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27

希修 사람을 비난하면 미움, 죄를 비난하면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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希修   사람을 비난하면 미움, 죄를 비난하면 이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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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도론』 (초기불교를 이어받은 상좌불교에서 명상을 가르치기 위해 저술한 책)에서는 사람의 성격적 특징에 따라 각기 다른 종류의 명상을 추천하는데, 그 기술 중 흥미로운 부분을 우연히 발견했다. Hate와 understand의 차이에 대한 부분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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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te seeks out only unreal faults, while understanding seeks out only real faults. And hate occurs in the mode of condemning living beings, while understanding occurs in the mode of condemning formations/fabrications.”
-- 『Visuddhimag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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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이해'라고 하면 '저 사람은 이러 저러 해서 그렇게 한 것이겠지'라고 어떤 사람의 어떤 생각/말/행동을 최대한 '좋은' 쪽으로 합리화해 주는 것을 의미할 때가 많다. 이게 '공감' 혹은 '사랑'이라고 흔히들 생각하고. 하지만 초기불교는 대승불교를 포함한 여타 종교들과 다른 독특한 점들이 몇 가지 있는데, 이것도 그 중 하나. 즉, 부처님은 'mettā' (goodwill)는 목숨걸고 지키라고 강조하셨지만, 'pema' (love)에 대해서는 밥을 먹으면 똥이 남고 사랑을 하면 미움과 괴로움과 흐려진 정신이 남는다고 하셨다. 누군가가 뭔가를 잘못했을 때, 애써 모른 척 하거나 그 생각/말/행동에 대해 변명해 주지 말고, 사람 자체를 비난하지도 말며, 문제가 되는 생각/말/행동 하나만을 있는 그대로 보고 impersonal하게 비판!하는 것이 이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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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 해탈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지혜' (탐진치 없는 분별력/통찰력)를 계발하는 것이다. 탐貪과 진瞋도 치癡의 다른 형태일 뿐이니 결국 '치' (어리석음=unskillfulness)의 제거가 핵심. 따라서, 나의 것이든 남의 것이든 어떤 생각/말/행동에 어떤 탐진치가 얼만큼 들어 있는지를 늘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한다. 그 행위자가 나인가 남인가, 아군인가 적군인가, 윗사람인가 아랫사람인가, 혹은 강자인가 약자인가에 따라 판단이 달라지면 안 된다 - 약자에게 좀더 너그러워야 한다는 것이 사회적으로는 바람직한 관점이지만. 나의 생각/말/행동뿐 아니라 남의 생각/말/행동도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이것이 지혜 계발을 위한 일종의 케이스 스터디이기 때문. 누가 더 잘났냐?의 비교/판단이 목적이 아니며 (비판을 에고의 놀음이라고밖에 생각 못 하는 것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자신의 투사요 한계일 뿐), 이런 분별의 연습이야말로 지혜계발의 필수코스라고 부처님은 가르치셨다. 치를 묵인, 부인, 은폐, 두둔해서는 치의 제거가 아예 불가능해지기에, 치는 치라고 보는 것만이, 치에 대해 진을 불태우는 치(i), 치를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치(ii), 치를 방치/합리화하는 치(iii)들 사이에서 中道를 지키면서 치를 제거해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된다. (中道라는 게 무조건 중간값을 취하라는 얘기가 아니고, 극단을 모두 파악한 후 상위 목적에 도움이 되는 건설적인 방법을 택하라는 것으로 나는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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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뉴질랜드 외교관의 성추행에 대해 한국 그 누구도 공식적 사과를 하지 않은 것은, 한국의 국격과 한국의 도덕 수준 둘 다를 낮추는 한국 모독인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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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tta Means Goodwill'
https://facebook.com/photo.php?fbid=1072471653124917&id=100010862771229&set=a.1042727616099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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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와 자비희사'
https://www.facebook.com/keepsurfinglife/posts/109580515412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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希修 added 484 new photos to the album "The Unexcelled Wheel" by Ṭhānissaro Bhikk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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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Generosity First.
#7~9: Dedicating Merit.
#10~30: Unsentimental Goodwill. What the Buddha said about 'love'. Emotional/sentimental love or naive positive thinking about human nature is not the way.
#31~34: For the Good of the World.
#35~45: Gratitude & Trust.
#46~52: A Post by the Ocean.
#53~59: Accepting the Buddha's Standards.
#60~64: Vows.
#65~76: Admirable Friendship.
#77~82: The Dignity of Restraint.
#83~101: The Grain of the Wood.
#102~126: Meditation Prep(aration).
#127~139: Precept Meditation.
#140~153: Goodwill as Restraint.
#154~171: The Meaning of the Body.
#172~179: To Be Your Own Teacher.
#180~203: The Breath All the Way.
#204~212: One Step at a Time.
#213~220: Levels of the Breath.
#221~243: Sensitivity All the Time.
#244~255: The Mind's Song.
#256~263: Endurance Made Easier.
#264~281: Permission to Play
#282~283: Bathed in the Breath.
#284~296: A Home for the Mind.
#297~309: How to Feed Mindfulness.
#310~323: Knowing the Body from Within.
#324~335: The Uses of Concentration.
#336~353: Always Willing to Learn.
#354~358: Perfections as Priorities.
#359~377: The Steps of Breath Meditation.
#378~385: The Interactive Present.
#386~408: Abusing Pleasure & Pain.
#409~414: What's Not on the Map.
#415~424: When Things Aren't Going Well.
#425~451: Dealing with Limitations.
#452~465: Tuning-In to the Breath.
#466~469: The Observer.
#470~477: Producing Experiences.
#478~482: Boring.
#483~484: What's Getting in the Way.




6You, 崔明淑, Sungsoo Hong and 3 others
11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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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이 포스팅과 여기 나오는 링크들을 전부 읽고, 생각하고 다시 읽는데 몇 시간이나 걸렸어요. 단연코 오늘의 문장은 "부처님은 ... 밥을 먹으면 똥이 남고 사랑을 하면 미움과 괴로움과 흐려진 정신이 남는다고 말씀하셨다. "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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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저는 인간과 인간세상을 보는 하나의 방법으로 배울 건 많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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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제가 다른 불교책들을 읽는 것은 불교공부를 하려고 이미 사 두었던 책들을 읽는 것이고, 그것과는 별개로 희수님과 타니사로 스님식의 초기불교를 공부하는 것도 동시에 하려고 합니다. 이 두가지가 경쟁적이지는 않다고 봅니다. 제가 불교를 공부하는데는 두가지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 한가지는 자기 수행을 위한 것이고, 또 한가지는 인류학자가 다른나라의 불교문화를 공부하는 것 같은 것 입니다. 한국, 더 크게는 아시아의 이해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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希修
인간은 '내 기분을 좋게 하느냐 나쁘게 하느냐?'를 善惡의 기준으로 삼는 무의식적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인간애/사랑을 최상의 가치로 여기는 것도, 개인 차원에선 그것이 우리의 기분을 좋게 하기 때문이고 종의 차원에선 그런 감정과 그에서 기인한 행동이 인류의 번성에 크게 공헌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은 '탐진치의 제거에 도움이 되느냐 안 되느냐?'를 善惡의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인간적 친밀함은 우리의 기분을 좋게 하지만, 그로부터 온갖 기대와 의무와 억압들이 생겨 나고, 그 기대가 충족되지 않을 때는 미움과 비난이 생겨 나며, 정 때문에 판단이 흐려지고 (성범죄 가해자의 부모/지지자들이 피해자를 오히려 비난하는 등), 기대가 충족이 된다 해도 그 때는 또 소유욕과 집착과 맹목적 추종이 생기죠. 상대를 '사랑'하기에 내가 일방적으로 '베푼다' 해도 그것이 상대가 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내 자신의 정서적 필요나 관념적 만족 ('난 이렇게 이타적인 사람이야')을 위한 '소비'가 되기도 하구요. (어떤 종교의 성직자가 "이웃사랑을 위해 이렇게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되니 코로나 위기도 축복"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 여러 생각이 들더군요.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고 절대자/섭리조차 자신의 주위에서 돈다고 믿는 것은 혹 아닌지..)
그래서 부처님은 인간들이 최상의 가치로 삼는 사랑을 경계하고, 대신 강도가 내 팔다리를 하나씩 잘라내더라도 그 와중에도 metta (상대방이 업의 인과관계를 이해하여 바른 행동으로써 행복에 이르기를 기원하는 마음)만은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죠. 그런데 이 metta가 동북아로 와서 '자비'로 번역되면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사랑' 혹은 '인간적인 情'의 의미를 갖게 되었구요.
말씀하셨듯이 인간과 삶과 세상을 보는 시각의 문제라고 볼 수 있을 듯 합니다. 그러니 문화인류학 공부이기도 한 셈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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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希修 궁금한 것은 동남아에서의 불교이해나 해석이 과연 이런가, 라는 질문과, 또 한국에서도 초기불교를 논하는 사람들이 같은 해석을 같고 있는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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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또 한가지 궁금한 것은 한가지 같은 이슈를 두고 초기불교와 대승불교가 어떻게 다르게 취급하는가입니다. 그 차이를 알면 초기불교의 독특성이 더 이해가 잘될 것도 같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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希修
Sejin Pak 음.. 저는 선생님처럼 문화인류학적 측면에서의 관심이 아니고 부처님이 정확히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만이 관심사라서, 그 나라들의 현실이 어떤지는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초기경전을 이어받은 상좌불교의 나라가 미얀마, 스리랑카, 태국인데, 미얀마같은 경우엔 특히 아비담마를 중시한다고 들었고, 베트남은 중국의 영향으로 대승불교쪽에 좀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사찰마다 스님마다 다르기는 하겠죠.)
초기경전의 영어 번역에서 가장 유명하신 분이 보디 스님과 타니사로 스님이고 두 분은 책을 쓰시거나 말씀을 하실 때 늘 초기경전 어디에 나온 얘기인지를 밝히시는데, 영어 번역에 있어서의 단어 선택이나 해석에 있어 두 분 사이에 차이가 나는 부분들이 물론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책은 타니사로 스님의 책을 읽고 보디 스님은 유툽에 올라와 있는 강의들을 듣고 있습니다.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 차이는.. 두 종교가 같은 옷을 입었을 뿐 아예 서로 다른 종교라고 말씀하시는 분도 계실 정도로 작지는 않은데, 물론 이건 전적으로 개인적인 판단이 되겠습니다만, 저는 두 종교가 서로 다른 종교라는 쪽에 좀더 공감하는 편입니다. 자세한 얘기는 차차 나누시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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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希修 "두 종교가 같은 옷을 입었을 뿐 아예 서로 다른 종교"일 수도 있다는 점은 염두에 두어야할 중요한 점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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希修
Sejin Pak 초기불교와 대승불교가 서로 다르게 취급하는 이슈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한 번에 다 열거하기는 도저히 불가능하지만, 위 본문과 관련해서 몇 가지만 생각나는 대로 언급하자면..
(1) 제가 현재 이해하기로는 초기불교에서 'mettā'는 '업에 대한 이해를 실천함'의 차원입니다. 즉, 남을 미워하거나 남의 불행을 바라는/기뻐하는 마음 (貪瞋癡의 瞋)이 그 자체로 이미 1차적으로 내 자신에게 악업이 되고, 그로 인해 어떤 행동을 할 경우엔 상대에게도 피해를 주기 때문이죠. 초기불교에서 mettā/慈를 언급할 때는 항상 悲喜捨도 함께 언급이 되는데, 이 捨는 바로 나의 능력과 시간의 한계 내에서 어떻게 도와 줄 수 없는 상대에 대한 평정심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기본적으로 각자의 업은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과제라는 사실을 초기불교는 단 한 순간도 망각하지 않습니다 - 남을 도울 때조차.

'용서와 자비희사'
https://www.facebook.com/keepsurfinglife/posts/1095805154124900

그런데 대승불교에 와서는 이 mettā/慈가 '업의 이해' 차원이 아니라, 맹자가 말한 仁이나 상식적인 人情, 즉 감정 차원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문화적 요소와 언어적 요소가 모두 작용하지 않았나 개인적으로 추측합니다. ('mettā'를 '자비'로 번역하고 나니, 한자 문화권에서 '자비'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문맥에서의 그 뉘앙스가 'mettā' 위에 덧씌워지고, 사람들은 그 덧씌워진 뉘앙스가 'mettā'의 원래 의미라고 믿게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2) 초기불교의 가르침은 마치 비행기의 부품을 조립하여 비행기를 완성하는 매뉴얼과도 비슷한 데 비해 (그 거대한 비행기의 아주 작은 나사 하나라도 잘못 끼워지면 안 되는 것이죠. 조립순서도 충실히 지켜야 하구요.), 대승불교에서는 이것을 대폭 간소화합니다.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不立文字, 敎外別傳, 直指人心, 見性成佛, 拈花微笑 등의, 초기경전에는 나오지도 않는 개념들을 창작하여 '근거'로 사용하구요.

물론 초기불교에서도 모든 생각/관념/노력을 놓는 것이 최후 단계에서는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8정도의 모든 8요소들을 fully 계발하고 균형을 이루어 강(윤회)의 건너편에 도달했을 때, 그 때에 가서는 배(생각/관념/노력)에서 내리라고 하는 취지인 것이죠. (배에서 내려 건너편 땅을 밟는 것이 '해탈'입니다.) 그런데 대승불교에선 강을 건너는 과정 자체는 삭제하거나 대폭 축소하고서 배에서 내리는 것을 유독 강조합니다 - "모든 생각/지식/분별을 놓아라", "오직 모를 뿐". 그러니 이 가르침을 듣는 사람이 이미 강의 건너편에 도달한 사람이 아닌 한, 강도 건너기 전에 강의 이쪽 편에서 배를 타자마자 내리고는 자신은 강을 건넜다는 착각을 하게 만들 위험이 대단히 크다는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3) 브라만교에서 말하는, 만물에 내재한 영원불변 '본질'인 브라만-아트만이 없다, 라는 주장을 하기 위한 초기불교의 가르침이 소위 말하는 '무아'이고 '공'인데 (이건 Bodhi 스님의 견해. 물론 '무아'도 사실은 이 표현보다 훨씬 복잡한 이론입니다.), 대승불교에선 '참 나'/'佛性'이라는 '본질'을 말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브라만교 사상을 몸뚱이로 하면서 옷만 사성제니 팔정도니 불교의 옷을 걸쳤다, 라는 비판을 피할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즉, 초기불교에선 인간의 병든 의식을 갱생/재활/혁신하기 위한 것이 수행인데 비해, 대승불교에서 수행은 거울에 낀 먼지를 닦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거울에 먼지가 끼어 있다 해도 여전히 거울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라는 주장이기도 하구요.

'무아와 윤회'
https://www.facebook.com/keepsurfinglife/posts/1150079848697430

(4) 초기불교에서 '보살'이라는 단어는 '곧 해탈에 이를 사람'을 의미했었는데, 대승불교에 와서는 이 단어가 '구세주'처럼 되면서, 스스로 공부+수행 안 해도 보살에게 보시/기도만 하면 누구나 무임승차로 극락갈 수 있다고 하는, '구원'이라는 테마의 '전형적인 종교'가 되었습니다. 부처님은 당신조차 타인을 구해 줄 수 없다고, 너를 구하는 건 네 자신의 수행뿐이라고 하셨는데도요..
이것이 제가 현재 갖고 있는 지식/이해의 수준인데, 혹 잘못된 부분을 발견하면 나중에라도 다시 말씀드릴 테니, 일단 그냥 참고만 하십시요 (^^;).

崔明淑
이해할 엄두는 못내고 성향별 명상법이 다르다...이말만 담고 가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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希修
네, 사람마다 상황마다 명상법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과, 대부분의 영적 전통들에서 理性을 靈性의 최대 장애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지만 초기불교는 그렇지 않다는 정도만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 (이성이나 노력을 내려놓는 것은 해탈에 이르러서나 할 일이고, 그 과정에서 얼마든지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죠 - 바르게 사용한다는 전제 하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