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29

정인재. 하곡(霞谷) 정제두의 양지생리설(良知生理說)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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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재. 하곡(霞谷) 정제두의 양지생리설(良知生理說)
존재는 생명의 강물
2020. 9. 29. 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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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곡(霞谷) 정제두의 양지생리설(良知生理說)
[생명에 대한 다양한 문제지평과 담론을 공유하기 위해서 『생명과 더불어 철학하기』(우리사상연구소 편, 철학과현실사, 2000, 300-315)에 실린 #정인재_교수(서강대 철
학과)의 글 <하곡 정제두의 양지생리설(良知生理說)>을 몇 번에 나누어 올린다.]
양명학자 #하곡_정제두
#하곡_정제두(鄭齊斗, 1649-1736)의 ‘ #생명사상’에 대하여 주제를 접한 ‘우리사상연구소’의 요청에 응하여 하곡의 ‘ #양지생리설(良知生理說)’을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그의 철학은 생명사상이 그 핵심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생리(生理), #생기(生氣), #생도(生道)등 많은 주제를 #생명의_문제 에 할애하여 논의하고 있
다. 그것은 주자(朱子)가 말한 ‘물리(物理)’를 염두에 두고 이를 비판하기 위한 것이다. #주자학 이 압도적으로 지배하던 당시 사회에서 #양명학(陽明學)적인 사유를 하고 있
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으며, 또한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따라서 그의 스승이나. 친구들은 양명학의 연구를 그만두라고 권고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하곡은 그러한
충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기의 길을 걸어갔다. 그것은 양명학적인 사유가 주자학보다 생명의 근원문제를 깊이 다루고 있다고 본 것이 그의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되는 것
이다.
‘ #격물치지(格物致知)’의 문제를 놓고 주자(朱子)와 양명(陽明)은 전혀 다른 해석을 한 것도, 전자(前者)가 ‘ #물(物)’을 외(外)적인 대상으로, ‘ #지(知)’를 인식주관으로 보
아 사물(物)에서 원리(理)를 끝까지 캐물어 감으로써(窮理) 외계 사물에 대한 지식을 넓힌다(致知)는 인식론(認識論)에 가까운 이론을 전개하였다면, 후자(後者)는 ‘물
(物)’을 ‘ #사(事)’로 보고 지(知)는 #양지(良知)로 해석하였다. 양지(良知)는 경험적인 지식(見聞知)과 차원을 달리하는 #도덕적_원리(moral principle; 天理)인 동시에 #
직관(intuition)에 해당하는 #지혜(wisdom)인 것이다. 하곡은 주자(朱子)와 양명(陽明)을 비교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정인재 교수
“주자(朱子)는 마음(心)을 몸(體)의 주재(主宰)로 삼고, 본성(性)을 도덕원리(理)로 삼았다. 그리고 원리(理)가 사물마다 내재해 있다고 주장하였다. 사물마다 각기 당연(當
然)한 법칙이 있으니 모두 그 당연한 법칙을 남김없이 발휘하기를 추구하는 것이다(求盡). 이 까닭에 마음(心)에서는 그 참됨(誠)과 경건(敬)함을 모조리 다 발휘하고 사물
(事物)에서는 그 원리(理)를 끝까지 캐묻기 때문에 그 마음(心)을 간직하여 만물의 원리(理)를 궁구(窮究)하고, 이렇게 함으로써 만사(萬事)의 법칙에 응(應)한다. 그러므
로 그 당연한 원리(理)를 궁구하는 것이 지식(知)이 되고, 그 당연(當然)한 법칙을 준수하는 것이 도덕행위(行)가 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왕씨(왕양명)는 마음(心)을 도덕원
리(理1)로 삼았는데0 , 이것이 바로 양지(良知)이다. 마음(心)의 양지가 본체(體)가 된다. 대체로 사물(事物)의 작용(作用)은 용(用)이 되는데 사물의 원리(理)라고 일컫는다.
[알음앓이] 하는 사람들의 공간
10/29/23, 3:33 PM 정인재. 하곡(霞谷) 정제두의 양지생리설(良知生理說)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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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리는 모두 마음에 갖추어져 있다. 마음에는 저절로 양지가 있으며 알지 못하는 원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사욕(私欲)에 빠졌기 때문에 어둡고 어리석은 것이 생긴
다. 양지를 실현하고(致), 그 본성을 회복하여 마음의 원리를 궁구하고 心의 원리를 다 발휘하면, 그 오륜(五倫)에서, 심성(心性)에서, 사물(事物)에서, 천리(天理) 아닌 것
이 없다. 이 까닭에 體와 用은 있어도 안과 밖(內外)도 없고, 정(精)과 조(粗)도 없다. 그러므로 명덕(明德)과 친민(親民)은 하나이고, 나뉘지 않고, 지(知)와 행(行)은 합일
(合一)된다. 知는 行의 시작이요 行은 知가 이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道)는 하나일 뿐이고, 참(誠)일 뿐이다. 둘로 되지도 않고, 갈라지지도 않는다. 내 몸(吾身)으로부터
사물(事物)에 이르기까지 또 천하(天下) 만물(萬物)에 이르기까지 단지 하나로 관통(貫通)하였을 뿐이다. 그러므로 천지를 일체(一體)로 삼고, 천하(天下)를 일가(一家)로
삼는다. 비록 다스리려 하지 않아도 다스려질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예악(禮樂)과 형정(刑政)은 성인이 되는 공부(工)에 관여함이 없다. 진실로 원리(理)에 부합되고 마
음(心)에 합당하다면, 비록 옛 성인(聖人)이 아니더라도 작위(作爲)할 수 있으니, 다만 성심(誠心)으로 사실(實)에 힘쓸 뿐이라고 하였다.”[『霞谷集』Ⅱ, <存言>下.]
이 글은 주자의 ‘ #격물치지설’과 왕양명의 ‘ #치양지설(致良知說)’의 의미를 뚜렷이 잘 설명하고 있다. 주자(朱子)와 왕양명(王陽明)은 성인(聖人)이 되는 목표(目標)는 같
으나, 그 방법을 달리하고 있다. 주자(朱子)는 내적으로 ‘ #존덕성(尊德性)’과 외적으로 ‘ #도문학(道問學)’을 주장하여, 전자(前者)의 공부를 위하여 ‘ #거경(居敬)’을, 후자
(後者)를 위하여 ‘ #즉물궁리(卽物窮理)’를 강조하였다. 주자(朱子)에 의하면, 마음은 여러 가지 원리를 갖추고 모든 일(萬事)에 대응하는 것(心具衆理而應萬事)이지만,
마음 자체가 원리는 되지 못하고, 본성이 원리이므로 마음과 본성은 확연히 구분되는 것이다. 따라서 안으로는 마음속에 있는 본성(性)을 잘 간직하는 정정과 공경(誠敬) 공
부를, 밖으로는 사물마다(事事物物) 내재(內在)한 원리(理)를 끝까지 캐묻는 것이다. 주자(朱子)는 이와 같이 안, 밖을 나누어서 공부하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왕양명은 이와 달리 우선 주자(朱子)의 외적인 ‘즉물궁리(卽物窮理)’의 방법을 비판하고, ‘ #심즉리(心卽理)’을 주장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내외의 구분은 사라졌다. #마
음(心)의 본체인 양지(良知)가 바로 #천리(天理)라는 것이며, 이 양지(良知)가 사물(事物)에 작용하여 도덕원리가 실현되는 것을 양지라고 생각하였다(致吾心之良知之天
里於事事物物, 則事事物物皆得其理矣). ‘양지(良知)’는 어디까지나 마음의 본체(體)이며 이것이 사물에 작용되어 드러난 것이 원리(理)라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을 벗어
나 내외(內外) 따로 외물(外物)에 일정한 이치(定理)가 있다고 주장한 주자(朱子)를 비판하고, “심외무리(心外無理)”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개인적_욕심(私欲)에 빠지게 되면 양지가 자기의 도덕 원리를 사물에 실현(致)할 수가 없기 때문에, 양지를 실현시키는 공부를 하여 양지가 본래 가지고 있
는 영명(靈明)한 본성을 회복시킨다. 그렇게 하여 마음의 천리인 본성, 즉 양지를 모조리 다 드러낸다. 그렇게 되면 오륜(五倫), 사물(事物)에 드러난 것은 천리(天理) 아닌
것이 없게 된다. 예컨대, 부자(父子) 관계에서 드러나는 효(孝), 군신(君臣) 관계에서 드러나는 충(忠) 등이 모두 도덕 원리(天理)가 되는 것이다. 양명(陽明)에 의하면 이 순
수한 천리(天理)의 마음을 어버이 섬기는데(事父) 발휘하면 이것이 바로 효가 되고, 군주 섬기는데 발휘하면 바로 충이 되며, 친구 사귀는데(交友) 발휘하면 바로 믿음(信)
이 되고, 백성 다스리는데(治民) 발휘하면 인(仁)이 된다는 것이다.[<傳習錄>上.]
주자학에서는 #명덕(明德)과 #친민(親民)이 안팎(內, 外)으로 나누어지고, #지식(知)과 #행동(行)이 앞, 뒤(先, 後)로 분리된다. 그러나 양명(陽明)에서는 #밝은_덕(明
德)과 #백성_사랑(親民)이 하나의 공부이고, 지행(知行)은 합일(合一)된다. 양명(陽明)은 정명도(程明道)의 성인설(聖人說)을 바탕으로 천지(天地)를 한몸(一體)으로 삼
는 생명사상을 전개하였다. 대인(大人)의 마음은 어린이가 우물에 빠지는 것(孺子入井)을 보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惻隱之心)이 생기는데, 그것은 그 인(仁)이 그 어린이
와 한 몸이 되었기 때문이다. 새나 짐승이 슬피 울부짖거나 벌벌 떠는 것을 보면 차마 보지 못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새나 짐승과 한 몸이 되었기 때문이다.
초목(草木)이 꺾인 것을 보고, 딱한 마음(憫恤之心)이 생기는데 그것은 그 인(仁)이 초목과 한 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한 몸이 된 인(仁)은 바로 천명(天命)의 본성에 뿌리
를 두고 있으며 자연(自然)스럽게 영소(靈昭)하여 어둡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명덕(明德)이라 한다. 그런데 소인(小人)의 마음은 너와 나를 나누고, 사욕(私欲)
에 가리어 이해(利害)가 서로 공격하고 분노가 서로 격발(激發)하며, 심지어 골육(骨肉)도 서로 해치게 되니 한 몸이 된 인(仁)이 없어지게 된다. 그러나 진실로 사욕의 가리
움을 없애버리면, 소인(小人)의 마음도 그 한 몸이 된 인(仁)이 대인(大人)과 같아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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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음앓이] 하는 사람들의 공간
10/29/23, 3:33 PM 정인재. 하곡(霞谷) 정제두의 양지생리설(良知生理說)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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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곡 정제두의 묘
하곡(霞谷)은 이러한 만물을 한 몸으로 생각하는 생명사상을 계승하여, 그의 < #양지생리설(良知生理說)>을 전개하였다. 하곡은 생리설(生理說)의 입장에서 이렇게 말한
다.
“대학(大學), 중용(中庸), 공자(孔子), 맹자(孟子)의 말씀은, 그 뜻을 고찰 탐구(考究)해 보면 물리(物理)를 끝까지 캐물어 그것을 미루어 준칙(準則)으로 삼으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 .... 卽物하여 그 理를 끝까지 캐묻는다면 도덕 생명 상(德性 上)의 이체(理體)를 보지 못한다. .... 학문(學問)하는 일(工)은 그 실체(實體)를 따라서 공들이는(着
工) 것이다. 반드시 사리(事理)에 나아가 배우라고 한 말이 한 마디라도 있었던 적이 어디에 있는가? 그런데 무슨 이유로 유독 대학 가운데 단지 하나의 ‘물(物)’ 字가 있는 것
만 꼭 쥐고 모든 경전의 가르침(訓)을 덮어버릴 수 있겠는가?”[<存言>下.]
또한 하곡은, “주자(朱子)의 ‘물리(物理)’를 끝까지 캐물어 따지는(窮究) 즉물궁리(卽物窮理)의 ‘격물치지설’을 비판하고, 덕성의 이체(理體), 즉 도덕생명의 원리인 “ #생리
(生理)”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주자(朱子)가 말하는 “물리(物理)”는 오늘날 우리가 배운 'Physical principle'(물리)가 아니라, 명물도수(名物度數) 즉
문물 제도 및 외물(外物)을 광범위하게 가리키는 것이다. 이러한 사물에서 원리를 구하는 ‘즉물궁리’는 원시 유학(대학, 중용, 공자, 맹자)에는 없는 말이라고 하였다. 하곡은
“주자(朱子)의 ‘즉물설’은 소이연(所以然)과 소당연(所當然)의 원리(理)를 각각의 사물(物)에 있다고 하였으므로 본령(本領)이 없는데, 양지학은 그 소이연(所以然)과 소당
연(所當然)의 원리(理)를 사물(物)이 각기 가지고 있는 것은 그 근원(根源)이 모두 마음에서 나왔기 때문이라고 하였다.”[<存言>中.]
이것은 주자(朱子)가 ‘ #원리(理)’를 “ #그렇게_된_까닭(所以然之故)”로서의 존재 이유와 “ #마땅히_그래야_하는_법칙(所當然之則)”으로서의 도덕 원칙의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보았는데, 원리를 또한 이성(reason)과 대비하여, 전자는 ‘ #도구적_이성’을 후자는 ‘ #도덕적_이성’을 각각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주자(朱子)의 즉물설은 원
리(理)가 사물에 고정되어 있다고 하였으며(天下之物 莫不有理), 그가 말하는 마음은 허령불매(虛靈不昧)하여 외물에 대한 인식능력(知)을 갖지 않음이 없다(人心之靈
莫不有理)고 하였다. 그러므로 어떤 학자는 주자(朱子)가 말한 마음을 #인식심(認識心)이라고, 양명(陽明)이 말한 마음을 #도덕심(道德心)이라고 구별하기도 하였다.[牟
宗三, 『心體與性體』] 양명학은 존재이유와 도덕원칙이 모두 마음에서 나왔기 때문에 본원(本源)이 있는 샘물과 같이 “쉬지 않고 생겨나고 생겨난다(生生不息)”는 것이다.
그것은 사물의 이치가 내 마음속에 있다고 생각하여 주자(朱子)처럼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을 이원적 대립관계로 보지 않고, 마음의 본체인 명덕(明德)을 밝히는 것이 백성을
사랑하는 것(親民)과 같으며, 궁극적으로는 이 세상 모든 사물(天下萬物)이 한 몸이라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긔림: 정인재 교수, 김교빈의 <하곡 정제두>, 정제두의 묘
(2020.0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