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21

알라딘: 조선의 유학자, 조식 남명 조식의 생애와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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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464쪽


책소개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 조식의 생애와 학문을 조명한다. 조식은 1500년대 경상도 일대의 산림에 머물며 학문에 몰두했던 은자이자 학자이다. 성리학 이론보다는 실천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황과 같은 시대를 살았는데, 당대의 학문적 위상이나 이후의 역사에 미친 영향은 이황 이상이었다.

조식은 여남은 번 이상 벼슬을 제수 받았지만 단 한번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간신들이 권력을 잡고 얼토당토않은 정치를 펼치는 때에 벼슬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성의 고통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이에 상소를 올려 조정의 정치를 정면으로 추궁했다. 1555년 을묘년에 명종에게 올린 <을묘사직소)>에서는 “전하의 나랏일은 이미 잘못되었다”고 썼고 수렴청정을 펼치는 문정왕후는 “깊은 궁중에서 살아온 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썼다. 가을 서릿발이 칼날처럼 쏟아졌다. 이로써 유학자의 마땅함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올바른 유학자의 전형을 세웠다. 조선 대장부의 기개와 절조를 보여주었다.

흔히 조식의 학문을 ‘경의지학’이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경은 유학자가 자신을 수양하는 방법론이고 의는 사회적 실천의 기준을 말한다. 과연 조식은 스스로를 수양할 때는 무엇인가를 두려워하는 듯 삼갔고, 불의와 맞설 때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책은 조식의 생애와 학문을 ‘찬찬히’ 따라간다. 저자인 한문학자 허권수는 조식에 대한 전기 기록이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방대한 분량의 원전 자료를 섭렵했다. 조식이 살았던 경상도 삼가현, 김해부, 진주목 등지의 지리적 공간도 빠짐없이 살폈다. 또한 조식이 직접 쓴 필적을 비롯해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삶을 보여주는 다채로운 도해를 소개한다. 조식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에서 촬영한, 실감나는 사진도 함께 보여준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조선 유학자 조식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다.


목차


서문 우리 시대의 남명 조식 읽기

1장 1501년, 삼가현 토동에서 태어나다
01 산처럼 큰 인물의 출현
02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읽다가 문득
03 아버지 조언형의 억울한 죽음

2장 1530년, 김해부 탄동에 산해정을 짓다
04 산악처럼 우뚝하고 연못처럼 깊게
05 과거의 길, 효도의 길, 그리고 학문의 길
06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한 학문의 경지
07 까마귀의 검은색은 빗물로 씻어낼 수 없고
08 암울한 죽음의 시대, 때를 만나지 못한 현사(賢士)들

3장 1548년, 계부당과 뇌룡사를 짓다
09 닭이 고니의 큰 알을 품듯
10 가혹할 만큼 엄격한 출사(出仕)의 기준
11 후학을 가르치는 기쁨, 현사(賢士)와 사귀는 즐거움

4장 1555년, 명종 임금에게 을묘사직소를 올리다
12 벼슬길로 나오라는 이황의 권유
13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 죽음을 결심한 상소
14 온 나라를 흔들어 놓은 을묘사직소의 파장
15 해인사에서 만나자는 약속
16 지금은 벼슬할 만한 때가 아니니

5장 1558년, 벗들과 함께 지리산을 유람하다
17 어진 사람은 산을 사랑하고
18 지리산 유람에서 만난, 세 군자의 숨결

6장 1561년, 지리산 덕산동에 산천재를 짓다
19 벽에 ‘경(敬)’자와 ‘의(義)’자를 붙인 까닭
20 부지런한 농부들이 연둣빛 들로 나올 때
21 이기론보다 쇄소응대(灑掃應對)를 강조하는 학문
22 얼토당토않았던 권간(權奸)의 시대가 저물어 가고

7장 1568년, 선조 임금에게 무진봉사를 올리다
23 대장부의 출처(出處)는 태산처럼 묵직해야
24 서울로 올라가 명종 임금을 만나다
25 선조 임금에게 ‘구급(救急)’ 두 글자를 올리다
26 백성은 귀중하고 임금은 가벼우니
27 아전의 폐해를 지적한 상소, 무진봉사(戊辰封事)

8장 1572년, 처사로서의 삶을 마치다
28 왜적을 막아낼 방책이 없겠는가?
29 김굉필의 그림 병풍이 전해진 내력
30 죽고 사는 일은 평범한 이치이니
31 부침을 겪은 후인들의 추존 활동

붙임 성운(成運)이 쓴 남명선생묘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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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높고 깊은 산이었다. 푸른 하늘과 맞닿아 있었다. 지리산은 우리나라 남쪽의 큰산으로 우뚝 솟아올라 있었다. 그리고 큰산 밑에서 큰 인물이 나타난다는 말을 입증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 지리산과 멀지 않은 곳에서 한 위대한 인물이 출현했다. 조선의 유학자, 조식(曺植)이다. ㅡ 1절 ‘산처럼 큰 인물의 출현’ 중에서
후대의 이익(李瀷)은 이황과 조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황은 소백산 아래에서 태어났고 조식은 지리산 동쪽에서 태어났는데 모두 경상도 땅이다. 경상좌도는 인(仁)을 숭상하고 경상우도는 의(義)를 주로 하여 유가가 기개와 절조를 변화시키는 것이 바다가 광활하고 산이 우뚝한 것과 같았다. 이 이황과 조식에게서 우리 학문의 밝... 더보기
시냇가에 있는 집은 풀로 지붕을 이고서 집 이름은 뇌룡사(雷龍舍)라고 했다. 그 뜻은 “시동(尸童)처럼 가만히 앉아 있다가 용처럼 승천하고, 연못처럼 잠잠하다가 뇌성벽력이 치는 것처럼 한다”는 것이다. 곧 꾸준히 실력을 쌓아서 때를 기다린다는 뜻이다. ㅡ 9절 ‘닭이 고니의 큰 알을 품듯’ 중에서
조식의 상소는 추상같이 준엄했다. 이 시대에 임금이라는 존재는 신성(神聖)과도 같아서 말 한마디 함부로 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임금과 임금 어머니의 잘못을 대놓고 지적하는 조식의 상소는 다른 벼슬아치나 선비들로서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것이었다. ㅡ 14절 ‘온 나라를 흔들어 놓은 을묘사직소의 파장’ 중에서
조식은 늘 제자들에게 “장부의 처신은 태산처럼 중후해야 하고 마땅한 때가 이른 후에 자신의 경륜을 펼쳐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자신의 처신도 당연히 이렇게 하려고 노력했다. ㅡ 24절 ‘대장부의 출처(出處)는 태산처럼 묵직해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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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허권수 (지은이)


남명학 연구의 1인자
우리나라 최고의 한문학자이다. “지금 대한민국에 살아있는 사람 가운데 한문을 가장 잘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다. 또한 우리나라 남명학(南冥學) 연구의 1인자로 손꼽힌다. 30여 년 동안 경상대학교 교수로서 제자들을 가르쳤고 2017년 정년퇴임했다. 남명학연구소 소장을 지내면서 남명학 연구 공간인 ‘남명학관’ 건립을 주도하기도 했다. 저서와 번역서 100여 권이 있다. 현재는 동방한학연구소를 열어 후학을 기르고 있다.

최근작 : <한문공부 60년>,<외재 정태진의 생애와 학문>,<조선의 유학자, 조식> … 총 34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조선 유학자 조식의 기개와 절조(節操)를 읽는다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기개와 절조(節操)로
조선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사람, 조식!

조식(曺植)은 유학의 나라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였다. 1500년대 경상도 일대의 산림에 은거해 학문에 몰두했으며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경상도 출신인 이황(李滉)과 같은 시대를 살았는데, 그 명성은 조금도 뒤처지지 않았다. 조선의 유학자라고 하면 지금은 대개 이황을 먼저 말하지만 당대의 학문적 위상은 조식이 이황보다 못하다고 할 부분이 조금도 없다. 이후의 역사에 미친 영향을 말한다면 조식을 이황의 앞자리에 놓아도 무방하다.

유학은 조선의 정치적, 사회적, 철학적 이념이었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성리학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사물의 이치와 사람의 도리를 탐구했다. 그리고 이 같은 이론적 탐구의 결과물을 현실 세계에서 실천하고자 했다. 조식의 위대함은 바로 유학이 실천 학문이라는 점에서 드러난다. 이황이 성리학 이론에서 누구보다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면, 조식은 실천 유학자로서 조선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었다.

조식의 학문은 흔히 ‘경의지학(敬義之學)’으로 일컬어진다. 여기서 경(敬)은 유학자들이 학문의 핵심으로 여기는 수기(修己)의 방법론이다. 공손하면서도 진지한 태도로 사물을 접하며, 무엇인가를 두려워하는 듯한 자세로 말과 행동을 조심하고 삼가는 것이다. 의(義)는 해도 좋은 일과 해서는 안될 일을 분별하는 사회적 실천의 기준이다. 사적 이익보다는 공적 이익을 앞세우는 올바름이고 마땅함이다. 대장부라면 어떤 두려움도 없이 지켜야 할 것이다. 그런데 경은 조식 학문의 특징이라기보다는 당시의 유학자들 대부분이 강조한 것이다. 이황과 같은 경우 학문과 인생에서 경을 바탕으로 실천궁행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조식 학문의 남다른 부분은 조식이 의를 누구보다도 강조했다는 점이다.

경의(敬義)의 학문을 바탕으로 조식은 자신을 수양하고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나아가 무도한 세상을 구하고자 했다. 조식은 경과 의에 대해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집에 이 경(敬)과 의(義)라는 두 글자가 있는 것은 마치 하늘에 해와 달이 있는 것과도 같다. 이 두 글자의 의미는 만고의 오랜 세월이 지나도 변치 않는 것이다. 성현들이 남긴 많은 말씀의 마지막 귀결처를 생각해 보면 모두 이 두 글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학문을 한다면서 경을 위주로 하지 않는다면 거짓된 것이다. 맹자는, 학문의 방법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니 그 흩어 진 마음을 수습하는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이것이 경을 위주로 하는 공부이다.”

당시의 조정은 조식에게 여남은 번 이상 벼슬을 제수했다. 전례가 없던, 파격적인 품계였다. 조식을 인정하고 존경하던 이황이 벼슬에 나오기를 권유하는 편지를 보내오기까지 했다. 그러나 조식은 평생 동안 단 한번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조식의 학문을 현실과 관계없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러나 조식이 벼슬에 나아가지 않은 것은 마땅한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뿐이다. 조식은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출처(出處)와 관련하여 “나는 공자처럼 학문을 통해서 세상을 구제하기를 원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벼슬에 나아가지 않은 유학자라 하여 백성의 고통에 대해 아무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조식의 생각이었다.

조식이 살았던 1500년대는 피비린내 나는 사화의 시대였다. 간신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뜻있는 현사(賢士)들을 죽이고 백성들을 괴롭혔다. 조식은 이처럼 얼토당토않은 정치에 분노했다. 스스로 벼슬에 나아갈 수는 없는 때라고 판단했지만 이를 내버려둘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공자는 “이익을 보면 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내던진다(見利思義 見危授命)”고 했다. 불의에 맞서는 일은 의로운 유학자의 의무였다. 조식은 간신들의 정치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1555년 을묘년에 명종에게 올린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에서는 “전하의 나랏일은 이미 잘못되었다”고 썼고 수렴청정을 펼치는 문정왕후는 “깊은 궁중에서 살아온 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썼다. 가을 서릿발이 칼날처럼 쏟아지는 듯했다. 왕과 대비에게 이러한 상소를 올리는 일은 목숨을 내놓기로 결심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로써 조식은 조선 대장부의 기개와 절조를 보여주었다. 이로써 유학자의 마땅함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올바른 유학자의 전형을 세웠다.

조식의 절친한 벗 성운(成運)은 ‘조식의 묘갈명’에서 이렇게 썼다. “풍채와 용모는 느긋하면서도 고상하여 절로 법도가 있었고, 비록 다급하고 시끄러울 때일지라도 늘 지켜 온 자세를 잃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얼굴빛이 엄격하고 핵심적인 사항만을 간략하게 말하며, 조심스럽게 무릎을 굽히고 앉아 무엇인가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삼가는 공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또 <선조실록>의 조식 졸기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조식은 도량이 푸르고 높았으며 두 눈에서는 빛이 났다. 그를 바라보면 세속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언론(言論)은 재기(才氣)가 번뜩여 천둥이 치고 바람이 일어나듯 하여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도 모르게 이기적인 욕심이 사라지도록 했다.”

그 명성이나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조식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실천을 중시한 학문적 태도로, 조식 스스로 자신에 대한 기록을 많이 남기지 않았던 탓도 있다. 광해군 시기 북인 정권을 이끌었던 조식의 제자들이 역적으로 몰리면서 학맥이 끊어진 탓도 있다.

이 책 <조선의 유학자, 조식>은 조식의 생애와 학문을 ‘찬찬히’ 따라간다. 저자인 한문학자 허권수는 조식이 직접 남긴 기록은 물론 같은 시대를 살았던 동료 유학자와 제자들이 남긴 기록까지, 방대한 분량의 원전 자료를 섭렵했다. 조식이 살았던 경상도 삼가현, 김해부, 진주목 일대의 지리적 공간도 빠짐없이 추적했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조식이 무슨 책을 읽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 무엇을 배웠고 누구를 가르쳤는지, 어디에서 태어나 어떻게 살았는지 등을 실감나게 알 수 있다. 조선 유학자 조식의 진면목을 느낄 수 있다.

이 책의 저자인 허권수는 조식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선생의 학문은 철저하게 현실을 바탕으로 하였다. 보통 선비라고 하면 단지 말만 앞세울 뿐 현실적인 일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존재로 잘못 인식하고 있는데 선생은 진정한 선비란 무엇인가를 보여주었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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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 조식의 큰 삶을 논한 책





남명(南冥) 조식(曹植; 1501 - 1572)을 안 것은 2009년 나온 한형조의 ‘조선 유학의 거장들’을 통해서였다. 칼을 찬 유학자라는 점이 이례적으로 느껴졌지만 그 이상의 자료를 찾지 못한 채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조용미 시인의 ‘탐매행’이란 시에서 남명매(南冥梅)란 말을 들었다. 남명은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로 유명한 분이다. 대비 문정왕후를 과부, 그의 아들인 임금 명종(明宗)을 일개 고아로 표현한 부분이 있는 글이다.



때는 소윤 윤원형 일파가 일으키는 분탕(焚蕩) 패악질이 극에 달한 때였다. 같은 해에 태어난 이황, 2년 연상의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이 직언을 하지 못한 가운데 단성현감에 제수(除授)된 조식은 죽음을 무릅쓴 사직 상소를 올렸다.(단성은 조식이 태어난 경남 합천에서 가까운 곳이다. 조정에서 조식이 벼슬을 사양하지 못하도록 삼가현과 가까운 단성현 현감 자리를 내린 것이다.) 사직이 죽음을 무릅쓸 일이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나라의 폐단을 조목 조목 지적한 것으로 인해서였다는 말이다.



조식은 임금dl 인재를 등용하는 것은 마치 집 짓는 목수가 목재를 취해 쓰는 것과 같은 바 인재를 등용하려는 전하의 큰 은혜를 감히 독차지 할 수 없다고 아뢰었다. 조식은 전하께서는 과연 신을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시느냐, 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시냐, 문장을 잘 쓴다고 생각하시냐고 물었다. 조식은 문장을 잘 쓴다고 꼭 도를 지닌 사람은 아니고 도를 지닌 사람은 신처럼 이렇지 않다고 말했다.



전하는 물론 정승들 또한 신의 능력이나 사람됨을 잘 알지 못하는바 그 사람됨을 모르면서 등용한다면 훗날 나라의 수치가 될 것으로 그 죄가 어찌 보잘 것 없는 신에게만 있겠습니까?란 말을 했다. 나는 을묘사직소에서 가장 준엄한 부분은 과부, 고아 운운한 부분이 아니라 전하께서는 학문을 좋아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들어본 적이라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전하께서는 군자를 좋아하십니까 소인을 좋아하십니까? 전하께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 나라의 존망이 덜려 있습니다란 말이라 생각한다.



조식은 명종에게 밝은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일을 요약해서 잘 간직한다면 사람을 알아보거나 판단하는 일이 거울처럼 맑고 저울처럼 공평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생각에 사악함이 없게 될 것이라는 말로 대안(代案)을 제시하기도 했다. 명종은 신하들이 간(諫)하는 말을 받아들여 조식에게 벌을 주지는 않았지만 끝내 바른 말을 한 조식을 공손하다고 여기지도, 옳다고 여기지도 않았다.



눈에 띄는 부분은 경연의 시강관으로 있던 정종영의 말과 사간원정언 이헌국의 말이다. 정종영은 조식은 세상에 숨어 사는 인물인지라 성격이 소탈하여 예를 차릴 줄 몰라 그런 것이니 거칠고 세련되지 못한 태도를 책망하기보다 물러나려는 욕심 없는 뜻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고 아뢰었다. 이헌국은 조식 같은 사람은 세련되지 못했고 옛 사람들의 책만 읽었으므로 말을 바르고 곧으나 문채(文彩)가 없으나 어려서부터 책을 읽은 사람인데 어찌 군신간의 의리를 모르기야 하겠습니까?라고 아뢰었다.



이헌국은 구양수가 황태후를 아낙네라고 했으나 벌을 받지 않은 송나라의 사례를 아울러 언급했다. 문질빈빈(文質彬彬)이란 말이 있는바 조식은 질(質)이 문(文)을 압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식은 칼을 찬 유학자인 한편 성성자(惺惺子)라는 쇠 방울을 차고 다닌 분이기도 하다. 조식은 방울 소리를 들으면서 정신을 맑게 유지했다. 1519년 19세의 조식은 기묘사화를 목도한다. 조광조를 비롯 현사(賢士)들의 부고를 들은 조식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벼슬살이가 험난할 것이라 느꼈다.



조식이 평생 벼슬하지 않는 데에는 가장 절친한 벗인 성운(成運)의 형 성우가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죽은 영향이 컸다. 조식은 원나라 유학자 허영의 글을 읽고 과거(科擧)를 위한 공부가 그릇되었음을 깨달았다. ”이윤(伊尹)의 뜻과 안연의 학문을 모본으로 삼아 벼슬에 나아가서는 경륜을 펴서 업적을 이루고 초야에 있을 때는 지조를 지켜야 한다... 벼슬에 나아가서 아무 하는 일도 없고 초야에 있으면서 아무런 지조도 지키지 않는다면 뜻을 세우고 학문을 닦아 장차 무엇을 하겠는가?“란 글이다.



조식은 강직(剛直)했던 유학자다. 그는 아버지의 묘갈명을 쓰며 나의 아버지에게 일컬을 만한 덕이 없는데도 장황하게 미화한다면 그 글은 아첨하는 글이니 나의 아버지를 부끄럽게 만드는 결과가 된다고 생각했다. 조식은 낮에는 정신을 집중하고 길지 않은 시간 깊이 자는 것으로 정신을 맑게 유지했다. 조식은 제자들에게 한 구절 구절 자세히 풀어 설명하지 않았다. 그는 한 문장, 한 문장 뜯어가며 읽지 않고 마음으로 글 전체의 큰 뜻을 터득하고자 읽었다.



조식은 학문을 하는 목적은 낱낱의 지식을 얻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식견을 높이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식견을 높이면 태산에 올라섰을 때 사방의 높고 낮은 산이 다 눈에 들어와 지형을 정확하게 살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주자가례에 대해서도 같은 자세를 유지했다. 조식은 바다와 관련이 큰 사람이었다. 산해(山海) 선생으로도 불렸는데 이는 산해정(山海亭)에서 학문을 닦고 제자들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남명(南冥)은 장자(莊子)에서 취한 호로 남쪽의 아득한 바다를, 나아가 남녘 바다를 향해 날아가는 대붕을 뜻한다. 그가 거처하던 방은 계명실(繼明室)이란 이름을 가졌다. 옛 현인들의 밝은 덕을 계승하여 사방에 펼친다는 의미를 가진 방이다. 그의 시기는 한양에서 거주한 시기(26세 이전), 경남 김해에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산 시기(30 - 45세), 경남 합천에 계부당(鷄伏堂)과 뇌룡사(雷龍舍)를 짓고 산 시기(48 - 61세), 경남 산청에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산 시기(61 - 72세)로 나눌 수 있다.



산해정은 높은 산에 올라 바다를 내려다 본다는 의미를 지닌 말이다. 계부당은 닭이 알을 품는 것처럼 자신을 함양(涵養)하는데 힘쓰고 제자들을 잘 가르치겠다는 의미가 담긴 이름이다. 뇌룡사(雷龍舍)란 시동(尸童)처럼 가만히 앉아 있다가 용처럼 승천하고 연못처럼 잠잠하다가 뇌성벽력이 치는 것처럼 한다는 의미로 실력을 쌓아 때를 기다림을 뜻했다. 산천재는 주역의 산천대축(山天大畜)에서 기인한 이름이다. 조식은 산천이라는 말을 통해 강건하고 독실하게 공부해 크게 덕을 쌓고자 하는 의지를 나타냈다.



그리고 자신의 시대에 경륜을 펼칠 기회를 얻지 못한다 해도 힘껏 제자를 길러 훗날에 큰 덕이 쌓이기를 기대했다. 조식과 이황은 동시대를 살았지만 편지를 주고받았을뿐 일평생 만난 적이 없다. 그들은 기질이나 학문적 경향이 달랐다. 조식은 공부하는 것은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같으니 한 치를 놓아두면 한 길이나 미끄러져간다는 말을 했다. 저자는 조식이 다른 사람은 권세를 자랑한다면 자신은 학문과 지조로써 긍지를 갖겠노라고 한 것을 언급하며 형식만을 위한 형식은 있을 수 없지만 내용을 담은 형식은 필요한 것이라 덧붙인다.



조식은 경상도 관찰사 이기를 장차 사람을 해칠 사람으로 보았다. 그런 그가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고자 학문에 대해 물어오자 병이 많아 한가하게 지내면서 요양이나 하고 있을 뿐으로 의리의 학문에 대해서는 공부한 것이 없다고 답한 것을 일러 조식이 아무리 학문을 좋아해도 사람 같지도 않은 자와 무슨 학문을 이야기하겠는가?란 말로 설명했다.



본문에는 조식의 절친 청송(靑松) 성수침(成守琛; 1493 - 1564) 이야기도 나온다. 기묘사화로 스승 조광조가 죽임을 당한 것을 보고 백악산 자락에 청송당을 짓고 숨어들었다가 파주로 간 사람이다. 파산서원(坡山書院)에 성수침, 성수종, 백인걸, 성혼의 위패가 모셔졌다. 조식의 문하에서 의병이 많이 나왔다. 가장 먼저 기의(起義)한 사람이 조식의 외손녀 사위였던 곽재우다. 1558년 58세의 조식은 지리산 유람에 나섰다. 진주 목사로 있었던 김홍, 자형 이공량(李公亮), 고령현감을 지낸 벗 이희안, 청주목사를 지낸 이정(李楨) 등과 함께. 고려 인종(재위; 1122 - 1146) 때의 은자(隱者) 한유한(韓惟漢)이 살던 삽암이란 곳이 나온다.



삽암은 꽂힌 바위라는 의미다. 섬진강가의 이곳에 모한대(慕韓臺)라는 석각(石刻)이 있다. 한유한을 그리워하는 곳이라는 대(臺)다. 조식의 실천 위주의 삶은 정여창(鄭汝昌)에게서 본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식은 자신이 사는 삼가현은 산세가 너무 빈약하다고 생각하고 거처를 옮기기 위해 지리산 일대를 10여 차례 찾았다. 조식은 장중한 사람 즉 어진 사람으로 정적인 산을 좋아했다. 지혜로운 사람은 민첩한 사람이기에 늘 쉬지 않고 흐르는 물을 좋아한다.



조식은 바위에 이름을 새겨놓은 사람들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바위에 이름을 새겨 놓으면 천 년 만 년 썩지 않고 자기 이름이 전해질 것으로 생각해서 이렇게 해놓은 것이다. 대장부의 이름은 푸른 하늘의 밝은 해처럼 떳떳해야 한다. 훌륭하게 일생을 살았다면 사관이 역사책에 기록할 것이고 넓은 땅 위의 사람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할 것이다. 그런데 쩨쩨하게 날다람쥐나 살쾡이가 사는 수풀 속 바위에 이름을 새겨놓고는 없어지지 않고 전해지기를 바라고 있다. 이는 새 그림자를 보고서 후세 사람들이 무슨 새인지 알기를 바라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것이다.”



조식은 “산에 들어온 사람 중에 누가 그 마음을 깨끗이 씻지 않겠는가? 또 누가 스스로 소인이라고 생각하겠는가? 그러나 잠시 마음을 씻는다고 해서 소인이 군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란 생각도 했다. 중요한 것은 꾸준한 노력일뿐 단기간의 노력은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조식은 무거운 부역과 세금에 신음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여유 있게 유람이나 하는 자신을 겸연쩍게 여겼다. 물론 선비들에게 유람은 단지 먹고 노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좋은 경치를 통해 사물의 이치를 깨닫고자 했다. 그리고 스승, 제자, 벗들의 학문적 태도와 삶의 방식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았다.



조식은 산천재의 왼쪽 벽에 경(敬)자를 써 붙이고 오른쪽 벽에 의(義)자를 써 붙였다. 경은 내면의 수양 방법이고 의는 경을 바탕으로 한 사회적 실천 원칙이다. 조식은 하늘에 닿아 있는 지리산 천왕봉을 사랑했다. 그리고 그 봉을 스승으로 여겨 배우고자 했다. 조식은 덕천강도 스승으로 삼았다. 조식에게 제자의 예를 갖추어 폐백(幣帛)을 가지고 찾아온 사람 가운데 정탁(鄭琢)이 있다. 윤원형의 악행을 서슴없이 탄핵한 사람이고 원균 등의 모함으로 옥에 갇혀 모진 고문을 당한 이순신의 무죄를 밝혀 죽음을 면하게 했다.



그는 성리학 이론에만 몰두한 문약한 유학자가 아니었다. 선비로서 병법을 모르면 큰 임무를 맡을 수 없다고 주장한 그는 병법에도 정통했다. 문무를 함께 갖추어 밖으로 나아가서는 무장이 되고 안으로 들어와서는 정승이 되어 세상을 구할 사람이었다. 조식은 황진이도 만났다. 조식은 임꺽정이 잡혀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라를 위해 다행이라 여기면서도 홀로 가만히 앉아 눈물을 흘렸다. 선량한 백성들을 도적떼로 내모는 현실을 탄식하는 한편 근본 원인을 찾아 대책을 세우지 않는 벼슬아치들에게 분노를 느꼈다.



조식은 젊은 문인들이 공허한 말장난을 하는 쪽으로 공부 방향을 정해가는 것에 이황의 책임이 크다고 느꼈다. 조식은 요즘 공부하는 사람들이 쇄소응대의 예절도 모르면서 입으로 천리(天理)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책에는 동서 분당(分黨) 이야기도 나온다. 동인은 김효원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그의 집이 도성 동쪽 건천동에 있었기 때문에 동인이라 한 것이다. 서인은 심의겸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그의 집이 도성 서쪽 정릉방에 있었기 때문에 서인이라 한 것이다.



조식은 친구 이준경이 영의정에 오르자 출사할 생각을 가졌다. 조식은 경의(敬義)를 주로 하여 지식보다 실천을 중시했다. 성리학 외에도 천문, 지리, 산술, 병법 등을 깊이 연구했고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조식은 스스로 벼슬길에 나서려고 설레발을 치며 부산을 떠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유학자에게 공부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신을 올바르게 수양한 후 백성을 교화하는 수기치인(修己治人)에 있다.



이양소(李陽昭)가 고려, 조선 두 왕조에 걸쳐 벼슬할 수 없어 친구 이방원의 부름을 거절한 것과 달리 강회백(姜淮伯)은 두 왕조에서 벼슬했다. 이에 조식은 강회백이 심은 매화(정당매; 政堂梅)를 보고 어제 꽃을 피우더니 오늘도 또 꽃을 피웠다고 했다. 변절을 풍자한 것이다. 조식은 학문의 근본이 선 다음 여러 가지 다른 분야에 관심을 갖는 것은 괜찮지만 처음부터 이것저것에 관심을 쏟다 보면 올바른 학문을 이루기 어려울 것이라 보았다.



조식과 이황에게서 배운 정구(鄭逑)의 학문은 제자 허목에게로 이어졌다. 허목은 성리학을 중심으로 한 당대의 학문적 분위기와는 달리 원시유학의 육경을 중시했다. 이런 학풍은 이익, 정약용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을묘사직소(1555년) 이후 11년만에 조식은 다시 명종의 부름을 받고 임금을 만나 명종이 능동적으로 정치를 펼 인물은 아니라고 판단하고 지리산 덕산동으로 돌아왔다. 조식은 한 인사가 그릇된 이기론을 펼치자 지인에게 자신은 평생 다른 기술은 없고 다만 책 읽는 일만 했으니 입으로 성리학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어찌 다른 사람들보다 못할까만은 오히려 말하고 싶지 않았을뿐이라고 말했다.



조식은 분신처럼 아낀 정인홍에게 평소 차던 경의검(敬義劍)을 물려주었다. 조식은 ”정인홍이 있으면 내가 죽지 않을 것“이라 말할 정도였다. 정인홍은 임진왜란 때 58세의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의병을 일으켰다. 그리고 조식의 문인들은 물론 자신의 제자들을 의병에 참여하도록 해 충의를 실천했다. 조식은 은거하면서도 나라와 백성에 대한 관심을 잠시도 놓은 적이 없었다. 조식은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 등이 사화로 비참한 최후를 마쳤고 그들과 뜻을 함께 한 이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귀양간 것은 간신들의 탓이 근본적인 원인이었지만 시대의 기미를 보고 출처(出處; 나아감과 물러남)를 바로 하지 못한 데에도 그 원인이 없지 않다고 보았다.



조식은 곽재우에게 유학자로서 읽어야 할 경서와 함께 병법에 관한 책도 두루 읽게 했다. 조식은 ”학문을 통해 세상을 구제하기를 원하는 사람”인 자신이 출사하지 않은 것은 때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라 답했다. 조식은 인재 등용은 임금이 직접 해야 한다고 말했다. 임금이 자신을 닦는 수양이 부족하면 자신만의 저울도 거울도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조식은 임금의 덕을 밝히지 않은 채 나라를 다스리려고 하는 것은 배도 없이 바다를 건너려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조식은 전하(선조)께서 만약 신의 말을 버리지 않고 관대하게 받아들인다면 신은 전하의 용상 아래에 있는 것과 같은 바 어찌 신의 늙고 추한 모습을 만나 본 후에라야 신을 썼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란 말을 했다. 또한 전하께서 만약 신이 한 말을 좋아하지 않으면서 신을 만나려고 한다면 헛일을 하는 것이라 말했다. 조식은 출처의 절조를 중요시하여 임금이 아무리 불러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조식은 죽고 사는 일은 평범한 이치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한 채 세상을 떠났다.



선조는 처사(處士)를 자처한 조식에게 정3품 대사간을 추증했다. 평소 조식에게 맡기고 싶어했던 관직이다. 조식은 저술에 있어서는 기발하고 고상한 것을 좋아하고 형식에 구애받지 않았다. 조식을 모신 덕천서원도 대원군의 서원 철폐 대상이 되었다. 대원군은 문묘에 배향되었거나 나라에 큰 공이 있는 인물을 모신 서원이나 사당 47개소를 제외한 나머지 서원들을 모두 없앴다, 조식의 문묘 종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수제자 정인홍이 처형당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회퇴변척(晦退辨斥)에 대해 알아보아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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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투의스케치북 2022-05-03 공감(1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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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조선의 유학자, 조식

임진왜란시 의병장 출신의 대부분이 조식의 제자일정도로 義氣를 가졌던 유학자였다.
퇴계 이황과는 1501년 동갑이며, 주리론적 이기이원론이라는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조식은 보다 직설적이고 행동파적 신념을 가진듯 하다.
같은 동인으로 분류되고 있으나 조식은 북인으로,
퇴계는 남인으로 분파된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한 퇴계는 당쟁과 사화를 피해 사직을 거듭했던
것과는 달리 조식은 벼슬에 나가는 것 자체를 義가
아니다라는 고집으로 평생을 재야에서 공부하고 후진을
양성하며 나름 자신의 생각을 부르짓는다.
그의 부친은 청렴 하였으나, 사화로 삭탈관직되고 목숨을
잃게됨에 따라 생활이 궁핍했던 조식은 유력한 가문에
장가 들면서 처가 유산으로 공부에 매진한다.
세상에 대한 義는 있었으나, 모친의 꿈인 입신양명을
포기함으로써 대못을 박은 불효는 용서 받을 수 있을까?
생계를 위한 방편으로 처가동네에 기거 하다가, 조강지처를 버려두고(정실부인이 따라가기를 거부) 후실을 얻은 후, 당시 상황으로 이해한다 하더라도, 이십년 동안이나 만나지도 않고, 후에 정실이 죽었을때 조차 찾지도 않고
후실에게서 얻은 아들을 보내 장사지낸 것을 과연
군자로서 義로운 행동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평생 자신만을 위해서는 치열하게는 살았으나 가족을 위한 가장으로서의 책무를 다하지 않았음은 이해 받기
어려워 보인다.
간신배들이나 아전들의 부정에 대하여 비판만 할 것이
아니라 현실정치에 뛰어들어 작은 것이라고 고쳐지도록 행동 하는게 親民을 실천하는게 아니었을까?
敬과 義를 지킨다면서 임금의 부름에 한번도 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음식을 하사하는 것 마져도 거부
했던 것은 만백성의 어버이라는 군주에 대한 유학자의
禮라고는 할 수 없는거다.

휴정이 유불선 3교의 교리를 해설하기 위해 지은 책자에
유교를 설명한 것이 맨뒤에 배치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사찰에 난입하여 사천왕의 목을 자르고 목판을 불태운
無道한 제자에게는 좀 심했다고 말을 하면서도 반갑게
맞이했던 조식의 내로남불은 광신적 근본주의자와
다르지 않다. * 진영논리에 빠진....
조식은 타협하지 않음을 義라 하고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는 我是他非하는 꼰데의 아집을 가지고 있다

퇴계와 쌍벽을 이루었던 조식에 대한 소개가 많지 않다.
그당시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고 그시점으로 보더라도
훌륭함 못지 않게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많아 보인다
이책에서 제대로 집어내지 못한 더 많은 훌륭한 점이
많이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흠모하고 존경하는 문하생이 많았고 평생지기도 많았음이 그러 했을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위인이라 하더라도 장점만이 있지는 않다. 이책은 위인전이 아닌 일생과 학문을 소개하는 것이라
장점 만큼이나 많은 단점이 있었던 점이 범부인 내게는 오히려 용기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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渼沙_常水 2022-07-10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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