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31

Philo Kalia 심광섭 폴 틸리히 산산조각이 나고 바스러져서 그 심층에 흐르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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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un Ju Kim
2 h ·




Philo Kalia  심광섭
18 h ·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기독교 사상사의 ‘근대’ 편에서 교회 내부의 신학적 운동보다 교회 밖에서 일어난 사상적 변화에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교회 내부의 신학자로서 크게 다룬 인물은 정통주의와 경건주의, 복고신앙 조금, 슐라이어마허와 키르케고르, 틸리히의 스승 마르틴 켈러와 하르낙 정도이고, 
그 외에는 모두 교회 밖의 사상적 운동이다. 계몽주의와 낭만주의, 스피노자와 헤겔, 셸링, 포이어바흐와 마르크스, 쇼펜하우어와 니체. 이들은 전통 교회와 신학의 비판자로서 근대의 새로운 정신세계를 열었고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사상가들이다. 
이들은 오늘의 인간 상황을 분석하고 이해하는데 오히려 신학자들보다 더 근본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틸리히는 말한다. 그는 복음적인 대답만이 아니라 인간이 처한 상황의 분석과 이해를 신학에 포함시킨다.

이는 틸리히가 신앙의 내용을 서술하는 조직신학을 구성하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계시-하느님-그리스도-성령-하느님 나라’로서의 조직신학이 아니라 
‘이성과 계시, 존재와 하느님, 생명과 영, 역사와 하느님 나라’, 
이처럼 ‘와’(and)를 중심으로 상황과 복음을 동시에 결합한다. 

신학은 상황 혹은 복음의 양자택일 아니라 
상황과 복음을 비평적으로 묶어 창조적으로 엮는 ‘와’에서 사건화되고 발생한다.

틸리히의 신학적 태도는 인간의 상황, 인간의 곤경에서 절대로 신을 발견할 수 없다는 칼 바르트의 입장과 다르다. 
  • 바르트 같으면 신이 밖으로부터 인간이 있는 곳으로 찾아와서 인간에게 말해야 한다. 바르트 신학은 인간의 도덕적, 정치적, 종교적 상황으로부터, 인간의 곤경으로부터 출발할 수 없다. 인간 안에는 신과 만날 수 있는 아무런 접촉점이 없다. 
  • 바르트는 동료 에밀 브룬너의 『자연과 은총』이란 저서에 대해 한마디 큰 소리로 『아니요』(Nein!)라고 잘라 말했다. 단호한 Nein!에서 신앙의 절대성을 지키려는 20세기 파수꾼의 숭고한 사명을 느낀다. 
  • 그래서 바르트는 『19세기 프로테스탄트 신학』에서 18세기의 계몽주의, 루소, 레싱, 칸트, 헤르더와 노발리스를 신학의 전사(Vorgeschichte)로 다룬다. 이것은 연대기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내용상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르트의 사자후(獅子吼)도 역사적 울림일 뿐이다.

 틸리히는 “이제 나는 이 사상이 지탱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오늘날 인간은 후견인이 불필요한 성인(成人)이 되었기 때문이다. 
성인이 된 세속 세계 속에서 종교영역과 문화영역의 분리는 이 이상 존속될 수 없다. 
교회는 역사에 나타나는 신적인 것의 유일한 대표가 아니다. 세속문화도 이와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 
본회퍼의 사상에 따르면 현재에 있어서 아마도 세속문화가 더 참된 권리를 가질지 모른다. 성과 속의 분리는 성서에는 없는 생각이다. 
성스러운 시간과 공간이 구별되어 따로 있으며 그 안에, 그 시간에 입장해야만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성서에 없다. 
하느님이 임하는 장소, 하느님이 현존하는 시간이 성소(聖所)이고 성시(聖時)이다. 성소와 성시가 교회나 성당, 예배와 미사 시간으로 제한되는 것이 아니다. 신구약 성경 어디에서도 이런 개념을 찾아볼 수 없다. 
물론 성전과 교회, 안식일과 주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 장소와 시간이 거룩함을 체험하고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배타적인 시공간은 아니다
‘아버지가 피우시던 꽁초’(레오나르도 보프)와 ‘강아지똥’(권정생)이 성사가 될 수 있듯이 뒷간도 성소가 될 수 있다  (손원영, “기독교의 생태신학적 ‘뒷간신학’”).

교회는 문화의 자율적 발전에서 떠나 있어야 하는가? 
교회는 문화 전체에 대해서 최후의 진리 보루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적응성을 잃고 구석으로 밀려나 있어야 하는가? 
아니면 일반 세속문화 안에 있는 종교적 요소와 종교 안에 있는 문화적 요소를 이해하고, 지난 시대와 문화에 존재했던 통합과 같은 새로운 통합을 지향하는 시도를 꾀할 것인가? 
지상에서 문화와 종교의 통합은 가능할 것인가? 
아니면 종교 없는 문화, 문화 없는 종교로 영역을 분할 축소하여 자신들만을 위한 닫힌 성안에서 자신들만의 잔치를 고집할 것인가?

지난 2년 코로나19의 경험을 통해 무엇이 달라져야할까? 
보이는 ‘내’ 교회중심의 신앙생활이 이완되어 교회와 세계, 신앙과 문화 및 예술을 갈랐던 경계의 문들이 열리고 담들이 무너졌으면 좋겠다. 
세계의 정치와 경제, 문화와 예술, 유불선 이웃 종교 등은 교회가 복음을 전하기 위한 수단이 결코 아니다. 
그들 자체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해석할 수 있는 주체이며, 그들 안에 깃든 종교적 옥동자녀(玉童子女)를 산파(産婆)해야 한다. 
적용이나 해석이 아니라 산파술이 필요하다. 
문화 없는 종교로 축소될 수 없듯이 종교 없는 문화로 축소될 수 없다. 이런 방향은 인간의 풍요로운 자기실현을 위해 해로울 뿐이다. 
유구한 종교적 가치는 세속적 무신론의 사회 속에서 없어진 것이 아니라 
산산조각이 나고 바스러져서 그 심층에 흐르고 있음을 다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