希修 < 자기 자신 다독이기 >
.---
아까 모임에서 Sejin Pak님의 질문에 제 대답이 좀 부족했던 것 같아 몇 자 추가합니다.
부처님은 자신을 환자를 고치는 의사에 비유하셨습니다. 평범한 인간은 의식/마음의 병이 들어 있기에 사고방식 자체를 근본적으로 개조/혁신해야 한다는 것이죠. 질병을 질병으로 정확히 진단하고 정확한 처방을 내리는 것이 '자비'이구요. 누군가의 얼굴에 악성 종양이 자라고 있는데 '그 종양도 개성 있어 보이고 멋지네!'라고 무조건 '긍정적으로' 생각해 주는 것이 자비가 결코 아닙니다. 상대가 당장 극심한 고통을 느끼더라도 그 종양 제거 수술을 해 주거나 하라고 말해 주는 것이 진짜 자비죠. (* 그런데 인간 세상에선, 악성 종양에 대해서도 무조건 듣기 좋은 칭찬만 해 주는 것이 '자비'/'공감'이라고 착각들을 하는 경우가 많죠. '인간적'인 것에 집착하면 인류 공통의 병을 치유할 수 있는 가능성이 아예 제로가 되는데도요.)
.
설명의 편의를 위해 좀더 단순한 예를 들겠습니다. 우리는 현재 마약, 담배, 술, 화학조미료, 가공육, 튀김 등 온갖 불건강한 음식에 중독되어 있고 ('수다'도 이 중 하나입니다. * 비롯 이런 저런 wrong speech가 섞이기 마련 때문 아닐까 싶습니다.) 신선한 야채는 전혀 먹지 않고 있습니다 (A). 그런데 우리의 목적은 삼시 세끼 샐러드 (명상)만 먹고 다른 종류의 음식은 일절! 먹지 않는 것입니다 (B) - 어디까지나 가정입니다. A에서 하루 아침에 B로 건너뛰기는 불가능하겠죠. 2~3일 노력하다 다시 원상태로 돌아올 테구요. 사실 대부분의 인간에게는 마약 하나 끊는 것도, 불가능에 가까울 만큼 어려울 것입니다.
.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 현실적인 접근은, 우선 마약 하나만이라도 끊자!는 것이 되겠죠. 금단현상으로 괴롭다면 차라리 담배나 술을 좀더 하는 한이 있더라도 우선은 마약 섭취량을 줄이는 것이 최우선입니다. 그렇게 마약을 끊었다면 그 다음엔 담배를 끊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겠구요. 그래서 내 자신을 독려하기 위해 '하루 종일 마약도 담배도 안 한 날은 자기 전 맥주나 와인 한 잔 마시기'라는 보상을 자신에게 주는 것입니다. 물론 맥주나 와인도 매일 마시면 건강에는 당연히 해롭습니다. 하지만 마약이나 담배보다는 낫다는 거죠. 그렇게 담배까지 끊고 난 후에는 또 술을 완전히 끊는 것을 목표로 하여 '하루 종일 마약도 담배도 술도 전혀 안 한 날은 자기 전 라면 하나 먹기'라는 보상을 스스로에게 줄 수 있겠죠. 이런 식으로 차근차근 나아가는 것입니다. 다만, 라면도 몸에 이롭지 않다는 사실을 인지는 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어떤 날은 그 라면조차도 안 먹고 건너뛰어 보려고 노력하구요. ('세계 평화'는 아마 통밀빵 정도 되겠네요, ㅎㅎ.)
.
수행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내가 지금 어떤 '감각' (5감+의식)적 즐거움에 중독되어 있는지를 잘 살펴서 그 즐거움은 좀 자제하고, 내가 자제를 잘 하고 있다고 생각된다면 중간 중간 덜 해로운 감각적 즐거움으로 자신에게 보상을 주라는 것입니다. '오늘 배우자에게 짜증나는 일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마음이 차분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내 의도를 충분히 확인한 후 어디까지나 goodwill에서 우러나오는 내 생각을 배우자에게 차분하게 전달했다'라고 판단이 된다면, '아, 내가 오늘은 전보다는 조금 더 지혜롭게 행동했구나. 나 오늘 참 잘 했다!'라고 스스로를 칭찬해 주는, 이것이 바로 '덜 해로운 즐거움'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칭찬도 我相이긴 하지만, 나 기분 나쁘다고 마구 짜증내는 그런 류의 我相보다는 백배 건강한 我相이기에, 아이스크림이 될 수 있다는 것이죠.
그 다음 단계는 'who' 아닌 오로지 'what thought/word/action'의 차원에서만 매사를 생각하는, 칭찬조차 필요 없는 단계가 되는 것이구요.
.
부처님은 八正道를 '윤회라는 수고스러움의 강을 건너기 위한 뗏목'에 비유하셨습니다. 저렇게 차근차근 수행하다 보면 '어느 덧' (어떤 이에게는 몇 생이 될 수도, 어떤 이에게는 몇 만 생이 될 수도 있겠죠.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강의 건너 편에 다다를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러면 그 때에 가서는 당연히, 뗏목에서 내려야 하겠죠. 뗏목에서 내리는 바로 이 행위를 "모든 종류의 관념도, 생각도, 我相도, 심지어 노력도 완전히 놓는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건 B지점조차 지나 강의 건너편에 도달했을 때, 즉 라면이든 아이스크림이든 심지어 샐러드도 더이상 먹고 싶은 생각이 안 들 때, 그 때 가서 하면 되는 것입니다. 아직 강의 이쪽 편=A에 있는 우리가 벌써부터 '뗏목에 대한 집착'을 버리면 우린 걍 마약중독으로 죽는 것이죠. 그러니 우린 현재로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뗏목=팔정도를 열심히 붙들고서 차근차근 노를 저어 나아가야 합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이것이 바로, 타니사로 스님이 설명하시는 수행의 과정입니다.
.
초기불교에 따르면,
인간계 아래의 세상에는 고통이 너무 많아 수행을 생각할 여유조차 없고,
인간계 위의 세상은 즐거움이 너무 많아서 또 수행할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깨달음의 첫 관문에 들어서는 이 중요한 일을 인간계에 있을 동안 하라고 독려하죠. (초기불교에서는 소위 '깨달음'을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의 4단계로 나눕니다.
- 아라한이 된 사람은 이승에서 부여받은 천수를 다 한 후에는 그 어느 곳에도 다시 태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해탈'이죠.)
- 그리고 일단 수다원이 된 사람은 7생 이내에 아라한이 된다고 합니다. 강은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데, 돌이킬 수 없는 그 흐름에 들어섰다는 의미에서 수다원을 영어로는 'stream enterer'라고 부릅니다.
- '아라한'/'해탈'이라고 하면 완전 불가능해 보이지만, 수다원은 '물론 여전히 매우 어렵지만 불가능하지도 않겠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정도입니다.
그러니 윤회를 믿으시는 분은 용기를 내어 정진하시고,
혹 윤회를 믿지 않으시더라도, 불교 철학을 실천함으로써 얻는 효과를 현세에서 누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