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25

마하트마 간디 - 물소리 오강남의 간디 이야기 : 네이버 카페



마하트마 간디 - 물소리 오강남의 간디 이야기 : 네이버 카페




마하트마 간디 - 물소리 오강남의 간디 이야기 | 자유게시판


2018.12.21.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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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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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트마 간디

-불살생-비폭력으로 사랑 일깨운 현대 인도의 아버지




“눈에는 눈이라면 온 세상이 다 눈이 멀게 되고 말 것이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인류의 지도자 중 하나인 간디(1869~1948)를 보통 ‘마하트마 간디’라고 하지만 본명은 모한다스 K.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였다. ‘마하트마’는 ‘위대한maha’ ‘영혼atman’이라는 뜻을 가진 존칭으로서, 일반적으로 타고르가 처음으로 간디에게 사용한 칭호라고 한다. 간디 스스로는 자기가 이 칭호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이를 거북하게 여겼다.




간디의 초기 생애는 그의 『자서전: 진리에 대한 나의 실험』에 잘 나와 있다. 간디는 1869년 10월2일 현재 구자라트 주의 해안 도시 포르반다르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는 그 지방 정치 지도자였다. 부인들이 난산으로 잇달아 죽어가, 네 번째로 얻은 부인의 넷째이자 막내 아이가 간디였다. 어린 간디는 정식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원칙에 엄격했던 아버지와 쉬바 신을 섬기는 경건한 어머니와(어머니가 자이나교 교인이었다는 주장도 있음) 그 지방 주 종교로 불살생不殺生을 최고로 여기던 자이나교의 영향을 받으면서 자라났다. 그가 나중에 주장하고 실천한 아힘사, 채식, 단식, 관용의 정신 등은 이런 영향 아래서 형성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간디가 어릴 때 어느 친구가 인도인이 영국의 지배를 받는 것은 인도인들이 고기를 먹지 않아 허약해졌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같이 고기를 먹기로 하자고 했다. 둘이서 강가로 가서 염소를 잡아먹었다. 집에 돌아가자 어머니가 저녁을 먹으라고 하는데 배가 고프지 않다고 하고 방으로 들어가 잤다.밤새도록 염소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자기 어머니에게 거짓말한 것에 죄책감을 느끼면서, 앞으로 결코 고기를 먹지 않기로 작정하였다고 한다.




어릴 때 읽은 인도의 고전 『마하라즈 하리쉬찬드라』에 나오는 영웅담도 그의 어린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의 자서전에서 “그 이야기가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 나는 셀 수 없이 여러 번 내 스스로 하리쉬찬드라의 역을 해보았다”고 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들을 통해 진리와 사랑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마음이 굳어졌으리라 볼 수 있다.




간디는 그 당시 풍속대로 열세 살에 열네 살 된 신부를 맞았다. 그는 부인을 사랑했다. 그가 열네 살 때 아버지가 병으로 몸져 누웠는데, 밤마다 아버지의 다리를 주물러 드렸다. 하루는 주물러 드리는 일을 마치고 부인하고 자고 싶어 쏜살같이 부인 방에 찾아 갔는데, 조금 있다가 하인으로부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전갈을 받았다. 간디는 그의 자서전에서 “정욕이 나를 눈멀게 하지 않았다면, 아버지의 임종을 보지 못하는 괴로움에서 나를 건져주었을 것”이라고 했다. 간디가 열다섯 살 때 첫 아기가 태어났지만 며칠 못 가서 죽었다. 그 후 네 명의 아들을 얻었다.




간디의 학교 성적은 보통이었다. 지방 대학에 들어갔다가 유학을 위해 중도에 그만 두었다. 1888년9월 4일 열아홉 생일 한 달 전, 영국으로 법학을 공부하러 떠났다. 본래 간디의 집안 어른들은 간디가 서양식 풍속에 오염되는 것을 염려하여 그의 런던 행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이 자이나교 승려 앞에서 고기와 술과 여자, 세 가지를 금하겠다는 서약을 하는 조건으로 아들의 유학을 허락했다.




런던에서는 영국 신사가 되기 위해 양복도 입고, 실크 모자도 쓰고, 가죽 장갑도 끼고, 지팡이도 가지고 다니고, 댄스 교습도 받고, 바이올린, 웅변술 레슨도 받았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원숭이처럼’ 영국신사 흉내 내기를 그만두고 인도인으로 살아가야 하겠다는 자각에 이르게 되고,그 이후 더욱 더 인도적으로 되었다.




런던에 살 때 채식 식당을 찾아 먼 길을 오갔는데, 그 때 다리운동으로 다리가 튼튼해졌다고 한다.런던에서 사귄 채식가들 중에는 힌두교와 불교 연구에 전념하던 신지학회Theosophy Society 사람들이 있었다. 간디는 그때까지만 해도 종교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신지학회 사람들의 권유로 그들과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기타』를 함께 읽으며 종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힌두교와 그리스도교 경전들을 읽기 시작했다.




1891년 6월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 2년 8개월의 영국 생활을 접고 인도로 돌아갔다. 가서 보니 자기가 런던에 있을 때 어머니가 이미 별세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학업에 지장을 줄까 통지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고향과 뭄바이에서 변호사로 개업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몇 가지 다른 것도 시도해 보다가 1893년 남아프리카에 있던 인도 상사에 일자리가 있다고 하여 1년 계약직으로 남아프리카에 가기로 했다.




남아프리카로 가는 기차에서 일등실 표를 사가지고 있었지만, 삼등실로 옮겨 가라는 요구를 받고 거절했다가 어느 역에서 밖으로 내동댕이쳐진 사건은 영화 『간디』를 통해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목적지로 가는 도중, 그리고 거기에서 살면서 받은 인종차별의 경험을 통해 불의에 항거하는 사회 운동의 중요성에 눈뜨기 시작했다.




간디는 인도인들의 투표권 박탈을 입법화하려는데 반대하는 운동에 참가하기 위해 남아프리카에서의 계약기간을 연장시켰다. 그리고 비록 법안을 저지하지는 못했지만 인도인들의 단결된 힘을 보여주는 데는 성공했다. 그는 1894년 나탈 인도인 의회를 창설하고 인도인들의 정치적 힘을 집결하였다. 그 후 남아공의 여러 가지 인종차별 정책에 저항하는 운동을 이끄는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남아공에서의 인권운동으로 유명해진 간디는 1915년 인도로 돌아와 인도와 인도의 독립을 위한 지도자가 된다. 영국 식민지배 하에서 고통 받고 있는 인도인들과 황폐된 농촌을 위해 자원봉사자들을 규합하여 마을을 깨끗이 하고, 학교와 병원을 세우는 일에 스스로 앞장설 뿐 아니라, 마을 지도자들을 일깨워 이런 병폐와 질곡에서 벗어나는 데 힘쓰라고 촉구하기도 했다. 이런 운동을 전개하는 중, 그가 사회 소란죄로 추방당하게 되었는데, 이 때 수많은 군중들이 감옥 앞에 모여 그의 석방을 요구하고, 그 결과 그는 감옥에서 풀려났다.




많은 사람들의 지원을 엎게 된 간디는 농민들을 착취하는 지주들과 영국 식민지 정부를 향한 저항운동을 지도했다. 1930년의 그 유명한 ‘소금 행진’ 등 긴 비폭력 저항 운동을 통해 1947년 8월 15일 드디어 인도의 독립을 가져오게 했다.




독립은 했지만, 인도는 결국 이슬람 교인이 압도적인 파키스탄과 힌두교인이 주를 이루는 인도로 갈라지게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힌두교와 이슬람의 평화적 공존을 주장하던 간디는 그의 지도력에 불만을 품은 힌두교 과격파 인물에 의해 암살당했다. 1948년 1월 30일 오후 5시 5분이었다. 죽으면서 최후로 한 말은 “헤 람(오, 신이여)”. 네루는 라디오 방송으로 그의 죽음을 알리면서 “빛이 우리의 삶에서 사라지고 어디에나 어둠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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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의 행동을 움직인 사상과 원칙을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하라면 아힘사ahiṃsā와 싸탸그라하satyagraha였다. 

아힘사는 보통 ‘비폭력’이라고 번역되지만 일체의 생명에 해를 주지 않는 것,생명을 ‘살림,’ 생명을 경외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눈에는 눈이라면 온 세상이 다 눈이 멀게 되고 말 것”이라고 하며, 진리와 사랑이 결국에는 승리한다는 것을 명심하라고 했다.

샤탸그라하는 진리파지眞理把持라고 번역하는데, 우리의 행동이 감정이나 이해관계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참된 현실을 진정으로 꿰뚫어 본’ 결과에서 나와야 한다는 주장이다. 예를 들어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화함으로 인도 사람들만 비인간화되는 것이 아니라, 남을 비인간화하는 영국 사람들도 똑같이 비인간화되는 것이니 인도의 독립은 감정이나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인도 사람들이나 영국 사람들 다 같이 인간화의 길을 가는데 불가결한 일이므로 이를 성취해야 한다는 식이다.

간디는 이 외에도 브라흐마차랴의 실천자였다. 36세에 부인의 동의를 얻어 금욕적인 삶을 산 것이다. 다석 류영모 선생님의 표현을 빌면 해혼解婚한 셈이다. 그의 성생활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이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는 또 ‘아파리그라하’ 곧 무소유의 단순한 삶을 원칙으로 하였다.채식 뿐 아니라 나중에는 과일만 먹는 과식주의자果食主義者, fruitarian였다. 머리도 스스로 깎고, 빨래도 손수 했다. 그의 아슈람이 설립되었을 때 불가촉천민만이 할 수 있는 뒷간 청도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일주일 중 하루는 묵언黙言으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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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는 모든 종교 전통이 한 분 신의 각기 다른 표현이라 믿고 모든 종교에 대해 관대하였다. 모든 종교의 핵심은 자비, 불살생, 황금률 같은 진리와 사랑으로 요약된다고 보았다. 그는 스스로 힌두교인이면서도 동시에 “그리스도인, 이슬람교인, 불교인, 유대교인이기도 하다”고 했다. 그는 특히 예수의 산상수훈을 좋아하고, 그 중에 악을 대적하지 말라든가 오른 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라고 하는 대목에 크게 감명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나는 당신들의 그리스도Christ는 좋아하지만 당신들 그리스도인들Christians은 좋아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간디의 사상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는데, 가장 큰 예가 1960년대 미국 인권운동을 지도한 마틴 루터 킹 목사, 미얀마 민주화를 위한 여성 지도자로 1991년 노벨 평화상을 받은 아웅 산 수치 여사(최근 그의 정치적 입장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남아공에서 흑백 차별 반대 운동을 지도하다가 1984년 노벨 평화상을 받은 데스몬드 투투 주교, 남아프리카 전 대통령으로 1993년 노벨 평화상을 받은 넬슨 만델라 같은 사람이다.

그 외에도 히틀러 정권에 저항하다가 사형 당한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 영국의 가수 존 레논, 환경운동으로 2007년 노벨 평화상을 받은 미국 전 부통령 알 고어, 한국의 류영모, 함석헌 선생님 같은 이들이 간디로부터 영감을 받았다고 공언했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상원의원 시절 “나의 전 생애를 통해 나는 언제나 마하트마 간디를 하나의 영감으로 우러러 보았다.”고 하고, 대통령이 된 후에도 어느 고등학교에서 행한 강연에서 그가 누구와 밥을 같이 먹고 싶으냐는 질문을 받고, 서슴없이 “간디!”라고 대답하면서 “그는 내게 가장 큰 영감을 준 분”이라 했다.

간디는 1930년 타임지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었고, 1999년에는 ‘세기의 인물’ 중 아인슈타인 다음으로 지목되었다. 간디의 생일 10월 2일은 인도의 국경일임은 물론, 2007년 유엔 총회에서는 ‘국제 비폭력일International Day of Non-Violence’로 선포하기도 했다. 이런 인물이 출현하였다고 하는 것은 인류를 위해 실로 다행스러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삶과 가르침 앞에 다시 한 번 경건한 마음으로 옷깃을 여미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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