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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내가 먼저 돌아가야 하는/
안개가 자욱하다. 산자락 마을이 안개 속에 묻혀 있다.
연지에도 안개가 가까이 내려와 있다. 연꽃과 안개로 흐릿한 풍경을 함께 담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 안개 속의 몽환적 풍경이 '알 수 없음'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지금 내가 가장 알 수 없는 것은 죽음과 관련한 것들이다. 삶에 대해서도 잘 알 수 없어서 더욱 그러리라 싶다. 죽음과 그후에 대해서, 그리고 언제 어떻게 죽을 것인지에 대해서도.
최근에 아내와 나눈 주된 대화도 이런 주제들이다.
오늘 그렇게 나눈 이야기들을 산문시 형식을 빌러 함께 나눈다.
지금 연지에는 연지 가득 피어있던 그 연꽃들 거의 다 졌다.
<내가 먼저 돌아가야 하는>
태어났으니,
언젠가 돌아가야 하리.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고,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으니
돌아감은 분명한 일이지만
언제, 어떻게 돌아갈지는 아직 나는 알지 못한다.
죽음이 태어난 순서를 따르는 것도 아니니
누가 먼저,
언제, 어떤 모양으로 가게 될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일.
그래도 자식보다 부모가 먼저 가야 하는 것은
자식은 부모의 삶을 이어갈 수 있지만
부모는 자식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기 때문이다.
평생을 함께해 온 두 사람이
살아온 날보다 남은 날이 훨씬 짧음을 절감하며
누가 먼저 떠나는 것이 좋을지 이야기하는 것은
비록 뜻대로 되는 일이 아닐지라도
미리 순서를 정하고 마음을 그리 모아간다면,
떠나고 보내는 그 순간을 조금은 더
담담하게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까닭이다.
아내와 함께 동의한 기준은
오래 사는 것보다
마지막 날까지 맑은 정신으로 건강하게 사는 것.
그리고 한 사람이 먼저 떠난 뒤
남은 사람이 홀로 견뎌낼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것.
당신보다 내가 먼저 가야 한다고 진즉부터 그리 말해왔던 것은
내가 더 오래 살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홀로 살아갈 능력도, 자신도 나에겐 도무지 없기 때문이다.
한 샹을 백수로 지내며 여태껏 살아온 것도
생계를 모두 아내에게 기대어 가능했던 일.
그런 아내가 먼저 간다면
이제 어디에 기대어 무엇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세상과 내가 따로 있지 않다는 것은
이제 알만큼 살았다.
나와 분리된 세상을 구한답시고 나대던 것이 한때의 미망이었음을
내 곁에 있는 이들, 지금 함께하는 이들과의 경험이 곧 나의 세계라는 것도.
그러니 아내를 먼저 보내고 내가 남는다면,
그것은 함께하는 세계에 보탬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짐을 더하는 일이 될 것이다.
살아 있을 때도 내 삶의 무게를 대부분
아내에게 짊어지게 했는데,
죽음마저 아내에게 맡긴다는 것이 염치없음은 안다.
그럼에도 이런 부탁을 다시 하는 것은
이 또한 전생에서부터 이어진 인연,
함께 짊어진 그 카르마이기 때문이라고 변명할 수밖에
언젠가, 그 이별의 날이 올 것이다.
그날까지 서두르지 않고 남은 길을 함께 가다가
마침내 그날이 왔을 때,
내 마지막 인사말이
또렷한 목소리로 당신에게 닿기를.
고맙다.
미안하다.
사랑한다.
그때 나를 보내는 당신의 얼굴이
슬픔을 넘어 밝을 수 있기를.
그래야 먼저 떠나는 내 걸음이 한결 가벼울 수 있고,
그래야 남은 당신도 나머지 삶을
더 충실하게 마무리할 수 있을 테니
내가 아내보다 먼저 떠나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것이 마지막으로 해야 할 내 일인 까닭이며,
내가 먼저 돌아가야 하는 그 또렷한 이유이다.
(25. 08.14)
이상권
저는 아내와 자식들에게 저의 장례식을 이렇게 치르라고 했습니다. "나의 죽음은 축복이다. 인간으로서의 고된 삶을 무사히 마무리했으니 기쁜 일이다. 슬픈 일이 아니니 가능하다면 축제로 손님들을 반겨라. 생명은 영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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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달프 내외와 검돌 화백의 ‘오늘 화실’에 다녀오다 /
어제 사천의 강달프·엘리네와 점심을 함께한 뒤, 거기서 30분 남짓한 거리에 있는 산청 남사 예담촌 ‘오늘 화실’의 검돌 화백을 만났다. 지난번 몽골생태영성순례단 일행들 가운데 몇 사람들의 번개팅인 셈이다.
가까운 거리에 살면서도 몽골 순례를 함께 다녀온 뒤 전화로만 안부를 전하다가, 더위를 핑계로 만나지 못했던 터라 사천에 간 김에 강달프 내외와 검돌 화백을 함께 만나기로 한 것이다.
남사 예담촌은 아름다운 황토 흙벽 담장과 함께 오랜 선비마을의 역사와 자취가 잘 보존된, 유서 깊고 아름다운 마을이다.
검돌 화백이 서울에서 내려와 이 마을에 둥지를 튼 지도 올해로 18년째다.
마침 검돌 화백이 지난번 몽골 순례 때 스케치해 온 그림을 대형 작품으로 옮기는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그 첫 번째 작품인 ‘홉스골 호수의 은하수’가 완성되어 우리가 가장 먼저 감상하는 멋진 기회를 얻었다.
작업 공간인 오늘 화실의 큰 벽면에 걸린 그림은 크기가 대단했다. 가로 550cm, 세로 180cm에 이르는 대작이었다. 그 넓은 화폭에 홉스골 호수 위로 은하수가 빛나는 풍경이 장엄하게 담겨 있었다.
시베리아 낙엽송이 우뚝 선 사이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게르와 모닥불, 그리고 어둠 속 호수 위로 쏟아질 듯 반짝이는 수많은 별 사이에 빛의 강처럼 흐르는 은하수는, 다시 홉스골의 밤을 마주하는 듯한 감동을 주었다.
거장의 솜씨로 재현된 그 풍경 속에 모두 감탄과 그리움으로 빨려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검돌 화백은 이 작업에 매달리느라 더위도 잊고 지냈다고 한다. 이번 몽골 순례에서 담아 온 풍경이 수십 점에 이르니, 그것을 모두 대형 화폭에 옮기려면 아마도 2~3년은 걸릴 듯하다. 대작들이 기대된다.
이런 형태의 작업을 통한 전시는 이미 인도전과 아프리카전도 한 바 있으니, 그림이 완성되면 한·몽 문화교류 차원에서도 뜻깊은 전시가 되리라 싶다.
검돌 화백의 작품이 보관된 수장고에도 들러 그동안 해 온 작품들도 함께 감상했다. 대부분 대형 작품 위주였는데, 이들 모두는 검돌 화백이 독창적으로 정립한 ‘생활풍수화’의 결과물이다. 모든 작품은 직접 현장을 발로 답사하고 실측한 것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화실 옆에는 부인 수인(水仁) 여사가 운영하는 아트 카페 ‘지금이 꽃자리’가 있다. 정갈하게 가꾼 대나무 숲과 어우러진 이 카페는 주인의 맑고 환한 미소처럼 아담하고 포근하다. 여름 풍경도 좋지만, 대숲에 눈이 내리면 그 모습이 더할 나위 없을 듯하다.
분홍빛이 황홀한 시원한 오미자차와 고급 아이스크림 등을 푸짐하게 대접받고, 손수 만든 딸기잼도 큰 병으로 한 병씩 얻어왔다. 12월 사천 엘리 댁 송년 파티 때, 이곳 예담촌이 멀지 않으니 카페 ‘오늘이 꽃자리’에도 들러 따뜻한 대추차와 집안 감나무에서 딴 곶감도 맛볼 수 있으리라 싶다.
숲마루재에 돌아오니 어느새 하루 해가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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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것과 알 수 없음의 사이에서/
아침에도 빗소리를 듣는다. 지난번 큰비가 내린 뒤로 비가 연일 오락가락한다. 마치 장마 때와 같다. 한창 불볕더위가 쏟아져야 할 8월 중순에 장마철처럼 이렇게 비가 내리는 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잘 모르겠다.
아무튼 정상적인 날씨는 아니다. 이제 8월 장마나 가을 장마도 별로 이상하지 않게 느껴지는 기후대로 바뀐 것 같다. 앞으로 이런 기상 변화가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도 알 수 없다.
계속 내린 비로 연지에도 물이 불어 출입을 금지한다는 줄을 쳐 놓았다. 연지 둘레를 돌면서 비에 젖어 있는 연꽃을 만난다. 비 때문인가, 활짝 피어 있는 연꽃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꽃은 빗속에서도 피어남을 멈추지 않는다고 노래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사실은 이렇게 비가 오는 날에는 꽃도 피어남을 멈추고, 날이 환하게 개이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야 제대로 수정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요즘 들어 더욱 자주 드는 생각이다. 나이 들수록, 세상에 대한 나름의 경험이 쌓일수록, 자신과 세상을 더 잘 알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갈수록 잘 모르겠다는, 모른다는 생각이 더 자주 든다.
젊은 날의 그 확신에 찬 생각들, 옳고 그름과 정의와 불의가 명확하게 분별되던 그 판단들이, 나이가 들수록 세상에 대한 경험이 쌓일수록 오히려 경계가 흐릿해지고 모호해진다. 그래서 누군가가 확신에 찬 주장을 할수록 내 내면에서는 ‘과연 그런가’ 하는 의문이 더 커진다.
내가 아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또 무엇인가. 내가 안다고 하는 것도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그렇다고 여기는 하나의 생각일 것이다. 생각은 사실 자체가 아니다.
어쩌면 ‘안다’는 그 생각이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을 더 제한하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안다는 그 생각에 묶여 그 너머를 볼 수 없게 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온통 알 수 없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속에 서서 내가 안다는 그 짧고 좁은 생각에 묶여 세상의 무한함을 외면하는 어리석음이, 우리가 안다는 것의 실체일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가장 우려스러운 것은 내 생각이 틀림없다는 그 확신, 이른바 확증편향이다. 그 확증편향의 무지와 어리석음이 광기로 치달은 숱한 역사를 우리는 보아왔다.
올해 도반들과의 공부 모임 주제는 ‘죽음’이다. 죽음을 알기 위해서는 삶을 먼저 알아야 하고, 그 삶을 알기 위해서는 그 삶의 주체인 존재, 곧 내가 누구이며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죽음이 있고 내가 죽는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 죽음이 무엇인지는 나는 모른다. 그러나 삶이 없다면 죽음 또한 없을 것이기에, 잘 사는 것이 곧 잘 죽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밖의 다른 것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연지에는 날마다 꽃이 피고 진다. 피었기에 지는 것이다. 이 빗속에서도 내 앞에 맑고 고운 자태로 나투어 있는 이 연꽃은 어디에서 왔는가. 그리고 연밥만 남긴 뒤 저버린 그 꽃은 어디로 갔는가. 저 연꽃의 한 생과 우리네 한 생이 다르지 않다면, 나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꽃 피어 있다가 어떻게 지고 있는가. 나의 이번 생이 지고 나면 그 죽음으로 끝나는 것인가. 아니면 다음 생으로 이어지는가. 무아(無我)와 윤회(輪回)를 이야기해보지만, 이 또한 하나의 생각일 뿐 나로서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지금 그 알 수 없다는 것이 내게는 불안이 아니라 하나의 설렘으로 다가온다.
미지, 곧 알 수 없음에 대한 기대와 호기심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세계는, 나 자신의 존재를 포함하여 알 수 없음으로 가득 차 있다는 이 생각, 이 자각이 빗속의 연꽃을 더 깊게 만나게 한다.
고맙다는 그 생각이 가슴을 따뜻하게 한다.
(2025. 0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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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연지에서,
머무름과 스침의 사이/
연지에는 이미 피어 있는 연꽃보다 꽃잎은 다 지고 연밥만 매달고 있는 꽃대가 더 많다. 그래도 피고 있는 연꽃들도 아직 제법 남아 있으니 고맙다. 그중에는 미색 연꽃도 포함되어 있다. 미색 연꽃은 지금이 한창인 것 같다.
오늘 아침에는 홍련 사이에 뒤늦게 피고 있는 이 미색련에 더 눈길이 간다. 아마도 연지의 백련을 볼 수 없어 더 그런 것 같다.
어찌할 수 없이 스마트폰으로 그 자태를 담는다. 오늘 내가 만나는 이 연꽃을 내일이면 다시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내일까지 지지 않고 피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 모습, 그 자태는 오늘 내 눈길을 끌었던 것과는 다른 것이다.
미루지 않기, 오늘을 산다는 것은 내일로, 다음으로 미루지 않는 것이라는 걸 알 만큼 살아왔다. 이미 남아 있는 시간이 미루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이제는 온몸으로 체감하기 때문이다.
어찌 미룰 수 없는 것이 시간뿐일까. 고맙다는, 미안하다는, 사랑한다는 그 말 또한 미룰 수 없는 것이리라.
홍련 사이에 피어 있는 미색련에 눈길을 두고 그 자태를 담으면서, 그 곁에 있는 홍련들은 그냥 스쳐 지난다. 내 관심과 주의가 지금 미색 연꽃에 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서두르듯이 미색련에 주의를 보내다가 문득 한 생각이 스민다. 지금 미색련에만 주의를 보내고 그것을 사진으로 담는 것은 미색 연꽃을 편애하는 것이고, 스쳐 지나는 다른 연꽃들은 무시하거나 차별하는 것인가 하는 새삼스러운 물음이다.
내가 아침마다 들르는 이 연지에는 아직도 많은 연꽃들이 피어 있다. 그 연꽃들 가운데 내가 발길을 멈추고 눈길을 마주하며 사진으로 담는 것은 그 일부에 불과하다. 모든 연꽃을 한꺼번에 만나거나 사진으로 담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내가 눈길을 맞출 수 있는 것은 한번에 연꽃 한 송이거나 또는 그 한 장면일 뿐이다. 이때 내 주의가 가닿는 것, 또는 내 주의를 가닿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오늘 아침에 내가 미색 연꽃에 더 관심을 두고 그 자태를 사진으로 담은 것은 내 의도가 먼저 작용한 것이다. 그러나 미색 연꽃 가운데서도 내 주의를 이끌고 그 모습을 담게 한 것은 내 의도만이 아닌, 어떤 끌림 때문이다. 그 연꽃이 내 주의를 그리 이끈 것이다. 그것을 부름과 응답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보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 마음이 없이는 보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심히 지나는 길에서 우연히 눈길이 가닿은 한 송이 들꽃이 주의를 이끌었을 때, 그것은 그것을 보고자 하는 내 마음에 앞서 내 주의를 이끌게 한 그 꽃의 부름, 그 이끔이 먼저 있었다고 할 것이다. 그것을 이끌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만남이란 상호의 작용, 서로 부르고 응답하는 동시적 작용이라고 해도 좋으리라 싶다.
내가 이 연지에 먼저 피었던 한 송이 꽃을 오랫도록 오롯이 바라보았던 것처럼, 오늘 아침에 내 눈길이 가닿지 않았던 다른 연꽃들을 무시하거나 차별하지는 않는다. 다만 내 관심에 따라 먼저 주의가 가닿거나, 이끌림의 정도가 달랐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 싶다. 내 감성 또는 정서가 그렇게 형성되어 왔기 때문이리라. 그것이 지금 내 정체성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을 것이다.
관심과 무관심, 또는 차이와 차별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그러면서 세상에 대해서도 무심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내가 마음을 보탠다고 세상의 변화를 이끌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도 세상일에 의연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사랑하는 이들 때문이다. 연못에서 피어나지만 거기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세상을 외면하지는 않되, 애쓰지는 않을 수 있으면 좋갰다.
이 연지의 연꽃들이 피었다가 미련 없이 지는 것처럼, 연꽃을 만나고 스쳐 지나가는 걸림없는 바람처럼 내 눈길과 내 마음도 그렇게 가벼울 수 있기를.
세상이 잘 되기를 기도하되, 거기에 얽매이지는 않기를.
오늘 아침 연지에서 떠오른 두서없는 생각이다.
(2025. 08.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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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 아침 연지에서,
비에 젖은 연꽃/
미리 고백하자면, 어제 아침 연지에서도 나는 스마트폰을 놓지 못했다. 전날 밤에 비가 내렸고, 아침에도 간간이 빗발이 돋아 비에 젖은 연지의 풍경이 평소와 사뭇 달라 그 풍경과 그 속의 연꽃 자태를 담고자 하는 내 욕심을 도무지 어찌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그냥 연꽃과 마주하는 일은 다른 날로 미루고, 비에 젖어 빗방울을 매단 연꽃 자태를 스마트폰으로 담기로 했다.
‘청호우기(晴好雨奇)’라 했던가. 환하게 눈부신 날보다 이렇게 비 오는 날이나 안개 낀 날의 풍경이 내게는 더욱 깊게 다가온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무엇인가에 대한 호기심 같은 것이 더 해지는 까닭이다.
빗방울을 머금고 있는 연꽃과 연잎의 자태가 더 맑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간밤에 내린 비로 인해 미리 피었다가 꽃잎을 닫지 못한 연꽃들은 잎이 젖거나 축 늘어져 있지만, 이제 막 피어나거나 전날 피었다가 꽃잎을 다시 닫은 연꽃들은 부푼 꽃봉오리 째로 빗방울을 매달고 있다. 그 빗방울들이 더없이 맑고 영롱하다. 내게는 그 물방울들이 모두 보석처럼 아름답게 느껴진다.
‘처염상정(處染常淨)’이라는 말처럼, 연꽃과 연잎은 물에 젖지 않는다. 그래서 빗속에서도 잠시 빗방울을 매달고 있다가, 적절한 무게가 되면 그냥 떨어지게 한다. 연꽃이나 연잎이 폭우에도 쉽게 상하지 않는 이유는 이처럼 붙잡지 않고 놓아주기 때문이다.
문득 ‘방하착(放下着)’이 떠오른다. 잠시 소유하되, 그것을 내 것이라 움켜쥐거나 매달리지 않음으로써 자유로워지는 것. 비에 젖으면서도 맑게 피어나는 연꽃과 연잎에게서 그런 삶의 이치를 본다.
소유한다는 것은 동시에 소유당하는 것이다. 현대인이 불행한 이유 중 하나는, 불필요한 것을 소유함으로써 도리어 그것에 소유당하기 때문이라는 말도 이런 맥락일 것이다.
이미 넘치도록 많이 가졌음에도, 무언가를 더 가져야만 한다는 끝없는 그 허기짐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지금 내 앞에서 비에 젖으면서도 환하게 피어나는 연꽃이 내게 던지는 질문이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문득 '연꽃을 만나고 가는(?) 바람처럼' 이란 시귀가 떠오른다. 바람이 자유로운 것도 그가 만난 것들을 소유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비에 젖은, 비에 젖으면서도 해맑게 피어나는 연꽃을 담아 나눌 수 있어 고마운 아침이다.
(2025. 08.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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