뜯어고칠 것은 세상이 아니라 바로 자신
이현주 목사
등록 :2023-03-13
이현주 목사와 함께 마음공부를 하는 전남 순천 사랑어린학교 공동체원들. 순천사랑어린학교 제공
# 꿈결에 어디서 들었는지 읽었는지 모르겠다. 요약하면 이런 내용이다. 큰 그것(IT) 안에 무수한 작은 그것(it)들이 있다. 둘러 말하면 무수한 작은 그것들의 총합이 큰 그것이다. 작은 그것들 가운데 어떤 그것이 자기가 ‘나’(I)라는 생각을 하면서 ‘너’(you)가 생기고 나와 너 사이에 당기고 미는 에너지가 작용하기 시작한다. 서로 당겨 마침내 하나 되는 에너지를 사랑이라 부르고 서로 밀어 갈 데까지 가는 에너지를 임시로 다툼이라 부른다. 왜 임시냐 하면, 작은 그것(it)들 모두가 큰 그것(IT)을 벗어날 수 없는 까닭에 ‘너’와 ‘나’가 끝내 서로 다투기만 할 수는 없고 언젠가 서로 당겨 하나 되는 사랑의 코스로 돌아서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모든 작은 그것들이 자기가 본디 큰 그것이므로 다른 작은 그것들도 모두 자기인 것을 깨치고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는 사자후(獅子吼)를 토하게 되는 거다! 인생이 마라톤이란 말, 과연 맞는 말이다.
아침에 일어나 바깥 화장실 수도를 틀어본다. 물이 ‘쇄~’ 하고 나온다. 아, 고맙다. 서산 목사가 물탱크에 전선을 연결하고서 이제 수도관이 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 효선이 뉴질랜드 집 앞에 흐르는 강을 사진으로 찍어 보여준다. 자연은 언제 어디서나 친숙하고 평안하다. 맞다. 강물은 지구가 안방이니 뉴질랜드라고 다른 모양으로 흐를 이유가 없다. 사람도 그 몸은 어김없는 자연인데 그래서 몸처럼만 살라는 건가?
# 셋이 어려서부터 단짝이었다. 전쟁이 벌어지고 셋 중 하나가 적에 포섭되어 둘을 배신한다. 둘 중 하나가 죽는다. 나머지 하나도 목숨이 위태롭다. 배신한 하나가 나머지 하나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한다. 그런데 그 일격이 본인에게 치명타로 바뀌어 죽어간다. 살아남은 하나가 배신한 친구에게 말한다. “우리가 너를 ‘사람’으로 보았다. 그게 착오였어.” 잠들기 전 아브라함 헤셸의 <누가 사람이냐?>에서, 사람이 머리로 알 수 없지만 몸으로 경험할 수 있는 하느님을 중심에 모시고 그와의 관계 속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야 비로소 사람이라는 내용의 글을 읽었더니, 그래서 이런 꿈을 꾼 것일까? “어두운 밤에 새벽을 확신하는 것, 저주를 축복으로 고뇌를 노래로 바꾸는 힘을 믿는 것, 이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괴물의 격렬한 분노를 알면서 그 앞에 떳떳이 나서는 것, 지옥의 한복판을 걸으면서 하느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는 것, 이것이 참 인생에 주어지는 도전이요 길이다.”(아브라함 헤셸).
# 여러 갈래로 길들이 얽혀있다. 어디로 갈까 망설이는데 누가 말한다. “망설일 것 없다. 여태 온 길이 앞으로 갈 길이다. 굽이굽이 땅 위를 흐르는 모든 강물이 바다로 직진하듯이, 네 중심으로 내려가는 모든 길이 하늘로 가는 직진 코스다.” 꿈속에서 생각한다. 망설일 것도 없고 걱정할 것도 없다. 지금 네가 네 발로 가는 게 아니라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아니 갈 수 없는 곳으로 가는 것이다. 아멘! 소리치다가 깨어난다.
천지인 수업하고 점심 먹고 열차로 귀가. 왕복 열차에서 아브라함 헤셸의 <누가 사람이냐?>를 읽는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싫든 좋든, 얽혀 들어가는 것, 행동하고 반응하는 것, 놀라고 응답하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그가 알든 모르든, 우주적 연극의 한 역을 맡는 것이다.”
# 잠에서 나오는데 들어오는 생각.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은 사람을 부리는 힘과 사람이 부리는 힘, 데이비드 호킨스의 말로, 자연의 힘(power)과 인위적 힘(force)의 대결이다. 이 대결의 연속이 이른바 인류 역사인데 ‘어느 편에 설 것인가’를 저마다 선택할 수 있어서 사람이다. 이 선택 자체를 할 수 없게 하는 무엇이 있다면 그게 진짜 폭력이다. 하지만 그런 폭력은 본인이 허용하지 않으면 아무 힘도 없는 허풍선이다.
# 일어나는 길로 명상하고 펼쳐 든 책에서 헤셸이 말한다. “사유 곧 삶이다. 어떤 사상도 두뇌의 동떨어진 세포에서 생겨나지 않는다. 어떤 사상도 섬(島)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고방식은 생활방식에 영향을 받고, 우리의 명상은 옹근 실존의 정수다. 지금 내가 이 펜, 종이, 책상이라는 존재와 어떻게 관계 맺고 있는가 하는 그 방법이 궁극적인 문제에 대한 나의 사고에 영향을 미친다. 자아도취적 사유에는 아무런 힘도 없다. 진정한 사유란 세계와의 만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런 말에 힘이 있는 까닭은 그것이 머리 아닌 몸통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1972년에 타계한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오늘 아침 동방의 한구석에서 곰지락거리는 한 벌레로 말미암아 그는 아직 죽지 못했다.
# 헤셸의 책에 인용된 오스카 와일드의 한 마디가 어깨를 툭 치며 빙그레 웃는다. “세상에 두 가지 비극이 있다. 하나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손에 넣지 못함이요, 다른 하나는 그것을 손에 넣음이다. 후자야말로 진짜 비극이다.” 그러니 비극을 맛보지 않으려면 원하는 것이 없기를 간절히 원할 일이다. 음, 큰 것은 바라는 게 별로 없는데 작고 미미한 것들이 고물거리며 가슴을 성가시게 하니 딱한 노릇이다.
# ‘이즈 쉬 유징 허 캔’(Is she using her can?’·그 여자, 자기 캔을 쓰고 있는 건가?) 이 비슷한 문장 하나를 놓고 뒤척거리다 잠에서 깨어난다. 여기서 묻는 것은 그 여자가 자기 능력을 제대로 쓰고 있느냐, 아니면 빈 깡통을 두드리고 있느냐다. ‘캔’(can)을 ‘할 수 있음’과 ‘깡통’으로 동시에 읽는, 이를 테면 일종의 말장난이다. 누구에게나 힘이 있다. 그런데 그것은 스스로 만든 힘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힘이다. 데이비드 호킨스가 말하는 인위적 힘도 실은 자연스러운 힘의 작용으로 가능한 것이다. 예컨대 몸속에서 피를 돌리는 힘의 작용 없이는 아무 짓도 할 수 없는 거다. 폐로 공기를 빨아들이지 않고서는 사랑은 물론 살인조차도 할 수 없다. 그러니까 지금 제가 쓰고 있는 힘이 하늘에서 주신 것인 줄 알고 쓰면 제대로 힘을 쓰는 것이고, 그것을 제가 만든 자기 힘인 줄 알고 쓰면 빈 깡통을 두드리는 거라는 얘기다. 음, 근사하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행위는 혼신의 힘을 다 쏟은 것 같지만 그 몸이 사라짐과 동시에 물거품처럼 꺼지고 어떤 사람의 행위는 전혀 힘들인 것 같지 않은데 그가 죽은 뒤에도 살아남아서 끊임없이 세상에 작용하고 있는 거다.
---
# “인간이 자신의 곤경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그 곤경이 곤경을 위한 곤경이 아니라 하나의 사명임을 깨달아 아는 데 있다. 우리는 ‘자기 앞에 있는 것에 응답하라’는 도전과 초대를 아울러 받고 있다.”(아브라함 헤셸) 아침에 펼쳐 든 책에서 헤셸이 한 뻔한 말을 읽는다. 문제는 이 뻔한 말을 너무 쉽게 망각하여 자기 앞에 있는 곤경을 곤경으로만 알고서 괜한 일로 허둥댄다는 데 있다. 그렇다, 곤경은 없다, 소중한 기회가 있을 뿐.
# 새벽 꿈. 낡은 책방 한구석에서 <너는 뭐냐>라는 제목의 소설책을 본다. 굵은 고딕체로 제목이 인쇄된 표지를 잘 드는 칼로 잘라 주머니에 넣으면서 “너는 뭐냐고 묻는 너는 뭐냐”고 말한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나머지는 모두 지워졌다. 깨어나서 대답한다. “나는 나 아닌 것들로 에워싸인 나 아닌 것들의 총합이다. 그러므로 나 아닌 모든 것들이 나요, 나는 나 아닌 모든 것들이다. 더 묻지 마라, 할 말 없다.”
# 동네 뒷산 같은 산을 맨발에 흰 고무신 신고 올라간다. 만만하게 보여 금방 오를 것 같더니 오를수록 산이 높아지는 느낌이다. 누가 말하기를 이 산이 우리나라에서 으뜸 높은 백두산이란다. 아무리 높아도 천천히 걸으면 정상에 오를 수 있다고 속으로 다짐하며 한 걸음씩 발을 옮긴다. 후배 하나가 제 마음에 들지 않는 세상 뜯어고치겠다며 여기저기 온갖 말썽 다 부리고 다닌다. 힘이 세어서 말릴 사람이 없다. 그에게 정작 뜯어고칠 것은 세상이 아니라 너라고 속삭여 말해준다. 그가 깜짝 놀라며 “형님, 나 태어나서 그런 말 처음 들었소!”라고 훌쩍훌쩍 울더니 어디론가 자취를 감춘다. 저 친구 혼자 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은 들지만 있는 데를 모르겠다. 놔둬라, 그에게도 제 한님이 있다, 뭐 이런 음성을 꿈에서 들은 것 같다. 언제 어떻게 꿈 밖으로 나왔는지 모르겠다.
글 관옥 이현주 목사
***이 시리즈는 전남 순천사랑어린학교장 김민해 목사가 발간하는 <월간 풍경소리>와 함께합니다.
연재[휴심정] 월간 풍경소리
# 새벽 꿈. 낡은 책방 한구석에서 <너는 뭐냐>라는 제목의 소설책을 본다. 굵은 고딕체로 제목이 인쇄된 표지를 잘 드는 칼로 잘라 주머니에 넣으면서 “너는 뭐냐고 묻는 너는 뭐냐”고 말한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나머지는 모두 지워졌다. 깨어나서 대답한다. “나는 나 아닌 것들로 에워싸인 나 아닌 것들의 총합이다. 그러므로 나 아닌 모든 것들이 나요, 나는 나 아닌 모든 것들이다. 더 묻지 마라, 할 말 없다.”
# 동네 뒷산 같은 산을 맨발에 흰 고무신 신고 올라간다. 만만하게 보여 금방 오를 것 같더니 오를수록 산이 높아지는 느낌이다. 누가 말하기를 이 산이 우리나라에서 으뜸 높은 백두산이란다. 아무리 높아도 천천히 걸으면 정상에 오를 수 있다고 속으로 다짐하며 한 걸음씩 발을 옮긴다. 후배 하나가 제 마음에 들지 않는 세상 뜯어고치겠다며 여기저기 온갖 말썽 다 부리고 다닌다. 힘이 세어서 말릴 사람이 없다. 그에게 정작 뜯어고칠 것은 세상이 아니라 너라고 속삭여 말해준다. 그가 깜짝 놀라며 “형님, 나 태어나서 그런 말 처음 들었소!”라고 훌쩍훌쩍 울더니 어디론가 자취를 감춘다. 저 친구 혼자 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은 들지만 있는 데를 모르겠다. 놔둬라, 그에게도 제 한님이 있다, 뭐 이런 음성을 꿈에서 들은 것 같다. 언제 어떻게 꿈 밖으로 나왔는지 모르겠다.
글 관옥 이현주 목사
***이 시리즈는 전남 순천사랑어린학교장 김민해 목사가 발간하는 <월간 풍경소리>와 함께합니다.
연재[휴심정] 월간 풍경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