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인도 유학 갔던 불교의 성지, 인도 날란다
[인도] 불신자의 성지순례②
23.03.23
김찬호(widerstand365)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보드가야를 들른 뒤에도, 저는 불교 성치를 찾아 여행을 계속했습니다. 일반적이라면 석가모니가 돌아가신 쿠쉬나가르(Kushinagar)로 향하는 게 맞겠지만, 저는 잠시 파트나(Patna)에 들렸습니다.
파트나에서 기차를 타고 외곽으로 나오면 '날란다(Nalanda)'라는 마을에 갈 수 있습니다. 이곳에는 과거 인도의 불교 대학, 날란다 대승원의 유적이 남아 있죠. 날란다 대승원은 당나라의 현장대사나 의정대사를 비롯해 신라의 유학승도 여럿 수학했던 공간입니다. 인도 불교의 전성기를 만들어냈던 현장이지요.
날란다 대승원은 12세기까지 존속하다가, 인도에 이슬람 왕조가 들어서며 파괴됩니다. 이미 인도 내에서는 불교의 세력이 약화되고 있었죠. 날란다 대승원의 파괴는 인도 불교의 종언과도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지금 날란다 대승원은 파괴된 유적으로만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관련사진보기
제가 날란다 대승원에 들른 것 역시, 인도 불교의 전성기와 최후를 함께한 현장을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파괴되었지만 여전히 장엄한 유적을 둘러보았습니다. 이제는 무너진 벽과 토대만 남아 있지만, 그 규모를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날란다 대승원을 보고는 바로 인근에 있는 도시인 라즈기르(Rajgir)에 잠시 들렀다 파트나로 돌아오기로 했습니다. 라즈기르는 최초의 불교 사원인 죽림정사가 있었던 땅으로, 불교의 8대 성지 중 하나이기도 하니까요.
날란다에서는 라즈기르로 향하는 합승 지프가 운행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차 안은 물론 위에까지 사람이 가득 탄 지프를 탈 수는 없겠더군요. 어쩔 수 없이 값은 좀 나가겠지만 오토릭샤를 불러 움직이려는 찰나, 저쪽에서 저처럼 오토릭샤를 찾고 있는 스님 두 분이 눈에 띄었습니다.
낯선 사람에게 잘 다가가지 않는 저인데도, 순간 말을 붙였습니다. 역시나 라즈기르로 향한다는 스님들은 방글라데시에서 오신 분들이셨습니다. 함께 가시는 게 어떠냐고 물었고, 저와 스님들은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 곧 지나가던 차 한 대에 함께 올라탔습니다.
스님들의 목적지는 라즈기르의 방글라데시 사원이었습니다. 보드가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순례자들을 위한 숙소를 마련해 두고 있는 모양이더군요. 스님들은 저에게 절의 숙소를 내어 주시려 했지만, 저는 이미 파트나의 숙소에 짐을 풀어둔 터라 사양했습니다. 사원의 불상 앞에 잠시 앉아 있다 나오면서도 그게 못내 아쉽더군요.
▲ 라즈기르의 방글라데시 사원
ⓒ Widerstand
관련사진보기
덕분에 무사히 라즈기르를 거쳐 파트나로 돌아온 뒤, 다음 향한 도시는 고락푸르(Gorakpur)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이 도시는 바라나시를 비롯한 지역에서 네팔로 넘어갈 때 들르는 관문 도시지요. 하지만 여기서 로컬 버스를 타고 1시간 30분 정도를 달리면 쿠쉬나가르에 갈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인도에서 버스라는 걸 제대로 타 보는 게 처음이었습니다. 버스 터미널이라는 곳도 처음 들려봤습니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혼란 그 자체더군요. 정해지지 않은 플랫폼과 알 수 없는 목적지의 버스들, 그리고 곳곳에서 큰 소리로 울리는 경적 소리. 버스 안을 돌아다니는 상인들과, 버스 하나 타는 데 뭐가 그리 복잡한지 싸우고 있는 사람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타야 할 버스를 찾는 외국인의 질문을 무시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버스를 찾아 "쿠쉬나가르?"라는 질문을 몇 번이나 반복한 끝에 정차해 있는 어느 버스에 탑승했습니다. 처음에는 넉넉했던 버스 안에 사람들이 가득찰 무렵, 버스는 출발합니다.
▲ 쿠쉬나가르로 향하는 버스
ⓒ Widerstand
관련사진보기
옆 자리에 아들을 안고 앉아 있던 아버지는, 쿠쉬나가르에 도착할 즈음이 되자 제게 손짓을 합니다. 힌디에 약간의 영어가 섞여 있었지만, 무슨 뜻인지는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아까 표를 사고 받은 영수증을 차장에게 보여주면 거스름돈을 줄 거야. 그걸 받아서 저 앞에서 내리면 돼."
그러고보니 아까 표를 사고도 거스름돈을 받지 못했습니다. 몇 루피 되지 않는 돈이라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덕분에 거스름돈까지 받아 쿠쉬나가르에 무사히 내렸습니다. 가득한 승객에 답답했던 버스 안에서 벗어나니 고요한 마을이 눈에 들어옵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들었다는 쿠쉬나가르. 이곳 역시 여러 나라에서 만든 사원이 곳곳에 들어서 있습니다. 한켠의 넓은 공원 안에는 와불을 모신 열반당도 세워져 있죠. 작은 마을은 걸어서도 쉽게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쿠쉬나가르는 작은 마을이라 따로 버스 터미널이 없습니다. 돌아올 때는 내린 곳의 맞은편 길가에 서 지나가는 버스를 잡아 타야 했죠. 마을을 나오니 다행히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현지인들이 여럿 서 있더군요. 그들 사이에 끼어 버스를 타고, 다시 고락푸르까지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 쿠쉬나가르 열반당
ⓒ Widerstand
관련사진보기
보드가야에서 날란다와 라즈기르, 그리고 쿠쉬나가르까지. 여러 불교 성지를 생각보다는 빠르게 돌아본 편이었습니다. 큰 실수나 일정의 지연 없이, 여행자가 적은 동네를 무사히 돌아다녔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물론 여러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죠.
쿠쉬나가르에서 돌아오는 길, 석가모니의 마지막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이미 자신이 열반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한 석가모니는, 쿠쉬나가르에 도착해 숲에 가사를 깔고 누웠습니다. 이곳에서 마지막 가르침을 행한 석가모니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변한다. 게으름 없이 정진하라"라는 말을 남기고 열반에 들었습니다.
"게으름 없이 정진하라." 불교 성지를 돌아보며 만난 여러 스님들을 생각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게으름 없는 정진이 모여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겠죠. 보드가야와 쿠쉬나가르에 있던 각국의 사원들도 그렇게 모여 만들어진 것이겠지요.
하지만 그러면서도, 이제는 결국 폐허가 되어버린 날란다의 모습도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정진은 어디로 간 것일까요. 날란다의 사원에서 수행했던 수많은 스님들 가운데, 지금 우리가 알 수 있는 이름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한때 1만 명의 학생이 살고 있었다던 날란다에서, 그 나머지의 이름은 어디로 사라지고 없는 것일까요.
▲ 날란다 역
ⓒ Widerstand
관련사진보기
그들의 수행과 공덕이 무엇이 되어 남았을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날란다의 건물들처럼 무너지고 쓰러졌을지도 모를 일이지요. 지금 우리가 게으름 없이 정진하고 노력하더라도, 그 역시 언젠가 폐허가 되어 흔적조차 남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그 폐허를 찾아가는 여행자에게 누군가가 베푼 호의만은 제게 남았습니다. 주변의 낯선 사람에게, 아무런 주저함 없이 선뜻 내밀던 도움만은 제게 남았습니다. 적어도 그 기억만큼은 무너지지 않고 제 안에서 살아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변한다. 게으름 없이 정진하라." 무엇을 향해 정진해야, 다른 '존재하는 것'들과는 달리 무너지지 않을 수 있을까요. 어쩌면 이 여행을 통해, 저는 제 나름의 답을 조금씩 찾아가는 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에 동시 게재됩니다.
23.03.23
김찬호(widerstand365)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보드가야를 들른 뒤에도, 저는 불교 성치를 찾아 여행을 계속했습니다. 일반적이라면 석가모니가 돌아가신 쿠쉬나가르(Kushinagar)로 향하는 게 맞겠지만, 저는 잠시 파트나(Patna)에 들렸습니다.
파트나에서 기차를 타고 외곽으로 나오면 '날란다(Nalanda)'라는 마을에 갈 수 있습니다. 이곳에는 과거 인도의 불교 대학, 날란다 대승원의 유적이 남아 있죠. 날란다 대승원은 당나라의 현장대사나 의정대사를 비롯해 신라의 유학승도 여럿 수학했던 공간입니다. 인도 불교의 전성기를 만들어냈던 현장이지요.
날란다 대승원은 12세기까지 존속하다가, 인도에 이슬람 왕조가 들어서며 파괴됩니다. 이미 인도 내에서는 불교의 세력이 약화되고 있었죠. 날란다 대승원의 파괴는 인도 불교의 종언과도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지금 날란다 대승원은 파괴된 유적으로만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관련사진보기
제가 날란다 대승원에 들른 것 역시, 인도 불교의 전성기와 최후를 함께한 현장을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파괴되었지만 여전히 장엄한 유적을 둘러보았습니다. 이제는 무너진 벽과 토대만 남아 있지만, 그 규모를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날란다 대승원을 보고는 바로 인근에 있는 도시인 라즈기르(Rajgir)에 잠시 들렀다 파트나로 돌아오기로 했습니다. 라즈기르는 최초의 불교 사원인 죽림정사가 있었던 땅으로, 불교의 8대 성지 중 하나이기도 하니까요.
날란다에서는 라즈기르로 향하는 합승 지프가 운행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차 안은 물론 위에까지 사람이 가득 탄 지프를 탈 수는 없겠더군요. 어쩔 수 없이 값은 좀 나가겠지만 오토릭샤를 불러 움직이려는 찰나, 저쪽에서 저처럼 오토릭샤를 찾고 있는 스님 두 분이 눈에 띄었습니다.
낯선 사람에게 잘 다가가지 않는 저인데도, 순간 말을 붙였습니다. 역시나 라즈기르로 향한다는 스님들은 방글라데시에서 오신 분들이셨습니다. 함께 가시는 게 어떠냐고 물었고, 저와 스님들은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 곧 지나가던 차 한 대에 함께 올라탔습니다.
스님들의 목적지는 라즈기르의 방글라데시 사원이었습니다. 보드가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순례자들을 위한 숙소를 마련해 두고 있는 모양이더군요. 스님들은 저에게 절의 숙소를 내어 주시려 했지만, 저는 이미 파트나의 숙소에 짐을 풀어둔 터라 사양했습니다. 사원의 불상 앞에 잠시 앉아 있다 나오면서도 그게 못내 아쉽더군요.
▲ 라즈기르의 방글라데시 사원
ⓒ Widerstand
관련사진보기
덕분에 무사히 라즈기르를 거쳐 파트나로 돌아온 뒤, 다음 향한 도시는 고락푸르(Gorakpur)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이 도시는 바라나시를 비롯한 지역에서 네팔로 넘어갈 때 들르는 관문 도시지요. 하지만 여기서 로컬 버스를 타고 1시간 30분 정도를 달리면 쿠쉬나가르에 갈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인도에서 버스라는 걸 제대로 타 보는 게 처음이었습니다. 버스 터미널이라는 곳도 처음 들려봤습니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혼란 그 자체더군요. 정해지지 않은 플랫폼과 알 수 없는 목적지의 버스들, 그리고 곳곳에서 큰 소리로 울리는 경적 소리. 버스 안을 돌아다니는 상인들과, 버스 하나 타는 데 뭐가 그리 복잡한지 싸우고 있는 사람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타야 할 버스를 찾는 외국인의 질문을 무시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버스를 찾아 "쿠쉬나가르?"라는 질문을 몇 번이나 반복한 끝에 정차해 있는 어느 버스에 탑승했습니다. 처음에는 넉넉했던 버스 안에 사람들이 가득찰 무렵, 버스는 출발합니다.
▲ 쿠쉬나가르로 향하는 버스
ⓒ Widerstand
관련사진보기
옆 자리에 아들을 안고 앉아 있던 아버지는, 쿠쉬나가르에 도착할 즈음이 되자 제게 손짓을 합니다. 힌디에 약간의 영어가 섞여 있었지만, 무슨 뜻인지는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아까 표를 사고 받은 영수증을 차장에게 보여주면 거스름돈을 줄 거야. 그걸 받아서 저 앞에서 내리면 돼."
그러고보니 아까 표를 사고도 거스름돈을 받지 못했습니다. 몇 루피 되지 않는 돈이라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덕분에 거스름돈까지 받아 쿠쉬나가르에 무사히 내렸습니다. 가득한 승객에 답답했던 버스 안에서 벗어나니 고요한 마을이 눈에 들어옵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들었다는 쿠쉬나가르. 이곳 역시 여러 나라에서 만든 사원이 곳곳에 들어서 있습니다. 한켠의 넓은 공원 안에는 와불을 모신 열반당도 세워져 있죠. 작은 마을은 걸어서도 쉽게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쿠쉬나가르는 작은 마을이라 따로 버스 터미널이 없습니다. 돌아올 때는 내린 곳의 맞은편 길가에 서 지나가는 버스를 잡아 타야 했죠. 마을을 나오니 다행히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현지인들이 여럿 서 있더군요. 그들 사이에 끼어 버스를 타고, 다시 고락푸르까지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 쿠쉬나가르 열반당
ⓒ Widerstand
관련사진보기
보드가야에서 날란다와 라즈기르, 그리고 쿠쉬나가르까지. 여러 불교 성지를 생각보다는 빠르게 돌아본 편이었습니다. 큰 실수나 일정의 지연 없이, 여행자가 적은 동네를 무사히 돌아다녔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물론 여러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죠.
쿠쉬나가르에서 돌아오는 길, 석가모니의 마지막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이미 자신이 열반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한 석가모니는, 쿠쉬나가르에 도착해 숲에 가사를 깔고 누웠습니다. 이곳에서 마지막 가르침을 행한 석가모니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변한다. 게으름 없이 정진하라"라는 말을 남기고 열반에 들었습니다.
"게으름 없이 정진하라." 불교 성지를 돌아보며 만난 여러 스님들을 생각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게으름 없는 정진이 모여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겠죠. 보드가야와 쿠쉬나가르에 있던 각국의 사원들도 그렇게 모여 만들어진 것이겠지요.
하지만 그러면서도, 이제는 결국 폐허가 되어버린 날란다의 모습도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정진은 어디로 간 것일까요. 날란다의 사원에서 수행했던 수많은 스님들 가운데, 지금 우리가 알 수 있는 이름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한때 1만 명의 학생이 살고 있었다던 날란다에서, 그 나머지의 이름은 어디로 사라지고 없는 것일까요.
▲ 날란다 역
ⓒ Widerstand
관련사진보기
그들의 수행과 공덕이 무엇이 되어 남았을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날란다의 건물들처럼 무너지고 쓰러졌을지도 모를 일이지요. 지금 우리가 게으름 없이 정진하고 노력하더라도, 그 역시 언젠가 폐허가 되어 흔적조차 남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그 폐허를 찾아가는 여행자에게 누군가가 베푼 호의만은 제게 남았습니다. 주변의 낯선 사람에게, 아무런 주저함 없이 선뜻 내밀던 도움만은 제게 남았습니다. 적어도 그 기억만큼은 무너지지 않고 제 안에서 살아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변한다. 게으름 없이 정진하라." 무엇을 향해 정진해야, 다른 '존재하는 것'들과는 달리 무너지지 않을 수 있을까요. 어쩌면 이 여행을 통해, 저는 제 나름의 답을 조금씩 찾아가는 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에 동시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