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30

Chang-Seong Hong 사라 보살 Bodhisattva Sar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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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g-Seong Hong
3icet1 SSapAonstugusistsort roesSat 13dSa:r0ogh3 ·
사라 보살 Bodhisattva Sarah

5년 전에 반쯤 쓰다 만 에세이인데, 그냥 버릴까 하다가 날짜만 바꾸어서 페북에 공개하기로 했다. 우리와의 인연으로 내가 'Sarah 보살'이라고 부르게 된 한 젊은 미국여성과 우리 가족 이야기다. 밑의 사진들은 11년 전 사라의 결혼식에서 찍은 것들이다. 써 놓고 다듬지 않아 글이 거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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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 사라(Sarah)보살로부터 배운 부지런함의 의미

나는 1970년대에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그리고 80년대에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을 다녔다. 거의 20년 동안 매일같이 신문과 방송에서 한국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부지런한 사람들이라는 소리를 읽고 들었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의건 타의건 일요일도 없이 휴가도 반납하고 일 년 내내 일하고 또 일했다. 소위 말하는 고도 성장기였다. 나도 한국인들이 정말 세계에서 가장 부지런한 민족일 것이라고 믿었다. 

유학길에 올라 피상적으로 가끔 접촉한 대학 밖의 보통 영국인들과 또 미국 동부지역 사람들과의 경험은 이 믿음을 흔들지 못했다. 내가 그들과 일상을 함께 겪으면서 생활할 기회 없이 교수와 대학원생들과만 접촉하고 살았던 이유도 있겠다. 그러나 미네소타에 교직을 얻어 이사 온 다음 당시 대학원생이었던 아내가 쌍둥이를 출산하면서 보통 미국인들과 본격적으로 접촉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의 경험들이 내가 가졌던 믿음을 완전히 버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 결론부터 짧게 말하자면, 우리 한국인들은 생각만큼 부지런하지 않았다

당시 나는 테뉴어(종신교수) 심사를 앞둔 조교수여서 바빴고, 30대 후반에 쌍둥이를 출산한 엄마는 휴학상태인 대학원생이었다. 수입이 빠듯했다. 또 일가친척 한 명도 없이 인구의 97%가 백인인 도시에 살다보니 ‘의지할 곳’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아이들이 7개월이 되었을 때 내가 재직한 대학 여러 곳에 베이비시터 광고를 냈다. 며칠 후 푸른 눈의 날씬한 만 20세 사라(Sarah)라는 금발 여학생이 찾아와 자신도 쌍둥이 남동생들이 있다며 쌍둥이를 돌보는 일을 맡고 싶다고 했다. 얼마를 지불하면 좋을지 몰라 현재 직장에서 받는 돈보다 조금 더 주겠다고 했다. 최저 임금보다 조금 많은 액수였지만, 이 여대생은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리고는 첫 날부터 상상을 초월하게 아이들을 지극 정성으로 돌보았다. 

일단 아이들을 첫 눈에 정신이 아찔할 정도로 좋아했고, 곧 자기는 아이들을 최소한 넷은 낳을 것이라고 떠들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셋을 낳았다.^^) 사라는 합쳐서 3년 가까이 우리 아이들을 돌보았는데, 언제나 일할 시간보다 15분 먼저 도착했고, 단 한 번도 온다는 날 안 온 적이 없으며, 한 번도 1분이라도 시간을 채우지 않고 간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어떤 일을 두 번 지시할 필요가 없었고, 단 한 번도 우리의 부탁을 거절한 적이 없다. 일하는 시간 동안은 단 한 번도 전화를 받거나 걸지 않았고, 우리가 건네지 않는 한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 언제나 밝게 웃었고, 단 한 번도 피로한 기색을 보인 적이 없었다. 어떤 날에는 8시간이나 아이들을 돌보았는데, 8시간 내내 아이들과 신나게 시끄럽게 노느라고 나와 아내가 공부를 못할 지경이었다. 

독감에 걸리면 아이들에게 옮길까봐 맞지 않던 독감예방주사도 맞기 시작했고, 아이들 건강하라고 침이 묻었을지 모른다고 매일같이 모든 장난감을 광이 날 정도로 닦았다. 아이들 낮잠 잘 시간에는 우리가 지쳐서 못한 방 청소와 빨래도 해 주었다. 베이비시터의 일은 아니었지만 힘들어하는 우리를 보고는 추가보수 없이도 기꺼이 여러 일을 도와주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우리 일 이전에는 어느 큰 호텔 프론트 리셉션에서 일했는데, 일주일에 이틀씩 하루 8시간 동안 앉지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18개월을 일했다고 했다, 최저 임금부터 시작하면서. 그러면 그렇다고 이 학생이 일에 지쳐 공부는 대충 했을까? 그렇지 않다.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그러나 실제로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은 그 이후에 생겼다. 

우리를 위해 1년 일했을 때 나는 테뉴어 심사를 통과했고 아이들 엄마는 대학원에 복학하게 되었다. 나는 2년간 휴직을 하고 아이들을 키우고 엄마를 지원하기 위해 미네소타에서 1,500마일 떨어진 노스캐롤라이나로 함께 내려갔다. 풍토가 많이 다른 곳에서 대학원생 아내를 지원하며 18개월짜리 쌍둥이를 키웠던 첫 1년은 무척 힘들었다. 그래서 당시 대학 졸업 예정이던 사라에게 우리와 함께 노스캐롤라이나로 내려와 1년 동안 아이들을 돌봐 주겠냐고 제의했다. 그러고는 가족들과 상의하며 결정하라고 두 달 동안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대학을 최우등으로 졸업한 사람에게 아이들 보모(nanny)일로 타향으로 가자고 제의하기가 참으로 미안하고 양심에 걸렸지만, 우리는 너무 힘들어서 어쩔 수 없었다. 

두 달이 지난 후 사라는 졸업하자마자 우리를 따라 내려오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는 그 약속을 지켰다. 그뿐만이 아니라 지금의 남편이고 당시에는 남자친구였던 데이브까지 함께 데리고 갔다. 둘이 일가친척 모두를 떠나 사라가 한국에서 온 교수의 쌍둥이 아이들을 돌보아 주겠다며 둘이 각자의 차에 이삿짐을 가득 실고 1,500마일을 운전해 우리를 도우려 내려왔다. 최소한의 보수밖에 못 주었는데도 그리했다. 

우리 가족은 이렇게 복이 많았다. 사라가 우리 아이들을 일 주일에 40시간씩 돌보아 주는 동안 아이들 엄마는 대학원 모든 수업을 이수하고 시험들을 성공적으로 통과했으며 나는 처음으로 불교철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아직 한 번도 직접 말해 준 적은 없지만, 이런 이유들로 내가 사라를 우리들의 보살이라고 부른다. 이 모든 고마운 일들을 사라가 만 20세에서 22세 사이에 우리에게 해 주었다. 세상에는 이렇게 어린, 푸른 눈의 금발 백인 보살도 있는가 보다. 

우리는 2005년 5월 말에 노스캐롤라이나를 떠나 미네소타로 돌아왔지만, 사라와 데이브는 그곳에 남아 곧 좋은 직장에 다니게 되었고 데이브는 직장에서 보내주어 경영학 석사까지 받았다. 그러고는 2010년에 다시 미네소타와 접경한 그들의 고향으로 멋진 직장들을 잡아 금의환향했다. 지금은 둘 다 30대 중반인데, 벌써 집을 몇 채 가지고 있고 아들 하나 딸 둘을 낳아 잘 살고 있다. 그리고 만날 때마다 자기들의 모든 성공이 우리가 노스캐롤라이나로 데려가 주어 더 넓은 세상에서 좋은 직장부터 시작할 기회를 주어서였다면서 우리에게 감사한다. 그러나 실은 우리는 대학을 갓 졸업한 아주 유능하고 건실한 청춘남녀를 보잘 것 없는 보수를 약속하며 이역만리 노스캐롤라이나로 데려가 혹시 이들의 미래를 망치게 하는 것이 아닐까 오랫동안 걱정했었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빈말을 하지 않는다. 사라와 데이브의 결혼식에서 양가의 모든 친척이 우리를 무슨 유명 인사 대하듯 반겨주고 환대해 준 것으로부터 이 두 사람이 실제로 우리와의 인연을 감사해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실은 그래서 더 미안했다. 우리가 우리의 목적을 위해 사라에게 부탁한 것이었고, 자신들의 성공은 스스로 건실하고 유능해서 가능했던 것인데, 오히려 우리에게 감사하다니. 우리 부부는 그 이후로 그들이 이사를 하거나 아이를 출산할 때마다 축하한다며 오래 전에 주고 싶어도 형편이 안 되어서 못 주었던 ‘밀린’ 보수를 보너스까지 더해서 주었다. 물론 사라와 데이브는 좀 이해를 못했을 것이다. 서로 동의한 내용으로 계약을 했고 우리가 그 계약을 모두 이행했는데, 거의 10년 가까이 되어서 예상치 못한 돈을 더 받는다는 것은 전혀 미국식이 아니니까. 그러나 우리는 한국에서 나고 자란 불자니까 우리의 도리를 다해야 했다. 

독일계 미국인 어머니의 정직함과 성실함 그리고 노르웨이계 미국인 아버지의 순수하고 깊은 정을 모두 가진 사라보살과의 인연 이후 나는 부지런함과 성실함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새로 생각하게 되었다. 막스 베버가 말했던 서구 자본주의의 근원이라는 프로테스탄트의 직업윤리라는 것이 어떤 것임을 철저히 경험했기 때문이다. 교회에 나가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사라는 루터교 계통의 개신교도였는데, 20대 초반의 사라가 보여 준 직업윤리는 나의 상상을 초월했다. 자신의 직업을 신이 준 소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독일지역과 스칸디나비아의 개신교도들이었는데, 이들이 이주해서 사는 미국 중서부 북부에는 지금까지도 그 문화가 생생히 살아있다. 흉볼 것 많은 미국이지만, 배울 것 많은 사람들이 어디에나 있기 때문에 아직도 미국이 그럭저럭 굴러간다. 

(부지런함의 의미에 대해 글을 더해서 에세이를 완성했어야 했는데, 다른 바쁜 일에 치여 그러지 못하고 말았다.)




137정승국, Chung Hyun Kyung and 135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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