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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9/13

* 오츠카 야스오(大塚恭男)[동서 생약고 東西生薬考]

<동서 생약고> 요약 및 평론 - 

오츠카 야스오(大塚恭男)의 1993년 저서 <동서 생약고>(東西生薬考)

<동서 생약고> 요약 및 평론

<동서 생약고>는 일본의 대표적인 한의학자이자 의사학자인 오츠카 야스오가 1993년에 출간한 저작이다. 저자는 동양과 서양의 전통 의학이 자연의 약재를 어떻게 인식하고 발전시켜 왔는지를 비교문화사적 관점에서 추적한다. 단순히 약물의 효능이나 화학적 성분을 규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류가 질병과 자연을 마주하며 쌓아 올린 지적 체계의 형성과 융합을 조망한다.

<1. 핵심 내용 요약>

<자연과 인간에 대한 인식 차이> 동양과 서양은 모두 식물, 동물, 광물 등 자연에서 약재를 구하는 것으로 의학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를 질병 치료에 적용하는 사유 방식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발생했다. 고대 그리스의 4체액설에 기반한 서양 의학은 갈레노스를 거치며 체액의 불균형을 교정하는 수단으로 생약을 바라보았다. 서양에서는 생약의 성질을 온·열·한·량 등 네 가지 성질과 건·습의 조합으로 파악하여 질병의 원인을 직접 억제하거나 배출(설사, 사혈, 구토)하는 데 집중했다.

반면 동양의 전통 의학, 특히 중국과 일본으로 이어진 한의학은 음양오행설과 기(氣)의 개념에 기대어 약재를 이해했다. <신농본초경>에서 제시된 상약, 중약, 하약의 분류 체계는 인간의 본성을 기르고 몸 전체의 균형을 유지하는 전인적 접근을 중시했다. 단일 성분의 직접적 작용보다는 여러 약재가 이루는 상호작용(군신좌사)을 통해 인체 고유의 회복력을 끌어올리는 방제학이 발달했다.

<실크로드와 대항해시대를 통한 약재의 교류> 생약은 고립된 채 발전하지 않았다. 감초, 육계, 대황, 인삼, 아편 등 주요 생약은 실크로드와 해상 교역로를 통해 끊임없이 동서양 사이를 넘나들었다. 서양의 대황(Rhubarb)은 동양의 장 세척과 열을 내리는 용법과는 다소 다른 맥락으로 수용되었고, 서양의 아편 역시 동양에 유입되면서 통증 완화와 지사제 등 고유의 처방 체계에 편입되었다. 대항해시대 이후에는 신대륙의 약재인 키나수피(키니네 원료) 등이 전 세계로 확산되며 전통적 질병관에 큰 충격을 주었다. 약재의 이동은 곧 문화적 번역과 의학적 체계의 재해석 과정이었다.

<본초학과 근대 식물학·약학의 분기> 18세기 이후 서양에서는 린네의 식물 분류학과 화학 혁명이 결합하며 생약에서 유효 성분을 추출·단리하는 근대 약리학이 태동했다. 생약의 복합적 작용은 단일 분자의 화학적 기전으로 환원되었다. 반면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에서는 에도 시대 란가쿠(난학)의 유입으로 네덜란드의 의학 지식을 접하면서도, 고유의 본초학 체계를 단번에 버리지 않고 <본초강목> 등의 지식을 바탕으로 자생 약초를 재검토하는 독자적 '고의학(古醫學)'과 실증적 본초학을 발전시켰다. 저자는 서양 약학이 '분석과 순수화'로 나아갈 때, 동양 의학은 '관계와 복합성'을 유지했음을 규명한다.

<2. 평론: 융합적 시선과 근대주의에 대한 성찰>

<탈서구중심적 의사학 연구의 모범>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서양 근대 의학을 발전의 최종 도착지로 두고 전통 의학을 미신이나 전근대적 유물로 치부하는 단선적 진보관을 거부한다는 점이다. 오츠카 야스오는 서양의 생약학 또한 수천 년간 경험주의와 고유의 철학에 기대어 작동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동양 본초학과 서양 마테리아 메디카(Materia Medica)를 동등한 층위에서 비교함으로써, 질병을 다루는 인류의 지혜가 지역적 환경과 철학적 전제에 따라 어떻게 다양화되었는지 객관적으로 증명한다.

<환원주의 약리학에 던지는 화두> 현대 약학은 특정 유효 성분만을 추출하거나 합성하여 질병을 표적 공격하는 방식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환원주의적 접근이 생약 특유의 다성분 복합 작용, 즉 성분들 간의 상승작용이나 부작용 상쇄 메커니즘을 온전히 설명하지 못함을 지적한다. 생약을 복합 처방의 형태로 다루어 온 동양 의학의 지혜는 현대 과학이 규명해야 할 또 다른 미개척 분야이며, 단순한 경험의 집적을 넘어선 정교한 시스템적 사고의 산물이라는 점을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한계와 현대적 의의> 책의 논의는 방대한 문헌 고증과 사료 분석에 기반하고 있어 인문학적·역사의학적 깊이가 탁월하지만, 1990년대 초반의 시점에서 서술되었기에 최신 생약 약리학이나 시스템 생물학적 연구 성과까지는 포괄하지 못한다는 시대적 한계가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양과 서양의 생약관을 이분법적으로 대립시키지 않고 문명 교류의 산물로 읽어내는 저자의 거시적 통찰은 오늘날 통합 의학이나 천연물 신약 개발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여전히 유효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동서 생약고>는 생약이라는 구체적인 매개체를 통해 인간이 질병을 해석하고 자연과 관계를 맺어온 방식을 탐구한 의사학적 수작이다. 단순한 지식의 나열이 아니라, 동서양 지적 전통의 만남과 분기를 날카롭게 포착함으로써 현대 의학이 잃어버린 생태적·전인적 감각을 되살리는 데 기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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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塚恭男 <東西生薬考>(1993) — 1,000단어 요약·평론

<東西生薬考>(동서 생약고)는 오쓰카 야스오(大塚恭男)가 1993년 창원사(創元社)에서 펴낸 310쪽의 책이다. 책은 크게 <1. 東西伝統医薬の流れ―동서 전통의약의 흐름>과 <2. 東西生薬考―동서 생약고> 두 부분으로 구성되며, 감초(甘草), 인삼(人参)을 비롯해 동서양에서 오래 사용해 온 생약 73종을 다룬다. 출판사 소개 그대로, 각 생약의 약효만 나열하지 않고 그것을 둘러싼 설화·풍습·역사와 동서양의 사용법을 비교한다. 귀중한 옛 채색 식물도판이 많이 수록된 것도 특징이다.

앞서 읽은 <東洋医学>(한국어판 <일본의 동양 의학>)이 <한방이라는 의료체계>를 설명하는 책이라면, 이 책은 그보다 한 층 아래로 내려가 <약 하나하나의 생애>를 추적하는 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약물학 교과서라기보다는 의학사·식물학·민속학·종교사·비교문화사가 교차하는 독특한 저작이다.

1. 핵심 질문: 인간은 왜 어떤 식물을 ‘약’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는가

현대 약리학은 약물을 주로 유효성분으로 이해한다. 어떤 식물에서 특정 화학물질을 분리하고, 그것이 수용체·효소·신경계에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측정한다.

오쓰카는 그보다 앞선 질문을 던진다.

<도대체 인간은 수천 년 전 어떻게 이 식물을 약으로 선택했는가?>

어떤 것은 먹어보고 알았을 것이다. 어떤 것은 우연히 효과를 발견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식물은 모양이나 색깔 때문에 신성한 힘이 있다고 믿었고, 어떤 것은 신화·주술·종교의 일부가 되면서 약으로 사용되었다. 한 식물이 중국에서는 한 가지 용도로, 그리스·로마나 중세 유럽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와 용도로 쓰인 사례도 있다.

따라서 생약의 역사는 단순히 <과학 이전의 불완전한 약리학>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연을 해석해 온 역사이기도 하다.

이것이 이 책의 가장 중요한 관점이다.


2. ‘동양의 본초’와 ‘서양의 herb’는 생각보다 가까웠다

우리는 흔히 동양에는 <본초학 本草學>, 서양에는 근대 약학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서양에도 오랫동안 식물·동물·광물을 이용하는 거대한 전통의 약물문화가 있었다.

그리스·로마의 약물학, 중세 수도원의 약초원, 르네상스 시대의 herbals, 민간의 약초 치료가 그것이다. 근대 화학약품이 등장하기 전까지 유럽 의약품의 상당 부분 역시 자연물에서 왔다.

오쓰카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이 평행성이다.

동양의 <본초서>와 서양의 <herbal>은 문화적 언어는 달라도 놀랄 만큼 비슷한 일을 했다.

식물의 모습을 기록하고,
어디에서 자라는지 설명하고,
어떤 부위를 사용하는지 적고,
어떤 질병에 효과가 있는지 전하고,
때로는 전설과 종교적 의미까지 덧붙였다.

즉 <신농본초경 神農本草經>과 유럽의 고전적 본초서는 서로 다른 문명에서 발생했지만 모두 <자연을 약물의 보고로 읽는 인간의 지식체계>였다.

바로 여기서 책 제목의 ‘東西’가 의미를 갖는다.

오쓰카의 목적은 어느 쪽이 더 우월했는지를 판정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멀리 떨어진 문명들이 동일한 식물을 어떻게 발견하고 해석했는가>를 비교하는 것이다.


3. 감초는 이 책의 방법을 가장 잘 보여준다

대표적인 예가 감초(甘草, licorice)다.

감초는 중국의 <신농본초경>에 등장하는 아주 오래된 약물이면서 유럽에서도 고대부터 사용되었다. 현대 한방에서는 수많은 복합처방에 들어가는 대표적인 생약이다. 감초는 중국과 유럽 모두에서 오랫동안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문자 그대로 <동서 생약>이다. 현대 연구에서도 감초의 주요 성분인 glycyrrhizin과 그 약리작용이 연구되어 왔다.

그러나 오쓰카에게 더 흥미로운 것은

<동일한 식물인데 왜 중국에서는 처방을 조화시키는 약으로 발전하고, 서양에서는 또 다른 형태의 약물로 사용되었는가?>

라는 질문이다.

여기서 중국 한방 특유의 <君臣佐使>라는 사고가 나타난다.

한방 처방에서는 하나의 약이 단독으로 작용하기보다 여러 생약이 군(君)·신(臣)·좌(佐)·사(使)의 역할을 나누어 전체 처방을 만든다. 실제로 오쓰카의 <東西生薬考>는 오늘날 한방교육 자료에서도 이 군신좌사의 설명을 위한 참고문헌으로 인용된다.

따라서 생약 하나를 이해하려면 그 식물의 성분만 봐서는 안 되고 <어떤 약들과 어떤 관계 속에서 사용되었는가>를 보아야 한다.

이것은 오쓰카의 동양의학관과도 정확히 연결된다.


4. 인삼: 약효와 상징이 결합한 식물

또 하나의 대표적인 약물이 인삼(人参)이다. 출판사의 복간 안내에서도 감초와 함께 이 책의 대표적인 사례로 인삼을 특별히 언급한다.

인삼은 동아시아에서 단순한 식물이 아니었다.

‘人参’이라는 이름 자체가 뿌리가 사람의 형상을 닮았다는 관찰과 관계된다. 귀한 산삼을 발견하는 과정에는 산신·꿈·길흉 등의 민속이 결합했고, 중국·조선·일본에서 인삼은 약이면서 동시에 고가의 상품이고 정치적·외교적 교역품이었다.

오쓰카가 이런 사례를 통해 보여주는 것은 <약효와 문화적 의미를 역사적으로 완전히 분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근대 약리학은 “인삼의 어떤 성분이 어떤 생리작용을 하는가?”를 묻는다.

전통사회는 동시에

“이 뿌리는 왜 사람처럼 생겼는가?”
“왜 오래 사는 산에서 발견되는가?”
“생명력을 보충해 주는 것은 아닌가?”

라고 물었다.

오늘날에는 후자의 추론 가운데 상당 부분을 과학적 근거로 인정하기 어렵지만, 그것이 수백 년 동안 인간의 약물 선택과 이용에 영향을 미쳤다는 역사적 사실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5. 유럽의 약초도 ‘과학적’이지만은 않았다

이 책의 장점은 동양의학만 신비화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서양의 약초사에서도 종교·점성술·유사성의 사고가 풍부했다.

예컨대 식물의 형태가 어떤 신체기관을 닮으면 그 기관의 질병을 치료한다고 보는 사고가 있었다. 현대적 관점에서는 비과학적이지만 당시 사람들에게 자연은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신이 인간에게 보내는 기호>이기도 했다.

이 책에서 다루는 금잔화 Calendula의 사례가 좋은 예다. 16세기 유럽 본초서들은 금잔화를 월경, 치통, 눈의 충혈, 피부 치료 등 여러 용도로 기록했다. 오쓰카는 이런 옛 유럽 본초 기록도 폭넓게 끌어온다. 현대 일본의 약용식물 연구기관도 <東西生薬考>에 기록된 이러한 유럽 본초 자료를 소개한다.

즉 오쓰카는

<동양 = 신비주의 / 서양 = 과학>

이라는 단순한 구도를 무너뜨린다.

동서양 모두 자연을 경험하고, 관찰하고, 동시에 상징적으로 해석했다.


6. 생약은 문명 사이를 이동한다

이 책에서 특히 흥미로운 또 하나의 주제는 <약의 이동>이다.

식물에는 국경이 있지만 약물지식에는 국경이 없다.

무역로, 전쟁, 종교, 제국, 의사의 여행을 통해 약과 지식이 이동한다.

어떤 생약은 중국에서 시작되어 일본으로 갔고, 어떤 것은 중앙아시아와 인도를 거쳐 중국으로 왔다. 반대로 지중해 세계에서 사용되던 약물이 아라비아·페르시아 의학을 거쳐 동쪽으로 이동하기도 했다.

오쓰카가 보여주는 것은 우리가 흔히 <중국의 약>, <서양의 허브>라고 고정해 부르는 것들이 실제 역사에서는 끊임없이 이동하고 변형되었다는 사실이다.

마늘도 그런 사례 중 하나다. 이 책의 229쪽은 고대 서양에서 포도주와 함께 마늘을 사용하는 치료법을 소개하는 자료로 후대 문헌에서 인용되고 있다.

즉 약물사는 일종의 세계사다.


7.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 경험은 미신과 과학의 중간에 존재한다

오쓰카가 전통 생약을 다루는 태도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두 극단을 모두 피한다는 점이다.

첫 번째 극단은

<옛사람들이 사용했으므로 효과가 있다>

는 주장이다.

두 번째 극단은

<현대 과학으로 설명되지 않았으므로 모두 미신이다>

라는 주장이다.

오쓰카는 양쪽 모두를 경계한다.

수백 년의 경험적 사용은 연구할 가치가 있다. 그러나 그 경험이 곧 약효의 과학적 증명은 아니다.

반대로 고대 문헌에 신화적 설명이 들어 있다고 해서 그 식물의 실제 약리작용까지 부정할 이유도 없다.

바로 여기에서 오쓰카의 특이한 이력이 힘을 발휘한다. 그는 한방의 대가 오쓰카 게이세쓰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도쿄대 의학부에서 현대의학과 약리학을 공부한 연구자였다.

따라서 그의 관심은

<전통을 믿을 것인가 버릴 것인가>

가 아니라

<전통 속에 축적된 경험을 현대 과학의 질문으로 어떻게 바꿀 것인가>

였다.


8. 평론: 이 책은 의학책보다는 ‘비교문명사’로 읽는 것이 더 좋다

나는 <東西生薬考>의 가장 큰 가치를 약효정보보다 <비교의 방법>에서 찾는다.

오쓰카는 73종의 식물을 하나씩 들여다보면서 문명 간의 차이보다 공통점을 발견한다.

인간은 어디에서 살든

아플 때 주변의 자연을 살펴보았고,
식물을 먹거나 발라 보았으며,
효과와 실패를 기억했고,
그 경험을 이야기로 전했으며,
마침내 그것을 의학체계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본초학은 자연과학이 시작되기 이전의 단순한 미신이 아니다.

<인간이 자연을 체계적으로 관찰하고 기억한 가장 오래된 지식 형태 중 하나>다.

그렇다고 이것을 현대 약리학과 동등한 과학이라고 부를 수도 없다.

바로 그 중간지대가 이 책의 가장 흥미로운 장소다.


9. 지금 읽을 때의 한계

다만 1993년의 책이라는 사실은 분명히 고려해야 한다.

오늘날에는 생약의 유효성분, 독성, 약물상호작용에 대한 지식이 훨씬 많이 축적되었다. 따라서 이 책에 등장하는 전통적 효능을 오늘날의 의학적 효능으로 곧바로 읽어서는 안 된다.

예컨대 “16세기 유럽에서 이 식물을 월경·치통·눈병에 사용했다”는 것은 중요한 의학사적 사실이지만,

<그 치료법의 효과가 현대 임상시험에서 입증되었다>

는 뜻은 아니다.

따라서 책의 두 층위를 구별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사람들이 무엇을 믿고 사용했는가>와
<실제로 현대 의학적으로 무엇이 효과가 있는가>

는 별개의 문제다.

이 구별만 지킨다면 책은 오히려 지금도 상당히 현대적이다.


10. <일본의 동양 의학>과 함께 읽으면 보이는 오쓰카의 사상

앞서 읽은 <東洋医学>(1996)과 이 책을 함께 놓으면 오쓰카의 전체 구상이 명확해진다.

<東西生薬考>(1993)은

약은 어떻게 인간문화 속에서 만들어졌는가?

를 묻는다.

<東洋医学>(1996)은

그렇게 발전한 동양의학은 서양의학과 어떻게 다른가?

를 묻는다.

하나는 <약의 역사>이고 다른 하나는 <의학체계의 역사>다.

그러나 둘을 관통하는 사상은 같다.

<서양의학과 동양의학을 적대적인 두 세계로 만들지 말라.>

서양에는 서양의 전통 생약학이 있었으며, 동양의 본초에도 풍부한 경험적 관찰이 있었다. 현대의학은 이 두 전통을 모두 비판적으로 계승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오쓰카는 전통주의자가 아니라 <통합주의적 역사주의자>에 가깝다.


종합평가

<東西生薬考>를 한 문장으로 정의한다면,

<약초 73종을 통해 쓴 ‘인간과 자연의 세계문화사’>

라고 하고 싶다.

처방을 배우려는 독자에게는 <東洋医学>이나 임상 한방서가 더 직접적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을 어떻게 약으로 만들었으며, 서로 만나지 않았던 동서 문명은 왜 비슷한 식물을 비슷하거나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용했는가>에 관심이 있다면 오히려 <東西生薬考>가 오쓰카의 책 가운데 가장 매력적이다.

특히 앞서 이야기한 <중국 중의학–한국 한의학–일본 한방> 비교와 연결하면 더욱 흥미롭다. 세 나라의 의학제도는 근대에 크게 갈라졌지만, 그 아래에는 훨씬 오래된 <본초라는 공통의 지식세계>가 존재한다. 오쓰카는 바로 그 층까지 내려간다.

그래서 이 책의 진짜 주제는 약초가 아니다.

<인간은 자연에서 무엇을 보고, 그것을 어떤 이야기와 경험으로 지식화해 왔는가>이다.

그 점에서 <東西生薬考>는 의학사 책이면서 동시에 종교와 민속, 과학이 아직 분리되기 이전의 인간 정신사를 보여주는 책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앞의 <일본의 동양 의학>보다 세진님의 관심사에는 오히려 이 책이 더 흥미로운 면이 있습니다. 특히 다음으로는 이 책에서 보이는 <본초학의 자연관>을 <도교적 자연관·신농본초경·서양 중세의 약초와 기독교적 자연관>과 비교하면, 단순한 동서의학 비교를 넘어 <동서양이 자연을 어떻게 ‘의미 있는 세계’로 읽었는가>라는 종교·철학적 차원까지 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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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9/03

* 일본 한방의학과 한국 한의학의 핵심적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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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한방의학과 한국 한의학의 핵심적 차이를 진단 체계와 제도적 구조를 중심으로 정리한 내용입니다.

<진단 체계 및 학문적 성격의 비교>

<1. 진단 방식과 핵심 지표>

  • <일본 한방 (방증상대와 복진 중심)>: 진단의 핵심은 <방증상대(方證相對)>다. 환자가 호소하는 자각 증상과 객관적 징후의 묶음(증)을 특정 처방(방)과 1대 1로 직결시키는 방식이다. 복잡한 장부 병리나 형이상학적 이론 대신, 환자의 복부를 손으로 눌러 긴장도와 압통을 살피는 <복진(腹診)>을 가장 결정적인 진단 도구로 삼는다. 맥진이나 설진도 활용하지만 복진의 비중이 압도적이다.

  • <한국 한의학 (변증논치와 사상의학 중심)>: 음양오행과 장부경락 이론에 기반한 <변증논치(辨證論治)>를 기본으로 한다. 병의 근본 원인(허실, 한열, 기혈 순환 등)을 논리적으로 추론하여 처방을 구성한다. 특히 이제마의 <사상의학(四象醫學)> 전통이 강하게 작동하여, 동일한 증상이라도 환자의 선천적 체질(태양, 태음, 소양, 소음)과 심리적 특성에 따라 완전히 다른 약제를 투여하는 체질 진료 체계가 발달했다. 진단에서는 복진보다 <맥진(脈診)>과 <설진(舌診)>, 그리고 환자의 체형 기상을 중시한다.

<2. 이론과 철학적 기반>

  • <일본 한방 (철저한 실증주의와 탈이론화)>: 에도 시대 고방파(古方派)의 영향을 받아 음양오행설과 같은 형이상학적 사변을 철저히 배격했다. "질병의 이론적 원인은 알 수 없으나, 특정 증상에 이 약을 쓰면 낫는다"는 철저한 경험주의와 실증주의를 취한다. 그 결과 이론 체계는 단순화되었으나 임상적 재현성은 높아졌다.

  • <한국 한의학 (정밀한 병리 이론과 전인주의)>: <동의보감(東醫寶鑑)>의 전통을 이어받아 정·기·신(精·氣·神)의 조화와 인체 내적 균형을 규명하는 이론 체계가 매우 정밀하다. 증상 자체의 소멸뿐만 아니라 신체 내부의 면역력과 생명력의 회복을 목표로 삼는 거시적 병리 철학을 유지한다.

<제도적 구조와 의료 전달 체계의 비교>

비교 항목일본 한방의학한국 한의학
<면허 체계>단일 면허제 (별도의 한의사 면허 없음, 서양의학 의사 면허 소지자가 진료)이원적 면허제 (의사 면허와 한의사 면허가 법적으로 완전히 분리)
<교육 과정>서양의과대학 교육 과정 내 일부 과목(선택/필수)으로 이수독립된 6년제 한의과대학 및 한의학전문대학원을 통해 배출
<제제 형태>148종의 표준화된 엑기스제(과립제/캡슐제) 중심, 건강보험 적용원내 탕전(물약) 중심, 과립제 병용 (탕전약의 보험 적용은 제한적)
<침구 시술 주체>주로 맹인 안마사·침구사 등 별도 국가자격사 또는 일부 의사가 시술한의사가 진맥, 한약 처방, 침·구·부항을 통합하여 직접 시술
<임상 적용 방식>서양의학적 진단(영상, 혈액검사 등)을 보조·보완하는 약물 요법 위주독립적인 한의학적 진단 체계 하에 독립적인 의료 행위 수행

<요약 및 평가>

일본 한방은 메이지 유신 이후 제도가 폐지되는 위기 속에서 서양의학 시스템 안으로 스스로를 적응시켰다. 그 결과 이론의 깊이는 얕아졌으나, 현대 의사들이 거부감 없이 처방할 수 있는 <규격화된 약물 치료 수단>으로 안착했다.

반면 한국 한의학은 일제강점기의 탄압을 견뎌내고 해방 후 독립된 법적 지위(이원화된 의료 체계)를 쟁취했다. 이로 인해 고유의 심오한 의학 철학과 침구·탕전의 통합적 치료 체계를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으나, 현대 서양의학계와의 직역 갈등 및 제도적 분절이라는 구조적 과제를 동시에 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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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쓰카 야스오, <일본의 동양 의학> — 요약·평론

먼저 서지사항 하나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한국어판 <일본의 동양 의학>(오쓰카 야스오 지음, 이광준 옮김, 소화, 2000)은 일본에서 처음부터 <日本の東洋医学>이라는 제목으로 나온 책이 아니다. 원저는 오쓰카 야스오가 1996년 이와나미서점의 이와나미신서로 출간한 <東洋医学>(동양의학)이다. 한국어판에서 일본적 맥락을 강조하기 위해 <일본의 동양 의학>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 일본 원서는 12장, 본문 213쪽과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1. 저자: 大塚恭男은 누구인가

저자의 일본어 이름은 <大塚恭男(おおつか・やすお, Ōtsuka Yasuo, 1930–2009)>이다. 한국어로는 보통 <오쓰카 야스오>라고 표기한다. 1930년 고치현에서 태어나 1955년 도쿄대학교 의학부를 졸업하고 도쿄대 병원 내과에서 근무했으며, 대학원에서는 약리학을 연구했다. 1962~1966년 서독과 오스트리아에서 유학했고 요코하마시립대 강사를 거쳐 1975년 기타사토연구소 동양의학종합연구소에 들어갔다. 1986년 제3대 소장이 되었다.

특히 중요한 사실은 그가 일본 근현대 한방 부흥의 중심인물 <大塚敬節(오쓰카 게이세쓰, 1900–1980)>의 장남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아버지에게서 한방을 전수받은 전통의학자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도쿄대에서 현대의학과 약리학을 배우고 유럽 의학도 경험했다. 따라서 그의 평생 과제는 <한방인가 서양의학인가>라는 양자택일이 아니라, “서로 다른 두 의학적 인식체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연결할 것인가”였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이 점이 바로 <일본의 동양 의학>의 성격을 결정한다.


2. 책의 출발점: 동양의학과 서양의학은 무엇이 다른가

첫 장에서 오쓰카는 동양의학을 서양의학의 덜 발달한 전단계로 취급하지 않는다. 두 의학은 인간의 몸과 질병을 바라보는 방식 자체가 다르다고 설명한다.

서양 근대의학은 질병의 원인을 특정하고, 장기·조직·세포·병원체·생화학적 기전으로 질병을 분석하는 데 탁월하다. 반면 한방은 “무슨 병인가?”에 앞서 “이 환자의 몸 전체가 지금 어떤 상태인가?”를 묻는다.

그래서 한방에서 핵심적인 것은 <証(しょう, 쇼)>이다. 흔히 한국어로 <증>이라고 번역하지만 단순한 증상(symptom)이 아니다. 환자의 체질, 현재의 신체 상태, 증상의 조합, 냉·열, 허·실 등을 종합한 하나의 임상적 패턴이다.

이 때문에 똑같이 위가 아프다고 해도 모든 사람에게 같은 처방을 하지 않고, 반대로 서양의학적으로 서로 다른 병명이라도 동일한 <証>을 나타내면 같은 처방을 사용할 수 있다.

이것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원리다. 원서 목차도 <동양의학과 서양의학>, <일본에서의 동양의학의 역사>, <일본의 동양의학과 중국의학>, <동양의 신체관과 질병관>, <본초의 역사>, <한방의 진단법>, <한방약>을 설명한 뒤 소화기·산부인과·노인·소아·통증 치료의 실제로 진행된다.


3. 중국의학과 일본 한방은 동일하지 않다

이 책에서 특히 가치 있는 부분은 일본의 한방을 단순히 <중국의학의 일본판>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중국에서 들어온 의학은 일본에서 수백 년 동안 선택되고 변형되었다. 특히 에도시대의 <古方派(고방파)>가 중요하다. 고방파는 송·명 시대에 발전한 복잡한 이론을 의심하고 장중경의 <傷寒論>과 <金匱要略> 같은 고전으로 돌아가 실제 환자의 증후와 처방의 대응관계를 중시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吉益東洞(요시마스 도도)>이다.

오쓰카가 보기에 이 과정에서 일본 한방은 중국의학과 다른 독특한 경험주의적 성격을 갖게 된다. 이것은 일본 사상사에서 종종 나타나는 흥미로운 현상이기도 하다. 외부 문명을 그대로 보존하기보다 수입한 뒤 대폭 단순화하고 실용적으로 재구성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책 제목을 한국어판에서 <일본의 동양 의학>이라고 한 것은 내용상 상당히 적절하다. 이 책은 사실상 <동양의학 일반론>인 동시에 <중국의학이 어떻게 일본의 漢方이 되었는가>를 설명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4. 몸을 ‘기계’가 아니라 ‘관계’로 보는 의학

오쓰카가 설명하는 동양의학의 신체관은 현대 독자가 가장 철학적으로 읽을 만한 부분이다.

음양(陰陽), 허실(虚実), 한열(寒熱), 기혈수(気・血・水) 같은 개념은 해부학적 실체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몸 안에서 일어나는 관계와 균형의 양상을 표현하는 언어다.

예를 들어 <虚>는 어느 특정 장기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신체의 대응능력이 약화된 상태를 나타낸다. <実>은 단순히 건강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병리적 반응이 강하게 나타나는 상태를 가리킬 수 있다.

이러한 사고법의 장점은 환자를 지나치게 병명으로 환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대 의학에서는 검사 결과가 정상이면 “이상 없음”이라고 판정하기 쉬운 증상도 한방의사는 수면, 식욕, 배변, 추위와 더위에 대한 반응, 발한, 갈증, 복부 상태 등을 종합하여 하나의 패턴으로 읽는다.

오쓰카의 다른 책 <漢方と薬のはなし>를 소개하는 일본 도서관 자료가 한방의 목표를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병든 사람을 고친다”는 말로 압축하는 것도 이러한 관점을 잘 보여준다.


5. 진단의 중심: 환자를 직접 만지고 관찰한다

책은 맥진(脈診), 설진(舌診), 복진(腹診)을 비롯한 한방 특유의 진찰법을 설명한다.

특히 일본 한방에서 <복진>의 중요성이 커졌다는 점이 흥미롭다. 복부를 직접 눌러 긴장, 압통, 저항 등의 상태를 파악하고 이를 처방 선택과 연결한다.

여기에서도 서양의학과의 대비가 나타난다. 근대의학이 검사기계와 수치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되었다면 전통 한방은 의사의 감각과 환자의 이야기, 그리고 반복된 임상경험에 크게 의존한다.

오쓰카는 이를 단순히 과거의 비과학적 유물로 버리려 하지 않는다. 동시에 신비주의적으로 절대화하지도 않는다. 자신의 약리학 배경을 이용해 전통적 경험을 현대 의학의 연구대상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最新の漢方薬理―漢方薬の科学的な検証と展望> 같은 책을 공동 편집한 것도 이러한 입장의 연장선상에 있다.


6. 한방약은 ‘약초 하나’가 아니라 처방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주의할 것은 한방을 “자연산 약초를 먹는 치료” 정도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갈근탕(葛根湯), 안중산(安中散) 등의 처방은 여러 생약을 특정한 비율로 조합한 하나의 체계다. 오쓰카에게 중요한 것은 개별 약물의 화학성분만이 아니라 <어떤 환자의 어떤 証에 어떤 方을 대응시킬 것인가>이다.

그래서 <方証相対>, 즉 처방(方)과 증(証)의 대응이라는 일본 한방의 사고가 중요해진다. 오쓰카는 이미 1973년 <東洋医学をさぐる>와 1983년 <東洋医学入門> 등에서 이 문제를 지속적으로 다루었다.

책 후반부의 소화기질환·산부인과질환·노인성질환·소아질환·통증 치료는 바로 이러한 원리가 실제 임상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평론

7. 이 책의 가장 큰 장점 — ‘전통 대 과학’이라는 싸움을 피한다

나는 이 책의 가장 좋은 점을 <양자택일을 거부한다>는 데서 찾는다.

오쓰카는 “서양의학은 기계론이고 동양의학은 전인적이므로 동양의학이 우월하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한방을 미신이나 민간요법으로 밀어내지도 않는다.

그 자신이 현대의학을 정식으로 공부한 의사였기 때문에 두 체계의 장점과 한계를 비교할 수 있었다.

이 태도는 오늘날의 일본 의료를 어느 정도 예견한 것이기도 하다. 일본에서는 메이지 시대에 한방의사라는 별도의 국가 자격이 사라졌고, 오늘날 한방약을 처방하는 사람도 기본적으로 현대 서양의학 교육을 받은 의사이다. 현대 일본에서 한방은 별개의 의료체계라기보다 현대의학 내부에 통합되는 형태로 발전했다. 2000년대 이후 의과대학 교육에도 한방이 다시 본격적으로 들어왔고, 최근 조사에서도 일본 의과대학의 상당수가 한방을 교육한다.

오쓰카가 걸었던 길이 바로 이 일본적 통합모델의 선구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다.


8. 그러나 오늘 읽을 때에는 ‘치료효과’와 ‘의학철학’을 구별해야 한다

여기에는 중요한 한계가 있다.

1996년에 쓰인 이 책을 2026년에 그대로 임상 지침서처럼 읽어서는 안 된다. 특히 어떤 한방 처방이 특정 질환에 효과가 있다는 전통적 경험과 현대적 임상시험으로 효과가 입증되었다는 것은 서로 다른 주장이다.

실제로 일본 한방계도 2000년대 들어 무작위대조시험과 근거중심의학(EBM)을 적극적으로 도입해 왔으며, 일본동양의학회도 한방치료의 임상근거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현대 연구자들도 전통적으로 사용되어 왔다는 사실 자체가 현대적 임상근거를 대신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오늘날 이 책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는 부분은 “어떤 약이 어떤 병을 고친다”는 개별 치료정보라기보다 <인간의 몸과 질병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의학철학이다.


9. 한의학을 아는 한국 독자에게 특히 흥미로운 점

한국 독자에게는 또 하나의 독특한 의미가 있다.

한국에서는 <한의학>과 <서양의학>이 교육기관·면허·전문직으로 분리되어 있다. 중국에서도 중의학이 독립된 전문 교육체계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그렇지 않다. 한방이 서양의학과 제도적으로 경쟁하는 별도 의료직역이 아니라 현대의학을 공부한 의사가 사용할 수 있는 치료 자원의 하나가 되었다.

따라서 이 책을 읽으면 단순히 “일본에도 한의학이 있다”가 아니라,

<중국의학 → 일본 漢方 → 메이지기의 서양의학 독점 → 20세기 한방 부흥 → 현대의학 내부로의 재통합>

이라는 매우 특이한 역사적 궤적이 보인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책은 의학서를 넘어 일본 근대사와 일본 사상사의 책이 된다.


종합 평가

<일본의 동양 의학>은 한방 처방전을 배우기 위한 실용서로 읽는 것보다 <일본인은 중국에서 들어온 의학을 어떻게 일본화했고, 근대 서양의학과 어떻게 다시 결합시켰는가>를 설명하는 지성사적 입문서로 읽을 때 훨씬 가치가 크다.

오쓰카 야스오의 위치도 흥미롭다. 아버지 오쓰카 게이세쓰는 메이지 이후 거의 사라질 뻔했던 일본 한방을 되살린 <부흥 세대>에 속했다. 아들 야스오는 그 유산을 현대 약리학·임상의학·의학사와 연결시킨 <통합 세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부자를 간단히 대비하면,

<大塚敬節 — 한방을 살려낸 사람>
→ <大塚恭男 — 살아난 한방을 현대의학과 대화시킨 사람>

이라는 구도가 선명해진다.

이 책의 진정한 주제는 사실 한방약 자체보다 <두 종류의 합리성이 공존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다. 질병을 객관적 대상으로 분석하는 근대의학과, 병든 인간 전체의 상태와 관계를 읽으려는 전통의학 사이에서 어느 한쪽을 폐기하지 않고 접점을 찾는다.

이 때문에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읽을 이유가 충분하다.

다만 오늘날에는 한방의 <철학적·임상적 관찰법의 가치>와 <개별 치료법의 과학적 효과>를 분리해서 평가해야 한다. 전자는 이 책이 여전히 매우 강한 부분이고, 후자는 1996년 이후 축적된 임상연구를 별도로 확인해야 한다.


오쓰카 야스오의 다른 주요 저서

일본어 제목연도성격
<東洋医学をさぐる>1973편저. 한방·침구·생약·의학철학을 여러 연구자가 논한 초기 종합서.
<東洋医学入門>1983본격적인 동양의학 입문서. 일본 한방의 역사와 논리, 생약·처방 등을 폭넓게 다룬다.
<最新の漢方薬理―漢方薬の科学的な検証と展望>1988공동 편집. 한방약을 현대 약리학적으로 검증하려는 작업.
<新・漢方処方マニュアル>1991공동 기획·편집. 임상 처방 중심의 전문서.
<東西生薬考>1993동서양에서 사용된 73종의 생약을 역사·문화·약효의 관점에서 비교한 독특한 저서.
<漢方と薬のはなし>1994자신의 임상경험과 약물·한방의 역사 이야기를 대중적으로 풀어쓴 책.
<東洋医学>1996이와나미신서. 바로 한국어판 <일본의 동양 의학>의 원저.
<東洋医学の世界―大塚恭男論文集>1998828쪽에 달하는 논문집으로 그의 연구 전체를 살펴보기에 가장 중요한 자료.
<臨床医の漢方治療指針>1999 개정판장곡천미인·丁宗鉄과 공동 편집한 임상의용 한방 지침서.

이 가운데 <일본의 동양 의학> 다음으로 한 권만 더 읽는다면 나는 <東西生薬考>(1993)를 권하고 싶다. 단순한 한방 치료서가 아니라 <동양과 서양은 식물과 약을 어떻게 서로 다르게 이해해 왔는가>를 비교하기 때문이다. 오쓰카의 관심이 단순한 임상 한방을 넘어 <의학사·문화사·비교문명사>에까지 미쳤다는 것이 가장 잘 드러나는 책이다. 출판사 소개에서도 동서양에서 빈번히 사용된 생약에 얽힌 설화·풍습과 약효를 비교하고 73종의 생약을 다룬 책으로 소개한다.

그리고 세진님이 지금까지 읽어오신 <동아시아 사상의 수용과 변형>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다음에는 <중국 중의학–한국 한의학–일본 한방>을 비교해 보는 것이 특히 흥미롭습니다. 같은 중국 고전의학에서 출발했는데 왜 한국은 <별도의 한의사 제도>, 일본은 <서양의사가 한방을 처방하는 통합형>, 중국은 <중의사와 서의가 병존하는 체제>가 되었는지를 비교하면, 의학뿐 아니라 세 나라의 근대화 방식의 차이까지 아주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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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塚恭男先生を追慕する

大塚恭男先生を追慕する

真柳誠「大塚恭男先生を追慕する」『漢方の臨床』56巻4号615-620頁、2009年4月

大塚恭男先生を追慕する

茨城大学教授  真柳 誠

 

 大塚恭男先生が二〇〇九年三月八日にご逝去され、もう二週間がすぎた。九日に訃報を受けたとき、いいようのない空しさにおおわれ、どうしても仕事に手が着かない。それで急ぎあちこちに連絡した後、帰宅して先生の思い出を妻と語りつつ夜を過ごした。十一日の通夜では懐かしい先生の温顔を仰ぎ、初めて悲しみがわき上がってきたが、今も空しさが心を占めている。時に思い出しては、大塚先生とつぶやいてしまう。一昨日の朝ようやく、これが心に穴の空いたような気持ちなのだと気づいた。

矢数道明・大塚恭男両恩師と共に(1986年7月23日矢数所長退任記念祝賀会)〔他は左より筆者・土屋伊磋雄・小曽戸洋・平馬直樹各氏〕
 私は矢数道明先生と大塚恭男先生に仕えさせていただき、多くを学び、人生の恩師と尊崇している。道明先生と永別したときは沈痛の一方で、感謝の気持ちに満たされていた。どうして恭男先生では心に穴が空いてしまったのだろう。うまく整理できないが、師と仰ぐ以上に先生が大好きで、心のボスとしていたからかもしれない。私は北里東医研に在籍した十三年間、公私ともに先生にかわいがっていただき、主人に従う子犬のように慕い続けてきた。でも永別がこんなに早く来るとは。

 先生に初めてお会いしたときのことは今も憶えている。一九八三年七月に中国留学から帰国した後、小曽戸洋氏らのお誘いをいただき、東医研で医史学を研究したいと決意した。道明所長からは留学中に幾度となくお手紙をいただいていたので、このことを相談申し上げると、医史学研究室長を兼任されていた大塚副所長が同意なさるなら宜しいでしょうとのこと。そこで恭男先生の面接を受けたのだった。

 緊張して副所長室に入ると先生はにこやかに、何を研究したいのですかと質問される。そこで当時ずっと考えていた本草の薬性論ですと答えると、すかさず『呉普本草』で神農や黄帝などの流派ごとに異なる薬性を記すのをどう思いますかと尋ねられ、吃驚した。恥ずかしいことに、恭男先生の医史学・本草学のご研究をまったく存じ上げなかったのだから。ただ運のいいことに、私は当時中国で内部出版だったガリ版刷り『呉普本草』をコピーし、『神農本草経』と読み較べなどしていた。これが尚志鈞という本草学者の重輯で、解説に多紀元胤・森立之・岡西為人の業績が何度も引用されているなどと述べ、冷や汗だらけで面接をなんとか通過した。それから先生への師事が始まる。

 本草がお好きだった先生は度々語られた。「見えない病気相手の医方より、見える薬物相手の本草は具体的に研究できる」「本草は記述年代が分かりやすいので、歴史研究に向いている」などなど。また大プリニウス『博物誌』にあるサソリ毒とトリカブト毒の相殺記事より、『呂氏春秋』にある「萬菫不殺」とは、萬(サソリの象形)と菫(トリカブトの古名)の毒が相殺する意味と喝破された。これは二千年の訓詁を正すご研究で、永遠に遺る業績である。私もサソリの咬傷にトリカブト末を使う治療が今本『肘後方』にあるのを見つけ、先生に報告して喜んでいただいたことがあった。大黄の薬用がローマ・中国ともに一世紀に始まることも、ギリシャの万能解毒薬テリアカがらみで先生にお教えいただいたひとつ。ドイツ・オーストリア留学で医史学に興味を持たれ、帰国後は順天堂の医史学研究室で小川鼎三教授の最初の門人となられた、大塚先生ならでは研究成果といえる。こうした東西医薬の比較研究は江戸の考証医学者ができなかった仕事、と先生は述べられていた。私も先生に倣い、漢字文化圏の医学史を比較研究するようになった。

 先生は沢山の患者さんを待たせないため、いつも昼食が夕方になってしまう。そして夕方の用件がないときは、しばしば私たちを副所長室(のち所長室)に招き入れて下さる。これが無上の楽しみだった。先生の机の後の棚には、当時の私たちには縁遠かった美酒が沢山ある。それで勝手に大塚酒庫などと呼んでいたが、センベイをつまみにグラスを傾け、貴重なお話を拝聴した多くの楽しい時間を、いま夢のように思い出す。

       温顔の大塚先生
 学会や研究会の宿泊先でも、一同でお話をうかがったことは数え切れない。毎年の東洋医学会と医史学会の学術総会、富士市での東西比較医学史シンポジウム、道明先生の主唱で発足した東洋医学研究機関連絡協議会の会合などなど。先生は気どらない飲み屋がお好きで、ご自宅近くの店にはよく皆でお伴させていただいた。酔うと必ず漢詩を口ずさみ、時には揮毫される。運良くいただけた揮毫は日付・場所のメモと一緒に横浜の自宅に保存してあるが、いま茨城にいて見ることができない。

 漢詩以外にもマッカーサーの「Old soldiers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老兵は死なず、ただ消え去るのみ)」や、井伏鱒二の名訳「花に嵐のたとえもあるぞ、さよならだけが人生だ」をしばしば口にされた。九六年の四月末、茨城大学に赴任する挨拶でご自宅へうかがったときには、「人生朝露 芸術千秋」と揮毫された写真の色紙をいただいた。これはヒポクラテスの箴言「Life is short, the Art long(人生は短く、術のみちは長い)」を先生がみごとに漢訳されたもので(郭沫若訳か)、以来ずっと研究室に掲げている。するとよく揮毫された「人生無別離 誰知恩愛重(人生別離なくんば、たれぞ恩愛の重きを知らん)」も、どうやらご自作の句らしい(小曽戸氏メモに蘇軾作と)。こうした別れの言葉をいつも口にされていたので、先生との永別にも無常感だけを強くおぼえるのだろうか。

 先生の話題は私たち相手のせいかほとんど医史学がらみで、尊敬する学者の話が多かった。岡西為人先生では、京都のご自宅を訪問したときのこと、晩年にお見舞いに行くと酸素テントの中で著書のゲラ校正をされていたこと。三木栄先生では、医史学会が終ると「おい大塚君、一杯やろうか」とよく誘われたこと。九二年十二月に三木先生の訃報を朝刊で知り、外来を終えた先生と二人でなんとかお通夜に間に合うよう、堺までとんぼ返りしたのも思い出す。かつて先生は宮下三郎先生の研究に感銘を受け、杏雨書屋に初めて訪ねると本人自ら「そんな人知りまへんなー」と、とぼけられたことを楽しそうに何度も話された。私も親しく学ばせていただいた宗田一先生とは、本当に楽しく痛飲されていた。みな上方の医史学者で、今はもう宮下先生だけになってしまった。

 私は大塚先生のご紹介により、三木先生・宗田先生・宮下先生・山田慶兒先生など多くの先生方と知遇を得てきた。また一九七一年にウィーンで開催されたアジア比較医学史の会議で、先生はもっとも若い発表者だったウンシュルト氏と出会い、以来ずっと氏の才を高く評価されていた。そのご縁で私もウンシュルト氏と親しくさせていただいている。みな先生のおかげである。ウンシュルト氏には三月九日に先生の訃報をメール連絡し、追悼文を翌日いただいたので大塚家に転送、また本誌にも載せてもらうことにした。

     先生からいただいた揮毫
 先生のご業績はとても多いが、東洋医学界と医史学界への貢献も大きく、その恩恵を私たちは受け続けている。医史学会の常任理事として東洋医学史の研究を牽引されてきたこと。小川鼎三先生のあとを承け、谷口財団による東西比較医学史国際シンポジウム(一九七六~九八)を酒井シヅ先生と開催され、アジアと欧米の若手研究者の交流と育成に努められたこと。このシンポジウムには私も二度参加させていただき強い刺激を得たが、先生たちと過ごした泊まり込みの楽しい日々は忘れられない。しかし私たちにとって最大の恩恵は、道明先生に協力されて北里東医研に医史学研究室(医史研)を開設されたことだった。矢数・大塚両所長のもと、存分に研究させていただいたおかげて今の私たちがある。

 当初は研究室といっても小曽戸氏が非常勤で書庫の一角で研究する状態だったが、氏が常勤になってからは徐々に研究室の体制が備わってきた。私も八三年九月から九二年三月まで非常勤、のち常勤として九六年四月まで医史研に在籍させていただいた。恭男先生は八二年に副所長、八六年から九六年六月まで所長を勤められたので、このほぼ全期間に仕えることができた私は幸せというしかない。不得意だった英文サマリーを、先生に真っ赤に直していただいたことまである。そして道明先生を後ろ盾、恭男先生をボスとし、医局から花輪壽彦・安井広迪・平馬直樹ほかの各氏、外部からも客員研究員が続々と参加して医史研は多くの研究と仕事を達成してきた。

 八〇年代は研究会を幾度も開催し、みな三十代で血気盛んゆえ、最後は取っ組み合いになるほど真剣な議論を重ねたこともある。医史学会総会では医史研の演題が十題ほどになり、そのパワーで学会の空気が一変したと思う。ついには大塚軍団と呼ばれたが、それを先生はとても満足げにされていた。先生をボスとした最大のイベントは、一九八七年の第八八回医史学会総会だろう。白金の北里大学を会場に、先生は会頭として「隋唐の医書にみる精神病とその治療」を講演された。私たちは嬉々として準備に奔走したが、とても助かったのは先生が派手な演出等を好まず、万事質素にするよう申されたこと。それで予算があまり、総会後に伊豆まで一泊の慰労会に出かけたのを、いま楽しく思い出す。

 ただ東医研第三代所長となられた八六年からは、診療を終えた後も会議などが多くなり、先生の蘊蓄を拝聴できる機会は徐々に少なくなっていった。この時期、先生は『中国本草図録』全一一冊の日本語版企画を中央公論社から引き受けられ、先生の監修と私の翻訳編集により九三年に完結したのも思い出ぶかい。これで科名・種名や植物学用語・化学成分・病名ばかりか、色彩表現まで日中の相違と翻訳関係を私は習得することができた。すでに翻訳出版されていた日本語版『中薬大辞典』に先生はご不満だったので、私たちの訳に満足していただけたのがとりわけ嬉しかった。

 先生のお宅にも年始のご挨拶や大塚敬節先生ご蔵書の目録作成などで、よく伺わせていただいた。そうした時いつも先生の書斎で食事やお酒をいただいたが、目を引くのは普通には見ることができない貴重なご蔵書の数々。ヨーロッパや中国関係が多いが、それらを手に取り、ひとつひとつ入手の経緯や内容を説明される先生のご様子が今も目に浮かぶ。みな先生あってのことと深謝せずにはいられない。しかし、もう二度とお目にかかることができなくなってしまった。

 私は先生よりちょうど二十歳下だが、初めて拝眉させていただいたとき、柔和だがリーダーとしての風格に私は惹きつけられた。このとき先生は五十三歳だった。三木栄先生のお通夜の帰途、車中で三木先生の思い出をしみじみ語られた先生は六十二歳だった。そうした先生に馬齢だけ近づいた今、先生に仕えた楽しい日々を思い出している。先生からいただいたご数々のご恩に、どう感謝申し上げたらいいのだろう。竹林の七賢、とくに稽康に共感されていた先生ゆえ、こう申し上げればちょっと微笑んでいただけるかもしれない。

 私は虚にして往き、先生の恭しく泰然とした仁愛につつまれた。いま幽居された先生を追慕し、いただいた大きな教えと充実した日々、そして学恩の重さをかみしめている。

 先生のご冥福を衷心より祈り申し上げ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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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츠카 쿄오 선생님을 추모

마나야 마코토 「오츠카 쿄오 선생님을 추모한다」 「한방의 임상」56권 4호 615-620페이지, 2009년 4월

오츠카 쿄오 선생님을 추모

이바라키 대학 교수 마야나기 마코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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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오츠카 쿄오오 선생님이 2009년 3월 8일에 체거되어 이미 2주가 지났다. 9일에 사보를 받았을 때, 좋은 듯한 빈함에 덮여, 아무래도 일에 손이 닿지 않는다. 그래서 서둘러 여기저기 연락한 뒤 귀가해 선생님의 추억을 아내와 말하면서 밤을 보냈다. 십일일 통야에서는 그리운 선생님의 따뜻한 얼굴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슬픔이 솟아오르고 있었지만, 지금도 공함이 마음을 차지하고 있다. 때때로 기억하고 오오츠카 선생님과 중얼거린다. 어제 아침에 드디어 이것이 마음에 구멍이 뚫린 것 같은 기분이라고 깨달았다.


야수도 아키라·오오츠카 쿄오남 양은사와 함께(1986년 7월 23일 야수소장 퇴임 기념 축하회)[그 외는 왼쪽보다 필자·츠치야 이기오·오소도토·히라마 나오키 각씨]

 나는 야수도 아키라 선생님과 오츠카 쿄오오 선생님을 섬기고, 미치아키 선생님과 영별했을 때는 침통의 한편으로, 감사의 마음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왜 쿄오오 선생님은 마음에 구멍이 버렸을 것이다. 잘 정리할 수 없지만, 스승과 바라보는 것 이상으로 선생님을 사랑해, 마음의 보스로 하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키타사토 동의연에 재적한 13년간, 공사 모두 선생님을 귀여워 주었고, 주인을 따르는 강아지처럼 계속 모호해 왔다. 하지만 영별이 이렇게 빨리 온다고는.


 선생님을 처음 만났을 때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1983년 7월에 중국유학에서 귀국한 후, 오소토양씨들의 초청을 받아 동의연에서 의사학을 연구하고 싶다고 결의했다. 도명소장으로부터는 유학중에 몇번이나 편지를 받고 있었으므로, 이것을 상담 말씀드리면, 의사학 연구실장을 겸임되고 있던 오츠카 부소장이 동의하면 좋을 것입니다. 거기서 쿄오오 선생님의 면접을 받은 것이었다.


 긴장해 부소장실에 들어가면 선생님은 은근하게, 무엇을 연구하고 싶은가라고 질문된다. 그래서 당시 쭉 생각했던 혼초의 약성론이라고 대답하면, 굉장히 '오보본초'에서 신농이나 황제 등의 유파마다 다른 약성을 쓰는 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부끄럽게도, 쿄오오 선생님의 의사학·혼초학의 연구를 전혀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단지 운이 좋은 것에, 나는 당시 중국에서 내부 출판이었던 갈리판 인쇄 「오보본초」를 카피해, 「신농본 초경」이라고 읽어 비교 등하고 있었다. 이것이 쇼시즈라는 본초학자의 중배로, 해설에 다키 모토모리·모리타치유키·오카니시 겐토의 업적이 몇번이나 인용되고 있다고 말하고, 차가운 땀 투성이로 면접을 어떻게든 통과했다. 그러면 선생님에게 사사가 시작된다.


 혼초를 좋아했던 선생님은 자주 말해졌다. 「보이지 않는 병 상대의 의사보다, 보이는 약물 상대의 본초는 구체적으로 연구할 수 있다」 「본초는 기술 연대를 알기 쉽기 때문에, 역사 연구에 적합하다」등 등. 또 대프리니우스 '박물지'에 있는 전갈독과 트리카부트독의 상쇄기사보다 '루씨춘추'에 있는 '만마불살'이란 만(전갈의 상형)과 스미레(토리카부트의 고명)의 독이 상쇄하는 의미로 갈라졌다. 이것은 2천년의 훈사를 바로잡는 연구로, 영원히 남는 업적이다. 나도 전갈의 물기에 트리카부트 말을 사용하는 치료가 지금 책 '팔꿈치 후방'에 있는 것을 찾아 선생님에게 보고해 기뻐해 주신 적이 있었다. 대황의 약용이 로마·중국 모두 1세기에 시작되는 것도, 그리스의 만능 해독약 테리어 카가미로 선생님에게 가르쳐 주신 하나. 독일·오스트리아 유학에서 의사학에 흥미를 가져, 귀국 후에는 순천당의 의사학 연구실에서 오가와 코조 교수의 최초의 문인이 된, 오츠카 선생만이 연구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동서약의 비교연구는 에도의 고증의학자가 할 수 없었던 일이라고 선생님은 말했다. 저도 선생님을 모시고 한자 문화권의 의학사를 비교 연구하게 됐다.


 선생님은 많은 환자를 기다릴 수 없기 때문에 항상 점심이 저녁이 되어 버린다. 그리고 저녁 용건이 없을 때는 종종 우리를 부소장실(나중에 소장실)에 초대해 준다. 이것이 무상한 재미였다. 선생님의 책상 뒤의 선반에는 당시 우리에게는 멀리 떨어진 미술이 많이 있다. 그래서 마음대로 오오츠카주고등이라고 부르고 있었지만, 센베이를 안주로 글래스를 기울여 귀중한 이야기를 배청한 많은 즐거운 시간을, 지금 꿈처럼 생각나게 한다.


       따뜻한 얼굴의 오츠카 선생

 학회나 연구회의 숙박처에서도, 일동으로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은 셀 수 없다. 매년 동양 의학회와 의사 학회의 학술 총회, 후지시에서의 동서 비교 의학사 심포지엄, 도명 선생님의 주창에서 발족한 동양 의학 연구 기관 연락 협의회의 회합 등등. 선생님은 기분이 들지 않는 술집을 좋아했고, 집 근처의 가게에는 자주 모두가 동반했습니다. 취하면 반드시 한시를 씹어 때로는 휘말린다. 운좋게 받은 휘호는 일자·장소의 메모와 함께 요코하마의 자택에 보존하고 있지만, 지금 이바라키에 있어 볼 수 없다.


 한시 이외에도 맥아더의 「Old soldiers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노병은 죽지 않고, 단지 사라질 뿐)」이나, 이후시보지의 명역 「꽃에 폭풍의 비유도 있어, 안녕 만이 인생이다」를 자주 입으로 했다. 96년 4월 말 이바라키대학에 부임하는 인사로 자택으로 향했을 때에는 '인생아사히로 예술 치아키'라고 휘말린 사진의 색지를 받았다. 이것은 히포크라테스의 잠언 「Life is short, the Art long(인생은 짧고, 수술은 길다)」을 선생님이 벌써 한역된 것으로(곽沫若訳인가), 이후 계속 연구실에 내걸고 있다. 그러자 잘 휘말린 「인생 무별리 누치 은애중(인생별 뗄 수 없으면, 어쩌면 은애의 무게를 모른다)」도, 아무래도 자작의 구인 것 같다(코소토씨 메모에 소소작이라고). 이런 이별의 말을 언제나 입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생님과의 영별에도 무상감만을 강하게 느끼는 것일까.


 선생님의 화제는 우리 상대의 탓인지 거의 의사학의 흔들림으로 존경하는 학자의 이야기가 많았다. 오카니시 겐토 선생님은 교토의 자택을 방문했을 때의 일, 만년에 문안에 가면 산소 텐트 중에서 저서의 게라 교정을 하고 있었던 것. 미키 사카에 선생님은, 의사 학회가 끝나면 「어이 오츠카군, 한잔 할까」라고 잘 초대된 것. 92년 12월에 미키 선생님의 사례보를 조간으로 알고 외래를 마친 선생님과 둘이서 어떻게든 밤새 늦게 맞이하도록 사카이까지 뒤집어 놓은 것도 기억한다. 일찌기 선생님은 미야시타 사부로 선생님의 연구에 감명을 받고, 안우 서점에 처음 방문하자 본인 스스로 「그런 사람 알기 마헨나」라고, 흐려진 것을 즐거운 듯이 몇번이나 이야기되었다. 나도 친하게 배워 주신 소다 이치 선생님과는 정말 즐겁게 통음되고 있었다. 모두 위쪽의 의사학자로, 지금은 이제 미야시타 선생님만이 되어 버렸다.


 나는 오츠카 선생님의 소개에 의해 미키 선생님, 소다 선생님, 미야시타 선생님, 야마다 케이코 선생님 등 많은 선생님과 지우를 얻어 왔다. 또 1971년에 비엔나에서 개최된 아시아 비교 의학사의 회의에서 선생님은 가장 젊은 발표자였던 운슈르트 씨와 만난 이래 계속 씨의 재능을 높이 평가받고 있었다. 그 인연으로 나도 운슈르트 씨와 친하게 지내고 있다. 모두 선생님 덕분이다. 운슈르트 씨에게는 3월 9일에 선생님의 사례보를 메일 연락해, 추도문을 다음날 받았으므로 오오츠카가에게 전송, 또 본지에도 실어 주기로 했다.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휘호

 선생님의 업적은 매우 많지만, 동양의학계와 의사학계에의 공헌도 크고, 그 혜택을 우리는 계속 받고 있다. 의사 학회의 상임 이사로서 동양 의학사의 연구를 견인되어 온 것. 오가와 고조 선생님의 뒤를 받아, 타니구치 재단에 의한 동서 비교 의학사 국제 심포지엄(1976~98)을 사카이 시즈 선생님과 개최되어, 아시아와 구미의 젊은 연구자의 교류와 육성에 노력된 것. 이 심포지엄에는 나도 두 번 참가해 주셔서 강한 자극을 얻었지만, 선생님들과 보낸 묵은 즐거운 날들은 잊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큰 혜택은 도명선생님과 협력해 키타사토 동의연에 의사학연구실(의사연)을 개설한 것이었다. 야수·오츠카 양 소장 아래, 마음껏 연구시켜 주신 덕분에 지금의 우리가 있다.


 당초는 연구실이라고 해도 고소토씨가 비상근으로 서고의 일각으로 연구하는 상태였지만, 씨가 상근이 되고 나서는 서서히 연구실의 체제가 갖춰져 왔다. 저도 83년 9월부터 92년 3월까지 비상근, 이후 상근으로 96년 4월까지 의사연구에 재적하였습니다. 쿄오오 선생님은 82년에 부소장, 86년부터 96년 6월까지 소장을 근무했기 때문에, 이 거의 전 기간에 봉사할 수 있었던 나는 행복이라고 밖에 없다. 불특의였던 영문 요약을 선생님에게 새빨갛게 고쳐 주신 것까지 있다. 그리고 미치아키 선생님을 뒤로 방패, 쿄오오 선생님을 보스로 하고, 의국으로부터 화환 이코히코·야스이 히로바타·히라마 나오키 외 각 씨, 외부에서도 객원 연구원이 잇달아 참가해 의사연구는 많은 연구와 일을 달성해 왔다.


 80년대는 연구회를 몇번이나 개최해, 모두 30대에서 혈기 번성해, 마지막은 대결이 될 정도로 진지한 논의를 거듭한 적도 있다. 의사 학회 총회에서는 의사 연의 연제가 십제 정도가 되어, 그 파워로 학회의 공기가 일변했다고 생각한다. 마침내 오오츠카 군단이라고 불렸지만, 그것을 선생님은 매우 만족했습니다. 선생님을 보스로 한 가장 큰 이벤트는 1987년 제88회 의사학회 총회일 것이다. 시로가네의 키타사토 대학을 회장에, 선생은 회두로서 「수당의 의서에 보는 정신병과 그 치료」를 강연되었다. 우리는 기뻐서 준비에 분주했지만, 매우 살아난 것은 선생님이 화려한 연출 등을 좋아하지 않고, 만사질소로 하도록(듯이) 신청된 것. 그래서 예산이 많아 총회 후에 이즈까지 1박 위로회에 나간 것을 지금 즐겁게 기억한다.


 다만 동의연 제3대 소장이 된 86년부터는 진료를 마친 뒤에도 회의 등이 많아져 선생님의 蘊蓄을 배청할 수 있는 기회는 점차 줄어들었다. 이 시기 선생님은 '중국 혼초 도록' 전일 1권의 일본어판 기획을 중앙 공론사로부터 맡아 선생님의 감수와 나의 번역 편집에 의해 93년에 완결된 것도 떠올랐다. 이것으로 과명·종명이나 식물학 용어·화학 성분·병명 뿐만 아니라, 색채 표현까지 일중의 차이와 번역 관계를 나는 습득할 수 있었다. 벌써 번역 출판되고 있던 일본어판 「중약대사전」에 선생님은 불만이었으므로, 우리의 번역에 만족해 주신 것이 특히 기뻤다.


 선생님의 댁에도 연시 인사와 오츠카 경절 선생님 장서의 목록 작성 등으로 자주 들었다. 그런 때 언제나 선생님의 서재에서 식사와 술을 받았지만, 눈길을 끄는 것은 보통 볼 수 없는 귀중한 장서의 여러가지. 유럽이나 중국 관계가 많지만, 그들을 손에 들고, 하나 하나 입수의 경위나 내용을 설명되는 선생님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띈다. 모두 선생님이 있었던 것과 심사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다. 하지만, 다시 한번 눈에 띄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나는 선생님보다 다만 20살이지만 처음으로 배려했을 때, 유화하지만 리더로서의 풍격에 나는 매료되었다. 이때 선생님은 53세였다. 미키 사카에 선생님의 통야의 귀도, 차중에서 미키 선생님의 추억을 한껏 말한 선생님은 62세였다. 그런 선생님에게 마령만 가까워진 지금 선생님을 섬긴 즐거운 나날을 떠올리고 있다.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수많은 은혜에, 어떻게 감사 말씀해 주면 좋을 것이다. 다케바야시의 칠현, 특히 야스야스에 공감되어 있던 선생님 때문에 이렇게 말씀드리면 조금 미소를 지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허허하게 왕래해 선생님의 괴롭고 태연한 인애에 휩싸였다. 지금 유거된 선생님을 추모해 주신 큰 가르침과 충실한 나날, 그리고 학은의 무게를 물고 있다.


 선생님의 명복을 충실히 기도합니다.

* 일본의 동양 의학 오쓰카 야스오 2000 Wikipedia

일본의 동양 의학 | 한림신서 일본학총서 53 | 오쓰카 야스오 | 알라딘


일본의 동양 의학 | 한림신서 일본학총서 53
오쓰카 야스오 (지은이),이광준 (옮긴이)소화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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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제1장. 동양의학과 서양의학
제2장. 일본 동양 의학의 역사
제3장. 일본의 동양 의학과 중국의 의학
제4장. 동양의 신체관과 질병관
제5장. 본초의 역사
제6장. 한방의 진단법
제7장. 한방약
제8장. 소화기계 질환의 한방 치료
제9장. 산부인과 질환의 한방 지료
제10장. 노인성 질환의 한방 치료
제11장. 소아과 질환의 한방 치료
제12장. 통증의 한방 치료

- 후기-동양의학과 나
- 역자의 말
- 일본의 동양 의학을 떠받친 사람들
- 이 책에 나오는 주 생약
- 한방약의 처방(1일량 단위 g)
- 약력



저자 및 역자소개
오쓰카 야스오 (大塚 康生 ) (지은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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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생. 의학박사. 현재 기타자토연구소 부속 동양의학종합연구소 소장. 기타자토연구소 부소장.

최근작 : <일본의 동양 의학> … 총 13종 (모두보기)

이광준 (옮긴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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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석사, 일본 고마자와대학(駒澤大學) 심리학 박사. 전공은 카운슬링, 치료심리학, 선심리학.
백상창신경정신과 임상심리실장, 한림성심대학교 교수, 일본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외국인 연구원(교수), 하나조노대학(花園大學) 국제선학연구소 연구원, 류코쿠대학(龍谷大學) 강사, 류코쿠대학 세계불교문화연구센터 객원연구원 역임. 현재 서울불교대학원 대학교 석좌교수.
저서로 『반야심경 제대로 공부하기』, 『붓다의 법담학 연구』, 『한국적 치료심리학』, 『일본, 그 문화와 사회』, 『카운슬링과 심리치료』, 『정신분석 해... 더보기

최근작 : <반야경의 사상 개설>,<반야심경 제대로 공부하기>,<붓다의 법담학 연구> … 총 13종 (모두보기)


good introduction

일본 동양의학의 ‘개론서’다. 일본 내 유명 연구소의 책임자이고 임상을 직접 했던 저자가 기초부터 임상 실제에까지 간략하지만 요모조모 잘 지어낸 잘 가꿔진 보석 같다. 그리고 일본 동양의학의 서적과 인맥의 계보도 설명되어 있다. 그 동안 사람 이름만 가지고 보았던 책들의 일본 동양의학사에서의 자리를 가늠할 수 있었다.

독서 동안 자신의 전통의학을 자랑하려고 하는 의도 섞인 어투를 많이 볼 수 있는데 이것 조차도 그가 자신의 전통 문화를 얼마나 아끼고 있는 지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장면이다. 우리도 많은 사상과 문화를 중국에서부터 받아들였지만 우리민족의 사람이 손수 만든 것이라면 아무리 중국과 똑같다 하더라도 그것은 다른 문화를 수용하는 과정으로 우리 민족의 수용 사상이 담긴 것으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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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ongq 2001-08-14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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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쓰카 야스오의 저작에 관한 기본 정보와 요약 평론입니다.

<저자 정보 및 주요 저서>

<저자의 일본어 표기>
大塚恭男 (おおつか やすお, Otsuka Yasuo)

<다른 주요 저서 (한국어 번역 명칭)>

<동양의학 입문>  
국내도서 - 교보문고

<한방과 약 이야기>

<동서 생약고>

<동양의학의 세계>

<의학사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