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14

생각의 끝에도 머물지 말라 - 성법 스님의 까칠한 불교 이야기 |성법 저, YES24

생각의 끝에도 머물지 말라 - 성법 스님의 까칠한 불교 이야기   
성법 (지은이)민족사2013-12-27

304쪽

책소개

머무는 순간 곧 집착하는 순간 이미 불교에서 멀어진다는 뜻을 내포한 제목과 ‘성법 스님의 까칠한 불교 이야기’라는 부제에서도 엿볼 수 있듯 이 책은 오늘날 불교의 문제점에 대해 합리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붓다께서는 오늘의 우리들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 성법 스님은
  1.  탄탄한 인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화엄경을 첨단 과학이론과 접목하여 해설한 『이판사판화엄경』, 
  2. 동서양 철학과 물리학·뇌과학·생명과학·심리학 등을 토대로 반야심경을 해설한 『마음 깨달음 그리고 반야심경』
  3. 천수경을 통해 불교의 기초에서 깨달음의 완성까지 모두 이해시키고자 고심한 『왕초보 천수경 박사되다』 등
그동안 책이 출간될 때마다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다양한 관점으로 명쾌하게 경전을 해설하면서 동시에 한국불교의 병폐와 모순을 조목조목 지적하고, 그 대안을 역설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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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머리말_ 13

제1장 붓다로의 시간 여행

027 붓다의 위대한 도전
불교의 탄생
030 붓다, 반고행주의의 성공
붓다의 깨달음
034 붓다, 수행 방법을 ‘업그레이드’ 하다
탈고행주의, 중도 수행
037 중생의 이익과 안락과 행복을 위하여 길을 떠나라
붓다, 진정한 승리자의 서원

제2장 붓다, 다르마를 설하다

043 힌두이즘을 제압하다
붓다의 연기緣起
045 인과는 연기의 부분집합이다
연기緣起 속의 인과因果
049 붓다에 주파수를 맞추라
연기, 산은 산 물은 물
052 엉뚱한 자문자답
이율배반도 연기緣起로 해결된다
055 물에 가라앉는 돌을 뜨게 할 수는 없다
업, 고
058 인因과 연緣의 결과물
060 정해진 업業은 없다
업의 개념이 안고 있는 업
066 붓다, 연기의 관점으로 세계를 보다
업과 윤회는 일반언어
068 무아無我가 아니라 공아空我다
무아와 윤회
073 윤회를 바로 보라
힌두교적 윤회는 없다
077 진화해야지 오염되어서는 안 된다
업과 윤회의 논리
093 다른 사상을 알아야 불교가 제대로 보인다
6사외도와 불법
098 겉은 불교, 속은 자이나교인가?
자이나교와 불교의 업과 윤회
100 인간을 구성하는 5가지 요소
오온
102 이해관계 없이 감각기관을 다스리라
12처 18계

제3장 붓다, 제자들과의 기막힌 인연

107 붓다, 세월을 함께 할 유일한 분
출가
110 왜 사람들은 붓다만 보면 앞뒤 가리지 않고 출가했을까?
붓다의 출가주의
112 유마경에서 만난 부처님의 으뜸제자들
10대 제자
116 조로아스터교의 개종 제자
가섭 3형제를 제도하다
119 붓다의 아들 사랑
외아들 라훌라를 교화하다
122 데바닷다는 극악무도한 자인가?
억울한 데바닷다
126 붓다의 말씀을 되살려 낸 아난존자
억울한 아난
129 현명한 불자, 바보 같은 불자
붓다와 춘다의 대화
133 붓다의 최고 후원자, 사랑과 영혼의 주인공
빔비사라 왕과 위제희 부인

제4장 경전의 바다에서 붓다를 만나다

141 각 나라와 지방의 언어로 법을 전하라
초기 경전들의 언어적 격의 문제
144 극락에 가서나 만날 수 있는 붓다라면
석연치 않은 삼처전심
147 중생의 필요에 따른 맞춤 구원
삼신불과 다불·다보살 사상
151 붓다의 진심은 어디에 담겨 있는가?
금강경과 법화경
157 열린 마음, 창의적으로 해석해야
열반경 속의 무상과 적멸
160 마음을 해부할 수 있는가?
중관과 유식
167 인류 최고·최상의 희망
여래장, 불성
172 고통이 피워낸 희망사항
정토사상, 미륵사상

제5장 붓다의 깨달음, 수행이 희망이다

179 일어나는 마음만 집중 관찰하라
사념처와 위빠사나
183 사람에 따라 수행법도 달라야 한다
위빠사나와 간화선
190 간화선 제일주의 이대로 좋은가?
간화선
193 보면 사라진다
마음 관찰하기
196 이타행, 수행의 척도
수행과 자비
201 사람은 왜 화를 낼까?
화, 수행
204 깨달음과 중생 구제
대승사상과 보살
209 양극화가 심화될수록 꼭 실천해야 할 것
상구보리 하화중생과 사섭법


제6장 붓다, 과학을 끌어안다

215 불교의 요체와 과학의 극적인 통섭
일체유심조

219 과학, 미래의 불교를 위한 새로운 대비책?
과거심·현재심·미래심

225 현대, 신神들의 최대 수난기
진화론과 연기


제7장 중생이 있으므로 붓다가 있다

235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을 만큼 성숙해 있는가
삼보三寶
238 허망을 버리고 진실을 가지라
삼귀의
241 붓다가 되겠나이다, 붓다처럼 살겠나이다
서원, 출가는 신분 상승인가
247 말귀부터 알아들어야
춘성 스님의 일화와 원각경
252 막간 우스갯소리
미국 법정에서 오간 대화들
255 용서가 반드시 최선은 아니다
인욕의 양면성
258 중생의 소원에 따라 진화된 만능 불·보살
불·보살의 본원
262 믿음을 저버린 ‘양심’이 더 종교적일 수 있다
종교적 신념과 믿음의 공허
266 신비주의 주의보
수행의 마장을 경계하라
270 단지 감각의 오류일 뿐
우주인, 임사체험, 심령현상
275 종교인의 오류는 누가 책임을 져야 하나?
뉴턴은 종교인이 아니었다
278 중생이 바라는 대로 맡기겠나이다
기복불교, 원력불교
283 다른 눈으로 세상 보기
사이언톨로지교와 라엘리안 무브먼트
289 동서양을 넘나든 종교적·문화적 아이콘
만卍자, 나치 문양, 십자가 문양
292 힌두이즘의 쓰나미가 덮치다
인도에서 불교의 멸망

부록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_ 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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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한국불교의 현재는 따지고 보면 염세주의보다 훨씬 위험한 낙관주의에 깊이 물들어 있습니다. 붓다 입멸 후 1,500여 년이나 지나 중국에서 발생한 선불교禪佛敎의 선사들의 입에서 나온 “네가 곧 부처다”라는 말을 붓다의 가르침의 요체로 인식하는 엄청난 착시에 함몰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한술 더 떠, 수행을 하는 데는 무식할수록 유리하니 붓다께서 설하신 경전도 보면 안 되고, 세간의 이치와 논리는 하찮은 것이니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조차 차단해야 비로소 바른 수행이라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중략)
붓다께서는 염세적인 출발에서 인간이 기대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서는 깨달음이라는 극적 반전으로 낙관적 회향을 보여 주셨지만, 이들은 “네가 부처다”라는 낙관적 출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부처가 맞다는 당연한 회향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것이 이들(선불교)의 근본적 한계인 것입니다. 스님들이 신도들과 늘 같이 독송하는 반야심경과 금강경의 붓다의 가르침은 이것과 정반대로 일체가 공空함을 강조하는데도 스님들은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사실이든 사실과 다르든 낙관주의적 착시를 신도들에게 오염시켜야 신도들의 보시가 많이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승가의 끝없는 욕심과 증명된 무능력은 따지고 보면 ‘배고픈 신도에 배부른 승가’에 그 원인과 해법이 있습니다. 승가는 해방 이후 타종교인에 비해 너무나도 편안하게 살아왔고, 지금은 오히려 종단과 본사에 돈이 넘쳐 출가정신을 다 망각해 버린 것입니다. -머리말 중에서-  접기
P. 48 붓다의 깨달음은 퍼펙트한 것이었고, 그 후 오늘날까지 붓다의 퍼펙트에 1~10%만 가까이 다가서도 보통의 인간의 사유를 단번에 넘어서는 것이 사실입니다. 붓다의 온전한 깨달음은 12연기가 아니라, 우주의 이理와 사事의 근본 원리인 “이것이 있으니 저것이 있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도 멸한다”는 상의상관 관계의 원리인 군더더기 없는 연기緣起입니다. - 44p -
인과응보는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는 인과에 징벌적 도덕률을 극대화시킨 것입니다. 연기의 부분집합으로 벌어지는 인과에는, 선이나 악이라는 인간의 자기 편의적 분별이 섞일 수가 없습니다. 인과는 연기의 한 단면이고 연기는 우주와 법계의 존재 그 자체와 질서로, 인간의 분별심이 오염시킬 수 없는 자리입니다. 붓다께서는 이 원리를 깨달으셨기에 시비와 분별, 선과 악, 태어남과 죽음, 이런 온갖 양변을 여의고 중도의 자리에 안착하셨던 것입니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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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성법 (지은이) 

20세에 출가하여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을 수료하고, 현재 고양시 대한불교조계종 용화사 주지로 있으면서 불교신자는 물론이고 일반인들에게도 ‘바른 불교’를 알려 주고, 바른 신행으로 이끌어 주기 위해 2001년부터 경전 전산화 불사의 원을 세워, 초기불교에서 주요 대승경전의 다양한 해설까지 아우르는 방대한 자료의 장(場)인 불교경전총론 세존사이트(www.sejon.or.kr)를 여러 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운영하고 있다.

잘못 인식된 한국불교의 흐름을 바로잡고 새로운 물줄기를 형성, 모든 이가 괴로움에서 벗어나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사이버 불사(佛事)와 불서(佛書) 저술과 아울러 지난 2017년 설립한 세존학술연구원 원장으로 세계불교 학술명저 번역 출간 불사(세존학술총서 출간)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저서로 기존의 훈고학적인 해석에서 벗어나 탄탄한 인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현대인들이 받아들이기 쉽게 해석한 『이래도 모르시겠습니까』와 화엄경을 첨단 과학이론과 접목하여 해설함과 아울러 현재의 ‘비불교적’ 요소를 날카롭게 비판한 『이판사판 화엄경』, 동서양 철학과 물리학·뇌과학·생명과학·심리학 등 다양한 관점을 토대로 반야심경을 해설한 『마음 깨달음 그리고 반야심경』, 천수경 해설서인 『왕초보 천수경 박사되다』, 불교의 문제점에 대해 합리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붓다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 칼럼집 『생각의 끝에도 머물지 말라-성법 스님의 까칠한 불교 이야기』 등 다수가 있다. 접기

최근작 : <그래도 불교>,<생각의 끝에도 머물지 말라>,<이판사판 화엄경> … 총 8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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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콕콕 정곡을 찌르듯 불편한 진실을
고스란히 드러낸 성법 스님의 까칠한 불교 이야기

지난 한 해를 반조하고 새로운 한 해에 대한 희망을 꿈꾸는 12월 말, 지금까지 왜곡되고 잘못 인식해 온 불교 교리, 승가의 잘못된 행태 등에 대해 콕콕 정곡을 찌르듯 불편한 진실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비판하면서 대안을 제시한 책이 민족사에서 출간되어 화제가 되고 있다.

『생각의 끝에도 머물지 말라』, 머무는 순간 곧 집착하는 순간 이미 불교에서 멀어진다는 뜻을 내포한 제목과 ‘성법 스님의 까칠한 불교 이야기’라는 부제에서도 엿볼 수 있듯 이 책은 오늘날 불교의 문제점에 대해 합리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붓다께서는 오늘의 우리들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 점이 매우 돋보인다.

이 책의 저자 성법 스님(57세)은 탄탄한 인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화엄경을 첨단 과학이론과 접목하여 해설한 『이판사판화엄경』, 동서양 철학과 물리학·뇌과학·생명과학·심리학 등을 토대로 반야심경을 해설한 『마음 깨달음 그리고 반야심경』, 천수경을 통해 불교의 기초에서 깨달음의 완성까지 모두 이해시키고자 고심한 『왕초보 천수경 박사되다』 등 그동안 책이 출간될 때마다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다양한 관점으로 명쾌하게 경전을 해설하면서 동시에 한국불교의 병폐와 모순을 조목조목 지적하고, 그 대안을 역설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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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답답했던 점을 스님이 풀어주어서 고맙다.”
“불교를 믿고 공부하면서 어렴풋하게 가지고 있던 의심의 덩어리를 성법 스님의 글을 읽고 확연하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이렇게 책을 통해서나마 바른 생각, 바른 소리를 하는 스님을 만난 것을 다행이라 생각한다.”는 독자들이 늘어났고 자연스레 마니아층이 형성되었다.

7장과 부록으로 나뉘어 편집된 이 책은 그동안 출간되었던 경전 해설서와는 달리 불교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총망라하여 다룬 만큼 성법 스님의 사상과 견해를 응축해 놓은 문자사리 같은 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은 불교의 탄생부터 붓다의 깨달음, 교리 발달사, 수행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을 순리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한편 인간 최고의 지성인 붓다의 가르침이 중국에 전해지면서, 중국의 기호에 가미되지 않았는지 반문하고, 중국에서 발달한 선수행, 한국의 대표종단인 조계종이 내세우는 간화선과 선사들의 가르침의 전달 방법은 완전한 것인가를 물으면서 현대인들에 맞는 수행법을 창안하여 제시하고 있다.

“업은 지금도 왜곡되어 불자들의 삶을 좌지우지합니다. 예를 들면, 자신이 억울하고 부당한 일을 당했으나 힘에 부쳐, 스님에게 해법을 의논하면 “그건 네 업이니 참고 지내라”는 3,000여 년 전의 정답을 들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정작 문제는 정답을 그렇게 잘 알고 있는 스님들이 모여 있는 승가, 그중에서도 권력의 중심부에 있을수록 ‘자신의 업’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행태가 만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65쪽 중에서

“분명한 사실은 한국의 불교는 상당 부분 붓다 이전의 업과 윤회의 개념으로 신도를 유인하고, 신도들은 고달픈 길인 깨달음으로 향하기보다는 내 욕심을 빨리 또 손쉽게 얻으려는 심사로 불교를 믿는다는, 참으로 인정하기 싫은 현실이 엄연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68쪽 중에서

스님은 “종교는 어떠한 경우에도 인간의 영혼과 순수성을 담보로 ‘거래’를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특히 힌두교인지 자이나교인지 분별하기 힘들 정도로 방편에 물들어 거래를 하고 있는 듯한 한국불교의 비불교적 모습에 대해 강렬하게 비판하면서 불교의 근본교리인 연기법과 업설의 개념에 대해 분명하게 밝혀 놓고 있다.

불교는 ‘지금’ ‘나와 우리’의 문제를 논하고
풀어나가야 하는 실시간의 종교여야 한다

“붓다의 가르침인 불교는 단순 마음 정화학(淨化學) 수준의 개인적 평안을 구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 정도라면 마음을 화두로 눈부신 발전을 하고 있는 뇌과학과 진화심리학, 일반 도덕론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습니다. 불교는 ‘지금’ ‘나와 우리’의 문제를 논하고 풀어나가야 하는 실시간의 종교여야 합니다. 그렇기에 불교는 인간의 보편적 가치가 무엇이고, 어떻게 중생들과 더불어 깨달음을 추구해야 하는가를 항상 고민해야 합니다.” -머리말 중에서

성법 스님은 지난 2001년부터 경전전산화불사의 원을 세워 불교경전총론(www.sejon.or.kr) 세존사이트를 운영해 오고 있다. 초기불교에서 주요 대승경전의 다양한 해설을 통해 방대한 자료의 장(場)을 만들고 잘못 인식된 한국불교의 흐름을 바로잡고 새로운 물줄기를 형성하기 위해 사이버 불사를 하는 스님의 뜻을 함께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스님은 이 책을 통해 실시간의 종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 비록 수십 년이 걸릴 지라도 붓다의 참된 가르침(s 라인)을 대·소승 경전 속에서 명확하게 정리해 나가는 제 5결집을 시작해야 할 때임을 역설하고 있다.

이 책을 관통하고 있는 메시지는 ‘붓다께서 진정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이고 그에 대한 대안이다. 스님은 세상의 물질적 혁명은 결국은 정신적 세계에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기에, 불교도 혁신을 해야 함을 거듭 강조하면서 오늘날 붓다의 수행 방법에 대해 논란이 분분한데 이에 대해서도 유연한 사고를 가져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아울러 위빠사나, 명상, 선수행의 장단점은 무엇이고, 스님이 경험을 바탕으로 창안한 현대인에게 맞는 수행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또한 현재의 승가는 수행의 ‘마장’ ‘장애’의 개념조차 사라져 원로스님들의 가이드라인이 필요한 상황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짚고 있다.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한국 승가에 이런 질책을 하실 것입니다. ‘너희는 내 모양을 천 개 만 개 조성해 복 지으라며 팔고, 사법(邪法)을 내 말이라고 중생들을 현혹하면서 정작 내 가르침의 진위에는 관심조차 없구나’라고 말입니다.” -부록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중에서

부록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은 성법 스님이 한국불교의 총체적 문제들을 하나씩 지적한 내용으로 이 책의 정수요, 이 책에서 설파하고자 한 메시지를 함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법 스님의 원력에 뜻을 같이 한 세존아카데미 재가불자 학인들의 보시에 힘입어 지난 2012년 불교신문에 광고 형식으로 연재해 실었던 내용으로 인구에 회자되었다.

생각의 끝에도 머물지 말라, 비교적 긴 머리말부터 부록에 이르기까지 불교의 태동과 교리, 경전, 수행, 한국불교 등 불교 전반을 총체적으로 다루면서 한국불교의 현실을 바로 보고 바른 불교를 세우고자 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날카롭고 까칠한 지적만큼이나 보석 같은 지혜와 대안이 돋보이는 이 책을 읽는 동안 독자는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될 것이다.
‘불교계에 이런 스님도 있구나’ ‘아직은 자정 능력이 있구나’ 하는 마음에 책을 읽는 동안의 이런저런 불편함에서 해탈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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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자평
 
     
중도를 말하면서 착시에 빠져있고, 염세주의보다 훨씬위험한 낙관주의에 물들어 있는 한국불교의 현실을 질타하는 참수행자의 모습이 오롯이 담겨있다. 승가의 욕심과 무능력을 꾸짖고 한국불교의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스님의 죽비와 같은 정신이 불자들의 가슴에 널리 스며들기를 기대한다.  구매
현정 2018-05-26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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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연기를 통해 바로보는 부처의 가르침

성법스님을 처음 알게된 것은 2006년경에 해인사에서 구입했던 한권의 책이 인연이 되었다. 그책은 성법스님의 저서는 아니었고, 만현이라는 사이비 중이 스스로를 부처라 칭하며 자신의 가르침(?)을 써낸 "21세기 붓다의 메세지"라는 책 때문이었다. 당시 나는 불교에 대해서 매력과 호기심 그리고 두려움이 뒤섞인 관심을 가지고 왕성하게 불교와 관련된 모든 것은 다 찾아보려고 애쓰던 시기였다. 

만현이라는 자가 썼던 책은 아주 상식적인 관점에서 생각해보아도 사이비 처럼 여겨졌으나 - 2014년에 누군가가 자신의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스스로를 재림예수 혹은 재림붓다라고 칭한다면 당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 해인사 경내에 있는 서적 코너에서 당당하게 팔리고 있었고, 서점에서 그 책을 판매하는 보살님께 여쭈어 보아도 잘 모르겠다는 대답뿐이었다. 해인사가 어떤 절인가? 한국불교의 최대 종단인 조계종의 "법보사찰" 이라고 불리우는 절이다. 그 상징성을 생각해볼 때 그런책이 해인사 경내에서 당당히 팔리고 있다는 사실은 참 맥이 빠지는 일 아닌가? 기독교는 워낙에 수많은 종파가 있으니 비교가 힘들지만, 명동성당 서점에서 재림예수라 칭하는 자의 가르침을 담은 책이 당당히 팔리고 있고 그 누구하나 그 책에 대해서 비판조차 없다고 생각해 보면 이건 뭔가 분명히 잘못되었다라고 생각이 드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일것이다.  

인터넷으로 그 책에 대한 내용을 검증해 보던 중 그 책과 저자에 대해서 조목 조목 비판을 하고 있던 스님이 유일하게 한분 계셨는데 그 분이 성법스님이었다. 또한 세존싸이트의 존재에 대해서도 그때 알게 되었다. 그때도 그렇지만 한국불교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해서 이미 대중은 거의 승가의 부패에 무감각해져 버린 듯한 2014년의 지금까지 한국 불교에 대해서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는 스님을 찾기가 힘들다. 달콤한 사탕발림이나 그럴 듯한 현실도피와 신비주의로 포장되지 않은, 석가모니라는 실존했던 한 인간의 진정한 가르침이 무엇이었는지를 당당하게 스스로의 목소리로 말하는 분도 극히 드물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성법스님의 가르침을 신뢰했고 보다 많은 사람이 스님의 가르침에 접할 기회를 가질 수 있기를 절실히 바란다. 이제 막 불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사람들, 냉철한 이성으로 깨달음이라는 신비주의를 경계하지만 부처의 위대한 가르침과 지혜는 무엇이었는지 진실로 궁금한 그 어떤 사람도 성법스님의 신간에서 바른 이정표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스님의 신간을 아래와 같이 간추려 본다. 성법스님의 신간은 300페이지가 넘는다. 보다 많은 이들이 스님의 가르침에 인연이 닿기를 바란다.

14p. 불교는 끊임없는 자기반조와 참다운 가치에 대한 의문을 통해 인간의 본능을 극복하고 깨달음에 도달해야 한다는 반 염세적인 메시지를 핵심으로 삼는 다는 말씀입니다.

16p. 붓다께서는 염세적인 출발에서 인간이 기대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서는 깨달음이라는 극적반전으로 낙관적 회향을 보여 주셨지만, 이들은 "네가 부처다" 라는 낙관적 출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부처가 맞다는 당연한 회향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것이 이들의 근본적인 한계인 것입니다. 이렇듯 理의 세계인 진여문에서 한국불교의 착시 현상은 매우 심각하다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事의 세계인 생멸문에서의 착시현상은 어떨까요? 한마디로 표현하면 돈으로 공덕도 살 수 있고 악업은 보시를 해서 소멸시킬 수 있고, 앞으로 받아야 될 업도 지금 보시를 하면 다 해결된다고 말합니다. 법당을 짓고, 불상을 조성하면 공덕중의 공덕으로 삼대가 복을 받는다고 자신합니다. 이것 역시 낙관주의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스님들이 신도들과 늘 같이 독송하는 반야심경과 금강경의 붓다의 가르침은 이것과 정반대로 일체가 空함을 강조하는 데도 스님들은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사실이든 사실과 다르든 낙관주의적 착시를 신도들에게 오염시켜야 신도들의 보시가 많이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37p. 우주적 진리인 연기를 관하신 붓다께서는 그 마음의 여운을 간직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5비구에게 자신이 방금 깨달은 경지를 자신 있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붓다가 5비구에게 설한 내용은 4성제 였습니다. 붓다께서 이들에게 12연기를 처음 설하셨다는 단 한 줄의 증거도 없습니다. 이건 상식에 어긋납니다. 즉, 5비구에게 설한 첫 가르침이 12연기법이어야 기존의 주장에 맞는데 실상은 4성제를 설하신 것으로 전해오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모순을 해결해야 합니다. 12연기가 아니라 4성제를 최초로 설하셨다고 전해지는 이유을 해결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제가 찾은 해결 방법은 12연기는 후대에 조합된 것이고, 연기적 고-집-멸-도라는 사성제를 설하셨다고 결론짓는 겁입니다. 붓다께서는 5비구에게 12연기가 아닌 법계의 '연기성'을 언어적이 아니라, 4성제라는 의미적으로 재차 확인해 주신 것이라고 이해하면 접근이 쉬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좀 더 과감한 추론을 한다면, 붓다께서는 연기법의 부분인 '인과'가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지 않을 수 있다는 부분에 상당한 고민을 하셨을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연기에는 의도나 선악이 없지만, 세상은 인과에 의도와 선악을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44p. 실제로 붓다의 깨달음은 퍼펙트한 것이었고, 그 후 오늘날까지 붓다의 퍼펙트에 1~10%만 가까이 다가서도 보통의 인간의 사유를 단번에 넘어서는 것이 사실입니다. 붓다의 온전한 깨달음은 12연기가 아니라, 우주의 理와 事의 근본 원리인 "이것이 있으니 저것이 있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도 멸한다" 는 상의 상관 관계의 원리인 군더더기 없는 緣起입니다.
 
45p. 물질(事)과 정신 혹은 마음(理)은 상호 緣起 관계에 있다는 말입니다. 인.연.과는 간단 없는 이와 사의 한 단면을 '사건적'으로 보는 것에 불과합니다.
 
46p. "연기는 내(여래)가 태어나기 이전이나, 내(여래)가 멸한 후라도 나와는 상관없이 존재한다" 고 하셨습니다. 이 연기에 확철한 경계라는 것은, 인간의 욕심과 작위로 인한  인因과 연緣을 엮어 가서 만들어 내는 과果라는 것을, 아주 미미하고 소소한 일로 여길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마음의 무한 팽창을 이룩한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한 인간이 어떤 문제에 자신의 마음의 10%쯤 빼앗기고 있다고 가정합니다. 이것을 반인 5%로 줄여 집착과 번뇌 역시 반으로 줄이는 일도 가능하지만, 자신의 마음을 10배로 확장 시킨 다면 이 역시 빼앗기는 마음을 10%에서 1%로 줄이는 효과가 있다는 뜻입니다. 고타마 붓다는 마음을 극대화시켜 인간이 갖는 모든 욕망을 아주 미미한 수준으로 낮추어 버린 것입니다. 그것이 감각기관을 다스리는 초기 수행의 방법론이며, 번뇌의 불을 다른 곳으로 번지지 못하게 단속한 붓다의 열반의 경지였던 것입니다. 고타마 붓다도 곳곳에서 인간으로서의 감정을 드러냅니다. 제자들을 야단치고, 우열도 가리고, 갈증이 일 때는 목말라 하며, 늙고 병드는 육체적 고통도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감정은 연기의 관점에서는 마치 태양에 물 한방울 더한 것과 같은의미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48p. 대부분의 경전과 논서들에서 인과는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불이 있으면 뜨거우니, 인과가 분명합니다. 그러나 "현생에 가난한 인은 과거생에 인색하기 살았기 때문이다"라는 모범적인 경전적 해석과 의존은, 붓다의 연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원죄론적 인과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자는 것입니다. 연기 자체에는 선악이 없습니다. 인과에도 선악이 없습니다.
 
50p. 세상의 시공의 변화와 관계없는 영원한 가치는 오직 연기를 체득하여 세상의 고와 낙, 생과 사를 무상으로 인식하며, 집착과 오욕을 일으키는 자신의 마음이 실은 무아無我(空我)라는 진리라고 '느끼라' 한 것이 붓다의 가르침의 전부입니다. 이 '느끼라'의 방법론(수행법)이 다양하게 해석되고 발생하게 되니 지금과 같이 불교가 아주 번잡스러워진 것입니다. '번잡'이라는 것은 문화적.시대적 다양성으로 이해해 줄 수도 있지만, 지금의 한국불교는 단순히 수행론의 번잡만이 아닌, 붓다의 가르침의 핵심인 연기는 망각하고 오직 신앙을 강조하는 종교로 퇴락해 버린 것이 문제 입니다. 그렇다고 불교가 신앙성을 배제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 신앙성 즉, '믿음'은 연기라는 진리에 나 자신도 한 축을 담당하고 있어 법계의 일원이라는 믿음, 법계에 편재한 곧 붓다께서 깨달음을 이룬 후 느낀, 바로 그 마음의 파장에 나도 하나가 되어 같은 파장을 이룰 수 있다는, 법신불法身佛에 대한 귀의와 발원이 불교의 종교성이 되어야만 합니다.
 
53p. '불법이 무상.무아에 해당이 되는가' 라는 의문입니다. 저는 해당이 된다는 견해입니다. 무상은 제행무상의 줄임이고, 무아는 제법무아의 줄임입니다. 제행무상은 연기를 사事의 논리로 표출한 것이고, 제법무아는 연기를 이理의 논리로 표출한 것입니다. 이 구별은 사실 삼법인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이이와 사가 원융되고 다시 진아와 합일되는 안팎세계의 불이가 바로 궁극적 깨달음입니다. 당연히 이것은 모조리 연기 자체이기도 한 것입니다.
 
67p. 그 '무엇'은 바로 연기라는 전혀 새로운 관점에서 세계를 보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업과 윤회도 연기가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이러우지고 설명되어야 합니다. 그것도 12연기가 아닌 그냥'연기'이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깊이 새겨야 할 화두인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한국의 불교는 상당 부분 붓다 이전의 업과 윤회의 개념으로 신도를 유인하고, 신도들은 고달픈 길인 깨달음으로 향하기 보다는 내 욕심을 빨리 또 손쉽게 얻으려는 심사로 불교를 믿는다는, 참으로 인정하기 싫은 현실이 엄연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내친김에 첨언하면, 아무런 대안 없이 '지식'을 깨달음의 장애로 매도하는 禪병에 대해 인간의 지성과 통찰력을 확신하는 저로서는, 선은 물론 지식을 포함한 모든 사상과 존재가 연기 안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 애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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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y 2014-02-03 공감(1) 댓글(1)
Thanks to
 
공감
     
진정 불자라면 꼭 봐야 할 책입니다.

정말 충격적입니다. 불법의 틀을 좀 더 크고 확실하게 전달해 줍니다. 
그리고 우리불교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내용입니다. 
 
개굴된장 2015-07-14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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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끝에도 머물지 말라 도서 리뷰 : 근본에서 멀어진 한국 불교에 대한 쓴 소리... | YES24 블로그 - 내 삶의 쉼표

근본에서 멀어진 한국 불교에 대한 쓴 소리...

벤투의스케치북 2014.01.25 댓글 수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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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끝에도 머물지 말라

[도서] 생각의 끝에도 머물지 말라  - 성법 스님의 까칠한 불교 이야기
성법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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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의 끝에도 머물지 말라’는 지난 2001년부터 세존 사이트(www.sejon.or.kr)를 운영하고 있는 성법 스님이 한국 불교에 대해 던진 고언(苦言)이다. 세존 사이트는 경전 전산화 불사(佛事)의 원(願)에 따라 초기불교에서 대승경전에 이르는 다양한 내용을 실은 사이트이다. 스님은 한국 불교가 있는 것을 그대로 보지 못하는 낙관주의라는 착시현상에 빠져 있다고 진단하신다. 스님의 눈에 비친 한국 불교는 상당 부분 힌두화(또는 자이나교화)가 진행된 불교이며, 기복불교보다 더 큰 문제일 수 있는 진리의 관념화에 빠진 불교이다.

스님은 탐진치를 벗어나면 단박 깨달은 것이라 말하지만 실은 그것은 법계를 아우르는 수행의 시작일 뿐이라 말씀하신다. 스님의 가르침은 담담하게 들리지만 공력은 만만치 않고 내용은 래디컬하다. 붓다가 깨달은 후 최초로 설법하신 것이 4성제(4聖諦)였고 12 연기(緣起)는 후대에 조합된 것이라는 말씀, 무아(無我)보다 공아(空我)라는 말이 오해의 소지를 줄일 수 있다는 말씀, 베다와 우파니샤드, 힌두이즘을 제압할 수 있는 붓다의 가르침은 (12 연기가 아닌) 오직 연기(緣起)라는 말씀, 윤회에 대한 새로운 가르침 등이 그런 생각을 하게 한다.

특히 “윤회의 개념을 생명체의 연속성과 재생에 한정시킬 것이 아니라 죽음을 맞아 육체를 화장하고, 화장 후 남은 재를 나무 밑에 뿌리고, 그 나무의 열매를 사람들이 먹게 되고, 새들도 먹게 되고.. 결국 질량보존의 법칙대로 내 육체의 질량과 에너지만큼은 우주에 윤회되는, 이렇게 이러한 윤회를 설명하면 무엇이 문제가 되는지 정말 모르겠습니다.”(76 페이지)란 말씀을 보라. 사실 불교도가 아닌 나에게도 12 연기는 윤회를 실체로 상정하는 힌두교의 가르침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반면 이것이 있으니까 저것이 있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도 멸한다는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을 주지(主旨)로 하는 연기(緣起)는 초기불교의 가르침(붓다의 원음)이 담긴 핵심 사안이다. 이는 성법 스님의 근본 취지이기도 하다.

스님에 의하면 연기는 마음과 물질이 상호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에 있는 것을 말한다. 물론 스님은 인과(因果)에는 선인선과, 악인악과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스님은 오직 식(識)만이 있고 밖의 경계인 물질은 없다는 세친의 유식무경(唯識無境)도 인정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스님은 한국 불교가 붓다의 핵심 가르침인 연기는 망각하고 오직 신앙을 강조하는 종교로 퇴락했다고 비판하신다. 그러나 불교에도 신앙이 있다는 것이 스님의 가르침이다. 그 신앙이란 연기의 진리에 나 자신도 한 축을 담당하는 법계의 일원이라는 믿음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한국 불교는 자신의 의사나 행위와 무관하게 일어난 결과까지도 자신의 업(業)에 의한 것이라고 가르친다. 이럴 경우 업은 기독교의 원죄(原罪)와 다를 바 없게 된다. 스님은 업은 내가 도저히 어쩔 수 없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신다. 스님은 살아 있는 나도 고정된 정체성이 없는데 죽은 내가 정체성이 있을 리 없다며 영혼과 윤회를 부정하신다. 스님이 인용한 정세근 교수의 ‘윤회와 반윤회’가 말하듯 영혼과 윤회를 말하고 가르치는 불교는 자이나교와 다름이 없는 종교다.

스님은 불멸(佛滅) 후 400년 경에 있었던 4차 결집(結集) 이후 단 한 차례도 사상 점검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결집과 유사한 것도 없었음을 지적하며 제 5차 결집을 제안하신다.(스님은 경전 전산화 불사를 제 5차 결집의 시작에 해당한다고 말씀하신다.) 불법(佛法) 역시 무상(無常)의 진리(모든 것은 무상하다는 가르침)에 해당한다는 스님의 말씀 역시 파격적이다. 물론 모든 세부 사항에서까지 그 분들의 문제의식이 같지는 않지만 스님과 문제의식을 같이 하는 분들도 꽤 있다. 학계에서는 ‘윤회와 반윤회’를 쓴 충북대학교 정세근 교수가 그렇고, 불교 수행자 가운데에서는 각묵 스님이 그렇다.

각묵 스님의 경우 금강경에 의거해 한국 불교의 힌두화를 집중 거론한 분으로 유명하다. 금강경은 조계종의 소의경전(所依經典)이지만 무주상(無住相) 보시를 강조한 경전으로 잘못 알려져 있다.(소의 경전이란 기본적으로 의거하는 텍스트라는 의미이다.) 각묵 스님은 금강경의 메시지를 ‘산냐(sanna)’ 한문 경전의 용어로는 ‘상(相)‘을 극복할 것을 강조한 경전으로 설명하신다. 극복할 것은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修者相) 등 네 가지 상이다. 각묵 스님에 의하면 금강경의 문맥을 잘 살펴보면 보시 바라밀은 불자들이 가져서는 안 되는 산냐(인식, 관념, 개념)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금강경 결제 논주 각묵 스님 인터뷰 ‘금강경 제대로 읽어야 외도적 발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참조)

금강경에는 붓다는 수보리에게 중생이라는 산냐, 자아(自我)라는 산냐, 영혼이라는 산냐, 개아(個我)라는 산냐가 생긴 자는 보살(菩薩: 구도자)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말씀이 나온다.(본문과 관련해 내가 참조한 금강경 해설서는 각묵 스님의 ‘금강경 역해’와, 감산(憨山: 1546 - 1632)이 번역하고 오진탁 교수가 해설한 ‘감산의 금강경 풀이‘ 등이다. 전자는 65 페이지, 후자는 33 페이지에 산냐(상)가 생긴 자는 보살이 아니라는 말씀이 나온다.)

금강경은 대승불교 경전群들 가운데서 가장 초기불교적인 향기가 많이 풍기는 경이라고 말씀하시는 각묵 스님의 ’금강경 역해‘는 산스크리트 원문을 철저히 분석한 뒤 구마라집역본과 현장역본을 대조하고, 번역, 대역, 주해(註解) 등의 지난한 과정을 거친 책이다. 흥미로운 것은 “공(空) 사상이 설파되고 있지만, 경전의 어디에도 공이라는 용어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한 필자의 글이다. 이 필자는 이 사실을 지적하며 공을 공이라 하면 이미 공이 아니라는 ’노자‘의 지취(旨趣)를, 공적(空寂)하게 보이려는(드러내려는) 것일까?“란 말을 한다.(김영민 교수 지음 ’보행‘ 18 페이지)

김영민 교수는 공(空)은 무(無)가 아니라 모든 현상이 상호연계된 상태에서 끊임없이 운동, 변화하는 존재의 성격이라는 말을 인용하지만 공을 가르친 금강경에 공이란 단어가 없는 것은 산스크리트어를 중국어로 바꾸는 당시로서는 전혀 새로운 공(空)이라는 개념을 표현할 단어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빚어진 일일 뿐이다.(’생각의 끝에도 머물지 말라‘ 70 페이지) 각묵 스님은 부처님이 금강경에서 무아(無我) 또는 공(空)을 가르치셨는데 대아(大我), 진아(眞我) 등을 내세워 그것에 몰입하는 것은 힌두교적 발상의 외도선(外道禪)이 되어가는 것이라 비판하신다.(금강경 결제 논주 각묵 스님 인터뷰 ‘금강경 제대로 읽어야 외도적 발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참조)

각묵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만일 반야를 세우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을 반야바라밀이라 한다면 이처럼 반야를 따로 존재하는 무엇으로 세우는 것이야말로 척파되어야 할 산냐 중의 산냐 아니겠습니까? 증도가는 환여피익이투화(換如避溺而投火) 즉 물에 빠지는 것을 피해 불로 뛰어든다고 했습니다. 물에서 나오면 그만이지 다시 불로 뛰어들면 죽기는 마찬가지 아닙니까?“ 산냐를 척파하면 되지 따로 반야를 설정하는 것은 물을 피해 불로 뛰어드는 꼴이 아니고 무엇인가, 란 말씀이다. 각묵 스님은 산냐의 척파가 반야의 실천이라 말씀하신다.(참고로 말하자면 척파라는 말은 국어사전에 없는 말이다. 추측하건대 척파는 척결(剔抉)의 척(剔: 뼈 바를 척)과 논파(論罷)의 파(罷)를 결합한 척파(剔罷)이거나 척결(剔抉)의 척(剔)과 격파(擊破)의 파(破)를 결합한 척파(剔破)가 아닐까 싶다.

지난 2002년 홍제동 수미정사에서 열린 10주 일정의 아미담마 강의를 통해 직접 말씀을 들을 때 스님의 배대라는 말씀에 낯설어 했던 기억이 어제인 듯 생생하다. 역시 국어 사전에는 없는 배대라는 말은 배配와 대對의 결합어가 아닌가 싶다. 배정과 대응의 개념을 아우른 말로 보인다. 언제 다시 그 분을 뵐 수 있을까?)

서유럽의 불교학자들은 고다마 싯다르타의 삶을 위대한 포기라 표현하지만 포기라는 말은 싯다르타의 욕망과 기득권을 포기한 소극적 의미를 담는 데에 그친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붓다의 삶은 위대한 도전이라는 말로 수식되어야 한다. 붓다는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사장인 브라만을 신성시하고 피지배 종족들을 영원히 굴복시키기 위해 업과 윤회를 무기로 네 가지 차별적 계급제도를 강제한 아리안들의 제도와 사상을 송두리째 뽑아버리려 했던 분이다. 고행으로는 깨달음에 이를 수 없음을 명확히 한 붓다의 면모 역시 중요하지만 붓다의 위의(威儀)는 위대한 도전이라는 말로 여실하게 드러난다.

아리안들은 출생 역시 계급별로 신체의 각기 다른 곳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상을 설파했다. 제사장인 브라만들은 머리에서, 무사 계급인 크샤트리야는 옆구리에서, 평민인 바이샤는 허벅지에서, 천민인 노예인 수드라는 발가락 사이에서 각각 태어난다는 것이다. 붓다 역시 마야부인의 옆구리에서 태어난 것으로 경전은 전한다. 붓다는 크사트리야 계급이었다. 아리안족은 기원전 2천년 경 현재의 중앙 아시아 카자흐스탄 남쪽에 위치했던 한 종족으로 우월한 기동성과 호전성 등을 무기로 페르시아를 거쳐 남진해 인더스 문명과 마주친 세력이다. 이들은 다수의 토착민들을 평민 이하로 지배했다. 윤회와 업 등은 이 지배 과정의 산물이다.

‘생각의 끝에도 머물지 말라’를 읽는 것은 초기 불교의 가르침(붓다의 원음)을 배우고 느낄 수 있는 기회이다. 도를 정복한 이, 도를 말하는 이, 도에 사는 이, 도를 더럽히는 이를 말씀하신 붓다는 원음의 순수함을 느끼게 한다. 도를 정복한 이는 의혹을 넘어서고 번뇌를 떠나 열반을 즐기며 탐욕을 버리고 신들을 포함한 세계를 이끄는 사람이며, 도를 말하는 이는 이 세상에서 최상의 것을 가장 최상의 것으로 알고, 법을 설하고 판별하는 사람, 의심을 버리고 동요하지 않는 사람이며, 도에 사는 이는 잘 설해진 가르침에 의지해 살며 스스로 자제하고 허물없는 삶을 사는 수행자들이며, 도를 더럽히는 이는 맹세한 계율을 잘 지키는 체하지만 고집 세고 가문을 더럽히며 오만하고 거짓이 있으며 자제함이 없고 말이 많고 그러면서도 잘난 체하는 사람이다.

스님은 부파불교에서 대승불교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듯 대승 불교 흥기 후 무려 2,000년 이상이 지난 지금 불교가 또 한 번의 사상적 진화를 이루어 내지 않으면 후대 언젠가는 붓다의 가르침을 전설로 받아들일지도 모른다는 절박한 심정을 토로하신다.(146 페이지) 스님 역시 금강경을 언급하신다. ”불법을 한 마디도 설한 바 없고, 한 중생도 구제한 바 없다.“는 부정을 통해 금강경 자체를 초월적 믿음의 단계로 승화시킨 붓다에 대한 언급이다. 각묵 스님이 금강경을 대승불교 경전群들 가운데서 가장 초기불교적인 향기가 많이 풍기는 경이라고 말씀하셨듯 스님은 금강경을 붓다의 진심이 가장 잘 담긴 가르침이자 신앙성이 거의 배제된 경전이라 말씀하신다.(153 페이지)

만약 형상으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서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 것이니 능히 여래를 볼 수 없다(약이색견아若以色見我 이음성구아以音聲求我 시인행사도是人行邪道 불능견여래不能見如來) 같은 가르침으로 모양 있는 것으로서의 공덕은 일체 인정하지 않는 금강경은, 법화경이 있는 곳에 탑을 쌓아 온갖 꽃과 향과 영락과 비단 등으로 장식하고 예배하고 공양하라는 불멸 이후의 대승경전인 법화경(154 페이지)과 너무 다르다. 아니 법화경이 금강경과 너무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이다.

스님은 방편을 쓴 법화경에 의해 일어나는 신앙이 금강경의 깨달음에 대한 믿음으로 전환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는 말씀을 하신다. 중관 불교와 유식 불교의 비교도 흥미롭게 다가온다. 스님에 의하면 세친(世親)이 유식학에서 말한 아뢰야식 연기가 붓다께서 깨달으신 연기에 부합이 된다면 후대에 더 깊은 식(識)인 8, 9, 10, 11 식까지 고려해야 할 까닭이 없다. 붓다의 사상을 후대에 보충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 불교는 수행의 목적지는 중관(中觀)의 공(空)인데 방법론은 유식을 들어 설명하는 모순에 빠져 있다.(163 페이지)

스님의 설명을 듣다 보면 유식 불교가 말하는 근본 마음인 제 8식인 아뢰야식이라는 근본 마음은 대아, 진아 등의 논의에서 지적된 무아와 배치되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는 점을 알게 된다. 스님은 조계종을 대승이라 칭하고 남방불교를 소승이라 폄하하는 한국 불교가 구족계를 제대로 받은 스님이 없어 지난 1973년 비구로서 상좌부 율맥을 이어온 태국의 스님들을 모셔와 구족계를 수계한 사실을 언급하신다.(불교평론 44호: 2010년 가을호 마성 스님 글 참조)

스님은 불교의 살 길은 양자역학, 불확정성 원리, 유전공학, 뇌과학 등 최신 과학의 성과를 적극 수용해 불법을 정교하게 이론화하는 데에 있다고 가르치신다. 진화론을 믿지 육도윤회를 믿지 않는다는 스님은 붓다는 업과 윤회에서 떠나야 하고 오로지 연기만이 진리라고 누누이 말씀했지만 당시 사성계급제와 더불어 거의 일상화된 업과 윤회라는 단어를 전혀 쓰지 않고는 윤회를 설명할 수 없었을 것이라 말씀하며 하지만 붓다께서 사용한 업이라는 용어는 브라만들이 사성제 계급을 유지하기 위해 악용했던 의미가 아니라 이미 벌어진 결과로 인간의 힘으로는 역전시킬 수 없는, 당연히 수용해야 하는 것을 뜻한다고 설명하신다.(230 페이지)

스님은 윤회 또한 성주괴공(成住壞空)의 우주적 윤회라 해석하면 업과 더불어 어떻게 윤회하느냐는 본원적 질문에 고민할 이유도 없게 된다고 가르치신다.(230, 231 페이지) 그렇다면 불교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 스님이 말씀하셨듯 사실과 현상을 망상과 집착 없이 있는 그대로 보는 힘을 기르게 하는 것이다. 스님은 한국의 사찰들이 지금부터라도 승가의 이익이 아닌,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곳이라는 의미의 불교 최초의 사찰인 기수급고독원(祈樹給孤獨園)의 본래 취지에 맞게 모든 양극화 해소에 앞장서길 서원(243 페이지)하신다.

화를 잘 내신다고 자신을 드러내신 스님은 절의 주지임에도 인터넷 전법에 전념하며 입시기도나 천도재 등 일체의 기복 행위를 하지 않고 10여 년을 그렇게 순수 보시에만 의존하다 보니 어느 날부터 절 살림이 난감해지는 사태를 겪으면서도 붓다 흉내 내기 삶을 바꾸려 하지 않는 당신이 스스로 야속할 때가 있다고 고백하신다.(265 페이지) 불교 신자들의 돈이 출세와 성공, 안락을 위한 조건부로서 입시기도 하고 천도재 하는 절로 몰리는 현실이 안타깝다.

스님은 임사체험도 죽음을 맞기 전 뇌에 산소 공급이 중단되어 그 농도가 아주 미약해지면 뇌세포들이 에러를 내는 것이라는 과학 실험 결과를 소개하신다.(272 페이지)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너희 구성원은 4부대중이 아닌 4부계급제로구나, 총무원 직책과 본사 주지는 바라문, 말사 주지는 왕족, 일반 출가자는 평민, 재가신도는 천민 아니냐“라고, 도박하고 술집 드나들고 폭력이 난무하는 한국 승가에 ”데바닷다가 교단을 혼란케 하고, 야사로 인해 교단이 분열되었지만 지금의 너희들은 나보다 그들을 스승으로 삼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말씀을 하실 것이라는 말씀이 불교도도 아닌 나에게까지 아프게 다가온다.

스님이 제기한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시리즈는 35 개에 이른다. 핵심적인 것만 간추려졌을 것이다... 뼈아픈 반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