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8/16

이병철 -내가 먼저 돌아가야 하는/-아는 것과 알 수 없음의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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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내가 먼저 돌아가야 하는/

안개가 자욱하다. 산자락 마을이 안개 속에 묻혀 있다.
연지에도 안개가 가까이 내려와 있다. 연꽃과 안개로 흐릿한 풍경을 함께 담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 안개 속의 몽환적 풍경이 '알 수 없음'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지금 내가 가장 알 수 없는 것은 죽음과 관련한 것들이다. 삶에 대해서도 잘 알 수 없어서 더욱 그러리라 싶다. 죽음과 그후에 대해서, 그리고 언제 어떻게 죽을 것인지에 대해서도. 
최근에 아내와 나눈 주된 대화도 이런 주제들이다. 
오늘 그렇게 나눈 이야기들을 산문시 형식을 빌러 함께 나눈다.
지금 연지에는 연지 가득 피어있던 그 연꽃들 거의 다 졌다.

<내가 먼저 돌아가야 하는>

태어났으니,
언젠가 돌아가야 하리.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고,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으니
돌아감은 분명한 일이지만
언제, 어떻게 돌아갈지는 아직 나는 알지 못한다.
죽음이 태어난 순서를 따르는 것도 아니니
누가 먼저,
언제, 어떤 모양으로 가게 될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일.
그래도 자식보다 부모가 먼저 가야 하는 것은
자식은 부모의 삶을 이어갈 수 있지만
부모는 자식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기 때문이다.
평생을 함께해 온 두 사람이
살아온 날보다 남은 날이 훨씬 짧음을 절감하며
누가 먼저 떠나는 것이 좋을지 이야기하는 것은
비록 뜻대로 되는 일이 아닐지라도
미리 순서를 정하고 마음을 그리 모아간다면,
떠나고 보내는 그 순간을 조금은 더
담담하게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까닭이다.
아내와 함께 동의한 기준은
오래 사는 것보다
마지막 날까지 맑은 정신으로 건강하게 사는 것.
그리고 한 사람이 먼저 떠난 뒤
남은 사람이 홀로 견뎌낼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것.
당신보다 내가 먼저 가야 한다고 진즉부터 그리 말해왔던 것은
내가 더 오래 살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홀로 살아갈 능력도, 자신도 나에겐 도무지 없기 때문이다.
한 샹을 백수로 지내며 여태껏 살아온 것도
생계를 모두 아내에게 기대어 가능했던 일.
그런 아내가 먼저 간다면
이제 어디에 기대어 무엇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세상과 내가 따로 있지 않다는 것은
이제 알만큼 살았다.
나와 분리된 세상을 구한답시고 나대던 것이 한때의 미망이었음을 
내 곁에 있는 이들, 지금 함께하는 이들과의 경험이 곧 나의 세계라는 것도.
그러니 아내를 먼저 보내고 내가 남는다면,
그것은 함께하는 세계에 보탬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짐을 더하는 일이 될 것이다.
살아 있을 때도 내 삶의 무게를 대부분 
아내에게 짊어지게 했는데,
죽음마저 아내에게 맡긴다는 것이 염치없음은 안다.
그럼에도 이런 부탁을 다시 하는 것은
이 또한 전생에서부터 이어진 인연,
함께 짊어진 그 카르마이기 때문이라고 변명할 수밖에
언젠가, 그 이별의 날이 올 것이다.
그날까지 서두르지 않고 남은 길을 함께 가다가
마침내 그날이 왔을 때,
 내 마지막 인사말이
또렷한 목소리로 당신에게 닿기를.
고맙다.
미안하다.
사랑한다.
그때 나를 보내는 당신의 얼굴이
슬픔을 넘어 밝을 수 있기를.
그래야 먼저 떠나는 내 걸음이 한결 가벼울 수 있고,
그래야 남은 당신도 나머지 삶을 
더 충실하게 마무리할 수 있을 테니
내가 아내보다 먼저 떠나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것이 마지막으로 해야 할 내 일인 까닭이며,
내가 먼저 돌아가야 하는 그 또렷한 이유이다.
(25. 08.14)
이상권
저는 아내와 자식들에게 저의 장례식을 이렇게 치르라고 했습니다. "나의 죽음은 축복이다. 인간으로서의 고된 삶을 무사히 마무리했으니 기쁜 일이다. 슬픈 일이 아니니 가능하다면 축제로 손님들을 반겨라. 생명은 영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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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달프 내외와 검돌 화백의 ‘오늘 화실’에 다녀오다 /

어제 사천의 강달프·엘리네와 점심을 함께한 뒤, 거기서 30분 남짓한 거리에 있는 산청 남사 예담촌 ‘오늘 화실’의 검돌 화백을 만났다. 지난번 몽골생태영성순례단 일행들 가운데  몇 사람들의 번개팅인 셈이다.
가까운 거리에 살면서도 몽골 순례를 함께 다녀온 뒤 전화로만 안부를 전하다가, 더위를 핑계로 만나지 못했던 터라 사천에 간 김에 강달프 내외와 검돌 화백을 함께 만나기로 한 것이다.
남사 예담촌은 아름다운 황토 흙벽 담장과 함께 오랜 선비마을의 역사와 자취가 잘 보존된, 유서 깊고 아름다운 마을이다. 
검돌 화백이 서울에서 내려와 이 마을에 둥지를 튼 지도 올해로 18년째다.
마침 검돌 화백이 지난번 몽골 순례 때 스케치해 온 그림을 대형 작품으로 옮기는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그 첫 번째 작품인 ‘홉스골 호수의 은하수’가 완성되어 우리가 가장 먼저 감상하는 멋진 기회를 얻었다.
작업 공간인 오늘 화실의 큰 벽면에 걸린 그림은 크기가 대단했다. 가로 550cm, 세로 180cm에 이르는 대작이었다. 그 넓은 화폭에 홉스골 호수 위로 은하수가 빛나는 풍경이 장엄하게 담겨 있었다.
시베리아 낙엽송이 우뚝 선 사이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게르와 모닥불, 그리고 어둠 속 호수 위로 쏟아질 듯 반짝이는 수많은 별 사이에 빛의 강처럼 흐르는 은하수는, 다시 홉스골의 밤을 마주하는 듯한 감동을 주었다. 
거장의 솜씨로 재현된 그 풍경 속에 모두 감탄과 그리움으로 빨려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검돌 화백은 이 작업에 매달리느라 더위도 잊고 지냈다고 한다. 이번 몽골 순례에서 담아 온 풍경이 수십 점에 이르니, 그것을 모두 대형 화폭에 옮기려면 아마도 2~3년은 걸릴 듯하다. 대작들이 기대된다.
이런 형태의 작업을 통한 전시는 이미 인도전과 아프리카전도 한 바 있으니, 그림이 완성되면 한·몽 문화교류 차원에서도 뜻깊은 전시가 되리라 싶다.
검돌 화백의 작품이 보관된 수장고에도 들러 그동안 해 온 작품들도 함께 감상했다. 대부분 대형 작품 위주였는데, 이들 모두는 검돌 화백이 독창적으로 정립한 ‘생활풍수화’의 결과물이다. 모든 작품은 직접 현장을 발로 답사하고 실측한 것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화실 옆에는 부인 수인(水仁) 여사가 운영하는 아트 카페 ‘지금이 꽃자리’가 있다. 정갈하게 가꾼 대나무 숲과 어우러진 이 카페는 주인의 맑고 환한 미소처럼 아담하고 포근하다. 여름 풍경도 좋지만, 대숲에 눈이 내리면 그 모습이 더할 나위 없을 듯하다.
분홍빛이 황홀한 시원한 오미자차와 고급 아이스크림 등을 푸짐하게 대접받고, 손수 만든 딸기잼도 큰 병으로 한 병씩 얻어왔다. 12월 사천 엘리 댁 송년 파티 때, 이곳 예담촌이 멀지 않으니 카페 ‘오늘이 꽃자리’에도 들러 따뜻한 대추차와 집안 감나무에서 딴 곶감도 맛볼 수 있으리라 싶다.
숲마루재에 돌아오니 어느새 하루 해가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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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것과 알 수 없음의 사이에서/

아침에도 빗소리를 듣는다. 지난번 큰비가 내린 뒤로 비가 연일 오락가락한다. 마치 장마 때와 같다. 한창 불볕더위가 쏟아져야 할 8월 중순에 장마철처럼 이렇게 비가 내리는 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잘 모르겠다. 
아무튼 정상적인 날씨는 아니다. 이제 8월 장마나 가을 장마도 별로 이상하지 않게 느껴지는 기후대로 바뀐 것 같다. 앞으로 이런 기상 변화가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도 알 수 없다.
계속 내린 비로 연지에도 물이 불어 출입을 금지한다는 줄을 쳐 놓았다. 연지 둘레를 돌면서 비에 젖어 있는 연꽃을 만난다. 비 때문인가, 활짝 피어 있는 연꽃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꽃은 빗속에서도 피어남을 멈추지 않는다고 노래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사실은 이렇게 비가 오는 날에는 꽃도 피어남을 멈추고, 날이 환하게 개이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야 제대로 수정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요즘 들어 더욱 자주 드는 생각이다. 나이 들수록, 세상에 대한 나름의 경험이 쌓일수록, 자신과 세상을 더 잘 알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갈수록 잘 모르겠다는, 모른다는 생각이 더 자주 든다.
젊은 날의 그 확신에 찬 생각들, 옳고 그름과 정의와 불의가 명확하게 분별되던 그 판단들이, 나이가 들수록 세상에 대한 경험이 쌓일수록 오히려 경계가 흐릿해지고 모호해진다. 그래서 누군가가 확신에 찬 주장을 할수록 내 내면에서는 ‘과연 그런가’ 하는 의문이 더 커진다.
내가 아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또 무엇인가. 내가 안다고 하는 것도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그렇다고 여기는 하나의 생각일 것이다. 생각은 사실 자체가 아니다.
어쩌면 ‘안다’는 그 생각이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을 더 제한하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안다는 그 생각에 묶여 그 너머를 볼 수 없게 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온통 알 수 없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속에 서서 내가 안다는 그 짧고 좁은 생각에 묶여 세상의 무한함을 외면하는 어리석음이, 우리가 안다는 것의 실체일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가장 우려스러운 것은 내 생각이 틀림없다는 그 확신, 이른바 확증편향이다. 그 확증편향의 무지와 어리석음이 광기로 치달은 숱한 역사를 우리는 보아왔다.
올해 도반들과의 공부 모임 주제는 ‘죽음’이다. 죽음을 알기 위해서는 삶을 먼저 알아야 하고, 그 삶을 알기 위해서는 그 삶의 주체인 존재, 곧 내가 누구이며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죽음이 있고 내가 죽는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 죽음이 무엇인지는 나는 모른다. 그러나 삶이 없다면 죽음 또한 없을 것이기에, 잘 사는 것이 곧 잘 죽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밖의 다른 것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연지에는 날마다 꽃이 피고 진다. 피었기에 지는 것이다. 이 빗속에서도 내 앞에 맑고 고운 자태로 나투어 있는 이 연꽃은 어디에서 왔는가. 그리고 연밥만 남긴 뒤 저버린 그 꽃은 어디로 갔는가. 저 연꽃의 한 생과 우리네 한 생이 다르지 않다면, 나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꽃 피어 있다가 어떻게 지고 있는가. 나의 이번 생이 지고 나면 그 죽음으로 끝나는 것인가. 아니면 다음 생으로 이어지는가. 무아(無我)와 윤회(輪回)를 이야기해보지만, 이 또한 하나의 생각일 뿐 나로서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지금 그 알 수 없다는 것이 내게는 불안이 아니라 하나의 설렘으로 다가온다.
미지, 곧 알 수 없음에 대한 기대와 호기심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세계는, 나 자신의 존재를 포함하여 알 수 없음으로 가득 차 있다는 이 생각, 이 자각이 빗속의 연꽃을 더 깊게 만나게 한다.
고맙다는 그 생각이 가슴을 따뜻하게 한다.
(2025. 0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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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연지에서, 
머무름과 스침의 사이/

연지에는 이미 피어 있는 연꽃보다 꽃잎은 다 지고 연밥만 매달고 있는 꽃대가 더 많다. 그래도 피고 있는 연꽃들도 아직 제법 남아 있으니 고맙다. 그중에는 미색 연꽃도 포함되어 있다. 미색 연꽃은 지금이 한창인 것 같다. 
오늘 아침에는 홍련 사이에 뒤늦게 피고 있는 이 미색련에 더 눈길이 간다. 아마도 연지의 백련을 볼 수 없어 더 그런 것 같다.
어찌할 수 없이 스마트폰으로 그 자태를 담는다. 오늘 내가 만나는 이 연꽃을 내일이면 다시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내일까지 지지 않고 피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 모습, 그 자태는 오늘 내 눈길을 끌었던 것과는 다른 것이다.
미루지 않기, 오늘을 산다는 것은 내일로, 다음으로 미루지 않는 것이라는 걸 알 만큼 살아왔다. 이미 남아 있는 시간이 미루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이제는 온몸으로 체감하기 때문이다.
어찌 미룰 수 없는 것이 시간뿐일까. 고맙다는, 미안하다는, 사랑한다는 그 말 또한 미룰 수 없는 것이리라.
홍련 사이에 피어 있는 미색련에 눈길을 두고 그 자태를 담으면서, 그 곁에 있는 홍련들은 그냥 스쳐 지난다. 내 관심과 주의가 지금 미색 연꽃에 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서두르듯이 미색련에 주의를 보내다가 문득 한 생각이 스민다. 지금 미색련에만 주의를 보내고 그것을 사진으로 담는 것은 미색 연꽃을 편애하는 것이고, 스쳐 지나는 다른 연꽃들은 무시하거나 차별하는 것인가 하는 새삼스러운 물음이다.
내가 아침마다 들르는 이 연지에는 아직도 많은 연꽃들이 피어 있다. 그 연꽃들 가운데 내가 발길을 멈추고 눈길을 마주하며 사진으로 담는 것은 그 일부에 불과하다. 모든 연꽃을 한꺼번에 만나거나 사진으로 담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내가 눈길을 맞출 수 있는 것은 한번에 연꽃 한 송이거나 또는 그 한 장면일 뿐이다. 이때 내 주의가 가닿는 것, 또는 내 주의를 가닿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오늘 아침에 내가 미색 연꽃에 더 관심을 두고 그 자태를 사진으로 담은 것은 내 의도가 먼저 작용한 것이다. 그러나 미색 연꽃 가운데서도 내 주의를 이끌고 그 모습을 담게 한 것은 내 의도만이 아닌, 어떤 끌림 때문이다. 그 연꽃이 내 주의를 그리 이끈 것이다. 그것을 부름과 응답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보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 마음이 없이는 보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심히 지나는 길에서 우연히 눈길이 가닿은 한 송이 들꽃이 주의를 이끌었을 때, 그것은 그것을 보고자 하는 내 마음에 앞서 내 주의를 이끌게 한 그 꽃의 부름, 그 이끔이 먼저 있었다고 할 것이다. 그것을 이끌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만남이란 상호의 작용, 서로 부르고 응답하는 동시적 작용이라고 해도 좋으리라 싶다.
내가 이 연지에 먼저 피었던 한 송이 꽃을 오랫도록 오롯이 바라보았던 것처럼, 오늘 아침에 내 눈길이 가닿지 않았던 다른 연꽃들을 무시하거나 차별하지는 않는다. 다만 내 관심에 따라 먼저 주의가 가닿거나, 이끌림의 정도가 달랐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 싶다. 내 감성 또는 정서가 그렇게 형성되어 왔기 때문이리라. 그것이 지금 내 정체성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을 것이다.
관심과 무관심, 또는 차이와 차별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그러면서 세상에 대해서도 무심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내가 마음을 보탠다고 세상의 변화를 이끌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도 세상일에 의연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사랑하는 이들 때문이다. 연못에서 피어나지만 거기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세상을 외면하지는 않되, 애쓰지는 않을 수 있으면 좋갰다. 
이 연지의 연꽃들이 피었다가 미련 없이 지는 것처럼, 연꽃을 만나고 스쳐 지나가는 걸림없는 바람처럼 내 눈길과 내 마음도 그렇게 가벼울 수 있기를.
세상이 잘 되기를 기도하되, 거기에 얽매이지는 않기를.
오늘 아침 연지에서 떠오른 두서없는 생각이다. 
(2025. 08.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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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 아침 연지에서,
비에 젖은 연꽃/

미리 고백하자면, 어제 아침 연지에서도 나는 스마트폰을 놓지 못했다. 전날 밤에 비가 내렸고, 아침에도 간간이 빗발이 돋아 비에 젖은 연지의 풍경이 평소와 사뭇 달라 그 풍경과 그 속의 연꽃 자태를 담고자 하는 내 욕심을 도무지 어찌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그냥 연꽃과 마주하는 일은 다른 날로 미루고, 비에 젖어 빗방울을 매단 연꽃 자태를 스마트폰으로 담기로 했다.
‘청호우기(晴好雨奇)’라 했던가. 환하게 눈부신 날보다 이렇게 비 오는 날이나 안개 낀 날의 풍경이 내게는 더욱 깊게 다가온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무엇인가에 대한 호기심 같은 것이  더 해지는 까닭이다. 
빗방울을 머금고 있는 연꽃과 연잎의 자태가 더 맑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간밤에 내린 비로 인해 미리 피었다가 꽃잎을 닫지 못한 연꽃들은 잎이 젖거나 축 늘어져 있지만, 이제 막 피어나거나 전날 피었다가 꽃잎을 다시 닫은 연꽃들은 부푼 꽃봉오리 째로 빗방울을 매달고 있다. 그 빗방울들이 더없이 맑고 영롱하다. 내게는 그 물방울들이 모두 보석처럼 아름답게 느껴진다.
‘처염상정(處染常淨)’이라는 말처럼, 연꽃과 연잎은 물에 젖지 않는다. 그래서 빗속에서도 잠시 빗방울을 매달고 있다가, 적절한 무게가 되면 그냥 떨어지게 한다. 연꽃이나 연잎이 폭우에도 쉽게 상하지 않는 이유는 이처럼 붙잡지 않고 놓아주기 때문이다.
문득 ‘방하착(放下着)’이 떠오른다. 잠시 소유하되, 그것을 내 것이라 움켜쥐거나 매달리지 않음으로써 자유로워지는 것. 비에 젖으면서도 맑게 피어나는 연꽃과 연잎에게서 그런 삶의 이치를 본다.
소유한다는 것은 동시에 소유당하는 것이다. 현대인이 불행한 이유 중 하나는, 불필요한 것을 소유함으로써 도리어 그것에 소유당하기 때문이라는 말도 이런 맥락일 것이다.
이미 넘치도록 많이 가졌음에도, 무언가를 더 가져야만 한다는 끝없는 그 허기짐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지금 내 앞에서 비에 젖으면서도 환하게 피어나는 연꽃이 내게 던지는 질문이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문득 '연꽃을 만나고 가는(?) 바람처럼' 이란 시귀가 떠오른다. 바람이 자유로운 것도 그가 만난 것들을 소유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비에 젖은, 비에 젖으면서도 해맑게 피어나는 연꽃을 담아 나눌 수 있어 고마운 아침이다.
(2025. 08.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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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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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미완성의 걸작/
오늘 아침 페북에서 가슴 뛰는 글을 한 편을 읽었다. 동검도에서 작은 예배소를 짓고 기도하고 사색하며 그림을 그리고 창작활동을 하시는 조광호신부님의 글이다.
평소 내 생각도 신부님의 이 지론과 비슷한데, 그런 생각을 더 깊고 넓게 정리해주시어 공감하고 감사하는 머음으로 여기에 나눈다. 신부님의 기도소이자 작업장인 작고 아름다운 채플은 강화도 갯펄의 끝자락에 있다. 신부님의 작품인 스테인글라스 창으로 꾸며진 이 작은 예배소를 썰물 때나 해넘이 때 방문한다면 더욱 멋진 풍경을 만날 수 있으리라.

Kwangho 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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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인간의 초월성과
창조럭의 실험
프로로그
모든 사람이 예술가인 이유를
당신이 알게 된다면
오늘 당신은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될 것이다
만약 당신이 한 순간 만이라도
그 어느 고정관념의 끌림으로 부터
잠시 자유로울 수만 있다면.
당신은 기가막힌 화가가 될수있다
여기서
자유로움이란— 단순히 제약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존재 본연의 흐름과 일치하는 상태, 우주의 창조적 리듬에 몸을 맡기는 상태다.
당신의 설레임이 깃든
이 간절한 바람 속에
모든 창조의 비밀이 숨어있다.
요셉 보이스는 바로 이 자유로움을 전제로하여
"모든 사람은 예술가다"라고 선언했다
기술이나 재능의 문제가 아니라,
고정관념과 두려움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의 문제.
진정성을 지키고 마음 가는 대로, 형편대로 캔버스에 그릴 수 있는 용기의 문제다
캔버스 앞에 선 당신. 붓을 들었지만 무엇을 그려야할지 모르는 설레임 속에 당신은 바로
138억 년 전 빅뱅의 순간처럼,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준비상태"에서 텅빈 자유로움으로
순수한 지성으로 신을 닮은 작은 우주가 된다
하나: 자유로움이 열어주는 양자적 공간
양자역학은 우리에게 놀라운 진실을 가르쳐준다. 관찰되기 전까지 입자는 모든 곳에 동시에 존재한다. 파동함수라고 불리는 '가능성의 바다' 속에서 무한한 잠재태로 머물러 있다가, 관찰되는 순간 비로소 하나의 확정된 현실로 붕괴한다.
그런데 여기서 핵심은 '자유로운 관찰'이다. 선입견이나 기대에 사로잡힌 관찰자는 이미 결과를 제한한다. 진정 자유로운 의식만이 무한한 가능성을 현실로 불러올 수 있다.
당신의 캔버스도 마찬가지다. 첫 번째 붓질을 하기 전까지, 그 하얀 공간은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다. 모든 색채가, 모든 형태가, 모든 감정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잠재의 영역이다
하지만 "이렇게 그려야 한다"는 고정관념이나 "저 사람처럼 그려야 한다"는 끌림에 사로잡힌다면, 그 순간 무한한 가능성은 제한된 몇 가지 선택지로 축소된다.
그러나 그 어느 고정관념의 묶임이나 끌림으로부터 잠시라도 자유로워진다면?
그때 당신의 붓질은 양자적 창조 행위가 된다.
예측 불가능하지만 완전히 진실한, 우연처럼 보이지만 필연적인 그 무언가가 캔버스에 출현한다.
진정성을 지키고 마음 가는 대로 그린다는 것은, 바로 이 양자적 자유로움을 신뢰한다는 뜻이다.
계산된 기교가 아니라, 존재 자체의 진동을 캔버스에 전이시키는 것.
둘: 물감이 흐르는 불확정성의 원리
물감을 부어도 되고, 흘려도 되고, 붓으로 그어도 된다. 이 자유로움 속에는 깊은 지혜가 숨어있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처럼, 우리는 정확히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을 받아들여야 한다.
물감 한 방울이 중력을 따라 캔버스를 타고 흘러내린다. 당신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예상치 못한 패턴을 만들며. 그 순간 당신은 통제를 포기하고 흐름과 협력하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순수한 형태의 창작이다.
샤르댕이 말한 '의식의 진화' 과정과 닮아있다. 물질이 생명으로, 생명이 의식으로, 의식이 사랑으로 진화해가는 그 예측 불가능하면서도 방향성 있는 흐름. 당신의 붓질도 그와 같은 진화의 한 부분이다.
실수라고 생각했던 번짐이 그림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 되기도 한다. 지우려다가 남겨진 자국이 전체 작품의 영혼이 되기도 한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지닌 창조적 지혜의 발현이다.
셋: 사랑이라는 창조의 원동력
왜 우리는 그림을 그리는가? 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물리학 교과서에서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경험으로 안다. 무언가를 창조할 때 느끼는 그 기쁨, 그 충만함을.
샤르댕은 사랑을 우주의 가장 근본적인 힘이라고 보았다. 중력이 물질을 끌어당기듯, 사랑은 의식을 끌어당기고 진화시킨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도 이 사랑의 인력장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당신이 캔버스를 마주하는 순간, 당신은 세상과 사랑에 빠진다. 색채와 사랑에 빠지고, 형태와 사랑에 빠지고, 그 과정 자체와 사랑에 빠진다. 기술이 없어도 상관없다.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된다.
어머니가 아이를 그리는 서툰 그림에도, 연인이 서로를 위해 그린 어설픈 초상화에도, 그 안에는 측정할 수 없지만 가장 강력한 에너지가 흐르고 있다. 바로 사랑이라는 창조의 원동력이.
넷: 진정성이라는 양자 얽힘
진정성을 지키며 그린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의 내면과 외부 세계 사이의 양자 얽힘을 인정하는 것이다. 거리와 상관없이 순간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입자들처럼, 당신의 마음과 캔버스도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
다른 사람의 기법을 따라할 필요가 없다. 유명한 화가의 스타일을 모방할 필요도 없다. 당신 안에서 일어나는 고유한 진동, 당신만이 느낄 수 있는 미묘한 떨림—그것이 바로 당신의 예술 언어다.
이것은 개인주의적 아집이 아니다. 오히려 우주적 연결감의 표현이다. 당신이 진정성을 지킬 때, 당신은 우주 전체의 창조적 흐름과 일치하게 된다. 당신을 통해 우주가 자신을 표현하게 된다.
형편대로 그리면 된다는 말의 깊은 의미가 여기에 있다. 당신의 현재 상황, 당신의 한계, 당신의 부족함까지도 작품의 일부가 된다. 완전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함 속에서 피어나는 진실을 포착하는 것.
다섯: 모든 사람이 예술가인 우주적 이유
요셉 보이스의 선언 "모든 사람은 예술가다"는 이제 단순한 구호가 아니다. 그것은 과학적 사실이다. 의식을 가진 모든 존재는 관찰자이고, 관찰자는 현실을 창조한다. 당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자체가 이미 창조적 행위다.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에 따르면, 관찰되지 않은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이 아침 하늘을 바라보는 그 순간, 당신은 그 하늘을 창조하고 있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미소를 바라보는 그 순간, 당신은 그 아름다움을 존재하게 만들고 있다.
이것이 샤르댕이 말한 '오메가 포인트'의 의미다. 우주는 물질에서 시작해서 의식으로, 의식에서 사랑으로 진화해가고 있다. 그 진화의 최전선에 있는 것이 바로 당신이다. 당신의 모든 창조적 행위, 모든 사랑의 표현, 모든 예술적 시도가 우주 진화의 한 부분이다.
붓을 든 당신, 노래를 부르는 당신, 사랑하는 당신—모든 순간에 당신은 예술가다. 우주가 자신을 인식하고 표현하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여섯: 불완전함의 성스러운 아름다움
당신의 그림이 완벽하지 않다고? 그것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다. 완벽함은 죽음과 같다. 더 이상 성장할 여지가 없는, 변화할 가능성이 차단된 상태. 반면 불완전함은 생명이다. 계속해서 변화하고, 진화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가는 살아있는 에너지.
일본의 와비사비(わびさび) 미학이 이를 잘 보여준다. 깨진 그릇을 금으로 이어붙이는 킨츠기(金継ぎ)처럼, 상처와 결함이 오히려 더 큰 아름다움을 만들어낸다. 당신의 서툰 붓질, 당신의 어색한 색채 선택—그 모든 것이 당신만의 고유한 아름다움이다.
양자역학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도 이것이다. 불확정성이야말로 창조의 원천이라는 것. 모든 것이 확정되어 있다면 새로운 것은 태어날 수 없다. 불확실함 속에서야 비로소 진정한 창조가 가능하다.
당신의 그림도 마찬가지다. 실수와 우연, 의도하지 않은 효과들이 오히려 작품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그것들을 받아들이고 포용할 때, 당신의 예술은 살아 숨쉬게 된다.
일곱: 기도하는 붓질, 명상하는 색채
그림을 그리는 것은 기도와 같다. 말로 하는 기도가 아니라, 존재 전체로 드리는 기도. 붓을 든 손의 떨림, 물감을 선택하는 순간의 직감, 캔버스와 대화하는 침묵의 시간—모든 것이 명상이고 기도다.
이때 당신은 에고의 경계를 넘어선다. 내가 그리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무언가가 그려지고 있다는 느낌. 이것이 바로 영성 체험이다. 종교적 신앙과는 별개로, 존재 자체와의 깊은 만남.
샤르댕이 말한 '우주의 내면화' 과정이 바로 이것이다. 물질 세계가 의식을 통해 자신을 인식하고, 그 인식이 사랑과 아름다움으로 표현되는 과정. 당신의 모든 붓질이 이 우주적 과정의 일부다.
색채 하나하나가 우주의 진동이고, 선 하나하나가 존재의 호흡이다. 당신이 진정성을 지키며 마음 가는 대로 그릴 때, 당신은 우주와 하나가 된다.
에필로그: 영원히 미완성인 걸작
모든 사람이 예술가라는 것은 모든 사람이 전문 화가가 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창조적 존재라는 뜻이다. 사랑할 수 있고,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 존재라는 뜻이다.
당신의 삶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다. 매일매일 새로운 붓질을 하며, 예상치 못한 색채를 더하며, 때로는 실수하고 때로는 깜짝 놀랄 만한 아름다움을 발견하며 계속해서 그려나가는 미완성 작품.
그리고 그 미완성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상태다. 언제나 새로운 가능성에 열려있고, 언제나 더 깊은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둔 상태.
캔버스 앞에 선 당신, 붓을 든 당신, 진정성을 지키며 마음 가는 대로 그리는 당신—당신은 이미 예술가다. 우주가 자신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해 선택한 고유한 통로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그려라. 완벽하지 않아도, 서툴러도,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도. 당신의 진정성만 있으면 충분하다. 그것만으로도 당신은 우주의 창조 과정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물감을 부어도 좋고, 흘려도 좋고, 붓으로 그어도 좋다. 중요한 것은 기법이 아니라 마음이다. 사랑하는 마음, 경외하는 마음, 감사하는 마음.
그 마음으로 그린 한 점, 한 선이 138억 년 우주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어간다.
*"예술은 보이는 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 파울 클레
*"모든 사람은 예술가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요셉 보이스의 정신을 계승하며



Namgok Lee
아름다운 글,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사르댕을 이렇게 만납니다
나의 캔버스, 붓, 물감을 생각합니다.
삶이 곧 예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