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19

증언과 자료를 통하여 본 조선전쟁의 도발자



룡남산

증언과 자료를 통하여 본 조선전쟁의 도발자

김일성종합대학 력사학부 박사 부교수 김병철 2017.7.31.

이 땅에서 전쟁의 포성이 울린지 67년이 되였다.




우리 민족에게 커다란 참화를 들씌운 조선전쟁은 미국에 의하여 강요된것이였다.




그러나 미국은 철면피하게도 수십년이 지나고 세기가 바뀐 오늘까지 우리 공화국을 전쟁의 도발자로 매도하면서 미군의 남조선강점과 반공화국침략책동을 합법화하고있으며 미국의 주장에 순종하는데 습관된 서방세계가 그 론조를 그대로 외우고있다.




1950년 조선전쟁도발책임문제는 단순한 력사적인 학술상의 문제가 아니다. 정전협정이 체결된지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평화가 깃들지 못하고 세계최대의 열점지역으로 되여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정세가 지속되고있는 조선반도의 엄혹한 현실로부터 이 문제는 누가 진실로 평화를 바라고 전쟁을 추구하는가를 가르는 정치적문제라는것을 실증해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미제국주의자들은 조선전쟁의 도발자이며 우리 인민의 철천지원쑤입니다.




미제국주의자들은 조선전쟁도발의 책임을 우리에게 넘겨씌워보려고 책동하지만 그 무엇으로써도 력사의 엄연한 사실을 외곡할수 없습니다.》 (《김정일전집》 제5권 229페지)




우리에게 전쟁도발의 책임을 넘겨씌우려고 력사적으로 책동해온 미제와 남조선괴뢰들은 사실상 저들자신의 증언으로 저들이야말로 조선전쟁의 도발자라는것을 낱낱이 드러내놓았다.




우선 미국의 정계와 군부의 우두머리들은 조선전쟁이 제2차 세계대전후 세계제패를 추구한 미국의 침략적대외정책, 대조선정책의 산물이라는것을 스스로 증언하였다.




일반적으로 전쟁이 특수한 폭력적수단에 의거한 국가정책의 연장이라고 볼 때 제2차 세계대전후 미국의 대외정책, 대조선정책을 고찰하는것은 전쟁도발자로서의 미국의 정체를 폭로하는데서 선차적인 문제로 된다.




미국대통령 트루맨은 1945년 12월 19일 국회에 보낸 《교서》에서 《우리가 그것을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가 얻은 승리는 세계를 지도할 책임을 우리에게 부여하였다.우리들은 제1차 세계대전후 윌슨대통령이 우리에게 부여하기를 원하였던 지도적지위를 이제야 인수 하게 되였다.》고 하였다.




트루맨이 미국의 대외정책을 제시하는 《교서》에서 말한 《지도적지위》, 《세계를 지도할 책임》이란 곧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하여 미국이 다른 렬강들을 누르고 제국주의의 우두머리로 되였다는것이며 따라서 미국이 세계를 저들의 비위에 맞게 재편성해야 한다는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면 트루맨이 세계의 면전에서 로골적으로 세계에 대한 《지도》를 떠든 리면에 무엇이 깔려있는가를 론의할 필요가 있다.




세계제패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생겨날 때부터 추구한 숙망이였으나 미국은 그것을 실현할만 한 힘을 가져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하여 제국주의의 우두머리로 등장하였다.




전후 세계정치구도에서 주도적지위를 차지할 교활하고 음흉한 목적에서 반파쑈련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한 미국은 전쟁기간 자기 령토에 포탄 한발 떨어지지 않은 유리한 기회를 리용하여 련합국들에 많은 군수물자를 팔아먹음으로써 세계최대의 채권국으로 되였고 전후 자본주의공업총생산액의 3분의 2를 차지하였다.




반대로 이전시기 미국을 내려다보던 유럽렬강들은 전쟁을 통하여 극도로 쇠약해지고 미국에 정치,경제,군사적으로 예속되게 되였다.




도이췰란드와 일본은 전패국으로서 미국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전승국이라고 하는 영국, 프랑스 등도 전쟁기간 국력이 심히 쇠약해지고 미국에 예속되게 되였다.




거만해질대로 거만해진 미국은 드디여 제2차 세계대전직후부터 로골적으로 세계제패를 저들의 대외정책으로 내세우게 되였던것이다.




당시 미국의 거두들은 세계제패를 추구하는 미국의 대외정책에서 조선을 지배하는것을 선차적인 문제로 보았다.




트루맨이 《초당파외교》를 제창하면서 국무성의 고문으로 임명한 공화당출신의 덜레스는 고문직에 취임하면서 《나의 새로운 임무의 중점은 극동에 둘것이다. 극동에는 하지 않으면 안될 일이 가장 많기때문이다.》고 의미심장하게 확언하였다.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직후 극동 특히 조선을 중시하게 된것은 당시 조선반도가 차지하고있던 지정학적위치의 중요성에 있었다.




미국은 정치적으로 볼 때 제2차 세계대전직후 바야흐로 시작되는 《랭전》의 시대에 유럽에서는 도이췰란드, 아시아에서는 조선에서 공산주의와 대치하고있다고 보았다. 때문에 트루맨의 특사로 남조선을 시찰한 포레이는 1946년 6월 22일 트루맨에게 제출한 《조선정세에 관한 견해, 결론 및 권고》를 종합한 비밀보고서에서 《솔직히 말해서 조선은 아시아에 있어서 미국이 성공하는가 못하는가 하는것이 걸려있는 사상상의 싸움터이다. 다시말하여 패망한 봉건주의에 도전하여 민주주의(미국식민주주의 즉 자본주의-인용자)가 서나갈수 있겠는가 아니면 공산주의가 강하게 될것인가를 시험하는 장소로 된다고 생각한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조선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사이의 대결장이라는 의미였다.




지리적으로 볼 때도 조선은 쏘련, 중국과 잇닿아있는 동북아시아의 관문에 위치하고있었다.




태평양전쟁에서 최고군사지휘권을 가졌고 전후 일본과 남조선에서 미국의 정책을 주도하던 맥아더는 《유럽은 죽어가는 체계》이고 8억의 인구를 가진 아시아야말로 《앞으로 1 000년의 세계력사의 발전을 결정》할것이라고 하면서 일본이 《장래의 도약대》라면 《조선은 대륙에로의 건늠다리》로서 조선반도 전지역을 정복할 때 《우리들은 쏘베트 씨비리와 남방을 련결하는 유일한 보급선을 산산이 끊어버리고 울라지보스또크와 싱가포르사이의 전지역을 지배할수 있을것이다. 그때에는 우리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이란 없게 될것이다.》고 주장하였다.




맥아더의 이 주장은 조선을 장악할 때만이 중국대륙을 손에 넣고 쏘련을 위협하여 극동에 대한 지배를 실현할수 있으며 나아가서 전 아시아를 장악할수 있다는것을 의미하는것이였다.




1949년 1월 28일부로 된 미국무성 정보조사국의 《극비문건 4849》 호에서도 《조선이 차지하고있는 동북아시아에 있어서의 지리적위치로 하여 조선과 그 인민을 좌우하는것은 극동에 리해관계를 가지고있는 다른 어떠한 국가》들에도 가치있는것이며 《정치적으로 조선이 미국에 대하여 가지는 중요성은 물론 의심할바 없다.》고 지적함으로써 미국이 일관하게 조선을 극동침략정책의 초점으로 간주하고있었다는것을 말해준다.




《미국현대사》의 저자 하쉘 메이어가 《실제에 있어서 월가의 조선인민에 대한 전쟁은 그 장군들이 남조선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 1945년 9월에 시작되였다.》고 자기의 책에서 서술한것은 우연한것이 아니였다.




다음으로 미국과 일본의 력사가들이 자기의 저서들에서 서술한 적지 않은 자료들은 조선전쟁은 1948-1949년 경제공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미국이 도발하였다는것을 론증하고있다.




제2차세계대전기간에 얻은 전시리윤을 밑천으로 상승하던 미국경제는 1948년말~1949년부터 시작된 자본주의의 전반적경제공황에 말려들게 되였다. 1948년말에 경공업부문으로부터 시작된 공황은 점차 중공업부문에까지 련쇄반응을 일으켜 1949년 상반년에만도 4 600개의 회사가 파산되였으며 실업자가 급격히 증대하여 1950년안으로 1 300만명에 이를것으로 예견되였다.




미국은 1948년부터 시작된 경제공황을 극복하는데서도 조선전쟁이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이에 대하여서는 미국인들자신과 조선전쟁을 연구한 외국인들속에서 이미 공인된 력사적사실로 인정되고있다.




당시 전쟁열에 들뜬 미국지배층에 대하여 《비사, 조선전쟁》의 저자 인 아이. 에프. 스톤은 《…미국의 지도세력은 변함없이 평화가 경제에 미치는 작용을 두려워하면서 공포에 휩싸여있었다. 정치가와 실업계 지도자들의 행동을 좌우하는것이 이 공포였다. 만일 조선에서 평화가 이룩되면 인도지나와 먄마에서도 조선의 뒤를 따르게 될것이다.》 라고 폭로하였으며 영국잡지 《에코노미스트》는 《미국은 위기를 극복할 계기가 필요하였으며 전쟁을 날조하지 않을수 없었다.》라고 썼다.




조선전쟁에 대하여 여러모로 연구하고 이에 대한 책들을 집필한 미국력사가 디 더블유 콘데는 자기의 글에서 《조선전쟁이 미국경제의 경기가 좋지 못할 때 일어난것은 부정할수 없다. 실업가들과 정부지도자들은 트루맨의 조선전쟁개입을 호경기에로의 예고로서 환영하였다.》라고 쓰면서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 1951년 5월 5일부가 보도한데 의하면 《트루맨대통령과 톰 코내리상원의원 등 높은 직위에 있는 많은 지도자들이 1949년 가을과 1950년 5월까지의 사이에 전쟁을 바라고있었다.》라고 명백히 지적하였다.




일본의 한 력사평론가도 《조선전쟁은 미국이 직면하고있는 경제위기의 타개책으로 되였다.》고 하면서 《조선전쟁은 1948년 가을부터 시작된 경제공황이 1949년에 이르러 더욱 심각해져 공업생산은 전해에 비해 15%나 감소되고 독점자본의 리윤은 16%나 감소된 사실과 무관계한것이 아니였다.》라고 미국의 조선전쟁도발원인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내리였다.




결국 미제는 《번영이 요구되거든 언제나 전쟁을!》이라는 독점자본의 본성으로부터 《경제공황의 공포》가 극도에 이른 1950년을 전쟁도발시기로 정하게 되였던것이다.




다음으로 미국정계와 군부의 주요인물들과 그의 하수인인 남조선괴뢰상층인물들은 자기들의 증언으로써 저들이 전쟁준비를 발광적으로 다그치고 전쟁의 도화선에 불을 지른 전범자들이라는것을 스스로 인정하였다.




미제는 괴뢰군조작후 장교들을 체계적으로 미국에 류학보내기도 하고 주일미군부대에 파견하여 미국식군사훈련도 주었다. 괴뢰군에 대한 이러한 류의 훈련은 주로 일본의 규슈와 야마구찌현에 주둔하고있는 미제24사단에서 실시되였다. 미제24사단장 띤의 《회상록》에 의하면 미 24사단에서의 괴뢰군장교들에 대한 훈련은 조선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계속되였다. 남조선주재 미군사고문단장 로버트도 남조선에서 저들이 괴뢰군을 훈련주고있는데 대하여 미국기자들에게 《실전에 경험있는 500명의 장병(남조선주둔 미군사고문단을 의미-인용자)들의 능률적이며 집중적인 활동》에 의하여 남조선에서 《당신들을 위하여 싸울 10만의 병사들을 훈련》시키고있다고 하면서 괴뢰군을 미국《자본을 지키는 훌륭한 번견》이라고 하였으며 미국은 남조선에서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성과를 거둘수 있는 병력을 보유하고있다고 자랑하였다.




1950년 9월 22일 미국회에서 한 상원의원 톰 코내리의 증언에 의하면 미국은 1949년에만도 1억 8 500만US$분의 군사기재들을 주었는데 그중에는 소총, 카빈총, 기관총, 각종 포들과 탄약, 포탄들, 장갑차들, 함정 79척, 비행기 20대를 비롯하여 다종다양한 전쟁장비들이 들어있었다.




미국무장관 딘 애치슨은 1951년 5월에 열린 국회에서 전쟁도발전에 남조선괴뢰군의 무장장비를 등한시하지 않았는가라는 공화당출신 국회의원들의 질문에 대하여 미국의 군사경제원조는 충분하였다고 대답하면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11만 4 000여명의 군대를 유지하였는데 그중 6만 5 000명의 륙군은 미국식보병기재로써 완전히 장비되여있었다. 경찰과 해안경비대의 약 절반은 미국제휴대무기 및 카빈총을 가졌었고 나머지는 같은 종류의 일본제장비를 갖추고있었다. 공격이 개시되였을 당시 이 군대는 우리의 원조로써 15만명으로 증가되였다.》




남조선괴뢰군이 완전히 미국화된 침략군대로, 현대적무장장비를 갖춘 정규군으로 강화된데 대하여 당시 남조선에 주재하고있던 《뉴욕타임스》특파원도 《미국장교들이 훈련시킨 모든 외국군대들가운데서 남조선군대는 가장 미국화된 군대이다. 그들은 미국제군복을 입고있으며 미국제자동차를 타며 미국제무기를 휴대하고있다. 여러해에 걸친 맹훈련의 결과 그들은 미국인처럼 행세하며 많은 점에 있어서 미국인들처럼 행동한다.》고 증언하였다.




하기에 1950년 5월 9일《미국제경제협조처》(《E.C.A》) 남조선원조처장 죤슨은 미국회하원 세출위원회에서 《미국의 무장으로 장비되고 서울의 미군사절단의 지도밑에 미국장교들에 의하여 훈련된 10여만의 남조선군대장병들은 모든 준비를 끝마쳤으며 임의의 순간에도 전쟁을 개시할수 있다.》고 증언하였고 미국방장관 루이스 죤슨까지도 《남조선군은 북조선군이 국경의 건너편에서 다대한 원조를 받지 않는 한 그들을 패배시킬것이다.》라고 확언하였다.




우리 공화국을 침략하기 위한 《북벌》전쟁계획작성도 미국이 주도하였다는 증언도 명백하다.




한때 괴뢰정부의 내무부장관으로서 죤 무쵸의 호출을 받고 자주 미국대사관에 드나들었던 김효석의 증언에 의하면 괴뢰군의 《북벌》 군사행동계획은 미군사고문단장 로버트의 주도밑에 작성되였으며 괴뢰군1사단장 김석원, 교통부장관 허정 등이 그에 협력하였다. 그 계획에 의하면 작전을 1949년 7~8월경에 전《전선(38゜선)에서 동시에 감행 하되 주공격은 서부전선의 1사단이 담당하기로 되였다.




김효석의 증언은 《북벌》군사행동계획의 기본골자를 밝힌것으로서 이것은 1950년 6월 28일 조선인민군이 서울을 해방할 때 괴뢰륙군 본부에서 압수한 《북벌》군사전략계획도에 의하여 립증되였다. 이 군사 지도의 밑에는 1945년, 미군군사지도인쇄소 발행, 축척 1:1 000 000 이라는 영문자가 찍혀있다.




이에 대하여 맥아더사령부참모부에서 근무하면서 조선문제에 대한 미제의 계획에 정통하였던 에이다대좌는 1950년 12월 이란주재 미군사고문단 성원으로 있을 때 이란군참모들과의 담화석상에서 《미국의 계획은 리승만의 직접적인 참가와 미륙해군의 원조에 의하여 조선의 38゜선이북지역을 점령하는것이였다.》라고 증언하였다.




김효석의 증언에 의하면 이 계획실행을 위하여 1949년 5월에 무쵸는 국방부장관 신성모와 김효석에게 《미국의 의도를 잘 알고 모든 준비를 유감이 없도록 갖출것》이며 《38゜선 이북에 대한 총진군의 시기》를 하루라도 빨리 앞당길수 있게 전력을 다하라고 지시하였다.




미국의 지원과 부추김을 받은 남조선괴뢰들은 북침전쟁을 통하여 전조선을 《통일》할 허황한 망상에 넘쳐 전쟁도발망언을 련발하였다.




리승만역도는 1949년 4월 10일 조병옥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들은 북방을 평정》해야 한다, 《북조선으로 진격하여 철의 장막을 38゜선으로부터 압록강연안》으로 밀어제껴야 한다고 줴쳤고 1949년 10월 7일 미국의 UP통신사 부사장 죠셒 죤슨과의 회견에서는 《나는 우리들이 3일이내에 평양을 점령할수 있다고 확신》하고있다고 허장성세하였다.




리승만역도는 전쟁을 하루라도 빨리 당길 목적으로 미국에서 자기의 적극적인 대변자적역할을 하고있던 올리버에게 1949년 9월 30일에 전쟁도발의 급박성에 대하여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공격을 개시하여 북의 공산권안에 있는 우리의 충실한 지지세력과 합세하여 평양에서 그 나머지 사람들을 숙청해야 할 가장 좋은 시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다음 우리의 방어선을 두만강과 압록강을 따라 강화해야 한다.》라고 강조한 비밀편지를 보냈으며 올리버는 10월 10일부 회답편지에서 《북침문제와 관련하여 나는 거기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며 공격이 가장 훌륭한, 때로는 유일한 방어로 된다는 생각에 동의한다.》고 하였다.




리승만의 졸개들도 기승을 부리며 북침을 선동하였다.




괴뢰군참모총장 채병덕은 1949년 년두사라는데서 괴뢰군의 과업에 대하여 말하면서 《우리는 신년도에 실지적행동으로 미회복지를 회복하여 조국강토를 통일하여야 할것이다.》느니, 괴뢰국방장관 신성모는 《우리 국군은 …명령만 있으면 이북의 평양, 원산까지라도 1일내에 점령할 자신과 실력을 가지고있다.》느니, 괴뢰국무총리 리범석은 1949 년 3월에 《학도호국단》결성식에 나타나 《학도제군! 이북으로 총진군하자!; 그래서 백두산에 기를 꽂고 두만강에 총을 놓자.》고 고아댔다.




한때 괴뢰내무부장관이였고 국회부의장이였던 윤치영도 1949년 3월 9일 기자회견에서 《남북조선을 통일하는 유일한 방법은 북조선의 실지를 힘으로 회복하는것이다.》라고 떠벌이였다.




이와 같은 증언들은 리승만을 괴수로 하는 남조선괴뢰들이 북침전쟁을 《국토통일》의 기본수단으로 삼고 미국의 계획에 따라 전쟁도발을 기정사실화하고있었다는것을 의미하였다.




이러한 속에서 미국무성 특별고문 덜레스가 1950년 6월에 남조선에 날아들었다. 6월 17일 서울에 도착한 덜레스는 다음날 미군사고문단과 괴뢰군의 고위인물들을 거느리고 38゜선을 시찰하고 만족을 표시하였으며 19일에는 괴뢰국회에서 《당신들은 외롭지 않다. 당신들은 인간의 자유를 위한 위대한 구상을 실현하는데서 가치있는 역할을 수행하는 한 절대로 외롭지 않을것이다.》고 괴뢰들을 《격려》하였다.




덜레스의 방문일정에서 가장 중요한것은 18일에 진행된 리승만과의 비밀회담이였다. 이 회담의 내용에 대하여 해방후 미군정청 고문 겸 하지의 책임고문인 서재필의 1등서기관으로 있다가 그후 유엔주재 남조선대사, 뉴욕주립대학 사회정치학 명예교수, 박사였던 림창영은 《내가 이전에 인간적으로 가까이 지낸바 있는 전 국군중장 최덕신의 말에 의하면 덜레스는 리승만에게 공산주의와 싸울 각오가 되여있는 나라에 대해서는 미국이 언제나 도와줄 용의가 있다고 확언하였다고 한다. 덜레스는 …리승만에게 공산북조선을 공격할 준비가 되여있다면 미국은 유엔을 통하여 도와주겠다고 시사하였다. 그러나 그는 리승만에게 남조선이 먼저 공격을 받았다는것을 세계가 인식하도록 해야 할 필요성과 그에 따라 행동계획을 짜야 한다는데 대하여 강조하였다.》고 확언하였다.




결국 덜레스가 남조선을 떠나간지 불과 며칠후에 전쟁의 포성이 울렸던것이다.




력사는 결코 위조할수도 외곡할수도 없으며 부정할수도 없다.




력사적증언과 자료들은 조선전쟁의 도발자는 바로 미국이며 미국은 전범자의 책임에서 절대로 벗어날수 없다는것을 똑똑히 보여주고있다.




미국에 의하여 조선전쟁이 강요된지 수십년세월이 흐르고 세기는 바뀌였지만 미국의 본성은 변하지 않았다.




오늘도 미국과 그에 빌붙어 잔명을 유지하는 남조선괴뢰역적패당은 1950년대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우리 공화국의 《도발》과 《위협》을 떠들며 새 전쟁도발에 피눈이 되여 날뛰고있다.




그러나 우리 공화국과 미국사이의 전략적구도는 완전히 뒤바뀌였다. 만일 미국이 이러한 현실을 망각하고 이 땅에서 전쟁을 도발한다면 그것은 미국의 자멸만을 가져올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