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6/15

한국의 간디 "세계적인 철학자" 위대한 종교지도자 함석헌의 추악한 진실 2023

한국의 간디 :: 함석헌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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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간디 "세계적인 철학자" 위대한 종교지도자 함석헌의 추악한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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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간디
함석헌 2023. 1. 1.

함석헌의 모든 진실이 담긴 책이 발매됩니다. 그 전에 작가 조순명의 에필로그를 실었습니다.



한국의 간디 함석헌에게서 나는 사탄을 봤다.

함석헌 외삼촌 영전에




외삼촌, 당신이 세상을 떠나신 지도 어언 34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직도 당신을 떠나보내지 못 하고, 이런 글을 또 쓰고 있어요.

이것은 결코 당신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어서가 아닙니다.

당신에 대한 저의 네 번째가 되는 이 글은 사실은 우리 민족에 대한 마지막 호소입니다.

그들... 종교계, 언론계, 재야세력, 야당 그리고 국가권력이 하나 같이 당신의 정체를 다 알고

있으면서도 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끌고 다니면서 이용하더니, 돌아가신 후에는 유해까지

국제시장에 내다 팔아먹고 있어요.

생전에 그들의 속셈을 꿰뚫어 보고 계셨던 당신은 이런 말씀을 남겼지요.

‘또 사랑이 무엇이 사랑인가? 살아서 우리가 그것을 말려드리지도 못 하고 또 죽은 후에 그

비판조차도 못 하면 무슨 사랑인가?

[새 시대의 전망] 중에서



당신이 정신없이 타락할 때 면전(面前)에서 “계집질하지 말라!” 고 직언한 사람은 유영모 선생님과 저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보면 이 세상에서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아낀 사람도 유영모 선생님과 저뿐이고,

유선생님이 돌아가시고 안 계시는 지금, 당신을 비판할 수 있는 사람도 저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해방 직후 저의 아버지는 신의주(新義州) 동중학교 교사로, 당신은 평안북도 자치위원회 교육부장으로 계실 때 가끔 우리 집에 와서 저녁도 자시고 아버지와 담소도하고, 주무시고 가곤했지요.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어수선한 소리에 눈을 떴더니, 캄캄한 방 한 구석에서 당신이 가슴을 치고 울면서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잠시 후 아버지의 뜻밖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형님, 어디 아프우? 불 켜라우?

“아아니, 괜찮아.”

그 후에도 여러 날 밤 당신의 기도 소리에 단잠에 설쳤지만, 두 번 다시 아버지의 “형님, 어디 아프우? 불 켜라우? 라는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저녁 아버지와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나누다가, 당신이 심각한 표정으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을 저는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제 머지않아 ‘말라귀’ 라는 마귀가 우리 조선을 집어삼키려고 하는데,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지?”

그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리 없었던 아버지는 그냥 듣기만 했고, 당신도 추가설명은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78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간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까 그것은 분명히 당신이 우리

민족의 최대 비극인 6,25전쟁을 예견(豫見) 하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거기에 대한 다른 증언이 있습니다.

‘6,25가 터진 바로 일주일 전의 일요일, 그러니까 1950년 6월 18일에 선생님이 하신 말씀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지금 이 화산은 속에서 불길을 뿜어대고 있는데, 그 정상에서는 살짝 덮여 있는 이 지각(地殼)이 언제 터질 줄도 모르고 왜들 이렇게 까불고만 있는지 참 답답하기만 하다‘는 요지의 말씀이었다.

이와 같은 말씀을 듣고난 그 다음 주일에 6,25는 터지고 말았다.

물론 그 말씀을 하신 선생님도 6,25를 미리 아시고 하신 말씀은 아니셨겠지만, 여하튼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영원히 씻을 수 없는 동족상쟁의 쓰라림을 겪었으며 나 개인에게도 깊은 흔적을 남긴 6,25 사변이라는 전쟁의 몇 해를 보내면서 나는 선생님의 그 예언자적인 말씀을 되새기곤 하였다.‘

김용준 명예교수(고려대학교)

[나의 스승 咸錫憲] 중에서

지금까지 6,25를 예견한 사람은 당신뿐인 것으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런 당신이 1947년 남한에 와서 제일 처음 하신일이 무료로 숙직을 제공해주고, 지극 정성으로 돌봐준 노연태 외항선장의 부인 권정님과 간통하는 일이었습니다.

최원극(五山학교 30회 전 주한미국 대사관 기획고문)의 증언에 의하면, 권정님은 당신을 ‘주님’ 이라고 부르며 음행했다고 그럽니다.



1960년 초 어느 날 당신과 같이 길을 가다가 제가 이런 말을 불쑥한 적이 있지요.

“거짓의 가면을 벗어라!”

지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느 책에서 그런 구절을 읽었기 때문에 별 생각 없이 그 대목을 인용했을 뿐입니다.

그 때는 제가 당신의 정체를 알기 전이었으니까, 당신의 비행을 빗대갖고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었지요.

그 말을 듣자마자 당신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저를 뚫어지게 노려보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깜짝 놀랐지요. 왜냐하면 항상 다정했던 당신의 얼굴이 아니라 험상궂은 사탄의 형상이 거기에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제가 놀라서 당신을 빤히 쳐다보니까 당신의 얼굴이 ‘하이드 씨’에서 ‘지킬 박사’로 천천히 변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의 쏘는 듯한 눈길을 제가 피하지 않고 똑바로 쳐다보는 눈에서 악의가 없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일 겁니다.

당신의 얼굴에서 제가 사탄을 봤다는 말, 다시 말하면 당신이 사탄이라는 소리는 아무런 근거도 없는 저의 주관적인 판단일 뿐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1947년 월남 후 종교지도자의 가면을 쓰고, 입으로는 거룩한 말씀만 골라서 하면서, 수십 명의 여성(제자 최원극은 수 백명 이라고 증언함)을 성폭행한 것은 사탄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짓이었습니다.

그 후에 저는 사탄에 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백과사전 등을 훑어 봤지만 피상적인 표현뿐이었지요.

그래서 저 나름대로 이렇게 정의해봤습니다.

첫째 외모가 출중하게 잘 생길 것. 당신은 해방 전 정주(定州) 五山학교에서 학생들로부터 ‘예수’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였으니까, 딱 어울리는 외모라고 하겠습니다.

둘째 많은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을 정도로 말을 잘할 것. 저는 지금까지 당신보다 말 잘하는 사람을 보지 못 했습니다.

셋째 박학다식(博學多識)할 것. 오죽하면 五山학교 학생들이 당신을 모르는 것이 없다는 뜻에서 ‘함 도깨비’라는 별명으로 불렀겠습니까?

함석헌만큼 많이 읽고 많이 아는 사람 없었고, 함석헌만큼 말 잘하고 글 잘 쓰는 사람도 없었다.

김동길 박사 (단국대 석좌교수, 연세대 명예교수)

넷째 말과 행동은 정 반대일 것. 당신은 입으로는 천사의 말을 하면서도 행동은 그와 정 반대었습니다. 그렇게 보면 함석헌, 당신은 분명히 사탄이었습니다.

만일 함석헌이 사탄이 아니면 대한민국에는 사탄이 없다고 저는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함석헌이라는 이름은 밝히지 못 했지만 분명히 당신을 빗대서 비판한 글을 남긴 언론인이 있습니다. 그는 조선일보 전 논설고문 선우 휘로 [鮮于 煇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스님의 入寂과 어린이

오늘날 남들이 다 아는 상스럽지 못한 소행을, 자기도 제자도 함께 덮어주거나, 감싸고 돌아감으로써 세상을 속이며, 정신적인 스승인 양 거드름을 피우거나 敎祖처럼 모셔지고 있는 경우를 흔히 볼 때마다, 인간이 지닌 약점을 아예 탁 터놓고 누구에게도 속임없이 “적어도 나한테는” 살다간 탄허 스님의 참된 인간상이 새삼스럽게 그리워지는 것이다.

조선일보(1983. 6. 12)



선우 휘는 당신의 비행을 글로만 규탄한 것이 아니라, 몸으로도 나타냈습니다.

당신이 논설고문실에 들어가면 선우 휘는 항상 정중한 태도로 맞이하곤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1982년 어느 날, 당신이 논설고문실에 들어섰는데도, 그는 취기(醉氣)가 돌아 불그스레한 얼굴로 빤히 쳐다보기만할 뿐 인사말도 없었다고 합니다.

멋쩍어진 당신 편에서 먼저 한마디 했다지요. “아침부터 약주가 좀 과해졌구만...”

선우 휘는 아직 쇼파에 몸을 묻은채 내뱉 듯이 한 마디 했습니다. “씨 X놈의 세상, 술 안 먹구 무슨놈의 재미루 살갔습네까?”

이것은 제가 목격한 장면이 아니라, 그 날 당신을 수행했던 전덕용(씨알의 소리 초대편집장)의 증언입니다.

선우 휘가 이렇게 강력하게 글로, 몸짓으로 당신의 부도덕한 행위를 규탄 할 수 있었던 것은 [거짓 예언자 조순명著]를 읽고 당신의 정체를 파악했기 때문이라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비록 짧은 글이지만 선우 휘는 할 말 다한 셈입니다. 당신만이 아니라 ‘함께 덮어주거나 감싸고 돌아가는 제자’도 싸잡아갖고 나무랐습니다. 짧지만 이 한 편의 글이 한국 언론은 결코 함석헌의 비행을 묵과하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낸 글이라고 저는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외삼촌, 당신이 쓰신 책 가운데 [뜻으로 본 한국역사] 한 권만이 혼이 살아 있을 때 쓴 것이고, 나머지는 전부 초점이 흐리고 횡설수설하고 있다고 꿰뚫어본 눈이 있어요.

그 눈은 한국인의 눈이 아니라, 부끄럽게도 일본인의 눈이랍니다. 이것은 제가 직접 들은 얘기가 아니라 배명수[십자가 복음] 편집 겸 발행인의 증언임을 밝혀둡니다.

“도쿄(東京)대학의 역사과 조교수가 서울에 왔을 때 내가 만난 적이 있어. 그는 무슨 말 끝에 [함석헌 전집 10권]을 전부 읽었는데 [뜻으로 본 한국역사] 한권만이 ‘함선생의 혼이 하늘을 찌를 듯이 살아 있을 때’ 쓴 것이고 나머지는 전부 초점이 흐리고 횡설수설 하고 있다는 거야. 그러면서 하는 말이 ‘함선생이 남한에 와서 왜 그렇게 갑자기 변했는지 모르겠다’ 면서 머리를 갸우뚱하잖아. 그 말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어. 왜냐하면 그는 조형이 쓴 [거짓예언자]나 [웬말인가 咸錫憲]을 읽기는 고사하고 구경도하지 못한 사람이거든. 그런데도 그런 날카로운 평을 하드라니까”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당신이 30대, 사생활이 깨끗할 때 정주(定州) 五山학교에서 쓰신 [聖書的 立場에서 본 朝鮮歷史]의 개정판이고, 나머지는 전부 남한에 와서 간통과 강간을 식은 죽 자시 듯하면서, 그런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글재주 부린 것이니까, 바른 글이 나올 수 없는 것이지요.

우리는 당신의 교묘한 글재주에 속아서 박수쳤는데 그 일본인 조교수만은 속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는 노릇입니다.

배명수의 증언은 다시 이어집니다. “언젠가 일본에서 온 무교회 회원을 만났더니 대뜸하는 말이 ‘함선생 야말로 남,북한 한국민족의 정신적인 지도자인데 그런 분을 어떤 사람이 여자문제로 모함하드라 면서 몹시 분개하드라니까.’ 나는 아무 소리도 못하고 그저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어. 일본에는 [함석헌을 생각하는 모임]이 여러 개 있대.



외삼촌 해 마다 개나리가 피는 춘3월이 오면 당신의 알뜰한 제자들은 함석헌을 찬양하는 [함비어천가](咸飛御天歌)를 부르는데 재작년에는 다음과 같은 가사로 합창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국이 낳은 현대 최고의 사상가이자, 민주운동 실천가이며, 평화운동가이신 함석헌(1901~1989.3.13.) 선생님의 탄신 117주년을 맞이하여 기념식 및 기념강연을 개최한다.

함석헌은 일제 강점기에는 민족정신을 고양시키는 역사학자로서 기독교 사회운동가로 활동했으며 해방 후에는 장준하, 김재준, 문익환 등과 더불어 독재정권과 싸우며 한국의 민주주의와 평화를 위해 헌신하셨다.

1970년에는 언론의 자유가 차단된 시절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여 민중들의 뜻을 대변하는 일에 온 힘을 기우리셨다.

평화를 향한 함석헌의 열정과 희생이 인정되어 세계퀘이커 연합인 “친우봉사”(Friends Service Council, 현 퀘이커 평화와 사회적 증언)로부터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두 번 노벨평화상 후보에 추천되기도 했다.

“한국의 간디”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 함석헌의 삶과 사상은 지금도 학자, 사회운동가, 정치인, 역사가와 언론인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에 뜻을 모은 사람들이 그의 사상을 널리 알리고 그의 뜻을 실천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1998년 [함석헌 기념사업회 사단법인]을 창립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번 [함석헌 선생님의 탄신 117주년]을 맞이하여 [함석헌 기념사업회]주관으로 기념모임을 갖는다. 이번 기념 모임은 기념영상 기념축사와 강연, 축하연주 등으로 진행되며 씨알들의 만찬도 함께 진행될 예정이다. 기념강연에는 김주영 박사(독립기념관 연구관)가 “3.1독립선언 100년 씨알정신을 말하다”라는 제목으로 3.1운동의 정신과 씨알사상을 연결하고 그것이 갖는 세계사적 의미를 되짚어 본다.

평화를 사랑하고 깨어 있는 씨알들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함께 참여해 민족의 역사와 미래를 향한 함석헌의 뜻을 되새기는 시간이 되기를 희망 한다.

2018년 3월 5일

함석헌 기념사업회 (사)

이사장 문대골 목사


놀랄 일은 다시 이어집니다. 함석헌의 정체를 결코 모른다고 할 수 없는 일단의 목사와 교수들이 42년 동안 새빨간 것짓말로 세상을 속이면서, 계집질한 것밖에 없는 함석헌을 팔아 [함석헌 씨알학교]를 창립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 창립취지문을 원문 그대로 인용합니다.



‘함석헌 씨알학교’ 창립취지문

우리는 현대문명의 발달 속에 온갖 편리와 혜택을 누리며 살고 있다. 그러나 그 내면세계를 들여다보면 깜짝 놀랄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자연은 회복될 수 없이 파괴되고, 지구공해와 기상이변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며 멸종되는 동식물의 수는 헤아리기조차 힘들다. 이와 같은 현상은 그대로 인류위기로 직결된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결국 인간은 손을 대서는 안 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핵무장과 유전자 조작, 인간복제와 로봇인간이 그것이다. 이런 일을 계속하면서도 어떤 반성이나 인간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도 보기 어렵다.더 편리하고 더 좋은 기계를 찾으며 기계의 종이 된 것도 망각하고 있다. 이대로 조금만 더 나간다면 인류종말의 날이 오지 않는다는 어떤 보장도 없다.

그렇다면 이제는 아무 희망이 없다는 말인가? 아니다. 아직 희망은 있다. 여기 한 사람, 우리가 존경하고 가르침을 받을 스승 한 분이 계시다. 이 분은 바로 함석헌 선생이다. 우리는 선생이 보여주고 남겨주신 ‘씨알정신’을 살리는 길이 아니고는 이 난국을 이기고 위기를 극복할 길은 없다고 확신한다.

선생은 1901년 구한말에 태어나서 일제강점기를 지나 공산치하와 자유당독재 5.16 군인정치와 신군부시대를 겪으면서 오직 참됨과 의로움과 바른 말씀을 외치다 수난을 당하면서도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90평생을 일관하셨다.

선생은 말하기를“나는 창세로부터 내려오는 바통을 받았다. 나는 이것을 다음 사람에게 넘겨주고 가야한다. 이것을 받을 사람은 받아요!”하신다.

또한 “10년 교육을 해도 이 백성의 정신지도자가 되어보겠다는 한 청년을 보지 못 하였고 그렇게 가르치는 한 사람의 교사를 보지 못 하였다.”고 탄식하신다.

오늘 우리가 ‘함석헌 씨알학교’를 창립하는 정신은 바로 여기에 있다. 선생이 넘겨주려는 ‘참의 바통’을 받아들 사람을 찾고 또한 ‘이 백성의 정신지도자가 될 청년’을 길러내는 것이다.

물론 이 일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이 일은 반드시 해야하고 시급한 일이기 때문에 지체할 수 없다.

‘함석헌 씨알학교’의 시작을 세상에 알린다. 강호에 계시는 많은 씨알들과 뜻 있는 동지들의 성원을 바란다. 가자, 씨알학교로! 살리자, 씨알정신을!

2020년 3.1운동 101주년을 맞으며,



함석헌 씨알학교 창립준비위원회

위원장 박선균




교수진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

박재순 (씨알사상연구소장)

김신보 (씨알사상연구원장)

박선균 (씨알의 소리 편집주간)

문대골 (전 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장)

전기호 (씨알 평화연구소장)

최정윤 (씨알아카데미 원장)

김조년 (한남대 명예교수)

장영호 (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

특강: 이은선 교수

이호재 교수




외삼촌, 1965년 여름 사회경험이 별로없는 29세의 저에게 닥친 [함석헌 사건] 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저는 피하지 않고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해결해 보려고 애썼습니다. 저의 고민을 원고지 1천3백5십매에 담아 여러 사람들에게 읽히고 평을 구했지요.

대부분 긍정적으로 평했는데 남정현 작가는 ‘매끈한데’라고 한 마디 해줬습니다. 양영호 작가(함석헌의 둘째 며느리)는 이렇게 평했습니다.

“그 원고의 전반부는 글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데, 후반부는 참 잘 됐어요.”

원고의 전반부는 [함석헌 사건]을 사실 그대로 표현한 것이고, 후반부는 ‘우리가 그토록 아끼고 기대했던 함석헌이 여자 하나에 걸려서 쓰러지게하는 하나님, 당신의 뜻이 무엇입니까? 라고 울부짖는 것이었지요.

김동길 박사에게 그 원고를 보여줬더니 이렇게 평했습니다. “미스터 조는 함선생을 죽일 때는 언제고, 살리려고 몸부림치는 건 또 뭐야? 코미디언이 코미디하고 먼저 웃는 것 봤어? 코미디언은 코미디하고는 뒤로 물러서는 거야. 웃는 것은 청중들 몫이지. 그런데 미스터 조는 그것을 혼자 다 했어. 혼자 쓰고 혼자 평하고, 그러면 독자들 몫은 뭐야?”

김동길 박사의 평을 받아들여, 양영호가 칭찬한 후반부를 저는 미련없이 잘라버렸습니다.

김박사는 저의 원고를 읽어봤으니까 다음과 같은 대목도 봤을 겁니다.

‘.......어느날 함석헌은 권영희를 범했다. 자연히 몸에 이상이 안 생길리 있나. 진찰 결과는 임신 3개월, 그녀는 핏기없는 얼굴로 함석헌을 찾아가 진찰결과를 말했다. 그런데 대답은 지극히 빨리 나오고 짧았다. “떼버려!” “네? 어린 생명을 어떻게?” 그럼, 넌 그 애를 낳을 작정이었냐?“

”......................“ 권영희는 울면서 돌아섰다. 멀리 사라져가는 그녀의 축늘어진 어깨를 바라보면서 함석헌은 그 일로 말미암아 자신의 파국을 맞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 무렵 사상계(思想界)로부터 원고청탁이 하나 들어왔다. 제목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나중에 그 글이 하마터면 그의 파멸을 가져올 수도 있는 구렁텅이에서 그를 구해줄 줄은 그 자신도 생각지 못 했을 것이다.

[함석헌과 한국지성들] 上,下 중에서



김동길 박사는 이 글을 읽고도 함석헌을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네요.

“누가 뭐라고해도 사상적으로 우리시대의 커다란 영향을 미친 거인이 있다면 그가 함석헌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는 일찍이 사상계(思想界)에 [생각하는 사람이라야 산다]는 글을 썼다.

철학을 전공해 유럽과 미국 유수한 대학에서 박사학위 받고 돌아온 철학자는 여럿 있지만 한국 국민의 생각에 함석헌만큼 큰 영향을 미친 사상가는 우리 현대사에 없을 것이다.“

김동길 박사의 함석헌 찬양은 다시 이어집니다. “누구보다도 감정이 풍부했던 함석헌이 이성을 사랑한 사실이 놀랄 일은 아니었으나 그가 어느 여성을 사랑하는 것 같은 눈치만 보이면 주변 ‘속물’들이 모두 들고 일어나 스승인 그를 비난했다.

함석헌 면전에서 ‘계집질하지 말라’고 직언한 사람은 유영모와 저뿐이었다고 앞에서 이미 밝혔습니다. 그렇게 직언한 사람을 보고 ‘속물’이라면 함석헌이 ‘개잡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누가 뭐라해도 사상적으로 우리시대의 커다란 영향을 미친 거인이 있었다면 그가 함석헌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찬양한 김동길 박사는 ‘성물(聖物)인가요?



김동길 박사는 다시 말합니다.

“함석헌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독일 문호 괴테는 70, 80이 될 때까지 젊은 여성들을 사랑했는데 왜 한국 사람인 나는 그러면 안 되나.’하며 탄식 아닌 탄식을 하기도 했다.

괴테가 70세 때 19세의 소녀를 사랑했다는 소리는 저도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함석헌 당신처럼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처녀의 목에 칼드리대고 강간했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 했습니다.

김동길 박사는 마지막으로 이런 말씀을 하네요.

“내가 보기에는 괴테가 천재였던 것처럼 함석헌도 천재였다.”

조선일보(2018. 1. 8)



이상은 조선일보(2018. 1. 8)

[Why? 특별기획]


[평생을 1일 1식..... 말과 글로 ‘양면도’ 휘두른 시대의 사상가]라는 제목하에 김동길 박사가 함석헌을 소개한 글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1982년 [합동출판사]에서 [거짓 예언자]를 출간하기 전 김석재 사장은 그 책이 나오면 사회에 미칠 영향을 염려해서 각계 각층 인사들에게 여론조사를 해봤답니다.

목사들은 태반이 반대인 반면 작가들은 그와 반대로 태반이 찬성이었답니다. 어느 현직 판사에게 물어보니까 원고 내용에 관해서는 한 마디도 묻지 않고 매수만 묻더랍니다. 1천 3백 5십여 매라니까 그 판사님 대답이 “그러면 그 원고는 사실일 개연성이 매우 높습니다. 왜냐하면 거짓말로 원고지 천오백여매 메우기기란 쉬운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라고 언도하더랍니다.

그 판사는 원고를 읽어보지 않고 매수만 묻고도 ‘사실일 개연성이 매우 높다’고 언도했는데 김동길 박사는 원고를 읽고도 독자들에게 ‘내가 보기에는 괴테가 천재였던 것처럼 함석헌도 천재였다’고 소개하다니.......



외삼촌 1965년 여름 원효로 집에서 당신과 곽분이 문제로 가족회의를 여러 번 했습니다, 저는 가족들에게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만일 외삼촌이 내가 하는 말을 듣지않고 곽분이와 은밀히 놀아나면서 세상을 속이는 언행을 계속하면 그때는 그녀와의 관계를 낱낱이 폭로해서 다시는 세상을 우롱하지 못 하게하겠다”고 말입니다. 대부분 아연해서 침묵하고 있는 가운데 김삼종(함석헌의 누이동생 함석보의 차남)은 당신의 시집 [水平線 너머]를 읽어보이며 이렇게 항의했습니다.



“시집 밑천 삼진 못할 내 목 잘라 쟁반에 담고 춤추는 오그라진 속아 네 눈에 원수 갚음의 속살 소용 없느니라.

나의 죽음이 쓴 빛살 이미 네 살을 뚫어 꿰지 않았느냐? 나는 영원히 빈들에 메아리를 울리는 죽지 않는 외치는 소리.”

“여기에서, ‘시집 밑천 삼진 못할’의 ‘삼진’은 ‘오삼진’ 이름을 빗대서 한 말이야. 이런 말은 하늘이 내린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이라구.”

"야, 이것이 어떻게 하늘이 내린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냐? 미친놈의 소리지.“

"형 어떻게 외삼촌 보고 미친놈이라고 말 할 수 있어?"

"미친 사람 미친놈이라고 부르지 않고 그럼 미친님이라고 부르란 말이냐? 외삼촌이 1960년 초 천안(天安) 씨알농장에서 오삼진 목에 칼들이대고 강간한 사건 너도 알고 있잖아. 그런데 오삼진은 외삼촌을 강간죄로 고소하지않고,"

“'나쁜짓 그만하고 회개하고 새 사람 되시오.' '위선 그만 떨고 강원도 안반덕에 가서 감자농사나 지으면서 여생을 조용히 보내시오.' 라고 충고의 뜻을 담은 엽서를 여러장 원효로 집으로 보냈어. 그것은 우편함에 꽂혀 있었기 때문에 나도 쉽게 읽을 수 있었지."

"만일 그 때 오삼진이 강간죄로 고소했더라면 외삼촌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몇 년 동안 콩밥신세를 지고 사회에서 매장되고 말았을 거야. 그런데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오삼진은 그러지 않았어. 그러면 외삼촌은 오삼진에게 백배(百拜), 천배(千拜) 엎드려 절을 해도 모자랄 판인데 그러기는 고사하고 ‘삼진’이라는 이름을 교묘하게 끼워넣고 140行의 장시(長詩) [나는 빈 들에 외치는 소리]라는 詩로 저주를 퍼붓다니 그래 이것이 미치지 않고 정상적인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냐?“

”..............................“

김상종은 더 이상 저에게 항의하지 못 했습니다. 며칠 후에 그는 상기된 표정으로 제 앞에 나타났지요.

“형 나는 그저께 곽분이가 [대방동 시립부녀보호소]에서 퇴근하기 전에 그녀집에 가서 가정부에게 곽분이 심부름을 왔다고 속이고 그녀방에 들어가 일기장을 훔쳐내다 다 읽어봤어. 그 일기장을 읽어보니까 울화통이 터져 견딜 수가 없어서 나는 술을 잔뜩 마시고 밤에 외삼촌 방에 들어가 안에서 문을 걸어 잠겄어. 그러고 대들었지."

”'외삼촌, 저는 어제 곽분이 집에 가서 대학노트 5권으로된 일기장을 훔쳐내다 전부 읽어봤습니다. 그 일기장을 흝어보니까 외삼촌이야말로 정말 형편없는 인간이던데 그러면서 왜 우리를 철저하게 속였습니까?' 라고 대들었어. 만일 그때 외삼촌이 거짓말을 하면 박치기를 하려니까 벌벌 떨면서 사실대로 대답하더라.”

“내가 처음 실수했을 때(노연태의 부인 권정님과의 간통사건) 모든 것을 털어놓고 용서를 빌었어야하는 건데 그럴 용기가 없어서 못 하고 거짓말로 덮었어. 그러다가 또 실수하게 되니까 더 큰 거짓말을 하게된 거야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세상을 속이면서 살아왔다."

외삼촌, 당신이 김동길 박사가 평한 것처럼 괴테같은 천재인지는 몰라도 초인(超人)은 아니었어요.

왜냐하면 새파란 외조카 김상종의 박치기 협박에 벌벌 떨면서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세상을 속이면서 살았다.’고 고백했으니 말입니다.

김상중은 그 후에 캐나다에 이민 가서 잘 사는 줄 알았는 데, 뜻밖에 부음이 날아왔습니다. 가족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밤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냉장고에서 위스키병을 꺼내 병채로 마시곤했다고 그럽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그가 왜 그랬는지, 그 마음을 알 것 같습니다. 김상종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당신을 하늘이 내려보낸 인물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지요. 그런데 그렇게 믿었던 함석헌이 다른 여자도 아니고, 제가 사귀던 곽분이 집에 가서 누워 『씨알의 소리』에 실릴 원고를 읽어주면 그녀는 당신의 바지를 벗기고 생식기를 빨아주고,

‘오늘도 나오지 않는 그의 바나나물을 빨아 먹었네.’

라고 일기에 쓴 것을 보고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을 겁니다. 저는 곽분이 일기장을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김상종보다 먼저 읽어본 유창현과 전덕용으로부터 한 번 들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저는 일기보다 더 생생한 곽분이의 고백을 - 1964년 겨울 선혜학원 (강원도 간성면 선유실리) 박정순이 (이대 국문과) 옆자리에 있는 곳에서 함석헌에게 강간당했다고 통곡으로 하는 소리 - 를 1965년 여름에 들었습니다.

함석헌 문제로 제일 처음 제가 찾아가 상의한 사람은 당신의 오랜 신앙동지인 송두용 선생, 그는 저에게 이렇게 충고 했습니다.

“조군이 함선생에게 대들겠다면 나는 말릴 수없지만, 그것은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만큼이나 무모한 짓일 거요.”

그로부터 자그마치 58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간 지금, 바위가 깨졌나 계란이 박살났나를 판별하는 것은 독자들의 몫입니다. 이것은 저의 창작소설이 아니고, 제가 직접 보고 들은 사실이기 때문에 당신에게 강간당한 피해 여성들의 이름까지도 전부 실명으로 표기했습니다.

그것은 털끝만큼도 그녀들의 부끄러움이 아니고, 그런 짓을 하고도 평생 동안 성자연하면서 세상을 속이다가 『용서를 빕니다.』는 대국민 쪽지 한 장 남기지않고 떠난 함석헌 당신의 죄상을 밝히기 위해서 입니다.



외삼촌, 하늘나라에서 거짓 짐을 벗어버리고 영면하소서.



2023년 2월 6일 당신의 외조카 조순명 아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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