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무속보다 가치있는가 - NEWS M
기독교는 무속보다 가치있는가
이재호 집사
승인 2022.01.31
갑자기 무속이 뜨거운 주제가 되었다. 왠만한 무당보다 자기가 낫다는 김건희와 손바닥에 왕자를 그리고 다녔던 윤석열 때문이다. 무속의 영향으로 검사가 되었고 아직도 그 영향이 전반에 드리우는 후보가 대통령이 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점을 쳤더니 북한을 쳐야한다면 전쟁을 일으킬 것인가. 농담 같지만 안심이 안된다.
하나님 아닌 다른 우상은 끔직히 싫어하던 개신교의 반응이 흥미롭다. 장승의 목을 치고 불상을 훼손하던 집단 아닌가. 하지만 무속에 의존하는 지도자는 안된다며 반대하는 일부의 목소리도 있지만, 많은 이들이 조용하다. 좌파 정권만 아니면 된다 걸까. 나아가 무당인지 목사인지 분간하기 힘든 이들은 안수도 하고 지지도 한다.
이런 모습과 별도로 다른 질문이 있다. 기독교는 무속보다 우월한가라는 질문이다. 한국교회를 비판하며 무속과 뭐가 다르냐는 비판이 있다. 타당하다. 입시철만 되면 새벽기도가 북적댄다. 중요한 결정을 앞두거나 집안에 문제가 있으면 목사를 찾아가 기도를 받는다. 축복에도 여러 단계가 있다던 어느 목사를 만나 기도를 받으려면 복채 아니 사례가 천만 원이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돼지 머리만 안 올렸지 가게를 열면 예배를 드리고 새 차를 뽑으면 손잡이를 잡고 기도를 한다.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무속의 영향을 받는 지도자를 반대한다는 의견에 찬성한다. 하지만 차별금지법이 아직 통과가 안된 중요한 이유가 개신교의 반대다. 교회는 집단적 압력을 행사하면서 다른 종교는 그러면 안되는가. 이런 모습을 볼 때 기독교가 무속보다 우월한가 묻는다면 그렇다 단언하기 어렵다. 그런데 아쉽다. 뭔가 중요한 부분이 빠져있다.
무엇이든 비교를 할 때 가장 낮은 모습을 보면 차이가 없을 수 있다. 정치 집단도 그렇고 회사도 그렇다. 가장 낮은 수준을 놓고 비교하면 오십보 백보다. 종교도 마찬가지다. 특히 무속의 영향이 전통적으로 존재해온 한국에선 교회에서 무속적 요소를 찾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게 전부인가 질문해야 한다.
예수는 많은 병자를 고쳤다. 귀신을 쫓아냈다. 같은 행위를 무당도 한다(혹은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예수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한 발자욱 더 나아갔다. 사람들의 아픔을 치유함으로 그들만 잘먹고 잘살게 하지 않았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며 이 땅이 하나님 원리대로 살게 되도록 사람들을 초청했다. 세리와 죄인을 초청하며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의 벽을 허물었다. 이 땅에서 서로 사랑하며 돌보도록 새로운 계명을 가르쳤다. 예수의 가르침은 개인의 영역에서 머물지 않고 세상을 변화시켰다. 뒤집어진 하나님 나라(Upside-down Kingdom)를 가르쳤다.
이런 복음의 공공성이 없이 개인의 영역에서 머무는 신앙은 무속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나 혼자 잘먹고 잘살자에서 그친다면 무엇이 다른가. 공공성은 쉽게 말해 ‘같이 살아가기’이다. 힘 있는 자가 힘 없는 자를 착취하는 대신 도와주며 부자가 가난한 이를 보살피는 세상이 예수가 가르친 하나님 나라다.
‘내가 무당보다 더 잘’ 본다는 김건희, 무슨법사가 캠프에서 이래라 저래라 했던 윤석열에게 침묵하는 교회를 보며 왜 그럴까 생각했다. 장승의 목을 자르던 그 기개는 어디 갔나 싶다. 답은 쉽다. 힘 있는 자의 이익에 편승하는 교회. 차별받는 이들을 마음껏 차별하고 싶어하는 교회. 자기들의 들보는 그대로 두며 다른 이의 티끌에 목소리 높이는 교회. 같이 살기를 싫어하는 그들이 무속과 별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반대할 이유가 없는 거다.
한국 교회는 도대체 얼마나 더 나빠질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보란듯이 더 낮은 모습을 보여왔다. 항상 예상을 뛰어 넘는 아니 예상보다 바닥으로 떨어진다. 이제 그들이 목숨처럼 지켜왔던 우상을 제하라는 명령조차 무시하고 있다.
기독교가 무속보다 우월한가라는 질문에 그렇다 답할 수 없게 만드는 건 바로 교회다.
복음의 적은 이런 무당 같은 목사들이고 그 무당을 찾는 신도들이다. 이런 교회를 보며 예수는 뭐라 할까. 슬피 우시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