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19

윗동네 리얼스토리 | 그렇게 하면 수령이 뭐가 되니? 2018년 3월호 | 통일한국



윗동네 리얼스토리 | 그렇게 하면 수령이 뭐가 되니? 2018년 3월호 | 통일한국



윗동네 리얼스토리 | 그렇게 하면 수령이 뭐가 되니? 2018년 3월호

그렇게 하면 수령이 뭐가 되니?

이지명 / 국제펜(PEN)망명북한작가센터 이사장

황해북도 사리원에 위치한 미곡벌은 논 면적만 해도 300여 정보(약 300만㎡)가 넘어 산악이 많은 북한치고는 큰 벌방으로 이름이 났다. 땅이 기름져 노동당이 제시한 벼 수확량만 해도 1정보 당 10t 생산으로 전국 농장들의 본보기로 적극 추켜세우는 고장이기도 하다. 따라서 걸핏하면 김일성 때나 김정일 때 국가지도자가 곧잘 현지시찰을 나가는 고장이었다. 물론 이유는 김일성이 내세운 주체농법 본보기 농장으로 선전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매해마다 정보 당 10t의 벼를 생산했다고 상부에 보고되었지만 실제로는 5t 정도의 수확밖에 거두지 못했다. 필자도 여러 번 이 농장에 다녀봤지만 산골의 농장과 달리 벌방이고 국가의 관심 속에 있어 그런지 농장원들은 이른 새벽에 벌로 나가고 별을 보며 집에 들어오고는 하는 것을 직접 봤다. 벼농사가 위주라서 쌀밥은 먹지만 그 고된 노동 때문에 농장원들의 불만은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니었다.

1984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일본농업대표단이 미곡벌을 참관했다. 벌의 정경과 농장원들의 일하는 모습을 살펴보던 대표단 실무진들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정보 당 얼마를 생산하는지 동행한 관리위원장에게 물었다. 1정보 당 10t이라는 대답이 오자 그 농사 방법과 함께 단계별로 벼에 어떤 비료를 얼마씩 주는지를 묻고 나서 지금의 방법으로는 10t을 절대 생산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러자 관리위원장은 대번에 얼굴색을 바꾸며 자본주의 나라에서 온 당신들이 어떻게 위대한 수령님이 제시한 사회주의주체농법의 진수를 알겠냐며 오히려 핀잔했다.

“당신이 주체농법을 알아?”

그러자 그 실무자가 말하길, 농사를 짓는데 사회주의나 자본주의라는 구조가 왜 필요하냐고 하자 관리위원장은 “필요하지. 당이 제시한 주체농법을 무조건 관철하겠다는 혁명적 투쟁정신이 있어야 수확량도 올라갈 것이 아닙니까!”라며 확신에 차 말했다.

실무진은 웃으며 토양 조건이라든가 기후, 주는 비료를 합쳐 분석해 보면 정보 당 최대 5t 이상은 생산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관리위원장은 그 말에 속이 뜨끔했으나 짐짓 뻗대며 “당신은 왜 10t 생산현장에 와서 5t 소리를 하느냐?”라고 말하며 그렇게 나오려면 참관이고 뭐고 어서 가라고 화를 냈다.

사실 일본농업대표단은 미곡벌을 둘러보며 일본과 북한 양국의 공동합작지대를 정하려고 찾아온 터라 그렇게 화를 낸다고 해서 호락호락 물러갈 기색이 없었다. 실무진은 “이렇게 하면 어떻습니까? 우리와 합작해 정보 당 10t을 생산하고 절반씩 나누는 것이죠. 일체 농사방법과 농기계 그리고 비료는 우리가 다 대고 노동력만 현지농장에서 담당하면 됩니다. 생산물은 절반씩 나누는데 설사 10t을 생산하지 못한다고 해도 정보 당 5t은 이 농장에 돌려 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지금처럼 새벽같이 벌로 나가고 어두워서야 집에 들어오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8시간 노동이면 충분하니까요. 선진화된 일본의 농사법을 배우는 겸 말입니다”

관리위원장은 그 말에 귀가 솔깃해 생각해 보겠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일본의 농장포전이 정규화되고 기계화가 이룩되어 사람이 할 일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밤낮 포전에서 살다시피 해야 정보 당 5t 생산도 힘든 것을 감안해 그렇게만 되면 고된 노동에서 해방도 되고 쉽게 낟알도 생산할 수 있어 다음 날 중앙농업부에 제의서를 올렸다. 그의 생각으로는 일본농업대표단이 일개 농장관리위원장을 상대로 하여 그러한 제의를 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미 사전에 토의를 걸치고 현지답사를 내려왔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이 관리위원장에게 있어 인생 최대의 실수였고 다시 소생할 수 없는 나락에 굴러 떨어진 함정일 줄은 몰랐다. 며칠 지나지 않아 일본농업대표단은 귀국했지만 관리위원장은 직위에서 해임되어 어디론가 사라졌다.

솔깃해서 올린 제의서, 돌아온 것은 ‘추방’

물론 관리위원장이 정치범관리소에 잡혀간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운이 좋았다고나 할까? 그 사람은 벌방에서 함경북도의 깊은 오지로 가족과 함께 추방되었다. 필자가 그 관리위원장을 만난 것은 중국 헤이룽장 성에 위치한 로야령의 깊은 산속 벌목장에서였다. 북한에서 ‘고난의 행군’이 한창일 때 생계를 위해 탈북한 그를 만났던 당시 내게 들려준 이야기다.

당시 이야기를 들은 필자는 그만 어처구니가 없어 웃었다. 어떻게 관리위원장까지 한 사람이 그렇듯 정치적 문제에 민감하지 못했는지, 만약 일본농업대표단과의 합작이 이루어져 벼 생산이 선진화되어 일도 한결 쉬워졌다면 그때까지 북한 주민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우월한 농법이라 추켜세우던 김일성의 주체농법의 위상은 무엇이 되는지 눈치도 없었다는 말인가. 설사 농장원들이 24시간 포전에서 산다 해도 북한 정권으로서는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일을 일개 관리위원장이 제의서까지 올렸으니, 이거야말로 수령의 주체노선을 따르지 않는 얼간이 짓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