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21

希修 불교의 우주론

 希修 < 불교의 우주론 >

  1. 스님들 공동체에서의 규율은 율장
  2. 사람들의 질문에 부처님이 대답하신 기록은 경장/경전
  3. 그리고 경전의 내용들을 주제별로 분류하여 종합적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스님들의 주석을 덧붙여 보완한 것이 논장(아비담마)입니다.

 (아비담마에 대해서는, 부처님께서 수제자인 사리풋타에게 직접 가르치신 내용을 기록한 것이라는 하나의 설과, 부처님의 제자들 스스로 정리, 분석한 것이라는 두 가지의 설이 있습니다. 어느 쪽이 진실이든, 경전이 주된 교재이고 아비담마는 참고서로만 활용하면 될 것 같습니다.) 

암튼 이 도표는 경전을 바탕으로 하여 아비담마에서 분류한 윤회계인데, 그냥 재미로 보시라고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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希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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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겹 매트릭스 >

(1) 보통은 불교라는 단어를 들으면 '자비'를 가장 먼저 떠올리지만, 

  • 초기불교에서 '자비'는 업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 달린 것이며, 
  • '선행'이나 '사랑'이라는 의미로 흔히 오해!하는 '자비'는 우리를 해탈시켜 주지 못 함. 
  • 탐과 진도 어리석음/치에서 기인하고 해탈 직전의 최후/최고 차원에까지 남아 있는 것 역시 어리석음과 들뜸. 
  • 그렇기에 해탈은 궁극적으로 '지혜'의 계발에 달려 있음. 

(2) '지혜'의 정확한 의미는, 흔히 생각하듯 '보고도 못 본 척, 알아도 모르는 척, 이길 수 있지만 져 주는' 그런 condescending한 처세술이 아니라, '탐진치 없는 분별력/통찰력'을 뜻함. '생각 없음'이 미덕이 아니고 무조건 '긍정적'으로만 생각하는 것도 미혹/망상/게으름이며, '해로운 마음부수'에 물들지 않은 생각/사유인가?가 중요한 것. (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942321206139963&set=a.906304756408275&type=3&theater)

(3) 모든 존재가 각자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인한 최대 '피해자'가 되며 그 누구도 자기 업의 결과를 비껴갈 수 없다는 이 사실에 대한 철저한 인식이 바로 세상 모든 존재들에 대한 '자비'의 근원. Compassion이라는 것은 환자를 대하는 의사의 마음과도 같다고 틱낫한스님은 말씀하셨는데, 상대의 어리석음=병균을 어리석음=병균이라 보아야 상대의 질병=고통에 도움을 줄 수 있지, 상대의 어리석음을 부인/합리화해 주는 人情은 '자비'가 아님. 아기 잃은 젊은 어머니가 울며 석가모니 부처님을 찾아왔을 때 부처님이 하신 일은, 아기를 살려 주거나 함께 울어 주거나 그 여인을 따뜻하게 위로해 준 것이 아니라, "마을에 내려가 일가친척 아무도 죽은 적 없는 집에서 겨자씨를 얻어 오라"고 말한 것.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 할 것을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도 해탈 후 돌아가실 때까지 무려 45년간 온갖 오해와 모욕 속에서도 끊임없이 가르침을 펼친 것. 이런 것이 바로 부처님의 '자비'. 

(4) 분별력/통찰력 없이 마음이 무디고 게으른 데에서 기인하는 '좋은 게 좋은 거' 식의 평정심/人情은 불교에선 오히려 '악'. (불교에서 '선'/'악' 개념은 해탈에 도움이 되는가?, 즉 지혜가 그 기준.) 살면서 지은 과보는 현생에서든 내생에서든 받게 되지만, 어느 차원/세상으로 윤회하느냐는 죽을 때의 의식상태가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데, '분별력/통찰력 없는 평온'은 惡處로의 윤회를 이끈다고. 숨거두는 순간까지 욕심/집착이나 증오/원한을 마음에 품고서 죽는 것이 물론 최악이고, 생전에 지혜를 안 닦아 정신이 흐린 상태로 '평온'하게 죽는 것도 악처로 윤회한다고. (실제로 대부분의 인간이 다음 번에 축생으로 태어난다 함.) 분별력/통찰력이 남아 있을 때 선정에 들어 그 상태에서 죽거나, '내 몸 = 나'라는 집착을 놓고서 몸의 감각이 사라지고 숨이 끊어져 가는 것을 관찰/관조하면서 눈감으면 이상적. (평소 수행 안 했는데 임종 닥쳐 갑자기 이게 될 리는 물론 만무.) 그러므로 임종이 가까운 환자 곁에서 울거나 소란/심란하게 하면 안 된다고. 

(5) '축생'하면 우린 보통 포유류나 조류만 생각하지만, 글자 그대로 모든 형태/종류의 생명체를 전부 합해야.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 얼마나 드물고 귀한 기회인지 알 수 있음.

(6) 의식은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에 묶이지 않기에, 인간으로 살면서도 선정 (정신의 집중으로 인한 고요함. 분별력/통찰력 계발의 조건)을 통해 다른 차원을 경험할 수 있다고. 다만, 자신의 근기를 실제로 극복하고서 한 차원 상승하여 윤회하기는 단순 '경험'보다 훨씬 어려우며, 해탈은 궁극적으로 선정 아닌 지혜에 달려 있음. 어쩌면 저 31개 차원들이 물리적으로 서로 동떨어진 공간에 존재하다기보다 라디오 주파수들처럼 겹쳐서 존재하는데 인간의 감각+의식으로는 다른 차원을 감지 못 하는 것일 뿐인지도. 똑같이 인간계에 살아도 보다 높은 수준의 의식을 유지하며 사는 사람이 '우월'하고, 낮은 의식 수준의 생명을 죽이는 죄보다 높은 의식 수준의 생명을 죽이는 죄가 더 무거움.  

(7) 눈에 보이는 인간/동물 이외의 존재들을 무조건 神/靈이라고 우린 부르지만, 어느 특정 神/靈이 저 많은 차원들 중 대체 어느 차원의 존재인지 그 누구도 알 방법이 없음. 어떤 무당/종교가 말하는 神/靈이 실은 인간보다도 저열한 존재인 아수라/아귀일 수도 있는 것이고, 인간보다는 좀 '우월한' 존재라 해도 여전히 인간처럼 감각적 욕망의 노예일 뿐인 그런 '허영 덩어리'의 神/靈일 수도 있는 것. 그러니, 神/靈과 소통할 수 있는 靈媒 (medium,  channeler)라고 해서 평범한 인간보다 '영적으로 우월한' 존재도 아니고, 그런 '능력'이나 神/靈 숭배가 지혜/해탈에 도움이 되는 것도 전혀 아님. 소위 말하는 영적 체험과 신통력은 선정의 side effect ('지혜'의 side effect도 아닌 '선정'의 side effect)이며 전생과 관련있을 뿐 지혜 자체와는 무관하니, 영적 체험이나 신통력에 아무 의미도 두지 말 것을 아비담마는 강조. ('영성'이라는 것에 대해 신비주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으면, 잔재주로 사람 현혹하는 사이비에 넘어가거나 주화입마 걸리기 십상.)  

(8) 암튼 초기불교에 의하면, 내게 잘못한 이를 내가 용서해 준다고 해서 그가 그 악업으로부터 해방되는 것도 아니고 제사를 지내 준다고 해서 좋은 곳으로 윤회하는 것도 아니며, 업과 윤회에 영향을 끼치지 못 함. 그러니 각자 자기 수행에 집중하라고, 수행보다 더 큰 '선업'은 없다고 초기불교는 가르침. 무려 부처님조차 타인을 구해 줄 수 없다고, 당신을 구원하는 건 오로지 당신 자신의 수행뿐이라 하셨음. 

(9) 중국 도교에만 있는 줄 알았던 龍이 불교에도 나오니 재밌는데, #5 인간계 바로 위 #6 매트릭스인 사대왕천 신들이 龍을 지배한다고. (기공하시는 분들은 용을 키우네 뭐네 이런 말들을 실제로 하심. 그땐 뭔소린가 했었음.) 또 어떤 분 말씀으로는 陰陽 원리는 욕계에서만 작용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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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세계를 떠돌아 다닌다는 윤회설은 방편설일 뿐 부처님 스스로도 윤회를 믿지는 않으셨다"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가끔 계신데.. 

이 영상의 전반부에서 보디 스님이 반박하고 계십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slkV6PJDCBk

타니사로 스님은 아예 책을 한 권 쓰셨구요,

"The Truth of Rebirth"

https://facebook.com/keepsurfinglife/albums/1174027482969333/

번역이나 해석에 있어 스님들 간에 약간씩 차이가 나는 부분이 물론 초기불교에도 있지만, 윤회는 초기불교에선 논쟁거리조차 못 됩니다. "너의 현재를 보면 너의 과거도 미래도 알 수 있으니 그런 걱정하지 말고 현재의 네 자신이나 들여다 봐라"라는 등의 구절들을 '윤회 방편설'의 '근거'로 내세우는 분들이 계신데.. 

그건 질문자가 '무엇이 윤회하는가?', '영혼이 있는가?', '나라는 존재의 본질이 무엇인가?' 등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하신 말씀일 뿐 윤회 자체를 부정하셔서가 아니었습니다. 부처님은 개인도 우주도 '과정'으로 파악할 뿐 '대상'/'객체'로 파악하지 말고 이런 생각 자체를 말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저런 류의 질문에 대해서는 대답도 않으셨죠. 그런 '본질'에 대한 문제보다, 당장 발등의 불과도 같은 '苦의 해결'에나 집중하라는 뜻이었습니다. 브라만교가 '본질'로 내세우는 브라만/아트만 개념을 부정하기 위해서, "만물에 공통된, 영원불변하는 본질이라는 것은 없다"는 의미의 空을 말씀하셨을 뿐인데, 이게 대승불교에서는 현재 임시적으로 존재하는 아무개라는 개인의 육체/생각/감정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모든 걸 무조건 부정하는 허무주의 식으로 오해되기도 했구요. 육체/생각/감정도  조건이 지속하는 동안은 한시적으로 존재하며 12연기의 지배를 받을 뿐인데 말입니다. 한편으로는 空 ("만물에 본질은 없다")을 말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론 佛性 ("만물의 본질은 불성이다", "참/진짜 나", "이 뭣고?")을 논한다는 점이, 대승불교의 문제점들 중 하나이고, 또 '본질'을 추구하는 대승불교와 '본질'을 부정하는 초기불교는 아예 서로 다른 종교라고 제가 생각하는 이유들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암튼, 부처님이 해탈하실 때 3가지를 보셨습니다.

(1) 본인의 윤회. 수십만 번에 걸치는 윤회동안 어떤 생에서 어떤 음식을 먹었었는지까지 자세히.

(2) 인간들의 윤회 패턴. 어떤 행동을 하면 결과가 어떻게 되고 그 결과가 언제 찾아오고 등등.

(3) 심리적 윤회. 어떤 마음을 먹으면 그 결과로 내 생각이 어떻게 되고 어떤 경험이 찾아오고 등등.

그리고 2번과 3번을 관통하는 공통된 법칙을 찾으셨는데 그게 12연기입니다. 그러니까 2번은 12연기가 거시적 레벨 (생과 생 사이)에서 작용하는 것이고 3번은 미시적 레벨 (한 개인의 한 순간의 의식과 다음 순간의 의식 사이)에서 작용하는 것인 셈입니다. (이처럼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12연기인데, 대승불교에서는 수행도 화두니 공안이니 하는, 부처님은 언급조차 안 하신 것들을 중심으로 하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전생을 기억 못 하고, 바로 이전 생을 기억한다고 해도 겨우 두 생을 갖고서 12연기의 패턴을 보기에는 어차피 부족하지만, 자신의 의식/심리상태 사이의 변화는 누구나 관찰할 수 있는 문제이기에 불교는 3번의 설명에 가장 집중합니다. 어차피 3번과 2번의 원리는 동일하니까요. 하지만 누가 죽을 때마다 제자들이 부처님에게 그 사람은 어디로 윤회했느냐고 묻고 이에 대해 부처님이 대답하시거나, 어떤 행동은 이승에서 그 결과가 오고 어떤 행동은 다음 생에서 그 결과가 오며 또 어떤 행동은 몇 생 후에 결과가 온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은 얘기들이 초기경전에 줄줄이 나옵니다.

해석과 의견은 물론 각자의 자유이지만, 적어도 초기불교 안에서는 '윤회 방편설'은 논쟁거리도 되지 않는 것이 현실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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希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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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더 추가하자면, 윤회 방편설이 나온 배경 중 하나는 글자 그대로의 윤회가 무아 이론과 모순되게 보이는 측면이 있기 때문인 것 같은데, 실은 이조차도 무아를 너무 단순하게 이해한 데에서 기인하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타니사로 스님과 보디 스님을 공부하면서 제가 현재 이해하고 있는 무아와 윤회는 다음과 같습니다.

'무아와 윤회'

https://www.facebook.com/keepsurfinglife/posts/1150079848697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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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아와 윤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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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단계: 내 삶의 주체로서의 '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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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업에 의한 윤회를 전제한다. 이승의 모든 디테일들이 세세하게 다 예정되어 있다는 얘기는 물론 아니고, 건강, 적성, 부모 등 삶의 큰 윤곽을 결정하는 요소들을 타고나는 것. 그러나, 마치 어떤 방송국에서 TV 연속극 제작을 시작할 때는 대충의 플롯만 있고 스토리의 디테일은 시청자 반응을 보면서 전개해 가는 것처럼, 삶의 구체성은 매순간 자유의지로 내리는 선택 (생각, 말, 행동)과 노력에 의해 스스로 완성해 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물론 그 '삶의 윤곽' 자체가, 삶을 특정한 방향으로 흐르게끔 하는 모멘텀을 이미 갖고 있기는 하며, 그걸 바꾸는 게 쉽지도 않지만 불가능하지도 않다. (모멘텀을 바꾸지 못 한다는 전제 하에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바로 점성술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의 현재 생각/말/행동이 얼마나 'skillful' = 'wholesome'한가?, 즉 어떤 貪瞋痴가 얼마나 많이/적게 들어 있나?에 따라, 이것이 새로운 업으로서, 전생/과거 업과 상호작용을 계속하면서 나의 삶을 확정해 나간다. (삶에 '저항' 않고 '분별' 없이 무조건 '수용'하는 것이 '영성'이라고 착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그건 그야말로 '운명/팔자의 노예'로 살겠다는 얘기.)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자신의 쾌락/이익만 좇는 이기적인 사람은 내세에 고통스러운 곳으로 윤회하고, 바른 과정/방법을 통해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은 내세에 행복한 곳으로 윤회한다는 내용을 초기불교에서는 mundane right view라고 부른다. 암튼 이 삶의 '책임'( ≠'탓')은 오로지 '나'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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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단계: '나'에 집착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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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기독교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영원불변하는 그런 '영혼'을 불교에선 인정하지 않는다. One and the same 영혼이 옷을 갈아입듯 몸을 바꾸는 것이 힌두교의 윤회 (reincarnation)이고, 한 양초의 불로써 다른 양초에 불을 붙이듯 그렇게 불=업이 다음 양초=생으로 넘어간다고 보는 것이 불교의 윤회 (rebirth). 힌두교의 윤회와 다른 점은, 불교의 윤회에서는 이전 양초의 불과 이후 양초의 불이 같다고도 다르다고도 말하기가 애매하다는 것이다. 전생의 A가 남긴 업이 물질을 끌어 와 B라는 이승의 육체를 형성한다. 이 때, A의 업 덕분에(?) 몸을 받는 B는 A의 업도 상속받는다. (마치, 부모님의 사업체 상속시 채무도 함께 상속되는 것과도 비슷하다고 나는 이해한다.) 그리고 상속받은 업을 요리할 책임은 B에게 있고, 그 요리의 결과가, B의 미래 and/or B의 업을 상속할 내세의 C에게 영향을 미치는데, 어떤 업이 이승의 B 자신에게 결과를 가져오고 어떤 업이 내세의 C에게 갈지 알 수 없기에, B로서는 그저 요리에 최선을 다 할 밖에. 이것이 불교에서의 윤회이며, 해탈로써 정지시키지 않는 한, 이 과정은 영원히 무한히 반복된다. 겉모습으로만 A-B-C의 '세 사람'인 것이지 업은 그렇게 명확히 구분되지 않고, 한 생 안에서도 새로운 업에 의해 매 순간 계속 '만들어져 가는' B를 딱히 규정할 방법도 없다. 예를 들어, B가 사고로 팔 하나를 잃어도 심지어 식물인간이 되어도 그는 D나 E 아닌 여전히 B다. 이런 식으로 하나씩 살피다 보면, 'B'가 누구인지를 규정하는 근거로 삼을 만한 '본질적/필수적 부분/요소'를 단 한 가지도 확정할 수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 내용을 한 마디로 간단히 표현한 것이 바로 '無我'. (그런데 이걸 글자 그대로 "내가 없다"고 과잉 단순화하는 데에서 온갖 문제가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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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하지만 여기서 머무르면, 종교에 중독된 좀비 혹은 道士입네 하는 사이비가 된다. 어떤 사무라이가 적을 죽이면서 "오늘 내가 너의 목을 베는 것은 내 자신의 목을 베는 것과 같다. 모든 것이 하나일 뿐 너도 따로 없고 나도 따로 없는데, 누가 누구를 죽인다는 말인가? 선과 악조차 둘이 아니라 하나이거늘 무엇이 죄란 말인가?"라고 했다는 일화처럼. 온갖 비리와 탐욕에 절어 사는 스님들도 전부 이런 '논리'를 자기합리화로 악용하면서 선악, 피아의 이분법을 초월한 체한다. 그러나, 글자 그대로 '나'도 없고 '너'도 없다면, 모든 것이 완전히 空하다면, 내가 너를, 혹은 네가 나를 죽이면 안 되는 이유가 대체 무엇인지, 나는 의문이다. 그리고 이 딜레마는, 無我와 空의 해석에 매우 섬세해야 함을 시사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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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불교는 윤회와 무아를 말하는데, 내가 없다면 대체 무엇이 윤회한다는 말인가? 이 둘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가?"라며 많은 이들이 헷갈려 한다. (윤회 방편설이 등장한 이유 중 하나가 아닐런지.) 하지만 부처님은 "니 몸도 니 마음도 100% 통제 못 하면서 '나'라는 것에 집착하는 일에 어떤 의의가 있느냐? 몸/감정/생각 등을 '나'라고 동일시하여 집착하지 마라"면서 지나친 애착/집착을 경계하거나, "self라는 관점에서도 not-self라는 관점에서도, existence의 관점에서도 non-existence의 관점에서도 생각하지 마라"고 하셨을 뿐이다. 사실 부처님은 "'나'라는 것이 있습니까?", "무엇이 윤회하는 것입니까?" 등의 질문에 대답을 아예 거부하셨다. 또, "너의 현재를 보면 너의 과거도 미래도 알 수 있으니 그런 걱정하지 말고 현재의 네 자신이나 들여다 봐라"고도 하셨다. 하지만 이건, 질문자가 '무엇이 윤회하는가?', '영혼이 있는가?', '나라는 존재의 본질이 무엇인가?' 등의 형이상학적 문제에 촛점을 두었기 때문일 뿐, 윤회 자체를 부정하셔서가 아니었다. 부처님은 개인도 우주도 '과정'으로 파악할 뿐 '대상'/'객체'로 파악하지 말고 이런 생각 자체를 아예 말으라고 하셨다. 그런 '본질'에 대한 문제보다, 당장 발등의 불과도 같은 '苦의 해결'에나 집중하라는 메세지이며, "만물에 내재한, 영원불변하는 본질이라는 것은 없으니 무엇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뜻에서 空과 無我를 말씀하신 것. 그래서 타니사로 스님은 무아를 절대적 진리 아닌 'strategy'라고 표현하신다. 굳이 방편설로 꼽자면 무아야말로 방편설이라는 얘기. '윤회를 빼놓은 불교'라는 것은 '세모난 동그라미' 같은 말이다.
3. 3단계: Who 아닌 What에 촛점을 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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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그럼 self나 existence 말고 어떤 관점에서 생각해야 하느냐? '너', '나', 이렇게 패키지로서의 사람 (1단계에서의 주체)에 중점을 두지 말고, 그 패키지를 구성하는 요소인 낱낱의 생각/말/행동에 집중하라는 것. 다시 말해, who를 삭제한 채 what action (thought와 word 포함)인가?만 보고, 그 what을 cause-effect, skillful-unskillful 측면에서 impersonal하게 판단하라는 것. (물론 낱낱의 행동이 쌓여 패키지가 되는 것이니, 결과/포장보다 과정/내용에 집중하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을 듯.) 초기불교에서는 이런 시각을 transcendent right view라고 부른다. 또, 타인의 행동도 자신의 행동도 늘 주의깊게 관찰하여 서로 서로를 부지런히 비판해 주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그래야 분별력=지혜가 계발되고 발전할 수 있기에. (이런 impersonal한 노력이, 칸트의 '보편적 입법원리'와도 통하지 않나 싶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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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Who 아닌 what에만 집중하며 살면, 자존심, 체면, 열등감, 자괴감, 우월감 등으로 인한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도, '내로남불'도 대폭 줄어들 수 있다. 정치인들 여럿을 우리는 자살로 잃었다. 자신이 평생 쌓아 온 self-image가 한꺼번에 무너지는 것 같을 때, 지금 이 순간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 가장 skillful 혹은 wholesome 한지 오로지 이 하나만을 impersonal 하게 생각해라, 칭찬이나 비난 같은 이미지/我相의 문제에 휘둘리지 마라, '너', '나' 이런 패키지의 차원이 아닌 낱낱의 행동 차원에서 생각해라, 후회나 자책으로 괴로와하지 말고, 잘못을 인정하고 반복 않기 위해 노력하기로 결심하는 그 선택을 매 순간 갱신함으로써 자긍심을 쌓아라.. 부처님의 이런 말씀들을 누군가 그들에게 해 주었다면, 그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와 처벌을 감수하며, 더 나아지고자 노력하는, 그런 용기있고 책임있는 훌륭한 모델을 우린 볼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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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4단계: 모든 것을 초월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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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탈을 하려면, 八正道의 8요소 모두를 만랩으로 계발하고 균형을 이룬 후, 모든 생각과 관념과 노력을 놓아야 한다고 초기불교는 가르친다. 그리고 이 생각/관념에는 '나', '수행', '해탈' 등이 모두 포함된다. "相/想에 집착하지 마라", "모든 생각과 노력을 내려 놓아라" 등의 얘기가 전부 이런 의미이며, 이것을 초기불교에서는 final right view라고 부른다. 다만 중요한 건, 이런 '모든 것을 놓음'은 해탈 직전이나 가서 걱정할 일이라는 것. 윤회라는 강의 건너편에 도달했다면 배에서 내려야 하는 원리. 그러니, 강의 건너편에 도달도 못 했으면서 심오한 척하느라 4단계의 얘기를 주문처럼 읊조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integrity에 주의해야 하고, 2단계의 과잉단순화된 무아에 취해 있는 사람은 3단계의 skillful vs. unskillful 사고를 '수준 낮은 이분법'으로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영성에 관심있는 이들이 가장 빠지기 쉬운 함정도 바로 과잉단순화된 무아나 oneness/nonduality에 대한 집착인데, 초기불교는 이 oneness/nonduality마저 거쳐 가는 특정 단계에서의 명상 경험일 뿐 truth/reality는 아니라고 말한다.)
(1, 3, 4 단계는 초기불교에 이미 있는 것이고, 1단계에서 3단계로 넘어가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제가 2단계를 중간에 넣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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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윤회를 믿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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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이 해탈하실 때 3가지를 보셨다.
(a) 본인의 윤회. 수십만 번에 걸치는 윤회동안 어떤 생에서 어떤 음식을 먹었었는지까지 자세히.
(b) 인간들의 윤회 패턴. 어떤 행동을 하면 결과가 어떻게 되고 그 결과가 언제 찾아오고 등등.
(c) 심리적 윤회. 어떤 마음을 먹으면 그 결과로 내 생각이 어떻게 되고 어떤 경험이 찾아오고 등등.
그리고 b와 c를 관통하는 공통된 법칙을 찾으셨는데 그게 12연기이다. 그러니까 b는 12연기가 거시적 레벨 (생과 생 사이)에서 작용하는 것이고 c는 미시적 레벨 (한 개인의 한 순간의 의식과 다음 순간의 의식 사이)에서 작용하는 것인 셈. 윤회는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없지만 자기 마음의 변화는 직접 확인할 수 있고 어차피 미시적 차원에서의 원리와 거시적 차원에서의 원리는 동일하기에, 윤회가 믿기지 않는다면 안 믿어도 상관은 없다. 마음수행을 열심히 하다 보면, 윤회가 있을 경우 좋은 곳으로 윤회할 것이고, 설사 윤회가 없다 한들 이미 이승에서 마음수행의 효용을 보았다면 억울할 이유가 없으니. 하지만 누가 죽을 때마다 제자들이 부처님에게 그 사람은 어디로 윤회했느냐고 묻고 이에 대해 부처님이 대답하시거나, 어떤 행동은 이승에서 그 결과가 오고 어떤 행동은 다음 생에서 그 결과가 오며 또 어떤 행동은 몇 생 후에 결과가 온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은 얘기들이 초기경전에 줄줄이 나온다. 해석과 의견은 물론 각자의 자유이지만, 적어도 초기불교에서 윤회는 논쟁거리조차 되지 않는,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명백한 사실로 전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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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無我之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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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만 추가로 언급하고 맺으려고 한다. 예술 작품/활동에 푸욱 빠져 잠시나마 '나'를 완전히 망각할 때 '무아지경'이라는 표현을 쓰고, 이걸 바람직한 상태로 오해하기에 그래서 심지어는 섹스를 '수행'으로 삼는 '탄트라'라는 것도 생긴 것이지만, 이런 해석은 초기경전의 관점과는 전혀! 무관하다. 초기불교는 섹스, 도박, 권력, 쇼핑, 예술, 여행, 우정/사랑, 심지어 학문마저도 모두 '감각적 즐거움을 위한 feeding'이라 간주한다. 물론 도박보다는 예술이 건전하고 인간관계보다는 자연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이 건강하지만, 가장 이상적인 즐거움은 명상을 통해 자가발전하는 것이라고. 또, 예술이든 뭐든 그런 외부 자극에 distract되지 않기 위해 일상생활 중에도 늘상 "자신의 호흡에 대한 관조를 자기 마음/의식의 anchor로 삼으라"고 (바로 이것이 'centered'의 의미) 초기불교는 가르친다. 그러니 외부의 무언가에 빠져 잠시나마 자신을 망각/상실하는 의미의, 우리가 흔히 말하는 '무아'/'무아지경'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완전히 정반대의 방향을 가리키는 것. What an iro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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