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25

내가 보고 겪은 북한 교통 실태 : 신동아



내가 보고 겪은 북한 교통 실태 : 신동아

내가 보고 겪은 북한 교통 실태

“마사지 받는다고 생각하시라우”
| 조현준 계명대 언론영상학과 교수 wesleycho7@naver.com
입력2018-05-20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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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선 시내 비포장 도로 위에 주차된 폴크스바겐 택시들. 이용하는 승객이 별로 없어 보였다. [조현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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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측 도로 사정이 좋지 않다.”

이번 남북 정상회담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이 솔직한 발언에 나는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열악한 내부 사정을 외부 세계에 굳이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 게 북한이기 때문이다. 내가 북한의 낙후된 농촌 마을을 촬영하려고 할 때마다 그곳 주민들은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다.

나는 2013년 11월, 함경북도 나선시와 청진시, 경성군을 다녀왔다. 영국, 호주, 러시아에서 온 외국인 관광객 5명과 함께였다. 내가 북한을 가게 된 것은 일종의 궁금증 때문이었다. 2012년 여름, 북한자유연합 등 보수단체가 대북 전단, 일명 ‘삐라’를 북한으로 날리기 위해 임진각에 모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당시 삐라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기획하고 있던 나는 카메라를 들고 임진각으로 향했다. 평화를 상징하는 임진각에서 거센 충돌이 일어났다. 삐라를 날리려는 보수단체와 이를 저지하려는 진보단체 및 지역 주민, 그리고 이들을 말리려는 경찰들까지 뒤엉켜 몸싸움이 벌어졌다.

삐라로 인해 생긴 남남 갈등. 과연 북한 주민들은 남한이 살포하는 삐라를 어떻게 생각할까? 호기심이 생긴 나는 북한이 허용하는 외국인 투어에 대해 알아봤다. 그러나 내 국적이 캐나다라고 하더라도 한국에 살기 때문에 북한 투어를 할 자격이 되지 못했다. 궁여지책으로 ‘캐나다에 거주하는 대학생’으로 서류를 제출해 북한행 여행 비자를 받았다. 공교롭게도 북한 여행 중 정치선전물을 훔치려 했다는 이유로 북한에 억류됐다가 혼수상태로 고국 미국으로 돌아가 사망한 오토 웜비어가 택했던 여행사를 통해 북한에 들어갔다.


‘미스터 김’의 딸 걱정


나선 시로 향하는 길에 만난 버스 창밖 풍경들. 산에는 나무가 드물다. [조현준 제공]
당시 전에 없던 새로운 여행상품이 나왔는데, 함경북도 나선시, 청진시, 그리고 경성군을 돌아보는 코스였다. 중국 옌볜에서 차를 타고 국경 세관을 거쳐 나선시에 도착했다. 우리 일행은 마중 나온 안내원과 함께 미니밴을 타고 나선시 식당으로 향했다.

세관에서 나선 시내로 가는 길은 고불고불했지만, 양방 2차선 도로는 깨끗한 편이었다. 창문 밖 풍경은 보통의 농촌 마을과 다를 바 없었다. 다만 김정은 위원장과 사회주의를 찬양하는 슬로건이 드문드문 보였고, 시내로 들어서자 그것들은 더욱 자주 눈에 띄었다.

호텔 앞에는 광장 같은 공간이 있는데 바닥에 금이 많이 나 있으며 울퉁불퉁했다. 남한이라면 이러한 공간을 주차장으로 썼으리라.

나선 시내 도로에 다니는 자동차 중에는 택시가 가장 많은 듯했다. 택시 대부분은 폴크스바겐. 나선에서 택시비는 1km당 중국돈 4위안(약 670원)이라고 했다. 그러나 택시를 타는 사람들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택시 대부분은 항상 어딘가에 주차돼 있었다. 2013년 당시 서울 택시요금인 2km당 3000원에 비하면 나선 택시가 반값 수준으로 저렴하지만 북한의 국민소득을 고려한다면 일반 주민에게는 매우 비싼 교통수단이다.

나선은 경제특구 지역이다.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 중국에서 들여오는 제품을 즐겨 사용하는, 북한에서 매우 잘사는 도시다. 다만 밤이 되면 도로에 가로등이 켜지지 않아 껌껌한 도로를 달릴 수밖에 없었다. 도로변에 있는 식당 몇 곳에만 불이 켜졌고, 대부분의 상점은 문을 닫았다. 나선시 식당에서 저녁을 먹는 도중에 갑자기 불이 나간 적도 있다. 그럴 때면 식당 종업원이 배터리로 작동하는 스탠드 조명을 가져와 불을 밝혀줬다. 몇 분 후에 다시 전기가 들어오기도 했다.

위성사진에 나온, 남한 대비 어두컴컴한 북한은 외국 언론이나 보수단체가 북한의 열악한 전기 사정을 보여주기 위해 주로 사용하는 이미지다. 북한의 전기 사정이 열약한 건 사실이다. 다만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옥외광고가 없다. 옥외광고 없는 사회에선 그만큼 전기가 덜 필요하다. 따라서 위성사진으로만 북한의 전기 상태를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선의 한 호텔 로비에서 호텔 종업원들과 대화를 시도했다(물론 북한에서의 모든 인터뷰는 몰래카메라로 촬영했다). 내가 남한 발음의 ‘조선말’로 말을 걸자 신기해하는 눈치다. 북한 사람들도 남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식 걱정을 많이 했다. 자신의 자식이 평양에서 대학에 다녔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았다.

호텔의 내 방 침대에는 전기장판이 깔려 있었다. 덕분에 매우 따뜻하게 잘 수 있었다. 그러나 온수가 나오지 않았다. 로비 직원에게 그 점을 얘기하자 그는 “그럴 리 없다”며 대화를 회피하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무래도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조금 부끄러웠던 것 같다.
우리 일행은 나선에서 밴을 타고 여기저기 다녔고, 도로에 차가 없으니 막히지 않아 좋긴 했다. 안내원 말고도 전직이 교사였다는 한 북한 남성이 동행했는데, 그와 친해지면서 여러 가지를 물어볼 수 있었다. 그는 “핵은 자위(自衛) 수단이다, 핵이 없으면 미국이 이라크를 침략했듯 북한을 공격할 것”이라고 했다. 남한 보수주의자들은 “남한이 퍼준 돈으로 북한이 굶어 죽는 주민들을 살리지 않고 핵을 만들거나 군인들에게만 혜택을 준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는 “남한이 돈을 주든 말든 핵은 항상 만들고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남한 원조가 군인들에게 갔다면, 그것은 북한 주민의 자식들에게 간 것이나 마찬가지”라고도 했다. 북한 인구의 상당 비율이 군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내 배가 고프더라도 우리 자식이 배불리 먹었다면, 거기에 대해 뭐라 하는 부모가 세상에 어디에 있느냐”고도 했다. 그는 남한이 살포하는 삐라에 대해서는 “비겁한 행동”이라며 치를 떨었다. “삐라 속에 약품을 넣기도 한다”고 하자 “약품은 적십자를 통해 공식적으로 보낼 것이지, 왜 비겁한 방식으로 보내느냐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와의 인터뷰는 북한을 여행하는 일주일 내내 이어졌다. 이제부터는 그를 ‘미스터 김’이라고 부르겠다.


트럭과 리어카와 소달구지


경성에서 목격한 아이나 짐을 싣고 가는 리어카들. [조현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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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선에서 어느 중학교에 방문했다. 거기 학생들이 닭싸움하는 모습은 한국과 비슷했다. 학생들과 영어로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는데, 아이들의 영어 실력은 우수한 편이었다(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로 보였다). 아이들은 곧 평양으로 견학을 간다며 들떠 있었다. 담임교사는 내가 무슨 말을 하나 궁금했는지 자꾸 내 주위를 맴돌았다. 그의 ‘감시’를 피해 아이들에게 남한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는지 물어봤더니 교육을 받은 듯 대답을 회피했다. 이후에도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면 못 알아듣는 척하는 북한 주민들을 종종 만났다.

이때까지만 해도 버스를 운전하는 기사와 별로 대화를 나누지 못했지만, 이후 그는 점점 마음을 열었다. 그는 한국 대학의 등록금이 얼마나 되는지, 삼성이 휴대전화 외에 무엇을 더 만드는지 궁금해했다.

며칠 후 나선에서 청진으로 이동했다. 나선을 빠져나오기 전 우리 일행은 철조망으로 둘러쳐진 공간에 차를 세워야 했다. 총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여권을 가져갔다. 다시 여권을 받아 이동할 때까지 30분가량 걸렸는데, 당시 우리 밴 근처에 있던 한 여자 군인은 나를 향해 미소 짓기도 했다.

나선을 벗어나자 다른 함경북도 관할시 소속의 다른 안내원이 우리를 맞이했다. 운전기사는 출발 전에 우리에게 “마사지 받는다고 생각하고 3시간을 잘 버텨달라”고 당부했다. 길이 울퉁불퉁하다는 말을 우회해서 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도로 사정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과속방지턱이 쉼 없이 연결된 도로를 3시간 동안 달리는 것 같았다. 몸이 오르락내리락 덜덜 떨려 잠을 청할 수도 없었다. 한번은 머리가 천장에 닿을 정도로 버스가 심하게 요동치기도 했다. 우리 일행은 안전벨트도 없이 좌석 손잡이를 꽉 붙들고 세 시간을 버텼다.

창밖 농촌 풍경은 남한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산에 나무가 없다는 걸 빼고는. 역시나 김정은과 사회주의 체제를 찬양하는 슬로건이 자주 나타났다.

북한에 도착한 첫날 안내원이 버스에서 바깥 풍경을 촬영하지 말라고 당부했지만, 나는 DSLR 카메라로 버스 바깥을 몰래몰래 촬영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앞에 앉아있던 안내원이 뒤로 돌아 내게 오더니 버럭 화를 냈다. 밖에 있던 어느 주민이 내 카메라를 보고 불편하다고 신고했다는 것이다. 믿기 힘든 얘기지만 나는 카메라를 끌 수밖에 없었다. 대신 몰래카메라를 켰지만.

청진으로 향하는 도로에는 차선이 없었다. 소달구지와 리어카, 트럭이 한데 뒤섞여 다녔다. 트럭들은 시도 때도 없이 경적을 울려댔다. 도로가 워낙 좁고 울퉁불퉁, 고불고불해 반대 방향에서 오는 차량에 경고하기 위해서다. 도로 위에서 리어카와 소달구지를 끌고 다니는 북한 주민들은 무척이나 힘들어 보였다. 그들의 최종 목적지는 어디일까, 거기까지는 얼마나 걸리까.

우리 버스가 마침내 청진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려 땅을 밟으니 비로소 살 것 같았다.


평양에서 온 마사지사들


서울 지하철처럼 청진 시내 트램에는 승객들로 가득하다. [조형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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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 시내는 나선만큼 깨끗했다. 나선처럼 자전거가 많이 다녔고, 신호등 없는 도로에서 길안내원이 깃발을 든 채 신호등 역할을 하고 있었다. 차량이 많진 않아서 길안내원의 업무가 크게 어려워 보이지는 않았다. 청진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거의 처음으로 발을 디딘 도시라고 했다. 촬영은 그만큼 쉽지 않았다.

청진에서 새롭게 합류한 안내원은 내가 DSLR 카메라로 김일성 동상을 어떻게 촬영했는지 보여달라고 했다. 김일성 목이 조금 잘려 촬영된 장면이 나오자 그는 매우 기분 상해하며 재촬영을 요청했다.

청진 시내에도 소달구지가 다녔다. 길 한복판에 롤러블레이드를 타는 아이들과 함께 소달구지가 지나가는 재미있는 장면이 포착됐다. 차량은 많지 않았는데, 차가 보인다 싶으면 외제차일 정도로 외제차가 은근히 많았다. 아우디 A6와 벤츠 S클래스 등 중대형 외제차도 목격했다. 나선과 청진 모두 시내에 트램이 많았는데 서울 지하철의 출퇴근 시간과 비슷하게 붐볐다.

청진의 안내원은 남한에 대해 많이 궁금해했다. 남한 사람들이 북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길에는 차가 얼마나 많은지, 어떤 차들을 주로 타는지 등을 물어봤다. 그는 일본부터 유럽까지 자동차 브랜드를 죽 읊었다. 그런데 현대차는 알고 있었지만, 기아차는 처음 들어보는 듯했다. 그는 “북한에선 자가용이 없어도 불편하지 않다”고 했다. “자전거를 타면 건강에도 좋지 않으냐”며 웃음을 지어 보였다. 북한에 있는 동안 자전거 경주대회를 TV로 흥미롭게 보는 주민들의 모습을 자주 목격했다.

청진에선 김정은과 사회주의 체제 찬양 포스터와 유명 화가들의 그림 판매소를 간 적이 있다. 멋진 그림도 있었지만 중국 세관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구매하진 않았다. 상점 여직원은 “북에서 산 그림을 중국에 가져가 비싸게 파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귀띔했다. 그러면서 불만 섞인 목소리로 “북한 길거리에 김정은 위원장을 찬양하는 문구가 너무 많다. 이런 슬로건이 자신에게 득될 게 없다. 더 이상 새로 설치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비록 간접적으로나마 불만을 터뜨린 것이지만, 북한에 머물면서 처음 접한 북한 당국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었다. 김정은 위원장에 대해 불만이 없는지, 미스터 김에게도 물어본 적이 있다. 그는 “질문 자체를 이해할 수 없다”며 “북한 주민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금기”라고 했다.

청진에서 갑작스러운 군사 훈련으로 도로에 무장한 군인들이 배치됐고, 우리가 탄 버스는 어느 식당 주차장에 정차했다. 주차장 문은 굳게 닫혀 밖을 볼 수 없었다. 청진에서 경성으로 이동할 때는 열차를 이용했다. 이 열차는 청진에서 함경남도 함흥 구간을 오가는 열차였다. 열차 내부엔 침대도 배치돼 있었으나 승객은 눈에 띌 정도로 많지 않았다.

열차는 시끄러웠고, 덜컹댔고, 속도가 일정하지 않았다. 평균시속은 60km 정도로 느껴졌다. 기차 밖으로 달리는 차량보다도 느린 경우도 있었다. 창밖으로 다른 열차들을 목격하기도 했는데, 열차마다 사이즈도, 상태도 달랐다. 사이즈가 큰 것은 그만큼 속도가 빨라 보였다. 열차는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버스보다는 더 편했다.

버스를 출발시키기 전 ‘마사지’ 받을 준비를 하라던 버스기사의 말처럼 우리 일행은 정말로 마사지를 받으러 가게 됐다. 경성에서 예정에 없던 마사지숍에 가게 됐는데, 마사지사는 대부분 20대 초중반의 평양 출신 여성이었다. “한국에서 손님이 왔다”며 노래를 부르고 반기는 모습에 감동했다. 그들은 의사 못지않은 사회적 지위를 누린다고 했다. 나를 담당한 마사지사는 한국의 의료 기술이 얼마나 발달했는지 궁금해하며 “통일이 되면 제주도에 꼭 가보고 싶다”고 했다.

경성에서 나선으로 다시 이동하면서 한 번 더 ‘마사지’ 받을 각오를 하고 버스에 올랐다. 역시나 길 상태는 엉망이었고, 반대편에서 오는 차량 혹은 리어카와 우리 버스가 부딪칠까봐 조마조마했다. 나선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에는 호텔을 몰래 빠져나와 옆에 있던 노래방에 갔다. 여종업원들은 북한 찬양 노래를 불렀다. 내가 서양 노래 좀 틀어달라고 하자 잠깐 고민하더니 틀어주었다. 다소곳하게 북한 찬양가를 부르던 그녀들이 서양 음악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 정말 놀랐다. 한편 화장실에 가던 길에 옆방에서 대마초를 피는 북한 주민을 목격했다.


교류가 교감이 되어
북한의 도로 상태는 북한의 열악한 환경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내가 만난 북한 사람들 대부분은 밝아 보였다. 길거리에서 마주친 그들은 내게 미소를 지어 보였고, 일을 구하고자 장마당 주위를 맴도는 이들도 웃음을 잃지 않으며 친근감을 보여줬다. 간혹 남한 사람들은 이러한 북한 사람들의 웃음을 가짜로 여긴다. 사전에 짜인 각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내가 본 ‘북한의 미소’는 할리우드 최고의 배우도 연기할 수 없는, 자연 그대로의 미소였다.

행복이란 돈 외에도 여러 가지를 따져봐야 하는 것이다. 열악한 환경에 있다고 곧 불행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동포를 대할 때 이러한 편견을 버려야 한다. 교류는 교감이 되고, 교감은 평화를 낳을 것이다. “도로 사정이 좋지 않으니 비행기 타고 평양에 오시라. 기다리고 있겠다”는 김정은 위원장의 말에 희망을 가져본다.



조현준
● 1981년 서울 출생
●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 학사, 아카데미예술대학교 멀티미디어커뮤니케이션
학과 석사, 동국대학교 영화영상제작학과 박사
● 미국 ABC방송국 교양프로그램 프로듀서
● 現 계명대학교 언론영상학과 교수
● 영화 ‘시계’ ‘삐라’ ‘황색바람’ 등 연출



신동아 2018년 6월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