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24

생태교육연구소 - 정해진씨 논문(2)

생태교육연구소 - 정해진씨 논문(2):

 정해진씨 논문(2)
백수
조회 수 : 14412005.01.03 (11:25:25)
2. 상호작용에 의한 교육

그룬트비는 ‘상호작용’이라는 개념을 통해 그가 생각하는 교육의 여러 가지 측면을 설명하고 있다. 버그(K.E. Bugge)는 Grundtvig's Educational Ideas (그룬트비의 교육사상) K.E. Bugge, "Grundtvig's Educational Ideas," N.F.S. Grundtvig : Tradition and Renewal, Christian Thodberg․Anders Pontoppidan Thyssen ed., (Copenhagen: Det Danske Selskab, 1983).
에서 교육을 주제로 한 그룬트비의 글을 검토해본 결과, 상호작용이라는 개념이 가르침과 교육에 관한 그의 사상 속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그룬트비는 삶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관계들 사이의 상호작용에 주목한다. 그룬트비가 이야기하는 상호작용은 좁게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볼 수 있고, 보다 넓은 범위에서는 역사와 신화를 통해 이루어지는 과거와 현재의 삶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교육의 내용과 보다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는 좁은 의미의 상호작용에 초점을 두어 살펴보고자 한다.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은 그룬트비가 생각하는 교육의 형태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개념으로, 이를 통해 그룬트비는 교사와 학생의 관계, 학생과 학생의 관계, 그리고 수업 및 학교생활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Within Living Memory(1837)(살아있는 기억 속에서)”라는 제목의 강의에서 그룬트비는 교사와 학생 사이의 진정한 교류가 이루어질 수 없는 강의식 수업의 단점을 지적하면서, 진정으로 살아있는 상호작용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교사도 가르치는 입장이 아닌, 함께 배우는 입장에 설 것을 주장했다.
당시의 상황에서 이러한 상호작용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학교가 로마-이탈리아의 문화 당시 덴마크의 지식인들은 대부분 로마-이탈리아 학문, 그리고 라틴주의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반면, 서민들의 삶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던 덴마크의 언어와 문화 등은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겼다. 따라서 당시의 학문과 교육은 주로 책이나 강의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라틴어 문법을 암기하는 등의 삶과 동떨어진 활동이 주를 이루었다. 따라서 그룬트비는 이러한 로마-이탈리아 문화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자유로운 상호작용의 전제조건으로 생각했다.
와 전통적인 기독교관 당시의 전통적 기독교관에 따르면, 현재의 삶은 이후 내세의 삶을 위한 준비에 불과했으며, 따라서 현재의 세속적인 삶은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룬트비는 이러한 기독교관에 반대했으며, 교육은 “인간 삶의 명료화”, 즉 삶의 의미와 목표를 명확히 하는데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따라서 그는 이러한 기독교관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비로소 현재의 삶에 중심을 둔 살아있는 상호작용이 이루어 질 수 있다고 보았다.
, 그리고 시험을 치러야 할 의무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어야 했다. 특히 학생들이 시험을 치러야 하는 의무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수업에서 교사와 학생 사이에 보다 생기 있고, 자유로운 상호작용이 가능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시험을 치르지 않는 것은 이후 그룬트비의 사상을 기초로 하는 평민대학의 매우 중요한 특징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조건을 갖춘 학교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수업의 이상적인 모습은 삶의 많은 것을 경험한 교사의 이야기로 시작하여 교사와 학생 또는 학생들 사이의 토론과 대화로 마무리되는 것이다. 이는 교사로부터 학생에게 전해지는 일방적인 수업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 교사와 학생, 그리고 학생과 학생 사이에 영향을 주고받음으로써 서로를 변화시킬 수 있는 수업이다. 학생들이 평민대학에 가져온 다양한 삶의 경험들은 교사와 학생들 사이의 차이점을 강조하기보다는 서로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을 찾아가면서 서로를 존중하는 법을 배워가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수업 뿐 아니라 다양한 활동과 공동체 생활 속에서 이루어진 상호작용은 교육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룬트비가 제안한 학교는 단순히 수업을 통한 학습만이 이루어지는 닫힌 공간이 아니라, 교사와 학생이 학교 안에서 함께 생활하고 학교를 운영해 나가는 열린 삶의 공간이다. 따라서 그룬트비는 학교에서 교사와 학생 모두가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할 수 있는 기숙학교를 제안하였다. 이러한 공간 속에서의 상호작용은 생활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진정으로 살아있는 것이 될 수 있다.
상호작용은 다양한 계층과 연령의 학생들 사이에 일어나게 됨으로써 그 의미와 효과가 더욱 증대된다. 그룬트비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발달 단계에 따라 교육이 이루어질 것을 주장하였으며, 각 단계의 학생들이 가지는 특징에 주목했다. 교육에 있어서 그가 특히 중요시 생각한 단계는 감정(emotion)이 발달하기 시작하는 청년기(youth)로, 교육하기에 가장 적절한 시기라고 생각했다. 이 시기의 청년들은 보다 활발하고 생기 있는 상호작용을 통해 많은 것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를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따라서 그룬트비는 이 시기의 청년들은 자연스러운 상호작용의 구조 속에서 삶의 경험과 그에 대한 성찰을 특징으로 하는 보다 성숙한 세대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점차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해야 한다고 보았다.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함께 생활하며 상호작용 하는 것 역시 중요한 내용으로, 특히 공무원과 같은 상류계층의 사람들이 평민 계층의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의 삶을 이해하는 것은 그룬트비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그룬트비는 국가의 일을 맡아보는 높은 계급의 공무원들이 평민의 삶을 이해하지 않고는 국가의 일을 올바로 수행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따라서 계층 간의 소통 또한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그룬트비는 ‘삶을 배우는 학교(School for Life)’라는 글에서 이러한 필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덴마크의 공직자들이 업무를 잘 수행하기 위해서는 덴마크어로 말하고 생각해야 할 뿐 아니라 그 어떤 사람보다도 우리 조국과 그 조국의 전반적인 구성 체계를 사랑하고 잘 알아야만 하는 사람들... 이 사람들이 평민대학에서 비록 라틴어는 모르고 기껏해야 덴마크어를 알고 있을 뿐이지만, 경험을 통해서 라틴주의자들이 쓴 그 어떤 책에 들어 있는 것보다도 이 나라의 민족적․사회적 삶, 그리고 여러 군소 지역들의 사정을 훨씬 잘 알고 있는 그들의 동시대인들과 함께 살면서 서로 접촉하고 영향력을 주고받는 활동이 없다면, 이 일은 할 수 없다.” N.F.S. Grundtvig, “삶을 배우는 학교,” 김성오 역, 『처음처럼』, 통권 제36호(2003 3-4), p. 105.


그룬트비는 이처럼 다양한 형태의 상호작용을 통해 사람들이 자기 자신과 삶에 대한 진정한 깨달음(각성)을 얻게 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생각했다.

3. 살아있는 말에 의한 교육

그룬트비의 ‘살아있는 말(the living word)’이라는 표현은 어떤 주제든 교사와 학생 간에 이루어지는 동등한 입장에서의 대화라는 뜻과 감정을 표현하게 하고 듣는 이의 가슴을 파고들어 상상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놀라운 힘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Karl Kristian Aegidius, 앞의 글, 2001, p. 70.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살아있는 말은 외국어가 아닌 모국어로 이루어진 것이어야 하며, 글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사람들의 입을 통해 사용되는 ‘말’이라는 것이다. 이는 삶을 위한 교육에서 살아있는 상호작용이 일어나게 하는 가장 유용한 수단이 된다. 그룬트비는 Norse Mythology(북구 신화)의 서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라틴어가 숨기려 하지만 우리가 입을 열 때마다 들춰내는 비밀, 즉 언어가 펜이 아니라 입의 것이라는 점과 생각과 감정, 신념과 세계관은 손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것을 통해서 간단하고 정확하게, 명확하고 활기차게, 뚜렷하고 알차게 전달되고 퍼져나가며 표출된다고 하는 비밀을 운 좋게 알아차리게 된다면... 그는 굳이 내가 언질을 주지 않아도 얼마나 경이로운 광채가 우리들 인간의 삶에 쏟아지고 있는가를 보게 될 것이다... 만약 독자가 아직도 무덤 속에 있다면 내 책, 아니 이 세상의 모든 책을 가지고도 그를 일깨워 생명의 진가를 알게 할 수는 없다. 내가 감히 바라는 것 전부는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말을 하고 들음으로써 그 말의 혜택을 누렸으면 하는 것이다. 어린이들은 혀와 귀를 갖고 태어나지, 옆구리에는 책을 끼고 손에는 펜을 쥐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미처 말을 알기 전에 과연 무엇을 쓸 수 있을지 자못 궁금하다.”  N.F.S.  Grundtvig, “Introduction to Norse Mythology 1832,” 김성오 역, N.F.S. Grundtvig: Selected Writings, Johannes Knudsen․Enok Mortensen․Ernest D. Nielsen trans., Johannes Knudsen ed.,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6), pp. 28-29.


그룬트비는 모국어를 ‘생명의 언어’라고 표현하는데, 이는 모국어가 다른 어떤 형태의 언어나 개념적 장치보다 삶의 원천에 도달할 수 있게 하는 가장 좋은 수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일상의 생활에서 사용하는 말, 즉 모국어에는 그들의 문화와 삶의 모습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으며, 이는 각 민족의 고유한 생각과 정신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이다. 평민의 언어는 삶에서 성장한 것이고, 그것은 역사와 그 나라의 자연과 평민 속에 동화되어온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모국어는 삶에 대한 지식을 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룬트비가 주장하는 살아있는 말은 나라와 그 나라의 역사 그리고 인문․자연 환경을 오늘의 삶 속에서 적극적으로 되살리고 활용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그 의미가 완성되는 것이었다. 김성오, “그룬트비 읽기,” 『처음처럼』, 통권 제36호(2003 3-4), p. 72.

그룬트비는 이러한 살아있는 말에 가장 가까운 것이 ‘시’와 ‘신화’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교사는 학생들에게 즐겁고 깊은 인상을 남길 수 있는 이야기를 하는 시인이 될 것을 주장한다.
언어에 대한 그룬트비의 이러한 생각들은 그가 제안한 평민대학의 교육에 잘 반영되었다. 특히 그 수업방식에서 잘 나타나는데, 모국어로 이루어진 토론식 수업과 끊임없는 대화가 이루어질 것을 강조했다. 따라서 그룬트비가 제안한 평민대학에서 사람들은 모국어를 배움으로써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하고, 마음에 떠오르는 모든 것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가슴과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것들을 표현할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Kaj Thaning, 앞의 책, p. 153.
  

4. folkelighed(폴켈리드)정신에 바탕을 둔 교육

시대적 배경에서 살펴보았듯이 그룬트비의 교육사상이 발달한 시기는 그동안 무시되었던 평민들의 사회적 역할과 정치참여에 대한 관심이 생겨나기 시작하던 때였다. 그룬트비는 국가의 근간을 이루는 평민들을 교육을 통해 일깨우고, 그들의 정신을 살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했다. 그는 평민교육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역설하였다.

“그러나 고귀하고 자유로우며 대중적인 덴마크 평민대학이 공직자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필요하다면, 공직자가 되는 것은 원하지도 않고 될 수도 없지만 스스로를 돌보고 또 공직자들을 지원해주어야 할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그 필요성이 덜할 수 있겠는가? 한 국가의 근간인, 크고 작은 군소 자치인들 및 자작농들, 모든 종류의 기능인들, 선원들과 장사들이 쟁기 뒤에서, 일터에서 돛대 옆, 채소 가게에서 얻을 수 있는 것 말고 다른 교육과 가르침은 필요 없다고 하는 것은 전제군주들이나 야만인들이 믿는 것이라면 모를까, 북구의 여러 나라들과 국왕들에게서 볼 수 있었던 사고방식은 아니었으며, 결코 그럴 수도 없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한 핏줄’이며, 그래서 오두막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이나 저택에 사는 부자들이나 똑같은 수학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우리나라 말고 더 잘 들어맞는 곳은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그 어떤 외부 세력들도 무력으로 침공해서 그곳에 살던 원주민들을 강제로 굴복시키지 않았던 북구의 국가들에서만 볼 수 있는,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것 같은 자연적인 평등을 우리는 충분히 길러낼 수 있다. 왜냐하면 이것이 가능한 그 어떤 방법보다도 우리의 조국애에는 깊이를, 국민 교육에는 더 큰 진실성을 부여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N.F.S. Grundtvig, “삶을 배우는 학교,” 김성오 역, 『처음처럼』, 통권 제36호(2003 3-4), p. 107.


이처럼 그룬트비는 지위, 생각, 신분, 연령 등의 차이에 관계없이 공동체에 속하는 모든 사람들이 원칙적으로 동등한 인간적 가치와 존엄성을 인정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김성오, 앞의 글, p. 71.
이러한 그룬트비의 생각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 folkelighed(폴켈리드)라는 개념이다.
그룬트비 사상의 근본적인 개념 중 하나인 folkelighed(폴켈리드)는 그룬트비의 교육사상, 특히 평민교육에 대한 생각을 형성하는 바탕이 되었다. 이는 매우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다른 나라말로 그 의미를 온전히 전달하는 것이 까다로운데, 덴마크어로 국민, 국가, 민주적 특질 또는 성격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룬트비는 folkelighed(폴켈리드)와 대등한 개념으로 ‘국민의 자유’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하였으며, 개인이 특정한 국가의 일원으로 태어난 것처럼 어떤 특정한 문화집단이나 학교와 같은 공동체를 선택해서, 책임과 헌신 뿐 아니라 희망과 기대를 품고 그 공동체의 필수 불가결한 일원이 된다는 뜻으로 해석하였다. Karl Kristian Aegidius, 앞의 글, 2001, p. 71.
이러한 생각에 바탕을 둔 평민교육은 자신과 공동체를 이루는 사람들 모두를 위해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든 교육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도달하게 된다.
또한 매니히(Peter Manniche) 20세기에 그룬트비의 사상을 따른 사람들 중 하나로 1921년 Elsinore 지역에 International people's College를 세운 덴마크 사람이다.
는 folkelighed(폴켈리드)를 ‘모든 사람을 포용하는 공동체적 삶’으로 해석하였다. 이러한 매니히의 해석을 통해 우리는 folkelighed(폴켈리드)라는 개념에서 민족주의적인 측면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 나라의 정체성(identity), 즉 그 나라의 문학과 시 그리고 삶의 방식을 보존하는 일과 관련되어 있다. 그룬트비는 국가가 정체성에 대한 강한 의식을 가지지 못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민족주의적인 단계에서 멈추게 되어 영토를 넓히기 위해 주변의 약소국을 침략하게 된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룬트비가 이야기하는 folkelighed(폴켈리드)는 좁은 의미의 민족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버그 교수의 설명처럼, 덴마크와 같은 작은 나라들이 다른 강력한 나라들에 의해 문화적으로 손상을 입는 것을 막으려는 하나의 방법을 장려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Max Lawson, op. cit., pp. 14-15.
즉, 인간은 자신과 자신이 속한 문화의 정체성에 깊이 뿌리박고 공동체 의식을 자각하면 할수록 좀 더 쉽게 편견 없이 다른 공동체와 문화를 접할 수 있으며, 함께 협력하고 배우는 일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Karl Kristian Aegidius, 앞의 글, 2001, pp. 71-72.


5. 민족정신에 바탕을 둔 교육

그룬트비는 교육은 반드시 역사적이며 시적이어야 한다는 점을 주장하였다. 교육은 시와 신화, 그리고 민족이 가지고 있는 역사의 도움을 받아 젊은이들을 안내해야 하며, 이를 통해 젊은이들은 삶의 근본적인 조건들을 드러내는 과거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나라의 희망이 보이지 않았던 당시의 상황에서 예전의 생기 있는 국가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전성기를 이루었던 과거의 역사를 아는 것이 필수적인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를 위해서 그는 학생들이 덴마크의 역사와 북구 신화 그리고 영웅담 등을 통해 조상들을 만나고 그들과의 정신적인 교류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룬트비는 이러한 교류를 통해 사람들은 당시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새로운 희망과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따라서 그룬트비는 학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가르쳐야 할 것으로 민족의 역사와 신화를 제시했다.
역사교육에 대한 그룬트비의 생각은 그의 역사관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룬트비에게 있어서 역사는 단순한 사건들의 축적이 아니라 깊은 수준에서 본다면, 그것은 인간 인식의 점진적인 명료화, 또는 인간의 발달에 대한 설명이었다. 역사는 현재에 빛을 던져주는 것으로 “세계가 어떻게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발전하게 되었는가, 인간의 생활과 인간의 사상들과 인간 조직의 모든 형태들이 어떻게 현재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었는가”를 설명해주는 것이었다. 그는 한 민족의 역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경험들은 개인의 삶에 유용한 예를 제시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이러한 역사는 개인의 삶의 과정에 대한 깨달음, 즉 삶의 계몽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룬트비는 역사는 인류의 기억이며, 이 같은 인류의 살아있는 기록이 없다면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며, 자기 자신에 대하여 아무것도 말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Kaj Thaning, 앞의 책, p. 141.

그룬트비에게 있어서 인간은 추상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신학적으로도 이해될 수 없으며, 단지 총화를 이루는 역사적인 어떤 것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 존재였다. 이는 바로 그가 무엇보다 중요시 여겼던 사람들의 세속적인 일상, 즉 삶에 대한 강조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즉, 과거 그곳에 살았던 조상들의 실제 삶의 경험이 역사 속에 축적되어 있기 때문에 인류의 공통적인 모습 뿐 아니라, 각각의 국가와 민족이 가지는 그들만의 삶의 방식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이러한 민족의 역사를 통해 덴마크인들은 덴마크인다운 점을 찾아내고 나아가 앞으로의 삶에 대한 비전을 제공받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그룬트비는 역사관은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아 결정된 것으로,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헤르더의 역사관과 그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그룬트비는 북구 신화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신화의 의미와 기능에 대하여 설명한다.

“모든 민족의 신화는 그 민족의 유쾌한 표현이며 또 그 민족의 정신의 신전을 구성한다는 점을 가정한다면, 신화는 필연적으로 예언적이다. 그것은 한 민족의 운명을 미리 암시해준다. 이런 일은 모든 사람들의 젊은 시절, 특히 시인들의 청춘이 예언적이라고 하는 그런 뜻에서 일어난다. 그 누구도 자신이 젊은 시절에 꾸던 꿈과 그 때 가지고 있었던 욕망에 간직되어 있는 정신적인 약속들 이상이 될 수 없다. 이렇게 우리는 그리스인들과 북구인들의 젊은 꿈이, 그것들을 일상생활의 표현으로 만들어버리는 신화학자들의 생각을 훨씬 넘어서는 깊이와 폭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틀림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N.F.S.  Grundtvig, “Introduction to Norse Mythology 1832,” 김성오 역, N.F.S. Grundtvig: Selected Writings, Johannes Knudsen․Enok Mortensen․Ernest D. Nielsen trans., Johannes Knudsen ed.,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6), p. 33.


그룬트비에게 있어서 신화는 한 민족의 고유한 정신과 성향을 담고 있으며, 그것은 그 민족의 시원적 정서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또한 시대를 넘어선 오늘날의 입장에서는 예언적인 미래가 될 수 있는 것이었다.한 민족의 역사는 그들의 신화 내부에 감추어져 있는 것으로,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삶을 그들의 신화에 비추어볼 수 있었다.  

6. 기독교 정신에 바탕을 둔 교육

그룬트비의 세계관은 기본적으로 기독교 정신에 바탕을 두고 있다. 따라서 그룬트비의 교육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기독교에 대한 생각을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다. 그룬트비는 기독교적 세계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북구가 깨어나면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시적이든, 역사적이든, 자연적으로 생겨났든 초자연적으로 생겨났든, 율법적․기독교적 세계관이 유일무이한 그리고 진정한 인간의 기본적인 세계관이라는 생각에 귀 기울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모든 이교도의 신들이 소멸하고, 모든 정령들이 사라졌으며, 영원이라는 것도 공허한 말이 되었을 때에도 이 세계관만은 뚜렷이 빛을 발했다. 이 세계관은 18세기에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을 받아 일어난 일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신성 뿐 아니라 그 자체의 신성한 기원까지도 입증하였다. 그러므로 이 세계관은 실용적인 삶고 학문에서도 우리의 길잡이별이 되어야 한다.” Ibid., p. 23.


그룬트비는 기독교를 ‘하나님의 복음이며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 모두에게만 평화를 주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선물’로 보았으며, 기독교의 율법과 복음이 사람들과 자유로운 관계를 맺는 것을 매우 중요한 문제로 생각했다. 그러나 당시의 기독교는 구원의 문제에 있어 사람들에게 정신적인 강요를 하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었으며, 학문 또는 학교에서와 마찬가지로, 문자로 되어 있는 성경 중심의 신앙 활동을 더 중요시하였다. 이러한 당시 기독교의 모습에 반대했던 그룬트비는 모든 기독교도들, 특히 덴마크의 기독교도들이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정신적인 강요는 인간의 도리가 아니라는 것과 기독교인다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역설하였다. 그는 기독교도들이 자연에 순종하며 사는 사람들과 잘 화합할 때 모든 곳에서, 특히 덴마크에서 가장 먼저 기독교와 국민의 삶이 본래의 자유롭고 올바른, 그리고 자연스러운 신앙관계를 회복할 것이라고 N.F.S.  Grundtvig, “Folk-Life and Christianity 1847,” 김성오 역, N.F.S. Grundtvig: Selected Writings, Johannes Knudsen․Enok Mortensen․Ernest D. Nielsen trans., Johannes Knudsen ed.,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6), p.40.
생각했다.
그룬트비는 진정한 기독교 정신은 정신의 자유와 국민의 삶을 전제로 하고, 혹 그것이 없는 경우에는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따라서 기독교는 국민의 삶에 봉사하는 정신의 자유라는 대의를 진전시킬 수 있을 때, 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보았다. 기독교가 사람들을 이롭게 하려면 그것은 정신의 자유와 국민의 삶을 전제하거나, 그것들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룬트비의 생각이었다.
그룬트비에게 기독교 신앙은 ‘자연적인 것이며, 인간이 삶이 없이는 결코 존재할 수 없는 것’이었다.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단어가 살아있는 인간적인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기독교 신앙의 의미를 우리에게 전달해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단어를 통해서 사람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상황과 공동생활의 본질과 자신에 대해 알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그룬트비는 인간의 빈약한 신학과 신앙생활에서 기독교인이 처량한 모습을 보이게 되는 이유는 인간의 진실한 생명에 대한 참여의 빈약과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인 인간의 삶에 대한 무관심의 결과라고 생각했다. Kaj Thaning, 앞의 책, pp. 205-206.

그룬트비가 자신의 교육 사상에서 살아있는 상호작용 또는 공동체 내에서의 나눔(fellowship)을 강조하는 것은 교회는 단지 성서를 읽는 모임이 아니라 신앙인들 사이의 나눔이 핵심이었다는 그의 신학적 믿음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에도 불구하고 그룬트비는 종교를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일은 평민대학에서 할 일이 아니며, 어떤 단계의 교육에서도 그러한 종교교육이 차지할 자리는 없다는 생각을 확고히 했다. 그는 종교교육은 학교가 아닌 교회의 문제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룬트비의 생각은 오해의 소지가 있으나, 그의 생각은 기독교를 부정하거나 배재하는 것이 아니라 의무적인 종교교육이 폐지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성서나 기독교인을 노래하거나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독단적인 교육을 없애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룬트비는 종교적 각성을 일으키는 것은 교회와 기독교도인 부모들의 책임이라 생각했다. 덴마크 프리스콜레협회, “그룬트비와 콜의 교육사상과 덴마크의 프리스콜레”, 『처음처럼』, 통권 제23호(2001 1-2), p. 110.

성직자였던 그룬트비가 학교에서의 종교적인 가르침을 거절했다는 점은 놀라운 일로 생각될 수 있으나, 이는 그룬트비의 복잡한 개념 중 하나인 ‘첫째는 인간, 그 다음으로는 신앙인(First, the Human, Then the Christian)’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룬트비는 이 말을 통해 사람은 먼저 진정한 인간이 되지 않고는 진정한 신앙인(Christian)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하였다. Max Lawson, op. cit., p. 12.
또한 이 문장을 통해 그룬트비는 인간의 생명을 무시하던 당시의 기독교의 형식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결국 인간의 삶을 중심에 두고 있는 그룬트비의 사상을 잘 드러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Ⅳ. 그룬트비 교육사상의 실천적 원용

1. 평민대학

1) 평민대학 Larson은 1970년에 발표한 그의 논문에서 folk highschool이라는 용어는 덴마크 원어인 folkehojskole의 의미를 명확히 전달할 수 없다고 언급했다. 또한 Schueler는, “학교의 이름을 ”high school"이라고 짓는데 있어서, 그것은 그러한 학교들이 일반 대중들이 “높은(high)” 생각과 만날 수 있도록 하고, 국민의 성격과 공동체성에 대한 최고의 이상에 대한 큰 뜻을 품을 수 있도록 도움을 줄 것에 대한 희망을 담고 있다.“고 설명한다. Herbert Schueler, ”Education in Scandinavia“, Comparative Education, 346, in Dean Gordon Larson, "A Comparison of the Spread of the Folk High School Idea in Denmark, Finland, Norway, Sweden and the United States," (Ed.D. diss. Indiana University, 1970), p. 2; Katherine Brown, ”Analysis of the Implementation of the Grundtvigian Folk Highschool Ideal within Three Provincial Grundtvigian Finlandssvensk Folk Highschools in Pre-independence Finland,“ (Ph. D. diss. Loyola University, 2001), p.ⅺⅴ에서 재인용.
의 교육목적

그룬트비를 추종하던 사람들과 의식 있는 농민들에 의해 생겨나기 시작한 덴마크의 평민대학(Folk High School)은 과학적인 교육이론을 바탕으로 세워진 것이 아니다. 평민대학의 교육목적과 방법은 모든 점에서 일반 국민들의 생활에 의해 결정된 것이었으며 국민으로부터 시작된 학교이다. 홀거 베그트룹․한스 룬트․페터 매니히 공저, 앞의 책, p. 18.

가장 먼저 세워진 평민대학은 1844년 플로어(Christian Flor) 교수가 슬레스비 공작의 영지에 살던 농민들과 함께 북 슬레스비(North Slesvig)에 세운 뢰딩(Rødding) 평민대학이었다. 이 학교는 무엇보다도 덴마크의 청년들에게 조국에 대한 사랑을 가르치는 것, 독일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 점차 거세어지는 독일어와 독일문화의 영향력에 대항하여 덴마크어와 덴마크의 문화를 지키도록 교육하는 것, 농업과 상업을 더 잘 할 수 있도록 하는데 도움이 되는 실제적인 과목을 가르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Karl Kristian Aegidius, 같은 글, 2001, p. 71

다음으로 세워진 평민대학은 크리스텐 콜(Christen Kold)에 의해 세워진 학교였다. 콜은 교육에 있어 그룬트비와 의견을 달리하는 부분도 있었으나, 그룬트비의 사상을 교육 현장에서 가장 잘 실현한 인물이었다. 그의 헌신적인 노력과 실천으로 운영된 평민대학은 이후 새롭게 생겨난 많은 평민대학들의 모델이 되었다.
한때 링그비(Lyngby)에 있는 평민대학의 교장이었던, 보룹(Ernst Borup)은 “평민대학은 이미 마련되어 있는 삶의 철학에 의해서가 아니라, 학생들이 그들 스스로 생각할 수 있도록 돕고, 진실한 가치와 거짓된 가치를 구분할 수 있도록 가르치며, 비록 그것이 가장 어려운 것이라 하더라도, 가장 올바른 길을 선택하고자 하는 의지를 길러줌으로써 학생들을 교육하고, 삶에 대한 올바른 자세를 심어주고자 한다”고 말했다. Peter Manniche, Denmark; A Social Laboratory, (Copenhagen: Duplex-Trykkeriet, 1969), p. 110.

이러한 평민대학에서는 학생들의 정서적이고 사회적인 성장을 매우 중요시 생각한다. 특히, 학생들의 사회적 성장은 평민대학의 교육과정을 구성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요소들 중 하나이다. 따라서 이곳에서는 공동체 생활을 통해 학생들의 사회적인 발달을 돕고자 하며, 학교를 운영하는 과정에도 학생들이 직접 참여하도록 함으로써 학교 안에서 올바른 민주주의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학생들은 보다 민주적인 사회를 경험하고, 민주시민으로서의 자질을 습득해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평민대학의 중요한 교육 목적들 중 하나는 학생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환경과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하고, 그들이 다시 지역사회로 돌아갔을 때, 그곳 환경을 더욱 풍부하고 의미 있는 곳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으로 기르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평민대학은 결코 학생들을 그들의 삶과 분리시키지 않는다. 학생 개개인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곧 그들의 삶의 방식을 설명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David C. L. Davis, Model for a Humanisitc Education: The Danish Folk Highschool, (Ohio: Charles E. Merrill Publishing Company, 1971), p. 8.

또한 평민대학의 교육은 반드시 삶에 유용한 지식을 얻고자 하는 학생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어야 하며, 그러한 가르침 속에서 학생들이 직접적으로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도움을 줄 것을 강조한다. 따라서 평민대학에서는 교육내용을 마련할 때, 학생들의 흥미와 관심을 지속적으로 반영하는 것을 중요한 원칙으로 삼고 있다. 즉, 개인의 존재가 무시되기 쉬운, 모든 학생들에게 획일적으로 주어지는 교육내용이나 교육방법은 거부하며 학생들의 이해력과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이전의 지식을 고려하여 수업을 진행한다. 따라서 다양하고 구체적인 예를 사용하고, 외국어를 과도하게 사용하지 않는 이해하기 쉬운 형태의 강의로 수업내용을 전달하는 것이 강조된다. 이러한 평민대학의 강의는 똑같은 생각을 추상적인 언어로 표현하고 있는 글이나 잡지 등을 읽는 것보다 이전에 거의 교육을 받지 못했거나 읽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훨씬 더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쉬운 것이다. 또한 평민대학에서의 강의는 가능한 한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것이어서 강의를 듣는 학생들이 그 과목이 자신들과 실제적으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중요한 과제로 삼는다. Thomas Rørdam, The Danish Folk High Schools, (Denmark: Det Danske Selskab, 1965), pp. 20-21.
학습에 대한 학생들의 흥미와 관련하여 생각할 수 있는 또 한 가지는 즐거움으로 평민대학에서는 무엇보다 학생들이 학교에서 즐겁게 생활하는 것을 중요시 여긴다. 평민대학의 대표적인 실천가로 알려진 콜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들을 즐거움 속에서 해나갈 때, 진정한 계몽도 이루어질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다음으로 평민대학에서의 교육은 학생들의 일시적인 흥미나 일상에서의 요구에 한정되지 않고, 그 이상의 것을 주고자 한다. 보다 넓은 외부의 세계와 사람들이 안고 있는 삶의 문제들에 새롭게 눈뜰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평민대학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의 중요한 역할이다. 이러한 교육은 학생들이 새로운 것에 대한 흥미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학생들의 시야를 넓혀주는 역할을 한다.
학생들에게 그들 자신의 존재에 대한 보편적인 방향을 제시해주는 것 또한 평민대학의 중요한 교육목적이다. 형식적이지 않으며 자유로운 강의는 이를 전달하기에 적절한 방법으로, 이러한 수업에서는 학생들이 살고 있는 나라의 지리와 역사를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사회의 상황들과 종교, 문학과 일반적인 문화를 다루게 된다. 수업의 다음 단계에서는 다른 나라들과의 비교, 그리고 자신들의 것과 다른 문화적 형태, 사회 체제 그리고 삶에의 철학 등을 설명해보고, 그것을 평가하는 활동 등으로 이어지게 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평민대학의 교육은 모두 인간 개개인의 삶과 삶이 안고 있는 가장 깊은 문제들에 빛을 비춰주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평민대학에서 생활하는 동안 학생들은 다양한 경험을 통해 삶에 대한 여러 가지 질문들을 얻게 된다. 학생들이 가지게 된 이러한 질문들은 거의 그 답을 찾을 수 없는 경우가 많지만, 그러한 문제들을 마음속에 떠올려 보고 교사 또는 동료학생들과 함께 토론해보는 것만으로도 학생들에게는 매우 좋은 경험이 될 수 있다. 삶에 대한 질문의 답을 찾고자 하는 노력과 세상의 어느 부분에 자신이 알맞은가를 발견하는 과정들 속에서의 성장이 학생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것이며 평민대학이 궁극적으로 학생들에게 주고자 하는 것이다. David C. L. Davis, op. cit, p. 4.

2) 평민대학 교육의 실제

평민대학과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은 일반적인 학교의 개념과는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르다. 이 학교는 교과목, 수업 방식, 그리고 교실형태 등을 자유롭게 결정한다는 특징이 있으며, 평민대학 간에도, 그 설립 철학과 이념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운영되고 있다. 각 학교마다 필요에 따라 서로 다른 수업 기간을 채택하기도 하며, 이론과 실제를 연결시킨 과목들, 전통적으로 가르쳐오던 것과는 전혀 다른 과목들, 범교과적 주제들, 혁신적인 교육방법의 도입, 소규모 학습동아리, 강의, 워크숍, 학생주도 수업 등 각 학교의 철학과 이념, 상황에 맞는 교육운영을 하고 있다. Helge Bekke-Hansen, "평민대학에 대하여,“ 2002 경기도 평생학습축제-국제학술심포지엄, 2002년 10월 19일(광명시평생학습원, 2002), p. 70.

평민대학은 기본적으로 그룬트비의 교육철학을 따르고 있으나, 교육기간, 중점을 두는 활동, 교육 대상 등에 있어서는 조금씩 차이가 있으며, 최근에는 매우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였다. 따라서 평민대학은 체계적이고 형식적인 교육체계나 프로그램 대신 삶의 경험과 변화하는 상황에 맞는 유연한 교육과정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평민대학의 교육을 간단히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평민대학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몇 가지 요소들은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다.
첫째, 평민대학은 학생과 교장, 교사, 그리고 학교가 고용한 사람은 누구든지 함께 생활하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에 가장 알맞은 환경인, 기숙학교의 형태를 지닌다. Thomas Rørdam,  op. cit., p. 16.
이러한 환경 속에서 평민대학은 학생들에게 가정에서 생활하는 것과 비슷한 친근한 분위기를 제공하며, 교사와 학생들은 수업이외의 시간에도 함께 생활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또한 학교 곳곳에서 수시로 이루어지는 자연스러운 대화와 토론은 교사와 학생 모두에게 진정으로 살아있는 깨달음과 배움을 제공하게 된다. 이곳에서는 교장과 교사, 학생들 그리고 교사의 가족들까지도 모두 모여서 식사를 하며, 동등한 환경에서 대부분의 생활을 함께 한다. 이는 매우 민주적인 생활방식으로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이러한 생활방식을 체득하게 된다.
둘째, 평민대학에서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 관심사인 사회․문화적 문제들을 중심으로 자유로운 교육과정을 구성하고 있다. 평민대학 초기에 교육과정의 가장 중심이 되었던 두 가지 과목은 그 나라의 역사와 문학 모국어로 된 시와 문학작품, 그리고 신화와 전설 등을 중요한 교재로 생각하였다.
이었다. 최근에는 학생들의 필요와 사회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과목들이 더해지거나 제외되기도 한다. 평민대학에서 이루어지는 수업은 대부분 모국어를 통해 이루어지며, 책을 중심으로 하기보다는 교사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살아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학생들 사이의 자유로운 토론을 통해 진행된다. 또한 노래와 체육 등을 중요시하여 학교생활에서의 즐거움과 그 안에서 얻을 수 있는 영적인 교감 등을 매우 중요시 한다.
셋째, 평민대학은 모든 사회계층과 교육적 배경을 막론하고 그 학교에서 공부하기를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든 입학할 수 있도록 아무런 입학조건도 내걸지 않는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이 학교에서는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생활하면서 각자의 다양한 경험을 나누고, 서로를 통해 새로운 세계에 눈뜰 수 있게 된다. 평민대학이 세워지게 된 배경에는 당시 사회에서 온전한 교육을 받을 기회를 가지지 못했던 농민들에게도 교육받을 기회를 제공하려는 의지가 담겨 있다. 따라서 학교가 세워지던 초창기에는 대부분 농민을 비롯한 낮은 계층의 사람들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점차 도시 출신의 학생들, 또는 사회의 상류계층에 속하는 자녀들도 학교의 구성원이 되었다.
넷째, 평민대학에서는 학생들이 시험을 보지 않는다. 입학시험을 비롯하여, 교육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치르게 되는 여러 가지 시험들, 그리고 졸업시험이 없다. 이러한 특징은 평민대학의 자유롭고 민주적인 분위기를 형성하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교사와 학생 사이의 자유롭고 개방적인 관계와 신뢰의 형성에 큰 도움이 되었다. 교사가 학생들에게 시험을 치르게 하고 학생들을 점수로 평가하는 역할을 맡게 되면, 자연스럽게 학생들에게 그 과목을 공부하도록 강요하게 되며, 교사 역시 수업을 진행하는데 있어서 시험에 대한 부담을 안게 된다. 따라서 학생들의 흥미와는 무관하게 교사는 시험을 치르기 위해서라도 학생들이 그 과목을 공부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험을 치르지 않았기 때문에, 평민대학에서는 무엇보다 과목에 대한 학생들의 흥미와 관심이 우선적으로 존중될 수 있었고, 시대적 변화와 흐름에 맞춘 개혁적인 교육과정의 자유로운 변형이 가능하였다. 물론 시험이 가지는 긍정적인 역할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평민대학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들 속에서 시험이 가지는 긍정적인 역할은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었다. 평민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치고자 했던 것은 자아와 삶에 대한 진정한 깨달음과 경험이었으며, 이는 시험으로는 측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또한 이처럼 평민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친 것은 그들의 삶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에, 시험이라는 강제적인 요소가 필요하지 않았다.

다섯째, 평민대학에서 공부를 하는 기간은 적어도 5개월 과정이거나, 해매다 두 번에 나누어서 3개월씩 이루어지는 과정이어야 한다. 즉, 평민대학의 교육과정은 학생들이 그동안의 가정생활과는 다른, 학교생활에 적응하기에 충분한 시간을 제공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교육과정은 평민대학의 기초를 세우는 데 있어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콜(Christien Kold)에 의해 마련되었다.

3) 평민대학의 교사 David C. L. Davis, Model for a Humanisitc Education: The Danish Folk Highschool, (Denmark: Det Danske Selskab, 1965)을 주로 참고하였음.  


평민대학의 교사는 자신이 가르치고 있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하며, 학생들로부터 한 인간으로서 존경받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그룬트비는 생각했다. 즉, 그룬트비는 교사이기 이전에 올바른 인간이 되는 것을 무엇보다 중요한 교사의 조건으로 생각했다. 평민대학의 교사는 단순히 배워야 할 교과목을 학생들의 눈앞에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교사 자신이 공부했던 교과목을 포함한 삶의 경험을 통해 삶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을 일깨우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또한 학생들에게 삶을 바라보는 새로운 방식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평민대학에서 요구하는 교사의 중요한 과업이다.
평민대학에서 교사를 선발하는 기준에 있어서 주목해 볼 사항은 교사자격증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학교의 교사가 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은 평민대학의 교사가 되고자 하는 강한 의지와 학생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몇몇 분야 덴마크어, 외국어, 체육, 수학, 과학 등의 과목영역.
에서의 교사의 능력이나 경험, 그리고 이러한 능력과 경험을 젊은이들과 함께 나누고자 하는 의욕이다. 평민대학의 교사는 단순히 정해진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지식을 전달하는 것 이상의 훨씬 더 많은 역할을 소화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학생들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다. 이는 평민대학, 그리고 그룬트비의 교육사상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 부분이다.
평민대학의 교사는 수업시간 뿐 아니라 학생들의 자유 활동 시간에도 함께하면서, 그 시간이 학생들에게 온전히 가치 있는 것이 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사실상 평민대학에서의 교사는 정규 수업시간과 자유 활동 시간을 구분하여 일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며,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활동에 학생들과 함께 참여하게 된다. 또한 현실적으로 평민대학에서 일하는 교사에게 지급되는 보수는 그렇게 넉넉한 편이 아닌 반면, 일의 양은 훨씬 많다. 특히 기숙학교에서 학생들과 함께 지내기 때문에, 교사들은 생활 속에서 늘 학생들을 보살피는 일을 담당하고 있다. 최근에는 정부의 지원을 받아 재정적인 부분은 나아졌으나, 여전히 교사의 역할과 업무는 많은 편이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학생들과 진정으로 살아있는 상호작용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교사가 학생들에게 마음을 열 수 있어야 한다.
그룬트비는 평민대학에 적어도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종류의 교사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첫째, 책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언어가 아니라, 국민의 삶 속에 내재되어 있는 활기와 다양성 속에서 이야기된 것으로서의 모국어에 특별히 재능이 있는 교사가 필요하다.
둘째, 조국의 역사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또 그것을 사랑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이러한 교사는 학생들에게 조국의 역사를 매우 재미있게 이야기해 줄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어,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학생들이 조국의 역사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러한 역사 학습에서는 학생들이 인물이나 지역의 이름, 또는 날짜 등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조국에서 일어난 훌륭한 사건들과 역사 속에서 국가가 위험에 처했던 시기 등에 대한 공부를 통해 나라의 장래에 대한 책임감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셋째, 이전부터 불러왔던 노래(민요)들과 새롭게 만들어진 국민의 노래(the song of the people)들을 잘 알고 그것을 매우 사랑하며, 학생들이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지도하고 도울 수 있는 교사가 필요하다. 덴마크 국민의 노래는 평민대학에서 이루어지는 매우 중요한 교육활동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노래를 부르는 것은 함께 노래하는 사람들 사이의 영혼을 하나로 연결해주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넷째, 조국의 곳곳을 여행한 경험을 가지고 있어, 그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학생들에게 국가의 여러 도시들과 마을, 들판과 숲,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 그들의 일, 그리고 각 사람들의 사고방식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교사도 필요하다. 젊은 학생들에게 단순한 지리적인 정보나 통계적 정보들을 제공하는 것만큼 지루하고 재미없는 수업은 없다. 따라서 교사는 나라의 각 지방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모습, 그들의 생각, 그리고 그들의 장점 등에 바탕을 둔 살아있는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어야 한다.
다섯째, 법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교사가 필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법률책과 갖가지 규칙들에 갇혀 있는 교사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평민대학에 필요한 교사는 젊은 학생들에게 정부가 제정한 법률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과 학생들이 찾아낼 수 있는 일반적인 법적 조건들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줄 수 있는 사람이다.

2. 평민대학의 영향

1) 덴마크에 미친 영향

평민대학은 덴마크 사회 전반에 걸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덴마크의 평민대학에 관해 연구한 외국인 학자들은 대부분 평민대학의 중요한 영향으로 협동조합 운동, 높은 수준의 문학, 세계 시장의 경쟁에서 이룬 덴마크 농민의 성공, 그리고 진보적인 법제도 등을 들고 있다. 또한 덴마크 사람들은 대부분 평민대학이 덴마크 사회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쳤다는 생각에는 주의할 필요가 있지만, 그 학교가 덴마크 사회와 덴마크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특징짓는 중요한 요소들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매니히는 덴마크의 평민대학이 오랜 기간 동안 덴마크의 농민들이 농촌으로 되돌아와 자신들의 일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발전시키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데, Max Lawson, op. cit., p. 15.
이 역시 평민대학이 덴마크에 미친 중요한 영향이다. 1864년 이후로 매년 점차 더 많은 농촌 청년들이 4개월에서 6개월쯤 평민대학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 수가 1870년에는 농촌 청년의 15%, 1900년에는 30%에 이르렀다. 교육을 마치고 마을로 돌아갈 때, 청년들은 자신들과 마을 사람들을 물질적․정신적 빈곤으로부터 구원하고자 하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청년들은 일상생활을 통해서, 그리고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활동을 통해서 농촌지역의 상황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전개하였다. 또한 거의 모든 덴마크의 농촌 마을에 마을회관을 건립하기 위한 운동을 벌였다. 마을회관에서는 자유롭고 자주적인 모임이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모임을 통해 평민대학의 교육정신에 바탕을 둔 교육과 계몽활동을 조직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Karl Kristian Aegidius, 앞의 글, 2001, p. 74.

그룬트비의 교육사상과 평민대학은 덴마크의 사립학교 전통을 세우는 데에도 크게 기여했다. 사립학교란 국가의 소유, 또는 지방자치단체나 어떤 다른 공적 기관에 속하지는 않지만 공적 영역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는 학교를 의미한다. 이러한 형태의 사립학교가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이 바로 평민대학이었다. 현재 덴마크에는 매우 다양한 종류의 사립학교와 공립학교가 공존하고 있다. 대안적 어린이학교, 이를테면 프리스콜레에서부터 사립 김나지움과 평민대학을 비롯한 다양한 종류의 직업학교들이 이에 속한다. 이러한 학교들은 국가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고 있지만, 매우 자유롭다. 따라서 이곳에서는 국가권력에 따른, 학교와 수업이 다수에 종속되는 자유가 아닌, 학교와 교육이 가지는 그들만의 고유한 조건에 따라 형성되고 운영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 덴마크 프리스콜레협회, 앞의 글, pp. 87-88.

덴마크 사회를 특징짓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협동조합을 들 수 있는데, 이러한 협동조합 운동의 원동력은 무엇보다도 평민대학의 정신과 그곳에서 생활한 학생들이 경험하게 되는 공동체 생활로부터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매니히는 가장 근본적인 덴마크의 협동조합 운동은 공동 책임(joint responsibility)에 대한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여기서 말하는 공동 책임이란 조합의 구성원 모두가 같은 조합에 속해있는 조합원이 진 빚에 대해 공동의 책임을 가진다는 생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은 한 조합 내의 구성원들이 서로를 온전히 믿을 수 있는 상황에서만 가능한 것으로 이는 평민대학의 공동체 생활에서 중요시되었던 부분이다. 이러한 덴마크의 협동조합, 특히 농업 협동조합의 또 다른 특징은 그것이 농민들의 필요에 의해 자생적으로 형성되었다는 점인데, 이러한 협동조합 운동을 주도하고 참여한 사람들은 대부분 평민대학 출신의 농민들이었다.
협동조합이 성공적으로 운영될 수 있는 덴마크의 협동사회는 구성원들의 성공과 실패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눌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러한 정신은 바로 평민대학에서 강조했던 동료애(spirit of fellowship)였으며, 이는 평민대학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사회로 뛰어들어 활동함으로써 사회 곳곳에서 발현될 수 있었다.  

2) 스칸디나비아 지역에 미친 영향 이 부분은 Thomas Rørdam, "The High Schools in Other Parts of Scandinavia," The Danish Folk High Schools, (Denmark: Det Danske Selskab, 1965)과 류달영,『새 역사를 위하여: 덴마크의 어제와 오늘』(서울: 동호서관, 1982)을 주로 참고하였다.


(1) 노르웨이의 평민대학

노르웨이는 킬 조약에 의해 덴마크에서 독립하기 전까지 400여 년 간 덴마크의 영토였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덴마크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오랜 기간 동안 덴마크의 일부였던 만큼 노르웨이는 그룬트비의 사상과 그가 제안했던 평민대학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노르웨이에도 이러한 평민대학들이 생겨났다.
그룬트비의 사상을 가장 먼저 노르웨이에 소개한 사람은 레오 핏히였다. 그는 교육가로서, 그리고 언론인으로서 노르웨이에 잘 알려진 사람이었다. 1850년대 이후 핏히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국가의 언어, 역사, 민족의 전설, 그리고 민요 등에 관심을 가지고 이러한 것들을 정리하였으며, 국민을 위한 교육에 큰 공헌을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덴마크와의 역사적 관계와 핏히의 영향으로 노르웨이는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국가들 중 가장 먼저 평민대학을 받아들인 곳이었다. 핏히의 영향을 받아 직접 평민대학을 세운 사람은 헤르만 안카(Herman Anker)와 오라운 아르베젠(Olaus arvesen)이었다. 이들은 대학을 마친 후 덴마크로 넘어가 그룬트비의 문하생이 되어 평민대학에 대한 것들을 자세히 연구하였으며, 협동조합 운영에 관한 방법들도 연구하여 노르웨이로 돌아왔다.
1864년 그들은 무제에겐 호숫가(Mjøsens River)에 사가툰(Sagatun) 평민대학을 세운 그들은 80명의 학생들을 받아들였다. 헤르만 엔커는 이 학교의 설립목적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이 학교의 목적은 농민들의 자녀들에게 보다 진보적이고 보편적인 교육을 제공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한 교육은 학생들에게 삶에 대한 영감을 얻을 수 있는 근원을 제공해주고, 올바른 삶을 살고자 하는 욕구를 불러일으키고, 나아가 보다 나은 국가에 대한 희망을 품게 할 것이다.”
이러한 사가툰 평민대학이 세워진 이후, 1867년에는 그리스토퍼 브룬(Christoffer Bruun)이 판하임 평민대학을 세웠는데, 이 곳의 교육 역시 시적이고 역사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1873년에는 비고 울만(Viggo Ullmann)도 평민대학을 설립했다. 이들은 모두 덴마크를 직접 방문하여 평민대학에 대한 것들을 배운 사람들이었다. 이후로도 노르웨이에는 20여 개의 평민대학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평민대학들이 설립되었던 당시에는 정부에서 이를 반기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마찰이 있었다. 정부에서는 이러한 학교들에 지원금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학교들은 재정난을 겪어야 했다. 또한 정부에서는 이에 반대하여 더 많은 문법학교들을 설립했는데, 이곳의 학생들은 많은 지원금을 받으며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이러한 학교에서는 역시 살아있는 교육보다는 보다 높은 단계의 학교에 들어가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정부의 평민대학에 반대하는 운동으로 한때는 평민대학이 사라질 위기에 놓이기도 하였으나, 노르웨이에서 일어난 젊은 농부들의 운동(Young Farmers' Movement)으로부터 새로운 힘을 얻게 되었다. 다시 살아나게 된 평민대학은 민중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움직임이 점차 활발해지기 시작했던 당시의 사회적 움직임과 함께 성장하게 되었다.
이후 평민대학과 일반 학교들 사이에는 점차 그 차이가 사라지게 되었으며, 1949년 7월 28일에 시행된 법령에 의해 당시 노르웨이에 존재했던 세 가지 종류의 학교들은 모두 평민대학이 지향하는 형태의 교육에 영향을 받게 되었고, 모두 하나의 법령 아래 놓이게 되었다. 신기하게도 노르웨이의 모든 학교들은 남녀 공학의 형태로 운영되었는데, 이는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다른 나라들과 비교할 때, 매우 빨리 시행된 것이었다.
  
(2) 스웨덴의 평민대학

스웨덴의 평민대학 역시 덴마크의 영향을 받아 세워진 것이었다. 그러나 스웨덴의 평민대학은 덴마크의 평민대학과 여러 가지 다른 점을 가지고 있었으며, 스웨덴만의 특성을 강하게 드러냈다.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다른 나라들에 비해 스웨덴은 역사적 전개과정에서 국가적 또는 민족적 위기를 겪지 않았기 때문에, 대대적인 민족주의 운동이나 그에 대한 의식이 그다지 강렬하게 일어나지 않았다. 또한 당시 스웨덴의 소작농들은 사회에서 비교적 자유롭고 독립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스웨덴은 매우 조화로운 발전을 이루어온 나라였다. 이러한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던 스웨덴의 경우는 사회적 변화를 일으키거나, 부조리한 구조에 맞서기 위한 투쟁적인 평민대학을 세울 필요가 없었다. 따라서 평민대학에 추구하는 교육내용 역시 덴마크의 것과는 다른 형태로 발전하였다.
스웨덴의 평민대학에서는 사실을 보다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능력을 중요시하였다. 따라서 그곳에서의 강의는 영감을 주는 것이거나 영적이기 보다는 정보를 제공해주는데 더 많은 비중을 두었다.
1868 년에는 Östergötland 평민대학, Önnestad 평민대학, 그리고 피일란(Hvilans) 평민대학이 세워졌는데, 이들은 대부분 어거스트 소르만(August Sohlman)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스웨덴의 평민들을 교육하는데 힘쓰지 않고, 대부분의 교육기관들은 상류 계급의 사람들만을 위한 곳이 되어버린 당시 스웨덴의 상황을 비판하였다. 따라서 그는 모든 국민을 평등하게 교육시켜야 하는 학교의 역할에 대하여 역설하였으며, 이를 위해서는 교육 분야의 혁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혁명을 통해 만들어야 하는 새로운 학교의 본보기로 그는 바로 덴마크의 평민대학을 소개했다. 그는 덴마크의 첫 번째 평민대학이었던 뢰딩(Rødding) 평민대학의 교장이었던 플러와도 잘 아는 사이였다. Östergötland 평민대학의 교장이었던 Ålund 박사 역시 덴마크에 머물면서 덴마크 평민대학의 교사들로부터 평민대학 운영에 관한 많은 것들을 익히고 돌아온 사람이었다. 이후 스웨덴에 돌아와 세웠던 Östergötland 평민대학은 성공적으로 운영되었다.
스웨덴 평민대학의 한 가지 두드러진 특징은 덴마크의 평민대학과는 달리 책도 교육의 중요한 자료로 여겼다는 것이다. 교사의 가르침에 의한 교육 뿐 아니라, 학생들 스스로 하는 독립적인 학습 역시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스웨덴의 의회를 갖게 되고, 그 결과로 새로운 지방 정부가 농민들에게 정치적 영향력을 부여하는 것을 인정하는 개정법(Reform Act)이 생겨난 1866년 이후, 사람들은 교육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고 그에 대한 강한 요구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새로운 교육이 사회 계층 사이에 놓여있는 장벽을 허물고자 했다. 평민대학의 과업은 학생들을 공동체와 개인적인 삶의 장소 모두에서, 삶과 조화할 수 있는 사람으로 길러내는 것이었다.
1882년 이후 비로소 평민대학의 중요성을 인식한 스웨덴 정부는 학교에 재정적인 지원을 하기 시작했으며, 많은 학생들이 그곳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지원금을 내리기도 하였다. 1964년에는 국가 보조금을 받는 평민대학의 수가 110개교에 달했다. 이러한 평민대학은 점차 스웨덴 교육제도의 일부로 통합되었으며, 자유롭게 운영되고 있다. 교육방법에 대한 정부의 간섭은 최대한으로 줄었기 때문에, 스웨덴의 평민대학에서 교사들은 매우 자유롭게 교과목을 선택하고 수업을 계획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학교의 교장이나 교사를 선정하는데 있어서는 정부가 관여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부분에 있어서는 덴마크의 평민대학만큼 자유롭다고는 볼 수 없으며, 국가에 속해있는 기관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사회의 정치적 발전 등과 함께, 평민대학 역시 스웨덴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데, 이러한 교육을 기반으로 스웨덴은 문화, 정치, 경제, 산업의 각 부분에서 큰 발전을 이루었다.

(3) 핀란드의 평민대학

핀란드에서는 1880년대 이후부터 젊은 소작농들이 더 안정된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이동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에 따라 핀란드의 학교에는 가난한 농민 출신의 학생들이 점차 늘어났고, 학교는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또한 전통적인 농민들의 문화를 온전히 보전할 수 없는 도시적 환경에서 농민 계급의 자녀들이 인간적인 균형을 찾을 수 있도록 하는 것도 학교의 과제가 되었다.
핀란드는 그룬트비의 사상에 바탕을 둔 평민대학이 뿌리내리기에 매우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핀란드의 젊은이들 사이에 일어났던 평민대학 운동과 덴마크의 평민대학 운동 사이에는 유사점이 있다. 모국어에 대한 그룬트비의 생각과 자유에 대한 그룬트비의 날카로운 요구는 루네베르그(Johan Ludvig Runeberg)와 그가 쓴 민족 전설에 큰 희망을 품고 있는 핀란드 인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다.
덴마크와 마찬가지로 핀란드는 당시 유럽 세계에 일고 있었던 변화로 인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당시 핀란드가 겪었던 변화는 경제․사회적인 것 뿐 아니라 민족적인 것이었다. 19세기에는 민족적․사회적 봉기가 일어났는데, 이러한 운동은 르네베르그(Runeberg)와 린토르(Elias Lönnrot)가 수집한 핀란드의 민요집 카베바라(Lays of Kalvevala)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았다. 동시에 핀란드의 역사와 언어의 중요성은 당시 유명한 웅변가였던 스넬만(Johann Wilhelm Snellman)에 의해 그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그는 핀란드인들이 민족적인 것 뿐 아니라,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부분에 대해서도 새롭게 눈뜰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또한 사회 지배계급의 지식을 갖춘 사람들과 일반 민중들 사이에 놓여있는 커다란 간격에 대해 이야기했다.
당시의 사회적 상황에서 대중교육은 사회적․민족적 간격을 줄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이러한 대중교육에 대한 고민 속에서 핀란드 역시 덴마크의 평민대학 모형으로부터 많은 영감을 얻을 수 있었는데, 이들은 스웨덴과 노르웨이에 이미 들어와 있던 평민대학을 통해 간접적으로 덴마크의 평민대학과 접촉할 수 있었다. 이러한 핀란드의 평민대학은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그들 나름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1860년대 이후로 핀란드에서는 사회 전반적으로 대중교육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였으며, 이 때부터 평민대학을 세우기 위한 본격적인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1889년에 이르러 첫 번째 평민대학이 소피아 하그만(Sofia Hagman)이라는 여성에 의해 캉가살라(Kangasala) 지역에 설립되었다. 이 학교에서는 핀란드 어만을 사용하였고, 수공예 과목과 종교, 역사, 음악, 체육 등을 중요시하였다. 이후 16개의 핀란드 평민대학과 5개의 핀란드계 스웨덴(Finno-Swedish) 사람을 위한 평민대학이 세워졌다.
1905년 이후부터 이러한 평민대학들은 정부의 지원을 받게 되었으며, 이후에도 평민대학의 수는 꾸준히 늘어났다. 대부분의 평민대학에서는 사회학과 인본주의적인 과목을 가르치는 것을 가장 중요한 과업으로 여겼으며, 이들 학교는 일반적인 교육과 사회적이고 직업적인 기술을 제공하는 기숙학교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3) 제 3세계 국가들에 미친 영향

민족의 문화와 정체성을 중시하는 그룬트비의 교육사상은 1950년대 들어 제 3세계의 국가들이 직면했던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대부분 식민지 생활을 하고 있었던 제 3세계 국가의 국민들에게 민족의 정체성과 역사, 그리고 민족 고유의 문화를 강조하는 그룬트비의 교육사상은 매우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제 3세계 국가의 사람들은 그룬트비의 사상을 받아들여, 그들의 상황에 알맞은 평민대학을 설립하고자 하였다. 이들이 그룬트비의 교육사상에서 발견한 것은 사람들을 이미 결정된 모습으로 만들어내는 것보다 사람들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능력과 기술을 이끌어내고, 각 사람이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게 하려는 정신이었다.  
이들 국가에서 그룬트비의 교육사상에 관심을 가지게 된 또 다른 이유는 ‘국가의 발전’과 관련이 있다. 이들은 평민대학과 그룬트비 운동을 통해 덴마크의 경제와 사회가 발전한 것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따라서 이들은 그룬트비의 교육사상과 평민대학을 모델로 한 학교를 세워, 학생들이 자신의 문화와 역사를 통해 스스로를 깨닫게 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진정으로 깨닫고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얻을 수 있을 때, 삶 속에서 진정한 진보와 혁신을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또한 이러한 변화는 나라의 발전에 깊은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와 같은 생각을 바탕으로 제 3세계 국가에는 덴마크의 평민대학을 모델로 한 많은 교육기관들이 1950년대와 1960년대 사이에 설립되었다. 이 지역에 세워진 평민대학들은 대부분 덴마크에서 평민대학의 교육, 특히 농업교육을 직접 경험한 후 본국으로 돌아온 제 3세계 국가의 사람들에 의해 세워졌다. 또한 몇몇 학교들의 경우는 덴마크 정부의 새로운 보조 프로그램(Danish government's new assistance program)으로부터 지원을 받기도 하였다. H. B. Hansen, Heritage and Prophecy: Grundtvig and the English-Speaking World. A.M. Allchin, D. Japer, J.H. Schjørring, K. Stevenson, ed., (Denmark: Aarhus University Press, 1993), p. 310.

제 3세계 국가들에 세워진 평민대학들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가나와 인도의 평민대학을 들 수 있다. Ibid., p. 310.
가나에는 비교적 일찍 평민대학이 세워졌는데, 중등학교 진학에 실패한 학생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고자 하는 것이 그 학교의 목적이었다. 이후 이러한 교육체계는 나라 전역에 걸쳐 실시되는 대학의 부설 교육 프로그램의 일부인 성인교육기관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는 농촌지역의 성인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을 가장 중심적인 목표로 삼고 있다. Ibid., p. 312
이러한 가나의 평민대학은 국가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사립학교 형태로 운영되고 있으며 학교는 덴마크의 평민대학과 마찬가지로 시험을 치르지 않는다.
인도에서는 1947년 국가가 독립하던 시기에 성인교육을 위한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이러한 운동에는 농촌의 청년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평민대학(people's school or folk school)을 짓는 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Ibid., p. 313
1950년대 초 인도는 국제 협력을 위한 덴마크 협회(Danish Association for International Coorperation)와 관계를 맺게 되어, 덴마크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평민대학이 세워지던 초기 단계에 덴마크는 직접 덴마크의 평민대학을 경험한 덴마크인 교사와 직원들을 보냈다. 이 학교에서도 역시 어린 시절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한 청년들과 젊은 여성들의 교육을 주로 담당하였다. 성인들을 대상으로 한 이러한 교육은 사회의 발전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그러한 효과를 인정한 지역 정부는 이러한 교육기관을 위한 모든 비용을 지불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제 3세계 국가들에 소개된 평민대학은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평민 신분의 사람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그를 바탕으로 사회의 발전을 꾀하는 데 있어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Ⅴ. 요약 및 결론

1. 요약

그룬트비는 19세기 덴마크의 대표적 인물 중 한 사람으로 덴마크 사회의 변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당시 나라가 처해있던 어려운 상황에서 민중들을 일깨우고 그들의 삶을 통해, 덴마크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고자 하였다.
19세기에 일어난 유럽의 급격한 정치․사회적 변화는 당시 덴마크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유럽 정세의 변화와 나폴레옹 전쟁의 영향으로 덴마크는 영토의 많은 부분을 잃게 되었으며, 국가 경제도 파산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또한 당시 덴마크에서는 외래의 문화와 언어에 가치를 두는 사대주의적 경향이 널리 퍼져, 학자들 사이에서 덴마크의 말과 역사는 하찮고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이러한 외래의 문화를 접할 기회를 갖지 못했던 평민들 대부분의 삶은 전혀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덴마크 사회는 죽음과 같은 절망의 상태에 빠져들었다. 그룬트비는 덴마크 사회를 살려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덴마크의 전통문화와 생생한 삶이 담겨있는 평민들의 말과 생활에 주목하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덴마크가 전성기를 누렸던 과거의 역사를 통해 다시 한 번 희망을 갖고 미래에 대한 꿈을 꿀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당시 덴마크에서는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새롭게 등장한 시민계급을 중심으로 귀족 뿐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도 교육이 필요하다는 의식이 생겨났으며, 토지개혁을 통해 성장하게 된 농민들 역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1849년에는 지방 정부법에 의해 농민들이 정치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면서 대의제 민주주의가 성립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운영을 위해서는 농민계급의 교육이 절실히 필요하였다. 당시의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그룬트비의 교육사상이 실현될 수 있는 좋은 토양이 되어주기도 하였다.
그룬트비의 교육사상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사상은 낭만주의 사상이었다. 초기에는 계몽사상의 영향을 받기도 했으나, 이후 그룬트비는 계몽사상의 이성 중심적이고 기계적인 사고에 반대하게 되었다. 그룬트비는 낭만주의 중에서도 독일 낭만주의의 영향을 주로 받았는데, 민족의 정체성과 자아, 그리고 국가 공동체를 중요시하는 민족주의적 성향이나, 모국어를 중요시하는 것, 그리고 민족의 신화와 역사를 중요시하는 것 역시 낭만주의의 영향이었다.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학자로는 헤르더를 들 수 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발달한 그룬트비의 교육사상은 다음의 6가지 정도로 정리해볼 수 있다.
첫째, 삶을 교육의 가장 중요한 목표이자 수단으로 삼고 있다. 그룬트비 교육사상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삶의 계몽’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될 수 있는데, 이는 교육을 통해 사람들의 삶을 진정 의미 있고 살아있는 것으로 거듭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교육은 죽은 문자로 이루어진 책을 통해서가 아니라, 생생한 일상의 삶과 경험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그룬트비의 생각이었다.
둘째, 사람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지는 교육을 중요시한다. 상호작용은 그룬트비의 교육사상 전체를 관통하는 개념으로, 그룬트비가 제시한 학교와 수업의 형태를 결정짓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상호작용, 특히 살아있는 상호작용은 주로 사람들 사이의 대화와 토론의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다. 또한 공동체 생활을 통해 함께 생활을 나누며 더욱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그룬트비가 제안하는 학교에서는 다양한 계층과 연령의 사람들이 함께 생활한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처럼 다양한 사람들 사이의 상호작용 또한 중요하다. 다양한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학생들은 무엇보다 자신에 대해 깨달을 수 있으며, 나아가 자신이 경험하지 못했던 세계에 대해서 눈을 뜨고 타인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셋째, 일상의 삶을 그대로 반영하는 살아있는 말인 모국어를 통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는 문자화 되어 있는 글이 아니라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전해지는 ‘말’이어야 한다. 살아있는 말은 상호작용을 위한 중요한 수단이기도 하다. 각 민족의 모국어에는 그들의 고유한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이 그대로 담겨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을 가장 정확하고 생생하게 표현해낼 수 있다. 따라서 그룬트비는 교육은 모국어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중요시하였다.
넷째, folkelighed(폴켈리드) 정신은 매우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는 말로, ‘모든 사람을 포용하는 공동체적 삶’ 정도로 해석될 수 있다. 하나의 공동체에 속해있는 사람들은 지위, 생각, 신분, 연령 등의 차이에 관계없이 원칙적으로 동등한 인간적 가치와 존엄성을 인정받아야 한다는 그룬트비의 생각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평민교육에 대한 생각과 민족교육에 대한 생각의 바탕이 되었다.
다섯째, 그룬트비는 교육은 민족의 역사와 문학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룬트비에게 있어서 역사는 한 민족의 진보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사람들은 현재를 올바로 해석하고 미래를 내다볼 수 있게 된다. 민족의 신화 또한 한 민족의 젊은 시절의 꿈을 표현하는 것으로 예언적인 기능을 가지며, 민족의 고유한 정신과 성향을 표현해 준다. 특히 신화에서 사용되는 시적이고 구어적인 표현들은 그 민족의 정신을 보다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다.
여섯째, 그룬트비의 교육사상은 기본적으로 기독교 정신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살아있는 상호작용 또는 공동체 내에서의 나눔을 강조하는 것은 신앙인들 사이의 나눔이 그 핵심이라는 기독교에 대한 그의 믿음이 바탕이 되었다. 그러나 그룬트비는 학교 교육에서 형식적인 종교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에는 반대했다. 그는 기독교 또한 정신의 자유와 국민의 삶을 전제로 해야 하는 것이며,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그것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그룬트비의 교육사상은 단지 이론에 그친 것이 아니라, 콜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에 의해 평민대학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학교를 탄생시켰고, 실제로 그것이 현장에서 실현되었다. 그룬트비의 교육사상을 현실의 삶 속에서 실천했던 평민대학은 작은 규모의 사립학교 형태로 운영되고 있으며, 초기에는 농민들의 교육에 특히 중점을 두고 이루어졌다.
18세 이상의 젊은 청년들을 주 대상으로 하는 평민대학은 평민들의 삶에 의해 교육목적과 교육방법이 결정되며, 교육과정은 각 학생들의 흥미와 요구, 그리고 사회적 변화 등에 맞출 수 있도록 매우 유연하게 운영된다. 따라서 이곳에서는 형식적인 교육체계나 프로그램은 운영하지 않는다. 또한 교사와 학생이 모두 공동체 생활을 한다. 교사와 학생들은 자신들의 공동체를 함께 운영하기 위해 다양한 회의와 토론을 하며, 이러한 과정에서 학생들은 민주시민으로 성장하게 된다. 또 한 가지 중요한 특성은 시험이 없다는 것으로, 입학시험을 비롯한 어떤 시험도 실시하지 않는다. 이는 교사와 학생 사이의 보다 자유롭고 인간적인 관계를 보장해준다. 이러한 평민대학의 교육은 모두 인간 개개인의 삶과 삶이 안고 있는 가장 깊은 문제들에 빛을 던져주는 것을 그 목표로 하고 있다. 이곳의 교사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교사자격증이 아니라, 학생들과 함께하고자 하는 의지와 열정, 그리고 학생들의 학습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어떤 분야에서의 능력이다. 그룬트비는 자신의 글에서 평민대학의 교사는 교사이기 이전에 먼저 올바른 인간이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평민대학은 1864년 이후로 덴마크 전역에 설립되었으며, 덴마크 사회의 변화와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농민생활의 발전 협동조합의 운영, 그리고 교육제도의 변화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덴마크 사회 내에서 올바른 민주주의가 뿌리내리고 운영되는 데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평민대학에서 추구했던 공동체 속에서의 자유롭고 생기 있는 삶과 서로에 대한 책임감은 덴마크 사회의 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불 수 있다.
평민대학은 덴마크 뿐 아니라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다른 나라들, 그리고 제 3세계의 국가들에도 영향을 주었다. 스칸디나비아지역의 대표적인 나라들로는 노르웨이와 스웨덴, 그리고 핀란드를 들 수 있으며, 제 3세계국가로는 가나와 인도를 들 수 있다. 이러한 나라들 역시 사회의 변화 속에서 평민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기 시작하였는데, 덴마크의 평민대학은 그러한 교육을 위한 가장 좋은 본보기가 되어 주었다. 각각의 나라들은 이러한 그룬트비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 덴마크의 평민대학을 모델로 하여 그들 나름의 특성을 살린 평민대학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또한 제 3세계 국가들의 경우는 평민대학을 세우는 과정에서 덴마크의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2. 결론

지금까지 덴마크의 대표적 인물로 손꼽히는 그룬트비의 교육사상과 그의 교육사상을 현장에서 실천하고 있는 평민대학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룬트비 교육사상의 핵심은 무엇보다 ‘살아있는 일상의 삶’을 통해 교육을 하고 이를 통해 삶을 일깨운다는 점이다. 교육에 있어서 삶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그룬트비 뿐 아니라 프레네를 비롯한 많은 교육사상가들이 한 목소리로 주장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는 우리의 교육이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가, 그리고 어떠한 교육을 실천해 나가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만들어가는 데 가장 바탕이 되는 생각일 것이다. 그룬크비의 교육사상은 바로 이러한 전제를 바탕으로 시작되었다.
지금으로부터 150여 년 전 덴마크 사회를 훌륭히 바꾸어내는 바탕이 되었던 그룬트비의 교육사상과 실천은 우리나라의 교육을 개선하고자 하는 다양한 노력들, 특히 대안교육 운동에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이는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다.
첫째, 다시 한 번 교육에서 ‘삶’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기존의 형식적이고 경직된 교육에 반대하여 새로운 교육을 추구했던 많은 교육사상가들이 교육에서의 삶이라는 요소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교육은 여전히 그것을 간과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교육 현장에서는 여전히 책을 중심으로 하고 일방적인 교사의 강의가 수업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아직 우리 사회에서는 교육은 현재의 삶보다는 앞으로의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이며, 따라서 현재의 삶은 교육을 위해 희생되어야 한다는 논리가 지배적이다. 그러나 그룬트비의 교육사상에 비추어 보면 이는 잘못된 판단이다. 교육은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활동이기 이전에 현재, 바로 이곳에서의 삶을 더욱 풍부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어떤 것이 되어야 한다. 현재의 삶을 충실히 살아낼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가 꿈꾸고 희망하는 미래도 있는 것이다. 그룬트비의 교육사상에서는 어떤 것보다 이 점을 중요시하였다.
둘째, 살아있는 상호작용에 대한 그룬트비의 생각과 이를 실현하기 위한 교육방법은 우리나라의 대안학교를 운영하는데 좋은 본보기가 된다. 또한 그러한 형태의 교육이 실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룬트비의 교육사상에 바탕을 둔 평민대학의 특징적인 교육방법은 대화와 토론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책이 아닌, ‘말’ 위주의 수업이었다. 또한 교사와 학생 모두가 하나의 학교 공동체를 이루어 민주적인 생활 방식을 실제적 경험을 통해 익힐 수 있었다. 이는 단순히 수업이라는 제한된 시간과 학교라는 공간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상호작용 뿐 아니라, 하나의 생활 공동체라는 장 속에서 보다 다양하고 깊은 수준의 상호작용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평민대학의 실천사례는 그러한 교육이 실현 가능하다는 희망을 보여준다. 또한 다양하고 실제적인 실천사례들은 교육의 이론적인 토대 뿐 아니라, 실제로 학교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많은 정보를 제공해 줄 수 있다.
셋째, 그룬트비의 교육이 덴마크 사회변화에 미친 영향을 살펴봄으로써 교육을 통한 우리 사회의 변화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룬트비의 교육사상과 평민대학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던 덴마크 사회의 민주주의와 협동조합 운동을 통해 우리는 실제로 교육이 사회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이 어느 정도인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현재 덴마크 사회의 민주주의와 협동조합 운동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수준에 있으며, 세계 여러 나라들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물론, 덴마크 사회의 변화에는 그룬트비의 교육사상이나 평민대학의 교육 이외에도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영향력은 결코 무시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우리나라 사회 역시 그러한 교육을 통해 변화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안겨준다.
넷째, 앞으로 우리 교육이 지향해야 할 사회의 모습과 가치관을 발견할 수 있다. 교육은 한 사회의 변화를 이루어내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교육을 통해 사람들이 얻게 되는 ‘가치관’은 오랜 시간이 지나면 그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관으로 자리 잡아, 한 사회의 성격을 결정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그룬트비의 교육사상과 평민대학이 지향했던, 일상의 삶을 중요시하고, 모든 사람, 특히 나라의 근간을 이루는 평민들의 가치를 인정하는 공정하고 민주적인 가치관은 세계적인 복지제도를 갖추고 있는 민주적인 덴마크 사회를 형성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앞에서 살펴보았던 그룬트비의 교육사상과 덴마크 사회의 변화는 아직까지 엘리트 중심의 교육 또는 경쟁위주의 교육이 사회의 중요한 원리로 자리 잡고 있는 우리나라 교육의 가치가 이제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아울러 그러한 변화에 있어 많은 역할을 담당하게 될 교육이 지향해야 하는 가치 또한 새로워져야 할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서론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과거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그룬트비의 교육사상과 덴마크 사회적 운동을 배우려는 노력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우리나라는 덴마크의 선진적인 교육이나 사회 제도들이 뿌리를 내리기에 너무 척박한 토양이었으므로, 대부분의 씨앗들은 말라죽고 말았다. 그러나 당시 뿌려졌던 수많은 씨앗들 중 한 두 개는 살아남아 성장해왔으며, 새롭게 일어난 대안교육 운동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이제 우리 사회는 그룬트비의 사상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덴마크의 교육을 받아들여, 그것을 우리의 것으로 소화해낼 수 있는 어느 정도의 역량을 갖추게 되었다. 50여 년이 지난 현재 우리 교육의 한편에서는 이제 그러한 그룬트비의 교육사상에 다시 새롭게 주목하고 있다.
이러한 그룬트비의 교육사상을 주제로 한 본 연구는 그 동안 단편적으로 소개되었던 그룬트비의 교육사상과 평민대학에 대한 내용을 하나의 선상에서 정리해보는 가장 기초적인 작업을 주 목적으로 하였다. 이제는 이러한 연구를 바탕으로 그룬트비의 교육사상과 실천에 대한 보다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특히 그룬트비의 교육사상과 그를 토대로 한 교육운동, 그리고 실천으로 변화된 덴마크의 교육제도와 사회에 관한 연구는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룬트비의 교육사상이 현장에서 실현될 수 있도록 하는데 누구보다 많은 공헌을 한 교육 실천가 크리스텐 콜에 관한 연구와 소개도 아울러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우리는 교육을 개선하려는 노력에 있어, 보다 유용하고 풍부한 정보와 자료들, 그리고 실천 사례들을 얻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