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04

05 | 인권이 만난 사람∷평화학자 박성준 선생 | 인권┃ 2005.02 04

2006.02.통권30호.pdf

05 | 인권이 만난 사람∷평화학자 박성준 선생 | 인권┃ 2005.02 04
거룩한 듣기, 만남과 소통을 위한 진리 실험 __평화학자 박성준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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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거울 앞을 지나가는데 아주 자연스럽게 웃는 나 자신을 처음으로 보았습니다.”
“그때서야 나는 여기 살고 있는 사람과 만났고나 자신과도 만났습니다.”

박성준 66 선생은‘찾는 자’이다. 진리를 찾는 자는 현실에
서 물러나지만 언제나 자신이 발견한 진리를 삶의 현실에
적용하고자 한다. 찾는 자는 현실 너머를 지향하지만 그 지
향이 겨냥하는 곳 또한 현실이다. 진리는 현실 너머의 것이
면서 동시에 현실의 것이기에, 찾는 자도 현실 속에서 현실
너머를 찾는다.

근래 몇몇 세인의 입에 박성준 선생의 이름이 오르내렸다.
그것은 그 자신의 일 때문이었기보다는 안사람이자 바깥
사람인 한명숙 의원 때문이었다. 여성부와 환경부의 장관
이었던 한 의원이 당권 주자로 나섰을 때, 일간지의 어느
정치부 기자는‘남편 13년 옥살이 중 나눈 러브스토리
유명하다’고 적었다. 세상의 표면적인 관심이란 언제나 그
런 식으로 표현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글 | 안찬수사진 | 김윤섭

아주 오래된 길찾기

박성준·한명숙 부부의 삶의 역정은 그대로 우리 현대사의 한 페이지다. 지난해 10월 24일, 한명숙 의원은 자신의 블로그에‘미니 자서전’이라는 글을 올렸다. 한명숙 의원은 이 글에서 자신이 사회의식에 눈뜨게 되었던 것은 대학 시절 기독교 학생운동 단체인‘경제복지회’에서 만난‘나의 키다리 아저씨, 나의 동지이자 내 사랑의 총합’인 박성준 선생 때문이라고 하였다.

“나는 남편을 통해 시대의 아픔과 사회의 현실에 서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믿음만으로 구원이 가능하다고 믿어 왔던 나에게 남편은 내가 미처 몰랐던 성서의 참의미에 대해 가르쳐 주었다. 나는 비로소 참 신앙은 개인의 영적체험에 서만 오는 것이 아니며 사회참여를 통한 하나님의 나라 실현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한명숙 의원을 처음 만나던 청년기부터 박 선생은‘진리의 길’이 무엇인지 찾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길찾기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어찌 보면,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되어 13년 반 동안의 옥살이, 출옥 후 안병무 선생이 이끌던 한국신학연구소 학술부장으로 지내던 일, 한국신학대 졸업, 한백교회를 개척해 8년여 동안 목회자로서 활동했던 일, 일본 도미사카 그리스도교 센터의‘동아시아의 선교와 신학’연구 그룹 책임자,
일본 릿쿄오대 신학박사, 그리고 미국 뉴욕 유니온신학교 유학, 펜들 힐에서의 체험 등등의 이력이란 모두 이런 길찾기의 궤적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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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준 선생이 옥살이를 한 기간은 1968년 7월부터 1981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새벽까지 13년여의 세월이다. 말하자면 1970년대를 꼬박 저 차가운 감방에서 보냈다. 그렇지만 박 선생은 릿쿄오대 문학부에 제출한 박사학위 논문「민중신학의 형성과 전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민중신학은 한국현대사의‘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70년대’의 역사적·창조적 소산이며‘70년대 한국사회’를‘장’으로 한‘현장신학’이다.”“70년대는 민중신학을 해명하는 해석학적 열쇠다”라고. 박 선생은 민중신학을 통해 삶의 현장으로서의 1970년대 한국사회를 자신의 것으로 소화했던 것이리라. ‘민중의 눈과 머리와 가슴으로’성서를 다시 읽는다는 것, 민중을 통한 성서의 재발견과 성서를 통한 민중의 재발견이 1970년대 한국민중의 수난의 현장에서 이루어졌다는 것. 민중신학 형성과 전개에 대한 이러한이해는 그것 자체로 역사 속의 한국민중을 온전히 껴안고 하나되기 위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살아 있는 침묵으로 공감한다는 것은 지금 그의 이름 밑에는
‘비폭력 평화의 물결’상임공동대표, 
‘아름다운 가게’공동대표, 
성공회대학교 NGO대학원겸임교수 평화학, 신학 ,
 ‘움직이는 학교’대표 등이 씌어져 있다. 

이것들은 서로 호응하면서 오늘 박 선생이 다다른 진리가 무엇인가를 보여 주고 있다. 박성준 선생이 지금까지 찾아낸 진리는 어떤 것이며, 오늘 찾아 나선 희망은 무엇인가.

“순탄하기만 한 길은 길 아니다/ 낯설고 절박한 세계에 닿아서 길인 것이다.”
도종환, ‘처음 가는 길’에서 과연 박성준 선생이가 닿은‘낯설고 절박한 세계’는 어디일까. 선생을 만나 뵈러 길을 나섰다.


1월의 네 번째 일요일. 찾아간 곳은 서울 신촌동의‘종교친우회 퀘이커 서울모임’집이었다. 
오전의 예배모임이 끝난뒤 이어지는 퀘이커리즘 공부모임에 참석한 뒤에 말씀을 여쭙기로 했다. 공부모임은 조촐했지만 한마디 말조차 새로워지는 분위기였다. 방 안으로는 겨울 빛이 따사롭게 비춰 들었다. 그 방의 한쪽 벽에는 함석헌 선생과 함께한 퀘이커들의 흑백 사진이 걸려 있었다. 반대쪽 출입구 쪽의 책꽂이에는 웨슬리 전집, 우치무라 간조의 한국어판 전집, 김교신
전집, 함석헌 전집, 그리고 퀘이커와 관련된 묵은 영어책들이 꽂혀 있었다. 공부모임의 텍스트는 하워드 H. 브린튼의「퀘이커 300년사」1952년 초판, 우리말로는 함석헌 번역본이 있다 와 같은 지은이의「퀘이커 350년사」의 영어본. 
이 두 권의 책에 각기 붙어 있는 질문서 queries 였다. 그것은 50년이 지나는 동안 질문서가 어떻게 변화했는가 하는 비교 연구, 말하자면 역사적 탐구의 한 과정이었다. 박 선생은 이 공부모임의‘돕는 이 facilitator ’였다.

“남을 위해 일한다고 하면서, 정작 자기 자신을 바로 세우는 데 시간을 전혀 쓸 수 없다든지 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이신앙반성 질문서는 신앙인뿐만 아니라 시민운동가에게도 크게 도움이 되는 내용일 것입니다.”

공부모임 중에는 중간중간 이방인을 위해 퀘이커의 역사라든지, 그 예배모임과 사무모임의 특징, 그리고 퀘이커들이생각하는 시민적 책임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이어지곤 했다.

공부모임은 1분 정도의 침묵명상으로 시작되고 마무리되었다. 이 묵상과 고요에는 남다른 의미가 있다. 묵상은 말하자면, 온갖 의식과 예배 절차와 직업 목사를 다 없애 버린 뒤에 남겨 놓은, 퀘이커의 형식 아닌 형식이다. 이 날 읽었던신앙반성 질문서에도 이런 대목이 나온다.

“살아 있는 침묵 living silence 이 있습니까? 그 살아 있는 침묵 속에서 여러분들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여러분들이 함께 뭉쳐지는 느낌을 갖게 됩니까?”
그침묵은‘알곡이가득찬침묵’이다. 이침묵과고요를회복하려는것은어찌보면현대문명에대한크나큰싸움이다.
“알곡이 가득 찬 침묵의 경험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현대의 큰 문제입니다. 맨송맨송한 상태에서 무엇을 어떻게 할 수있단 말입니까?”
공부모임을 정리하기 전에 박 선생은 작은 피리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것은 마이크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누구나 말할 자격과 말할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은 마이크와 인연이 없다고들 생각합니다. 어떤 이는‘나는 마이크를 잡을 자격이 없다’고 자기를 비하하여 말합니다. 어떤이의 말이 크고 또 어떤 이의 말이 작은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의 말이 소중한 것입니다. 모든 이들이자기 속의 마이크를 사용해야 합니다.”

이 말은‘각 사람 속에 빛이 있다’는 퀘이커의 믿음이기도 하다. 모임에 참석한 이들도‘자기 속의 마이크’를 들고 이야기를 이어 나갔으며 서로의 생각을 나누었다. 마이크를 상징하는 작은 피리는 말하자면 서로‘속의 빛’을 비추는 도구인 셈이다.
삶으로 말하고 거룩하게 듣자공부모임에 참석한 이들이 돌아가고 박 선생과 단둘이 마주 앉았다. 차마 무엇을 여쭙기가 송구스러울 정도로 박 선생은 말씀을 아꼈다.

“삶으로 말하라 Let your life speak 는 말이 있잖습니까? 저는 가능하면 저의 삶을 드러내는 것을 피해 왔습니다.”

삶의 굽이굽이를 여쭈어 본다는 것은 구차스러운 일일 것이다. 다만 박 선생이 써 놓은, 많지 않은 글 가운데 생각나는단어가‘귀향’이어서 그 귀향에 대해서 여쭈었다.

“소월은‘불귀 불귀 다시 불귀’라고 했는데, 선생님은 어느 글에선가 귀향을 말씀하셨습니다.”
“20대 때에는 물에도 빠지고 불에도 빠지는 그런 성격이었습니다. 20대 후반에 투옥돼서 40대에 나와 보니 한국사회가 너무나도 변화해서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지금이야 인권, 생태, 환경 등 다양한 문제가 여러 형태로 제기되지만, 그때에는 정신적으로 외로웠습니다. 과연 내가 나왔나 하는 느낌이 들었죠. 한마디로 마음의 평정을 얻지 못했습니다. 1994년 처음으로 여권이 나온 뒤 일본에 이어서 미국까지 건너가서 공부하던 중 펜들 힐에서 2년간 공부하며
처음으로 마음이 편안함을 느꼈습니다.”

“어느 날 거울 앞을 지나가는데 아주 자연스럽게 웃는 나 자신을 처음으로 보았습니다.”
2000년 7월 박 선생은 기쁜 마음으로‘귀향’했다.
“그때서야 나는 여기 살고 있는 사람과 만났고 나 자신과도 만났습니다.”
그 귀향을 가능케 했던 것은 하나의 체험 때문이었다.
“케이커들 중에는 감옥을 경험한 분들이 많습니다. 그분들이 저의 이야기를 듣는데, 남의 이야기를 그렇게 경청하는것을 처음 보았습니다. 아, 남의 말을 이렇게도 들을 수 있구나 하는 체험이었죠. 그것이 퀘이커를 공부하게 된 계기였습니다. 지금은 그분이 누구든지 오로지 그분 이야기를 그분의 이야기로 듣게 됩니다.”
환갑의 나이에 귀향하면서 박 선생은 작은 선물꾸러미를 들고 들어왔다. 
그 선물꾸러미에는‘거룩한 듣기’라는 것과‘움직이는 학교’라는 새로운 꿈이 들어 있었다.

“겸허하게 정성을 다해 귀를 기울여 듣는 것.”박 선생은 이것을‘경청 敬聽 ,mindful listening ’혹은‘거룩한 듣기’라고 부른다. 이‘거룩한 듣기’는 선생이 지난 5년간 해온 만남과 소통을 위해 펼쳐온 진리실험인‘움직이는 학교’의 중심 원리다. ‘거룩한 듣기’는 박 선생의 깊디깊은 체험과 반성과 성찰과 길찾기의 고갱이다.
거룩한 듣기라는 원리로 볼 때, 기독교나 민중신학도 반성의 대상이다. “기독교는 말하는 종교지 듣는 종교가 아닙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큰 약점의 하나입니다.”

“한국의 민중신학에는 이 경청의 영성이 부족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불의한 권력에 맞서서 억눌린 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증언자의 역할을 자임하다 보니 민중, 씨?에게 귀 기울여 듣는마음의 여백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거룩한 듣기는 새로운 교육에 대한 비전도 포함하고 있다. ‘움직이는 학교’에서는 선생과 학생 사이의 이분법적인 분리가 없다. 가르치는 사람이 배우는 사람이 되고, 배우는 사람이 가르치는 사람이 된다. 학생이 선생을 찾아가는 것이아니라 선생이 학생을 찾아간다.

깨어 있는 마음으로 내면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자 거룩한 듣기는 사회운동 내부의 변화를 요구하며, 새로운 인간관계의 형성을 촉구한다. “세상의 변화를 말하는 사람들이 많고,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교회와 사찰이 수없이 많은데도 왜 세상은 이토록 변하지 않을까? 그것은 어쩌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마음의 소통이 막혀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사람과 사람이 서로 만나면서도 진정으로는 서로 만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부모와 자식이, 남편과 아내가, 친구와 친구가, 직장 동료가, 이웃과 이웃이 마치 처음인 듯 다시 만날 수 없을까. 그래서 관계를 새롭게, 깊게 할 수는 없을까.”

어떤 사람이 말을 독점하지 않도록 하고, 소외되는 이가 없도록 배려하는 것. ‘돕는 이’로서 박성준 선생은 계기마다 ‘마중물’을 조금 부어가며 마음 깊은 곳의 지하수를 끌어올려 진실의 샘물이 솟구치게 도와준다.

박 선생은 현재의 삶의 방식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 새 삶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이 있는 이, 오늘의 학교나 교회, 시민단체나 노동조합의 현실에 대해 고민하는 이, 뭔가 대안이 될 새로운 모임과 공동체, 새로운 사회, 새 세상을 갈망하는 이들이 작은 모임을 꾸려 움직이는 학교를 만들고 거룩한 듣기를 실천하기를 권하고 있다. “따뜻하게 깨어 있는 마음으로 서로 내면의 빛으로부터 들려오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자”고.

박 선생이 마음속의 디아스포라 흩어져 사는 사람들 를 끝내고 귀향한 뒤 펼친 일들 가운데에는‘비폭력 평화의 물결’과‘아름다운가게’도 있다.

‘비폭력평화부대 Shanti Sena’는 본디 간디가 구상한 것이었다. 1999년 5월 헤이그에서 1907년에 이어 두 번째로 평화회의가 열렸을 때, 평화운동가, 학생, 학자, 시민사회단체 활동가, 노벨평화상 수상자 등은“평화는 인권이다”“이제야말로 전쟁을 끝내야 할 때다”라는 주장을 펼치며 평화부대에 대한 개념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2002년 12월 2일 무장하지 않은 다국적 시민으로 이루어진 집단이 분쟁 지역으로 들어가서, 학살과 인권 침해를 감시하고
억제하는 활동을 펼침으로써, 세계 평화를 이루는 데 공헌하고자 하는‘비폭력평화부대 NP, Nonviolence Peaceforce ’가 발족했다. 박 선생이 이끄는‘비폭력 평화의 물결’은 이 국제NP의 한국지역모임이다. 하지만 박 선생이 구상하고 펼치는 평화운동은 결코 거창한 것이 아니다. “문턱이 낮은, 부담이 없는, 아주 대중적인 평화운동을 한번 해보자”는 것이다. 비폭력 평화의 물결은 결코 투사들의 모임이 아니라, 우리 이웃들과 아주 평화롭게 이야기하고 삶의 경험을 나누자는 것이다. 그래서 ‘아름다운가게’도 그렇지만 이 모임도 녹색보다 더 부드러운 연
둣빛으로 상징된다.

박 선생이 고향으로 돌아오며 작은 꾸러미에 담아온 선물은, 그러니까 자기 성찰과 내적 쇄신, 관계의 변화와 세상의 변혁에 대한 새로운 비전이다. ‘움직이는 학교’라는 꿈의 꽃씨는 지금 민들레꽃씨가 들녘으로 퍼지듯, 풋풋한 생명력으로 조금씩 새로운 생활운동, 새로운 신앙운동, 새로운 교육운동으로 퍼져가고 있다. ‘비폭력 평화의 물결’이나‘아름다운 가게’는 그 꿈의 꽃씨가 어떻게 꽃을 피우는가, 꽃피울 수 있는가를 우리에게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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