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3/25

박성용 막:9:1-29 길가는 자의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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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용

15회 마가복음 공동나눔 진행자 노트 
막:9:1-29 
                       >>길가는 자의 정체성<<

마가의 길가기에서 두드러진 인식의 프레임은 보이는 현상(the phenomenal)과 숨겨진 실재(the nomenal) 사이의 역동적인 변증법이다. 이는 한 예시로 마가가 진술한 제자직 수행에 있어서 배 안에서 ‘건너감’의 과정(8:14-21) 속에 보여지는 ‘빵의 부족’(제자들은 물리적 사물로서 빵들-빵의 복수형 artous)에 대한 제자들의 관심과 예수의 ‘빵의 의미’(예수는 빵에 대해 단수형 arton을 사용하여 정신적인 의미로 oneness에 대한 언급을 한다)에 대한 언급에서 볼 수 있다. 전자는 드러난 현상에 대한 것이며 후자는 감추어진 실재의 의미를 다룬다. 
마가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와 등불의 비유에서 ‘감추어 둔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지게 마련이다’(4:22)라는 말을 통해 등불의 역할에 관련하여 감추어짐/은폐됨의 드러남과 알려짐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는 실재의 무제약적인 공급으로서 우리가 아는 세상을 넘어 실제 세상(the world of the real)은 무제약적인 공급과 지원의 자원과 터전이 되며, 등불의 비유에서는 우리 영혼의 감추어짐에 관련하여 등불로서 영혼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이 두 비유는 12 사도로 뽑힌 이들의 하느님 나라의 길가기 제자직 선택(3:13-19)에 있어서 중요한 첫 번째 설교 말씀이었다. 
이를 다르게 말하자면, 악령과 질병 그리고 지배체제의 드러나 있는 현상과 그 뒤에 있는 실상에는 역치(contra-position)의 구조로 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전자가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눈에는 보이지만 실제로는 허상이요, 실제로는 그 뒤의 보이지 않는 실재로서 하느님의 뜻과 통치가 실상이라는 것이다. 드러나 있지 않지만 그러한 실상의 세계는 자라나는 씨처럼 우리의 노력없이도  -“하루 하루 자고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4:27- 스스로 성장하여 자라난다. 눈에는 안 보이지만 -“그것은 겨자씨 한 알과 같다”;4:31- 푸성귀보다 더 크게 자라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눈으로 명확히 멀리서도 구분해 볼 수 있을 만큼의 크기와 남을 품을 수 있는 실재로 자란다. 
그러한 허상으로서 악령과 지배통치의 현실과 보이지 않게 희소하지만 강력한 실재의 연결은 기적(miracles)이 매개한다. 기적은 그러므로 초현상적인 것과 초월적인 인격의 힘에 대한 상징이 아니라 보는 것에 대한 눈멀음과 보이지 않은 것에 대한 눈뜸의 매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 자신에 대한 놀라움과 기적의 결과에 대한 신적인 인격으로서의 존경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온전해져서 일어서서 집으로 돌아가는 복귀의 수단으로 마가에서는 다루어져 있다. 즉, 기적은 눈뜨기 위한 일시적인 수단 역할을 하는 셈이다. 기적과 마찬가지로 말씀으로서 비유도 그러한 역할을 한다. 즉 들리지 않고 보지 못한 것을 알아듣고 보고 깨달을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기적과 비유로 행해지거나 들려진 것을 넘어서 보고 듣게 하는 것은 길가기와 건너감의 중요한 핵심 의미이다. 어느 정도 예수와 한 무리가 되어 그동안 이곳저곳을 다녔던 제자들에게 길가기의 중간쯤의 여행에서 자기 정체성에 대한 질문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8:29- 그동안 함께 해 온 그들에게는 적절한 질문이기도 하다. 그렇게 해서 마가의 내러티브, 이야기 숨겨진 것들의 드러남이 반복된다. 이제는 현실과 실재 사이의 이슈가 아니라 숨겨짐/드러남이 제자들의 마음으로 초점이 바뀌어진다. 
마가에는 여러 차례 중요한 이야기 전개 속에 예수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침묵 강요의 이야기들이 있다. 사회적 소외에 있던 나병환자의 치유(1:44), 호숫가에서 군중의 치유에서 더러운 악령들의 예수에 대한 고백에 대한 예수의 말(3:12), 회당장 야이로의 딸 치유(5:43), 귀먹은 반벙어리의 치유(7:36) 그리고 베드로의 고백(8:30) 등의 각각의 상황에서 침묵 –예, “아무에게도 하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하셨다”;8:30- 명령이 주어진다. 이 침묵 명령은 새로운 정체성과 새로운 권위의 드러남이라는 사역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정체성과 그가 한 일에 대한 감추임을 명하시는 뜻으로 이해된다. 아마도 추측컨대, 이러한 침묵의 명령은 폭로/드러냄/알려짐의 때가 아직 아니었던 것이거나, 그러한 알려짐이 다른 방식으로 알려도록 적절한 계기적 수단(방법)이 필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흥미로운 점은 예수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 던져진 것은 “...(방향)..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 가시는 도중에...” 일어났다는 점이다. 길을 가면서 그 도중에 그 길 위에서 질문은 던져졌고, 일부만 정답이 되었다. 즉, 그리스도라고 응답한 것과 더불어 곧 사탄아 물러가라는 베드로와 예수의 응답을 교차해 보면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린 것이 된다는 점이다. 이에 대한 8장 마지막 절의 예수의 응답은 여전히 가시는 도중에 있는 존재로서 예수는 가 버리신 다음에 다시 오시는 분으로 자신을 묘사한다. 다음 구절을 곰곰이 보자.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여기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도 있다.”(8:38-9:1) 
길을 가는 자로서 자신의 소임을 다한 후 –이는 수난 예고를 통해 떠나감을 확인시킨다- 그는 다시 오는 자로서 자신을 밝힌다. 그렇게 해서 다시 길을 열며 길을 가던 자는 길을 걸어 오는 자로 자신의 미래를 밝힌다. 이런 드러남/감추임의 비유적 메시지를 통해 길을 간다는 것은 눈뜬 자에게만 보여지는 실재로 육신의 자연적인 눈에는 감추어져 있게 된다. 그리고 악령에게 사로잡힌 아이의 치유 이야기(9:14-29) 속에서 악령을 쫓아내는 감추어진 비밀은 ‘믿음’과 ‘기도’라는 눈떠진 존재의 영적인 눈과 연결시킨다.   
지금까지 필자의 진술은 이제부터 나눌 내용에 대한 말머리로서 감추인 것의 드러남에 대한 이야기였다. 마가의 진술에서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침묵과 관련지을 때, 예수의 영광스러운 변모 이야기(9:2-8)은 제자들에 대한 디다케(가르침) 구조의 첫 번째 위치로서 중요성을 갖는다. 그것은 길가는 존재를 알게 되는 방식에 대한 마가가 귀와 눈이 있는 사람들에게 끼워놓은 암호와 같기 때문이다(이는 어디까지나 필자의 생각이다). 
마가에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에 대한 질문에 대해 그의 내러티브 속에 코딩해 놓은 사건들이 있다.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결정적인 선언’이라 불릴 수 있는 사건들이다. 이 사건을 이야기 하기 전에 ‘거룩한 기억(remembering)’이 있다. 그 기억은 대담한 선언으로 -“하느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시작”- 시작하는 예언자 이사야의 글에 대한 기억이다. 
“이제 내가 일꾼을 너보다 먼저 보내니
그가 네 갈 길을 미리 닦아 놓으리라”하였고, 
또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들린다.
‘너희는 주의 길을 닦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1:2-3)
여기서 보듯이 ‘갈 길’, ‘주의 길’, ‘그의 길’로 대변되는 길에 대한 외침과 그 기억에 대한 예언자의 목소리의 상기(re-membering)는 우리를 길가는 존재로 불러들인다. 그 희미한 그러나 상기된 기억(remembering)은 길을 가는 존재를 불러내면서 그에 대한 기쁜 소식의 팡파레를 울리며 시작을 알린다. 물론 이는 모두가 객관적으로 인정하는 역사적 사실로서 그리고 주목해야 할 사건으로서는 아니다. 뭍히고 버림받고 무시당한 이 희미한 ‘거룩한 기억’은 그러나 끈질기게도 한 존재에게 점화되어 불꽃이 되어 타오른다. 비극적 현실과 생존의 버거움 그리고 강력한 지배체제 속에서 모두가 헤매고 있을 때 그 거룩한 기억의 상기시킴은 한 존재의 길가기를 통해 새로운 현실로 노출되고 눈앞에 펼쳐진다. 제자직은 이러한 거룩한 기억을 상기하고 또한 잇는 것을 통해 그 거룩한 기억에 소속하고자 하는 발걸음을 옮김으로써 부르시는 실재의 구성원(member)으로 들어섬이 가능하게 된다.
길가기의 존재로서 실존하기라는 사명(calling)은 3가지 결정적인 사건의 내면화와 현실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희미한 거룩한 기억(re-member)은 궁극실재에 연결된 자로서 샬롬 나라의 구성원(member)이 된다. 그것은 5가지 예수 자신으로 향한 재귀적인 사건과 관련된다. 그것은 아래와 같으며 그 5가지 중에 9장까지 노출된 3 가지만 언급하기로 한다. 그 5가지는 다음과 같다. 마가는 빠른 템포의 내러티브 전개 속에서 이들 사건을 끼워 넣었고, 이들 사건은 일반적인 눈으로는 쉽게 건너뛸 수 있게 하였지만, 사실은 이 사건들은 중대한 사건이며 머물러서 깊이 사색해야 할 삶의 깊이에로의 초대로서 영적인 ‘샘’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 샘을 발견하는 것은 알아들을 수 있는 귀와 눈을 위해 은폐된 것으로서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 예수의 세례/하늘로부터의 목소리: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1:11)
● 예수의 물 위의 길을 가심: 나다, 겁내지 말고 안심하여라. (6:50)
● 예수의 변화, 하늘로부터 목소리: 이는 내 아들이다 (9:7)
● 대사제의 심문 과정(그대가 과연 찬양을 받으실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인가?): 
                  그렇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이 전능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아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14:62) 
● 십자가에서 백부장의 고백: 진실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들이었다 (15:39)
먼저, 거룩한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한 존재를 점화시킨다. 그것이 첫 번째 사건이다. 이것은 누구도 육신의 눈으로 보지 못한 마음의 눈이라는 열쇠를 통해 열려지는 인식이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1:11)
두려움과 상처 그리고 외적인 견고한 지배와 비통한 상황의 전개에도 불구하고, 그 기억은 심장을 때리고 머리를 정화시켜 영혼으로서 존재 각성을 일으킨다. 이는 톨스토이와 도스토엡스키를 배출한 러시아 정교회의 전통 중에 신학보다는 숲속으로 들어가 고독속에서 비전을 얻는 것과도 같고 선주민 문화에서 성인식을 위해 남자 아이는 비전 퀘스트의 시기를 숲속에 홀로 앉아 거룩한 상징을 보고(visioning) 그것을 얻어 돌아오는 것과 유사할 수 있다. 
그것은 내면에서 누구도 인식 못 하는 궁극 실재와의 연결됨이다. 이것은 지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기억의 실마리로 풀리는, 지금의 두려움과 결핍의 상황에서 생의 깊이에로 돌파해 깊이로 들어설 때 열리는 신성한 관계, 거룩한 결속과 소속감이다. 이를 통해 전념(commitment)이 출현한다. 행위가 파동으로 형성된다. 목표에 대한 의지가 생기며, 삶의 중력에서 그 힘을 벗겨내고 상승의 의식과 행동이 전개된다. 행동은 이러한 신성한 결속/소속에 대한 자연스러운 이행으로 건너간다. 
두 번째 신성한 노출의 장면으로 넘어가자. 육지에서 길을 걸어감과 달리 ‘항행’의 장면은 더욱 위험한 상황으로 전개된다. 어둠과 거친 바람과 물결 속에서 역풍을 만나 건너감을 힘들어하고 있는 장면이다. 이 건너감은 두 번째이며 제자들은 예수의 재촉으로 일어난 것이며, 이들은 자기 실존이 걸린 건너감에서 역풍을 만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괴로이 노젖는 것을 보시고”(개역본)- 봉착해 있다. 건너감을 힘들어하고 있는 그들을 향하여 다가오시며 옆으로 지나쳐 길을 계속 가려는 예수에 대해 ‘유령’ 즉 현실의 존재로 보지 않은 제자들을 향해 예수는 여기서 자기 정체성을 밝힌다. 마가는 매우 미묘한 문장을 소개하고 있다는 점을 숙고할 필요가 있다. 
      “나다. 겁내지 말고 안심하여라.” (6:50)  
건너감을 사는 실존은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는 장소가 역풍에 시달림이라는 실존 상황에서 비로소 드러낸다. 그 은폐된 본질이 드러나는 곳이 바로 건너감이며 제자들이 건너감에 버거워하는 그 순간에 자신의 정체(‘나다 I am’- 사막의 긴 세월에서 가시나무떨기에서 만난 신의 정체성도 ‘I am that I am’이었다)를 드러낸다. 그러므로 위기는 자신의 본질이 누구이고 자신의 소명이 무엇인지 재확인하는 기회가 된다. 이는 단순히 물 위를 가는 예수의 초월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기적은 거기에 있지 않다. 길 가는 것에 관해 오롯한 정신과 의지를 보이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 기적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바로 직전에 예언자로 여기던 세례요한의 헤로데 왕에 의한 죽임 이야기(6:14-29)와 어울리며 그 의미를 더욱 강화시킨다.
행동으로 계속 끊임없이 길을 열며, 길을 잇고, 건너감을 사는 존재에 대한 자기 정체성이 재 확인되는 세 번째 지점은 바로 이번 본문인 예수의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이다(9:2-8). 이 사건은 성전 엘리트들이 주목해서 멀리 갈릴리 주변부에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 몇 사람’(7:1)을 직접 보내 예수에 대한 반박과 재차 보내진 ‘바리사리파 사람들이 와서’(8:11) 그의 속을 떠보는 직접적인 압박이 고조된 상태 이후에 등장한다. 그리고 물론 제자들이 빵에 대한 인식의 오류(8:14-21)와 베드로와 예수의 상호 꾸짖음 –베드로: 그래서는 안된다(원문은 ‘꾸짖다’임); 예수: 사탄아 물러가라-의 사건(8:31-38) 후에 이 사건은 소개된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잘 들어라” (9:7)
마가의 첫 번째 예수에 대한 이야기 부분(1:14~8:26)이 마쳐지고 이제 두 번째 내러티브 부분인 제자들과의 문답 부분(일명, 디다케[가르침]의 구조 부분; 8:27~10:52)으로 들어가면 예수가 직면한 적은 이제 ‘밖’에 있던 악령, 질병, 혹은 성전 엘리트들이 아니라 ‘안’에 있는 제자들임을 주목하게 된다. 밖은 점점 사납게 물어뜯기 위해 달려들고 안은 무력감과 생각없음의 중첩된 파도 앞에 다시 ‘길가기’는 끊어질 위태한 상태이다. 수난 예고가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함께 길을 가는 동행자로서 선택된 12 제자들 중에 핵심 제자들인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요한은 예수와 함께 산에 올라가 –마가에 있어 산, 빈들은 소명이 일어나는 장소이다- 예수의 모습이 그들 앞에서 변모한 것을 보게 된다. ‘새하얗고 눈부시게 빛남’과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나타남’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전통의 권위자들인 엘리야와 모세의 동시 목격과 길가는 인생의 보편적 가능성으로서 예수 자신의 순수한 존재로의 변형에 대한 눈으로의 확인이 있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전체가 아니라 그 어떤 순간의 시간과 그 어떤 공간의 짧은 머무름이 자기 생의 전반을 뒤흔들어 놓으며 변화를 맛보게 하는 카이로스(무르익은 때)의 경험을 가질 때가 있다. 일생에 심지어 한두 경험이지만 그것은 잊히지 않고 자신에게 서서히 빛이 되어 길을 비추며 가야 할 방향과 목표를 얻는다. 나의 경우엔 청년 때 5.18 사건 나고 늦은 가을 무등산에서 이른 아침 갈라진 하늘을 본 경험, 폐결핵후 수이산 에덴 기도원에서 잊지 못할 꿈 하나를 새겨 받은 것, 유학중 산책중 토끼와의 대면, 9.11기간중 퀘이커의 펜들힐에서 여러 평화 증언의 목격, 2009년인가 지구를 돌고 있는 세계비폭력행진 관련 기적같이 국제 행진단을 2주간 경비를 감당하게 한 여러 도움들의 경험 등등의 짧은 순간과 공간이 생각난다. 그런 시간과 공간에서 나는 나의 에고를 벗고 존재로의 변형에 대한 잠시 동안의 도약 경험을 하였고, 씨뿌리는 무한한 공급으로서 무제약적 실재의 현현과 자기 영혼의 잠재성을 맛보았다.     
위험한 시기는 계시의 시기이며, 자신의 전 실존을 흔드는 혼돈과 깜깜함의 에너지 속에서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는 틈이 생기면서 무언가가 새롭게 보이는 길이 열린다. 오직 ‘새하얗고 눈부시게 빛났다’라고 나중에 고백할 수밖에 없는 그 어떤 절정의 경험이 바닥(the bottom)과 거의 끝장남에서 추락이 아니라 고양되는 예기치 않은 순간을 경험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실재는 자기모순이 없이 진실하고 마가가 보여주듯이 바닥과 밖으로 그 연결의 에너지를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길가는 자의 뒤따름을 택한 사람들은 이렇게 드러난 것과 감추인 것 사이의 역설에서 눈뜨고 귀 열어 듣고자 마음을 열어야 할 필요가 있다. 마가는 이에 대해 두 가지를 말한다. 그 첫째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4:11)라는 은폐된 실재를 보기 위해 ‘하느님의 뜻’(3:35)에 대한 분별과 헌신이며 둘째는 밖이 아닌 안이라는 ‘깨끗한 마음’(7:21-23)의 주문이 그것이다. 마가의 길 가기 스토리는 이렇게 본래의 존재를 비추는 내적인 경험을 통해 걸음걸이는 멈추지 않고 가야 할 길을 간다. 
(2023. 3.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