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31

알라딘: 바가바드 기타 함석헌 (옮긴이)한길사2003

알라딘: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 한길그레이트북스 18  
함석헌 (옮긴이)한길사2003-03-10원제 : Bhagavadgi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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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종교 주간 11위, 소설/시/희곡 top100 3주|Sales Point : 2,402 
 8.7 100자평(18)리뷰(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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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장본5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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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아르주나의 고민
2. 삼캬 요가
3. 카르마 요가
4. 즈나나 카르마 산야사 요가
5. 내버림의 요가
6. 진정한 요가
7. 즈나나 비즈나나 요가
8. 브라마 요가
9. 왕지식과 왕신비
10. 거룩하신 능력
11. 일체상
12. 박티요가
13. 밭과 밭알이와 그 분별
14. 3성 분별
15. 멸 불멸을 초월하는 지상자아
16. 거룩한 바탈과 귀신 바탈
17. 세 종류의 신앙
18. 내버림에 의한 해탈

책속에서
P. 93
16. 비유(非有) 아닌 것이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하는 것이 유(有) 아닐수 없다. 이 둘의 궁극은 참다움을 본 이에 의해서만 보일 수 있다. - 미친 나이스가이
P. 114
71. 일체의 애욕을 버리고 갈구하는 것도 없이, 나란 생각도 내것이란 생각도 아니 하는 사람은 평화에 이른다. - 미친 나이스가이
P. 129
19. 그러므로 집착을 떠나 언제나 마땅히 행하여야 할 것을 하라. 집착 없이 행하는 자가 가장 높은 데 이르기 때문이다. - 미친 나이스가이
P. 171
22. 우연히 오는 것으로 만족하고, 상대로 보기를 넘어서서, 미워하는 마음이 없이, 성공 · 실패를 하나로 보는 사람은 아무리 행동하여도 얽매임이 없느니라. - 미친 나이스가이
P. 198
10. 자기의 모든 행위를 브라만에게 바치고 집착을 떠나 행동하는 자는 죄에 물들이 없나니, 마치 연잎이 물에 젖지 않음 같으니라. - 미친 나이스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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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에세이
무엇에도 집착 않는 해탈에 이르는 길
기독교, 이슬람교와 더불어 세계적인 종교의 하나인 불교는 인도에서 생겨났다. 하지만 오늘날 인도는 불교 국가가 아니라 힌두교 국가이다. 기원전 5세기 무렵 불교는 인도의 동북부에서 발생하여 한동안 성행하다가 인도의 전통 종교인 힌두교에 밀려 동쪽으로 전파되기 시작한다. 중국, 한반도, 일본의 고대 사회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여기에 기인한다.

불교가 그 고향인 인도에서 힌두교에 밀린 이유는 뭘까? 불교의 평등 사상은 카스트 제도마저 부인할 정도로 진보적인 것이었는데도 인도 민중이 불교를 버린 까닭은 뭘까? 그것은 인도의 독특한 윤회 사상 때문이다.

윤회를 믿는 인도인들은 지금은 비록 노예의 신분이더라도 꾹 참고 성실하게 살아 가면 다음 세상에서는 더 좋은 신분으로 태어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렇게 다음 세상을 기약하면 되는데, 굳이 현재의 삶에서 평등을 추구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현세의 행복은 오히려 자신의 업을 키워서 복된 내세를 저해하게 될 뿐이다).

그래서 불교는 윤회의 관념이 없는 극동에서 더 찬란하게 꽃을 피우게 된다. 하지만 인도에서 힌두교가 불교를 누른 이유는 더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바가바드 기타>이다.

<바가바드 기타>는 <베다>, <우파니샤드>와 더불어 힌두교 3대 경전 가운데 하나지만, 다른 두 경전과는 달리, 그리고 불교의 경전들과도 달리 승려가 아닌 일반 대중이 읽을 수 있는 경전이다.

"나에게 귀의하면 천민, 여자, 바이샤, 수드라라 할지라도 지고의 목표로 갈 수 있다." 불교와 달리 힌두교에는 이렇게 대중적이고 서민들의 구체적인 삶과 연관된 경전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바가바드 기타>의 내용 자체가 대중적인 것은 아니다. '바가바드 기타'라는 말은 '거룩한 자, 존엄한 자의 노래'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아득한 옛날 쿠루크셰트라라는 들판에서 카우라바 집안과 판다바 집안이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두 집안은 서로 형제 간이었으니 바야흐로 골육상잔의 비극이 벌어지려는 순간이었다. 이 때 판다바의 왕자인 아르주나와 비슈누 신의 화신인 크리슈나가 나누는 대화가 <바가바드 기타>의 내용을 이룬다.

왕자와 성자의 대화, 따라서 '존엄한 자의 노래'는 어울리는 제목이라 하겠다. 아르주나는 갈등한다. 형제를 죽이고 왕이 될 것이냐, 아니면 속세를 버리고 은거하여 명상과 고행을 하는 삶을 살아 갈 것이냐. 이 극적인 장면에서 크리슈나는 용감히 나가 싸우라고 충고한다. 하지만 어찌 형제들과 싸워 이기라는 게 신의 가르침일까?

크리슈나는 그것이 단순히 세속적인 왕위를 얻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싸움이며 근원적인 갈등임을 말한 것이다.

"그대가 할 일은 오직 행위 자체일 뿐 그 결과가 아니다. 행위의 결과를 동기로 삼지 말며 행위하지 않음에도 집착하지 말라."

이것이 인간을 대표하는 아르주나에게 크리슈나가 주는 신의 가르침이다.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는 삶이란 근원적인 갈등이 해소된 상태, 곧 해탈을 가리킨다. 윤회 관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힌두교에서 지고의 목표로 제시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바로 윤회에서 벗어나는 해탈인 것이다.

<바가바드 기타>에서 가르치는 해탈에 이르기 위한 길은 세 가지이다. 첫째는 지식의 길, 즉 깨달음을 통해 참된 지식을 얻고 인간 본성으로 복귀하는 길이다. 둘째는 행위의 길, 즉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아무런 집착이 없이 수행함으로써 속세의 한가운데에서 해탈에 이르는 길이다. 셋째는 가장 높은 단계인 믿음의 길, 즉 신에 대한 사랑과 헌신의 길이다. 이 셋을 종합하면, 진정한 해탈은 깨달음으로 행동하고 신을 믿음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인도의 성자로 추앙받는 마하트마 간디는 평생 동안 <바가바드 기타>를 항상 몸에서 떼어 놓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벽에 한 구절씩 붙여 놓고 아침마다 세수할 때 읽고 이를 닦는 동안 그것을 외웠다고 한다. 그 덕분일까? 그의 영도 아래 인도는 200년 동안의 영국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나 '해탈(독립)'할 수 있었다. - 남경태(전문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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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함석헌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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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 분포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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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두경전 기타에 함석헌 선생의 주석을 더한 인간 내면의 전쟁을 그린 지고자의 노래  구매
인문학에길을묻다 2010-07-15 공감 (2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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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몸은 아홉개의 구멍을 가진 거대한 상처다. 이 문장만으로도 한번쯤은 읽어볼만한 책.  구매
bl. 2013-11-21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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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반정도 읽다가 갑자기 무기력증에 빠졌다. 몇달간 무기력증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경쟁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에겐 안맞는 책인듯 하다.  구매
착한레이 2013-07-24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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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를 대표할만한 성전에 대한 우리나라 사상가의 의역~ 간혹 정확하지 않은 대목이 있을 지도 모르지만 읽고 이해하기에는 놀랄만큼 너무 명료합니다.  구매
밭고랑 2013-04-02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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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경전에 대하여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인도 종교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구매
거북이 2012-05-05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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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나는 오늘 궁극에 다녀왔다 새창으로 보기
바가바드기타(Bhagavad Gita)
―나는 오늘 궁극(窮極)에 다녀왔다



궁극(窮極)을 향한 노래

『바가바드기타』는 궁극을 향한 노래이다. 이는 신에 대한 종교에 대한 옳은 행위에 대한 논증을 설파하는 것도 아니다. 『바가바드기타』가 가지는 유일한 논증이라면 그것은 아름다운 비유이다. 궁극으로 가기 위해서는 놀라운 과정을 감수해야 한다 '사지가 주저앉고, 입은 바싹 타며, 전율이 내 몸을 휩싸고,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고뇌를 견뎌내야 하며, 전장에서 내 목숨을 위협하는 것은 혈육이며, 지고의 순례길 중에는 온 형제 가족이 낙오되거나 죽은 끝에 결국 혼자 남은 외로운 수행길을 감당해야 한다. 이 때 귀를 맑게 하는 아름다운 깨달음의 노래는 나를 더 이상 슬픔에 빠뜨리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지고자가 나를 위해 배려한 과정이며, 그러한 지고지순한 진리가 쉽게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궁극이라는 것은 절대적인 자유를 의미하며, 자아를 초월한 초자아란 하나님이 완전히 내 안에 들어와 있는 상태이다. 스피노자는 그 상태를 꿈꾸어 '신을 향한 지적 사랑'을 갈구했으며, 파스칼은 '가장 위대하며 가장 비참한 상태'를 체험했다.
궁극에도 시간은 있지만, 이 때의 시간은 '영원을 헤아리는 사고방식'이다. 연대순으로 이루어진 역사는 별 의미가 없다. 영원이라는 관념에 도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창조의 상대적 분야에서 가장 오랜 수명을 가졌던 어떤 물건의 생애를 생각해 보는 일인데, 인도인들은 창조의 분야에서 가장 오랜 수명을 가진 존재를 거룩한 어머니 혹은 우주적 어머니라고 불렀다. 우주적 어머니로부터 인간의 생애에 이르기까지는 수없이 많은 단위가 놓여 있는데, 어머니의 시간 개념으로 가장 말단의 단위인 칼리 유가(kali yuga) 하나만 해도 사람의 생애 43만 2천년이다. 그래서 영원에 가깝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어머니와 나는 상상할 수 없는 시간의 벽이 서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연인의 앞에 서 있는 것처럼 사고하는 방식이 인도인의 시간관이었다.
'궁극'을 경험한 자는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우리가 힘겹게 찾아 올라갔던 정신의 여정은 간단한 한마디 말로 녹아야 하며, 그 말 한마디가 인생 이해의 전부를 뒤집어엎어서 사람은 단번에, 아주 완전히, 모든 얽매임을 다 벗은 영원한 해탈의 지경에 올라가게 한다.
'궁극'의 의식에 도달한 사람은 개인 생명의 수준에서 행하던 사고방식을 뛰어넘어 우주적 생명의 수준으로 올라간다. 평생 느껴보지 못한 단맛을 본 사람은 모든 단맛을 다 이기듯이 우주적인 의식을 체험했던 사람은 그 축복의 맛을 언제나 마음속에 간직한다. '궁극'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이미 인정세태의 괴로움은 사소한 추억에 불과하리라.

이 궁극의 노래는 노래의 언어로, 노래의 귀를 통해 받아들여야 한다. 사변적인 언어로 받아들이면 아름다운 향연에 참여할 수 없게 된다. 영혼의 가락과 정열에 몸을 맡기고, 가만히 듣고 있으면 당신의 내면 속에서 따라부르는 그 노랫소리가 바로 이 노래라는 것을 알게 된다.


대략적인 줄거리와 서술 방식


『바가바드기타』는 쿠루크셰트라 전쟁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무대로 한다. 하스티나푸라에 자리잡은 쿠루족의 두 형제 가문, 즉 카우라바 형제들과 판다바 형제들이 쿠루크셰트라 들판 양편에 군대를 대치시키고 왕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살육전을 벌이려는 극적인 상황에서 아르주나와 크리슈나의 대화가 이루어진다. 바라타 왕국의 정당한 후계자였던 아르주나의 맏형이 두료다나의 술책에 빠져 도박으로 나라와 형제들을 다 잃고 13년 간 고행을 하게 된다. 시일이 지났을 때 두료다나는 반환을 거절했고, 생활을 꾸려 나갈 약간의 땅조차 수용하지 않아 결국 형제끼리 창을 겨누는 비극적인 상황으로 이야기는 비화되었다. 아르주나는 이 전쟁에 대한 확실한 대의 명분을 가지고 전쟁터로 나가지만 상대편 군대에서 자기 사촌들, 아저씨, 할아버지 등 혈족들을 있다. 왜냐하면 그가 자신의 혈족을 죽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혈족을 죽이고 왕국을 통치하느니 차라리 숲으로 은거하여 궁극자에 대한 명상에 몰두하는 고행자의 삶을 택하려 한다. 그때 크리슈나는 아르주나에게 '싸우라'(ii. 8)고 말하면서 둘의 토론이 시작된다.
이야기의 서두에 전쟁이 나온 것은 인간 내면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모순을 여지없이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 전쟁이 주는 극적인 상황이기 때문이다.
두료다나와 아르주나는 같은 전장에 서 있지만 그들의 싸움은 이미 같은 종류가 아니다. 두료다나는 다만 권력과 부를 유지하려는 자기욕망의 표현인 반면, 아르주나는 자신의 고뇌와 만인의 사명을 안고 싸우는 입장이다. 이 둘은 모두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말끔히 요약되며 크리슈나가 '싸우라'고 주장한 요점도 여기서 비롯된다.

오래된 인도의 경전인 이 책은 어느 경전과 같이 주석가들의 적절한 비유가 돋보인다. 라다크리슈난, 간디, 함석헌 등의 저술가들은 경전을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 세계의 고전들과 인물들을 끌어다 이 책의 '보편화'에 기여했다. 궁극의 초월정신은 어디든 통하며 지고의 경지에서 마주앉아 세상을 논한다.
『바가바드기타』는 인도의 경전 중 가장 궁극에 가까운 저술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엄격한 카스트 제도 역시 궁극의 입장에서는 한낱 사소한 제도에 불과하다.


"어떠한 신자가 신앙을 가지고 어떤 형태의 신을 예배하기를 원하더라도 나는 그의 신앙을 튼튼하게 해준다"
……
프리다의 아들아, 내게 돌아오는 자는 비록 죄의 탯집에서 났더라도, 여자로, 바이샤로, 수드라로 났더라도 다 최고의 경지에 이를 것이니,



사실 『바가바드기타』 안에는 어떤 경지나 단계 같은 것이 설정되어 있지 않다. 다만 깊이 이해하고, 깨끗이 비우고, 참되게 행동하는 것을 통해 신에게 보다 깊이 다가가고자 하는 간절함이 가득할 뿐이다.


궁극의 가르침


너는 슬퍼할 수 없는 자를 위하여 슬퍼하고 있다.



아르주나는 관계에 현혹되어 있다. 즉 그는 아직도 제자나 스승, 친척은 그들 자체 때문에 소중한 것이 아니고 자아 때문에 소중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난 자는 반드시 죽게 되고, 죽는 자는 반드시 나는데,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자신이 어찌할 수 있다는 듯이 판단하고 있는 것은 아르주나가 옅은 감정에 정신을 빼앗겨 버렸기 때문이다. 아르주나는 자아를 우주적 입장에서 사려하기 힘들다. 적과의 갈등과 대립이 2중, 3중고로 다가오는 이유도 물질과 환경에 영향을 받고 홀가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상과 사랑을 위해서 우리는 압박자와 고통과 죽음에 직면한다.
인간의 생에서 모든 행동은 필연적으로 반동을 받는 법이고, 우리의 영혼을 끝까지 얽어매 지고자와의 대면을 어렵게 한다.
이 때 크리슈나가 아르주나에게 들려주는 첫 번째 궁극은 '평정한 마음'이다. 꼭 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는 어떤 일도 없으며, 아직도 얻지 못해서 꼭 얻어야 한다는 어떤 물건도 없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일을 하고 있다. 이 때 나의 행동은 행동 자체에 있는 것이지 결과에 이끌리지 않는다.


행동의 결과를 네 동기가 되게 하지 마라



역설적으로 보이지만,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최대의 자유는 우리의 모든 의식을 지고자에게 기울여 복종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먹고 싶은 대로 먹는 것은 자유처럼 보이지만 사실 감각의 지배를 받는 것일 뿐이다. '무엇을 조금 알면 독단적이 되고, 조금 더 알면 묻게 되고, 또 조금 더 알면 기도하게' 된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존재해 나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덕분임을 알게 되기 때문에 겸손해진다. 고금을 막론하고 위대한 사상가는 모두 종교심이 깊은 사람들이었다.
 진정한 자유를 얻은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을 우주적 영(靈)의 기계로서, 모든 운명을 지고자에게 맡기고 또 우주적 질서의 유지를 위해 살아간다. 자신의 운명을 모두 맡길 수 있으려면 믿음도 두터워야 하겠지만, 세계에 대한 절대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이로서 신과 나는 하나가 된다. 신과 하나가 될 때 나의 마음은 평정을 되찾으며 나의 행동과 말들은 생기가 돋는다. 나는 더 이상 누구의 지배도 아니며 신을 위해 일할 뿐이며, 모든 것은 신에 의해 안배되어 있다는 믿음으로 살아간다. 차가 아무리 빠르게 달린다 해도 차부는 움직이지 않듯이, 굴곡이 많은 생을 살아가는 우리 안에는 신이 타고 있다.
크리슈나가 아르주나의 차부였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는 무장을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넘어졌을 때면 언제나 우리를 도와주시고, 우리가 실망에 떨어졌을 때 위로해 주시기를 지체하지 않지만, 우리를 위해 우리 갈 곳을 대신 기어 올라가시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에게로 돌아갈 때까지 길이 참고 견디시기를 싫어하지 않는다.



궁극의 평정을 얻고 난 후 두 번째 궁극의 가르침은 '행위'이다.


너는 네 명함을 받은 일을 행하여라. 행(行)은 비행(非行)보다 나으니라. 행함 없이는 네 육신의 부지조차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바가바드기타』에서 특히 강조하는 것은 '실천'의 덕목이다. 평정을 갖춘 행위는 십만 대군보다 의연하며 강력하다. 나는 해야 할 일이 있어서 탄생하였다. 해야 할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만일 일하기를 그친다면 이 세계는 망해 버릴 것이다. 나는 혼란을 일으킨 자가 될 것이요, 인류는 멸망하고 말' 것이다.
지식은 그 완전한 지경에서는 이해와 체험의 두 가지를 다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완전한 지경에 이르려면 세계에 대한 이해와 체험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 '행위'라 함은 노자가 주장하는 '무위(無爲)'를 포함한다. 무위는 자신의 행위하되 따로 행위한다고 말할 것이 없는 상태다. 항상 일하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일하는 자라는 주장을 아니하는 사람의 '행위'는 무행위요, 외양으로는 행동을 피하면서도 마음속에는 천만 칸 기와집을 짓고 있는 사람의 무행위는 행위다. 이러한 행위의 이치를 깨우친 사람은 자신이 하는 행위는 없고, 지고자의 '명'을 받고 행할 뿐이다. 마치 차부가 이끌 듯이 움직이는 말과 같다.


행위 속에 무행위를 보며 무행위 속에 행위를 보는 자는 사람 중에서 깨달음을 얻는 자니라. 그러한 사람이 요가를 닦는 사람이요 모든 행위를 완성하였느니라.



그의 몸은 기계적으로 움직일 뿐이고 행동자는 하나님이지 그 자신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가 행위를 이겨낼 때까지 언제고 기다려 줄 수는 있지만, 직접 전장에 나가거나 산을 기어오르지는 않는다. 이것이 하나님과 나의 관계이다. 나는 자신를 무(無)에까지 낮춘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라고 보는 것이 『기타』의 사상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자연을 닮았다. 하나님이 부리는 대로 꽃을 피우고 바람을 일으키는 대자연과 나는 하나가 되며 천지인(天地人)의 관계를 완성한다. 이 때 나의 행위는 지속적이어야 한다. 오래된 동양의 정신에서 '불성무물不誠無物', 즉 성실하지 않으면 만물이 생장할 수 없다고 한다. 어머니의 사랑이 없이 아이는 어린이도 될 수 없으며, 설사 어른이 되었다 할지라도 사랑을 나누어줄 수 없다. 세상에 사랑을 나누얼 줄 수 없는 사람은 마찬가지로 세상을 위태롭게 만드는 사람이다. 세상은 지고자의 지속적인 사랑과 인내로운 기다림으로 인해 유지되고 있다.


 활을 양껏 당기지 않고는 살이 힘있게 나갈 수 없고, 마음을 속으로 당기어 그 밑바닥에까지 이르게 하지 않고는 힘이 날 수 없다. 그리고 마음이 활발하며 강하지 않고는 세상에서 성공할 수 없다. 그러므로 크리슈나는 이 세상에서도, 저 세상에서도 성공하려면 정화, 즉 희생을 계속함이 필요한 것을 말해 준다.



무위는 곧 내버림이다. 아르주나가 고뇌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버리지 못하고 구질구질하게 안고 갔기 때문이다.


장자 - 안회(顔回)가 "감히 묻잡니다. 마음 씻기[心齋]란 무엇입니까" 한다. 중니(仲尼)가 "네 뜻을 하나로 하여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으며,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운으로 들어라. 들음은 귀에 그치는 것이고, 마음은 가져다 맞추는 쪽[符]에 그치느니라. 기운이란 비어 가지고 물건을 대하는 것이다. 도는 오직 빔에 모인다. 비게 함이 마음 씻음이니라"고 답한다. 안회가 "제가 처음에 그렇게 시켜주심을 얻지 못했을 때 정말 스스로 회(回)이옵더니, 시켜주심을 얻고 나니 비로소 회란 것이 있지 않습니다. 이러면 빔이라 할 만하옵니까." 스승이 "됐다" 하였다.



내버림이란 것은 수십년 동안 자신이 갖고 있었던 성향이나 습관, 이성 등을 모두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자아의 저항도 대단할 것이다. 하지만 내버림은 행위를 통해 높은 수준(영적인 수준)에 있는 신령한 의식 안에 존재하는 자유에 도달할 수 있다. 사람이 무지하면 수십 년 동안 틀린 지식을 신봉할 수 있다. 하지만 단 한 순간이라도 진리의 빛을 쬔 사람이라면 승복할 것이다. 이러한 영적인 체험을 통해 신 의식으로 들어간다. 거기가 바로 집 중의 편안한 집이며, 완성된 자아의 모습이다.


진정한 신


『기타』의 특징은 앞에서 말한 대로 유연한 신앙에 있다. 궁극의 종교로 가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 바로 유연성이다. 아직도 중동에서는 민족간 분쟁과 종교간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윌 듀런트는 종교 등의 미묘한 문제로 생기는 대립이 가장 무서운 것이라고 했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자행되었던 만행의 역사를 보라. 다른 사람들에게는 신이 없고 반드시 지정된 신만을 섬겨야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여기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오지에 가서 똑같은 신을 섬기지 않는다고 해서 불경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신앙의 강요는 가장 잔인한 폭력이다. 왜냐하면 다른 신을 믿는 사람과 그의 신 둘을 모두 죽이기 때문이다.


맑은 물을 얻기 전에는 더러운 물을 버리지 말라는 가르침에 따라, 인도의 만신당(萬神堂) 안에는 군중들이 섬기던 가지가지의 신들이 다 모시어져 있다. 하늘의 신, 바다의 신, 시내와 숲의 신, 먼 옛날의 전설의 신, 부락 호수의 남신 여신. 시대가 지나가는 동안 어떤 것도 잃어서는 아니 된다는 두려움에, 모든 진실된 확신을 어느 것 하나 버리지 말고 조화시켜 보자는 생각에, 그것은 자신 속에 형형색색의 요소와 동기를 다 포함하는 하나의 엄청난 종합에 도달하게 됐다. 종교 안에서 깜깜하고 원시적인 미신이 시글거리는 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들의 신은 욕망에 의해 그려진 신이기 때문에 『기타』가 추구하는 초월적 신과는 다르다. 이들은 자신이 욕구하는 것만을 취할 뿐이다.

거룩한 바탈은 해탈을 위한 것이고 귀신 바탈은 얽어매임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판두족의 아들아, 슬퍼하지 마라, 너는 거룩한 바탈로 났느니라.



정통종교의 이름으로 자유와 독립, 인간의 존엄을 거짓으로 해석한 종교가 세상을 병들게 하고 있다. 처음의 말씀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해석이 나오는 현상은 가르침을 받는 자들이 스승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했거나 그 안에 자신의 사리사욕을 살짝 집어넣은 경우다. 가르침이 천년이고 만년이고 전달되기 위해서는 가르침을 받는 사람은 온몸을 비우고 맑은 정신으로 그저 지고자의 명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임의의 판단은 불성실과 죄악의 결정적인 증거이다.

 

인간의 연약함을 안다는 것과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그저 주는 복만을 바라는 것은 결코 같은 말이 아니다. 불쌍히 여기신다는 것은 죄 속에 있으면서도 거기서 빠져나오려고 애를 쓰는 그 마음을 불쌍히 여기시는 것이지 결코 덮어놓고 무조건 그러시는 것은 아니다. 연잎이 물에 젖지 않는 것은 젖지 않는 성질을 제 속에 길러내어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 누가 거기 무슨 칠을 해주어서는 아니다. 하나님은 결코 뺑끼칠장이가 아니다. 그런 따위 그릇된 신앙이야말로 이 세상의 권세자와 야합하여 역사를 언제까지라도 구정물 속에 썩게 하는 것이다. 그런 일을 가리켜 예수는 "거룩한 것을 돼지에게 주는 것"이라 했다.

우리가 이러한 악행을 저지르게 되는 이유는 우리 마음 속에 악한 마음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참된 자아를 찾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생각이든 행위든 성(誠)이 바탕이 되지 않고는 변태되기 십상이다. 궁극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무기는 '성실함' 밖에 없다. 그것도 임의에 따라 하고 안하고가 아니라 이미 나의 결정을 초월한 행위이다. 나의 최고의 판단에 의한 행위는 신이 시키는 행위다. 우리가 인(仁)을 생각하고 있으면 인을 행할 수 있지만, 인한 행위가 수천 년에 걸쳐 나오지 않는 이유는 인이 틀려서가 아니라 행위의 지속성을 담보할 바탕이 허약하기 때문이다. 나의 판단이란 것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를 우리가 자유라 부르기는 거북스러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들의 일생 동안 자유라고 부를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었는지를 생각한다면 이러한 자유가 내가 생각했던 자유보다 더 자유로워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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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주나무 2005-10-07 공감(42) 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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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두교의 살아 있는 성전 새창으로 보기 구매
바가바드기타는 힌두교 세계에서 가장 널리 애송되는 경전이다.  권위로 보면 "베다"나 "우파니샤드" 같은 계시서가 이보다 우위에 있다 하겠지만, 인도 대중들에게 끼친 영향력 면에서는 오히려 계시서를 능가하는 경전이 '거룩한 자의 노래' 바가바드기타이다.  바가바드기타는 궁극적 실재에 대한 어떤 체계적인 논리를 펴지 않는다. 단지 실천적인 삶의 원리를 가르칠 뿐이다. 지고자의 실재성은 논리적인 사변의 대상이 아니라, 영성에 의한 체험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진다.
신흥동 2011-09-24 공감(4)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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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에 관한 최고의 고전 새창으로 보기
바가바드기타는 인도에서 고대로부터 전수되어온 깨달음에 대한 철학시로써, 부족간의 전투에서 친족과의 전투에 임한 주인공이 싸움을 할지를 망설이는 상황에서 조언자가 등장하여, 주인공에게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며, 싸움에서 이기면 현실에서 승리를 쟁취해서 좋고, 만일 싸움에서 져도 정의를 위해서 싸웠기 때문에 죽어서도 영혼은 해방되므로 좋으므로, 절대 망설이지 말고 싸움에 임하라는 격려의 내용이 담겨있는 글입니다.

보통 깨달음은 소극적 방관 내지 내 마음의 평화를 지키고,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에 초연한 것이 마치 참 깨달음인 것처럼 알려져 있는데, 이 책을 보면 이런 선입견이 철저히 깨어지게 됩니다.

 

 

또한 이 책을 통해서

살면서 가끔씩 내 마음속에서 울리는 양심의 소리에 대해서도 재고하게 됩니다.
만약 내안에 나라는 느낌을 주는 자의식외에
또다른 뭔가가 있다면 아마 양심이겠죠...
이 양심을 장자는 참주인이라고 불렀고, 하느님, 진리, 도,
진아, 참나, The Self등 참으로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답니다.
이 책은 그 양심의 입장에서 현실에서 어떻게 행위하고 어떤자세로 삶에
임해야 할지를 옆에서 차근차근 얘기해 준답니다.

 

또 요즘처럼 바쁜 현대인들에게 소극적인 도피보다는 적극적인 행위를 통해 깨달음에 이를수 있는 길을 제시하는 점에서 아주 유용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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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천 2014-01-08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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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바가바드 기타 새창으로 보기 구매
읽다가 한글의 아래아 글자까지 나오는 것을 보고 읽기 포기했다. 외국의 옛 문헌을 꼭 우리의 옛날 글자로 옮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해설도 그렇게 와닿지 않았다는 점은 덤이다. 지금은 올재 클래식에서 나온 바가바드 기타를 읽고 있는데 훨씬 읽기도 편하고 해설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미친 나이스가이 2020-08-19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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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르주나면 함석헌 선생이 크리슈나 새창으로 보기
      처음엔 엄청난 양의 주석에 뜨악했다. 흐름이 끊기지 않을까 걱정도 되었다.
 읽어보니 함축적으로 표현된 기타를 이해하는 데 주석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 
오히려 없었으면 곤란했을 뻔했다. 
기타 못지 않게 주옥같은 명사들의 주석들이다.   함석헌 선생님 이름만 들어보았지 읽어본 저서가 없어서 어떤 분인지 잘 몰랐는데 글을 통해 만난 선생은 절로 존경심이 드는 분이었다. 함석헌 선생님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무지개모모 2013-07-16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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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들의 삶 속에 숨쉬는 경전, 『바가바드 기타』







『베다』나 『우파니샤드』와는 달리 언제나 서민 대중의 삶 속에서 호흡해온 대중들의 경전 『바가바드 기타』는 인도의 모든 지역, 모든 계층이 공유하며 다양한 인도를 하나로 묶는 공통분모격으로서 힌두교의 살아 있는 성전이라 할 수 있다.

쿠르크셰트라 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무대로 하는 『바가바드 기타』는 바로 이 전쟁이 벌어지려고 하는 찰나에 전쟁에 대한 대의명분을 가지고 전쟁터로 나갔으나 상대편 군대에서 자기의 혈족들을 바라보고는 고뇌에 빠지게 되는 아르주나와 크리슈나의 대화를 기록한 것이다. 여기서의 전쟁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모순을 나타내는 인간 내면의 전쟁이라 할 수 있겠다. “싸우라”고 아르주나에게 조언하는 크리슈나의 표현도 결국 전쟁을 명한 것이라기보다는 슬픔과 미혹으로 생겨난 장애를 제거하기 위한 촉구일 뿐이다.

현대에 들어 『바가바드 기타』는 더 큰 의미로 부각된다. 간디는 어려움에 직면할 때마다 마치 모르는 영어 단어를 영어사전에서 찾아보듯이 이 행동의 사전을 찾아보았다고 한다. 이외에도 라다크리슈난, 시성 타고르 등 수많은 인도의 정신적인 지도자들에게 『바가바드 기타』는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힌두교 경전 중 가장 먼저 번역된 이 『바가바드 기타』는 주석을 단 함석헌 선생이 토박이 우리말로 풀어썼다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문자에 얽매이기보다는 뜻을 헤아려 새기는 가운데 우리의 고유 사상을 녹여놓았다는 점에서 『바가바드 기타』의 한국적인 토착화를 이루어 그 의미가 더욱 돋보이며 값지다 할 수 있다.


눈을 감고 마음을 다스리는 명상의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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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리에 올라앉아, 마음을 한 점에 집중하고, 사념과 감각을 제어하여, 자기 혼을 정결케 하기 위하여 요가를 닦을지어다.

함석헌 - 장소나 자리에 대해 주의할 요점은 장시간 동안 밖에서 오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는 방해를 받음이 없이, 그리고 사람의 몸이 피로해짐이 없이 견디어갈 수 있도록 하며, 마음의 활동이 깊은 정신적 체험에 들어갈 수 있도록 순조롭게 되어가도록 하자는 데 있다. 정신일도 하사불성(精神一道 何事不成)이라는 말을 많이 쓰지만 그런 지경에 가려면 많은 훈련을 쌓은 후에야 이루어지고, 처음에는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육신 속에 있는 것이므로 생리적인 법칙을 무시하지 말고, 서두르지 말고, 침착한 마음으로 지킬 것을 지켜가며, 불급불완(不急不緩)의 겸손한 태도로, 단계적으로, 제 분에 맞는 대로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특히 기독교 개신교 사람들이 주의할 것은 개신교에서는 신앙을 강조하는 나머지 개인 자질에 생리적 심리적 차이가 있다는 점을 생각 않고, 아직도 욕심을 제어하지 못한 사람들까지도 제멋대로 열심을 내어 구하기만 하면 된다 하기 때문에 잘못되는 일이 많다. 초심자는 반드시 신뢰할 수 있는, 체험 있는 이의 지도를 받는 것이 필요하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것을 보면 주의깊게 그 사람과 경우를 생각하여서 지도하신 것을 알 수 있고, 바울도 처음에는 어떻게 했는지 모르나 일단 폐단이 생긴 후는 그것을 바로 지도하기 위해 애쓴 것을 알 수 있다. 정신에라고 결코 법칙도, 원리도, 순서도 없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기독교가 아직 샤머니즘을 탈피하지 못했다는 데는, 다른 여러 가지 이유도 있겠지만 이 점도 확실히 그 하나임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라다크리슈난 - 12절에서 요가라 한 것은 쟈나 요가(dhyana yoga), 즉 명상을 말한다. 진리를 깨달으려면 실제적인 이해 관계에서 놓여나지 않고는 아니 된다. 그런데 실제적 이해란 우리 사는 외계의 물질적인 세계와 서로 얽혀 있다. 그 주된 조건은 잘 수양된 가라앉은 마음이다. 우리는 사물을 대할 때 될수록 자유롭게 비틀리지 않은 지성을 볼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 자신을 국외에 세우지 않으면 아니 된다.

피타고라스(Pythagoras)는, 왜 자기 자신을 철학자라 부르느냐 하는 질문을 받았을 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한다. 그는 인생을 올림피아 같은 큰 축제에 모인 가지각색의 군중에다 비했다. 어떤 사람들은 저자에 장사를 하러 가 재미를 보고, 또 어떤 사람들은 경기에 나가 상을 타려고 가고, 그리고 또 어떤 이는 단지 그런 것을 보려고 가는데, 이 나중 사람이 철학자라고 했다. 그들은 직접적인 문제나 실제적인 필요에 버물려 들지 않는다.

샹카라는 지혜를 탐구하는 자의 가장 근본적인 자격은 영원한 것과 영원하지 못한 것을 분별할 줄 아는 능력과, 현세적 내세적 행동의 결과를 누리자는 생각에 집착하지 않음과, 자제와 정신적 자유에 대한 갈망이라고 했다. 플라톤에게는 모든 지식의 목적은 선(善), 즉 삶과 앎에 다 같이 근원이 되는 선의 관념에 대해 사색할 수 있는 데까지 우리를 높여주는 데 있다. 따라서 이상적인 철학자란, 인생을 힘껏 다 살고 난 끝에 가서 그의 목적이 언제나 고요하고, 안으로 향해 잠잠하고 고적하며 떠나 있는 살림에 있는 사람이다. 그 살림 속에서는, 세상이 그를 잊음으로 인해, 그는 세상을 잊고 자기의 하늘을 선에 대한 외로운 명상 속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 그것만이 참 살림이다. “마음이 정결한 이는 복이 있나니, 저가 하나님을 볼 것이다.” 이 혼의 정화는 훈련에 의해서만 얻어진다. 플로티노스는 “지혜는 안정 속에 있는 심성의 한 상태라”했다.

마하리시 마헤슈 요기 - 크리슈나가 밝히고자 하는 첫째는 명상은 반드시 앉은 자세로 해야지, 눕거나 서서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누우면 정신이 둔해지고, 서면 마음이 자아 속으로 깊이 빠져들어 갔을 때 쓰러질 염려가 있다. 명상을 시작하려면 마음이 정상적인 상태에 있어야 한다. 마음이 둔해져도 못쓰고 너무 활발해도 못쓴다. 둔하면 잠이 와서 체험할 능력이 없어지고, 너무 활발하면 이 조잡한 의식 속에 남아 있어서, 말하자면 오묘한 체험 속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셈이 된다. 마치 수면에서 활발하게 동작하면 물 속에 빠지지 않는 것과 같다. 명상한다는 것은 마음이 자아의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일인데, 만일 섰을 때와 같이 마음이 너무 활발히 작용하면 그 빠져드는 과정이 시작되지 못한다. 그래서 명상은 앉아서 하라고 한 것이다. “한 점에 집중하고”에서 한 점에 집중하려면 마음이 점점 더 오묘한 지경에 들어가는 대로 두어야만 잘된다.




요가 수행자. 요가는 우주적 에너지의 원천과 하나되는 체험이다.

『바가바드 기타』 제6장 「진정한 요가」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욕망과 분노에 대한 통찰

『바가바드 기타』는 쿠루크셰트라 전쟁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무대로 한다. 하스티나푸라(Hastinapura)에 자리 잡은 쿠루족의 두 형제 가문, 즉 카우라바(Kaurava)형제들과 판다바(Pandava) 형제들이 쿠루르셰트라 들판 양편에 군대를 대치시키고 왕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살육전을 벌이려는 극적인 상황에서 『바가바드 기타』의 가르침이 시작된다. 원래 바라타 왕국의 정당한 후계자였던 유디슈티라(Yudhis.t.hira)가 카우라바 형제들 가운데 맏형 두료다나(Duryodhana)와 도박을 하여 그 결과로 그는 왕국을 잃고 네 형제들과 함께 13년 동안 숲 속에 유배되었다. 약속한 기한이 되어 유디슈티라가 두료다나에게 자신의 왕국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그의 요구는 거절되고 결국 두 가문 간에 전쟁이 불가피하게 된 것이다. 『바가바드 기타』는 바로 이 전쟁이 벌어지려고 하는 찰나에 판다바 가문의 다섯 형제 중 셋째인 아르주나(Arjuna)와 크리슈나(Kr.s.n.a) 사이에 오간 대화를 적은 것이다.

아르주나는 이 전쟁에 대한 확실한 대의명분을 가지고 전쟁터로 나간다. 그러나 그는 상대편 군대에서 자기 사촌들, 아저씨, 할아버지 등 혈족들을 바라보고는 고뇌에 빠진다. 왜냐하면 그가 자신의 혈족을 죽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혈족을 죽이고 왕국을 되찾느니 차라리 숲으로 은거하여 명상에 몰두하는 고행자의 삶을 택하려 한다. 그때 크리슈나는 아르주나에게 ‘싸우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이 곧 크리슈나가 전쟁 그 자체를 옹호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크리슈나는 결코 전쟁을 열망하지 않았으며, 그는 오히려 두 가문 간의 갈등을 중재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평화의 사절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그런데 그의 역할은 카우라바 지도자들의 억지 때문에 실패했다. 싸우지 않겠다는 아르주나의 주장을 논박하는 과정에서, 크리슈나는 판다바족에 관한 한 그 전쟁이 정당하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수행하는 것이 아르주나의 의무라는 것을 보여주면서 세속적인 관점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이유들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크리슈나의 가르침이 지니는 요체가 정작 전쟁 그 자체에 대한 옹호가 아니라, 아르주나의 결심, 즉 싸우지 않겠다는 것이 왜 옳지 않은가를 보여주는 데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아르주나가 싸우지 않겠다는 것은 단지 그 대상이 자기의 혈족이기 때문이다. 그가 자기의 사랑하는 혈족들을 죽이느니 차라리 스스로 죽겠다는 말은 일면 매우 사리에 맞는 것 같지만, 그것은 영원한 자아의 본질을 망각한 결과이며 냉철한 판단의 결과가 아니었다. 그는 무지와 이에 수반되는 격정 때문에 고뇌했다. 결국 그는 스스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가 그의 마음이 어두운 먹구름으로 가려졌으며, 옳고 그름을 분간할 수 없다고 고백했을 때, 크리슈나는 그에게 바른 지식을 내려 무지를 제거하려고 한다. 그 가르침은 아르주나 혼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의 고뇌를 다루는 가운데, 크리슈나는 모든 인류의 선을 위하여 『바가바드 기타』를 설한다.

‘싸우라’는 표현에 대하여 샹카라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그것은 전쟁을 명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슬픔과 미혹으로 생겨난 장애를 제거하기 위한 촉구일 뿐이다. 자아란 육체적 생사를 초월한다는 것과, 누구나 자기 신분에 주어진 사회적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설정된 상황이 바로 전쟁이다. 『바가바드 기타』의 가르침은 슬픔과 미혹과 같은 윤회의 원인을 제거하자는 것이지 결코 전쟁을 명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바가바드 기타』의 쿠루크셰트라 전쟁은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모순을 나타내는 인간 내면의 전쟁이다. 『바가바드 기타』의 가르침이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 놓인 아르주나의 고뇌로 시작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다. 전쟁은 죽거나 죽여야 하는, 생명이 무참히 살해되는 인간의 극한 상황이다. 『바가바드 기타』의 가르침은 먼저 이러한 극한 상황에서 고뇌하는 아르주나의 내면을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여기서 아르주나는 내면의 싸움에서 미혹에 눈멀고 두려움에 떠는 모든 사람을 대변한다.

이어서 설해지는 가르침이 더욱 매혹적인 것은, 그것이 아르주나의 내면의 큰 위기를 나타내는 전쟁이라는 구체적인 상황 속에 설정되기 때문이다. 전쟁이라는 상황 속에서 여실하게 드러나는 죽음이라는 문제에 대한 철저한 고뇌가 있기 때문에 참다운 철학이 가능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사람은 위기 상황에서 정확히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다. 삶 가운데 문득 찾아오는 중대한 위기 상황은 우리의 마음속에 궁극적인 가치에 대한 생각을 자극한다. 오직 그때 영적인 세계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감각의 장애를 깨부수고 내적인 실재에 닿는 데 필수적인 긴장을 얻게 된다.

아르주나의 낙심은 단지 실망한 사람의 일시적인 기분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비실재성을 일깨우는 공허감, 가슴속에 느껴지는 일종의 죽음 상태이다. 아르주나는 만일 필요하다면 자신의 생명을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무엇을 해야 옳은지 모른다. 그는 전율스런 시험에 직면하였으며, 감당하기 어려운 고뇌가 그를 뒤흔든다. 아르주나가 마주치는 절망감은 문득 깨달음의 길에 꼭 지나야 할 영혼의 어두운 밤이다.

이처럼 『바가바드 기타』는 전쟁 그 자체보다는 이를 통하여 내면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순과 갈등을 다루고 있다. 영혼의 삶은 쿠루크셰트라의 전쟁터로 상징되며, 카우라비족은 영혼의 진전을 방해하는 적이다. 아르주나는 시험을 물리치고 감정을 제어하여 인간의 왕국을 되찾으려고 시도한다. 전진의 길은 고통과 자기 극기를 통해서 가능하다. 내면의 삶에 대한 추구는 “사지가 주저앉고, 입은 바싹 타며, 전율이 내 몸을 휩싸고,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아르주나의 고뇌를 요한다. 이어지는 크리슈나의 가르침---참된 자아에 대한---이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것은 죽음에 대한 아르주나의 철저한 고뇌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바가바드 기타』의 시작은 갈등과 모순, 이기심, 악마의 부드러운 속삭임이 교차하는 인간의 내면세계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준다. 크리슈나와 아르주나의 대화가 진행됨에 따라 우리가 듣는 것은 전쟁의 아비규환이 아닌 신과 인간 간의 진지한 교감을 보게 된다.

이거룡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교수·심신통합치유학


함석헌 선생은 1901년 평북 용천에서 태어나셨다. 평양고등보통학교를 다니다 3운동에 참가, 학업을 중단하셨는데 오산학교에 편입하여 이승훈, 유영모 선생의 영향을 받으셨다.

동경고등사범학교 문과일부를 다니실 때 우치무라 간조 선생의 성서연구 집회에 참여하셨고, 귀국하여서는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셨다. 1932년에는 『성서조선』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쓰기 시작하셨으며, 1938년 창씨개명과 일본어 수업을 거부하여 오산학교를 사임당하셨다.

해방을 맞아 용암포·용산군 자치위원장을 지내시고 평안북도 자치위원회 문교부장에 취임하셨다. 1947년 월남하셨으며, 서울에서 매주일 YMCA 강당에서 일요종교집회를 가지셨고, 6?5가 일어나자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하시게 되었는데 이때 『수평선 너머』를 발간하셨다. 1953년 서울로 올라오셨고, 서울 용산구 원효로에 사택을 마련, 1956년부터 『사상계』에 집필을 하셨다.

1970년 잡지 『씨알의 소리』 창간호를 내셨고, 1979년 퀘이커세계협회 초청으로 미국종교대회에 참석하시기도 했다. 노벨평화상 후보로 두 차례 추천을 받으셨다. 남강문화재단을 1984년 설립하셨고, 제1회 인촌상을 수상하신 바 있다.
저서로는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비롯해 『인간혁명의 철학』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 등 많이 있는데 이는 한길사에서 펴낸 ‘함석헌 전집’ 20권에 모아져 있으며, 1996년에 나온 ‘함석헌 선집’ 5권에 다시 정리된 바 있다.

출처: https://hangilsa.tistory.com/138 [여기는 한길사 블로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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