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6/06

러시아적 인간 이즈쓰 도시히코 + 한글 서평

러시아적 인간 : 알라딘


러시아적 인간 
이즈쓰 도시히코
 (지은이),최용우 (옮긴이)글항아리2023-11-06






























 10.0 100자평(0)리뷰(1)

392쪽

책소개

19세기 러시아 문학은 하나의 세계적 현상이었다. 저자는 한 세기 전에 이미 오늘날의 사상적 문제를 제기했던 러시아 문학이 일반적인 문학사와는 다른 관점에서 재검토돼야 한다고 본다. 현상적인 격변 너머에 있는 영혼의 러시아, 이념이나 추상물이 아니라 ‘살아 있는 구체적인 것’으로서의 러시아를 파고들어 ‘러시아적인 것’을 밝혀내는 것이 바로 이 책이 쓰인 이유다.

세계문학의 반열에 오를 만한 작품이 러시아에서는 19세기 푸시킨에 이르러 처음 등장했다. 그때까지 4류, 5류를 벗어난 작가를 배출한 적이 없는 이 나라의 문학은 모두 19세기의 도약을 위한 발판이거나 영양분이 되었을 뿐이다. 그러다가 푸시킨이 평지돌출한 후 체호프에 이르기까지 러시아에서는 한 세기 내내 거인들이 탄생했다.


목차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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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영원한 러시아
제2장 러시아의 십자가
제3장 모스크바의 밤
제4장 환영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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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푸시킨
제6장 레르몬토프
제7장 고골
제8장 벨린스키
제9장 튜체프
제10장 곤차로프
제11장 투르게네프
제12장 톨스토이
제13장 도스토옙스키
제14장 체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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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옮긴이의 말
참고문헌


책속에서

P. 19 러시아인과 러시아의 자연, 러시아의 흑토는 피로 맺어져 있다. 이것이 없다면 러시아인은 그 무엇도 될 수 없다. 서구적 문화에 대한 러시아인의 끈질긴 반역은 여기서 비롯된다. 문화의 필요성을 몇 배로 민감하게 느끼고 문화를 열망하는 한편 이를 증오하고 반역할 수밖에 없는 이들의 태도는 러시아 특유의 것이다. 이와 같은 국가에서 사람들은 서구 문화나 휴머니즘에서 행복을 찾을 수 없다.  접기

P. 30~31 러시아인에게 조화를 향한 동경은 일종의 병적이며 광적일 만큼 격렬한 정열이다. 하지만 러시아 정신의 부조화가 독특한 부조화의 일종이었듯이, 그것이 추구하는 조화 역시 단순한 조화가 아니다. 러시아인은 스스로 그 특수성을 의식하고 이를 ‘러시아적 해조諧調’라 이름 붙였다.
이 러시아적 해조를 의식적으로 탐구한 최초의 사람은 시인 푸시킨이었다. 그로 인해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적인 문학으로서의 러시아 문학이 시작되었다. 궁극의 해조, 마지막 조화를 탐구하는 일이 푸시킨 이후의 19세기 문학계에 있어서 가장 큰 과제였다. 러시아 문학 전체는 이 근원적인 테마를 중심에 두고 주위를 에워싸듯 전개되었다.  접기

P. 48~49 푸시킨 이전의 고문학 중에서 거의 유일한 문예작품인 『이고리 군기』가 러시아 민족의 참담한 패배 감정을 서술한 사시史詩라는 사실도 마치 민족의 역사를 상징하는 것 같지 않은가. 이렇듯 러시아 문학은 패배에 대한 찬미에서 비롯되었다. 다른 민족들은 고대 문학을 장식하는 서사시에서 각자 민족적 영웅의 용맹함을 칭송하고 이민족에 대한 자신들의 승리를 자랑스럽게 노래했던 반면, 러시아에서는 자신의 패배를 노래했던 것이다. 따라서 관점에 따라 19세기 문학의 주인공 대부분이 ‘패배의 인물’이었다고 봐도 조금도 이상할 게 없다. 사실 오네긴, 페초린, 오블로모프 등 도스토옙스키의 주인공들과 체호프, 가르신의 주인공들뿐만 아니라 혁명기에 이르는 19세기 문학은 수없이 많은 패자와 실의에 빠진 사람들로 차곡차곡 채워졌다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하지만 이는 19세기에 갑자기 생긴 우발적 현상이 아니라 그 배후에는 수백 년에 걸친 기나긴 역사가 있었다. 바로 이 역사의 시초가 된 것이 13세기 초 타타르인의 침공이었다.  접기

P. 84 하지만 이 음울한 면모는 페테르부르크의 단면에 불과하다. 페테르부르크에는 이와 전혀 다른 밝은 측면이 있었으나 도스토옙스키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푸시킨은 그러한 양쪽 측면을 전부 인지했다. 오직 푸시킨만이 ‘러시아적인 존재’의 모든 것을 보편적 정신으로 관조했다.

P. 104 푸시킨은 세계문학을 향한 러시아의 과감하고 화려한 도전이었다. 이제껏 세계적인 견지에서 봤을 때 4류, 5류 이상의 작가를 배출한 적이 없는 러시아 문학계에서 그의 등장 이후로 일류 작가들이 연속으로 배출되었다는 사실만 봐도 우리는 이를 단순한 우연의 일치라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러시아인은 종종 푸시킨을 불꽃이나 별똥별에 비유하곤 하는데, 사실 그가 러시아의 정신적 밤하늘을 눈부시게 비춘 것은 한순간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 별똥별이 묘한 빛의 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지평선 너머로 사라짐과 동시에, 마치 이것이 신호탄이 되어 무언가 마법의 입김이라도 불어넣은 것처럼, 이제껏 암흑 속에 잠들어 있던 러시아 문학계가 활기를 띠며 술렁이기 시작했다.  접기

P. 169~170 고골에게는 구성적인 정신력이란 게 전혀 없었다. 소설이나 희극의 소재라면 남에게 받지 않고도 남아돌 정도로 지니고 있었지만, 이러한 재료의 과잉을 도대체 어찌 풀어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이는 전혀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버렸다. 모순되고 뒤죽박죽인 소재들을 하나의 주제로 묶으면서 자연스럽게 완성된 작품으로 만들어나가려면 투철한 지성적 구상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측면에 있어서 고골은 마치 어린아이와 같았다. 그는 천재였지만 상당히 한쪽으로 치우친 천재였다. 스스로도 감당이 되지 않을 정도로 항상 어딘가 엇박자가 나면서 균형이나 평형을 전혀 유지할 수 없었다.  접기

P. 207 ‘위험인물’인 벨린스키는 1848년 37세 한창인 나이에 비참한 죽음을 맞았으나 그의 정신은 그 시대에서 압도적인 승리의 개가를 올렸다. 동시대는 물론 향후 세대에 있어서도 그의 승리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벨린스키적 정신의 승리란, 요컨대 ‘산문’정신의 승리에 다름 아니었다. 순수하게 일의적으로 예술적 미를 추구하던 시가는 문학의 왕자에서 쫓겨났으며 이제 소설가나 시인 등의 문학자는 무엇보다 먼저 시민이어야 했다. 따라서 당시 작가들은 그들이 속한 사회와 시대 상황을 직시해야 했으며, 현실에 초연한 듯 ‘작은 새의 지저귐’ 운운하며 자기만족에 안주해서는 안 되었다. 그 역시 시대적 관심에 귀를 기울이며 역사적 현실에 자신의 문학을 녹여내야 했다.  접기

P. 247~248 푸시킨의 시와 더불어 사라진 서정적 조화의 빛은 잠시 사람들 사이에서 모습을 감췄다가 어느 날 문득 생각이라도 난 듯 투르게네프의 영혼을 통해 다시 점화되었다. 하지만 푸시킨의 보석과 같은 견고하게 결정화된 서정시의 형태가 아닌 대하 소설 형태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 푸시킨적 서정성이야말로 투르게네프 문학의 본질적 정신이자 최대 매력 포인트였으며 이는 투르게네프를 세계문학에서 부동의 위치를 보장해주었다. 투르게네프는 부조화의 나라인 러시아에서, 심지어 모든 것이 모순되고 상극인 형상으로 광분하던 19세기를 살면서도, 홀로 온화하게 서정적 망상에 취할 수 있었던 예술의 나라의 은자였다.  접기

P. 309 하지만 이 위대한 자연적 인간에게는 ‘사색’ 중독이라는 무섭고 안 좋은 버릇이 있었다. 그의 특기인 ‘사색’이 시작되는 순간 그는 소심하고 불쌍한 남자가 되어버린다. 방금 전까지 그렇게 행복해하던 남자가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병적인 공포심이 그를 사로잡고 참을 수 없는 죄의식이 그를 책망한다. ‘자신의 앞에 더 이상 파멸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전율한다._  접기

P. 366 체호프는 다르다. 그는 위대한 19세기 문학의 정통 계승자이자 마지막 대표자였다.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에 비하면 규모는 작을지라도 그의 예술은 ‘진짜 보석’이었다.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보다 더 순수한 예술이었다. 모든 측면에서 월등한 19세기 문학을 편력하다가 마지막에 체호프에 다다랐을 때 우리는 무언가 ‘예술의 나라’로 돌아간 듯한 고요함과 안정감에 안도하게 된다.  접기

P. 30 이반 카라마조프는 ˝인간의 영혼은 정말로 광활하다. 정말이지 엄청나게 광활하다. 가능하다면 살짝 작게 만들고 싶을 정도다!˝라고 말했다. 이건 지성이나 이성만으로 해석할 수준의 것이 아니다. 이들 영혼에는 우주의 바람이 깃들어 있으며 이 엄청난 모순덩어리는 디오니소스적 성격을 보인다. 그렇기에 디오니소스의 불가사의한 외침을 가슴으로 직접 느껴본 사람만이 이를 이해할 수 있다.  접기 - 로쟈



추천글

우크라이나 전쟁은 무엇을 위한 싸움인가? 전쟁을 끝낼 방책은 없을까? 러시아인의 사고와 정신을 읽을 실마리를 찾다가 손에 쥔 한 권이 이 책이다. 저자는 동양사상과 언어철학을 전공한 세계적 학자로 알려져 있다. “세계사의 중심에 선 오늘날의 러시아는 그 괴물 같은 모습을 스멀스멀 드러내고 있다.” 이 책의 첫머리를 읽으면 마치 현재 상황인 듯 착오가 일어나 갑자기 빨려든다.
- 산케이 신문 

푸시킨, 고골,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체호프……. 광대한 변경의 땅에 19세기에 왜 유례없는 걸작의 숲이 한꺼번에 생겨났을까. 작가들 혼의 봉우리를 종주하며, 서구와는 다른 괴물적 인간관, 신앙과 구원, 자연, 폭력, 어둠의 사상의 근원을 찾아내기 위해 격투한 기록이다.
- 마이니치 신문 

저자 및 역자소개
이즈쓰 도시히코 (井筒俊彦) (지은이)

아랍어, 페르시아어,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러시아어, 그리스어 등 30개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해 ‘언어 천재’라 불린 언어학자다. 그리스 철학, 스콜라 철학, 러시아 문학, 언어학, 이슬람학, 힌두교, 불교, 도교, 노장사상, 주자학 등 여러 분야에서 강의 및 저술활동을 하며 동서양 모든 철학을 횡단 연구하는 통섭의 철학자로 잘 알려졌으며, 번역가로도 활동했다. 게이오대학, 캐나다 맥길대학, 이란 왕립철학아카데미 교수를 지냈고, 스위스 에라노스 회의에서 노장사상과 선·유교 등 동양철학을 강연했다.
1949년부터 시작한 연속 강의... 더보기

최근작 : <러시아적 인간>,<이슬람 문화>,<의식과 본질> … 총 52종 (모두보기)

최용우 (옮긴이)

게이오대학 문학부를 졸업하고 고려대 중일어문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연세대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옮긴 책으로 『어른의 조건』 『도쿄 최후의 날』 『어느 하급장교가 바라본 일본제국의 육군』 『인구가 줄어들면 경제가 망할까』 『인간의 영혼은 고양이를 닮았다』 『페퍼로드』 『내 주위에는 왜 욱하는 사람들이 많은 걸까?』 등이 있다.



출판사 제공 책소개

러시아 문학에서는 하루 종일 빛이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한 방의 내음이 느껴진다

월등한 무사태평, 자유에 대한 갈망, 극심한 원한, 열광적인 신앙
러시아인은 자연 및 흑토와 피의 연결 고리를 가지고 있다
그게 없다면 러시아인은 아무것도 아니다

러시아적 인간이란 무엇인가

“전 세계가 주목하고 귀를 곤두세우고 있다. 러시아는 과연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 과연 무슨 말을 할 것인가. 그 일거수일투족이 일으키는 파동은 순식간에 전 세계 구석구석까지 뻗어나가며 곳곳에 파란을 일으킨다. 세계사의 중심에 선 오늘날의 러시아는 그 괴물 같은 모습을 스멀스멀 드러내고 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괴물 주변으로 무수한 사람이 모여 시끌벅적 미친 듯이 떠들어대는 모습은 마치 스타로브긴을 둘러싼 ‘악령’의 세계가 그대로 현실이 되어 출현한 것만 같다.”

이것은 1953년에 초판이 출간된 이 책의 첫 단락이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일본에서 스테디셀러로 읽혀온 『러시아적 인간』은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독자들의 주의를 끌었다.
19세기 러시아 문학은 하나의 세계적 현상이었다. 저자는 한 세기 전에 이미 오늘날의 사상적 문제를 제기했던 러시아 문학이 일반적인 문학사와는 다른 관점에서 재검토돼야 한다고 본다. 현상적인 격변 너머에 있는 영혼의 러시아, 이념이나 추상물이 아니라 ‘살아 있는 구체적인 것’으로서의 러시아를 파고들어 ‘러시아적인 것’을 밝혀내는 것이 바로 이 책이 쓰인 이유다.

세계문학의 반열에 오를 만한 작품이 러시아에서는 19세기 푸시킨에 이르러 처음 등장했다. 그때까지 4류, 5류를 벗어난 작가를 배출한 적이 없는 이 나라의 문학은 모두 19세기의 도약을 위한 발판이거나 영양분이 되었을 뿐이다. 그러다가 푸시킨이 평지돌출한 후 체호프에 이르기까지 러시아에서는 한 세기 내내 거인들이 탄생했다.

무엇이 러시아인들을 움직이게 하는가? 이것은 러시아적인 것의 본질을 찾고자 19세기 작가들을 읽으면서 저자가 놓지 않은 단 하나의 질문이다. 러시아 문인들이 품고 있는 묵시적·종말적·절망적 세계관과 부활·신세계·구원을 희구하는 마음…… 양쪽으로 요동치는 과정에서 야기되는 비극의 역사. 그것이 왜 러시아에서 일어나는가를 인간미 넘치는 문체로 하나하나 예를 들며 이야기한다. 즉 독자들은 문학을 통해 러시아를 분석적으로 읽을 수 있고, 이로써 인간을 바라보는 깊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아랍어, 페르시아어,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러시아어, 그리스어 등 30개 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해 ‘언어 천재’라 불린 학자다. 그리스 철학, 스콜라 철학, 러시아 문학, 언어학, 이슬람학, 힌두교, 불교, 도교, 노장사상, 주자학 등을 연구한 통섭의 철학자로도 잘 알려졌다.
총 14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 1~4장에서 이민족에게 오랫동안 지배받은 러시아인의 정신사 형성의 흐름을 부감한다. 
  • 5장부터는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효시라고 평가받는 푸시킨부터 대미를 장식하는 체호프까지 총 11명의 작가론을 전개한다. 
총론과 각론을 통해 ‘러시아적 인간’의 윤곽을 드러내는 짜임새 있는 구조다.

전 시대를 발판 삼은 100년 문학의 정수

19세기 러시아 문학 거장들의 면모를 크로키해보자. 
  • 안으로는 세계로 통하는 섬세하고 평온한 부드러움을 띠고, 밖으로는 소용돌이치는 격정과 열정을 내뿜는 작가이자 러시아 문학의 원천인 푸시킨
  • 푸시킨이 결투를 벌여 죽었을 때 그 죽음을 홀로 애도했으나, 시인으로서는 격정적이면서도 냉담한 면모를 보여 미움받은 레르몬토프
  • 순러시아적 토착 문학을 썼고, 사람 좋다는 평을 얻은 고골.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의 선조 격이며 누구도 뒤따라올 수 없는 문예비평 안목으로 후세 작가들을 찾아낸 벨린스키. 
  • 시대의 주류가 산문으로 옮겨갈 때 세계 존재의 어두운 근원을 들여다보는 시를 써 도드라진 튜체프.
  •  러시아적 잉여 인간인 오블로모프를 창조해 역사에 이름을 남긴 곤차로프. 
  • 그 자신은 사회비평을 목표로 한 듯하지만 정작 미학적이고도 아름다운 서정적 문장으로 두각을 나타내며 푸시킨을 계승한 투르게네프. 
  • 걸핏하면 불끈 성을 내지만 영원한 세계를 봤고, 그 종교적 구원의 이야기를 흥분과 감격의 문장으로 담아낸 거인 도스토옙스키
  • 본질은 오직 자아만을 추구해나간 에고이스트이나, 작품에 자아의 모든 것을 표현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 거장 톨스토이. 
  • 푸시킨을 닮은 명징한 예지의 문체로 도스토옙스키처럼 인간과 그 구원의 가능성을 찾은 체호프…….

더욱이 이 책은 문학적 분석에 그치지 않고 문학에서 역사와 이들 정신의 심연까지 길어올린다는 것이 특징이다. 저자는 러시아인 고유의 정신을 다음과 같이 보고 있다. 
  • 첫째, 어둡고 음울하며 광대하고 혼돈스러운 자연을 정신적 고향으로 여기며 깊은 애착을 갖고 있다. 
  • 둘째, 타타르에게 유린당하고 학대받은 300년 세월의 깊은 각인으로 여전히 자신들은 “괴롭힘당한 사람들”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 셋째, 따라서 학살당한 인간 예수에게 체감적 공감을 한다. 
괴롭힘당한 자신들의 신앙이야말로 정통이고, 그래서 러시아인들은 세계를 구원할 사명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것을 시대 축에 겹쳐놓으면 다음과 같이 된다. 
  • 우선 타타르 이전의 러시아 정신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타타르의 잔학한 지배 아래 처음으로 ‘러시아 정신’(학대받은 사람들의 일그러진 정신)이 형성됐다. 
  • 타타르를 무력으로 몰아낸 모스크바 공국을 바탕으로 ‘순러시아적 세계’가 성립됨으로써 피지배층에게는 잔학한 난동을 부렸으나 교회와 결탁해 “세계를 구원한다”는 기만적인 꿈을 심어줬다. 
  • 서쪽 창구 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해 세계적 보편성에 뜻을 둔 표트르 대제도 이 ‘메시아주의적’ 세계 구원의 사명감을 계승했고, 이는 훗날 러시아 혁명 정권에까지 이어졌다.

거대한 지하실에서도 환희는 피어난다

19세기 러시아 문학에서는 “종일 빛이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한 방의 내음이 느껴진다”는 것이 저자의 표현이다.
저자가 그리는 ‘러시아적 인간’이란 어떤 부류인가. 
  • 서유럽의 지성적인 문화인들과 비교하면 좀더 뚜렷이 부각되는데, 특히 자연과 맺는 관계가 다르다. 과거 수 세기 동안 서유럽의 문화인에게 있어 원초적인 자연으로부터의 유리는 자기 상실을 의미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를 인간의 자기 확립으로 여겼다. 비합리적인 자연의 카오스를 하나씩 정복하면서 빛과 이성의 코스모스로 향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본분이라 생각한 것이다. 
  • 러시아인들은 정반대다. 그들에게 원초적 자연성으로부터의 이탈은 곧 자기 상실이자 인간 실격을 뜻한다. 러시아인과 러시아의 자연 그리고 흑토는 피로 맺어져 있다. 이것이 없다면 러시아인은 아무것도 아니다. 서구 문화에 대한 러시아인의 끈질긴 반역은 여기서 비롯된다. 
  • 문화의 필요성을 몇 배로 민감하게 느끼고 문화를 열망하면서 동시에 이를 증오하고 반역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월등한 무사태평, 자유에 대한 갈망, 극심한 원한…… 물론 작가들은 작품에서 종종 조화로운 러시아를 그리려고 시도했고, 푸시킨도 그중 한 명이었다. 온화한 빛으로 가득한 평온한 실내에서 문밖의 소란스러움은 느껴지지 않는다. 창문과 문은 전부 굳게 닫혀 있다. 이는 순수한 내면성의 적막이다. 하지만 바깥에서 무서운 폭풍이 불어닥치고 있다. 밖으로는 소용돌이치는 폭풍의 포효, 안으로는 영원한 정적과 아름다운 빛. 이는 단순한 모순이 아니라 디오니소스적 인간의 본질적 구조를 이루는 부분이다. 끓어오르는 정열로 몸도 마음도 남김없이 불태워버리는 디오니소스적 인간의 영혼 중심부에는 이러한 정적 지대가 존재했고, 그것이 바로 러시아적 인간의 내면이다. 그리고 이 불안하고도 불온한 조화는 늘 악령적 힘에 의해 위협받았다.

새로운 작가들의 등장으로 이러한 흐름은 바뀌어간다. 1840년대를 경계로 일반 독자의 요구는 변해 더 이상 시적인 것에 도취되지 않고 일상의 사실적인 것들을 추구해나갔다. 즉 소설의 시대가 도래한 것인데, 니콜라이 고골이 그 선두에 서 있었다. 이전의 푸시킨이 영웅적 자각을 지녔다면, 고골에게는 그런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었다. 그는 자신을 ‘지상의 버러지’라 여겼지만 언젠가 맑은 지하수를 발견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으로 자신의 마음속 토양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이들 일군의 러시아 작가는 신의 얼굴에 절교장을 던지며 골수까지 무신론적인 자아를 발견해나갔다. 벨린스키가 바로 그런 인물이었고, 도스토옙스키는 소설 속 인물 이반을 창조할 때 벨린스키를 모델로 삼았다.
러시아의 무신론은 신에 대한 선천적 원한을 품고 있었는데, 저자는 프랑스 실존주의의 특수한 세계 감각이나 사상적 문제가 매우 러시아적인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고 본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서유럽에서 시작된 현대의 여러 문제는 러시아에서 일찍이 19세기부터 사활을 건 문제로 제기했던 것들이다.
이 책은 체호프에서 끝을 맺는다. 그리고 처음 마주했던 푸시킨의 모습을 여기서 다시 만나게 된다. 
  • 모든 쓸데없는 말을 배제하고 남은 단순함, 
  • 내적인 흥분이 고양될수록 외적으로 더 냉정하고 침착해지는 문체,
  •  깊은 감동을 안에 감춘 채 눈곱만큼도 보여주지 않는 억제의 예술. 
이러한 것은 푸시킨 외에 그 누구도 지니지 못한 시적 특질이었다. 게다가 체호프는 이 훌륭한 시를 산문 형식을 통해 궁극의 한계까지 끌어올렸는데, 이 역시 조용하지만 생생하게 혁명에 대한 예감을 지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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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러시아적인 것 

러시아여, 당신의 이처럼 겸허한 나체 그 밑바닥에
살포시 놓여 있는 반짝이는 무언가를
교만한 이국의 사람은
알 도리 없다, 이해할 도리 없다.

-튜체프(1803~1873)
광활한 땅만큼이나 알 수 없는 나라 러시아.
<러시아적 인간>은 러시아가 낳은 세계적인 작가들과 그들의 위대한 작품들을 분석하여 그 밑에 깔려있는 근본 정신, 즉 러시아적 정신을 찾는 책으로 1953년 처음 출간되었다.

저자는 이즈쓰 도시히코(1914~1993)라는 일본의 언어학자이자 철학가, 번역가로 무려 30개의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해 '언어 천재'라 불렸다고 한다. 철학, 문학, 언어학, 이슬람학, 힌두교, 불교, 노장사상, 주자학 등 여러 분야에서 강의 및 저술활동을 한 세계적인 석학으로 일본에서 처음으로 <코란> 원전을 완역해 출간했다.

이 책은 총 14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장부터 4장은 러시아와 러시아인의 정신을 총체적으로 살펴봄으로써 러시아의 근원을 찾아 나선다. 
5장부터 14장까지는 푸시킨에서 시작하여 체호프에 이르기까지 19세기 러시아의 위대한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을 분석하면서 러시아의 어떤 정신이 이들 작가들을 움직였는지 설명한다.

러시아 정신의 뿌리 깊은 곳에는 13~15세기에 걸친 타타르인의 지배가 자리잡고 있다. 타타르인의 침공은 러시아인을 하루아침에 노예 신세로 만들었다. 바로 이 3세기에 걸친 굴욕과 고난이 러시아인의 정신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했는데, 러시아 민족은 스스로를 '박해받는 자'로 규정하였고, 타타르인의 지배를 받은 300년이라는 시간은 러시아 민족으로 하여금 반역 정신과 묵시록적 관점을 갖게 하였다.

따라서 고통 속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간 그리스도는 이런 러시아 민족에게 특별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고, 그리스도가 사흘 뒤 부활했다는 사실은 언젠가는 자신들의 삶도 희망으로 밝게 빛날 것이라는 믿음이자 약속이었다. 러시아인들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광기에 가까워 도스토옙스키가 말했듯이 '무신론자는 러시아인이 될 수 없다.'

이러한 정신 세계에서 러시아의 기독교는 러시아만의 색채를 강하게 띠게 되었고 '러시아가 세계를 구원할 것이라는 확신'(p.65)으로 까지 확대된다.

이반 3세 시대 드디어 타타르의 지배로부터 벗어난 러시아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인 모스크바 공국으로 새롭게 탄생하는데, 교회와 은밀히 결탁한 차르의 독재에 러시아 민중은 또 다른 형태의 노예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박해받는 자'가 가질 수밖에 없는 묵시록적 환상, 러시아 민족이 전 세계를 구원한다는 망상이 이 시기에 생겨난다.

[러시아인이 스스로를 '최고의 진리'를 받드는 지상 유일의 민족이라 믿고 언제가 러시아를 중심으로 세계가 구원받을 것이라는 독특한 사상(이라기보다 환상)을 갖게 된 것은 타타르 시대 이후인 모스크바 시대의 일이었다. 이러한 민족주의, 국가주의적 세계 구원이라는 메시아 사상에 대한 이해는 러시아 문학뿐 아니라 러시아의 일반적인 현상을 제대로 해석하는 데에도 매우 중요하다. (p.68)]

이로써 타타르 시대 이후 러시아인들은 지위에 관계없이 누구나 종말론적, 묵시록적 관점을 지니게 되었고, 러시아만이 전 세계를 구원할 수 있다는 정신이 러시아인들의 영혼에 뿌리 깊게 자리 잡는다. 드디어 하나가 된 러시아는 강력한 신권정치를 바탕으로 자신을 세계 역사의 주인으로 인식하는데, 이러한 인식은 오랜 세월 이민족의 폭정으로 고통당한 러시아인들의 민족주의와 묵시록적 정신을 더욱 고취시키는 계기가 된다.

1453년 비잔틴 제국이 오스만 제국에 의해 붕괴되자 러시아는 지상에 남은 유일한 그리스 정교 국가가 되었고, 러시아가 세계의 중심이며 구원자라는 믿음은 더욱 확고해져 스스로를 '제3의 로마'라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런 모스크바 정신은 모스크바 공국이 멸망한 후에도 사라지지 않는데, 이는 표트르 대제가 가진 사명, 즉 러시아주의가 곧 세계주의라는 사명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리고 훗날 이 정신은 러시아 혁명으로까지 이어진다.

이상이 푸시킨 이전의 대략적인 러시아 정신사(史)로 저자는 이러한 러시아 정신을 알아야 러시아와 러시아 문학을 이해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나의 이 보잘 것 없는 독후감은 '아 이런 책이 있구나' 정도로 아시고, 러시아 문학을 사랑하시는 분들, 특히 러시아 문학에 나오는 심각하고 묵시록적인 인간들을 이해하고 싶으신 분들은 이 책을 꼭 읽어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나는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며 자꾸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슈테판 츠바이크였다. 순간순간 츠바이크의 글을 읽는 듯한 친숙함이 느껴져 얼굴도 모르는 저자이지만(나중에 찾아봐서 지금은 안다) '30개 언어를 구사하는 대단한 학자가 참으로 러시아 문학을 사랑했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따뜻한 인간미가 느껴져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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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4-01-16 공감(20) 댓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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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적 인간
프로필  하루키  2024. 3. 18. 10:00
https://m.blog.naver.com/kahlill/223370962344

🥀들어가면서  

푸시킨, 고골,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체호프……. 광대한 변경의 땅에 19세기에 왜 유례없는 걸작의 숲이 한꺼번에 생겨났을까. 작가들 혼의 봉우리를 종주하며, 서구와는 다른 괴물적 인간관, 신앙과 구원, 자연, 폭력, 어둠의 사상의 근원을 찾아내기 위해 격투한 기록이다. _마이니치신문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느리지만 천천히 접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러시아 -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푸틴 독재정권의 러시아에 대한 궁금증이 아닌, 러시아인의 근원적 정서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러시아의 역사와 종교, 문학의 관점에서 다룬 『러시아적 인간』의 발견. 기쁩니다.^^ 읽기 시작하겠습니다.☺️⛵

저자는 정치체제나 이데올로기를 초월해 '러시아적인 것의 본질'로서 러시아인의 정신적 근원에 주목했다. _옮긴이의 말

✍내용

저자 이즈쓰 도시히코(1914 ~ 1993)는 30개 이상의 언어를 구사하는 언어학자이자 세계적으로 알려진 동양철학자이자 통섭 철학자입니다. 후쿠자와 유키치상·게이오대 기주쿠상, 마이니치출판문화상, 아사히상과 팔레비 국제상 등을 받았습니다.

​총 14장, 1~4장은 이민족에게 오랫동안 지배받은 러시아인의 정신사 형성의 흐름을 부감합니다. 5~11장은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효시라고 평가받는 푸시킨부터 체호프까지 11명의 러시아 작가론을 전개합니다.
  
🌿 자유와 열광적인 무엇  

💭 13세기 초 러시아는 잔혹한 타타르인의 침공으로 약 300년간 어둠의 역사를 보내는 한편 박해받는 러시아인으로서 자각을 시작합니다. 1480년 이반 3세는 타타르인을 격파하고 민족의 굴욕에서 구출하지만, 주인만 바뀐 형국으로 대다수의 러시아인들은 노예와 같은 삶을 200년간 지냅니다. 500여 년간의 시간들,  

저자는 러시아인 고유의 정신적 기원을 어둡고 혼란스러운 그렇지만 자유로운 자연으로 삼았고, 한편 그리스 정교회의 영향으로 핍박받다 죽은 (인간적인) 예수와 공명해 종말론적 현실과 혁명을 꿈꿉니다. 이러한 모순된 조화는 '신' 아니면 '인간', 아니면 '과학', 아니면 '사상'으로 광적 열광의 변화가 수시로 일어납니다.

​'혁명의 러시아적 이념은 본질적인 구조상 기독교적 묵시록을 무신론적으로 뒤바꿔 생각한 것에 불과하다.' _50p

 이러한 (저자가 말하는) 러시아 정신은 오랜 시간 응축돼 러시아, 나아가 세계를 품은 푸시킨이라는 불세출의 거장을 탄생시킵니다.  

 🌿 전인* 푸시킨  

💭 저자는 푸시킨에 대해 (진정한 의미의) 러시아 문학의 창시자이며, 러시아라는 지역이 아닌 세계를 품은 인간으로 표트르 대제 2세나 나폴레옹과 같은 혁명적 인간이자 전인이라 말합니다. 러시아 문학의 유례없는 대폭발의 기폭제가 됩니다.  

* 전 세계의 모든 훌륭하고 위대한 존재를 마치 처음부터 자신이 품고 있었던 것처럼 아무 어려움 없이 체득해 버리는 지극히 러시아적인 재능이 되는 것, 이러한 재능을 '전인성'이라 하며 이런 천재성을 타고난 사람을 '전인'이라 일컫는다. _89p  

푸시킨 이후 19세기 러시아 문학계에는 거장이 쏟아져 나옵니다.  

🌿 톨스토이 적인 것, 도스토옙스키 적인 것  

💭 우주, 자연의 인간과 나를 탐구하는 망원경의 톨스토이와 심연의 어둡고 깊은 곳의 인간과 나를 현미경으로 탐구하는 도스토옙스키  

▶ 톨스토이의 이교도적 영혼 - 톨스토이는 자연주의에 기반한 자연 체험, 우주적 생명과의 직접적인 접촉이라 할 만한 일종의 기이한 체험이 존재합니다. 나라는 문명화된 의식이 아닌, 자연과 닮은, 일체의 나를 경험할 수 없는 상태(무아의 상태). 저자는 톨스토이의 원초적 무의식 세계관을 강조합니다.  

▶ 도스토옙스키의 기독교적 영혼 - 도스토옙스키는 자연 상실과 사랑의 불능은 파생적인 현상이라고 말합니다. 더 근원적으로 신의 상실이란 문제가 숨어 있다고 말합니다. 잃어버린 신을 탐구하는 것이 인간의 가장 큰 과제이고, 회복하는 과정을 심플하게 '오래된 사람'이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그 길의 끝은 신의 찬가, 자연의 찬가, 사랑의 찬가가 합창을 이루는 것.

​👋감상

러시아 문학에 관심이 있고, 러시아 문학 전반을 조망하고 싶다면, 정말 좋은 책이란 생각이 듭니다. 강추하고 싶습니다.👍

동쪽엔 끝없이 펼쳐진 지독한 추위의 시베리아 벌판, 서쪽엔 광활한 초원과 신비의 우랄산맥, 유라시아를 관통하는 러시아, 흑토(혁명) 위에 핀 검붉은 사파이어(러시아 문학)

#한줄감상

💡사유

인상 깊었던 내용으로는 『오블로모프』가 있습니다. 러시아인에게는 특유의 느긋한 니체보Nichevo(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의미)가 있다고 말합니다. 곤차로프는 니체보와 게으름을 결합시켜 소설 『오블로모프』의 주인공 오블로모프를 창조해 냅니다.  

1850년대 곤차로프는 무기력한 삶, 잉여 인간, 세상에 대한 무관심 등 『오블로모프』를 통해 미래의 새로운 인간 유형을 예언했고, 그의 예언은 현대에 이르러 러시아를 넘어 전세계적 현상이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소름 돋습니다.😱  저자의 비유처럼 러시아 문학은 예언적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

​사족으로, 예전에 시인의 정의에 대해 친구와 이야기를 나눴었습니다. 당시 이런저런 말을 주고받았는데, 진정한 시인은 지식이나 글쓰기 능력이 아닌, 직관(선천)과 그것을 언어로 바꿀 수 있는 능력(재능), 소수의 선택된 자(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닌)만이 될 수 있다고 (저는) 주장했습니다.

​『러시아적 인간』에서 러시아적 인간(보편적 인간)에 대한 찬사로 (러시아어) '추토키chutkiy(민감함)'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러시아적 민감성은 세상(우주)의 모든 것, 만유에 대한 수용성을 의미하고, 이는 마치 처음부터 품고 있었던 것처럼 아무 어려움 없이 모든 것을 체득해 버리는 능력(재능)을 말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추토키(민감함)로 글을 쓰는 사람이 시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덧, 유일하게 등장한 그림 이야기. 도스토옙스키의 『백치』를 통해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II <The Body of the Dead Christ in the Tomb> (1520 ~ 22)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도스토옙스키의 『백치』를 읽은 사람이라면 로고진의 어둡고 암울한 집 안에 걸려 있는 이상한 그리스도 책형도(위의 그림) (중략) ‘나는 저 그림을 보는 게 좋아.’ 로고진은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다시금 자신의 질문을 잊어버린 듯 이렇게 중얼거렸다.  
‘저 그림을!’ 공작은 문득 떠오른 어떤 상념에 사로잡혀 갑자기 소리쳤다. ‘저 그림을 보노라면 오히려 신앙이 사라져버릴 사람도 있을 텐데!’

‘그래서 사라지고 있지.’ 뜻밖에도 로고진은 불쑥 동의를 표했다. (중략) 그림 속에서 이 얼굴은 구타로 인해 퉁퉁 붓고 무섭게 짓이겨졌을 뿐만 아니라 무섭게 부어오른 피멍으로 덮여 있으며, 두 눈은 퀭하니 떠져 있고 동공은 비스듬히 돌아가 있다. 커다랗게 열린 흰자위는 뭔가 생명이 없는 유리알 같은 빛을 반사하고 있다. _36 - 38p

1500년대 초(신은 곧 절대 선이었던 중세) 한스 홀바인은 신성(빛)을 잃은 (인간적인) 그리스도를 그립니다. ㅡ 명백한 신에 대한 불경입니다. ㅡ 하지만 러시아인들은 (최소 도스토옙스키는) 자연스럽게 인간적 그리스도를 수용하고, 자신들의 (러시아 민족의) 현재와 과거의 역사를 투영해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 

20000 총.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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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적 인간상에 나타나는 자가당착을 그저 모순이나 분열로 여겨서는 안 된다. 이는 하나의 줄기에서 생장한 크고 작은 가지에 불과하다. 즉 상층부는 수만 갈래로 흐트러져 복잡한 모양새이지만 그 근간은 하나다. 그렇기에 그 근간을 이해하는 순간 비로소 우리는 현상적 측면의 러시아인을 통일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투체프는 ‘러시아는 평범한 저울로 측정할 수 없다’고 했는데, 이는 어떤 저울로도 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니라 유일하며 특별한 저울이라면 문제없이 측정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따라서 가장 먼저 그 특별한 저울을 손에 넣는 것이 관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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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혁명이란 역사 내부에 있는 ‘종말’이고 시간적 지평에 투사된 묵시록적 환상이다. 하지만 종말은 오래된 질서의 끝이면서 동시에 완전히 새로운 질서의 개시를 의미한다. 이는 고난으로 가득한 현재 세계질서의 종말이면서 동시에 사랑과 평화의 새로운 질서의 탄생이다. 이처럼 영원하며 새로운 행복이 역사가 끝난 이후의 지점에서 생겨날지 혹은 역사가 끝나기 전 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생길지는 신경 쓰지 않는다.

🔖 (보들레르의 '악의 꽃les fleurs du mal', <여행Le Voyage>가 생각나게 한 튜체프의 시!)
​아아 밤의 바다, 너는 어찌 이리 아름답느냐!
이곳은 찬란하게 빛나고, 이쪽은 어두운 감청색,
달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살아 있는 듯한 바다는
걷고 호흡하며 빛을 낸다.

평생 모를 자유의 확산 위에
번쩍번쩍 빛나고 주춤하며 저 멀리 천둥처럼 우렁차게 울려 퍼진다
아련한 달빛을 온몸으로 느끼는 바다여,
인기척 없는 밤의 세계에, 너는 참으로 아름답구나.

거대한 파도, 바다의 너울이여
너는 누구의 날을 축하하고 있는가.
요란하게 빛나는 물결이 다가온다.
잠귀 밝은 별들이 하늘에 흩날리고 있다.

이런 동요 속에서, 이런 반짝임 속에서,
꿈꾸듯 망연히 나는 서 있다.
아 정말이지 기분이 좋다.
이 매혹 속에 영혼이 잠길 수만 있다면.

​(1865년 작품,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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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unipress.co.kr/news/articleView.html?idxno=9511
러시아적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명아 기자 승인 2023.11.25 18:53 댓글 0

■ 러시아적 인간 | 이즈쓰 도시히코 지음 | 최용우 옮김 | 글항아리 | 392쪽

 19세기 러시아 문학은 하나의 세계적 현상이었다. 저자는 한 세기 전에 이미 오늘날의 사상적 문제를 제기했던 러시아 문학이 일반적인 문학사와는 다른 관점에서 재검토돼야 한다고 본다. 현상적인 격변 너머에 있는 영혼의 러시아, 이념이나 추상물이 아니라 ‘살아 있는 구체적인 것’으로서의 러시아를 파고들어 ‘러시아적인 것’을 밝혀내는 것이 바로 이 책이 쓰인 이유다.

세계문학의 반열에 오를 만한 작품이 러시아에서는 19세기 푸시킨에 이르러 처음 등장했다. 그때까지 4류, 5류를 벗어난 작가를 배출한 적이 없는 이 나라의 문학은 모두 19세기의 도약을 위한 발판이거나 영양분이 되었을 뿐이다. 그러다가 푸시킨이 평지돌출한 후 체호프에 이르기까지 러시아에서는 한 세기 내내 거인들이 탄생했다.

무엇이 러시아인들을 움직이게 하는가? 이것은 러시아적인 것의 본질을 찾고자 19세기 작가들을 읽으면서 저자가 놓지 않은 단 하나의 질문이다. 러시아 문인들이 품고 있는 묵시적·종말적·절망적 세계관과 부활·신세계·구원을 희구하는 마음…… 양쪽으로 요동치는 과정에서 야기되는 비극의 역사. 그것이 왜 러시아에서 일어나는가를 인간미 넘치는 문체로 하나하나 예를 들며 이야기한다. 

더욱이 이 책은 문학적 분석에 그치지 않고 문학에서 역사와 이들 정신의 심연까지 길어올린다는 것이 특징이다. 저자는 러시아인 고유의 정신을 다음과 같이 보고 있다. 첫째, 어둡고 음울하며 광대하고 혼돈스러운 자연을 정신적 고향으로 여기며 깊은 애착을 갖고 있다. 둘째, 타타르에게 유린당하고 학대받은 300년 세월의 깊은 각인으로 여전히 자신들은 “괴롭힘당한 사람들”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셋째, 따라서 학살당한 인간 예수에게 체감적 공감을 한다. 괴롭힘당한 자신들의 신앙이야말로 정통이고, 그래서 러시아인들은 세계를 구원할 사명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것을 시대 축에 겹쳐놓으면 다음과 같이 된다. 우선 타타르 이전의 러시아 정신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타타르의 잔학한 지배 아래 처음으로 ‘러시아 정신’(학대받은 사람들의 일그러진 정신)이 형성됐다. 타타르를 무력으로 몰아낸 모스크바 공국을 바탕으로 ‘순러시아적 세계’가 성립됨으로써 피지배층에게는 잔학한 난동을 부렸으나 교회와 결탁해 “세계를 구원한다”는 기만적인 꿈을 심어줬다. 서쪽 창구 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해 세계적 보편성에 뜻을 둔 표트르 대제도 이 ‘메시아주의적’ 세계 구원의 사명감을 계승했고, 이는 훗날 러시아 혁명 정권에까지 이어졌다.


19세기 러시아 문학에서는 “종일 빛이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한 방의 내음이 느껴진다”는 것이 저자의 표현이다. 저자가 그리는 ‘러시아적 인간’이란 어떤 부류인가. 서유럽의 지성적인 문화인들과 비교하면 좀더 뚜렷이 부각되는데, 특히 자연과 맺는 관계가 다르다. 과거 수 세기 동안 서유럽의 문화인에게 있어 원초적인 자연으로부터의 유리는 자기 상실을 의미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를 인간의 자기 확립으로 여겼다. 비합리적인 자연의 카오스를 하나씩 정복하면서 빛과 이성의 코스모스로 향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본분이라 생각한 것이다. 러시아인들은 정반대다. 그들에게 원초적 자연성으로부터의 이탈은 곧 자기 상실이자 인간 실격을 뜻한다. 러시아인과 러시아의 자연 그리고 흑토는 피로 맺어져 있다. 이것이 없다면 러시아인은 아무것도 아니다. 서구 문화에 대한 러시아인의 끈질긴 반역은 여기서 비롯된다. 문화의 필요성을 몇 배로 민감하게 느끼고 문화를 열망하면서 동시에 이를 증오하고 반역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월등한 무사태평, 자유에 대한 갈망, 극심한 원한…… 물론 작가들은 작품에서 종종 조화로운 러시아를 그리려고 시도했고, 푸시킨도 그중 한 명이었다. 온화한 빛으로 가득한 평온한 실내에서 문밖의 소란스러움은 느껴지지 않는다. 창문과 문은 전부 굳게 닫혀 있다. 이는 순수한 내면성의 적막이다. 하지만 바깥에서 무서운 폭풍이 불어닥치고 있다. 밖으로는 소용돌이치는 폭풍의 포효, 안으로는 영원한 정적과 아름다운 빛. 이는 단순한 모순이 아니라 디오니소스적 인간의 본질적 구조를 이루는 부분이다. 끓어오르는 정열로 몸도 마음도 남김없이 불태워버리는 디오니소스적 인간의 영혼 중심부에는 이러한 정적 지대가 존재했고, 그것이 바로 러시아적 인간의 내면이다. 그리고 이 불안하고도 불온한 조화는 늘 악령적 힘에 의해 위협받았다.

새로운 작가들의 등장으로 이러한 흐름은 바뀌어간다. 1840년대를 경계로 일반 독자의 요구는 변해 더 이상 시적인 것에 도취되지 않고 일상의 사실적인 것들을 추구해나갔다. 즉 소설의 시대가 도래한 것인데, 니콜라이 고골이 그 선두에 서 있었다. 이전의 푸시킨이 영웅적 자각을 지녔다면, 고골에게는 그런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었다. 그는 자신을 ‘지상의 버러지’라 여겼지만 언젠가 맑은 지하수를 발견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으로 자신의 마음속 토양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이들 일군의 러시아 작가는 신의 얼굴에 절교장을 던지며 골수까지 무신론적인 자아를 발견해나갔다. 벨린스키가 바로 그런 인물이었고, 도스토옙스키는 소설 속 인물 이반을 창조할 때 벨린스키를 모델로 삼았다.

러시아의 무신론은 신에 대한 선천적 원한을 품고 있었는데, 저자는 프랑스 실존주의의 특수한 세계 감각이나 사상적 문제가 매우 러시아적인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고 본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서유럽에서 시작된 현대의 여러 문제는 러시아에서 일찍이 19세기부터 사활을 건 문제로 제기했던 것들이다.

이 책은 체호프에서 끝을 맺는다. 그리고 처음 마주했던 푸시킨의 모습을 여기서 다시 만나게 된다. 모든 쓸데없는 말을 배제하고 남은 단순함, 내적인 흥분이 고양될수록 외적으로 더 냉정하고 침착해지는 문체, 깊은 감동을 안에 감춘 채 눈곱만큼도 보여주지 않는 억제의 예술. 이러한 것은 푸시킨 외에 그 누구도 지니지 못한 시적 특질이었다. 게다가 체호프는 이 훌륭한 시를 산문 형식을 통해 궁극의 한계까지 끌어올렸는데, 이 역시 조용하지만 생생하게 혁명에 대한 예감을 지니고 있었다.

이명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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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러시아 문학에 감격
이즈쓰 도시히코, 『러시아적 인간』

byENA  May 08. 2024
https://brunch.co.kr/@kwansooko/1124

19세기 러시아 문학은 존재 자체가 거대한 ‘현상’이다. 읽든, 그저 읽지 않든 우리는 그들의 이름에, 그들의 작품에 압도당한다. 일례로 도스토예프스키라는 작가를 배출한 것만으로도 러시아 민족의 존재 가치가 충분하다고 한 이도 있다. 그뿐인가? 그보다 더 유명한 톨스토이가 있다. 그 뒤에는 체호프가 서 있고, 고리키가 있다. 그들 앞에는 투르게네프, 고골이 있고, 맨 앞에 푸시킨이 있다. 이들 작가와 이들의 작품 세계를 한 번에 파악하는 것은 어쩌면 거의 불가능할 것 같아 보인다. 그럼에도 그런 시도는 해볼 만하다. 적어도 그 작품들에 세례를 받고, 깊이 빠져든 지 얼마 되지 않은 젊은 평론가, 학자라면...

이즈쓰 도시히코가 19세기 러시아의 문호들에 대한 책 『러시아적 인간』을 쓴 것은, 1953년 ‘당연히’ 20대 때다. 러시아 문학에 감격했던 시기다. 이들의 세계를 발견하고는 저절로 써졌을 때다. 그 감상과 분석이 나중에 보았을 때 어떠했든 그 젊음의 시각에서 러시아의 문호들의 세계는 감격스러웠던 것이다.

푸시킨, 고골, 투르게네프,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체호프 등(나머지 몇몇 작가들도 포함하고 있지만) ‘위대한 19세기적 러시아인들’에 대해 쓰고 있다. 딱 한 명을 제외하고 있는데, 바로 고리키다. 이즈쓰 도시히코는 고리키가 20세기, 러시아의 현대에 속하는 작가라 제외한다고 밝히고 있다. 갸웃거려지면서도 고리키가 ‘소련’, 즉 소비에트와 맺는 관련성을 생각하면 끄덕여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런데 저자는 단순히 위대한 작가 한 명 한 명을 순서대로 호명하고, 작가와 작가의 작품 세계를 분석하고 있지 않다. 형식보다는 작가들이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특히 인간에 대해 무엇을 발견하였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형상화했는지에 집중하고 있다. 그래서 작품마다 다른 세계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작품 전체를 두고 작가와 그의 세계를 이야기하고 있다. 나아가 이들 19세기의 러시아 작가들을 전체적으로 파악하고 있기도 하다.

이들 가운데는 서유럽 쪽으로 기우는 작가도 있었고, 슬라브주의를 내세운 이들도 있었으며, 자연에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거기서 미래를 보는 이도 있었고, 자연에 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고 도시의 삶에 대해서만 쓴 이도 있었다. 하지만 공통되는 것은 그들은 전적으로 ‘러시아적인 것’을 썼으며, 그것이 ‘세계적인 것’이 되었다는 점이다.

저자는 타타르에 지배당한 300년에 의해 기원한 러시아적 정신이 성립되었다고 본다. 어둡고 혼란스럽고, 종말론적이다. 감수성 짙은 작가들이 이러한 러시아적 정신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러시아적 작가들은 보여주었다. 러시아적인 것을 넘어서 인간 보편에 대해 성찰하고 문제를 제기하였기에 그들은 영원히 남고 있다.

정말로 도스토예프스키를 읽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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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log.naver.com/tnwls6687/223372903312

책리뷰 : 러시아적 인간 - 문학을 통해 읽는 '러시아 정신'
 릿 ・ 2024. 3. 4. 18:41 
각주1NAVER 블로그 
Tell me Quando Quando Quando 
 
또 그 시즌이 찾아왔다. 책을 잔뜩 사 놓고 뿌듯해는 하지만 다 읽지는 못하는 이상한 시즌. 그나마 다른 점을 찾는다면, 그래도 예전에 비해 완독하는 책이 늘었으며 그 책을 읽어야 하는 적확한 이유(?)가 있어 읽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는 것. 특히 요즘 읽고 있는 <러시아적 인간>이 그렇다. 

왜인지는 정말 모르겠지만, 나는 예전부터 이상한 ‘뽕’에 빠져 있었다. 가본 적 없고 겪어본 적 없는 소련에 대한 이유 모를 호감과 아련함이다. 사회 시간에는 공산주의의 실패를 이야기할 때 잠깐 언급되는 정도인데다, 세계사를 선택과목으로 잡고 정확히 공부한 것도 아니면서 그냥 그랬다. 고2 때 야자 시간에 독파했던 <태백산맥>의 영향이려나? 아닐 거다. 무수한 추천 글과 스크린샷으로만 접하며 환상만 키워 온 케이스다. 대체 이 이유 모를 소련을 향한 무조건적인 호기심, 호감(현재 푸틴이 장악한 러시아하고는 선을 긋고 싶다. 소련에도 스탈린 같은 놈들이 있지만 일단 푸틴은 현재진행형이라 더욱 엮이기 싫음)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에 대한 의문을 이 책을 읽으며 살짝씩 풀어나가고 있다.

꽤 오래 전에 쓰인 책인데, 현재까지도 유효한 통찰이라는 점이 놀랍다. 일단, 저자는 19세기에 갑자기 신성처럼 나타난 러시아 문학가들과 표트르 대제 등 러시아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이들을 통해 러시아인 고유의 정신을 분석하고 있다. 첫째, 어둡고 음울한 늪지, 끝없이 내리는 눈으로 뒤덮인 척박한 땅이지만 이러한 자연마저도 본인들의 일부로 여기며 사랑한다. 둘째, 타타르족에게 지배받은 300여 년의 여파로 여전히 자신들은 핍박당했다고 생각한다. 핀란드와 폴란드를 지배한 건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셋째, 그래서 학대당한 인간 예수에게 공감한다. 정교회에서는 그들의 신앙이야말로 정통이며, 러시아인들이 세계를 구원할 수 있고, 그래야 할 사명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즉, 타타르 지배 이전에는 ‘러시아(만의) 정신’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지배 이후 학대받은 사람들의 일그러진 정신이 형성된 것이다. 타타르에게서 해방된 후 세운 모스크바 공국부터 피지배층(백성)에게는 잔혹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정교회와 결합해 세계를 구원한다는 기만적인 꿈을 심어줬다. 아무것도 없던 척박한 늪지에 백성들의 피로 세운 페테르부르크가 이 메시아적, 묵시록적 정신의 대표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정신이 훗날 러시아 혁명(소련) 정권에까지 이어졌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딱 여기까지(4분의 1)만 읽었는데도 막연하게 품고 있던 의문이 해소된 기분. 옳고 그름하고는 상관없이 오만하게까지 느껴지는 저 밑도 끝도 없는 메시아주의에 내가 압도된 것일까? 한때는 본인들 주도의 사상으로 세계를 양분하기까지 한 원동력이 나(우리, 소련, 러시아)만이 세계를 구할 수 있다는 정신에서 나온 혁명 정신이었던 건가. 비장미와 처연함, 이미 사라진 것에서 오는 아련함도?

다시 책 내용으로 돌아가보자면, 작가는 5장부터 푸시킨을 시작으로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체호프는 물론 우리에겐 비교적 생소한 레르몬토프, 류체프 등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후반까지 활동한 러시아 작가들의 작품세계 속에 내재된 러시아 정신을 분석한다. 그 앞의 1장부터 4장까지는 표트르 대제 출현 이전과 이후 러시아의 상황에 비추어 '러시아 정신'이 생겨나게 된 배경을 설명해 준다.
이들은 늘 인류의 미래라든가 세계의 운명처럼 서구적 기준에서 보면 추살적이고 아니꼬운 거대한 문제를 매우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화제로 삼는다. 특히 러시아 문학은 비종교적이거나 반종교적인 작가도 지극히 종말론적 경향을 보인다. 이에 대해 베르다예프는 '러시아의 묵시록'이라고 표현했다. 즉 자신이 세계와 인류를 구해야 하며, 고뇌하는 동포를 위해 구원의 길을 알려줘야 한다는 일념으로 작업한다는 점에서 러시아 문학인의 이상한 예언자적 정열을 엿볼 수 있다. (중략) 그렇기에 러시아 문학에서는 항상 '어떻게 쓰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쓰느냐'에 일차적 의의를 둔다. 

1장. 영원한 러시아. 34~34쪽
혁명의 러시아적 이념은 본질적인 구조상 기독교적 묵시록을 무신론적으로 뒤바꿔 생각한 것에 불과하다. 위대한 '종말'에 대한 끓어오르는 열정과 이상하게 생생한 환영을 내포한 묵시록적 인간이, 더 이상 신의 나라가 도래하길 바라지 않고 인간 왕국의 도래를 희구하기 시작하는 그 순간 러시아의 혁명정신이 생겨나는 것이다. (중략) 메레시콥스키는 말한다. "러시아 혁명은 이미 무의식적인 종교다. 왜냐하면 혁명적 사회성 중에는 전 세계적 교회성의 원리, 즉 어떤 궁극의 전 인류적 진리 속에 '인류를 전 세계적으로 단결시키자'라는 희구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여기엔 무의식적인 종교적 원리가 숨어 있다는 말이다. (생략)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라는 외침은 러시아 혁명에 있어서, 다른 어떤 곳에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매우 아득하고 숙연하며 두려운 묵시록적인 희망(혹은 위협)이 되어 널리 퍼져나갔다." 역사와 시간의 건녀편에 있든 이쪽에 있든, 종말을 향한 강렬한 마음에는 차이가 없는 것이다. 요컨대 혁명이란 역사 내부에 있는 '종말'이고 시간적 지평에 투사된 묵시록적 환상이다. 하지만 종말은 오래된 질서의 끝이면서 동시에 완선히 새로운 질서의 개시를 의미한다.

제2장. 러시아의 십자가. 58쪽.
표트르 대제와 그가 늪지를 개간하고 백성들의 피로 세운 페테르부르크를 세우며 러시아에 서구 기술과 사상의 바람을 불러왔다는 챕터를 끝으로 그 무렵 등장한 문학가들 소개로 이어진다. 맨 첫 번째는 푸시킨. 그에 대해서는 아는 게 많이 없다. 하지만 러시아인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시인)라 하여 한국인으로써는 아쉬울 따름이다. 우리나라 시만 읽어 봐도 알 수 있지만, 언어를 최대한 축약하고 단어를 골라골라 메시지를 전달하는 문학 형식이라서 제2언어로 번역하면 원어가 품고 있는 뜻을 100% 전달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래서 소설에 비해 번역이 활발하게 이뤄지지는 않는 분야 같다.(해외는 잘 모르겠고, 국내 한정) 그래도 이 책을 통해 일부나마 접해본 소감을 얘기하자면, 왜 러시아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인지 알 것 같다. 세계적으로 알려진 도스토옙스키나 체호프, 톨스토이, 고골 등에 비해 '밝은' 느낌이 든다. 물론 어두운 심연을 노래하는 시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눈 쌓인 들판에 내리쬐는 아침 햇빛 같다고나 할까. 서정시 <겨울 아침> 등에 이러한 묘사가 잘 드러나 있다. 하지만 저자가 주목한 것은 <캅카스의 포로>와 같이 러시아가 당시 처한 문제, 즉 서구의 기술에 뒤처짐으로써 발생하는 '잉여 인간'의 대두를 암시한 작품이다. <예브게니 오네긴>의 주인공 오네긴도 이 잉여 인간에 해당한다.

다음 장에서 소개하는 작가는 푸시킨보다도 더욱 생소했던 '레르몬토프'다. 이 책이 아니었으면 쭉 몰랐을지도 모른다. 채 서른도 안 돼 생을 마감하였고, 작품 수도 그리 많지 않다. 그럼에도 내가 이 후기에서나마 그를 언급하고 싶은 이유는 서사시 <악마> 때문이다. <악마>는 그가 푸시킨의 죽음을 애도하며 게재한 <시인의 죽음>으로 유명세를 타다 못해 황제의 눈밖에 나서(그를 죽음으로 내몬 건 전체주의를 옹호하는 귀족들이라고 비판했기 때문) 유배를 떠나듯 향했던 캅카스에서 집필하였다. 내용은 이렇다. 신의 저주를 받고 코카서스 산맥에서 홀로 늙지도, 죽지도 못하는 고통과 고독에 시달리던 악마가 조지아 영주의 딸 타마라에게 반하게 된다. 사랑에 미친 악마는 그의 약혼자도 죽인다. 자신을 유혹하는 속삭임이 악마의 것임을 깨닫고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타마라는 수도원행을 자처하지만, 계속되는 끈질긴 구애를 끝내 받아들이고 만다. 
 
위 시에 영감을 받아 그렸다는 미하일 브루벨의 <악마> 연작 중 하나.
하지만 신의 분노를 산 타마라는 악마와 하룻밤을 보낸 직후 죽게 되고, 악마는 다시 혼자가 된다. 신에게도 버림받고, 스스로 찾은 사랑도 영원히 잃고 마는 악마의 슬픔, 영원히 기댈 곳 없이 떠도는 악마는 레르몬토프 자신의 처지를 투영한 것처럼 절절하게 다가온다. 여러 학문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나 결국은 원치 않던 사관학교에 편입하여 군인으로 삶을 마감하고, 많은 여인들과 염문을 뿌렸지만 한 여인에 정착하지 못했다. 긴 안식은 누리지 못하고 방황하던 잉여 인간(자신)의 삶을 <악마>에서는 그리스 비극처럼 낭만화했지만, 소설 <우리 시대의 영웅들>을 통해서는 신랄하게 self비판하였다. 

그 다음, 다음 챕터에서 소개하는 벨린스키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작가다. 그의 진가는 비평에서 빛을 발하는데, 이 시기 러시아를 지배하던 무기력과 분열에 대해서 먼저 얘기해야 할 것 같다. 잉여인간으료 표상되는 러시아의 무기력은 표트르 대제의 폭정 아래 잿빛이 된 사람들의 권태감과 같다. 잉여인간이 문학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팽배한 가운데, 반대쪽에서는 사상적 움직임이 움트기 시작했다. 서구주의와 슬라브주의로 양분돼 세계사적 측면에서 러시아의 운명을 논한 것이다. 러시아는 유럽 제국의 진보에 비해 한참 뒤처진 미개국이고, 하루빨리 표트르 대제의 정책 기조에 따라 이들을 따로잡아야 한다는 것이 서구주의라면 슬라브주의자는 표트르 대제(의 개혁)를 러시아에 대한 배신으로 보았다. 표트르 대제 이전의 '루스'야말로 아름다운 이상향이라고 생각하였다.

벨린스키는 이 시기 활약한 사상가이자 문예비평가로서 저자의 말에 의하면 '존재 자체로 러시아적 인간의 총결산'이다. 19세기 후반 러시아적 인간의 특징은 벨린스키 한 명을 통해 최대한으로 엿볼 수 있다고 밝혔다. 그의 모든 장단점, 감수성, 생활양식마저도 말이다. 우선 그의 업적(?)을 보자면, 표트르 대제 이후의 작가들을 자신만의 비판적 관점을 근거로 정확히 평가하였다. 푸시킨이나 레르몬토프의 시를 대중들이 쉽게 다가가도록 만든 것도, 고골, 투르게네프, 도스토옙스키 등 러시아를 대표하는 19세기 문학가들이 모두 그의 글을 통해 대중에게 더 한발짝 다가갔다는 것이다. 미천한 출신으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타고난 감각, 미추와 참-거짓을 판단하는 정확한 감수성이 뛰어났다. 특히 '진리'를 향한 열정은 본문에도 여럿 언급되어 있다. 그에게 진리나 사상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있는 것이었고 그에겐 그게 전부였다. 

여기서의 진리는 과연 무엇인가. 바로 '전체적, 포괄적인 세계관의 탐구'와 같다. 러시아인은 모든 문제를 한 번에 재단하고 해결하는 궁극적 입장을 갈망한다. 이를 발견하기까지 그들에게 마음의 평안은 없다. 즉 '인생의 모든 문제에 해결책을 주고 이론이성과 실천이성을 결합해 사회적 이념에 철학적 기초를 부여해주는' 종합적인 입장이야말로 그들이 추구한 '진리'였다. 여기서 머리를 탁 쳤다. 내가 문학을, 성경을 읽으면서 얻고자 했던 게 이거였을까? 왜 문제만 던져놓고 결말에서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냐며 <나무들 비탈에 서다>(황순원 作)을 읽고 받은 실망감을 학원 선생님께 토로하던 18살의 내가 떠올랐다. 물론 지금은 문학의 역할이 애초에 해결책을 제시하는 게 아님을 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정말 답답했다. 그때의 답답했던 마음이 진리를 좇던 옛 러시아인들의 마음과 같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참 하였다.

"과학이나 수학에서 말하는 논리적 귀결로는 인간사회의 악이나 사회적 부당함을 줄일 수 없다. 러시아인은 바로 그러한 실천적 활력을 지닌 살아 있는 진리를 추구했다. 즉 진리이면서 동시에 정의여야 하는 것이다. 러시아적 광신의 두 가지 형태, 즉 정교도적 기독교와 열정적인 공산주의적 성격도 이로써 설명될 수 있다."(195p) 그래서 나도 종교를 한때 믿어볼까 했었고, 공산주의의 실패를 안타까워한 것일지도. 지식을 전달해 주는 책을 읽으며 습득할 때도 기쁘지만, 이처럼 알 수 없던 내 과거(또는 현재)의 감정, 또는 현상의 원인을 짚어주는 책은 더더욱 보물 같이 느껴진다. <행복의 약속>이 그랬고 <러시아적 인간>도 그럴 것 같다.

살아 있는 개개인으로서의 인간과 인격을 신이나 이성, 세계라 일컫는 추상적 존재의 억압으로부터 구원해야만 했다. '개개인이 전 세계의 운명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모든 이는 자유롭고 평등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박해받는 자'가 이 세상에 한 명이라도 있어서는 안 된다. 벨린스키는 자유, 평등, 동포애라는 사회주의적 인권의 이념을 단순히 사상적 문제가 아닌 절실하고 현실적인 초미의 문제로 바라본 최초의 러시아인이었다. 이렇듯 그는 인류 구원을 위한 유일한 수단으로 사회혁명을 요구하는 한편, 이처럼 부조리하고 불결한 세계의 인간을 방치한 '신'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이는 반역에 그치지 않는다. 신의 얼굴을 향해 냅다 절교장을 던진 셈이다.

제5장. 벨린스키. 199쪽.
도스토옙스키는 <죄와 벌>의 이반을 창조할 때 벨린스키를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그의 무신론은 신의 존재, 있고 없고를 문제로 삼은 게 아니라 존재의 증명과 상관없이 그냥 싫은 것이다. 이러한 무신론은 인류를 향한 열렬하고 가까운 사랑과 동정에서 시작된 것이며 인류애의 고양이 이를 지탱하고 있었다. 

다음 다음 챕터에서는 이제 딱 세 명만 남았다.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체호프. 특히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에 이르러 러시아 문학의 인간 탐구는 절정에 이르렀다고 저자는 평한다. 하지만 둘의 문학과 사상, 성격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럼에도 두 사람이 추구한 지점은 하나였다. 사람은 무엇을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걸까, 이 정도로 고통스러운데 인생을 살아야 하는 걸까, 라는 의문을 철저히 탐구하며 '살아 있는(우리 곁에 있는) 신'의 존재에 대해 갈구했다. 

개인적으로는 톨스토이보다 도스토옙스키를 좋아한다. <안나 카레니나>, <전쟁과 평화>는 연출자의 해석이 추가되고 상상력이 제한된 영화나 드라마로 보았기 때문일까? <죄와 벌>과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은 머리에 쥐가 날 것 같은 고통을 참으며 책으로 꾸역꾸역 읽었다. 왜 톨스토이에 비해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이 할리우드라는 거대 자본의 선택을 받지 못했을까..를 고민해 보니 이미 내가 도스토옙스키를 더 좋아하는 이유가 확실해진다. 내면은 썩어 문드러졌을지라도 화려한 귀족의 삶을 담아내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치정(?)이 극화하기에는 더욱 구미가 당기는 소재 아닌가. 그러니 나도 숱한 드라마와 영화로 톨스토이를 먼저 접한 것일 테고.

하지만 그에 비해 도스토옙스키의 주인공들은 어딘가 비참한 구석이 있다. 가난하거나, 무언가에 중독되어 있거나.. 우선 극중 배경부터가 어두컴컴한 지하실이나 한밤의 술집을 연상케 하는 어두운 면이 많다. 책 뒤표지에 있는 '하루종일 빛이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한 내음'을 느낄 수 있는 러시아 문학은 곧 도스토옙스키다! 

 
그나마 밝은 책표지로 가져온 게 이거다...^^
우선 책에서도 톨스토이는 대표작보다도 작품 바깥의 톨스토이라는 인간 자체의 일생에 주목한다. 말년의 그는 세간에서 위대한 역작이라 칭송받는 자신의 작품들을 스스로 폄훼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예로슈카 삼촌'으로 대표되는 <카자크인들> 속 인물들처럼 살아가길 표방한다. 자연과 하나가 되어 완전한 자유를 누리길 소망하지만, 또 다른 등장인물 올레닌에 더 가까운 삶을 이어갔다. 자연의 환희를 누리다가도 사색에 빠져 다시 기독교적 사고와 원래대로의 삶으로 돌아오고 만 인물, 톨스토이 그 자신과 같다. 종교의 힘에 기대어 구원받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무의식 속에는 자연인으로서 살아가고픈 양가적 감정이 평생 그를 괴롭혔다고 한다. 종교적이지 못한 인간이라 말년의 그가 회심한 후 쏟아낸 후기작들에 영 손이 안 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도스토옙스키로 넘어와서, 그와 기독교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전 세계의 구원을 바라는 그에게, 인간의 구원을 공공연하게 약속하고 있는 기독교는 의심의 대상이다. 이는 문학에 고스란히 형상화된다. 인간이 그리스도 복음에 따르며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는지 그는 묻는다. 
자연성의 회복이란, 말하자면 자연과의 연대성 회복을 의미한다. 자신의 껍질 안에 굳게 갇혀 있기를 그만두고 세계의 중심으로 나와 그 일원이 됨으로써 직접 자연의 향연에 참가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 역시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고 사람과 세계를 하나로 맺는 힘이 아닐까 싶다. (생략) 하지만 인간은 한번 상실한 연대성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 도스토옙스키의 경우 사람의 원죄의식을 심화시킴으로써 회복을 꾀한다. 톨스토이적 자연인처럼 죄를 잊고 선악의 피안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가 깊어지고 죄로 일관됨으로써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생략) 이상한 점은 이처럼 죄의식이 깊어지고 암흑이 짙어질수록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한 줄기 신성한 빛이 내려온다는 것이다. (생략) 죄에 대한 자각이 마지막 한계선에 다다랐을 때 사람은 갑자기 광활하고 풍요로우며 끝없는 사랑의 세계로 넘어간다. 도스토옙스키는 자신의 체험을 통해 원죄의식이 궁극에 달했을 때 암흑은 환희의 빛이 되고, 죄의 세계는 사랑의 세계로 변모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에게 종교적 사랑이란 그러한 것이어야 했다.

제13장. 도스토옙스키. 344-346쪽.
죄의 질서에서 사랑의 질서로, 죄의 공동체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듯이 이러한 근원적인 연대성의 복귀야말로 도스토옙스키적 인간의 최고 경지이자 최고 목표였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다시 읽고 싶은데, 엄두가 안 난다.

마지막장은 체호프다. 러시아의 현실을 종말론적 구조에 놓고 바라본 관점은 도스토옙스키와 같지만, 종말(이자 시작)은 종교나 신의 개입 없이 이뤄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게 결정적인 차이다. 하지만 당시의 현실은 암울했다. 그래서 체호프 희곡 속 인물들은 '지루하다' '암담하다'라는 말을 달고 산다. 그러한 현실을 묘사하는 데도 가차없다. 하지만 체호프의 작품에는 그러한 인간들일지라도 결국에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신뢰가 있다. 비록 결말부에도 등장인물들의 인생이 드라마틱하게 바뀌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긍정적으로 풀리길 기대하고 바란다.(<바냐 삼촌>이 딱 그렇지 않은가!) 체호프가 바라던 세상은 도래한 것일까? 아니면 아직 몇백 년 남은 것일까. 러시아에 품고 있던 환상, 그리고 문학에 대해 잠시 품었던 과한 기대마저 궤뚫어 봐준 책이라 꼭 읽으면서 생각난 감상을 블로그에 남기고 싶었다. 고골(고리키)와 푸시킨, 레르몬토프의 작품들을 마저 읽고 다음에는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를 독파해 보고 싶다. 이번 학기중에 힘들면 방학 때라도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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