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23

유달영 [새 역사를 위하여] 4 광야는 옥야(沃野)로

 새역사를 위하여 - 4.광야는 옥야(沃野)로

유달영


 


4.광야는 옥야(沃野)로


 


1).구호에 맞추어서


[밖에서 잃은 것을 안에서 찾자]


[하나님과 가정과 국토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기초로]


[덴마아크의 건설은 광범한 지식위에]


 


이것은 덴마아크 국민의 갱생의 힘찬 구호이다. 이 신념에 불타는 국민들은 개척되지 않은 촌척(寸尺)의 땅이라도 이를 개간하여 잃어버린 국토를 회복하고자 전력을 다하였다.국내의 모든 황무지와 소택(沼澤)과 사구(沙丘)로 하여금 삼림으로 농장으로 목장으로 주택지로 만들기에 덴마아크 사람들은 시간과 재산을 아낌없이 바쳤다. 덴마아크 국민들의 이 꾸준하고 지성스러운 위업은 마침내 성공하였다.


 


[국민의 근본적 부원(富源)은 흙에서 온다]


[덴마아크의 부원을 보호함은 국민의 신성한 의문이오 특권이다]


이것은 덴마아크 사람들의 국토에 대한 한결같은 신념이다.


 


반세기전에 실망과 비애의 황막한 광야는 지금은 울창한 숲으로 풍요한 농장으로,목장으로, 아름다운 마을로 변하여 꽃과 노래와 우정으로 찬 즐거운 낙토(樂土)가 되었다.


옛날에 황무지이었던 곳들은 지금에 농장과 숲과 공원으로 바뀌었다. 이 위업을 완성하고 조국의 머리 위에 영예의 관을 빛나게한 애국자들의 기념비를 곳곳에 바라보는 오늘의 덴마아크 국민들의 감격이야 말로 어떠하랴.


 


저분 애국자들의 분투가 없었던들 오늘 인류문화의 위대한 공적을 자랑하는 농업의 나라 덴마아크는 역사에 그 이름이 없었을 것이다. 저들이야 말로 참 평화의 용사들로서 위대한 사람들이라 하겠다.


[배우(俳優)는 무대의 조건에 필연적으로 제약된다]이것은 유물사관(唯物史觀)의 주장이다. 그러나 우리는 덴마아크의 선각자들 특히 이엠 달가스와 그 동지들의 사업에서 위대한 배우는 무대를 자기의 품위에 어울리도록 고쳐간 것을 배울 수가 있는 것이다.


 


[의식이 족해야 예절을 알고 창고가 넘쳐야 영욕(榮辱)을 안다]과 관중(管仲)은 말했으나, 실상은 [사람다운 사람은 예절을 알므로 의식의 길을 도모 하고 영욕을 알므로 창고의 충실을 힘쓰는 것이니 이는 이미의심할 여지도 없다]라고 말한 내 스승의 말씀에 그대로 동감이다.


 



2).자연의 분노


우리는 덴마아크의 혹박(酷薄)한 거친들에서, 저들이 어떻게 무엇으로서 인류의 최고농업문화의 영광을 자기들의 것으로 하였는가 다음에 깊이 살펴보도록 하자.덴마아크의 본토 유트랜드는 사구(沙丘)와 저습지와 소택(沼澤)이 대부분을 차지한 큰 황무지이다. 


 


그러나 원래부터 이 고장이 이렇게 거친 곳은 아니었다. 옛날 석기시대로부터 청동시대에 걸쳐서는 사람이 살기에 대단히 좋았던 지방이었다.이것은 오늘에 남아있는 여러가지 유물로 추측할 수가 있으며, 적어도 기독교가 들어왔을 무렵만해도 삼림(森林)들이 곳곳에 울창하였던 것은 의심할 수가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독일과 덴마아크가 여러세기에 걸쳐서 전쟁을 계속하고 또 내부에는 추장(酋長)들이 끊임없이 서로 약탈을 일 삼는 동안에, 저들은 일체로 자연을 돌아보지 않았다. 더욱이 그 시절에는 저 무서운 흑사병(黑死病)이 크게 유행하여 모든 도시는 폐허가 되고 농장들은 초원으로 일변하여 버렸다.


 


이 엄혹(嚴酷)한 벌을 받고도 저들은 깨닳음이 없었다. 여러 곳에서 모여 들어온 사람들은 왕위와 영토의 쟁탈로 열광하여 역시 자기들의 사는 국토의 자연을 돌아보지 않았다. 울창하던 삼림을 아낌없이 함부로 베어서 자연과 협조할 생각은 전연 없었다.


덴마아크에서 가장 억센 전나무 종류도 수년이 못되어 전부 말라죽기에 이르렀다.


 


북해의 모진 바람이 성낸 물결과 사나운 사풍(砂風)을 몰아 목전의 이익만으로 눈이 뒤집힌 가증한 무리들을 징벌하기 시작하여 삽시간의 덴마아크의 아름다움과 기름짐을 앗아 버렸다. 그 황폐의 모양은 실로 처참하여 옛 모습을 상상할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물론 여기에 살던 사람들은 모두 집과 농장과 재물을 잃어버리고 빈곤의 나그네로 제 살던 고향에서 추방되었다.


 


18 세기에 덴마아크의 애국자들이 몇번이나 유트랜드의 황무지를 개척하려고 애썼으나 모든 시험이 수포로 돌아갔다. 최종의 방법으로서 외국인인 독일 사람들의 그 참을성과 치밀한 성격을 이용해보고자 1천명의 독일 사람들을 막대한 경비를 들여 초빙하여 식민(植民)을 시켜 보았다.


 


그러나 그 거친 땅은 인력의 미치지 못하는바요, 또 그 불순한 기후는 사람의 건강을 유지할 길이 없어서 마침내 그들은 전부 돌아가 버렸다. 독일 사람들의 근기와 과학적인 치밀성도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제가 저질은 것은 제 손으로 수습하라는 신의 뜻인 것처럼 느껴진다. 덴마아크 정부는 다액의 경비를 들여서 식림(植林)을 시험해 보았으나 또한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였다. 자연의 노여움은 그렇게 쉽게 풀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19세기 전반에 덴마아크의 시인인 스테센 푸리챠아는 그 황무의 초원을 걸어보았다. 몇마일을 걸어가도 걸어가도 끝 없는 초원에 강한 사풍이 얼굴을 후려치고 높은 하늘로 부터 부파 종달새의 소리만이 들려옴은 더 한칭 적막하였다. 이동하는 사구와 널려있는 소택들이 이 시인의 앞을 막을 뿐으로 전연 인영(人影)이 끊어진 빈 들이었다.


그는 울창하던 삼림과 기름진 농지로 가득하던 옛 국토를 회상하며 깊은 감개(感慨)에 잠겼다.



[이 참담한 조국 광야에 꽃 향기 풍겨나고 낙토구가(樂討謳歌) 드 높은 번영의 날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것인가] 하고 탄식과 명상에 잠겼었다.그는 [황무지의 이야기]라는 명작을 남기고 1848년에 세상을 떠났다.


 


자연을 학대하며 신의 은혜를 느낄줄 모르는 무리들이 저주받은 산천에서 모조리 쪼껴나온 후에 상당한 시일이 지나갔다. 어디를 막론하고 자연과 협조하지 않으며 자연을 학대하는 무리들은 자연이 주는 정확한 보복을 그대로 거두게 되는 것이다.


 


그 자손들도 또한 조상들이 뿌린 것으로 자연의 주는바 징벌을 면할 길은 없는 것이다. 그들이 다시 자연의 품에 안겨 행복을 누리랴면 곧쳐진 심정의 주인으로 다시 자연의 뜻에 협조하는 인격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자연을 정복한다는 말은 무식한 말이다. 어떠한 사람의 위대(偉大)도 자연의 법칙에서 한치도 벗어나서 생활할 수는 없다. 오늘의 자연 과학은 자연을 정복함이 아니다. 무한한 자연의 법칙의 바다에서 몇개의 진주를 선물로 받아서 법칙에 순종하여 이를 활용하는데 불과한 것이다.


우리는 자연과의 협조 여부로 인간이 거두는 바가 무엇인지를 뎅마아크의 역사에서 가장분명히 배울 수가 있는 것이다. 


 



3).문이 열리다.


[구하라 그러면 받을 것이요, 두다리라 그러면 문을 열리라.]는 기독교 진리의 말씀대로 대 황무지도 열리지 않는 문은 아니었다.


1866년에 무너진 전선에서 돌아온 공병대령 달가스의 가슴 속에는 유트란드 대황무지의 개척의 계획이 서 있었다. 그는 낙망하지 않는 영혼의 주인이었다. 그의 뜨거운 애국심과 열성과 진실에 움지겨 공명하는 동지들이 모여, 히이트 협회(Danish Heath Society) 곧 황무지 개간협회를 조직하고 활발히 사업에 착수하였다.


 


저들은 국민정신이 창일(漲溢)한 애국청년들이다.저들은 덴마아크의 살 길은, 전쟁으로 입은 치명적인 손실을 평화의 사업으로 내부에서 회복하는 것만이 가장 현명한 방책이라고 자각한 사람들이다. 저들은 달가스를 중심으로 굳게 뭉쳐 주위의 비평도 개인의 이해도 돌아보지 않는 동지들이었다.


 


저들의 사업이 실패한다면 조국 덴마아크이 앞날에는 얼마나 큰 비참이 기다리고 있는 가를 저들은 잘 알고 있었다. 식림사업, 토지개량사업,소택배수사업, 토탄사업 등등에 불면불휴(不眠不休) 전 정력을 기우렸다. 한편 다수의 농업기술원을 만들어 아모라도 곧 지도와 원조를 받을 수 있는 강력한 조직을 만들기에 성공하였다.


 


이 히이트 협회가 창설된지 불과 30년 만에 다음과 같은 놀라운 업적의 성공을 보게 되었다. 


 


218 평방마일의 소림(疎林)은 702 평방마일의 밀림으로


300 평방마일으 사구(沙丘)는 140 평방마일로


360 평방마일의 소택(沼澤)은 150 평방마일로


2065 평방마일의 황무지는 270 평방마일로 


이것은 1896년 까지에 유트랜드에서만 이루어진 업적이다.


 


달가스가 세상을 떠날 지음에는 사업은 전국민의 협조를 받아서 급속도로 발전하여 유트랜드와 그 밖의 섬에서 실로 2500 평방마일의 광대한 면적이 보람있게 개척되었다. 이것은 덴마아크의 거의 반이나 되는 넓은 면적이다.


수년전의 황무지와 소택과 사구등의 불모의 땅이든 국토는 가는 곳마다 삼림과 목장과  농장과 향촌의 새 산업지로 그 면목을 일신하였다.실망의 패잔(敗殘)국민이라는 덴마아크 민족은 이제 정열에 불타는 희망의 새 주인으로 바뀌었다. 옛날에 인영이 끊어진  조국의 광야에서 깊이 탄식하던 시인 푸리챠가 이 날에 다시 돌아와 낙토로 변한 조국의 모습을 바라본다면 그 감개가 과연 어떠하랴. 그의 시혼(詩魂)은 개척자들과 낙토화한 국토를 읊어 얼마나 찬양할 것이랴.


 


오늘에 이 개척은 최대한으로 발전되어 8할에 가가운 국토가 농경지로 이용되고 농촌 산지의 정돈은 세계의 무비(無比)로 일대 농업공원이 되었다.


 


1932년의 통계를 보면 주요 농작물의 재배면적은 다음과 같다.


보리           840,000 에이카


밀             240,000 에이카


연맥(燕麥)     980,000 에이카


라이           290,000 에이카


감자           170,000 에이카


(1에이카는 약 4단보(段步)



주요 가축통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33년                    1935-39년                    1950년


소       130,000                   3,196,000                    3,044,000


말       500,000                     567,000                      503,000


돼지   4,400,000                   3,163,000                    3,208,000


닭    26,000,000                  29,745,000                   24,433,000



참고로 해방직후인 1947년도 우리나라 가축통계를 보면 다음과 같다.


농우     33,000


유우      1,339


말       32,635  


돼지    508,628


닭    3,081,283


이 통게를 국민1인당 환산하면 더욱 큰 차이가 생길 것이다.(제2차 대전에 큰 타격을 받은 덴마아크의 가축이 또 급속히 회복하였음을 볼 수 있다).


 


달가스가 현실적으로 국토를 개조하여 국민의 영원한 복리를 끼친 공적은 위대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이 현실적인 업적 그 것보다도 달가스의 부동의 신념과 무사(無私)의 애국정열이 절망의 바닥에서 국민을 이끌어내어 그들의 가슴속에 불멸의 희망을 불을 달려 준 점을 우리는 더욱 높게 평가하고 기리는 바이다.


 


수 많은 덴마아크의 청년들이 그의 정신을 이어 받아 분기(奮起)활동할 것이니, 눈에 보이지 않는 이 고귀한 유산을 후세에 끼쳐주어 그의 생명은 민족의 위대한 불로 밝을 것이다.


 


한 알의 밀이 땅 속에서 썩어 백배로 다시 썩어 만배로 퍼지는 일상보는바 진리는 농사만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자기를 버리지 않는 곳에 번영이 없음을 2000년전의 젊은 성철(聖哲)이 이를 비유로 들어 인류에게 가르친바 영원의 진리이다.


 


우리 민족도 이 진리의 범주안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국민이 대아(大我)를 위한 희생과 봉사의 정신이 없고서는, 아모리 간절하다 할 지라도 갈망만으로는 참 평화와 행복과 고도의 문화가 우리의 것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농경지는 약 450만 정보로 전 국토의 2할에 불과하다. 아모리 산이 많은 산의 나라이라 할 지라도 우리의 개척의 여지는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근시안적인 경박한 생각과 이익을 위하여서는 신의를 헌 신짝 버리는 근일(近日)의 변태성(變態性)을 근본적으로 수정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국토도 틀림없이 노(怒)를 발할 것이요 또 세계 우방으로 부터 받을 대접도 명확할 것이니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리는 시급히 일대국민운동을 이르키어 국토를 몸같이 아끼며 불의를 두려워하고 용납하지 않도록 함이 간절하다 할 것이다.


 


 


4).제2의 수난


고난(苦難)은 인생을 깊게하고 역사를 순화(純化)한다. 덴마아크는 단적으로 이를 증명한 나라이다. 나는 덴마아크의 역사에서 또, 하나의 수난에서 비약한 사실을 기록하고자 한다.


지금부터 팔구십년전인 1870년경에 덴마아크는 고심참담하여 개발한 국토를 기초로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서 산출된 곡물로 외화를 얻어 국민의 빈곤을 건지랴고 계획하였고 또 이밖에는 다른 길이 없었다. 1871년부터 1874년에 이르는 동안은 덴마아크 주곡농업의 전성시대로 년평균수확고는 4500만 크로너를 넘어섰다.


 


그러나 신흥 미국은 무진한 평원을 개척하여 현대적인 기계농업으로 막대한 곡식을 안가(安價)로 생산하고 유럽 각국에 대량 수출하였다. 이로 인하여 덴마아크는 시장 전부를 빼앗기게 된 것이다.노임에도 차지 못하는 싼 값인고로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고경에 빠지게 된 것이다.


미국뿐만이 아니라 쏘련과 남미에서도 또한 값 싼 곡물이 밀려 들었다. 이 대 자본과 기계의 의한 곡물의 대량에 생산과 경쟁할 수가 없어서 덴마아크는 다시 무서운 경제 파멸에 직면하였었다. 그러나 저들의 성실과 지혜는 이 것을 타개하기에 성공한 것이다.


 


그 것은 곧 유축(有畜)산업으로의 전환이니 값싼 사료의 구입, 축산물 가격의 안전성, 두엄에 의한 지력증진등의 유리한 점을 발견한 까닭이다. 이 것은 그 후에 순조로 진전하여 협동조합과 아울러 놀라운 발전으로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 부지런하고 규모있고 과학적이 경영은 인류 농업사의 찬란한 꽃이다.덴마아크 민족이 수난의 시기마다 실망하지 않고 새로운 비약으로 행복의 날을 창조함을 보고 이 수난의 시대에 처한 우리가 어찌 이에 무심할 수가 있을 것이랴. 덴마아크는 국토와 인심이 아울러 광야에서 옥야(沃野)로 바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