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갈매기/지식경영자(CKO)
새마을 운동 정신은 어디서 왔는가? | 머리식히기
부산갈매기 2009. 5. 22. 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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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덴마크 중흥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룬트비(Nikolai Frederik Severin Grundtvig)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땅을 사랑하자.”는 이른바 ‘3애(三愛)정신'을 내세워 전쟁과 가난으로 깊은 좌절과 자탄에 빠진 덴마크 국민들에게 등불이 되어주었다. 오늘날의 덴마크는 북유럽의 아름답고 부유한 나라지만 19세기 중엽만 해도 상황은 딴판이었다.
당시 덴마크는 프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해 프러시아(지금의 독일)에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주고 유럽대륙 북부의 곡창지대인 슬레스빅, 홀슈타인 지역을 넘겨준 상태였다. 남겨진 스칸디나비아 땅은 북해와 발트해의 바닷바람에 시달리며 돌과 모래, 잡초만이 무성한 황무지였다. 국가 경제는 당연히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한때 중앙은행이 파산할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덴마크 국민은 좌절과 실의에 빠졌다. 어두운 사회 분위기 속에서 알코올 중독자들이 늘어났다.
1783년 9월8일 덴마크의 우드비에서 태어난 그룬트비는 “힘이 아니라 국민성으로 위대한 국가를 건설하자”고 외치며 국민 성격개조 운동과 농촌부흥운동을 벌여 오늘의 선진 낙농국가인 덴마크의 기초를 마련했다.
그룬트비는 그 파탄에 빠진 덴마크를 구하기 위해 ‘국민의식 구조가 개혁돼야 잘 사는 나라가 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국민성 개조운동’을 펼쳐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덴마크 국민들 사이에 ‘우리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그러한 믿음이 경제 재건의 활력소가 되면서 덴마크는 아름답고 부유한 낙농국가로 거듭날 수 있었다.
우치무라 간조의 <덴마크 부흥기>에서 깊은 감명을 받은 고 류달영 선생은 참고할 만한 변변한 문헌도 없고 원고지조차 구하기 힘든 한국전쟁 당시 피난지 대구에서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시멘트 포대 속지에 조국을 다시 일으켜세우겠다는 의지와 다짐을 담은 부흥사를 써내려갔다. 그는 이를 통해 한국인들이 가진 ‘되는 일이 없다’는 식의 부정적 문화를 ‘열심히 해서 잘살아보자’는 긍정적 문화로 바꾸는 데 앞장섰다.
1953년에 출간된 류달영의 <새 역사를 위하여>는 전후 한국재건운동의 바이블이 되었다. 특히 그가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자조’는 이후, ‘근면, 자조, 협동’이라는 새마을 운동 정신의 밑바탕이 되었다. 이처럼 150년 전만 해도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던 자조가 그룬트비와 우치무라 간조, 류달영 선생을 거쳐 우리에게까지 전해진 것이다.
정진홍 <인문의 숲에서 경영을 만나다2>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