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死の講義――死んだらどうなるか、自分で決めなさい
by 橋爪 大三郎 (Author) Format: Kindle Edition
4.2 4.2 out of 5 stars (204)
本書は、死んだらどうなるかの話。といってもスピリチュアルな本ではなく、「死」とは何かについて、知の達人橋爪大三郎氏が、宗教社会学の視点から鮮やかに、説明する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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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き物はそもそも、すべて死ぬのです。しかし、生き物は、死ぬそのときまで、死ぬと思っていません(たぶん)。人間は違います。うんと小さい子は別として、ちょっと知恵がつくと、みんな死ぬらしい、自分も死ぬだろう、と思うようになります。
では、死んだらどうなるとわかっているのでしょうか。(中略)そう、複雑な社会には宗教というものができるのです。いくつも宗教がある。それは、死んだらどうなるか、の考え方がいくつもあるということです。
これまで人類に大きな影響を与えた宗教は、キリスト教、イスラム教、ヒンドゥー教、儒教、仏教、の五つです。それぞれ、人間は死んだらどうなるか、についてしっかりした考え方をもっています。
そこでこの本では、これらの宗教が、人間は死んだらどうなると考えているのか、詳しく追いかけることにします。(本書の「はじめに」よ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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死んだらどうなるのか、死んでみるまでわからない。だから、死んだらどうなるのかは、自分が自由に決めていい。宗教の数だけ、人びとの考え方の数だけ、死んだらどうなるのか、の答えがある。そのどれにも大事な生き方が詰まっており、人生の知恵がこめられている。
コロナ禍で「死」をこれまで以上に身近に感じている多くの人々に読んでほしい一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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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시즈메 다이사부로의 저서 <죽음의 강의: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스스로 결정하라>에 대한 요약과 평론입니다.
<죽음의 강의: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스스로 결정하라> 요약 및 평론
하시즈메 다이사부로의 <죽음의 강의: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스스로 결정하라>는 종교사회학의 분석 도구를 동원해 인류의 가장 오래된 불안이자 불가피한 숙명인 '죽음'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저작이다. 저자는 과학이나 의학이 죽음의 생물학적 메커니즘을 규명할 수는 있어도, '내가 죽은 뒤에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라는 실존적 의미의 공백은 결코 메울 수 없다고 단언한다. 인류가 발전시켜 온 사상과 종교의 본질은 결국 이 알 수 없는 죽음이라는 미지의 심연에 의미와 형태를 부여해 온 집단적 지혜의 축적이라는 것이다.
본서는 인류 문명사를 지배해 온 대표적인 사후관을 체계적으로 조망한다. 기독교와 이슬람교 같은 일신교의 최후 심판과 부활, 힌두교와 불교가 발전시킨 업(業)과 윤회 전생의 순환, 유교의 조상 숭배와 사회적 기억을 통한 영속성, 그리고 현대 과학주의가 상정하는 '완전한 소멸'에 이르기까지 각 사상이 제시하는 죽음의 모델을 명쾌하게 해체한다. 저자는 이러한 사후 모델들이 객관적으로 검증 가능한 물리적 사실이 아니라, 삶의 질서와 윤리를 확립하기 위해 인간이 고안한 정교한 '가설'이자 '언어적 구성물'임을 밝힌다.
책의 핵심 메시지는 부제에 집약되어 있다.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스스로 결정하라." 근대 이전의 인간은 자신이 태어난 공동체의 전통과 도그마가 강제하는 사후관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해야 했다. 그러나 공동체적 규범이 해체되고 개인화가 극단으로 치달은 현대 사회에서, 죽음에 대한 태도 역시 외부의 강요가 아닌 개인의 주체적 결단에 맡겨지게 되었다. 사후 세계가 천국이든 윤회든 무(無)이든 간에, 죽음 이후를 어떻게 상정하느냐에 따라 지금 살아가는 현재의 가치 체계와 윤리적 태도가 역으로 결정된다는 논리다. 즉 사후관의 선택은 곧 '나는 지금 어떻게 살 것인가'를 스스로 규정하는 실존적 기획이다.
이 저작의 두드러진 미덕은 죽음을 둘러싼 신비주의적 환상과 금기, 공포의 베일을 걷어내고, 이를 객관적이면서도 실용적인 사유의 장으로 끌어올린 데 있다. 저자는 어느 한 종교의 독점적 진리성을 옹호하지 않고 철저한 다원주의적 시각을 견지한다. 국가나 혈연, 특정 문화의 굴레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실존의 좌표를 스스로 설정하고자 하는 세계인에게, 본서가 제시하는 사유의 독립성은 매우 현실적이고 명징한 해방감을 선사한다. 죽음을 금기시하거나 막연한 불안으로 방치하는 대신, 생의 설계를 완성하는 마지막 지적 퍼즐로 다루는 태도는 대단히 건강하고 이성적이다.
하지만 사회학적 도식화가 지닌 본질적 한계 또한 명확히 드러난다. 종교적 사후관을 개인이 취향대로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나 지적 도구처럼 다루는 태도는, 실제 역사와 종교적 실천이 지닌 실존적 무게를 과도하게 탈색시킨다. 한 인간이 특정 종교의 죽음관을 체화하는 과정은 책상머리에서의 합리적 결단이라기보다, 깊은 비탄과 실존적 고뇌, 언어로 환원되지 않는 신비적 체험 속에서 형성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또한 유교나 불교를 논할 때 일본 사회의 습합된 장례 문화와 관습을 은연중에 보편적 모델처럼 전제하는 서술 방식은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서는 맹목적인 믿음과 허무주의적 냉소라는 양극단을 벗어나, 죽음이라는 최종 과제를 지성적으로 응시하게 만든다. 타인이 정해준 각본을 거부하고 자기 삶과 죽음의 주권을 오롯이 쥐고자 하는 이들에게 명쾌한 사유의 길잡이가 되어주는 책이다.
세진님, 저자가 제시한 여러 사후관의 모델 중에서 유독 흥미롭거나 더 비판적으로 검토해보고 싶으신 문명권의 시각이 있으신가요?
橋爪大三郎 <死の講義――死んだらどうなるか、自分で決めなさい> — 죽음 이후를 묻는 것은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는 일
하시즈메 다이사부로의 <死の講義――死んだらどうなるか、自分で決めなさい>(2020)는 제목만 보면 ‘죽은 뒤 세계’를 설명하는 종교서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기독교·이슬람교·유대교·힌두교·불교·유교·도교·신도 등이 죽음을 어떻게 이해해왔는지를 비교하면서, 마지막에는 독자 자신에게 “그러면 당신은 죽음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라고 되묻는 종교사회학적 죽음론이다. 책은 6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죽는다는 것>, <일신교의 죽음>, <인도문명의 죽음>, <중국문명의 죽음>, <일본인의 죽음>, 그리고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스스로 생각하기>로 진행된다. ダイヤモンド社
핵심 명제는 매우 단순하면서도 도발적이다.
“죽은 뒤 어떻게 되는지는 누구도 확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자신이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는 스스로 결정해도 된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렇게나 믿어도 된다”는 가벼운 상대주의와는 조금 다르다. 하시즈메가 정말 말하고 싶은 것은 인간이 죽음을 어떻게 상상하느냐가 지금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1. 죽음은 경험할 수 없는 유일하게 확실한 사건이다
책의 첫 장에서 하시즈메는 죽음의 특수성을 논리적으로 검토한다.
나는 다른 사람의 죽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나 자신의 죽음’을 경험하고 다시 보고할 수는 없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죽지 않았고, 죽은 뒤에는 경험을 말할 ‘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음은 이상한 사건이다.
반드시 일어나지만 직접 경험할 수 없다.
하시즈메는 바로 이 지점에서 과학의 한계를 지적한다. 의학은 뇌 기능의 정지, 심장 정지, 세포의 붕괴 등을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죽었을 때 이 ‘나’는 어떻게 되는가?”
라는 질문에는 답할 수 없다.
과학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질문 자체가 경험적 검증의 범위를 벗어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는 ‘나의 죽음’을 일종의 초경험적 문제로 취급한다. note(ノート)
그리고 바로 이 빈 공간에 종교가 들어온다.
종교는 인간이 알 수 없는 죽음 이후에 의미를 부여해온 거대한 문화적 장치라고 볼 수 있다.
2. 일신교 — 죽음은 끝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으로 넘어가는 문이다
하시즈메는 먼저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라는 일신교 문명을 살핀다.
일신교의 가장 중요한 전제는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점이다.
인간은 우연히 생겨난 존재가 아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따라서 인간의 생명은 근본적으로 자기 소유가 아니다.
이 생각은 죽음의 의미를 크게 바꾼다.
죽음은 단순한 소멸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는 사건이 된다.
특히 기독교에서는 죽음 뒤에 부활과 심판이라는 전망이 놓인다.
현재의 삶은 유일한 일회적 삶이며, 인간은 그 삶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진다.
이것은 뒤에서 등장하는 인도적 윤회관과 결정적으로 다르다.
윤회에는 여러 생이 있지만, 기독교에서 인간의 지상 생애는 기본적으로 한 번뿐이다.
그래서 일신교에서 죽음과 윤리는 강하게 결합된다.
어떻게 살았는가가 중요하다.
죽음 이후가 현재의 삶을 평가하는 지평이 되기 때문이다.
3. 인도문명 — 가장 중요한 것은 ‘잘 죽는 것’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인도문명으로 넘어가면 죽음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진다.
힌두교적 세계에서는 삶과 죽음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업에 따라 태어나고 죽고 다시 태어난다.
여기서 인간에게 가장 큰 문제는 죽음 자체가 아니다.
오히려
<계속해서 다시 태어난다는 것>
이 문제다.
그래서 최종 목표는 더 좋은 곳에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윤회 자체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해탈이다.
불교도 이 기본 문제설정을 공유하지만 독특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붓다는 영원한 자아나 영혼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자연히 어려운 문제가 생긴다.
“자아가 없다면 무엇이 윤회하는가?”
앞서 <ゆかいな仏教>에서도 하시즈메와 오사와가 집중적으로 다룬 문제다.
하시즈메에게 불교는 죽음 이후의 ‘나’를 보존하는 종교라기보다, 애초에 고정적인 ‘나’라는 생각 자체를 해체하는 종교다.
따라서 불교의 죽음관은 상당히 역설적이다.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라고 묻지만 불교는 오히려
“그런데 그렇게 죽음을 걱정하는 ‘나’가 정말 고정된 실체인가?”
라고 되묻는다.
이 점에서 기독교와 불교의 차이가 극명하다.
기독교에서는 인격적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다.
불교에서는 그 ‘인격적 나’에 대한 집착 자체가 고통의 근원이 된다.
4. 중국문명 — 죽은 뒤보다 살아 있는 사람들과 조상 사이의 질서
중국문명의 죽음관은 또 다르다.
하시즈메는 유교와 도교를 중심으로 설명한다.
유교는 죽은 뒤 세계를 정교하게 체계화하는 종교가 아니다.
공자의 유명한 태도처럼, 살아 있는 사람의 일을 충분히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죽은 사람의 일을 알 수 있겠느냐는 입장이다.
중요한 것은 인간관계다.
부모와 자식, 조상과 후손, 군주와 신하, 공동체 구성원 사이의 질서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가 중심이 된다.
따라서 죽은 사람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는 후손의 기억, 제사, 족보, 가족관계 속에서 계속 존재한다.
하시즈메의 표현을 빌리자면, 죽은 이는 ‘죽은 자로서 살아간다’고 볼 수 있다. 공식 목차에도 이 문제를 다루는 항목이 명시되어 있다. ダイヤモンド社
도교는 또 다른 방향을 제시한다.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이므로 죽음도 자연의 변화 가운데 하나다.
태어남과 죽음을 지나치게 인간 중심적으로 해석하기보다 자연의 흐름 속에 놓는다.
여기에는 일신교의 심판도, 인도 종교의 윤회 탈출도 없다.
오히려 자연과 하나가 되는 태도가 중요하다.
5. 일본 — 하나의 죽음관이 아니라 겹겹이 쌓인 죽음관
책에서 가장 길고 흥미로운 부분 중 하나가 일본이다.
하시즈메는 일본인의 죽음관을 하나의 종교로 설명할 수 없다고 본다.
조몬 시대의 죽음관에서 시작해 야요이·고분시대, 황천국, 신도, 불교의 전래, 원령신앙, 정토교, 선, 법화종, 유교, 국학, 국가신도와 영령관념, 그리고 현대의 뇌사 문제까지 계속 변형되어 왔다. ダイヤモンド社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이 <신불습합>이다.
일본에서는
신도로 태어나고
기독교식 결혼식을 하고
불교식 장례를 치른다
는 식의 종교적 중층성이 드물지 않다.
서양의 일신교 관점에서는 모순처럼 보인다.
그러나 일본적 종교문화에서는 반드시 모순이 아니다.
여러 종교가 각기 다른 기능을 담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불교가 일본에서 ‘장례의 종교’가 된 과정이 중요하다.
원래 불교의 핵심은 죽은 사람을 위한 장례의식이 아니었다. 붓다의 문제는 인간이 어떻게 고통과 윤회에서 벗어날 것인가였다.
그러나 일본사회에서 불교 사찰은 점차 장례, 묘지, 조상제사와 결합했다.
그 결과 오늘날 일본인에게 불교는 철학적 깨달음보다도 죽음과 훨씬 밀접하게 체험되는 종교가 되었다.
6. 국가와 죽음 — ‘좋은 죽음’을 누가 정의하는가
이 부분에서 책은 단순한 비교종교론을 넘어 정치사회학으로 이동한다.
공동체나 국가는 죽음을 의미화한다.
전쟁에서 죽은 사람을
‘희생자’
라고 부를 수도 있고
‘영령’
이라고 부를 수도 있고
‘순교자’
라고 부를 수도 있다.
어떤 말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죽음의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다.
특히 근대 일본에서는 국가신도와 천황제가 죽음을 정치적으로 조직했다.
천황을 위해 죽는 것을 의미 있는 죽음으로 만들어냈고, 죽은 군인을 ‘영령’으로 기념했다.
죽음관은 개인의 철학만이 아니다.
권력과도 연결되어 있다.
누군가에게
“이 죽음은 가치 있는 죽음이다”
라고 말할 권한을 누가 가지고 있는가는 매우 정치적인 문제다.
이 지점은 <死の講義>에서 상당히 중요한 사회학적 통찰이다.
7. 그러면 무신론자는 어떻게 죽음을 생각할 수 있는가
마지막 장에서 하시즈메는 종교에서 벗어나 현대인의 선택을 검토한다.
가장 단순한 답은 이렇다.
“죽으면 완전히 사라진다.”
의식도 없고 영혼도 없고 사후세계도 없다.
현대의 자연주의적 무신론자에게 익숙한 생각이다.
하시즈메는 이것 역시 하나의 정합적인 입장이라고 인정한다.
그러나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내가 죽은 뒤 정말 아무것도 없다면, 현재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여기서 니힐리즘의 문제가 생긴다.
“어차피 죽으면 끝인데 무엇을 하든 무슨 상관인가?”
라는 결론으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 결론도 가능하다.
“삶이 한 번뿐이기 때문에 지금 이 삶은 더욱 소중하다.”
사후세계가 없다는 사실이 삶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에 더 큰 밀도를 줄 수 있다.
하시즈메는 어느 한쪽을 강요하지 않는다.
8.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스스로 결정하라”의 진짜 의미
이 책의 제목은 오해하기 쉽다.
죽은 뒤 실제 세계를 개인이 결정할 수 있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하시즈메의 뜻은 인식론적이다.
죽은 뒤 무엇이 일어나는지는 누구도 확실하게 증명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결국 어떤 해석을 선택해야 한다.
기독교식 부활을 믿을 수도 있다.
불교식 윤회를 받아들일 수도 있다.
조상과 후손의 연속성 속에서 죽음을 이해할 수도 있다.
자연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완전히 소멸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시즈메가 강조하는 것은 이 선택을 남에게 맡기지 말라는 것이다.
종교가 그렇게 말하니까,
가족이 그렇게 믿으니까,
사회가 그렇게 말하니까,
막연히 따라가기보다는
“나는 죽음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를 살아 있을 때 스스로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저자 자신도 이 책을 “죽음을 두려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대로 살아가기 위해 읽는 책”이라고 설명한다. ダイヤモンド・オンライン
9. 죽음론이 결국 삶의 윤리가 되는 이유
그래서 이 책의 진짜 주제는 죽음이 아니라 삶이다.
하시즈메의 결론을 가장 압축하면 다음과 같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결정한다는 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죽음 이후에 심판이 있다고 믿는다면 현재의 행동이 달라진다.
윤회를 믿는다면 업을 의식하게 된다.
조상과 후손의 연속성을 중시하면 가족과 공동체가 중요해진다.
완전한 소멸을 믿으면 지금의 한 번뿐인 삶이 특별해진다.
그러므로 죽음관은 단순한 형이상학적 의견이 아니다.
삶을 조직하는 윤리적 프로그램이다.
하시즈메가 여러 종교의 죽음관을 소개하는 이유도 “어느 것이 사실인가”를 결정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각각의 죽음관 속에 수천 년간 사람들이 축적해온 삶의 지혜가 들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版元ドットコム
10. 이 책의 가장 큰 장점 — 종교를 ‘죽음이라는 하나의 질문’으로 정렬한다
하시즈메가 매우 잘하는 방식이다.
복잡한 종교사를 하나의 질문으로 압축한다.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이 질문 하나를 가지고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
유교
도교
신도
를 나란히 놓는다.
그러면 각 종교의 기본 구조가 놀랄 만큼 잘 보인다.
기독교에서는 창조주와 피조물,
힌두교에서는 윤회와 해탈,
불교에서는 무아와 열반,
유교에서는 조상과 후손,
도교에서는 자연,
일본 신도에서는 공동체와 신들이 중심에 나타난다.
이 점에서 <死の講義>는 일반적인 ‘세계종교 입문’보다 훨씬 효과적이다.
종교의 교리를 외우는 대신 “죽음 앞에서 이 종교는 무엇이라고 말하는가?”를 묻기 때문이다.
11. 그러나 약점도 분명하다 — 종교를 지나치게 ‘논리체계’로 본다
하시즈메의 장점은 동시에 약점이다.
그는 사회학자이고 구조주의적 사고에 매우 능하다.
그래서 종교를 명료한 논리체계로 정리한다.
하지만 실제 종교생활은 그렇게 깨끗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기독교인도 사후세계를 확신하지 못할 수 있다.
불교도도 무아보다는 ‘천국 비슷한 극락’을 상상할 수 있다.
유교적 조상제사와 기독교 신앙을 동시에 유지하는 사람도 있다.
현대 일본인은 신도·불교·무신론을 상황에 따라 오갈 수 있다.
즉 살아 있는 종교는
교리 + 습관 + 감정 + 가족관계 + 의례 + 기억
의 복합체다.
하시즈메는 그 가운데 <논리>를 지나치게 선명하게 추출하는 경향이 있다.
때문에 이 책은 종교인 자신의 죽음 체험을 설명하는 책이라기보다
<종교들이 죽음이라는 문제를 어떤 논리로 처리하는가>
를 분석한 책이라고 읽는 것이 정확하다.
12. 더 중요한 비판 — 정말 ‘자기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가
책 제목에는 현대적 개인주의가 강하게 들어 있다.
“自分で決めなさい.”
스스로 결정하라.
매력적인 주장이다.
그러나 사회학적으로 생각하면 약간 역설적이다.
인간의 죽음관은 정말 개인이 자유롭게 선택하는가?
대부분 그렇지 않다.
우리는 이미 어떤 언어, 가족, 종교, 문화 속에서 죽음을 배우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에게 ‘제사’가 갖는 의미와 일본인에게 ‘오봉’이 갖는 의미, 서구 기독교인에게 ‘천국’이 갖는 의미는 개인이 처음부터 선택한 것이 아니다.
죽음을 상상하는 언어 자체를 사회에서 받는다.
따라서 더 정확하게 말하면
<죽음관을 무에서 자유롭게 만들어라>
가 아니라
<당신이 물려받은 죽음관들을 자각하고, 그 가운데 무엇을 받아들일지 스스로 검토하라>
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읽으면 책의 주장은 훨씬 설득력이 생긴다.
평론 — 하시즈메의 종교론 세 권을 함께 보면
앞서 본 <ふしぎなキリスト教>, <ゆかいな仏教>과 이 책을 나란히 놓으면 하시즈메의 종교관이 더욱 분명해진다.
그에게 종교는 우선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질문에 대해 만들어온
<집단적 사고의 체계>
에 가깝다.
<ふしぎなキリスト教>에서는
“왜 서양인은 이런 방식으로 세계를 생각하게 되었는가?”
를 묻는다.
<ゆかいな仏教>에서는
“왜 불교는 자아와 세계를 이렇게 해체하는가?”
를 묻는다.
그리고 <死の講義>에서는 그 둘을 더 큰 질문 안에 넣는다.
“인간은 자신이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어떻게 의미화해왔는가?”
세 권 가운데 저는 <死の講義>가 가장 개인적인 책이라고 본다.
앞의 두 권은 종교를 ‘이해하는’ 책이다.
이 책은 마지막에 독자에게 선택을 요구한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그리고 그 선택대로 지금 어떻게 살 것인가.
그래서 이 책의 가장 좋은 문장은 역설적으로 ‘죽음’에 관한 문장이 아니다. 하시즈메의 최종 메시지는 대략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죽음은 삶의 도중에 온다. 그러므로 언제 끝나더라도 괜찮도록 살아야 한다.>
그는 이것을 ‘각오’라는 말과 연결한다. 죽음 직전에 급히 죽음관을 마련하려 하지 말고 살아 있는 동안 죽음을 생각해두라는 것이다. 本が好き!
이 점에서 <死の講義>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설명하는 책이라기보다 <죽음을 미리 사고함으로써 현재의 삶을 다시 조직하라는 책>이다.
그리고 하시즈메의 종교사회학에서 가장 인상적인 점도 여기에 있다. 그는 “어느 종교가 참인가”를 거의 묻지 않는다. 대신 “이 믿음은 인간에게 어떤 삶을 가능하게 하는가?”를 묻는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신학적 죽음론보다는 사회학적·실존적 죽음론이며, 제목의 <死んだらどうなるか、自分で決めなさい>보다 오히려
<어떻게 죽을 것인지 생각하고, 그에 맞추어 어떻게 살 것인지 스스로 결정하라>
라고 읽을 때 이 책의 핵심이 가장 잘 드러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