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23

[책리뷰] 김건우 - 대한민국의 설계자들(학병세대와 한국 우익의 기원... - 동아마라톤 이야기

[책리뷰] 김건우 - 대한민국의 설계자들(학병세대와 한국 우익의 기원... - 동아마라톤 이야기

[책리뷰] 김건우 - 대한민국의 설계자들(학병세대와 한국 우익의 기원...

❝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이다. 손기정은 김교신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그냥 바라만 보고 있어도, 아니 선생님이 계시다는 생각만 하고 있어도 무엇이...세부 요약 내용이 짧은 글로 이루어져, 이미지나 동영상이 기반이 되는 게시물입니다. 세부 내용은 본문에서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 ❞      2020 . 04 .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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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낀 점
이 책,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마사 누스바움의 책은 내용은 알찼지만 재미는 좀 없었다. 그래서 진도가 좀 느렸지만 이 책은 참 재미있었다. 그래서 진도가 잘 나갔다. 확실히 한국인이 쓴 책이 몰입도가 더 좋다. 물론, 내가 관심있었던 내용이 있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이 책은 친일을 하지 않은 보수 우파의 맥을 살펴 보는 책이다. 이승만, 여운형, 김구, 안창호 이런 "거물급" 지도자들은 큰 그림을 그렸지만 실제로 구체적인 설계도와, 조직, 행동에 나선 이들은 아랫세대 사람들이다(12). 그 세대에서 가장 주목해 봐야 하는 사람들은 "평안도와 황해도(좁은 의미의 서북 지방)를 주요 근거지로 하던 우익 기독교인들과 지주, 상공인이 대거 월남한 사람들", "간도(동만주)와 함경도를 근거로 하던 우익 민족주의자들"(14)을 가장 먼저 다뤄야 한다. 이들을 월남 지식인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가장 주된 중심은 "반공"이다. 이들은 전쟁 이전부터 공산주의와 전쟁을 치뤘던 사람들이다. 또한, 이들은 평양을 중심으로 했던 안창호의 "실력양성론"에 사상으로 이어져 있다. "교육과 계몽을 통해 민족의 힘을 기르는 것, 일제 시기 독립의 방략으로도 제시되었던 이 모델이 새로운 나라 만들기의 중요한 밑그림 중 하나가 되었다."(15) 그 인물들을 언급하면 이렇다.

그렇지만 어떤 식으로든 일제에 협력하지 않은 사람들, 특히 젊은 세대의 인물들은 당당히 건국의 주체가 되고자 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대표적 인물들만 거론해 본다. 장준하, 김준엽, 지명관, 서영훈, 장기려, 선우휘, 김성한, 양호민 등이다.
그리고 남쪽 출신이지만 학교를 매개로 이들과 이어졌던 류달영 같은 인물들, 사상의 계보로는 다르지만 정확히 학병세대의 중심에 있는 종교인 김수환, 지학순, 문인 조지훈, 김수영, 더하여 세대는 훨씬 위이지만 "우익 진보 진영"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류영모, 함석헌, 김재준 같은 종교 사상가들과 그 제자들, 또한 비교적 아랫세대로 해방을 맞이했지만 오늘날 언론계와 학계의 밑그림 하나를 놓았던 천관우, 이기백 등 정치, 언론, 교육, 종교, 학술, 사상 각계에서 오늘날 대한민국의 기초를 놓은 이들이다.
앞으로의 글은 이들에 대한 이야기다. 이 사람들을 만든 배경, 이 사람들이 했던 활동과 생각을 살핀다. 종합적으로 이 책은 "대한민국의 설계자들"에 대한 이야기이자 한편으로 "남쪽을 선택한 지식인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또한 부분적으로는 "학병세대에 대한 보고서"에 해당한다. 인물에 대한 열전이면서 세대에 대한 평전이기도 한 이 책이, 어떤 독자들에게는 "한국 우익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로 읽힐 수도 있다. (15-16)
학병이라는 세대, 거기에 장준하, 사상계 지식인들 등 친일을 하지 않았으면서 좌파를 경계하던 서북지역에서 내려온 철저한 반공주의자들, 곧 정통우파 민족주의자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들 다수가 기독교인이기도 했다. 여러 이야기들이 기억에 남는다.

이 책이 재미있었던 이야기는 정말 내가 궁금했던 내용들이던가 읽다가 궁금했던 내용들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흥미로운 부분을 몇 개 옮겨보겠다.

장준하 vs 박정희
이 책에서는 장준하 선생님을 굉장히 중요한 인물로 다룬다. 장준하 선생님하면 유명한 것이 돌베개이다. 돌베개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주일학교를 꾸준히 다닌 분들은 돌베개하면 야곱의 돌베개가 떠오를 것이다. 장준하 선생님의 돌베개도 성경에서 나온 것이 맞다. 야곱이 형 에서를 속여서 죽을 위기에 처하자 외삼촌의 집으로 도망을 가는데 도망 가는 도중에 잠을 잘 때 돌배게를 봤다. 신학적으론 그때 꿈을 꾼 장면이 나중에 훨씬 중요한데 그보단 여기에서 돌배게가 중요하다. 왜 돌배게냐면 장준하선생님은 일본군에서 목숨걸고 탈출해서 광복군이 있는 곳까지 가는데 그 거리가 정말로 멀었던 여정이었다. 6000리였는데 Km로 환산하면 대략 2,356Km이다. 이렇게 긴 여정을 마치고 임시정부 광복군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왜 박정희와 라이벌 구도로 볼 수 있을까? 둘은 나이도 비슷하지만 삶의 여정은 정반대였기 때문이다. 장준하는 1918년생, 박정희는 1917년생이다. 박정희의 인생을 잠깐 말해보겠다. 그는 군인이었다. 만주군. 독립운동가를 잡아 다니던. 그러니 친일의 행각이 있다. 그리고 그의 셋째 형은 공산주의자였다. 대구 10.1 사건으로 죽었는데 여기에 분노해서 그는 남조선로동당에 가입을 한다. 남로당, 즉 그도 공산주의 전력이 있는 사람이다. 솔직히 친일과 빨갱이 프레임을 박정희에게 다 씌울 수 있다. 박정희는 빨갱이로 몰릴 수 있기에 자신은 전향한 티를 내어야 했고 더욱 잔인하게 공산주의자들을 찾아내고 죽여야 하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미국과도 사이가 나빴다.

장준하 선생님은 어떤가. 그는 앞서 말했듯이 임시정부의 광복군 출신이다. 그리고 해방 전 광복군 시절에 미군의 OSS(미 전략정보기관, CIA의 전신)에서 훈련을 받았다. 완전히 미국통이다. 그리고 평안도 출신이었고 아버지는 목사였다. 그렇기에 누구보다도 반공의식이 있는 사람이다. 과연, 장준하 선생님이 대통령 후보로 나온다면 미국은 누굴 밀어줄까? 당연히 장준하 선생님이다. 그리고 장준하 선생님은 군인들에게도 인기가 좋았다. 김재규 역시도 장준하 선생님을 존경했다. 이정도라면 박정희의 입지를 흔들 수 있는 너무나 큰 적이었다. 그러니 그를 반드시 암살하여야 했다. 그리고 장준하 선생님은 1975년 추락사고로 돌아가신다. 후에 시신을 살펴봤는데 머리에 무언가 맞은 자국이 두개골에 확실히 보였다. 무거운 무언가로 내려친 흔적이다. 누군가 암살한 것이다. 배후는 분명 박정희 정권일 것이다. 암살을 하지 않았다면 장준하 선생님이야 말로 박정희의 가장 큰 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거대한 인물이 대통령이 되었다면 우리는 좀더 역사에 정통성을 부여할 수 있지 않았을까. 임시정부의 맥락을 이을 사람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독립운동도 하셨고 민주화 운동도 하셨기에 더더욱 그 뿌리가 아쉬워 진다. <사상계>를 만드셨기에 누구보다도 지성이 깊은 사람이기도 했다. 참 아쉬울 뿐이다. 장준하 선생님을 말하려면 <사상계>를 말해야 하지만 이를 리뷰에 옮기지는 않겠다. 참 아쉽다.

임시정부의 안창호
당시 임시정부는 상당히 복잡했다.

당시 충칭 임시정부는 파벌 난립으로 인해 연립 정부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상하이를 떠난 후 임시정부는 파벌별로 흩어져 있다가 중국 정부의 요청으로 겨우 모양만 통합을 이룬 상태였다. 파벌들은 각자 정당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김구와 조소앙의 한국독립당, 김규식과 김원봉의 조서민족혁명당, 신익희의 한국청년당, 그 밖에도 서너 정당이 난립 중이었다. (27)
책에서는 이렇게 난립 중일 때 장준하 선생님은 도착했고 김준엽 선생님과 함께 임시정부에서 좌충우돌을 보인다. 이들은 나이가 어렸기에 위의 인물들이 포섭 공작을 벌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장준하 선생님은 "다시 일본군에 돌아가 항공대에 지원, 중경 임정 청사를 폭격하고 싶다."(27)는 폭탄발언을 하셨다. 얼마다 대단하 포구인가. 이런 기개로 임정의 분열과 졸렬에 한방을 날린 것이다.

그러한 임시정부에서 내무총장, 국무총리대리, 노동총장 등을 맡았다.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맡았는데 과연 안창호 선생님은 이 분열에서 어떤 고민과 역할, 행동을 하셨을까? 물론 분열을 수습하지 못하고 떠나시긴 했지만 그분이 중도를 향한 발걸음을 봤을 땐 상당히 귀감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분의 일본에 대한 글을 봤는데 상당히 충격이었다. 일제시대를 겪고도 그 시기를 넘어서서 나아가야 한다는 그 말이 대단히 새로웠다. 이러한 분이 대한민국의 지도자가 되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실력양성론으로도 유명한 안창호 선생님인데 역시 서북인들은 안청호 선생님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그의 수제자는 이광수와 주요한이다. 모두 친일행위를 한 사람들로 유명하다. 뛰어난 실력을 지닌 후배들을 배출했지만 그의 두 수제자들은 왜 친일을 저질렀을까. 이러한 궁금증에 최근에 나온 안창호 선생님의 전기를 구입할까 말까 망설여 지기도 하다.

우리는 화해의 정신을 보인 안창호 선생님에게 배워야 할 때가 아닐까 싶다. 그런 분이 우리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무교회주의(김교신, 함석헌, 손기정, 류달영, 윤석중, 농심, 풀무, 성서조선)
그래도 가장 관심이 갔던 부분은 무교회주의자들이었다. 내가 어렸을 적 가장 존경했던 분이 무교회주의자들을 이야기했고 그들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해서 나 역시 이들에게 관심이 갔다. 그래서 배운 사람은 우치무라 간조이다. 그리고 간조의 제자들은 김교신, 함석헌, 송두용 등으로 알려져 있다. 그 중 나는 김교신 선생님에게 왠지 정이 간다. 이름이 멋있어서 그런가? 김교신 선생님의 제자가 있는데 그 제자는 엄청 유명한 사람이다. 그 제자는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이다. 손기정은 김교신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그냥 바라만 보고 있어도, 아니 선생님이 계시다는 생각만 하고 있어도 무엇이 저절로 배워지는 것 같은 분이셨다." (118)
김교신은 양정 고등보통학교의 선생이었다. 이곳에서 손기정 선수를 만난 것이다. 김교신은 손기정 선수의 비공식 트레이너이기도 했다. 둘 사이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나는 어렸을 적 존경하던 분이 설교때 이 이야기를 해주어서 많이 들었던 내용이었다. 1935년 도쿄에서 열린 베를린 올림픽 국가 대표 선발전에서 손기정 선수의 요청에 따라서 김교신 선생님이 자전거로 앞서 달렸던 일화가 있다(이 책에서 자동차라고 나왔는데 내가 알기로는 자전거이다). 이때 외쳤던 말이 "기정아! 나라를 생각해서 뛰어라" 를 외쳤었다(설교때 들었던 내용으로는 "예수님 생각해라"는 말이 있었는데 예전에 이 부분을 봤을 때 이 말은 없었다. 아마도 설교하신 분이 은혜롭게 보이려고 각색한 것이리라).

그의 제자들 중에는 유독 유명한 사람들이 많다. 가장 유명한 사람이 바로 위에 언급한 손기정이고, 동시 작사가로 유명한 윤석중, 새마을 운동의 기틀을 세운 류달영이 있다. 윤석중은 "퐁당 퐁당 돌을 던지자", "졸업식 노래", "떳다 떳다 비행기", "새나라의 어린이" 등 유튜브로 그의 동요를 들어보니 어렸을 때 한 번 쯤은 들어보았던 동요였는데 이 동요의 작사가가 윤석중이다.

그의 애제자는 류달영이다. 류달영은 김교신을 생각하며 이렇게 말했다. "오늘의 나의 인생관과 세계관은 모두 김교신 스승과의 만남으로 자리 잡은 것"이라고 했다. 두 사람은 양정고등보통학교에서 뿐만이 아니라 김교신의 주일 성서 모임과 또 이후 일상을 같이하는 시간도 가졌다. 류달영은 우리나라에 농촌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분이다. 이분이 "농심"이라는 말을 만들어 내신 분인데 "농심"이라는 기업의 말고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여튼, 이분이 농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무교회주의자였기 때문이다. 당시 맥락을 보자.

우치무라 간조의 <덴마크 이야기>는 한국의 무교회주의자들에게 사회 개조 모델 이전에 기본적으로 큰 정서적 "격려"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
덴마크는 1864년 프로이센(독일)과의 전쟁에서 국토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곡창 지대(현 독일 북부)를 빼앗긴 역사가 있었다. "나라 없는" 조선의 무교회주의자들에게 덴마크의 아픈 역사는 특별히 강한 인상을 주었던 듯하다. 덴마크가 "밖에서 잃은 것(땅)을 안에서 찾자"를 모토로 새롭게 설계되고 정비된 것처럼, 조선도 덴마크 모델을 살피며 길을 찾을 것으로 보였다. 덴마크의 성공담은 이십대 청년 류달영에게 깊이 각인되었다. 훗날 류달영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33년 수원고등농림 재학 시절 일본의 우치무라 간조의 <덴마크 이야기>라는 수첩 크기의 작은 책을 읽고 나라 없이 살던 그 시절에 나는 국가관을 확립했다. 내가 일생 동안 할 일은 민족의 광복을 위하여 이바지하는 일이며 조선을 동양의 덴마크로 만드는 일이었다. (135-136)
간조의 <덴마크 이야기>를 건네준 사람이 바로 김교신이었다. 류달영은 훗날 1961년 쿠데타 직후 군사 정부에서 만든 "재건국민운동본부"의 본부장을 맡았다. 박정희가 여러 차례 직접 류달영을 만나 본부장 직책을 맡아 줄 것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단, 박정희가 일체 간섭을 하지 말라는 조건으로 승낙했다. 이후 류달영은 덴마크 모델에 따라 국민운동계획을 수립하고 실행에 착수 했다.

류달영의 재건국민운동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류달영은 사업 파트를 크게 국민 교육, 향토 개발, 생활 혁신, 사회 협동 넷으로 나누었다. "국민 교육"은 덴마크 모델에 따라서 "농민 교육"에 주안점을 둔 것으로, 중앙과 도지부, 시군 지부의 3개 각급에 교육원을 두고 농촌 지도자를 양성하고자 했다. "향토 개발"은 농로 수로 개설과 농지 개간 사업으로, "생활 혁신"은 주택과 식생활 등 생활환경 개선 지도로, "사회 협동"은 도농 자매결연과 결식아동 급식, 학생 봉사 활동 조직으로 전개했다.
운동은 추진력 있게 이루어졌으며, 취임 한 해 만에 상당한 성과를 거뒀던 것으로 보인다. 새마을운동 연수원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중앙 교육원과 시도 지부 교육원에서 각각 7000명여 명과 6만 4000여 명의 농촌 운동 지도자를 교육했고 마을 청년 회관 약 7000동, 농로 5만 4000여 킬로미터, 수로 3300여 킬로미터를 개설했다. 부엌, 변소 등 생활환경 개선과 농촌 결식아동 급식을 하고 41만여 명의 농어촌 학생 봉사대를 조직했다. (138)
후에 재건국민운동은 새마을운동의 주요 모델이 되었다. 왜 류달영의 재건국민운동은 사라지고 새마을 운동이 생겨났을까. 그것은 국가주의자들과의 대립때문이다. 확실히 무교회주의자들은 국가랑 친하질 못하다. 우치무라 간조도 고등학교 선생이었는데 천황의 교육 칙어에 대한 불경 사건으로 학교에서 짤렸고 러일전쟁을 반대해서 일본의 적으로 몰려 있었다. 간조가 한 말 중에 일본이 이렇게 제국주의를 계속한다면 벼락을 맞을 것이라고 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제자 중에 유명한 사람이 여럿 있지만 대표적으로 야나이하라 다다오이다. 그는 일본 군국주의에 반대하여 도교대학교 교수직에 쫓겨나기도 했다. 쫓겨난 이후 1940년, 1942년 두 차례 한국에 와서 서울과 평양 등지에 무교회주의 집회를 열기도 했다. 모두 김교신이 주최한 것이다. 1942년 평양 방문때는 김교신 선생님께서 장기려 선생님께 지시를 내려 모임을 준비하게 했다. 장기려 선생님의 전기를 보면 그 모임에서 조선총독부의 감시가 있었다고 한다. 왜냐면 야나이하라 다다오는 반정부주의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훗날 도쿄대학교 총장으로 부임하게 된다. 아, 우치무라 간조의 제자들 중에 수상, 도쿄대학 총장, 교육부 장관 등 전후 일본을 일으키는데 힘이 되는 인물들이 대개 있었다. 그래서 우치무라 간조는 현대 일본을 일으킨 인물 20명 중에 한 명에 꼽힐 정도이다.

결국 군사정부와의 알력으로 재건국민운동본부는 해체되었다. 이용만 당한 것이다. 그래서 동아일보에 박정희 군사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실었다. 민간이 중심이 되는 걸 꿈꿨던 류달영이기에 군사정부의 개입은 참으로 맞지 않았다.

류달영은 재건국민운동과 새마을운동을 연관시키는 것을 싫어했다.

하지만 새마을운동의 전개에 실질적인 힘을 보탰다. 새마을운동 중앙 연수원 원장이 된 김준 등, 자신이 재건국민운동본부장을 맡았던 시기에 운동에 참여시켰던 서울대 농대 제자들 중 많은 수가 이후 새마을운동의 주요 간부가 되었던 이유도 있었다. 류달영은 이런 방식으로라도 농민이 잘살게 된다면 그 자체로 의미 있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그는 농민을 사랑했고 "농심"이란 말을 창안해 사용하기도 했다. ...
류달영이 국가 정책에 참여함으로써 이룬 성과는 크다. 대한민국 사회에 류달영이 기여한 것은 농촌 사업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늘날 "평생교육" 개념은, 1980년 헌법 개정 심의위원으로 참여한 류달영이 "평생교육" 조항을 헌법으로 제정케 함으로써 대중화된 것이다. 이 때도 류달영은 덴마크 교육 모델을 참조했다. (143)
무교회주의자들이 농촌 운동에 관심이 많았다고 위에서 서술하였다. 그들은 공동체를 열었는데 그 공동체가 바로 풀무 공동체다. "이찬갑의 풀무 공동체는 한국 무교회주의자들의 세계관과 가치관, 방법론을 집약해서 보여 주는 사례이다"(152) 나중에 홍성에 풀무학교가 새워졌다. 우리가 아는 풀무원의 이름도 여기에서 나왔다. "풀무원의 창립자 원경선은 풀무학교 이사진 중 한 사람이었고, 풀무학교의 이름을 따서 농장 이름을 지었다"(159). 원경선 장로의 아들이 바로 국회의원 원혜영이다. 여튼, 풀무라는 이름은 "녹슨 쇠붙이를 녹이고 정련해 새로운 농기구를 만든다"는 뜻이다. 작가는 성서에도 등장하는 용어여서 이를 이름으로까지 지었다고 했다. 하지만 개역개정 성경으로 풀무를 검색했을 때 위와 같은 맥락에서 쓰인 단어는 없다. 개역한글도 마찬가지다. 저자가 무엇을 근거로 이렇게 말했는지 각주가 없어서 모르겠다. 하지만 위의 맥락에 쓰이는 성경 구절은 있긴하다. 이사야서 2장 4절이다.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 이 구절인지는 모르겠다. 새로운 농기구를 만든다는 것만 같아서다. 개역한글의 풀무는 심판을 말할 때 자주 쓰이는 표현인데 어떤 성경구절을 보고 풀무를 붙였는지 모르겠다.

무교회주의를 이야기하면 가장 먼저 이야기해야 하는 건 성서조선이다. 성서조선 사건은 근현대사 교과서에더 실려 있다. 나는 이 장면을 고3 때 수업시간에 봤는데 전율을 느꼈다. 성서조선 사건이 무엇인가? 바로 조와 사건이다.

혹독한 추위로 개구리들이 얼어 죽은 일을 묘사한글로, 마지막 부분은 이렇게 되어 있다.

혹한에 작은 담수의 밑바닥까지 얼어서 이 참사가 생긴 모양이다. 동사한 개구리 시체를 모아 매장하여 주고 보니, 담저(연못 밑바닥)에 아직 두어 마리 기어 다닌다. 아, 전멸은 면했나 보다!

이 글로 인해 1942년 "<성서조선> 사건"이 발생했다. 김교신, 함석헌, 류달영(후일 서울대 농대 교수), 이찬갑(후일 풀무학교), 장기려(후일 부산 복음 병원) 등 필자들은 물론 정기 구독자 전원이 검거되었고 김교신과 함석헌 등 열세 명은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꼬박 한 해 동안 옥고를 치렀다. 물론 <성서조선>도 폐간되었다.
어느 일본인 형사로부터 "독립운동 하는 놈들보다 더한 최악질들"이라는 소리를 들었다는 <성서조선>그룹은 한국 기독교 정신주의의 가장 비타협적 지점에 서 있다. 이들은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두고 자신의 삶 전체를 민족을 위해 헌신하고자 했다. (124-125)
이처럼 이들은 저항했던 이들이었다. 일제에 저항했고 독재에 저항했다. 나에게 전율을 일었던 그 기억이 아직도 난다. 내가 고등학생때였을 때 이만열 교수님이 국사편찬위원회였는데 아마 그 영향에 교과서에 실렸던 것일까? 그전에도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후대에도 계속해서 알려지길 소망한다.

이렇게 무교회주의자들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왜 어렸을 적부터 그룬트비를 들었는지도 풀렸다. 존경하는 분이 우치무라 간조에게 영향을 받았기에 덴마크 그룬트비를 언급했던 것이다. 그분은 그룬트비와 키에르케고르를 알려준 분이다. 차마 그분의 이름은 이제 볼드모트가 되어 밝힐 수는 없으나 내 어린시절 나를 형성하는데 크게 영향을 끼친 분이시다. 옛 기억과 나의 사상의 뿌리를 탐구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무교회주의자들이 뿌린 씨앗이 이토록 많구나 느낀 시간이이도 했다. 김교신 선생님은 이른 나이에 독립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1945년에 돌아가셨기는 하지만 해방 날 전에 돌아가셨다. 그러나 그분은 짧게 생을 사셨지만 훌륭한 제자들을 많이 두어 대한민국에 값진 보물들을 남기셨다. 양현혜 선생님이 도쿄대학교 박사학위로 김교신과 윤치호에 대한 내용을 썼다고 하던데 읽고 싶어 진다.

그밖에 홍익인간은 누가 만들었나?
오랫동안 한국 교육 이념의 근간이 되었던 "홍익인간"은 백낙준이 미군정 시절에 안출한 것이다. 백낙준은 1945년 12월 미 군정청 한국교육심의회에서 "홍익인간"을 교육 이념으로 제안하여 채택하도록 했다. 정부 수립 후 대한민국 최초의 교육법 제1조는 이렇게 나왔다.

교육은 홍익인간의 이념 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완성하고 자주적 생활 능력과 공민으로서의 자질을 공유케 하여 민주국가 발전에 봉사며, 인류 공영의 이상 실현에 기여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 (54)
백낙준은 한국교회사를 공부할 때 배웠던 인물이다. 그런데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한 그가 홍익인간의 만든 사람이라고?! 안수를 받았으면 목사일 것인데 검색해보니 목사 안수를 미국에서 받은 듯하다. 그렇다면 목사가 홍익인간을 제정한 것이다. 나는 홍익인간을 무슨 대종교의 영향으로 한 것은 아닌가 싶었는데 참 의외였다.

조선일보의 이데올리거가 진보의 거두 리영희를 옹호?
리영희 하면 빨갱이로 아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조선일보를 만든 선우휘가 리영희를 옹호했다! 리영희가 삼십대 중반 젊은 기자였을 때 중립국들이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안을 제출할 조짐을 보인다는 내용을 썼다. 이 내용은 남한 단독 가입을 추친하던 정부 정책에 배치되는 기사였다. 편집국장이던 리영희와 기사를 쓴 리영희는 구속을 당했다. 리영희는 구속 만기로 스무이레 만에 석방되었고, 선우휘는 법원의 구속적부심으로 닷새 후 석방되었다. 리영희를 석방하는 대가로 선우휘는 편집국장 직을 내놓았던 것이다.

이외에도 철저한 반공주의자이면서 극우였던 선우휘는 이해가 안 가는 행동을 한다. 일본으로 간 지명관은 일본의 시사 월간지 <세카이>에 한국 정치 상황과 민주화 운동을 바깥에 알린다. 익명으로 알렸는데 필명은 "TK생"이었고, 오랜 뒤에 지명관으로 알려진 것이다. ""TK"생 지명관을 중앙정보부가 추적할 때, 이를 따돌린 인물도 선우휘였다"(103). 그는 말한다. "박정희 정권에 대한 입장이 "피차 달랐어도 철저하게 그는 자가기 내 형이다, 동생을 돌본다, 하는 생각이 철저했다.""(103) 함석헌에 대해 사람들이 "수군거릴" 때도 격분했다.

리영희, 지명관, 함석헌의 공통점은 서북 사람이다. 그렇다. 선우휘는 지역주의가 아주 강했다. 이데올로기보다 더 강했다. 한면으로는 서북지역의 끈끈함(긍정적인 면에서, 부정적인 면에서)을 다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서러웠던 과거 때문일까?

국문학자가 왜 역사책을?
국문학을 전공한 저자가 왜 역사책을 썼는지 나온다.

문학은 일반의 통념보다 훨씬 범위가 넓다. 특히 지성사는 문학 연구와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다. 더구나 오늘날 학문 영역의 경계는 새롭게 그어지고 있다. 누군가 필자에게 전공이 무엇인가 물어보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한국학입니다. 현대 한국학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293)

2017년 봄
김건우
신학을 전공하는 분들 중에도 자신을 역사학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신학도 범위가 넓어서 일까? 그럼 신약을 전공한 사람들은 전공을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할까? 고대 유대학? 고대 로마학? 팔레스타인학? 음, 그냥 포괄적으로 역사학이라고 말하는게 더 깔끔할 듯하다. 학문의 경계가 새롭게 그어지고 있다는 말에 신학도 역시 역사학, 문화인류학, 언어학 등 다양한 방법이 동원되기에 어떤 전공을 말해야 할까 고민되기도 하겠다. 2000년 전 있었던 일을 탐구하기에 역사학자라고 말하는 것도 나는 타당하다고 본다. 그것이 불신앙의 표현이라거나, 기독교를 안 믿는 사람들에게 어필해 보이려거나 그런 것은 아니라고 본다. 정말 신학적인 내용을 잘 몰라서 그럴 수 있다. 물론, 이때는 조직신학적인 차원에서 말하는 것이지 싶다.

나가면서
이 외에도 김교신과 함석헌의 차이, 진보개신교 이야기, 강원룡 목사님 이야기 등 많은 부분이 있다. 전체적인 일관성이 뛰어나다 할 수 없지만 내 취향 저격이었기에 너무너무 재미있는 책이었다!

페이스북 글

<대한민국의 설계자들>은 엄청 재미있게 읽었다. 안 읽히는 책은 그냥 넘기고 잘 읽히는 책을 읽었어야 되나 싶었다.
임시정부 이야기로 드라마를 만들면 정말 재미있겠다 싶다. 그 안에서도 좌파, 우파 갈등이 있었고 장준하를 위시한 어린(?) 학병 세대가 가세해 윗세대에 한방을 가하고ㅎㅎ
장준하라는 거대한 인물을 읽었고 그가 여운형에 대해서 대단히 높게 평가했다던데 여운형에 대한 괜찮은 자서전을 한 번 구입해야겠다.
그 외에도 도산 안창호의 오른팔과 왼팔이 이광수, 주요한이라는 데에 놀람.
선우휘는 지금의 조선일보의 포지션을 만드는데 지대한 영향은 준 사람인데 리영희를 지켜줬다는 데에 놀랐다. 이데올로기보단 같은 지역 출신이 앞섰다. 그만큼 서북지역의 끈끈함이라는 게 있나보다.
그래도 제일 재미있었던 것은 10-12장. 김교신의 제자는 손기정 선수가 가장 유명하다. 류달영은 이름은 들어봤지만 그토록 농촌부흥에 영향을 준 사람인지 이제 알았다. 농심이라는 용어를 류달영이 처음 썼다.
풀무 역시도 성경에서 가져온 용어였단다. 풀무학교를 세웠고, 거기에서 원경선이 자신의 농장을 풀무원이라고 지었단다. 물론 그도 독실한 기독교인이다.
왜 그토록 한때 존경했던 분이 덴마크 그룬트비를 얘기했는지 이제 알 것같다. 우치무라 간조때문이었다. 그것말고도 김교신은 철저하게 성경주의자였던듯 하다. 류영모와 함석헌이 도교적인 것을 혼합하려 했을 때 경계하고 거리를 뒀다는 것이다.

여튼, 전체적인 구성이 완전히 맞춘 것같진 않지만 그래도 많이 배웠다. 궁금했던 것들과 몰랐던 내용들을 채울 수 있었기에 좋았다.

왜 문학자를 역사학자로 부르는지 말하는데 신학자도 역사학자라고 부르는데 비슷한 걸까?.

책 맛보기
서영훈은 많은 이들이 추구하는 주류의 길을 가지 않았다. 공부는 하되 학력에 무관심했고, 사상을 추구하되 화려한 것에 끌리지 않았다. (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