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31

나를 보내지 마 :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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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근원, 생명을 찾는 여정 새창으로 보기 구매
내가 좋아하는 배우 중 한 명인 '키이라 나이틀리'가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인 '나를 보내지마(2010)'를 TODO 목록에 올려놓고 얼마안되서 '가즈오 이시구로'라는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이 영화의 원작 소설의 작가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소설 속에 나오는 'Judy Bridgewater'라는 가수가 부른 'Never let me go'라는 동명의 노래를 찾았으나 아쉽게도 없어서 (나는 '멜론'의 유료 이용자다!) Youtube를 통해 겨우 찾아 들었다.

결국 찾아낸 최고의 조합은 블루즈풍의 'Never let me go'의 연주곡을 들으며 중반부에서 결말까지 책을 읽어나가는 것이었고, 이 글도 연주곡을 들으면서 써내려 가고 있다. - Bill Evans의 Alone이라는 앨범에 수록된 곡으로 무려 14분35초짜리! -

서평에, 특히 소설의 경우 줄거리를 소개하는게 소설을 읽기 전이나 혹은 이 서평을 보고 관심을 가지게 될 미래의 독자에게는 자칫 김빠지는 일이 될 것 같아 자제하겠다. (영화평을 늘어놓으면서 스포를 하는 테러리스트가 되고 싶지는 않다.)

이 소설은 믿기지 않지만 SF물이다. 그것도 디스토피아적인 SF물이다. 하지만 언젠가 죽음을 맞이하게될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해당될 수 있는 주제를 담고 있는 소설이라고 생각된다. 사랑을 찾고 자신의 근원(origin)에 대한 의문을 찾아 의식하지 않더라도 그 답을 향해 삶을 살아내는 것. 어쩌면 보편적이라고 할 삶의 여정을 이 소설은 화자인 주인공 '캐리'와 그녀와 함께 자란 '루시', 그리고 '토미'를 통해 섬세하면서도 애잔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 소설은 세 주인공의 사랑 이야기인 동시에 존재의 근원을 찾고자 하는 여정을 다룬 이야기이며, 인간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태어난 의료용 복제 인간에 대한 생명윤리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만큼 이 소설을 읽고 나서 느껴지는 반향은 복잡하고 깊이가 있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원작소설은 1993년에 출시된 '안소니 홉킨스' 주연의 '남아있는 나날'이라는 영화를 통해 처음 접했었다. 아마도 개봉된 후 몇 년이 지나 갖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며 TV를 통해 보게 된 것 같은데 아직도 영화의 장면과 스토리가 인상 깊게 남아있다. '남아있는 나날'도 함께 읽기위해 구매해뒀는데, 일단 '나를 보내지마'를 원작으로 한 영화와 2017년도에 일본에서 드라마로 제작된 시리즈물을 본 뒤에 읽어볼 생각이다. 영화와 드라마는 이 소설을 어떻게 해석해서 풀어나가게 될지 자못 기대된다.



"너희가 게임의 담보물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리라는 건 안다. 충분히 그렇게 느껴질 수 잇어. 하지만 생각해 보렴. 너희는 그래도 햄복한 담보물이다. 한때 어떤 흐름이 있엇지만 이제는 지나가 버렸어. 세상일이 때때로 그런 식으로 돌아간다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 대중의 생각이나 감정은 이쪽으로 쏠렸다가 저쪽으로 가버리지. 그 과정 중 한 지점이 너희의 성장기와 겹쳤던 거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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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가꾸는꿈 2018-02-15 공감(44) 댓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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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2017년 노벨 문학상 수상으로 유명한 가즈오 이시구로 님의 책을 읽었단다. 2017년 당시 노벨 문학상 소식을 뉴스로 접하고, 아빠는 들어보지 못한 일본 사람이 노벨 문학상을 탔네, 이런 생각을 하고 기사를 읽어본 기억이 있구나. 기사를 읽어보니 어렸을 때 영국으로 이민 간 영국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 노벨 문학상 수상을 하게 되면, 출판계에서는 그 작가에 대한 노벨상 특수로 매출이 올라가곤 하는데, 가즈오 이시구로 님의 책들도 그렇게 한 동안 베스트셀러 코너에 있었던 기억도 있구나. 당시 아빠는 딱히 끌리지 않아서 읽지는 않았어.

그런데 얼마 전에 아빠가 자주 보는 북플이라는 알라딘 책 어플에서, 가즈오 이시구로 님의 <나를 보내지 마>라는 책이 자주 언급이 되었고, 좋은 평이 있어서 뒤늦게 읽어보게 되었단다. 평이 좋고, 재미있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지,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서 리뷰나 책 소개는 거의 읽지 않았단다. 지금 생각해보니 리뷰나 책 내용을 아마 읽었을 수도 있겠다 싶더구나. 다만 아빠의 순삭 기억력으로 책을 읽기 시작할 때는 다 지워져서 기억을 못하고 있는 것일 수도…. 아무튼 무엇이든, 아빠가 책을 읽기 시작할 때는 책의 내용을 전혀 몰랐어. 그래서 책 중간 정도에서 나오는 반전의 재미가 더했던 것 같구나.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냐고? 조금 있다가 알려줄게.



1.

주인공이자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이는 캐시 H라는 서른 한 살 여자였어. 11년 넘게 간병사라는 직업으로 일하고 있었고, 혜일셤 출신으로 다른 사람들이 좀 다른 시선으로 캐시를 바라보기도 했어. 캐시는 혜일셤 시절을 떠올릴 때가 많았는데, 소설은 캐시가 13살 학창 시절로 돌아가 이야기를 해주는 것으로 본격적으로 시작한단다.

토미라는 아이가 있었는데, 학습능력과 체력이 다소 떨어져서 왕따를 당하곤 했는데, 캐시는 그에게 동정을 표시하면서 친하게 되었단다. 그런데 얼마 뒤 다른 애들에 비해 뒤처지지 않는 모습으로 보였어. 그래서 캐시가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보자, 토미는 루시 선생님과 면담을 하고 나서 괜찮았다는 거야. 루시 선생님이 이야기하시기를, 창의적으로 되려고 애쓰지 말라는 거였어. 루시 선생님의 조언이 좀 이상하긴 하지? 그것뿐만 아니라, 캐시가 다니는 학교에서 사용하는 용어들 중에는 낯선 말들이 있고, 아이들의 행동도 조금 이상하고 평범한 학교는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 혜일셤에 있는 아이들은 어떤 목적을 위해 함께 생활하면서 지내는 것이라는 깨닫게 되는데, 조금 더 읽다 보면 그 목적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더구나. 그것이 아빠가 앞서 이야기했던, 책의 내용을 모르고 읽으면 저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그런 내용이야.

결론부터 이야기를 하면 헤일셤에 다니는 아이들은 평범한 아이들이 아니고, 모두 유전 기술로 태어난 복제 인간들이었단다. 그들은 혜일셤을 졸업하게 되면, '기증'이라는 일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그들의 장기를 보통 사람들에게 이식해 주는 것이야. 그들은 그것을 당연히 여기고 있었어. 그렇게 교육을 받은 것이지. 이쯤 되니 아빠가 예전에 본 영화 <아일랜드>가 생각이 나는구나. 아빠가 좋아는 배우들인 이완 맥그리거와 스칼렛 요한슨이 나와서 봤던 영화인데, 자신들이 복제인간인 것으로 모르고 집단생활을 하면서 일어나는 일을 그린 영화였어. 영화 <아일랜드>처럼 소설 <나를 보내지 마>도 그런 복제인간들이 겪는 이야기를 해주고 있단다.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은 다르지만 말이야. 아무튼, 헤일셤의 아이들은 나중에 '기증'을 목표로 학교 생활을 하고 있었지. 그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은 평범한 사람들이었단다. 그래서 아이들의 미래를 알고 있기 때문에 심적 갈등을 겪으면서 힘들어하는 선생님도 있었단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선생님이 루시였어. 루시 선생님은 안타까움에 그들에게 그들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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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119)

"다른 누군가가 너희한테 얘기해 주지 않는다면, 내가 말해 주마. 전에 말한 것처럼 문제는 너희가 들었으되 듣지 못했다는 거야. 너희는 사태가 어떻게 될 건지 듣긴 했지만, 아무도 진짜 분명하게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감히 말하건대 사태가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 데 무척 만족하는 이들도 있지. 하지만 난 그렇지 않아. 너희가 앞으로 삶을 제대로 살아 내려면, 당연히 필요한 사항을 알고 있어야 해. 너희 중 아무도 미국에 갈 수 없고, 너희 중 아무도 영화배우가 될 수 없다. 또 일전에 누군가가 슈퍼마켓에서 일하겠다고 얘기하는 걸 들었는데, 너희 중 아무도 그럴 수 없어. 너희 삶은 이미 정해져 있단다. 성인이 되면, 심지어는 중년이 되기 전에 장기 기증을 시작하게 된다. 그거야말로 너희 각자가 태어난 이유지. 너희는 비디오에 나오는 배우들과 같은 인간이 아니야. 나랑도 다른 존재들이다. 너희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미래가 정해져 있지. 그러니까 더 이상 그런 얘기를 해서는 안 된다. 너희는 얼마 안 있어 헤일셤을 떠나야 하고 머지않아 첫 기증을 위한 준비를 해야 해. 그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너희가 앞으로 삶을 제대로 살아 내려면, 너희 자신이 누구인지 각자 앞에 어떤 삶이 놓여 있는지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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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아이들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어. 그들은 그런 목적을 위해 사는 것을 당연시 하는 것 같았고, 그런 삶에 맞춰 교육을 받았고, 몸도 그렇게 관리되어 있었단다.



2.

16살까지만 헤일셤에서 지냈고, 그 이후에는 다른 곳에 가게 되었단다. 헤일셤에서 여러 친구들을 만났지만, 캐시에게 가장 친한 친구는 루스와 토미 둘뿐이었단다. 그리고 루스와 토미는 서로 사랑하는 연인 사이였어. 헤일셤에서 공부를 마치고, 코티지라는 곳에 갔단다. 코티지라는 곳은 '기증'을 할 때까지 대기하면서 생활하는 곳이야. 그곳에는 먼저 졸업한 선임들도 있었어. 헤일셤 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어. 가까운 곳으로 외출을 다녀올 수도 있었는데, 선임들이 외출을 다녀오더니, 루스의 근원자를 본 것 같다고 했어.

근원자... 그러니까 루스를 만들어낸 세포의 주인.... 기분이 이상할 것 같으면서 궁금할 것 같구나. 자신을 만들어낸 사람. 어떤 사람일까. 캐시, 루스, 토미는 그 사람을 보기 위해 외출을 했어. 루스의 근원자라고 한 사람은 평범한 50대 회사원이었단다. 그런 사실에 약간 충격을 받았단다. 그들이 알기로는 근원자들은 부랑자나 하층민이라고 생각했거든. 생활이 어려운 자들이 복제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평범한 사랑이라니... 하나하나 모르는 사실을 알게 되어도 그들은 바뀌는 것이 없었어.

...

헤일셤을 졸업하고 기증을 하기 전에 코티지에 대기한다고 했는데, 기증을 하기 전에 또 하나 거치는 것이 있는데 간병사란다. 기증자를 보살피는 일이었어. 먼저 기증자를 보살피다가 자신의 차례가 오면, 기증을 하고 기증을 하고 나서는 한동안 회복 센터에서 몸을 회복하고, 다시 기증을 하고 다시 회복 센터에서 회복을 하고... 그런 기증은 많아야 두세 번이었단다. 그런 기증을 마치고 나면 그들은 죽게 되는데, 그들은 이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했어.

...

그런데 캐시는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간병사 일을 남들보다 길게 하고 있었단다. 간병사 일을 잘 해서 그렇다고는 하지만, 캐시의 근원자가 아직 그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싶더구나. 캐시는 간병사 일을 잘 해서, 자신이 간병할 기증자를 직접 선택할 수도 있었는데, 두 번 기증을 마친 루스를 간병하기로 했단다. 코티지에 머물고 있으면서 마지막에 루스와 말다툼을 하고 헤어진 이후에 그들은 제대로 된 화해를 하지 못했단다.

루스와 다시 만난 캐시는 화해를 했고, 근처 회복센터에 있는 토미를 만나러 가기도 했어. 화해를 하긴 했는데, 루스는 기증을 두 번이 해서 그런지 기력도 없고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았어. 루스는 미안하다고 하면서 자신이 죽으면, 캐시와 토미에게 집행 연기를 신청하라고 했단다. 집행 연기 신청이 뭐냐고? 그들은 그런 게 있다고 들었어. 두 사람이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것이 확인이 되면, 기증이라는 집행을 연기할 수 있다고 말이야. 루스와 토미가 연인 관계라고 했지만, 오래 전부터 캐시와 토미가 속으로만 서로 좋아하고 있었어. 그것을 루스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죽기 전에 그렇게 이야기를 한 거야. 그렇게 루스는 두 번째 기증의 후유증으로 그만 죽고 말았단다.



3.

캐시는 이제 토미의 간병사가 되기로 했어. 그리고 그들은 집행 연기를 신청하기로 했어. 그렇기 위해서는 '마담'이라는 직책을 가진 사람을 만나야 했지. 마담은 그들이 헤일셤에 있을 때부터 그들을 관리하는 사람이었어. 캐시와 토미는 마담이 살고 있는 곳을 알아내어 그를 찾아갔는데, 마담은 그들의 방문을 당황했고, 그들이 이야기하는 집행 연기라는 것은 없다고 했단다. 그러면서 같이 살고 있는 한 분을 데리고 왔는데, 그 사람은 다름 아닌 헤일셤의 교장 선생님이었던 에밀리 선생님이었단다. 에밀리 선생님은 헤일셤과 그곳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의 모든 진실을 이야기해주었어.

헤일셤이 있기 전까지 복제인간들은 가축들과 마찬가지로 '사육'되었다고 했어. 비인간적으로 다루고 그랬다고 했어. 복제인간들이 살아 있는 동안만이라도 최소한이라도 인간적인 대우를 받게 하고자 만든 것이 바로 헤일셤이었다고 했어. 하지만 그런 곳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비용이 문제였지... 캐시가 졸업하고 나서 얼마 뒤 헤일셤에 대한 후원이 줄어들면서, 문을 닫았다고 했어. 다시 비인간적인 기관들에서 복제인간이 사육되는 것이었어. 캐시와 토미의 희망이었던 집행 연기는 하지 못했어. 사실, 그런 것은 전혀 없었으니까 말이야. 그리고 토미는 네 번째 기증을 하고,(정말 드물게 많이 기증을 한 것임) 그만 죽고 말았단다.

그렇게 소설은 끝이 났단다. 현대의 기술로 복제 인간은 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단다. 다만, 윤리적인 문제로 실현될 수 없는 것이지.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은 것은 모든 사람들의 욕망이기 때문에, 누군가는 복제인간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있을 것 같구나. 그리고 먼 미래에는 그 윤리적인 문제를 회피해가면서, 그러니까 적당한 핑계를 만들어 복제인간을 합법화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렇다면 이 소설이나 영화 <아일랜드>에서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말라 법이 없을 것 같아. 아참, 이 소설 <나를 보내지 마>를 원제로 한 영화도 있다고 하더구나. 아빠도 기회가 되면 보고 싶긴 하구나. 소설 속의 암울한 세상을 어떻게 영상으로 담았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가즈오 이시구로라는 작가가 어떤 소설들을 썼는지 아빠는 잘 모른단다. 이런 SF를 주로 쓰신 것인가? 다른 장르의 소설도 썼나? 썼겠지? 최근에 출간한 <클라라와 태양>도 인공 지능을 가진 로봇에 관한 SF리고 하던데, 그 책도 기회 되면 한번 읽어봐야겠구나.



PS:

책의 첫 문장: 내 이름은 캐시 H. 서른한 살이고 11년 이상 간병사 일을 해 왔다.

책의 끝 문장: 다만 잠시 그렇게 서 있다가 차로 돌아가 가야 할 곳을 향해 출발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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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holic 2021-06-15 공감(26) 댓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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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복제인간, AI, 과연 우리는? 새창으로 보기
인공지능이 이제 우리 시대의 화두가 되었다. 기계 문명이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고 해야 한다. 디지털이 이제는 우리 삶 곳곳에 들어와 있다. 이런 일들 가운데 하나인 챗지피티라는 말이 언론을 장식하고 있어서 '복제'라는 말은 쏙 들어가 버린 듯하다.



한때는 '복제'란 말이 언론을 장식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복제'가 우리 삶의 일부가 되어 언론에서 다루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는 말인지...



하긴 '배양육'이 우리 식단에 들어오는 현실이니, '복제'라는 말은 이제 일상에서 쓰이는 언어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도 인간복제에 대해서는 수긍하기 힘들다.



인간을 복제한 클론이 과연 인간일까? 라는 질문을 할 수가 있는데, 그들에 대해서 과연 우리가 알 수 있을까?



클론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다른 사람을 알 수가 없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오만이다. 그 사람의 내밀한 마음을 어떻게 알겠는가? 자신도 자신을 모르는데... 그렇다면 클론의 마음을 인간이 알 수 있을까?



자신을 복제한 클론을 마주친 인간이 클론이 자신과 똑같다고 여길까? 자신이 클론의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자체가 오만 아닐까?



신이 있다고 가정하자.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신은 창조한 인간의 모든 것을 알 수 있을까? 신은 전지전능하니까 당연히 알아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과연 그럴까?



신이 인간을 창조했고, 신의 뜻대로 인간이 살아간다면 인간의 '자율성'은 어디에 있는가? 아니, 그때 자율성이 있다고 말할 수가 있나?



그렇다면 지금까지 인간이 이룬 것은 무엇인가? 자신의 복제까지도 만들어낼, 생물 복제만이 아니라 과학기술을 이용해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존재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지금, 인간은 여전히 신의 뜻대로 움직인다고 해야 하나?



그렇다. 라고 답할 수 있다면, 클론을 우리 역시 다 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신의 뜻대로 살게 되듯이 클론 역시 인간의 뜻대로 살게 된다. 어떤 어긋남도 없어야 한다. 어긋남 역시 계산에 있어야 하기 때문에.



만약,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면? 이때는 인간 복제는 해서는 안 된다. 아니, 해도 된다. 다만 복제된 클론이 자율성을 지니고 살아가는 인간이 뜻대로 해서는 안 될 자율적 존재라고 인정을 한다면.



이렇게 되면 클론을 인간의 질병을 치유하기 위해서 만들어낸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클론 역시 인간의 한 부류이므로. 우리가 인종이나 민족으로 인간을 구분하듯이, 여기에 클론이라는 또 하나의 부류가 첨가된다고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지나친가? 지나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클론이 생각할 수 있다고? 그들은 그냥 주입된 것을 표출할 뿐이라고? 어떻게 아는가? 클론의 뇌 속으로 들어가 보았는가? 뇌의 조직, 기능을 다 안다고 해도 생각이 어떤지 정확히 맞출 수 있는가? 없다. 뇌라는 보이는 형태와 뇌가 작동해 일으키는 생각은 같지 않다. 



그러니 클론이 인간의 복제라면 생각하는 능력이 있다는 말이고,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존재라는 말이 된다. 이들을 단지 인간의 병치료를 위해서 도구로 사용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소설은 이런 클론의 문제를 클론의 처지에서 서술하고 있다. 캐시를 서술자로 선정하고 있다. 소설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다면 캐시의 성장소설로 읽을 수 있다. 캐시의 학창시절부터 어른이 된 후까지가 소설의 시간적 배경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읽다보면 곳곳에서 캐시가 보통 인간과 다르다는 점을 알게 된다. 기증자, 근원자라는 말이 나오고, 조금 읽다보면 캐시가 복제인간이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읽으면서 복제인간인 캐시의 관점으로 사건을 따라가게 된다. 인간과 같이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캐시를 보면서, 그런 캐시가 결국은 자신의 일부를 기증하는 삶을 살다가 생을 마감하게 될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알게 된다.



캐시와 루스, 그리고 토미. 이 셋의 애증관계, 성장관계. 그렇지만 여기에 얽힌 복제인간에 대한 관계. 그들이 자란 헤일셤이라는 곳은 복제인간을 인간답게(?) 가르치는 곳. 어차피 장기기증으로 죽어갈 그들에게도 인간다운(?) 생활을 하고, 교육을 받게 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곳.



이곳은 기부자의 기금으로 운용이 되고, 이들 목표는 클론 역시 교양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리는 것. 그러나 이들은 외부에 의존해서 운영하려고 했고, 또 클론을 자신과 함께 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들이 한시적으로 시혜를 베풀어야 할 존재라고 생각하고 운영했다.



철저히 인간의 관점에서, 시혜를 준다는 관점으로, 그러니 클론들이 자신들의 처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그렇게 가르쳐야 한다는 루시 같은 선생은 떠날 수밖에 없다.



클론에게 자신들의 처지를 정확히 알리지 않고 최대한 시혜를 베풀어야 한다는 입장과 클론들이 자신들의 처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입장의 차이. 작가는 명확히 이야기하지 않지만, 작중 인물인 토미가 "루시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 에밀리 선생님 생각이 아니라 말이야."(374쪽)라는 말을 통해서 엿볼 수 있다.



복제인간이라고 해도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 즉, 복제인간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어야 한다. 인간을 수단으로 대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자신의 복제인간이라 해도 또다른 자율적 존재임을, 존중해야 할 존재임을, 결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됨을 알아야 한다.



작가는 복제인간을 서술자로 택함으로써, 그들이 어떻게 고민하고 성장하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줌으로써 복제인간에 대한 문제에 대해 간접적으로 답을 하고 있다.



생물학에서 시도하는 복제인간을 넘어서서 이제는 컴퓨터과학기술로 인공지능이 인간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게 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아니, 벌써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인공지능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이런 인공지능의 흐름에 밀려서 복제인간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언급되고 있지 않은데, 인간 '복제', 이렇게 묻혀서는 안 될 주제다. 특히 지금처럼 마음만 먹으면 '인간' 복제가 가능한 시대에서는.



이 소설을 읽으며 문학의 힘을 생각해 본다. 왜 과학자가 될 사람들이 어린(젊은) 시절에 문학 작품을 읽어야 하는지... 아니, 그들에게 영재교육이 아니라 문학작품을 읽혀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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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nye91 2023-06-27 공감(2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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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주어진 존재 목적을 수용하는 시간 새창으로 보기



아름다운 시골 기숙 학교의 목가적 풍경 속에서 해맑은 아이들의 학교 생활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시작되는 작품에는 곱고 하얀 쌀밥에 섞여 씹힌 작은 모래 알갱이처럼 돌출된 단어 하나가 서걱서걱 굴러다닌다.  뭔가 옳지 않아 하는 기운이다. 어린 소년 소녀들의 우정과 갈등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지만, 거기엔 뭔가 이치에 맞지 않는, 섬뜩한, 비운이 감돈다. 아이들은 학대되거나 방치되지 않고 비교적 잘 돌보아지고 있는 듯하고, 창작 활동, 그룹 놀이, 교환회 같은 사건에 조명을 비춘다. 평화 속에 감도는 이상한 긴장감은 첫째, 아이들이 그곳에 수용되어 있는 이유, 둘째, 아이들이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는 과정과 태도에서 비롯된다. 훗날 이미 이들 일부가 죽었음이 혹은 죽음의 단계에 있음이 간간히 나레이션을 통해 전달되면서 현재 시점에서 생존해 있는 캐시의 미래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으며, 현재 어떤 단계인지를 확인하는 것은 고통스럽다. 

일화들 각각은 기억이 반추하는 의미, 성장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 목적을 어떤 식으로 자각하게 되고 받아들이게 되었는지와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실제로 전체 이야기가 집중하는 것은 절친이었던 캐시와 루스 토미 사이의 사랑과 질투와 우정이 발생하고 소멸하는 지점의 섬세한 세부 사항들이다. 그러한 일화 속에서는 과거에서는 미래였을 현재를 암시하는 징조와 상징들이 드문 드문 포진해있지만, 이 해맑은 기숙 학교의 아이들의 관심사는 사소한 인간 관계와 선생님들이 강조하는 작품활동 뿐이다. 헤일셤이라는 장소는 그곳에서 성장한 모든 사람들 뿐만 아니라, 성장 후에 만난 같은 부류의 사람들에게도 동경할만한 이상적인 장소다. 목구멍에 가시처럼 불쑥불쑥 나타났다 사라지곤 하는 이질적 단어 '기증'은 사용 빈도가 높아지고 그 맥락이 형체를 갖추면서 점차 이야기의 중심으로 전환된다. 그러나 기증은 여전히 아이들, 성인 직전 아이들, 혹은 성인이 되었을 때조차도 그들의 주된 관심사가 아니다.  애가 타고 끓어오르는 건 오히려 이야기 바깥에 있는 독자다. 아이들의 존재 목적, 정해진 운명의 정체가 온전한 문장을 통해 확연히 드러나면서, 설마 아닐거야 아닐거야 하던 의심이 확증으로 변하는 순간의 충격은 책을 끝까지 다 읽을때까지, 그 이후까지 오랫동안 가시지 않는다. 

사람이 사람과 구분되지 않는 생명체를 노예로 삼거나 학살하거나 비인간적으로 이용하는 서사는 SF 뿐만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익숙한 소재다. 그것이 클론이라 해도 전혀 새롭지 않다. 하지만 이 작품은 기존 서사와는 다른 각도에서 그들의 삶을 조명한다. 그것이 독자를 경악케 한다.  기증이라는 행위를 받아들이는 태도는 독자에게는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은 매우 낯선 방식이다. 이 순진무구한 사람들이 자신에게 닥친 운명앞에서 분노하거나 저항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심하게 좌절이라도 해야 할 문제를 제쳐두고 사소한 우정 속에 켜켜히 박힌 갈등과 사소한 기억과 의도를 따지며 관계적 감정에 모든 에너지를 쏟고 몰두하기에 충격과 걱정과 염려는 독자 스스로의 몫이다. 클론들은 자신의 존재 목적이 인간의 장기 제공이라는 변할 수 없는 사실에 무심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용서되지 않는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다. 정해진 삶 밖으로 나가는 걸 차단하는 것은 어떤 물리적 수단도 아닌 의식이었다. 은폐와 암시가 시간을 타고 천천히 성인을 향해 나아가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의식의 강,  만들어진 운명을 천명으로 알고 안주하는 인간의 태만, 무기력. 어찌보면 인간은 태곳적부터 사피엔스의 마음이 생겨났을 때부터 이렇게 시스템의 권력이라는 맹목적 허구에 길들여지는 것이 전체 종의 생존을 유리하게 했을테지만, 다시 보자. 이게 인간이다. 가축을 잔인하게 취급하고, 동물을 학대할 뿐만 아니라 같은 인간끼리 노예를 부렸고, 홀로코스트를 자행했고, 노동자를 기계취급한 주체가 바로 인간이다. 

루시 선생님이 분노했던 이유를 우리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교장도 마담도, 아이들의 성장을 담당한 개인들은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한다.  엄격한 교장은 아이들의 복지와 보호를 위해 교장으로서 할 일을 했고, 제롬비 선생님은 아이들을 따스하게 보살폈고, 마담은 마담대로 아이들이 거기 있었다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 작은 손으로 그리고, 만든 '최고'의 작품들을 수집했다. 모두 자기 자리에서 아이들을 최상의 상태로 돌보고 성장시키지만, 아이들의 존재 목적에 기생하는 제도권의 수혜자들이며, 아이들과는 철저히 분리되어 있다. 루시가 분노하는 것은 반인륜적 클론 농장과 기증  제도가 아니라, 헛된 꿈을 꾸도록 내버려두는 아이들의 성장 환경이다. 캐시가 '네버 랫미 고' 노래를 들으며 베개를 끌어안고  아기를 떠나보내는 엄마를 상상할 때, 아이들과의 접촉을 꺼려하는 마담이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아이들은 성교 교육 시간에 자신들이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사실에 공허감을 느낀다. 캐시가 베개를 끌어안고 아이를 달래듯 '네버 렛미 고' 속에 투영하는 건 떠나가는 아기이며 애초에 존재할 수 없는 아기이다. 태어날 수 없는 아기 대신 베개를 안고, 존재할 수 없는 아기에게 자신을 떠나지 말라는 노래를 투영하는 모습은 슬픔 넘어의 것이며, 이룰 수 없는 막연한 동경일 뿐이다. 하지만 마담의 시선에 비친 캐시는 성장하자 마자 곧 생을 떠날 수 밖에 없는 한 인간의 모습이며 자신이 가진 한 차원 더 깊은 세계에서만 가질 수 있는 감정이다. 마담은 불붙은 막대 끝을 기어가는 개미를 보듯 캐시를 보며 한없는 연민에 눈물 흘리지만, 캐시는 인간의 자신(들)을 향한 그러한 슬픈 감정을 잘 모른다. 훗날 모든 것을 알게 된 후에라도 그들은 기증하지 않는 삶이라는 것의 실체를 잘 모른다. 그것은 자신의 DNA 원본을 향한 호기심과 동경같은 것의 차원을 결코 넘지 못한다.

클론들의 삶은 정해져있다. 그들의 비극은, 자신들의 존재 목적이 장기제공용이라는 비인륜적 의무를 저항없이 받아들이는 것 뿐만 아니라,  간병인으로서 거울처럼 똑같은 무수히 많은 죽음, 죽음으로 이어지기 직전의 기증을 체험하는 방식으로 집행이 유예된다는 사실에 있다. 학교를 졸업하면 즉 성장이 끝나면 바로 기증을 마친 클론들의 간병인이 되어 자신이 겪게 될 똑같은 고통과 세네번까지의 반복적인 죽음을 수년간 수없이 많이 겪은 후에야 비로서 기증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간병인으로서의 생활을  비참하게 이어가며 겨우 5년의 삶을 유예한 루스는 기증의 시간이 다가오자 '기쁘게' 받아들인다. 11년을 간병한 주인공 캐시 역시 다르지 않다. 기증의 끝은 당연히 죽음이고 기증이 유예되는 유일한 길은 간병인의 연장이지만 간병 자체가 곧 닥칠 자신의 죽음을 제 삼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위로하는 일이다. 죽음과 크게 다르지 않은 간병 기간을 축소시켜 어서 임무를 끝내고 '할 일'을 완수하는 일보다,  삶이 곧 죽음이지만 그래도 헤일셤의 친구들이 대부분 생을 마친 후에도 아직 '살아'있으니 죽음을 통한 삶의 유예는 위안인가.

처음으로 근원자라는 말이 나오기 전까지는, 그토록 직접적으로 빈번하게 언급하고 앞뒤 맥락이 사실을 암시해주고 있음에도 나는 아이들과 똑같은 상태가 되어, '듣고 있으나 듣지 않았'다. 듣고 있지 않았으나 말해졌고, 말해진 모든 것들은 어느새 아이들의 의식과 무의식의 빈틈을 차곡차곡 채웠다. 루시 선생님은 그들이 '듣기'를 원했다. 어쩌면 생의 부당함을 인식하기를 바랐을 지도. 자신들의 운명을 처음으로 명확하게 온전한 문장으로 듣는 그 충격적 순간조차 그들의 관심은 사실보다 루시 선생님의 감정에 더 집중한다. 그들은 여전히 듣지 않았으나, 듣지 않음은 듣지 않은 시간 속에서 무심히 쌓여온 정보들이 마침내 한데 모아져 정확하게 삶과 운명을 정의해도 격정적 상태를 겪지 않고 순응하게 한다. 헛된 희망들은 여전히 꺼진 재 속에 남아 있는 불씨처럼 잔재해있지만, 자신의 근원자(원본)에 대한 막연한 환상, 사랑의 증명이라는 동화같은 전설이 유예해줄 것이란 순박한 믿음과 추론 뿐이다. 

이미 결정된 미래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해주는 대신 기증을 위해 흠없이 깨끗하고 건강한 몸을 유지시켜야 한다고 매일 강조되는 학교에서 은연중에 기증이라는 단어가 의식의 어두운 장막 속에서 거주하며 조금씩 수용을 향해 움직였을 수도 있다. 자신들의 작품을 걷어가던 외부인 마담의 주저하듯 두려워하던 시선이 어쩌면 외부인들과의 벽을 더욱 단단히 높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성장을 마치고 외부로 나가 외부인의 세계에 살면서도 그들은 외부인들로부터 고립되어 있긴 마찬가지였으므로 무엇이건 될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는 평범하고 자유로운 인간의 삶이라는 것의 실체를 체험해보지 못했으리라. 그러기에 누군가는 기증을 위해 태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는 우주적 질서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캐시가 헤일셤 시절의 우정과 코티지 시절의 갈등과 이별 그리고 간병과 기증의 시간동안 다시 만나 엇갈린 사랑과 교활한 우정을 반추하고 용서받는 시간들로 채워나가고, 기증이라는 몇번의 수술과 고통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죽음이 퇴직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게 가능한 지도 모른다. 내일 죽어도 오늘은 순간에 충실해야 할 세부적 감정들이 있으니까.

그런데 알고 보니, 헤일셤은 특별한 곳이다. 이 특별한 헤일셤이라는 장소가 또다른 이슈를 불러일으킨다. 다른 클론들이 오로지 목적만을 위해 상상도 할 수 없는 환경에서사육된 것과 달리 헤일셤의 아이들은 당대 인권운동 바람을 맞은 곳이었다. 마치 오늘날 좋은 고기를 먹기 위해 동물 복지가 이슈화되는 것처럼, 장기제공자들에게도 좋은 환경에서 성장할 권리가 있다는 목소리가 높아갔던 시절, 많은 단체의 후원과 사회적 지원으로 인해 헤일셤이 설립되어, 그곳에서 성장하는 아이들은 교사들의 보살핌과 교육과 창작활동을 보장받은 특권을 누렸던 것이다. 성장을 마친 후에도 헤일셤 출신이라는 명패는 동료들에게 부러움을 사고 본인들에게도 자랑스레 추억할 수 있는 의미있는 장소가 된다. 캐시가 기증자들을 헤일셤의 지인들로 선택할 수 있는 것도 헤일셤 출신에게 주어진 특권이라 생각하며, 진실된 사랑이 증명되면 집행이 3년간 유예된다는 소문도 헤일셤 출신만 해당된다. 인간과 클론 사이의 계급관계 특권의식이 다시 클론들 사이에서 출신지에 따라 형성되는 것이다. 

아이들의 운명이 정해져 있다면 그 비련의 주인공들의 운명을 미리 알게 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아니면 그들이 헛된 꿈을 꾸는 걸 막지 않고, 들었으되 듣지 못하게 은폐하는 것이 아이들을 보호하는 것일까. 그러니까 그토록 '많이 들었으되 듣지 못한' 채 자신의 꿈을 얘기하는 아이에게 루시처럼, 화를 내며 너희는 청소부도 트럭 운전사도 그 무엇도 될 수 없고 여길 나가자마자 곧 간병인이 되고, 기증을 하여 짧은 생을 마치리라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그토록 잔인하게 전달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사실을 은폐하는 에밀리 교장선생님처럼 해맑게 키우는 아이들에게 진실을 말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훗날 봇물 터지듯 쏟아냈던 에밀리 교장의 말의 홍수가 헤일셤의 설립과 폐쇄, 아이들에게 작품활동이 격려되고 마담이 가져가는 작품과 갤러리에 대한 진실을 밝혀주는 듯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에밀리가 하는 말의 이면에는 단 한가지 주목할만한 진실이 있다. 헤일셤이 아니었다면 동물처럼 사육되었을 너희를 위해 우린 최선을 다했다고,  별 관심도 없어보이는 캐시와 토미에게 쏟아붓는 그 모든 고백의 핵심은 너희는 우리와 다르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사랑도 예술도 창작열도 그 무엇도 집행 연기의 사유가 될 수 없다. 기증 이외의 삶은 3년이 아니라 단 3개월도 주어질 수 없다는 것, 그것이 그들의 운명이며, 그 누구의 어떤 권력으로도 바꿀 수 없는 성역이다.  이미 세번의 기증으로 심신이 미약해진 상태에서 엉터리 소문들과 더 엉터리 추론으로 만들어낸 겨우 3년이 되었을 희망. 평생을 사랑했지만, 교활한 우정이 찢어놓은 그 사랑 앞에서 남겨진 조각 시간들,  예리하게 가슴을 베이는 것처럼 아프다. 그들의 죄는 들었으되 듣지 못한 것이다. 시스템을 의심하지 않는 대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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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BBP 2018-05-17 공감(18)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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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대표작 『나를 보내지 마』 새창으로 보기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을 데뷔작부터 순서대로 읽기 시작한 지 보름 만에 여섯 권을 읽었다. 그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은 단연 <나를 보내지 마>이다. 앉은 자리에서 다 읽었을 만큼 읽기도 쉬웠다. 



주인공은 11년 경력의 간병사 캐시. 그녀는 지금은 폐교가 된 기숙 학교 '헤일셤' 출신으로 이따금 그곳을 추억하며 회상에 젖는다. 캐시의 추억 속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인물은 루스와 토미다. 외부와의 접촉이 일절 차단된 이 학교에서 루스는 시도 때도 없이 사건을 일으키는 트러블 메이커이고, 토미는 그림 실력이 형편없고 이따금 누구도 말릴 수 없을 만큼 화를 내는 탓에 놀림감이 되는 아이다. 캐시와 루스, 토미는 속내를 털어놓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이고, 얼마 후 루스와 토미가 연인 사이가 되고 나서도 캐시는 이 둘을 거리낌 없이 응원한다. 



소설은 이미 어엿한 어른인 캐시가 학창 시절을 추억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헤일셤은 일견 평범한 기숙 학교처럼 보인다. 헤일셤은 미술 교육을 특히 중시하며, 뛰어난 작품은 학교 외부에서 화랑을 운영하는 마담이 가져간다. 학생들은 마담이 자신의 작품을 가져가길 바라며 암묵적인 경쟁을 한다(그림 실력이 형편없는 토미가 전교생의 놀림감이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헤일셤은 또한 외부와의 접촉을 일절 차단한다. 일 년에 몇 번, 학교 외부에서 가져온 물건을 학생들이 구입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뿐이다(이때 캐시가 구입한 카세트테이프의 타이틀이 '나를 보내지 마'이다). 



독자는 소설을 읽으면 읽을수록 헤일셤이 결코 평범한 기숙학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헤일셤은 학생들 간의 성적인 접촉 내지 성관계를 적극적으로 막지 않는다. 다만 성관계를 해도 아이를 가질 순 없음을 은밀히 암시한다. 헤일셤은 학생들의 흡연을 강력히 제지한다. 흡연에 관한 이미지, 흡연이라는 말 자체도 삼갈 정도인데, 이는 헤일셤 학생들의 '정체'와 관련이 있다. 헤일셤 학생 전원은 인간의 장기 이식을 위해 복제된 존재이며, 기증자에게 장기를 이식하기 전까지 흡연 등을 일절 삼가며 자신의 몸을 깨끗하게 관리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소설은 캐시가 헤일셤에서 자신이 장기 기증용 클론임을 은연중에 알게 되는 과정과 헤일셤 졸업 후 간병사로 일하며 장기 기증용 클론으로서의 삶에 적응해가는 과정을 그린다. 캐시는 헤일셤을 졸업하고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헤일셤에서 겪었던 일 하나하나가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를 알게 된다. 어째서 학생들이 열심히 그림을 그리며 자신의 창조성을 드러내기 위해 노력했는지, 학생들이 그린 그림을 보며 교사들이 눈물지었는지, 학생들의 정체를 알려준 교사가 학교를 떠나야 했는지 캐시는 알게 되고 허탈해 한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다른 소설과 마찬가지로, <나를 보내지 마>의 주인공 캐시 역시 과거에 겪었던 일들의 실체를 알게 되고 나서 현재나 미래를 바꾸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간병사로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에 집중하고, 장기 기증용 클론으로서 제 역할을 다 하는 데에 충실할 뿐이다. 작가는 장기 기증을 위한 '도구'로서 태어나는 이들을 불쌍하다 단정 짓지 않고, 가까운 미래에 실제로 벌어질 만한 일이라고 경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 밖에 있는 내가 이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건, 나 또한 인류의 존속이라는 거대한 계획 안에서 쓰다가 곧 버려질 도구임을 본능으로 알고 있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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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치 2017-11-06 공감(1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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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지지 않은 진실의 처연함 새창으로 보기
노벨상 수상 작가의 작품은 어렵다는 편견이 있다. 그 중에서 그나마 읽기 수월하다는 책을 한권 골라들었다. <네버 렛미 고>라는 제목의 영화로도 개봉된 적이 있는 <나를 보내지 마>는 복제인간에 관한 SF소설이다. 말이 SF소설이지, 소설이 끝날 때까지 내가 기대했던 스릴 넘치는 이야기는 단 한줄도 나오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 캐시의 회고로 이어지는 이 소설은 캐시가 헤일셤에서 함께 공부했던 친구들인 루스와 토미에 대한 일상적이고 소소한 이야기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소재가 복제인간인 걸 모르고 읽었다면, 소설 중반에 이르도록 알쏭달쏭하기만 했을 것이다. 

이 소설은 말하고 싶은 주제를 철저히 감추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심지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하고 싶은 말을 명백하게 하지 않고 감추는 경우가 많아 서로 말할 타이밍을 놓치거나 속으로만 끙끙 앓는 경우가 많다. 마치 독자들을 일부러 속 끓게 하는 것처럼 정작 궁금한 복제인간에 관한 내용은 인물들의 대화 속에서 언뜻언뜻 양념치듯 살짝 언급될 뿐이다. 그래서 아무런 설명없이 갑자기 튀어나오는 기증자, 간병인, 근원자 같은 단어들로 이들이 보통 인간과 다른 삶을 살게된다는 것을 언뜻 인식하게 될 뿐이다. 

헤일셤에 있는 클론들은 그래도 축복받은 측에 속하는 셈이다. 그들은 학교에 다니며 교육을 받고, 친구를 사귀며, 매번 건강검진을 받으며 몸을 관리한다. 그 중에서도 담배는 절대 피면 안되는 항목 중 하나이다. 본인의 몸이 아니라 추후에 기증을 해야하는 몸이기 때문이다. 서로 성관계 갖는 것은 오히려 권장하는 항목이긴 하지만, 이들은 아이를 낳을 수 없도록 설계된 몸이다. 이런 부분들을 제외하고는 이들은 보통 사람들과 전혀 다른 부분이 없다. 친구끼리 소소하게 다투고 화해하고, 마음을 나누는 일상적인 일들이 반복되는 하루들이다. 작가가 친구들 사이에 일어난 소소한 사건과 감정들을 하나하나 너무나 디테일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 사이의 미묘한 감정과 개인의 성격까지 자세하게 파악하게 되지만, 신기한 것은 겉모습에 대한 묘사는 하나도 없다. 이들이 어떻게 생겼을까 상상 해보려했을 때, 문득 이들의 모습에 대한 얘기는 하나도 없었던 것이 생각나서 좀 의아했다. 

이들이 헤일셤을 졸업하고 코티지로 이동하게 되어 다른 곳에서 이동해온 전임자들을 만나면서 새로운 소문을 하나 듣게 된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서 둘이 커플임을 증명하게 되면 기증을 몇년 미룰 수 있다는 정보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진심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게 정말 사실일까 고민하던 그들은 헤일셤에서 선생님들이 그림을 그리는 행위에 대해 많이 강조했던 것을 생각해냈다. 좋은 작품은 '마담'이라는 사람이 바깥세상으로 가져가기도 했는데 화랑이라는 곳에 전시된다고 했다. 자신들의 그림을 왜 가져갈까 고민했던 캐시와 토미는 그림에 사람의 영혼과 진심이 담겨있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그래서 토미는 자신의 영혼을 담아 상상 속 동물을 아주 세밀하게 매일 조금씩 그려나가기 시작한다.

이들은 그렇게 어른이 된다. 피해갈 수 없는 현실이 다가오고 루스와 토미는 기증자가 되고 캐시는 간병인으로 활동한다. 모든 복제인간은 기증자 아니면 간병인 밖에 될 수 없고, 간병인도 그 일이 끝나면 결국 기증을 해야 한다. 캐시는 자신의 친구들인 루스와 토미를 곁에서 간병하며 지켜본다. 그러던 어느 날 캐시는 헤일셤에 가끔 찾아왔던 마담을 길에서 보게되고 그녀를 찾아가서 그동안 그들이 몰랐던 충격적인 진실들을 듣게 되는데.....

「이제 이 나라 어디에서도 헤일셤 같은 곳은 찾아볼 수 없단다. 이제 남은 건 정부가 운영하는 거대한 '사육장'뿐이다. 그곳의 상황이 과거보다 좀 나아졌다 해도, 얘들아, 그런 곳에서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면 너희는 며칠동안 잠을 이룰 수없을거다. 」
<p.363>

《나를 보내지 마》는 복제인간들의 평범하고 인간적인 일상만을 보여주는 소설인데,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작가가 일일히 말해주지 않은 소설 속 현실 저 너머의 이야기가 더 크고 무섭게 다가오는 소설이다. 인간들이 어떻게 복제인간을 만들었고, 사육되듯 키워진다는 복제인간들의 실상은 어떤 것인지, 일반인들은 실제로 복제인간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대하는지, 복제인간 본인들은 자신의 삶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신들의 삶의 목표가 건강한 장기이고, 모든 것을 다 내준 후 죽는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관해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 내용들이 구구절절하게 나오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소설을 다 읽고 나면 혼자 생각해보게 된다. 배경에 커다랗고 검은 이야기가 통째로 남겨진 채 이야기가 끝나는 느낌이다. 

내가 태어났는데 일반인이 아니라 복제인간이라면? 난 분명 나일 뿐인데 근원자의 복제품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래서 내 인생의 목표가 장기기증이라면, 그러면 난 어떨까.  단지 태어났을 뿐인데 온전한 내가 될 수 없다니, 누군가의 소모품일 뿐이라니, 내 목숨을 누군가에게 구걸해야 하다니,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일까? 

복제인간이 등장하는 다른 영화에서는 그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찾기위해 도전하고 고군분투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반해 《나를 보내지 마》의 주인공들은 처절한 현실을 다 알게 되고도 그냥 받아들인다. 토미는 4번이나 기증을 한뒤 죽음을 맞이하고, 죽음을 맞이한 뒤에는 남아있는 장기마저 모두 빼앗길 예정이다. 본인의 동의는 필요없다. 원래 그러려고 애초에 태어난 것이니까. 

너무 잔잔하고 인간적이라 더 슬프고 애잔하다. 소설의 배경에 숨어 장기를 기증받아 살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도 결국엔 다 인간이라는 사실이 슬프고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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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림냥 2017-11-13 공감(1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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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 작가의 SF ‘나를 보내지 마‘ 새창으로 보기
Never let me go...는 노래 가사다.

나를 가게 하지 말라는 간절한 호소는, 가기 싫다는 마음의 에두른 표현이다.

떨어지기 싫지만 떨어져야만 하는 상황의 어쩔 수 없음이 다가선다.

 

그런데 <남아 있는 나날>의 이시구로를 기억하는 나에게

그의 SF라니... 좀 신선할 뻔 했으나,

글을 읽어 나가면서 역시 가즈오 이시구로란 생각이 들었다.

차근차근 독자는 염두에 두지 않고

자기 호흡대로 글을 쓰는 작가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그런 작가의 호흡을 노벨상은 좋아하는 모양이다.

 

"어떤 여자에게 아이가 생겼고

너무나도 기쁜 나머지

그 여자는 혹시 뭔가가 자신들을 떼어 놓을까봐 두려워서

아기를 가슴에 꼭 안고 베이비, 베이비, 네버 렛 미고 하고 노래..."

이렇게 해석하는 캐씨와는 달리 마담의 해석.

"거칠고 잔인한 세상이지. 나는 어린 소녀가

두 눈을 꼭 감은 채

과거의 세계, 더이상 지속될 수 없다는 걸 자기도 잘 알고 있는

과거의 세계를 가슴에 안고 있는 걸로 보았어.

그걸 가슴에 안고

결코 자기를 보내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고 있었지."(372)

 

400페이지에 달하는 소설인데, 스토리랄 것도 없다.

다만, 클론의 세상을 상상하던 21세기 초반에,

한국도 황우석의 무지갯빛 사기에 놀아나던 시점에,

클론들의 감정과 그들의 성장에 대하여,

그리고 기증자가 되고, 간병사가 되는 그들의 삶에 대하여

화끈하지 않지만 담담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소설이다.

 

인간적이고 교양있는 환경에서 사육된다면

학생들 역시 일반인들처럼 지각있고 지성적인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음을 증명.

헤일셤 이전에 클론들은,

그저 의학 재료를 공급하기 위한 존재에 지나지 않았단다.(358)

 

으스스한 헤일셤의 생활들을

그들의 미술 작품을 화랑에 가지고 가는 것들을 이렇게 바라보니 참 서글프다.

 

가즈오의 이 책을 도서관 <일본 소설> 칸에서 찾았는데,

아마 가즈오가 계속 일본에서 성장했다면, 히가시노 게이고 류의 소설을 쓰지 않았으려나?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는 커플은

운영자들이 진위를 가려내

몇 년간 함께 지낸 다음 기증을 시작.(214)

 

이런 풍문을 확인하기 위하여,

그래서 몇 년간의 유예를 얻기 위하여 클론들은 움직인다.

 

너희 삶은 이미 정해져 있단다.

성인이 되면 심지어는 중년이 되기 전에

장기 기증을 시작하게 된다.

너희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미래가 정해져 있지.(118)

 

가즈오의 소설을 읽는 호흡은 함께 느려진다.

그런데 풍성하고 풍부한 글맛을 느끼는 경험보다는

건조하고 메마른 나날을 만나는 경험이었다.

<남아 있는 나날>과 같은 호흡의 문체여서

내 독서 습관과는 맞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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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7-11-06 공감(1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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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내지는 자의 슬픔 새창으로 보기
가즈오 이시구로의 2005년 작. 작품 배경은 1900년대 후반 영국이다.

장기 기증을 위해 태어났고 키워지는 이야기를 이렇게 문학적으로 풀어낸 작품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앞으로 또 있을지도 모르겠다. 인간 복제가 지금은 더 이상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고 이 소설이 발표될 당시 2005년에도 이미 복제에 대한 소재가 소설의 주제로 쓰인 것이 이 작품이 처음은 아니었겠지만 읽어가면서 든 생각은 작가는 복제인간, 장기 기증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기보다 그것을 소재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따로 있다는 것이다.

헤일셤이라는 기숙학교에서 학창시절을 보내는 아이들은 물론 처음엔 자기들이 어떤 목적으로 이 학교에 모여 교육을 받는지 모른다. 한 교사에 의해 기증에 대해 처음 언질이 주어지는 시기는 학생들이 열 세살때, 성교에 대해 가르치는 시기와 비슷한 시기로 타이밍을 맞추면서 공개적으로 토론하지 않고 공개적으로 이야기 하기를 삼가해야할 어색한 주제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함께 주입시킨다. 소위 '들었으되 듣지 못했다'는 식.

기증할 후보 학생들의 성향 추적 자료로 다른 것이 아닌 이들이 그려온 그림을 선별하여 보관한다는 아이디어는 예술적이고 문학적이라는 차원에서 남과 다른, 가즈오 이시구로다운 발상 아닌가 싶다.

 

"선생님은 로이한테 그림이나 시 같은 건 '한 인간의 내면을 드러낸다'고 했어. '영혼을 드러낸다'고 말이야." (245)

등장하는 아이들중 가장 어리숙해보이는 토미가 그것을 추론하여 캐시에게 야기하는 대목에선 '이 아이가 토미 맞나?' 했다.

나중에 루스가 토미의 이런 추론을 캐시로부터 전해 듣고서 토미 앞에서 일축시키는 대목이 나온다. 루스의 미묘한 심리, 즉 속마음과 다르게 표현하고 행동하는 심리, 그걸 바라보는 캐시의 심정, 당황하는 토미의 마음 등을 끄집어 내어 루스와 토미, 토미와 캐시, 루스와 캐시, 이 각각의 관계를 작가는 매우 섬세하게 묘사했다. 누구도 따라가지 못할 이 작가의 능력이 아닐까. 작가의 사이에 분명히 존재하는 장벽, 그리고 동시에 존재하는 연민이 이 셋을 어떻게 끌어안게 하고 어떻게 멀어지게 하는가를 표현하는 방식 말이다.

결말이 가까와오면서 (장기기증)집행 연기에 대한 희망의 뭉개짐이 서서히 드러나고.

우리가 너희 작품을 걷어온건 거기에 너희의 영혼이 드러나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좀더 세련되게 말하자면 그걸로 너희한테도 영혼이라는게 있음이 증명되기 때문이란 말이다. (357)

난 여기서 나름대로 가닥을 잡는다.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었는지를. 그들이 단지 만들어진 기계같은 존재, 소모품으로서의 존재가 아니라 우리처럼 영혼이 있는 존재라는 것.

그러면서 괜히 북받쳐 오른다. 눈물이 고이기 시작한다.

장기기증이라는 그들의 존재 목적을 학생들이 알게 해야한다는 루시 선생님과, 학생들이 알게 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에밀리 교장선생님의 대립을 통해, 우리의 운명을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모르고 사는 것, 과연 어떤 쪽이 나은지 스스로 물어보게 한다.

너희는 멋진 추억이 있고, 교육을 받았고, 교양이 있어. (358)

각자 앞에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았다면 어떻게 그럴 수 있었겠니? (367)

 

이 책의 마지막 몇 페이지는 가히 숨을 참고 읽게 한다. 어떻게 이렇게 끝까지 침착하게, 마지막 숨을 고르는 심정으로 절제하여, 그러나 아름답게 써낼 수 있을까.

 

눈물이 나오는대로 내버려둔채 책장을 덮었다.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나는 흐느끼지도, 자제력을 잃지도 않았다. 다만 잠시 그렇게 서 있다가 차로 돌아가 가야 할 곳을 향해 출발했을 뿐이다. (393, 이 책의 마지막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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