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6/18

Ki-Sang Lee - 정대현 1. 세계철학의 길목에 놓인 한국철학

(1) Ki-Sang Lee - 정대현 1. 세계철학의 길목에 놓인 한국철학 비판적 대화를 회피하는 철학계 음미를 강조한... | Facebook

Ki-Sang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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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현 1. 세계철학의 길목에 놓인 한국철학

비판적 대화를 회피하는 철학계

음미를 강조한 정대현 선생의 집필 방식을 이해하면서도 나는 나의 경험을 소환해서 한국 철학계의 학술토론의 모습들을 기술하고자 한다.
시작부터 정대현 선생은 이 책이 현대한국 철학자들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한국의 학자들은 비판과 평가에 민감하다. 오랜 외국유학생활을 한 뒤 귀국해서 강단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학회에 나가서 발표를 하고 논평을 하면서 가장 신경이 쓰인 부분이 바로 이 점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자신의 발표에 대해 비판적인 질문이나 논평을 하면 그것을 자기 개인에 대한 ‘평’ 또는 ‘비판’이나 ‘공격’으로 이해한다. 유럽이나 미국에서 공부한 사람들은 거기에서는 학술토론이 얼마나 치열하게 펼쳐지고 있는지 잘 알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경험을 한 사람들도 비판이나 평가에 대해서는 알레르기성 반응을 보인다. 사실 이것이 한국 학술계의 발전을 막는 가장 큰 요소의 하나이기도 하다. 장유유서(長幼有序) 따지고 학교나 학번 선후배 관계 고려하고 친구관계 염두에 두며 ‘예의바르게’ 질문이나 논평하려면 제대로 된 학술 대화와 토론이 가능하지 않다.
 
나는 이런 풍토에 익숙하지 못해 내가 독일서 익힌 대로 질문과 토론, 논평을 했다. 인사치례 없이 바로 논점으로 들어가 쟁점을 가지고 논쟁을 펼쳤다. 이런 나의 학술태도는 강의와 세미나 때도 그대로 전개되었다. 그래서 나는 외대 철학과에서 가장 무서운 선생으로 알려졌다. 내 별명도 거기에서 유래된다. <시베리아>, <게슈타포> 등이 그것이다. 나는 처음에는 학생들의 시험도 구두시험으로 보았다. 눈을 마주보며 질문을 하고 그 대답을 들으면 상대방이 그 주제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가장 잘 알 수 있다. 질문의 답에 대해 두세 번의 “왜 그렇게 생각하지요?”라는 물음을 던지면 상대방의 이해의 깊이를 즉시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3-4년을 진행하다가 구두시험을 포기하고 필기시험으로 바꿨다. 그렇게 한 이유는 졸업반 학생들 중 몇몇이, 이 시험 통과 못하면 지금 취직하기로 되어 있는 회사에 들어갈 수가 없고 그러면 이런저런 집안의 문제가 생긴다며, 막말로 마구 떼를 쓰는 바람에 내 신조가 흔들리는 것을 나 스스로 느꼈기 때문이다.
 
다른 대학 박사과정 논문심사에 참여한 적도 꽤 있다. 하이데거나 현상학 관련 논문을 쓴 박사과정생의 논문심사이다. 그런데 그 당시 이런 논문심사의 상대는 대개 다른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학위 없는 교수들이다. 그러니 보통의 경우는 매몰차게 심사를 진행하지 못하고 웬만하면 통과시키는 것이 관례다. 그런데 나는 그런 관례를 참고 넘길 수가 없었다. 내 이름이 심사위원으로 들어가는 한, 박사학위 논문이 어느 정도의 학술성은 갖춰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꼼꼼하게 심사를 진행하는 바람에 몇 학기씩 학위논문 통과가 늦어져서 학위를 늦게 받은 분들이 있다. 그래도 그렇게 어렵게 논문통과를 해서 학위를 받은 교수 중에, 이 논문심사를 통해 제대로 공부하며 연구하게 되었다고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분이 계셔 나로서는 보람을 느꼈다. 어쨌거나 그런 이유로 나는 다른 대학에서 논문심사 부탁이 들어오면 가능한 한 정중하게 거절했다. 소수의 철학도들이 내 심사를 통과했는데, 그 분들은 내가 나름 일정부분 지도를 했다고 자부할 수 있다.

알고 보면 보이게 보이지 않게 대학사회에 이런 박사학위 논문심사를 둘러싼 잡음이 많았다. <품앗이>라는 표현이 여기서도 어느 정도 통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알리라. 원정 박사학위 논문심사에는 후한 보답이 뒤따른다. 박사논문 지원자는 과도하게 책정된 논문심사비 외에도 외부 심사자의 교통비와 식비, 숙박비까지 지불해야 한다. 그래서 많은 교수들이 아주 즐겁게 이 과정에 참여한다. 나도 제자들과 동료 교수들로부터 이런 못된 관행으로 지방대학의 박사학위 후보자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큰돈을 쓰고 있다는 불평을 들어 알고 있다. 독일은 이런 면에서는 그야말로 천국이다. 나는 논문심사를 위해 돈을 낸 기억이 없다. 이런 못된 관행이 지금은 없어졌는지 궁금하다.

이렇게 한국의 철학계는 알게 모르게 끈적한 인연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논평의 기회가 왔을 때, 솔직하게 학술적으로 비판적으로 논평을 했다가는 그것이 그 사람에 대한 공격으로 읽히고, 그래서 두 사람은 아주 껄끄러운 사이가 되기도 한다. 한번은 학술대회에서 어느 연륜이 있는 교수의 발표에 대해 비판적인 논평을 했다가 대회 진행교수로부터 질책성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 두 교수는 같은 대학 선후배 관계로 얽힌 사이였다. 주제에 대한 논쟁에서 벗어나 인신공격성 발언까지 비화되기도 한다.
 
한국 철학계에 널리 퍼진 관행의 하나는 다른 동료학자들의 연구결과물인 논문이나 책을 무시하는 태도다. 아예 관심을 표시하지 않는 것이다. 거기에는 지금의 학술진흥재단[한국연구재단]의 연구진흥 정책에도 책임이 있다. 진흥재단이 교수들의 연구업적을 평가하는 잣대를 가지고 있고 연구비지급을 시행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교수들이 연구 주제선택과 연구방법, 그리고 논문발표 형식에까지 재단의 정책에 따라야 한다. 이제는 연구비를 따기 위해 학술논문을 쓰는 기이한 풍토가 조성되고 있다.
나도 오래전이긴 하지만 신청논문 심사에 참여해서 알지만 거기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교수들이 대부분 자기 전공분야와 그 인접분야에 관심을 두고 그런 주제에 선심성 평가를 내린다. 창의적 주제, 새로운 문제의식이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심사시스템이다. 나는 ‘우리말 철학사전’을 위한 연구기획을 제출했다가 연구지원에서 탈락한 경험이 있다. 한국적 인문학으로서의 <생명학> 정립을 위해 ‘생명학회’를 창설해서 김지하 시인과 함께 한국적 생명사상에 대한 다년도 연구기획을 올렸다가 그것도 탈락했다. 나는 철학계의 ‘이단아’이다 보니 연구지원에서는 주목을 받지 못했다.
 
서양철학중심의 철학사가 아닌 “세계철학사”가 요구된다

정대현 선생의 『한국현대철학』이 철학사와도 밀접하게 연관되니 <철학사>의 문제를 한번 짚어보자. 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한국철학’이 제대로 된 궤도에 오르기 위해서는 <한국철학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유럽에서 오래 공부하면서 내가 수집한 책 가운데는 ‘철학사’와 관련된 책이 많았다. [처지 곤란한 책들을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없어서 어떤 책들을 모았는지 지금은 알 수가 없다.] 나의 관심을 끈 것은 독일 철학자가 쓴 ‘서양철학사’, 프랑스 철학자가 쓴 ‘서양철학사’, 영국 철학자가 쓴 ‘서양철학사’가 그 내용이 많이 차이가 난다는 점이었다. 특히 <현대철학>에 관련된 부분에서 말이다. 서양철학의 전통을 ‘현대’인 오늘날 이 현대를 사는 철학자들이 어떻게 소화하고 체계화했는지가 바로 여기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그래서 바로 현대를 사는 ‘한국의 철학자’가 이 현대를 살아가며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철학의 전통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며 나름대로 자신의 철학적 문제로 만들려고 노력했는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한국 철학자가 쓴 『세계철학사』를 발견하고 감격에 겨워 무릎을 쳤다. 서양인이 쓴 <세계철학사>라는 것이 있긴 하지만 그것은 ‘전 세계의 철학’을 아우르기에는 너무나 조악했다. 한스 요아킴 슈퇴리히가 쓴 <세계철학사>가 그런 책 중 하나다. 마르크스와 레닌의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추종하는 운동권 세력이 학술계를 휩쓸었을 때는 소련[러시아]에서 나온 <세계철학사>가 잘 팔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제2세계의 관점에서 쓰여진 일방적인 세계관과 역사관 아래 집필된 책이다. 러시아를 비롯한 몇몇 사회주의 국가에서만 읽히고 있는 이 책들이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널리 선전되고 있는 것을 보면 그저 의아할 따름이다.
 
이제는 우리의 학문풍토도 이런 서양철학 수입상 노릇을 때려치울 때가 되었다. 지구촌 시대, 문화다양성의 시대 제3세계적인 철학사관을 가진 철학사가 집필될 때가 되었다. 서양철학자들은 자신들의 철학적 유래는 알지만 그 외 문화권에 대한 철학적 유래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하다. 지구촌의 70%가 제3세계의 문화권임을 감안한다며 이런 시대에 걸맞는 안목을 갖고 <세계철학사>가 쓰여져야 하는데, 이런 과업을 달성할 수 있는 철학자는 더 이상 서양철학자가 아니다. 바로 동서양을 아우르는 철학적 이해의 지평을 가진 “글로벌 철학자”여야 한다. 그런 철학자로 사실 한국철학자가 가장 적격이다. 서양 흉내내기가 아닌 주체적이며 동시에 글로벌한 문제의식만 갖고 있다면 말이다.
 
내가 이정우 선생이 출간한 두 권의 <세계철학사>를 보고 감격한 이유다. 이 책도 별 주목을 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저자인 이정우 선생이 철학계의 ‘이단아’이기 때문이다. 어느 대학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가 도저히 강단철학의 비뚤어진 관행을 좇아갈 수 없어 남들이 오매불망 열망하는 교수직을 내던지고 <철학아카데미>를 개설하며 재야철학자로 변신했다. 대학생과 일반인들을 위한 강의를 개설하여 철학의 지평을 넓히며 오랫동안 연구한 결실을 두 권의 <세계철학사>로 내놓았다. 머지않아 마지막 완결판인 <세계철학사 3>이 출간되기를 기다린다.
 
이정우 선생은 “서양 중심의 철학사관”을 벗어던져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서양 중심의 세계관이 퍼뜨리고 있는 온갖 폐해가 지구촌을 위기로 몰아넣고 있는 현금 이제 새로운 세계관도 필요하고 새로운 인간관, 새로운 신관도 필요하지 않는가! 지구촌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철학을 시도해야 하지 않겠는가!
 
정대현 선생의 『한국현대철학』이 이정우 선생의 『세계철학사』와 만나 세계철학계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나가기를 기원한다. 한국의 철학자들이 지구촌 시대에 자신의 세계철학사적 역할이 무엇인지 눈을 크게 뜨고 사유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도한다.

긔림: <2008년 세계철학대회 준비모임>, 니니안 스마트의 <세계 사상사>, 이정우의 <세계철학사 2>, 러시아판 <세계철학사>
(2025.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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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uCheol Park
공유합니다 교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