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경
얼마 전 뉴욕타임즈가 ‘21세기 최고의 영화’ 100편을 선정해 발표했을 때 남편과 그 리스트를 쭉 같이 훑어봤다. 남편은 영화를 좋아하고 아주 많이 본다. 그 리스트에 있는 작품들도 거의 다 봤다고 했다. 나는 영상보다는 글이 좋기도 하고, 특히 어느 수준 이상의 잔인한 장면이 포함되면 아무리 작품이 좋아도 볼 수가 없어서 영화 보는 데 제한이 있다.
그 리스트의 순위를 보면서 남편에게 만약 죽을 때까지 딱 한 편의 영화만 반복해서 볼 수 있다면 뭘 고르겠냐고 물었다. 잠깐 생각하더니 (리스트에서 99위에 오른)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2003)이라고 했다. 그 많은 유럽 영화들을 다 제치고서 말이다. 자신에게 좋은 영화란 여러 번 되풀이해 봐도 볼 때마다 새로운 면, 다른 관점이 나타나는 영화인데 <살인의 추억>이 그렇다고 했다.
저 리스트에 그런 작품이 <살인의 추억>만 있는 건 물론 아닌데, 이 영화가 자신에게 특별한 이유가 두 가지 있다고 했다. 하나는 공간적인 배경이다. 한국의 시골에 끝없이 펼쳐진 논, 보는 사람 마음까지 막막하게 만드는 그 논이 자기 고향 발렌시아와 너무나 흡사하다는 것이다. 잘 알려져있다시피 발렌시아는 스페인 쌀요리의 중심지이고 시내를 좀 벗어나면 전부 논이다. 낯선 이야기에 몰입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배경이 되는 시공간에 익숙해지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 과정에 너무 힘이 많이 들어가게 되면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쓸 에너지가 줄어든다 (이 때문에 SF 작가들이 어려움을 겪고 실제 많은 SF가 저평가된다. 배경이 독자에게 익숙해지도록 세팅하는 게 쉽지 않아서다. 내 기억에 옥타비아 버틀러가 이 얘기를 했던 것 같다). 한국의 화성과 스페인 발렌시아의 물리적 거리 차이가 논이라는 공통의 요소 때문에 확 좁혀졌고 그래서 이질감 없이 이야기 자체에 빠져들 수 있다는 얘기다.
남편은 또다른 이유로 서울 형사와 시골 형사의 갈등이라는 영화 초반부의 장치를 들었다. 중심지와 지방의 차이는 어느 곳에나 있지만 유럽, 특히 스페인은 각 지방의 특색이 아주 강하다. 한 나라로 통합된 역사가 그리 길지도 않고 기후, 언어, 음식 등 기본적인 문화의 요소가 너무나 다르니 독립 요구도 이해 안 가는 바는 아니다. 프랑코 독재 시절 스페인의 권력은 마드리드에 몰렸고 정치, 경제는 물론 심지어 축구 경기에 있어서도 지방은 홀대와 차별을 받았다(는 게 비마드리드인들의 얘기다). 예를 들어 쿠바 전쟁 때 마드리드에서 내려온 관리들이 발렌시아에서 논농사 짓고 있던 농부들을 무차별 징병해 갔다든가 하는. 바스크, 카탈루냐 다 비슷한 스토리들을 갖고 있다. 한국도 지역 갈등이 작지 않지만, 내가 느끼기로 스페인을 비롯해 유럽 몇몇 나라들이 안고 있는 지역 갈등은 그와 비교도 안 되게 크다. 겉보기에 너무나 평화로운 스위스만 해도 쓰는 언어(사투리)로 서로 칼 같이 선 긋는 것부터 해서 과연 이들이 한 나라 국민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종종 있다. 인종이나 성별과는 또다른, 하지만 그에 못지 않는 묵은 지역 차별(또는 갈등)이 있는 곳 출신인 사람이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한국 영화에서 서울 형사와 시골 형사가 기싸움하며 건건이 부딪히는 걸 볼 때 별다른 추가 설명이 필요없다는 거다. 그래서 ‘<살인의 추억>을 그대로 스페인 발렌시아로 옮겨가 스페인 배우들로 리메이크해도 어색하지 않을 것’이라는 게 그의 평가다.
작품이 창작자의 손을 떠나는 순간 그것은 더이상 창작자의 것이 아니다. 감상하는 이가 백 명이면 백 개의 기준이 생긴다. 내 남편처럼 자기 고향의 논이라는 공간과 지역 차별이라는 사회적 갈등을 자신이 보는 한국 영화에 투영해 영화를 감상하고 해석하는 외국인도 당연히 있다 (이 말이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니 작품의 절대적 가치를 평가할 수 없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좋은 작품은 수많은 다양한 이유 때문에 좋고, 나쁜 작품은 한 가지 이유로 나쁜 것!).
얼마 전 발렌시아에 갔을 때 ‘엘 팔마르(El Palmar)’라는 마을에 들렀는데 여기가 딱 남편이 말한 ‘스페인인지 한국인지 잊게 되는 논밭’으로 둘러싸인 곳이었다. 스페인 가면 어디든 빠에야가 맛있고, 빠에야의 고장인 발렌시아에 가면 더 맛있지만, 발렌시아에서도 특히 빠에야로 유명한 마을이 바로 엘 팔마르다. ‘알부페라(Albufera)’라는 큰 석호를 끼고 있는 마을인데, 이 석호라는 게 끝간 데 없이 넓은 데다 한 점 물결 없이 잔잔하고 불투명한 황록색의 물이다. 호숫가는 사람 키만한 갈대로 뒤덮였고 갈대는 끈적이는 진흙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예전에는 갈대 사이에 숨은 오리를 사냥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바로 그 석호 덕에 쌀농사가 잘되기도 하고 석호에서 장어가 많이 잡혀 장어 요리로도 유명하다. 여긴 그냥 동네 세 집 중 두 집이 식당이고 전부 맛있다. 발렌시아 전역에서 현지인들이 빠에야와 장어 요리를 먹으러 이 마을로 온다. 호숫가에는 지금은 텅 비어버린 옛 방앗간 건물이 남아있다.
(*잠깐 딴길로 새자면* 시어머니 친구의 아들이 이 마을 식당 요리사로 일하고 있어, 그 찬스를 써서 아무나 못 들어간다는 식당 꼭대기층 빠에야 조리실에 잠깐 들어가봤다. 장작불로 요리하는 전통적 방식이었다. 어떻게 해야 맛있는 빠에야를 만들 수 있냐고 스페인 사람들에게 물으면 아마 처음에는 다 다른 얘기를 할 거다. 쌀이 중요하다는 사람도 있고, 물이 중요하다며 오직 발렌시아의 물로만 만들어야 한다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결국 마지막에 동의하는 건 불이다. 넓고 얕은 빠에야 냄비 바닥 전체에 오랫동안 골고루 불이 전달되도록 하는 게 중요한데, 그게 장작불이다보니 절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큰 식당들에선 장작불 조리가 비효율적이라 가스불로 대체되었지만 엘 팔마르 같은 곳의 작은 식당들에선 여전히 장작불을 쓴다. 그런 빠에야가 어떤 맛이냐 하면, 숯불로 구운 고기와 전기 그릴에 구운 고기 맛의 차이를 생각하면 된다.)
엘 팔마르에서 유명한 건 빠에야만이 아니다. 마을 주민들이 아주 자랑스러워하는 작가 비센테 블라스코 이바녜스(Vicente Blasco Ibáñez, 1867-1928)가 있다.
에밀 졸라의 영향을 받은 여러 자연주의 작품들이 유명한데 그 중에서 1902년에 나온 <갈대와 진흙 (Cañas y barro)>은 바로 이 마을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일을 쓴 소설이다. 나중에 TV 드라마로도 제작되어 스페인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마을 곳곳에 작가와 작품의 이름이 남아 있다.
인터넷으로 요약된 내용을 대충 살펴봤는데
20세기 중후반 한국 농촌을 배경으로 한 소설과 겹치는 부분도 꽤 있어 보인다.
김정한(소작민 수탈), 김유정(허영심에 빠진 농민), 나도향(성적 타락), 박경리(영아 살해) 같은 것들.
남편이 얼마 전 <갈대와 진흙>을 읽고선 자신의 출신지와 정체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고 해 제대로 읽고 싶어서 찾아보니 한국어로는 번역이 안되어 있다.
고종석 평론가가 예전에 한국일보에 블라스코 이바녜스를 소개하는 글을 쓴 것이 검색되고, 또 한수산 작가가 (단어 순서가 바뀐)<진흙과 갈대>라는 소설을 90년대에 낸 것으로 나오는데 절판되었고
내용 소개도 없어 블라스코 이바녜스의 작품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시어머니가 재밌다고 꼭 읽어보라고 해서 그러겠다고 했는데 영어로 구해서 읽어야 할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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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eds and Mud , 1966
by Vicente Blasco Ibanez (Author)
5.0 5.0 out of 5 stars (1) 4.2 on Goodreads 1,179 ratings
Set in Valencia, a poverty stricken city on the coast of Spain, this novel portrays the struggle of the common man against his environment.
Based on the author's first hand experience in this area,
the story centres around three generations of a poor Valencian family (circa 1900) who are as divided in their views on how to get along in this hostile world as any three individuals can be.
- The old grandfather, pampered by the villagers and extremely pig-headed, sees fishing, along with a little illegal hunting on the side, as the only means of maintaining one's dignity.
- His son, on the other hand, who is blessed with high intelligence, as well as with a powerful physique, looks upon fishing and especially upon illegal hunting as degrading, and sees emancipation only in land cultivation. But land is more easily yearned for than acquired.
- The grandson, strong, handsome, and brash, looks upon fishing with loathing and upon cultivation as unrewarding labour. This, however leaves him with nothing, causing him to become involved where he can bring pain not only to others, but also to him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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