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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간기(戰間期) 영국 이상주의의 몰락
ㅡ가즈오 이시구로, <남아있는 나날>을 읽고
이야기는 소위 전간기(戰間期)라고 하는,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사이의 영국 상류사회를 무대로 펼쳐진다.
대저택 달링턴홀의 집안일을 책임지고 관리하는 집사(버틀러) 스티븐스는 주인어른인 달링턴경을 35년간 성심을 다해 보필해왔다. 주인의 사후 저택을 인수한 미국인 부호의 배려로 그는 한 때 총무로서 함께 일하다가 20여년전 저택을 떠난 켄턴양을 찾아 영국서부로 긴 여행을 떠나게 된다.
때는 1957년. 전쟁의 여파로 노동시장과 계급문화등 사회질서의 극심한 변동을 겪게 되는 와중에
스티븐스는 과거 호흡을 맞추어왔던 켄턴양의 도움을 받아 저택 운영의 돌파구를 찾고자 한 것이다.
여행길에 스티븐스가 마주친 영국의 산하와 풍경, 보통 시골사람들의 생활과 생각의 면면이 그의 지난 인생에 대한 회고와 함께 얽혀들면서 한 시대와 인생의 본질에 대한 깊은 성찰로 이어진다.
상류사회를 무대로 한다지만 주인공은 귀족이 아닌 하인신분인 집사다. 비록 집사지만 스티븐스는 세상을 움직이는 힘의 중심에 참여하고 싶은 야망과 '인격적 품위와 복종의 자세가 완벽하게 균형을 이룬' 집사의 이상을 놓지 않았다.
"자신이 봉사해온 세월을 돌아보며 나는 위대한 신사에게 내 재능을 바쳤노라고, 그래서 그 신사를 통해 인류에 봉사했노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만이 위대한 집사가 될 수 있다."
그는 위대한 집사의 이상을 위해 임박한 아버지의 임종에도 발길을 돌리고 마음을 전해오는 켄턴양에게도 마음의 장벽을 쌓고 철저하게 사무적으로 대했었다.
하지만 그가 충성을 다해 보필한 달링턴경은 구시대의 귀족적 이상과 명예심에 사로잡혀 상황을 오판하고 히틀러의 야욕에 이용당하는 신세로 영락했다.
"이 어른은 전형적인 영국신사죠. 점잖고 정직하고 선량하고. 그러나 이 어른은 '아마츄어'입니다."
"어르신은 신사 중의 신사요. 그게 바로 문제의 근원이지. 신사이기 때문에 지난 전쟁에서 독일인들과 맞서 싸웠고 패한 적에게는 자비와 온정을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하시고, 그것이 그 분의 본심이요."
"저들이 그 점을 어떤식으로 이용하고 조종하여 훌륭하고 숭고한 것을 엉뚱한 것으로, 저들의 추악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변질시켜왔는지 당신은 분명히 다 보았소, 스티븐스."
친독일적 비밀회교의 현장인 저택 사교모임에 나타난 미국인 루이스씨와 달링턴경의 최측근이자 시사평론가 카디널씨의 예리한 지적에도 스티븐의 충심은 굳건하기만 했다. 그리고 달링턴경이 오해와 모욕 속에서 손가락질 받는 죽음을 맞이한 후에도 변함이 없다.
달링턴경의 몰락은 1차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구세계가 어떻게 변화되고 취약해져서 전세계를 2차세계대전으로 굴러떨어지게 했는지 인간형상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E.H 카는 일찍이 "1919년에서 1939년 사이 영국과 미국의 국제관계에 대한 사고전반에 걸쳐 만연되었던 매우 위험한 결함"을 지적하며 "도덕에 과도하게 집착하며 권력의 요소를 철저하게 무시하는" 경향성을 비판한 바 있다.
더구나 베르사이유조약이 독일에 가혹한 배상금과 영토할양을 요구한 것에 대해 당시 외무성에 근무하고 있던 케인즈마저 항의성 사표를 내고 관가를 떠났던 것처럼 독일에 대한 동정론과 부채의식이 영국 조야에 팽배했던 것이다.
이러한 기류, 즉 독일에 동정적인 이상주의 외교경향성을 대변하는 인물이 바로 달링턴경이고 그의 집사 스티븐스는 주인을 위해 헌신함으로써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애써왔던 것이다.
이 책을 번역한 역자 송은경은 스스로의 판단을 접어두고
주인의 의지에 자신을 맞추는 집사 스티븐스를 한나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개념을 빌어 평가하고 있다. 스티븐스의 위대한 집사론은 “성실하게 일상을 반복함으로써 악을 돕고 악에 이용당하는 범인들의 삶, 그 소름끼치는 관성의 폐해”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 책을 쓴 가즈오이시구로 또한 두 차례의 인터뷰에서 “책의 제목 The Remains of the day는 프로이트의 ‘꿈’ 개념에서 차용한 것”이라고 말하고, 또 “집사는 평범한 괴물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저는 그가 일종의 괴물이라고 항상 생각해왔다”고 밝히면서 역자의 견해와 궤를 같이하는 모양새를 취한다. 이 책의 주제가 인간이 과거의 삶을 정당화하고 자기자신을 합리화하는 ‘기억의 왜곡’에 있다는 평론가들의 대체적 기류에 동조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아이히만류의 악의 평범성 혹은 자기합리화의 괴물을 스티븐스에게서 느끼지 못했다. 물론 그런 기미를 슬쩍슬쩍 집어넣은 작가의 솜씨에 경탄을 금할 수 없지만, 그것은 마치 화가가 완벽한 장미꽃잎에 살짝 햇볕에 탄 듯 그을림을 주는 것처럼 스티븐스의 심리에 현실성을 부여하기 위한 장치로 느껴지는 것이다. 스티븐스에게서 아이히만 냄새가 살풋 난다고 해서 아이히만과 한통속으로 싸잡는 것은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
베르사이유조약 이후 구시대 유럽을 지탱하던 내면의 질서, 이상주의와 귀족적 아마츄어리즘이 무너지고 현대적인 합리적인 사고와 이해타산적인 국제관계가 확립되었다.
그 과정에서 무너지는 구유럽을 마지막으로 어깨를 받쳐 지탱하던 영국귀족과 그 집사. 이 둘의 인생행로를 주인과 노예의 단순한 관계로 순치시킬 수 있을까. 그 둘의 이상주의와 그 몰락의 여정을 결과에 반하는 자기합리화라고 몰아부칠 수 있을까.
가즈오이시구로는 이상에 매여있는 인간, 그리고 다른 인간에 매여있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한도 끝까지 밀고 올라가 신분사회에서의 한 인간의 진실성과 직업윤리, 그리고 그 안에 본질적으로 포섭될 수 밖에 없는 시대적 한계를 보여주었다.
이를 통해 스티븐스가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가지기 위해서는 신분제 틀과 자기직분의 한계를 깨고 세계에 대한 고민과 결정을 주체적으로 해야 한다는 민주주의 이상의 험난함과 당위성을 보여주었다. 그렇다. 위대한 집사를 이루는 양대축, 인격의 존엄과 복종의 자세는 민주주의 시대에는 양립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고보면 이 책은 악의 평범성이라기보다는
더 깊고 보편적인 시대와 인간실존의 모순, 진정한 인간적 위대함의 역사적 탐색에 뿌리가 닿아있는 것이다.
이 책을 처음 읽을 때 내 가슴은 전율 속에서 “이것이야말로 인생이다!” 라고 외쳤다. 이 정도로 위대한 작품이라고 확신한 것은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의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 다음으로 처음이다.
이 두 권의 책에는 거의 자연이 빚어낸 것 같은 완벽한 우주와 인간의 실상이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감히 작가가 말하는 창작의도에 구속되지 않고 나만의 반기를 들고 나 자신의 눈으로 이 책을 수용한다. 그 정도로 작가는 독자 자신의 시각으로 새로 책을 읽을 수 있을만큼 거대한 깊이와 다면성을 구사한 작품세계를 이룬 것이다.
나는 감히 작가가 말하는 창작의도에 구속되지 않고 나만의 반기를 들고 나 자신의 눈으로 이 책을 수용한다. 그 정도로 작가는 독자 자신의 시각으로 새로 책을 읽을 수 있을만큼 거대한 깊이와 다면성을 구사한 작품세계를 이룬 것이다.
이는 ‘리얼리즘의 승리’라는 관용구로 해석이 될 수도 있고, 작가의 사고실험이 의도와는 다른 결과를 도출했다는 예술창작의 의외성의 원리를 들 수도 있겠다.
이 책은 또한 무수한 암시와 생략기법으로 점철된 스티븐스와 켄턴양의 은밀한 연애소설이기도 하다.
- 마음이 연결되어 있는 줄 아는데 함께 할 수 없는 고통. 아무리 두들겨도 열리지 않는 문, 아무리 높이 뛰어도 넘을 수 없는 선.
- 꽃을 들고 용감하게 집사 집무실에 쳐들어가기도 하고, 뜬금없이 화도 내보고, 협박도 하고, 쌩까고 무시해보기도 했지만 스티븐스가 그어놓은 굵은 선, 금 밖에 서성일 수밖에 없었던 그 여자.
- 환히 보이는 선 너머, 손에 닿지 않는 생의 보석을 뒤로 하고 혼자만의 황량한 인생을 찾아 달링턴홀을 떠날 때의 그 여자의 아픔.
처음 책을 덮고 난 후 얼마간 나는 설거지나 집 안일을 하다가도 문득 켄턴양의 심정에 빙의된 듯 슬품이 사무쳐 울기도 했었다. 사랑하지 않는 남자의 아이를 낳고 긴 생애를 ‘텅 빈 허공을 밟듯’ 살아오다 노년에 와서야 스티븐스와 마주앉아 처음으로 자신을 들어낸 그 여자를 위해.
지금은 전간기 못지 않게 국제정치와 외교의 변화, 리더쉽의 변화가 급격하게 일어나고 2차대전과 같은 파국을 앞에 두고 있는 듯 위험천만한 시대이다.
전세계를 충격과 경악으로 밀어넣은 이란핵시설 대폭격으로 이란-이스라엘전쟁의 협상의 실마리를 찾아내는 트럼프를 보면 지금까지의 국가간 윤리와 지도자의 품격에 대해 생각해왔던 모든 것이 ‘아마츄어리즘’이라고 비웃음을 당하는 듯하다. 전혀 다른 ‘프로’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음에도 나는 이미 구시대의 잔재라서 따라갈 수도 자각할 수도 없는 지경일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의 이재명대통령과 미국의 트럼프만 보더라도 도저히 기존의 민주주의 사고방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지도자인데, 더 놀라운 것은 그들이 그 공갈과 사기와 협잡 같은 수법으로 무언가를 해낼 거라는 낙관적 전망마저 준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 책의 현재성을 드러내고 책 속의 문제적 두 인물, 달링턴경과 스티븐스가 여전히 우리 속에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줄처가면서 읽었습니다.
1] 나만의 반기를 들고 나 자신의 눈으로 이 책을 수용한다.
2] 슬품이 사무쳐 울기도 했었다
3] 달링턴경과 스티븐스가 여전히 우리 속에 생생하게 살아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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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된 작품은 작가의 의도와는 관계없은 생명을 가지고 있겠지요.
정미님같은 독자가 새로운 생명을 주기도 하겠지요.
책보다 정미님이 읽히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