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2. 5. 11:22
새 역사를 위하여 - 12.조국(祖國)을 바라보고
유달영
12.조국(祖國)을 바라보고
1936년 8월 중순 필자는 골짜기마다 가득한 만년빙(萬年氷)과 새로 내린 흰 눈을 밟으면서 검푸른 물의 천고의 신비 를 담고 힘차게 출렁이는 천지 (天池)의 변두리 백두산의 정상 망천후봉(望天吼峰)에 서게 되었었다.
북으로 아득하게 넓은 만주의 대 평원은 웅지(雄志)를 품은 조상들이 말 달리던 고구려의 옛국토이며, 남으로 눈부시게 펼쳐진 남화(南畵)같은 산천은 신라, 백제의 문화 무르녹고 세종, 충무 사시던 한반도라. 일제의 박해가 날로 심해져서 에이는듯 아픈 젊은 가슴 속에 이 벅차오르는 감격이야말로 과연 무엇으로 형용하랴.
아 ! 가슴이 터질듯 호대(浩大)한 만주의 큰 평원 ! 고구려의 그 기개(氣槪)와 그 기상이 수천년 옛날로 돌아가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듯하다. 아 ! 명공(名工)의 조화인듯, 더 없이 아름다운 남반도의 강과 산은 봉(峰)마다 미(美)요, 골마다 예(藝)라.
저 호대한 대륙과 이 수려한 강산이 그대로 하나이어서 우리 들의 옛 국토이었나니,신이 우리에게 주신 바에 과연 무엇이 부족하였던가.
젊은 겨레야, 지금 세계 지도를 펼쳐 놓고 우리들의 조국을 이윽히 바라보라. 아시아 동방에 정기 모여 수려한 산하 는 그대로 태평양에 고동치는 동양의 심장이 아닌가. 앞으로 호호망망(浩浩茫茫)한 대양과 뒤로 가이 없이 펼쳐진 대륙은 모두다 우리들이 마음껏 약동할 무대가 아닌가. 문화의 찬란한 둥대가 이곳에 우뚝 서 빛나 어느 때이고 세계의 갈 방향을 한 번쯤 지시함직한 자리가 아닌가.
아시아 각 민족 중에 남못지 않은 바탕과 예지를 지니면서도, 한번도 동양의 주인 자리에 서 보지 못한 오직 하나의 민족이 바로 우리가 아닌가?
신이 우리에게 부여한 무대에 부족함이 있다 말라. 마지막 문제는 그 무대위 에 움직 이는 민족에게 만 있을 뿐이다.
이 겨레가 깊은 잠에서 깨어나 자기 사명을 자각하고 장쾌한 걸음걸이로 견실하게 걷기만 한다면 반드시 역사의 꽃과 향기는 유난히 아름다울 것이며 그 열매는 이 국토 밖으로 넘처 나갈 것이다.
짧지 않은 이 나라 역사에 몇 번이나 움터 나던 문화의 싹은 한번도 시원스러이 세계사 위에 피어본 적이 없이 번번이 봉오리대로 떨어지고 말았으니, 이것은 우리의 역사적 큰 사 명이 과거에 있지 않고 미래에 있음을 분명히 말하는 것이다.
고난과 핍박과 경멸 속에 천만에 서 2천만으로 다시 여러 천만으로 무섭게 불어가는 이 겨레에게 누가 과연 역사적 사명이 없다 하겠는가? 누가 한갖 의미없는 번식이라고 일컬을 것인가?
비록 세계가 험 난하고 우리의 현실이 암담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확고하게 방향을 정하고 일그러진 현실을 바로 잡아 내일을 준비 해야 할 것이다. 신이 맡기고자한 바 크고 중한 사명이 우리들 위에 있을지라도, 우리가 그 사명을 감당할만한 성실과 용기와 슬기가 없는 때에는 그 사명은 반드시 다른 민족의 어깨 위에 옮겨질 것이다. 그 날에는 우리들은 벌써 무용의 존재가 되어 지층(地層)속의 파충류들처럼 생명없는 화석(化石)이 되어 역사 위에서 그 자취를 감추어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 나라에는 요행을 바라는 심리가 바닥에 깔려 있다. 이럭 저럭 남의 덕으로 통일하고 쓰고 남은 원조를 해마다 얻어들여 힘들이지 않고 잘 살아 보려는 꿈을 꾸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억척스러운 진취의 기상과 험난을 돌파하는 분투와 불굴의 독립 정신이 없이 우리 스스로의 앞 길을 개척해 나갈 수는 없을 것이다. 또 요행으로 순로(順路)를 얻어 우리의 새 역사가 일시적인 표면적 발전을 하였다고 가정하더 라도 이 것은 분명히 사상(砂上)의 누각이 될 것이다. 요행은 멸망으로 통하는 가장 가까운 길인 것이다.
제 힘으로 세우지 않은 것이 끝까지 제 것이 된다는 천리(天理)는 있을 수 없다.
8,15에 뚝 떨어진 해방으로 우리는 진정한 독립을 얻지 못 하였고 지금도 이렇게 견디기 어려운 진통과 막대한 대가를 지불하고 있는 것이다. 고금에 걸쳐서 대가를 치르지 않고 얻은 독립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지금 폭풍 속에 휘몰리고 있기는 하나 장차 맞이할 봄을 바라고 씨와 거름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지금 전 세계는 자기들의 자손들이 피 를 뿌린 이 나라에 대하여 그 동향과 진로를 큰 관심으로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파란중첩(波瀾重疊)의 어려운 현실 속에서 우리는 덴마아크가 걸어온 역사에서 수난(受難)의「쓴 잔」과 찬란한 건 설의「산 말씀」을 듣고 보는 것이다. 북빙양(北氷洋)기슭 황무지에 기적처럼 피어난 20 세기의 알찬 문화 창조의 역사는 우리 들의 갈 길을 지시 하는 신의 계시(啓示이다. 어느 시대이고 진리와 동행 하는 역사만이 생의 환회 를 노래 할 수 있는 것이다.
역사의 거센 바퀴 아래, 정치의 큰 변혁으로 또는 경제의 큰 변동으로, 덴마아크의 역사에 일대 파탄이 일어나 그들의 아름다운 족적(足跡)이 과거의 한 조각 역사적인 기 록으로 되는 날이 온다 할지라도, 그들은 영구히 진리의 실증자(實證者)로서 불행을 안고 헤매는 모든 민족들에게 넉넉히 분발의 활력소가 될 것이 다.
다음 노래는 필자가 지은 예산 농고(禮山農高) 교가의 일부 이다.
천만년 잠을 자던 조국 산천아
얼마나 우리 오길 기다렸더냐
청춘의 영광을 노래하면서
개척의 큰 쟁기롤 힘차게 몰자
우리의 땀방울로 젖은 국토에
눈부신 새 역사의 꽃이 피리라
장부의 품은 뜻이 철석 (鐵石)같으니
폭풍도 눈보라도 거칠 것 없다.
나는 이 노래를 쓰면서 스스로 벅찬 가슴을 안고 눈물지었었다. 사람도, 산과 강들도 다 같이 하나가 되어 분발할 새 아침이다. 5천년 동안 잠자던 민족도 강산도 이제는 깨어나야 할 때이다.
젊은 겨례야,우리가 걸어온 가혹한 민족의 시련을 의미 없는 수난으로 하지 말자.
이 전고에 없는 환란을 위대한 역사의 전개를 위한 산모의 진통으로 하자. 하루살이 같은 덧없는 여생을 어리석게 썩히지 말고 새 역사의 영광이 우리들 위에 오도록 투쟁하자. 너 와 나,우리 다 같이 이 수난의 역사의 서곡(序曲)에 종지부 를 찍도록 하자. 그리고 장쾌한 새 역사의 창조틀 위하여 억척스럽고 을바르게 행진하자.
언제나 성실하고 억척스럽고 또 슬기로워 진리와 동행하는 자만이 번영의 역사의 주인이 된다는 것을 확신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