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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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나는 우리집 문 앞에 눈을 쓸어야겠다
-박석, <인문학, 동서양을 꿰뚫다>을 읽고
사실 좀 질리는 책이다.
사놓고 반년을 넘겨서야 겨우 다 읽어냈다. 읽어놓고도 정리가 안되어 독후감을 쓸 엄두를 못냈다. 페친 이남곡 선생님이 이 책을 소개하며 지은이 박석교수를 ‘천재’라고 하시길래 호기심이 동했다가 경을 친 것이다. 박학이면 깊이를 좀 덜하든가, 깊이 파고들면 범위를 좁히든가 해야 하는데 박이심(博而深)의 경지라. 이건 반칙이다.
글이 어렵다는 뜻은 아니다.
술술 읽히게 너무나 정확한 논거를 대며 쉬운 말로 이론을 전개한다. 미학이라면 생경한 개념어가 난무하는 외국책, 그것도 설익은 번역본만 읽은 사람이라 이 쉬운 한국어문장이 경이로울 정도였다. (음악이론은 내 지능의 한계로 끝내 이해하지 못했음을 고백한다.)
다만 논거를 제기하는 각도가 새롭고 읽으면 읽을수록 생각할 거리가 무궁무진 일어나서 진도를 나가기가 어려웠다. 수렁도 아닌 인식의 꽃넝쿨에 발목을 잡히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고진감래라는 말이 있다.
빽빽한 인식의 숲을 겨우 헤쳐나와 다시 목차를 보며 전체를 조망하게 되었을 때의 기쁨은 정말 크다. 그것은 우리 조상들의 사유방식을 이해하는 기쁨이며, 우리 안의 동양과 서양을 제대로 이해하고 수용하는 기쁨이다. 그리고 통합된 인류의 미래를 새롭게 그려보는 방편을 얻은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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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제목대로 몇 개의 키워드로 동서양의 문화사를 꿰뚫었다.
저자는 중국에서 비롯되어 동아시아의 저변에 흐르는 가장 중요한 문화적 코드가 바로 화광동진, 대교약졸과 대성약범의 미학이요, 수렴의 미학이라고 제시한다. 여기서 철학이 나오고 종교가 나오고 문학, 음악, 회화, 건축 등 예술이 나오고 동양과 서양을 가르는 사회문화적 정체성이 형성되었다.
◇화광동진
화광동진과 대교약졸은 노자도덕경에 함께 나온다.
도가적 사유의 원형으로서 모두 나선형적 발전과 감추기의 논리적구조를 가지고 있다.
화광동진(和光同塵)의 진정한 의미는 화광과 동진의 두 단계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다. 하나는 감추기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깨달음의 빛을 밖으로 보내지 않고 다시 범속함으로 돌아오는 화광이다. 또 하나는 성스러움과 범속함, 초월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통합해서 새롭게 현실을 살아가는 동진이다.
보통사람들은 성스러움에 도취되면 깨어나기 힘들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감추는 화광은 대단한 경지이다. 그러나 한발짝 더 나가 진정한 동진을 구현하는 것은 더욱 심오한 경지를 필요로 한다.
화광에 급급한 표피적인 동진에서 한 단계 더 들어가면 세상사람들과 기쁨과 슬픔을 같이 나누며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노력하는 ‘보살도’의 단계가 있다.
하지만 그 보다 더 동진이 무르익은 경지가 있으니 그것은 ‘혁명가의 길’이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개인적 인연의 구제에 그치지 않고 현실사회와 문명의 문제점을 직시하면서 현실개혁의 대안을 모색하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최고수준의 화광동진이라는 것이다.
화광동진은 노자가 말했지만 사실 화광동진의 경지를 끝까지 체현한 사람은 공자라고 박교수는 보고 있다.
노자는 화광동진의 경지를 알았을뿐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을 구체적인 현실속에서 실천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만년에는 결국 문명세계를 등지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화광동진을 종교계에서 변주한 것이 바로 동양적인 성스러움을 표현한 대성약범(大聖若凡)이다.
이는 거룩한 기독교와 범속한 유교, 강렬한 성스러움의 예수와 성스러움을 감춘 공자사이에서 철저하게 대비되어 드러난다.
공자는 초월적 세계가 아니라 범속한 일상의 윤리를 강조하며 개인적 수양과 사회적실천의 통합을 강조했다. 공자는 명리를 버리고 조용히 살아가라고 충고하는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면서도 세상을 구제하겠다고 버둥거리며 평생을 살았다. 공자야말로 대성약범의 대성인이다.
◇대교약졸
낮은 수준에서는 기교가 밖으로 그냥 드러난다.
하지만 기교가 커져 무르익게 되면 기교는 안으로 감추어지고 겉으로는 다시 서툰 듯이 보인다는 것이 대교약졸(大巧若拙)의 의미다.
이 경우 졸은 단지 교와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교를 통합하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새로운 차원의 졸이다. 이렇게 졸에서 교로 나아갔다가 다시 졸로 돌아온다는 말 속에는 회귀의 개념이 들어있으나 이는 평면의 무한순환이 아닌 삼차원의 나선형발전을 의미하게 된다.
대교약졸의 미학이 구체화되어 다섯가지 미적범주을 이룬다. 저자는 세련된 소박미와 심오한 단순미, 숙성된 평담미 그리고 분산된 통일미와 배경과의 조화미를 들고 있다.
인공적 기교를 통과하여 다시 원초적 생명력을 회복한 소박미(素樸美),
다채로움과 복잡함을 내면으로 숨겨 안정감과 깊이를 주는 단순미(單純美),
평범한 듯 담백하여 부담없이 편안한 평담미(平淡美), 뚜렷하게 가시적인 구심점이 보이지 않고 각 부분의 개성이 살아있으면서 모호하게 기운이 통일되어있는 통일미,
주체를 지나치게 드러내지 않고 배경인 자연과 사회를 끌어안아 조화를 이루는 조화미가 그것이다.
앞의 세가지는 감추기와 나선형회귀의 두 가지 속성을 다 가지고 있고 뒤의 두가지는 감추기와만 관계가 있다. 이들 다섯가지 아름다움 모두에 공통된 특징은 안으로 감추기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수렴미라고 할 수 있다.
수렴미란 발산미와 대비되는 말이다. 서양의 미학적 특성인 발산미가 자신의 아름다움의 빛을 밖으로 강렬하게 드러내는 것이라면 동아시아의 수렴미는 아름다움의 강한 빛을 속으로 감추는 것이다. 결국 화광동진과도 통하는 것이다.
대교약졸에 대립되는 서양의 아름다움은 기교를 중시하는 화려미, 다채로운 농염미, 시선이 하나로 고정된 초점투시의 집중된 통일미, 전경을 독자적으로 부각시키는 전경미를 들 수 있다. 이렇게 대립되는 양방향의 아름다움은 서양과 동아시아를 이해하는 중요한 문화적 코드이다.
◇동아시아와 서양 미의식 차이의 근원
이러한 미의식의 차이는 대비되는 삶의방식과 문자체계에서 찾을 수 있다.
서양문화의 근원을 이루는것은 해양의 그리스문명이고 동아시아 문화의 근원은 대평원의 중국문명이다.
에게해를 무대로 상공업으로 부를 일군 그리스정신은 개별자 중심으로 배를 타고 멀리 낯선 곳으로 가는 지적 오디세이를 이루었고, 일찍부터 황하강 유역에 자리잡고 사람들간 협력이 필수적인 쌀농사로 시작한 중국문명은 질서와 조화를 체화하는 문명을 일구었다.
거기에 굴절어인 그리스, 로마어와 고립어인 중국어의 차이에서도 사유방식과 철학의 체계, 그리고 미의식의 차이가 비롯된다.
문자는 언어를 기록하여 전달하는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체계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서양과 중국의 가장 큰 차이는 서양은 표음문자를 사용하였지만 중국은 상형에서 출발한 표의문자를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중국의 철학자들은 설령 추상적인 개념을 만들어도 그것을 문자로 표시할 때는 구체적인 이미지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의 경우 수많은 격변화의 규칙을 잘 지키면 그 속에 담긴 의미를 명료하게 파악할 수 있다. 이런 언어를 사용하면 아무래도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사유가 발달하게 된다.
그러나 한문어법은 융통성이 너무 많아 막연하고 모호한 측면이 있다. 대신 문장전체를 한 덩어리로 보면서 그 속에서 각 단어들의 역할을 직감적으로 파악하는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총체적 직관적 사유는 더 발달하게 된다.
공자가 말한 인이나 노자가 말한 도 또한 마찬가지다.
공자는 논어에서 인을 수없이 언급하였지만 그 개념을 명확하게 정의하거나 그것에 이르기 위해서 어떤 논리적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주장한 바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논리적사유의 대상이 아니라 즉각적인 실천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노자의 도 또한 논리적사유가 아닌 마음을 허정하게 한 가운데 바로 직관적으로 체득하는 것이다.
동양에서는 궁극의 실재가 이 현상계의 데이터에 따른 논의로는 증명될 수 없으며 직접 경험에 의해 체험되어야 한다. 철학이란 인생의 길이며 그것에 대한 사고가 아니라 생활에서의 실천이다. 이에 비해 서양에서 철학이란 반드시 인생의 길은 아니며 그것의 입증은 이성에 의해서만 증명이 되는 것이다.
요약하면 ‘서양은 리얼한 것을 보기를 원하고, 동양은 리얼한 것이 되기를 원한다.’
◇새로운 통합문명의 미래
발산에서 침체를 거쳐 다시 팽창한 서양문화와 졸에서 교로, 대교약졸로 나아간 동아시아문화라는 두 줄기 흐름은 근대의 산업혁명으로 승기를 잡은 서양문화의 완승으로 일단 종결되는 모양새다.
하지만 두차례 세계대전을 거치고 지역의 장벽이 무너지며 하나의 세계문명으로 가는 길목에서 전혀 새로운 문화적 요구, 심미관의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음악이나 영화, 티브이 등 지금의 대중문화는 자극적인 소재, 말초신경을 흥분시키는 표현 등 발산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노자의 표현에 따르면 결국 우리의 감각기관을 망가뜨리고 생명력을 고갈시키는 결과에 이르게 된다. 발산형문화의 폐단이다.
이제 인류문명은 힘을 과시하고 발산미에 탐닉하는 것을 넘어 차분한 지혜와 수렴미가 필요한 중년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관점에서 발산의 아름다움을 성숙시켜서 다시 수렴으로 돌리는 대교약졸의 미학이 필요하다.
지금의 고등종교 및 철학사상들은 대략 기원전 8~2세기, 소위 <축의 시대>에 등장했다. 당시는 문명의 대변혁기로 조그만 지역단위 도시국가들이 통합되면서 점차 강력한 고대제국으로 나아가는 과도기였다. 원시적인 부족종교나 윤리로는 새로운 사회환경에 대응할 수 없어 새로운 사상과 종교가 요구되었으며 보다 넓은 세계와의 교류를 통해 사람들의 세계관이나 인생관에 심원한 변화가 일어났다.
마찬가지로 근대 이후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전세계적 통합의 기운이 시작되면서 <제2의 축의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가장 큰 변화는 과학적 합리적 사유능력의 발달로 신화적 초월적 성스러움이 점차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는 것이다.
과연 그렇다면 개혁개방으로 오랜 잠에서 깨어난 중국이 새로운 문명의 승기를 잡을 수 있을까.
중국은 세계 2위의 경제력을 앞세워 역사학계의 서남공정, 동북공정 등을 꾀하고 있다. 이는 과거의 영화에 기댄 대국주의의 발로로 볼 수 있는데 결국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는 것이 박교수의 지적이다.
당나라 때 유명한 시인 유우석은 “산의 명성은 높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선이 있어야 명산이 되는 것이고, 물의 명성은 깊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용이 살아야 영험해진다.”라는 말을 하였다. 과거의 찬란했던 영화의 흔적이 아니라 지금 현재 세계문화를 선도할 수 있는 문화의 깊이가 있어야 진정한 대국이라는 것이다.
박석 교수는 동서양을 가로지르고 고대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문화와 예술과 종교와 사상을 광폭으로 넘나든 사유의 끝을 다음 문장으로 마무리했다.
“동아시아의 오랜 강자 중국, 19세기 후반에 부상하여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일본, 그리고 20세기 말부터 급속도로 부상하고 있는 한국, 어느 나라에서 동서문화가 융합된 더 큰 보편성을 지닌 새로운 문화가 나올 것인지 아직은 모른다. 각자 선의의 경쟁을 하며 노력할 일이다.”
책을 읽으면서 대체 마지막을 어떻게 끝낼까, 중국찬양으로 끝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역시 멀리보고 깊이 보는 인문학 천재다운 클로징이다. 박석교수의 다음 저작이 기대된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어서 우리집 문앞의 눈을 쓸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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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미 23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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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관문 앞에 하얀꽃잎이 눈처럼 날리면
우리 빌라와 옆집 빌라사이 좁은 공터에 자란 벚나무는 영 볼 품이 없다. 햇볕을 찾아 가늘고 길게 몸피를 늘여서 솟아올라 멀대같이 키만 크다.
하지만 시선이 잘 미치지 않는 높은 가지에 봄이면 솔찬히 꽃을 피워내는 모양이다. 오늘 아침에 현관문을 열고 나가보니 검은 아스팔트 인도에 하얀꽃잎이 눈처럼 내려있다.
눈처럼 하얀 꽃잎을 보면 어디 싸리비라도 찾아 쓸고 싶어진다.
송나라 휘종대 진적선사(眞寂禪師) 일화가 생각나 마음이 더욱 정갈해진다.
ㅡ법당을 열던 날, 어느 승려가 물었다.
"세존이 세상에 나왔을 때 땅에서는 금빛 연꽃이 솟아올랐는데
스님이 세상에 나왔을 때 어떤 상서로운 징조가 있었습니까?"
스승은 답하기를, "문 앞에 눈을 쓸었다.".ㅡ
<인문학, 동서양을 꿰뚫다>에서 박석교수는 이 일화를 새롭게 해석한다.
법당을 열어 설법을 시작했다는 것은 이미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 일화는 인도식 깨달음과 선종 깨달음의 미학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낸다고 한다.
인도식 깨달음이 기이한 이적과 지극한 성스러움을 동반하는 것으로 묘사된 반면
선종의 깨달음은 평범하고 담백한 일상사 속에 숨겨져있다는 것이다.
박석교수는 선종은 인도에서 전래된 불교를 아버지로, 중국의 도가사상을 어머니로 삼아 탄생했기 때문에 노자의 화광동진(和光同塵)의 미학을 내면화했다고 본다.
화광동진은 선가에 와서 깨달음의 경지를 가리키는 진광불휘(眞光不輝)로 변주된다.
여기서 진적선사는
'깨달음의 성스러운 빛을 부드럽게 하여 그것을 안으로 감추고
다시 범속한 일상의 세계로 돌아와 보통사람처럼' 문 앞에 눈을 쓸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듯 진정한 성스러움은 밥먹고 일하는 일상에 있다고
현관문 앞에 내려앉은 하얀꽃잎은 말해준다.
도닦는게 별건가.
봄에는 싸리비, 꽃잎을 쓸고
여름엔 싸리비, 빗물을 쓸고
가을엔 싸리비, 낙엽을 쓸고
겨울엔 싸리비, 흰눈을 쓸고.
어린시절부터 이 노래를 부르면 불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항상 고요한 산사의 아침같은 마음이 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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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comments
이군희
저는 요즘 가슴 속의 빗물을 쓸어야 할 듯 싶네요..ㅜ.ㅜ
지인이 많이 아파서 흩어지는 마음을 어떻게 쓸어담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Reply3 d
박정미
이군희 그 빗물을 저도 같이 쓸어드리고 싶어집니다. 그 비가 어서 그치기를 마음 보탭니다. 교장선생님. 힘 내시길요.
Reply2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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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철
Reply3 d
Ilwon Yoon
"문 앞에 눈을 쓸었다.", 참 좋은 표현입니다.
Reply3 d
박정미
윤일원 일화를 처음 읽는데 차고 맑고 푸른 기운이 찻물처럼 몸 속에 흘러드는 것 같았습니다.
Reply2 d
정금희
이렇게도 찬란하게 목련이 피었는데 의성은 긴 고난을 뚫고봉오리를 터트려 고고한 자태를 뽐내지도 못한 채 어제 영하로 떨어진 날씨에 모두 갈색이 되어 주렁주렁 달렸는데 가슴 한 켠에 뚝뚝 떨어지는 것은 무엇인지....
Reply3 d
박정미
정금희 영하라니요. 이 좁장한 반도에서 무슨 변괴랍니까. 의성에 겨울요괴가 잠시 난동을 부렸나봅니다. 하지만 그래봤자 하루이틀이겠죠. 이제 힘을 못 쓸겁니다.
찬란한 봄이 피어날겁니다. 목련도 그냥 지지만은 않을거구요!
Reply2 d
김두화
아예 1도를 하셨군요.
Reply2 d
박정미
김두화 일도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현관문을 여는 순간 그런 기분이 확실히 듭니다.
안보이면서 꽃잎을 보내주는 벚나무에게 감사하는 마음도요^^
Reply2 d
Jungeun Kim
맞아요 언니 매일 아침 청소하고 빵을 준비하고 커피를 내리면서 행복해요ㅎ 오늘도 행복하세요💕
Reply2 d
박정미
Jungeun Kim 네가 진정한 도인이다. 힘든 일이 있어도 하루하루 일상을 변함없이 지켜내는것, 그것이 도력 아닐까, 싶다.
화이팅!
Reply2 d
Jungeun Kim
박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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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ly2 d
이근식
May be an image of text that says "행복한 아침! 즐거운 마음으로 시작하는 아침입니다. 오늘 하루도 웃는 일, 좋은 일만 가득한 하루 되시길 빕니다."
Reply2 d
Rie Saito
私たちが友好的にお互いの国の文化を理解することができれば、フェイスブックを追加することができればもっといいですね。
ReplySee translation2 d
이병철
낙화인들 꽃이 아니라 쓸어 무삼하리요.
나는 떨어져 있는 꽃이나 눈을 보면 사람들이 쓸어버릴까 마음이 조려지네.
떨어져 있는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을까. 떨어진 꽃을 밟지 않으려고 길을 돌아가네.
Reply2 d
박정미
이병철 꽃잎을 쓸다가 빗질을 멈추고 잠시 푸른 하늘을 우러릅니다. 아! 빗질은 호사요, 흉내일뿐이지요. 저 하늘 가득 내리는 꽃눈을 보세요.
Reply2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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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리
최정철 2004.09.01 11:11 조회 수 : 375
NIKON D100 2004:08:28 16:03:481/90sF11.0+0.33 EV조리개 우선 모드스팟105mm430x644
콩과식물인 싸리나무입니다.
옛날에 줄기를 이용해서 빗자루나 사립문 같은 것을 만드는데 이용했었지요.
저 어렸을 때에는 '싸리비'라는 동요를 배웠는데 요새도 배울까요?
봄에는 싸리비 꽃잎을 쓸고
여름엔 싸리비 빗물을 쓸고
가을엔 싸리비 낙엽을 쓸고
가을엔 싸리비 낙엽을 쓸고
겨울엔 싸리비 흰눈을 쓸고
꽃잎과 빗물을 쓸던 이 싸리비.
이제는 낙옆을 쓸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꽃잎과 빗물을 쓸던 이 싸리비.
이제는 낙옆을 쓸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