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24

정농회 40 년을 돌아본다 원 혜 덕

2016년 겨울호-업로드용.pdf

정농운동/ 정농회 40 년을 돌아본다/원혜덕 157
미래사회/ ‘농’(農)이 있는 세계를 향한 구상/
우치야마 다카시, 정남희 역 170
협동조합/ 가가와 도요히코의 기독교사회주의와 협동조합운동/김석주 207
===

◑정농운동◑
정농회 40 년을 돌아본다
원 혜 덕(농부, 포천 평화나무농장)


정농회는 지금부터 40 년 전인 1976 년에 나의 아버지 원경선
선생께서 뜻이 맞는 분들과 함께 만드신 우리나라 최초의
유기농업 단체이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신앙
양심에 따라 결성한 농민 단체라는 데에 또한 의미가 클 것이다.
나는 정농회에 직접 관여한 사람이 아니다. 어떤 책임을 맡은
적도 없고 책임이 아니더라도 정농회를 위해서 일한 것도 없다.
그러나 나의 아버지로 말미암아 정농회가 시작되었고, 내 남편이
나의 아버지와 함께 창립 때부터 이제까지 정농회를 위해 일해
온 사람이기에 나는 정농회의 처음과 이제까지의 과정을
보아왔다. 올해 창립 40 주년을 맞아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정농회를 보면서 그동안 지켜보아온 정농회의 모습을 한번
돌아보고자 한다.


아버지와 고다니 준이치 선생의 만남과 초청
정농회가 만들어지기 2 년 전인 1974 년 여름에 나의 아버지는
뉴욕에 있는 유니온신학대학에 다녀오실 일이 있었다. 그 당시
아버지는 부천의 도당리라는 동네의 산기슭에 풀무원 농장을
만들고 여러 사람들과 함께 농사를 짓고 계셨다.
아버지는 귀국 길에 일본에 들러 미에현에 사는 고다니 준이치
선생을 찾아가셨다. 그 분이 매달 내는 신앙잡지에서 유기농업에
관한 글을 감명 깊게 읽으셨던 터라 한 번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셨다고 했다. 고다니 선생은 일본의 유기농단체인
애농회(愛農會) 창립자로 애농고등학교도 세운 분이다. 두 분은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국에 초청하고 싶다는 아버지께
고다니 선생은, “이제까지 많은 한국 사람들이 초청하겠다고
해도 마음이 동하지 않았는데 당신을 만나서 이야기하다 보니까
한국에 가고 싶어졌다. 초청해 주면 방문하겠다” 고 했다.
고다니 선생은 이듬해 한국에 다녀간 후에 애농지에
“한국방문기”라는 글을 썼는데 그 글 서두에 나의 아버지와의 첫
만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말로만 하는 신앙이 아니라
온몸으로 신앙을 증거하는 분임을 처음 뵈었는데도 바로 알 수
있었습니다. 이 분이 초대해 주시면 반드시 열매가 있는
한국방문이 되겠다고 직관적으로 느꼈기에 그 자리에서
받아들였습니다.”
아버지는 다음 해 9 월에 고다니 선생을 부천에 있는 당신의
풀무원 농장으로 초청하였다. 아버지는 김포공항에 마중 나가
고다니 선생을 집으로 모셔왔다. 저녁 모임을 갖고 하룻밤을
지낸 다음, 고다니 선생님은 아버지의 안내로 일본에서 만났던
지인들을 차례차례 방문했다. 고다니 선생이 아버지께 미리
연락을 부탁했던 곳들이다. 주옥로 선생님과 풀무학교, 제천의
엄태성 목사님의 제천교회, 고다니 선생님이 쓴 『애농회,
인류구원의 책』이라는 책을 번역한 안평호 사모님과 강릉교회
등을 차례로 방문하고 모임을 가졌다.
고다니 선생은 이렇게 한국 농촌과 풀무학교, 여러 교회 등을 한
바퀴 돌아보시고 다시 부천 풀무원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고다니 선생의 3 박 4 일간의 강연회를 열었다. 아버지는 당신이
인도하시던 기독동신회 교회 분들과, 가깝게 지내시던 무교회
분들 등 30 여 명을 불러서 함께 듣도록 하셨다. 아버지는 이
강연을 위해 소 집 바닥을 개조하여 마루를 놓았다. 그 마루에서
사람들은 4 일간 강의도 듣고 밥도 먹고 잠도 잤다. 그 때 대학에
다니던 나도 아침저녁으로 어머니를 도와 밥을 했다. 그 모임이
있기 바로 얼마 전에 아버지가 현미밥을 해먹자고 결정하셔서
제대로 된 압력밥솥도 없이 어머니가 그 많은 사람 밥을
짓느라고 고생하시는 걸 본 기억이 난다.
고다니 선생은 강연을 시작하기 전에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삼아 고통을 준 것을 진심으로 사죄한다고 하셨다. 40 년이 지난
지금도 일본 애농회 회장들은 정농회에 와서 인사를 할 때마다
이 사죄를 한다.
고다니 선생은 농약과 제초제를 사용하는 일본의 농사를
따라오지 말라고 했다. 일본의 농사는 죽음의 농사라고 했다.
10 년만 있으면 한국도 틀림없이 일본과 같이 농약과 공해의
피해가 나타날 것인데 그러기 전에 하루 빨리 돌아서라고 하였다.
당시 일본에서 큰 사회문제가 되었던
이따이이따이병(아프다아프다병), 미나마타병 등의 공해병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주었다. 농약과 제초제를 뿌리는 것, 공해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가, 하는 내용이었다. 그런 소리를
처음 듣는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고다니 선생이 일본으로 돌아가서 쓰신 “한국방문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다음 날부터는 새벽 5 시 반부터 밤 12 시까지 새벽
시간에는 신앙에 대해서, 오전과 오후는 농업, 특히
농약과 공해에 침식된 농업을 어떻게 하면 무서운
죽음의 농법에서 삶의 농법으로 180° 바꿀 수
있을까 하고 내가 아는 한 모두를 다 토해냈습니다.
일본의 애농 성서연구회도 훌륭하지만 그보다
우수할지언정 빠지지 않는 영적 분위기가 넘치는
진지한 모임이었습니다. 9 월 24 일 마지막 새벽
모임에는 눈물을 흘리면서 감격하는 청년과 장년
여러분, 여성분들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강당에 하나 가득 넘치고 있는 것을 모두 피부로
느끼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을 사로잡아 인도하고 있는 것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서 움직이시는 것을
실감을 하면서 찬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홍순명
선생 번역)
고다니 선생의 두 번째 방한과 정농회의 창립
다음 해인 1976 년 1 월에 아버지는 다시 고다니 선생을
초청하고 전에 참석했던 사람들을 다시 불렀다. 이번에는
40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였다. 그런데 겨울이라 추워서 전 해
가을에 썼던 마루에서는 앉아서 말씀을 듣거나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다시 양계장 하나를 집으로 개조하셨다. 말이 개조이지
겨울이라 난방시설까지 해야 하니 사실상 집을 하나 새로 짓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해 겨울은 정말 추웠다. 벽돌을 쌓고
마루를 놓는데 인부들이 손이 시려서 장작불 옆을 떠나지 못했다.
일이 능률이 날 리가 없었다. 겨울방학이라 집에 있어서 그들의
밥을 나르던 나도 손이 많이 시렵던 생각이 난다. 그동안
아버지가 풀무원 공동체를 꾸려 나가시면서 빚 때문에
힘들어하시는 것을 보아온 나는 사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기다렸다가 추위가 풀리는 봄에 하면 작년에 쓴 장소를 다시 쓸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날 수밖에 없었다. 필요한 일이라면
돈이 아무리 들어도 바로 실행에 옮기시던 아버지를 그 때의
내가 이해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 고다니 선생님이 농사가 끝난 겨울에나 다시 시간을 낼 수
있다고 하셨을 것이다. 그 분은 말씀만이 아니라 직접 귤 농사를
지으며 자신의 생계를 꾸려가던 분이었다. 첫 번 모임에도
가을이라 농사일이 바빠서 올 수 없는 형편이었는데 이미
아버지와 약속했기에 무리를 해서 한국에 오셨다고 했다.
어쨌든 양계장을 개조해 만든 기다란 집이 완성되었고 4 일간의
강연이 시작되었다. 풀무원 공동체의 연수생으로 그 모임에
참가한 미래의 내 남편은 강연을 들으면서 강의실에 놓인 여러
개의 연탄난로를 계속 갈아대느라고 바빴다고 한다.
마지막 날에, 참석한 사람들은 이제부터는 농약과 제초제,
화학비료를 쓰지 않는 농사를 짓겠다고 눈물을 흘리며 다짐했다.
모임을 만들어 함께 유기농업에 대한 공부도 하고 서로 힘을
얻자고 했다. 사람들은 단체의 이름을 ‘한국 애농회’로 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모두 찬성하여 막 통과되려고 할 때 아버지가
일어나셨다. “길게 보아야 한다. 한국애농회라고 하면 일본
애농회의 한국 지부처럼 보일 수 있다. 우리만이 아닌 다음
세대까지 생각해서 이름을 지어야한다. 바른 농사를 짓는다는
의미의 정농회(正農會)가 어떠냐?” 하고 말씀하셨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라 모두 동의를 하여 정농회라는 말이 생겨났던 것이다.
그 자리에서 있는 사람들은 아버지께 정농회의 회장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당연히 수락하실 줄 알았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나는 평생을 전도하기로 하나님께 약속한 사람이다.
바른 농사를 하는 정농회 일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나는 두
가지 일을 다 잘 하는 사람이 못 된다." 하면서 그 집회에
함께한 오재길 선생을 추천하셨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정농회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시겠다고 했다. 그러면 부회장이라도
맡아달라는 사람들의 요청은 받아들여 정농회 부회장이 되셨다.
초대 회장이 된 오재길 선생님은 자신이 정농회 회장을 맡기는
하였으나 정농회의 모든 일을 원 선생님과 의논해서 하겠노라고
했고 실제로 그리 하셨다. 아버지를 찾아온 오 선생이 아버지와
의견이 달라 긴 시간동안 말씀을 나누는 것도 보았다. 오
선생님은 14 년간 정농회를 맡아 헌신적으로 일하셨다. 아버지는
오재길 선생에게 정농회 회장이라는 무거운 짐을 씌어드려서
미안했다고 사람들 앞에서 여러 번 말씀하셨다.
경기도 양주로의 이전과 연수회

이렇게 정농회가 1976 년 1 월에 시작되었고 그 해에 아버지는 당시 오지(奧地)였던 양주땅 4 만평을 구입하여 풀무원 농장을 옮기고 유기농업을 시작하셨다. 나의 장차의 남편이 트럭으로 부천 농장의 이삿짐을 옮겼다. 척박한 땅을 일구려 부천 농장에서 거름도 수없이 퍼 날랐다. 그 때부터 겨울마다 정농회 연수회가 양주 풀무원 농장에서 열렸다. 십여 년이 지나고부터는 교통이 편한 도봉산역 근처에 있는 다락원으로 모임 장소를 옮겼다. 풀무원 농장이 유기농업을 하는 곳으로 알려지면서 많은 젊은 사람들이 바른 농사를 배우겠다고 찾아왔다. 그들은 몇 년 간의 연수 생활 후에 전국에 흩어져 각 지역의 유기농업을 실천하면서 자연스레 그 지역의 유기농업의 지도자들이 되었다. 지금은 누구나 농약과 화학비료를 치지 않는 유기농업이 좋은 줄을 알고 정부에서도 유기농업을 권장하고 지원해 주는 세상이 되었지만 그때는 달랐다. 농업의 최고의 목표가 증산이던 시절이라 농약과 비료를 치지 않고 농사를 한다니 사상이 의심스러운 단체라고 하여 정농회 연수회 등 모임이 있을 때마다 형사들이 뒤에 앉아 어떤 내용을 강의하나 하고 듣기도 하고 참가자 명단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여기에는 아버지가 풀무원 농장의 연수생들을 위해 강사로 초청한 분들 중에 함석헌 선생님, 문익환, 문동환 목사님, 한완상 박사님 등 소위 말하는 반체제 인사들도 여러 분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고다니 선생의 제안, ‘한ㆍ일 평화교류회’ 고다니 선생이 정농회 창립 20 주년에 오셔서 애농회와 정농회가 ‘평화교류회’를 만들어 해마다 양국에서 교대로 열라고 유언처럼 부탁하셨다. 그 때 시작된 한ㆍ일평화교류회는 지금까지 20 년간 이어지고 있다. 일본과 한국의 감정이 서로 좋지 않은데 정농회와 애농회는 서로 형제로 여기며 긴밀한 관계를 이토록 오래 이어오고 있다는 것이 기적같은 일이 아닌가 싶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시기 1 년 전에 백수(白壽)를 맞으셨다. 그 때 정농회 초대 회장이셨던 오재길 선생이 일본 애농회에 이를 알렸다. 그 때 당시 애농회 회장이던 이시이 야스히로 씨가 아버지께 다음과 같은 감사장을 보내왔다. 나는 그 감사장의 첫 문장,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과 용서로’ 나의 아버지와 고다니 준이치 선생이 만났다고 하는 첫 귀절을 읽었을 때 마음에 전기가 오는 듯한 감동을 받았다. 감 사 장 원 경 선 선생님 1974 년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과 용서로 원경선 선생님과 애농회 창시자 고다니 준이치 선생님이 만나시게 되었습니다. 그 만남으로 정농회가 태어났고 애농회는 한국의 형제를 얻게 되었습니다. 두 모임의 평화 교류는 두 나라의 농촌과 농민에게 축복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원경선 선생님은 두 나라를 잇는 교각 역할을 해 주셨고 그 사랑의 가교를 통하여 수많은 회원이 깊이 교류하였고 미래를 짊어진 젊은이들이 함께 배우는 길이 열렸습니다. 또 선생님께서는 오랜 세월에 걸쳐 애농회의 고문을 맡아주셨습니다. 애농회가 제창하는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사랑과 협동의 마을 만들기는 선생님이 제창하시는 생명 문화, 전원 문화의 길이면서 세계 평화와 미래 희망의 길입니다. 이제까지 해 오신 귀중한 활동에 대하여 이에 애농회를 대표하여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2012 년 4 월 17 일 애농회 회장 이시이 야스히로(石井康弘) 기독교농민회에 대한 아버지의 입장 정농회에 대한 아버지의 생각을 보여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정농회가 창립되고 나서 6 년 후에 기독교농민회가 조직되었다. 기독교농민회는 농민의 권익을 찾아주기 위한 투쟁운동을 벌였다. 정농회도 회원단체가 되어 함께 농민운동을 펴 나가자고 하는 요청이 기농에서 왔다고 한다. 그 때 아버지는 기농활동에 정농회가 참여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농민들을 위한 투쟁은 필요하다. 다른 농민단체는 그 길을 가는 게 맞다. 그러나 정농회는 농민이 자신의 이익을 찾는 단체가 아니다. 사람과 환경에 해로운 농약이나 제초제를 쓰지 말라고 하며 오히려 희생을 요구하는 단체다. 정농회는 손해를 보면서라도 농업의 바른 길을 걷자고 했던 창립정신 그대로 나가는 게 맞다.” 이 말을 듣고, 정의감에 불타는 젊은 회원들이 서운해 하였다고 한다. 당시 정농회에서는 원경선 선생님의 말이 곧 법이니까 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 많이 서운했지만 아버지의 뜻을 거스를 수가 없었던 것이다. 후에 여러 가지 현실적인 어려움이 닥쳐 기독교농민회는 없어졌다. 정농회가 지금까지 존속하여 생명농업운동의 지주 역할을 하고 있는 건 본래의 정신을 고수하였기 때문이라고 평가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교사의 길을 접고 결혼하다 남편은 이른 나이에 풀무원 공동체에 연수생으로 들어온 사람이다. 연수생들은 어느 정도의 연수 기간이 지나면 독립해서 나갔다. 남편은 군대에 갔다 와서도 풀무원에 있겠다고 나의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아버지가 바깥일과 전도일로 바쁘시니까 자기가 농장 살림을 맡아 도와드리겠다고 했다. 나의 부모님은 기뻐하셨다. 평소에도 신뢰를 하던 청년이 독립해 나가지 않고 함께 살겠다고 하니 대견하게 여기셨을 것이다. 우리 형제들은 같이 사는 사람들을 가족처럼 생각하였다. 한 집에서 함께 먹고 자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가족인 것은 맞다. 우리 형제들이 그들을 언니, 오빠라고 부르며 따른 것은 한 집에 살아서도 그렇지만 나의 부모님이 그들을 가족으로 대했기 때문일 것이다. 부천 풀무원에서나, 농장이 양주로 옮겨와서 이번에는 나이가 위인 내가 언니, 누나가 되었거나, 그 때 함께 살았던 이들과 지금까지 가까운 관계로 지내고 있는 것은 특별하다고 생각된다. 나는 남편과 결혼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남편과는 나뿐만 아니라 나의 형제들도 한 가족처럼 지냈다. 그러다 내가 대학에 들어가고 난 어느 날 우리 두 사람은 신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서로가 새로운 감정을 갖게 되었다. 우리 둘이 가까이 지내며 이야기를 많이 나누는 것을 지켜보던 부모님은 우리가 결혼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셨다. 그러던 중에 일본에서 고다니 준이치 선생님이 아버지의 초청으로 한국에 오셨다. 남편은 고다니 선생님의 강연을 듣고 바른 농사에 일생을 바치겠다고 결심을 했다. 나는 농사짓고 살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함께 사는 모든 식구처럼 나도 시간이 나면 농사를 돕고 있었고 농업을 귀한 것으로 여기는 분위기에서 자랐지만 그렇다고 농사를 평생의 내 일로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좋은 선생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없는 생활은 어떤 것일지라도 나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와의 결혼을 결심했다. 남편은 내게 하고 싶은 만큼 학교 선생을 하라고 했다. 그동안 기다리겠다고 했다. 그러나 결혼을 하면 학교를 그만 두고 같이 농사를 짓자고 했다. 부천에 있는 나의 모교인 여고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은 내게 맞는 일이었고 보람도 있었다. 나는 선생을 하라고 태어난 사람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가르치는 일이 좋았다. 결혼도 하지 않은 내가 모성을 느낄 만큼 아이들이 사랑스러웠다. 삼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제자들은 연락을 하고 때때로 여럿이 함께 찾아오기도 한다. 지난봄에도 마지막으로 담임을 맡았던 졸업생들이 나를 만나겠다고 내가 살고 있는 포천까지 찾아왔다. 학교를 그만 둘 때 섭섭함은 생각 이상이었다. 그러나 농촌 생활을 하면서 나는 새로운 폭넓은 세상을 만났다. 바깥에서의 생활이 오히려 좁은 세계였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풀무원 농장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 것도 그런 생각이 들게 한 것 같다. 유기농업에 관심이 있어서, 혹은 기독교 공동체에 관심이 있어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공동체 식구들에게 유익한 이야기를 해 줄만한 사람이 찾아오면 모임을 마련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생각과 삶을 들었다. 풀무원 공동체에서의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은 이제까지 남편과 함께 농촌 생활을 하는 내게 좋은 기운을 주었다는 생각이 든다. 남편이 겪은 시련과 극복 정농회가 창립될 때 남편은 스물여덟 살의 가장 젊은 회원이었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남편은 40 년간 한결같이 정농회 일을 해왔다. 중간에 정농회에서 정식으로 총무가 되어달라고 요청을 했고 남편은 농사일을 하면서 정농회의 실무적인 일을 맡아했다. 연수회를 위해 강사도 섭외하고 소식지도 발행하고 정농회지 발간도 맡아서 했다. 녹색평론의 편집장이었던 장길섭 선생이 정농회에 들어오면서 그가 정농회 사무를 맡아주어 남편은 사무적인 일에서는 벗어났다. 2010 년에 남편은 정농회 회장이 되었다. 전 회장이었던 정상묵 회장이 이사회에서 “김준권 부회장은 진작 회장이 되어야할 사람인데 원경선 선생님 그늘에 있었기에 이제서야 회장이 되게 되었다.” 라고 말하며 추천했고 만장일치로 선출되었다고 한다. 앞서 회장을 거친 정상묵 회장, 강대인 회장이 내 남편보다 나이가 적었기에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남편은 정농회 회장이 되자마자 어떤 사람의 함정에 빠지는 일이 생겼다. 그가 치밀하게 문서를 조작하고 일을 벌이는 바람에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그런데도 남편은 동요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다. 내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 끝내 함정에 빠지도록 두지는 않을 것이다.” 남편의 이러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그 사람이 파놓은 함정에 빠졌다. 자기가 잘못하지 않았다는 것만 생각하여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일을 대했던 것이 문제였던 것이었다. 법은 결코 성의있게 사실을 들여다보지 않는다는 것도 그 때 알았다. 그 함정에서 빠져나오려고 다시 피 말리는 대응을 하고 있을 때 남편은 내게 말했다. “정농회는 하나님의 뜻으로 세워졌다. 이것은 나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정농회를 흔들려고 하는 힘이 작용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정농회를 사랑하신다면 내가 이 함정에서 빠져 나오도록 해 주실 것이고, 하나님이 정농회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 사람의 함정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정농회는 망가질 것이다.” 남편이 그렇게 말한 것은 그 사람이 정농회를 지렛대로 썼기 때문이다. 정농회와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을 벌려놓고는 정농회를 끌어 들었던 것이다. 법적으로 곤란한 지경에 이르자 남편은 정농회 회장을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직전회장이던 임락경 목사님이 임시회장이 되었고, 남편의 임기가 만료될 때까지는 이 일을 일체 정농회 외부에는 드러내지 않도록 회의에서 결정했다고 사무국에서 알려왔다. 나는 진실을 밝히는 일에 모든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다. 남편은 이 일 때문에 정농회가 정상적으로 가동할 수 없을 것을 염려하였지만 나는 남편에게 흙탕물이 끼얹어지는 것을 볼 수가 없다는 마음이었다. 남편을 고소한 사람이 내놓은 서류들이 사실을 왜곡한 거짓이라는 것을 밝혀내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미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온 후이기에 그것을 뒤집기는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한 가지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여러 방향에서의 증빙자료들이 필요하였는데 한 가지가 아닌 여러 가지 사실을 증명해야 했다. 이 일은 지난함을 넘어 가능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 일은 잘 끝났다. 우리가 쓴 법적 비용까지 그 사람이 다 물어주라는 것으로 판결이 났다. 이런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하나님의 전적인 도움이 함께 했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 그 사람이 사실을 왜곡하여 문서를 작성했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는데 그와 가까운 사람들이 문서로 사실을 증명해 주었고, 심지어는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이 사실을 알고 미국에서 날아와 오래 전에 만들어진 중요한 자료들을 우리에게 건네주었다. 다시 일 년 만에 남편은 그 함정에서 완전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 때 정농회 임시회장을 맡고 있던 임락경 목사님이 우리 집으로 남편을 찾아왔다. 이사회에서 김준권 회장을 다시 회장으로 세우자고 만장일치로 결정하였으니 다시 회장을 맡아달라고 했다. 나는 그 사람이 어떤 거짓 문서를 만들어 남편을 함정에 빠뜨렸나 하는 것을 밝힌 여러 자료를 임락경 목사님에게 보여주었다. 임 목사님은 깜짝 놀라며 “난 정말 몰랐다. 그 사람 말만 들었기에 그 말이 다 사실인 줄 알았다.”고 말했다. 남편은 다시 정농회를 맡았다. 남편이 당한 일이 잘 해결된 것은 이제까지 남편이 바르게 살아왔기에 하나님이 도와주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남편은 정농회를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이 도와주신 것이라고 했다. 정농회 창립 40 주년, 앞으로 정농회의 길은? 올해로 정농회는 창립 40 주년을 맞았다. 정농회는 젊은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새로운 길을 모색하려고 하는 것으로 보인다. 남편은 그동안 정농회가 기독교 신앙 위에 세워지고 성령의 이끄심으로 이제까지 왔으니 신앙을 정

올해로
정농회는 창립
40 주년을
맞았다.
정농회는 젊은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새로운 길을
모색하려고 하는 것으로 보인다. 남편은 그동안 정농회가 기독교
신앙 위에 세워지고 성령의 이끄심으로 이제까지 왔으니 신앙을
정농회 중심에 놓아야 한다고 말해왔다. 남편이 이렇게 말한
것은 정농회에서 기독교 색깔을 빼자고 말하는 사람들이 큰
목소리를 낸 일이 그동안 두어 차례 있어서 그 때마다 정농회가
진통을 겪었기 때문이다. 남편은 정농회 이사의 일정 비율
이상을 기독교 신앙인으로 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남편의 생각을 정농회 회원들이 다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 신앙을 내세우면 젊은 사람들이 정농회에 가입하기를
꺼려할 것이라고 염
려하기도 하고, 기독교 신앙을 강조하는 것은 요즘 시대에는
맞지 않다고 여기는 분위기도 있는 것 같다.
정농회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놓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남편의
생각이다. 개인이든 단체이든 본래 추구하던 정신에서 벗어나지
않을 때 진정한 생명도 깃들어 있고 살아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제는 지켜볼 뿐이라고 남편은 말한다
===
농(農)이 있는 세계를 향한 구상
우치야마 다카시(内山 節)
정 남 희(전도사, 대구 제자도교회)역


===
가가와 도요히코의 기독교사회주의와 협동조합운동 김 석 주(교수, 장로회신학대학교, 아시아교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