의 도를 우리 모두가 더욱 힘써야 하는 덕목으로 가르쳐 주는 의미라고 읽고자 한다. 간괘가 잘 밝혀주듯이 그 길은 자신을 숨기고 자아를 좀 더 내려놓으면서 인류의 보편을 따르는 길이고[捨己從人], 그 일에서 장딴지에서 기름이 빠지고, 등뼈가 열리는 것과 같은 고통이 있을지라도 새로운 시대의 탄생을 위해서 지속함[誠]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렇게 간괘의 육오(六五)는 “간기보 언유서 회망”[艮其輔 言有序 悔亡]이라고 하고, 다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말하기를 “상구 돈간길”[上九 敦艮吉]이라고 했다. 즉 멈추어 서서 자기를 주장하는 것을 내려놓고, 시대를 앞서 보는 초인의 믿음을 가지고 다시 한번 인내하며 말을 살피고 아끼며 참으로 겸허한 자세(孝, the void self/selfless self)로 나와 같이 하늘의 뜻으로 태어난 이웃들과 언어로 잘 화합하는 일[誠]이 우리의 인간 규정이라는 것, 이 인간 규정[言]을 우리 몸과 삶과 문명으로 이뤄낼 때까지 지속하고 인내하는 것[成]이 우리가 갈 길[誠]이라는 것을 밝혀준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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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이은선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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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문명의 전환에 관한 지속적인 관심으로 종교(聖)와 정치(性), 교육(誠)을 함께 엮어서 ‘믿음(信)을 위한 동서 페미니스트 통합학문(信學)’의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다. 2018년 세종대학교를 명예퇴직한 후 한국信연구소 Institute of Korean Feminist Integral Studies for Faith를 열어서 ‘신학(神學)에서 신학(信學)으로’의 모토 아래서 ‘한국 신학(信學)’과 ‘인학(仁學)’의 구성에 힘쓰고 있다. 오늘 문명위기와 전환의 때에 우리 사회에서 여남의 구분을 떠나 ‘사유하는 집사람’이 많아지는 것이 긴요하다고 보며 강원도 횡성 산골 현장(顯張)아카데미에서 신학자 남편과 더불어 여러 활동을 함께하며 살고 있다. 동서 인류 문명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들 중의 하나인 바젤대학과 성균관대학교에서 기독교 신학과 유교 철학을 공부했고, 세종대학교 교육학과에 재직하면서 동서 철학과 종교, 교육의 일들을 여러 학회들에서 회장과 부회장 등으로 역할하면서 연구해 왔다.
최근 저서로 『동북아평화와 聖·性·誠의 여성신학』(2020), 『사유하는 집사람의 논어 읽기』(2020), 『한국 페미니스트 신학자의 유교 읽기-神學에서 信學으로』(2023) 등이 있으며, 공저로는 변선환 아키브와 현장아카데미에서 펴낸 ‘이후(以後)’ 신학의 세 시리즈가 있고, 선친 故 이신 박사 40주기 기념 『李信의 묵시의식과 토착화의 새 차원』(2021)과 백낙청 TV를 통해서 탄생한 『개벽사상과 종교공부』(2024) 등 다수가 있다. 『지혜를 찾아서-왕양명의 삶과 사상』(1998), 『한나 아렌트-삶은 하나의 이야기이다』(2022)를 번역했다. 접기

최근작 : <神學(신학)에서 信學(신학)으로>,<새 시대 새 설교>,<개벽사상과 종교공부> … 총 31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현대인의 애증이 교차하는 길목, 종교와 신앙
오늘 한국 사회에서 종교는 대체로 존중받기는커녕 혐오의 대상까지 되어 간다. 1970~1980년대 내내 한국 사회 민주화의 성지로 자리매김하던 종교 시설, 민권과 민주의 수호자로 존경받던 종교 성직자의 모습 대신 사회분열의 최전선에서 종교인의 모습을 목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한편으로 도무지 접점 없이 대치하기만 하는 정치나 양극화로 치닫는 사회와, 지구위기, 환경위기, 기후위기의 복합위기 속에서 내일의 생존을 기약할 수 없는 ‘인류세’ 시대에 영성(靈性)에 대한 갈급함이나 종교나 믿음 등 근원적인 해법을 요청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이러한 상호 모순적인 두 가지 현상은 사실 하나의 요구가 두 갈래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행태를 탈피하여 새로운 믿음과 새로운 영성을 제시하는 종교로 거듭나라는 요구이다. 그리하여 다시금 현재와 미래, 인간과 지구 모두에게 희망을 제시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신학(神學)에서 신학(信學)으로, 전회를 꿈꾸다
이은선 교수의 『신학(神學)에서 신학(信學)으로-참 인류세를 위한 한국 신학(信學)』은 한국 사회뿐 아니라 전 지구적인 범위의 현재 위기에 대한 근본적이고 본원적인 원인을 찾아내면서 정치와 경제, 교육 등에 종교와 신앙, 영성 등의 차원을 연결하고자 하는 노력의 과정을 담고 있다.
우리가 처한 국면을 포스트 근대’로 규정하고, 우리에게 긴요한 믿음과 신앙에 대해 사유와 지성적 성찰과 통합학문적 인식을 부가하는 ‘신학(神學)에서 신학(信學)으로’의 전회를 통해 우리 사회와 인류 문명이 맞이하고 있는 위기를 극복하는 길에 대하여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신학(信學)이라는 말은 2014년 세월호 참사를 맞이하며 저자가 떠올린 개념이다. 저자는 “이제 우리 삶의 진정한 문제와 관건은 바로 ‘믿음’과 ‘신뢰’(信)의 문제이고,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의 우리 ‘신학’(神學)은 ‘신학’(信學), 즉 ‘믿음의 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수백 명이 수장당하고도 온전한 진상 규명과 궁극적인 책임자 처벌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믿음과 신앙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과연 가능하기나 한 것인지, 믿음과 신뢰의 기본 개념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로부터 재구축된 것이다.
세월호 참사 당시의 국내외 정세와 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의 전방위적 학살 행위 등이 난무하는 오늘의 국내외 정세는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 몸과 정신, 자아와 세계, 초월과 내재, 종교와 정치 등이 도대체 어떻게 서로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거듭 묻지 않을 수 없는데, 그것이 곧 ‘신학’(信學), ‘믿음’에 관한 물음이라는 것이다.

『신학(神學)에서 신학(信學)으로』
Ⅰ부 「사유와 신학」에서는 니콜라스 A. 베르댜예프의 대표 저서 『노예냐 자유냐』를 핵심적으로 살핀다. 베르댜예프는 정신으로서의 인간 인격과 자유가 자연과 물질의 세계와 깊이 상관되어 있지만, 결코 그 후자로부터 연역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변증하려 한 20세기 전반기의 러시아 사상가다.
II부 「참 인류세를 위한 토대 찾기」 첫 번째 <정의와 효>는 동아시아적 효(孝)가 인간 정신에 내재하는 ‘존재론적’ 근거에서 비롯된다는 것과, ‘사유’(思)와 더불어 지속적인 정신의 힘으로서 우리 삶의 정의와 신뢰의 토대가 될 수 있음을 밝힌다.
두 번째 <21세기 인류 문명의 보편적 토대로서의 성(誠)과 효(孝)>는 우리 존재의 존재론적 근거로, 내가 ‘누군가에 의해서 태어났다’는 ‘탄생성’을 제시하며, 『중용』의 ‘성’(誠) 개념이 그것을 잘 드러낼 수 있다고 본다. 그 성(誠)이 우리 삶의 다원성의 조건과 믿음의 상상력과 창조력으로 해석될 수 있음을, 그리고 인류 문명의 믿을 만한 보편적 토대가 될 수 있음을 역설한다.
세 번째 <참된 인류세를 위한 이신(李信)의 영(靈)의 신학>은 저자의 선친 이신(李信) 목사의 학문을 천착한 것이다. 이신은 우리 시대에 만연한 “의식의 둔화”를 염려하면서 ‘영’(靈)과 예술가의 시대 전복적 ‘전위의식’ 속에서 새로운 믿음의 길을 가고자 했다.
네 번째 <역·중·인(易·中·仁)과 한국 신학의 미래>는 유교 문명권의 언어인 ‘역·중·인’이 보편적으로 기존 한국 신학의 신론과 기독론, 성령론 등을 전복하고 새롭게 하는 데 크게 유용한 언어라는 것을 밝힌다. 다섯 번째 <퇴계 사상의 ‘신학(信學)’적 확장-참 인류세 세계를 위한 토대[本原之地] 찾기>는 N. 베르댜예프, 한나 아렌트, 이신(李信)과 폴 리쾨르의 핵심 사유와 연결하여 신학 논의를 동양철학적, 한국 유학적 탐구의 지평과 연계하는 새 장을 마련코자 했다.
III부 「사유하는 신학(信學)으로의 돌파」의 글들은 ‘신학(神學)에서 신학(信學)으로’의 전회가 어떻게 우리의 새로운 신(神) 이해와 예수 이해, 영(靈) 이해 등을 통해서 표현될 수 있는지를 드러내고자 하는 글들을 모았다. 한국 ‘신학’(信學)이 무엇을 지향하고, 어떤 내용의 학이 되기를 원하는지 밝히고자 한 것이다. 이를 위해 종교와 과학의 대화로 진화론을 재해석하는 존 F. 홀트, 미국 드류 대학교의 여성신학자 캐더린 켈러와 제자 셀리 램보, 도올 김용옥의 『마가복음 강해』, 인지학자 루돌프 슈타이너의 『어떻게 하면 더 높은 세계의 인식이 가능할 수 있을까』나 함석헌의 『뜻으로 본 세계사』 등을 읽으며 신학(信學)의 의미, 가능성, 확장성 등을 살피고 있다. 접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