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28
2018년 북한 군사 도발 '없음'…평화는 이렇게 만드는 것
2018년 북한 군사 도발 '없음'…평화는 이렇게 만드는 것
2018년 북한 군사 도발 '없음'…평화는 이렇게 만드는 것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2018.12.27 09:54:49
[정욱식 칼럼] 남북 군사합의서가 '신의 한 수'
비핵화 문제에 압도된 나머지 올해 가장 큰 성과를 이뤄냈음에도 불구하고 저평가된 것이 있다. 바로 남북한의 군사 분야 합의와 이행이다.
4.27 판문점 선언에서 씨를 뿌리고 9.19 평양공동선언을 통해 수확에 성공한 이 성과의 의의는 결코 작지 않다. 국내 극우 보수 진영에선 이를 두고 "무장 해제"니 "신체 포기 각서"니 하면서 험담을 쏟아내고 있지만, 이는 근거 없는 정치 공세에 불과하다.
오히려 군사 분야 합의와 이행은 '신의 한 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북한이 '부전(不戰)'의 다짐을 한 것은 과거에도 여러 차례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부전의 맹세가 선언적인 수준에 머물지 않고 창의적이고도 과감한 군비 통제 정책을 통해 실천적으로 뒷받침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불일치의 문제'도 극복하고 있다. 4월 27일 판문점에서 만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과거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며 남북관계와 한반도 평화를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다졌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었다. 미국 주도의 대북 제재가 워낙 촘촘하게 짜여 있어 남북한이 자주적이고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영역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북관계의 패러다임 전환
이러한 불일치, 즉 남북관계를 획기적으로 발전시키겠다는 의지와 촘촘하게 짜인 대북 제재의 현실 사이의 커다란 간극에서 남북한이 주목한 것이 바로 군사 분야였다. 남북한이 '선군(先軍) 협력'을 통해 남북관계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는 것이다.
▲ 지난 9월 19일 오전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송영무 국방부 장관과 북한 노광철 인민무력상이 판문점 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 분야 합의문에 서명한 뒤 교환하고 있다.ⓒ평양사진공동취재단
패러다임 전환의 의미는 문재인 정부도 계승·발전시키고 있는 햇볕정책의 과거 기조와 비교해보면 명확히 드러난다. 햇볕정책의 핵심 기조는 선경후정(先經後政, 경제협력을 먼저 추진해 정치군사 문제의 해결도 도모함)과 선이후난(先易後難, 쉬운 것은 먼저 진행하고 어려운 것을 나중에 함)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가장 까다로운 문제로 여겨졌던, 그래서 이전까지는 후순위로 여겨졌던 군사 문제 해결을 먼저 시도했다. 선정후경(先政後經)으로 전환된 셈이다.
이러한 패러다임의 전환은 두 가지 도그마의 극복으로 이어지고 있다. 하나는 '군비통제 도그마'이다. 이전까지는 정치적 신뢰구축→군사적 신뢰구축→운용적 군비통제→구조적 군비통제의 순서를 거치는 것이 마치 군사 문제 해결의 교과서처럼 간주되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치적 신뢰구축과 군사적 신뢰구축, 그리고 운용적 군비통제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심지어 감시초소(GP)의 검증가능한 폐쇄에서 확인된 것처럼 일부 구조적 군비통제도 이뤄지고 있다.
또 하나는 '선 비핵화 도그마'이다. 남북한의 군비통제는 비핵화 이후에나 가능하다는 것이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입장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북한이 '완전한 비핵화'를 선언적으로 다짐한 상태에서, 그러나 비핵화 초기 단계에 군사 문제 해결을 도모하고 있다. 이는 적어도 남북한 사이에서 부전(不戰)의 맹세와 불가침 약속을 군사적으로 뒷받침함으로써 비핵화와 평화체제 실현에 우호적인 환경을 만들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안보 딜레마의 극복
이뿐만이 아니다. 남북한의 군사 분야 합의와 이행은 핵시대의 가장 심각한 안보 딜레마라고 할 수 있는 '안정과 불안정의 역설'을 해결하겠다는 취지도 품고 있다. 국제정치 용어인 '안정과 불안정의 역설(Stability-Instability Paradox)'은 "핵무기가 핵전쟁을 비롯한 전면전의 가능성은 줄이는 대신에 국지전과 같은 저강도 분쟁의 가능성은 높인다"는 것을 뜻한다. 쉽게 말해 북한이 핵의 위력을 믿고 재래식 국지 도발을 일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남북한 군사 합의와 이행의 역사적이고도 미래 지향적인 의미는 바로 이 지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동안 남북한, 혹은 북미 사이의 무력 충돌의 원인이 되었던 군사적 갈등 요인을 상당 부분 제거·완화하고 있는 것이다.
지상과 해상은 물론이고 공중에도 평화지대 및 군사적 완충 지대를 설치하고, 상대방을 자극하는 심리전과 군사 훈련도 제한하며, 공격적인 군사 태세 및 교전수칙을 방어적으로 전환함으로써, 우발적 충돌 가능성 자체를 크게 낮춘 것이다.
이는 비핵화와 평화체제 실현에도 유리한 환경을 구축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들 목표 실현이 지연되더라도 한반도 정세를 안정화시킬 것이라는 점에서 그 자체로도 큰 의의가 있는 것이다. 즉, 군사 분야의 합의와 이행이 비핵화와 평화체제를 촉진하는 것이 '최선'에 해당된다면, 비핵화 및 평화체제 구축이 어려움에 봉착하더라도 군사 분야 합의를 계속 준수하는 것은 '최악'을 방지하는 데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
기실 우리 사회에선 군사 분야의 합의와 이행을 평화체제와 비핵화로 가는 '가교'나 '수단'으로 간주해온 경향이 강했다. 하지만 남북한의 '선군 협력'이 70년 동안 누적되어온 안보 딜레마를 극복한다는 독자적인 의의에도 주목해야 한다. 이는 어떠한 시련이 다가오더라도 군사 분야의 합의와 이행은 앞으로도 계속 준수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군사적으로 대치한 상황에선 '상대방을 불안하게 만들어야 내가 안전해질 수 있다'고 믿기 십상이다. 하지만 총성 한방 울리지 않고 냉전을 종식시킨 주역인 미하엘 고르바초프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전세계를 향해 이렇게 호소했다. "상대방이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어야 나도 안전해질 수 있습니다."
안보 딜레마는 이러한 정신을 공유할 때 극복될 수 있다. 남북한은 세 차례의 정상회담을 통해 이러한 정신을 실천에 옮기고 있다. 그 결과 올해는 북한의 군사적 도발이 '제로'가 될 가능성도 높아졌다. "전략적 도발"로 일컬어졌던 핵실험과 탄도미사일 시험 발사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일체의 재래식 도발도 없었다.
평화는 이렇게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도 최선의 안보이다.
* 필자의 신간 <비핵화의 최후> 보러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