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21

도쿄지검 특수부의 날선 칼 - ‘추상열일(秋霜烈日)’.1995

도쿄지검 특수부의 날선 칼 - 시사저널



도쿄지검 특수부의 날선 칼
도쿄·蔡明錫 편집위원 ()
승인 1995.11.16

도쿄지검 특수부, 총리 2명 체포·내각 셋 무너뜨려 ‘추상열일(秋霜烈日)’. 이 말을 그대로 풀이한다면 가을의 찬 서리와 여름의 뜨거운 해라는 뜻이다. 일본 검찰의 상징이 바로 이 ‘추상열일’이다. 다시 말해서 형벌은 찬서리와 같이 엄정해야 하고 여름 해처럼 권위가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이 추상열일, 엄정공평의 전통이 면면히 이어지는 곳이 바로 도쿄지방검찰청 특별수사부, 줄여서 ‘도쿄지검 특수부’이다. 도쿄지검 특수부는 전체 검사가 30여 명인 작은 집단이다. 게다가 도쿄와 수도권을 관할하는 일개 지역 수사기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나는 새도 떨어 뜨리는 일본 최강의 수사기관’이라는 또 다른 이름이 붙어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바로 노태우 전 대통령 비리 사건과 같은 권력형 범죄를 다루는 유일한 수사기관이기 때문이다.

도쿄지검 특수부가 생긴 때는 지금으로부터 46년 전이다. 패전 이전의 일본 검찰은 체제의 수호자, 전쟁 수행에 앞장선 ‘권력의 시녀’였다. 그래서 검찰 간부들이 미국 점령군으로부터 ‘공직 추방 명령’을 받고 무더기로 법복을 벗기도 했다. 패전 후 일본 검찰은 거듭 태어나기, 홀로 서기를 위해 ‘사상 검찰’에서 ‘민생 검찰’로 변신을 꾀했다. 이 때 설치된 것이 정부 물자와 군수 물자 횡령을 막기 위한 ‘은퇴장 사건 수사부’였다. 그후 도쿄와 오사카의 지방검찰청에 특별수사부가 설치된 것은, 이같은 전국 규모의 민생 범죄와 권력형 범죄를 수사하기 위해서였다.

도쿄지검 특수부의 존재가 널리 알려진 것은 발족 직전에 터진 ‘쇼와전공 사건’을 수사하면서부터다. 이 사건은 쇼와전공이라는 회사에 정치인들이 부정하게 융자를 알선해 주고 뇌물을 받은 사건이다. 도쿄지검 특수부는 이 때 국회의원 6명을 구속하고, 당시 총리 아시다 히토시(芦田均)를 체포하는 개가를 올렸다.

또 54년에 터진 ‘조선 의혹 사건’(조선 해운회사들의 뇌물 사건) 때는 당시의 요시다 내각을, 89년의 ‘리크루트 사건’(취직 정보지 리크루트사의 뇌물 사건) 때는 다케시타 내각을 무너뜨리며 주목을 받았다. 게다가 76년의 ‘록히드 사건’(여객기 구입을 둘러싼 뇌물 사건) 때는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전 총리를 기소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거악(巨惡)과 싸우는 특수부’라는 명성을 굳히기도 했다.

후배 앞에 무릎 꿇은 선배 검사

이렇게 보면 일본 검찰, 즉 도쿄지검 특수부는 발족 이래 내각을 셋이나 붕괴시키고 총리를 2명 체포한 셈이다. 게다가 14년의 ‘지멘스 사건’(군함 발주를 둘러싼 오직 사건), 33년의 ‘데이진 사건’(제국인조견사회사를 둘러싼 오직 사건) 등 전쟁 전의 사건까지 합한다면 일본 검찰이 내각을 붕괴시킨 기록은 다섯 차례로 늘어난다. 그러나 일본 검찰이라고 해서 정치권과의 대결에서 항상 ‘완전 시합’만을 해온 것은 아니다.

일본 검찰 사상 최대 오점으로 기록되고 있는 ‘법무장관 지휘권 발동 사건’이 바로 좋은 예다. 도쿄지검 특수부는 54년의 조선 의혹 사건 때 뒷날 총리가 된 자유당 간사장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를 체포하기 일보 직전까지 몰아가고 있었다. 뒷날 제16대 검찰총장에 오른 이토 시게키(伊藤榮樹) 특수부 검사가 해운회사 간부 집에서 사토에게 현금 2백만엔을 건넨 사실을 기록한 암호 메모를 발견한 것이다. 또 사토의 바로 앞 총리를 지낸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당시 자유당 정조회장에 대한 뇌물 제공 혐의도 포착한 상태였다. 그러나 당시의 법무장관 이누가이 다케시(犬養健)가 청천벽력같이 이른바 ‘법무장관 지휘권’을 발동해 특수부의 수사를 중지시켰다.

일본 검찰도 사실은 행정부에 속한 하나의 행정기관에 불과하다. 그러나 검찰권의 중립성을 확보해 주기 위해서 법무장관은 검사 개개인이 아니라 검찰총장에게만 지휘·명령이 가능토록 되어 있다. 당시의 요시다 내각은 이런 법규정을 이용해 사토와 이케다에 대한 수사를 강압적으로 중지시켰다. 중대한 법안을 국회에서 심의중이라는 이유를 달고.

이 사건은 외부 압력으로 검찰 수사가 중단된 한 예다. 그러나 당시의 바바(馬場) 검찰총장이 법무장관의 지휘를 거부하고 사임했더라면 일본 검찰에 오점이 남지 않았을 것이다. 그 후임자가 사임하고 또다시 사임하는 식으로.

그렇다면 왜 바바 총장은 그 때 정치권에 순순히 백기를 들고 말았는가. 그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악법도 법인 이상 법을 집행하는 검찰이 법을 외면해서는 안된다”는 이유에서이다. 바바 총장은 그대신 후배 검사들 앞에 무릎을 끓고 용서를 빌었다고 한다. 또한 분을 삭이지 못한 특수부 검사들은 폭음을 하며 밤새도록 ‘쇼와의 혁명가’를 불렀다고 전해진다.

3년 전 당시의 자민당 최고 실력자 가네마루 신(金丸信)을 약식 기소한 사건도 도쿄지검 특수부에게는 씻을 수 없는 오욕이다. 가네마루는 당시 사가와 규빈사 와타나베 사장의 진술에 의해 5억엔을 뇌물로 받은 것이 탄로났다. 가네마루는 처음 이 돈을 자신의 정치 단체에 입금시켜 그후 국회의원 60여 명에게 분배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가네마루는 “보도진이 집 앞에 진을 치고 있어 외출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도쿄지검의 소환에 일절 응하지 않았다.

도쿄지검 특수부는 결국 가네마루에게 정치자금규제법을 적용해 벌금 20만엔에 약식 기소하는 형태로 이 사건을 마무리했다. 가네마루는 도쿄지검의 문턱도 밟지 않은 채 진술서만 제출했다.

전 도쿄지검 특수부장 가와가미 가즈오(河上和雄)씨는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당시의 문제점을 이렇게 지적했다. 첫째, 가네마루가 처음 주장한 대로 5억엔을 자신의 정치 단체에 입금하고 이를 보고하지 않았다면 마땅히 불고지죄를 적용해 5년 이하의 금고형에 처했어야 했다. 더구나 가네마루 자신이 이를 사적 용도에 사용했다면 탈세죄도 적용할 수 있었다.

둘째, 국회의원 60여 명에게 5억엔을 분배했다면 그 의원들이 정치자금규제법의 양적 제한 규정을 위반했는지 여부를 함께 조사했어야 한다. 그런데도 도쿄지검 특수부는 본인들을 조사해 보지도 않고 간단한 약식 기소로 이 건을 처리해 버린 것이다.

가네마루 약식 기소하자 항의 편지 쇄도

이같은 지적은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가 노태우씨로부터 20억원을 받아 절반은 당에 넣고 절반은 자신이 정치 자금으로 썼다는 주장을 다시 음미시켜 주는 대목이다. 김종필씨의 백억 소문도 똑같은 추적을 받아야 마땅하다.

도쿄지검 특수부가 가네마루를 단돈 20만엔에 약식 기소한 대가는 실로 엄청났다. 예를 들어 도쿄지검에는 전국 각지에서 항의 편지와 고발장이 3만1천 통이나 날아 들었다. 한 정의파 시민은 “검찰에 과연 정의가 있는가”라고 외치며 검찰청의 현판에 페인트통을 뒤집어씌웠다.

검찰 또는 특수부 출신 법조인들의 분노도 극에 달했다. 당시 일본 검찰 내부 서열로 치면 열 손가락에 드는 사토 미치오(佐藤道夫) 삿포로고검 검사장은 현직 신분이면서도 <아사히 신문>에 ‘사법의 세계에서 특별한 사람을 특별하게 취급해서는 안된다’고 외쳤다(44쪽 <시사저널> 인터뷰 참조). 또 가와가미 전 특수부장은 <디스 이즈 요미우리>라는 월간지에 ‘검찰의 가네마루 처분에 이의 있다’는 글을 싣고, 공들여 쌓아온 특수부의 전통이 하루아침에 무너졌다고 통곡했다.

그러나 특수부의 이런 오명은 다섯 달도 채 지나지 않아 말끔히 벗겨졌다. 이가라시 노리오(五十嵐紀男) 부장을 중심으로 한 수사팀이 다시 가네마루 주변을 은밀히 내사한 결과, 가네마루가 무기명 할인 금융채권을 50억엔어치 갖고 있음을 밝혀낸 것이다.

특수부는 이 때 정치권과 검찰 수뇌부의 압력을 막기 위해 가네마루를 체포하기 직전에 이같은 수사 방침을 상부에 보고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가네마루는 결국 소득세법 위반, 즉 탈세 혐의로 기소되어 정치 생명을 완전히 잃었다.

이렇게 보면 일본 검찰의 추상열일과 같은 위상은 하루아침에 쌓인 탑은 결코 아니다. 앞의 제16대 검찰총장 이토는 부하 검사들에게 입버릇처럼 “거악을 잠들게 해서는 안된다”고 되뇌었다고 한다. 그러한 뼈를 깎는 자성 노력이 있었기에 오늘의 일본 검찰, 그 중에서도 도쿄지검 특수부의 위상이 돋보이는 것이다.

전 도쿄지검 특수부장 가와가미씨는 후배 검사들에게 늘 이렇게 충고한다. “검찰청 현판에 묻은 페인트는 물로 지울 수 있지만, 검찰의 수사 실수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 그는 이같은 충고를 ‘권력층 비리 단죄’를 놓고 햄릿처럼 방황하고 있는 한국의 검찰관들에게도 전해주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