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30

[조성환] 나에게 주어진 새길 - 성산기획

[조성환] 나에게 주어진 새길 - 성산기획

[조성환] 나에게 주어진 새길



나에게 주어진 새길

– 원광대학교 초대 총장 숭산 박길진의 일본 유학과 대학 경영 –

조성환 (원광대학교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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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길 – 일본으로 떠나는 숭산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던 해에 숭산 박길진(1915~1986)은 유학 길에 올랐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교단도 어려운 상황인데다 종교가 아닌 철학을 공부하러 간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모험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을 깊이 이해하고 세상을 넓게 보기 위해서는 철학을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이미 고등학교 시절부터 싹트고 있었다. 숭산은 철학에 심취했던 배제고등학교 시절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나는 4학년으로 올라가면서 생각이 서서히 전환되기 시작했다. (…) 이때부터 나는 안으로 나 자신 인생 문제를 해결해야겠다는 데 귀결되었다. 그래서 철학 서적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철학개론과 논어, 맹자, 중용에 이르기까지 독파하였고, 읽으면 읽을수록 더욱 철학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으며 그 방향의 공부에 집중하였다. (숭산종사 추모기념대회: 아, 숭산종사, 2004, 43쪽)

숭산이 유학의 목적지로 동양대학(東洋大學)을 선택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동양대학은 “모든 학문의 기초는 철학에 있다”는 건학이념을 내건 ‘철학대학’이었기 때문이다. 동양대학을 창시한 이노우에 엔료(井上円了, 1858~1919)도 숭산과 비슷한 나이에 동경대학 철학과에 입학했다(1881년, 24세). 입학생은 단 한 명이었다. 숭산 역시 원불교 역사상 최초의 유학생이었다. 숭산이 유학을 떠나기 직전에 쓴 「새로운 출발」(1937)이라는 시에는 그의 비장한 각오가 느껴진다.

새로운 출발

험악하고 무서운 길이다.

나는 이 길을 걸어갈 때 자기 이욕(利慾)을 만족시키려는 고부라진 마음을 주의할지며,

모둔 동지와 선배들과 같이 우리의 사명과 의무를 끝까지 이행하리라.

아는 내 개체를 불에 던지더라도 그것은 절대로 어기지 않겠다는 용기승천의 세력으로

재출발을 부르짖는다.

언이행난(言易行難)의 인간이다. 배움이 있고 앎이 있고 실행이 있는 인물이 되어야 한다.

배우고도 모르고 실행없는 인물은 무용지물이다. 실행 있는 충실한 인물이 되어야 한다.

활기있게 말과 정신과 실제의 덩어리를 한 뭉치로 만들어 전신에 걸머지고

육해산상(陸海山上)으로 날뛰며 한 마디의 호령으로 잠든 강호를 깨우치리라.

도덕이 쇠퇴한 사회다. 나에게 원천을 준 위대한 삼강령팔조목과 사은사요이시여,

이제 나는 ‘당신’의 품안을 떠나지 않고 위대한 정신을 받아 혼란한 사회를 위하여

영원히 땀과 피를 아끼지 않고 정의도덕을 위하여 분투노력하여서

불만을 느끼는 ‘당신’의 얼굴에 만족의 미소를 띄게 하리라.

이 시를 보면 당시 숭산은 “다시 태어난다”는 마음으로 유학의 장도에 올랐던 것 같다. 흥미롭게도 「서시」의 주인공 윤동주(1917~1945)도 이듬해인 1938년에 「새로운 길」이라는 시를 쓴다. 그 역시 연희전문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에 남긴 작품이다.

새로운 길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이 두 시에는 낯선 환경에서 새로운 공부와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는 한국 청년들의 비슷한 감성이 담겨 있다.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젊은이들이 각오를 다지고 미래를 꿈꾸던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구도 : 동양대 유학 생활

숭산은 일본에 공부하러 가는 대신 교단으로부터 커다란 ‘사명’을 부여받았다. 그것은 귀국 후에 교육 기관을 하나 맡아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 박길진이 아닌 공인 박길진으로서 감당해야 할 일이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내가 일본에 가서 공부한 목적은 인재를 양성할 교육 기관을 하나 맡을 것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대학을 다닐 때 벌써 ‘불교전수학원’ 원장의 발령장이 날아오기도 했었다.”

(원보 17호, 1983.02.01.)

“총부에서는 졸업식도 하기 전 내게 「불교전수학원」이란 발령장을 보내왔다.”(숭산문집, 64쪽)

교단의 사명을 지고 떠난 유학이었기에 각오는 남달랐지만, 막상 일본에 도착해보니 유학 생활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무엇보다도 경제적인 어려움이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숭산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몸 불편하고 돈도 한 푼 없으면서 무엇을 가졌길레 기운은 그리 살았오.

그뿐인가 땅 한편 없고 집 한간도 없오. 가진 것이 있다면 희망 하나 뿐이오.”

(「희망」, 일본 수학시, 일원상과 인간의 관계, 316쪽)

그렇다면 무엇이 그로 하여금 꿈을 포기하지 않게 만든 것일까? 진리에 대한 열정과 세상에 대한 애정이었던 것 같다.

“읽을 틈이 없다고 한탄치 말고, 볼 능력이 없다고 서러워 마라. 우리는 아직도 욕심을 억제할 여유가 있고, 사랑하고 불쌍히 여길 힘이 있지 않는가. 힘과 여유가 한 가지 있건마는 될 일은 아니하고 안 되는데 구하더라.” (「구본(求本), 회보 54, 1939년 5월 1일, 42쪽」

비록 외국생활은 어려웠지만, 유학시절은 숭산에게 생각을 정리하고 학문에 몰두할 수 있는 최고의 환경을 마련해 주었다. 그는 한편으로는 독서와 사색에 몰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수양과 구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도일(渡日) 후 동양대학에 취학하면서부터 나는 전일(前日)에 범한 사고의 극단을 정리하면서 순수한 학문 세계에서만 골몰하였다. 즉 독서와 사색에의 건전한 태도로 종교가로서 일체를 준비하는 한편, 저명한 불교학자며 일반 종교들과도 자주 상종하면서 우리 한국을 불교의 나라로서 발전시켜야겠다는 신념을 굳게 하였다.” (1958.10.25. 학보 8호.)

이처럼 숭산은 일본에서 단지 철학을 ‘배우는’ 것에 머물지 않았다. 다양한 종교와 폭넓은 교류의 경험을 쌓았다. 그것은 하나의 새길을 찾아가는 구도의 과정이기도 하였다. 그는 일본의 세계적인 사회운동가인 카가와 토요히코(賀川豊彦, 1888~1960)를 찾아가 ‘신(神)’에 대한 문답을 나누기도 하였다.

나는 그분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였다.

“신에 대한 신앙이 철저하신데 그 신이 어딘가는 계실 것입니다.

제게 지금 그 신을 보여주셨으면 합니다.”

얼마동안의 침묵이 흘렀다.

그런 후 정원수의 나뭇잎 하나를 따서 나에게 주고는 “이게 신이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신에 대해서는 묻지를 않았다.

“나뭇잎이 신이다”는 카가와 도요히코의 말은 “새소리가 하늘님의 소리다”는 해월 최시형의 설법이나 “처처불상, 사사불공”이라는 원불교의 교리와 다르지 않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천지만물이 몸살을 앓고 있는 지구위기의 시대에는 이 가르침이 더욱 절실히 다가온다.


지덕(智德) : 숭산의 교육이념

숭산이 다녔던 동양대학의 건학이념은 ‘철학대학’과 ‘지덕겸전(智德兼全)’이었다. ‘철학대학’이란 “모든 학문의 중심에는 철학이 있다”는 뜻이고, ‘지덕겸전’은 지성과 덕성을 겸비한 인재를 기르겠다는 생각이다. ‘철학대학’이라는 건학이념은 ‘철학공원’의 건설로 이어졌다. 동양대학을 창시한 이노우에 엔료는 동경의 나가노구에 거대한 철학공원을 만들었다. 거기에는 인류의 사대성인을 모신 ‘사성당(四聖堂)’이라는 건물도 있다. 사성당은 서양철학의 아버지 소크라테스, 서양 근대철학의 종합자 칸트, 불교의 창시자 석가, 유교의 창시자 공자를 모신 사당으로, 지금도 매년 11월 첫 번째 토요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흥미롭게도 원광대학교 안에도 사대성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사성당과 다른 점은 칸트 대신 예수가 들어가 있다는 점이다. 바로 여기에서 숭산 박길진이 철학뿐만 아니라 종교도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모든 진리는 하나로 통한다”는 원불교 정신의 반영이기도 하다. 또한 원광대학교의 건학이념은 ‘지덕겸수(智德兼修), 도의실천(道義實踐)’이다. ‘지덕겸수’는, ‘지덕겸전’과 마찬가지로, 지성과 덕성을 겸비한다는 뜻이고, ‘도의실천’은 도덕과 정의를 실천한다는 말이다. 동양대학이 철학이라는 지성의 훈련에 강조점이 있다면, 원광대학은 종교를 통한 도덕의 실천을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거울 : 숭산의 인생철학

숭산이 평소에 가지고 다니던 소지품 중에 ‘거울’이 있다. 그가 거울을 중시한 이유는 1985년에 쓴 「숭산법어 : 거울의 교훈」이라는 글 속에 잘 나타나 있다.

“거울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해도 산에 비치면 산이 다 비쳐지고, 바다에 비치면 바다가, 천체(天體)에 비치면 수 많은 별들까지 다 그 거울에 들어가 버린다. (…) 그것은 거울 속이 텅 비어서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순무(純無)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무(無)의 심경(心境)을 가져보면 한량없는 넓은 마음이 되어 이 우주의 모든 것을 포용하고도 남음이 있게 될 것이다.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원보(院報) 23호, 1985.05.30.)

숭산에게 있어 거울은 장자(莊子)의 개념을 빌리면 허심(虛心), 즉 ‘텅 빈 마음’을 상징한다. 그리고 종교는 이러한 허심을 기르는 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거울은 ‘영성’의 다른 말이라고 보아도 좋다.

“머리는 텅 비워버려야 한다.” (원보 12호, 1981.05.)

“이러한 한가한 마음을 양성하기 위해 종교가 필요한 것이다.” (원보 13호, 1981.06.)

이렇게 보면 숭산에게 있어서는 원불교의 ‘원’은 텅 빈 거울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속에 아무 것도 없어서 모든 것을 포함할 수 있는 본래 마음을 이미지화한 것이다. 수덕호의 사대성인상도 거울과 같은 마음이 되어야 세울 수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타 종교의 진리에 열려있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개벽 : 마음을 비우는 수양

숭산에게 있어 ‘정신개벽’이란 ‘마음을 거울처럼 비우는 것’에 다름 아니다. 다만 장자와의 차이는 물질개벽 시대에 허심을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은 원불교의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라는 표어에 드러나 있다. 이 표어에서 키워드는 두 가지다. 하나는 물질과 정신의 대비이고, 다른 하나는 개벽이다.

1900년 전후로 일본을 통해서 동아시아에 본격적으로 서양철학이 수용되는데, 당시 서양철학을 이해하는 큰 틀은 유물과 유심, 물질과 정신이었다. 그런데 이 시기에 일본에서는 ‘수양’ 담론이 시작된다. ‘수양’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책들이 여러 권 나오는데, 바로 여기에서 ‘정신수양’이라는 개념이 성립한다. 문제는 일본의 수양론이 ‘국가주의’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국민교육이나 국민윤리의 일환으로 수양론이 개발된 것이다.

반면에 한반도에서는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인다. 국가라는 틀을 넘어서 우주론적이고 문명론적인 차원에서 수양론이 전개된다. 서구 근대의 ‘물질’주의의 폐해를 극복하는 새로운 정신적 주체, 영성적 인재를 길러내자는 취지의 수양론인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1917년에 천도교 사상가 이종린이 정신수양이라는 책을 쓰고, 1927년에 원불교 최초의 교재인 수양연구요론이 나오게 된다. 그리고 이런 수양론이 개벽론으로 이어지게 된다. 1930년대에 천도교에서 ‘정신개벽’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원불교의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개교표어도 이러한 사상사적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지구 : 사회병에서 지구병으로

숭산은 원불교의 대종경을 해설하면서 ‘도덕문명’을 말하였다.

“현대사회는 물질문명은 발달하였으나 많은 사회병을 안고 있다…이러한 때일수록 정신문명, 도덕문명의 선행이 절실히 요청된다.” (대종경강의 「제2 교의품」, 65쪽)

“물질문명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에 국한되지만, 도덕문명은 모든 인간에게 다 필요하다. 물질문명은 인류에게 유익한 반면에, 혹 피해를 줄 수도 있지마는 도덕문명은 언제 어디에서, 누구에게나 피해를 주는 바가 하나도 없다.” (대종경강의 「제2 교의품」, 62쪽)

숭산이 살았던 시절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원불교가 탄생했던 시절은, 한국사회가 근대화와 산업화에 매진한 시대였다. 그것을 숭산은 ‘사회병’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은 사회병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지구병’을 앓는 상황이 되고 있다. 친족윤리와 국민도덕을 넘어서 지구도덕, 지구윤리가 요청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숭산이 지향한 도덕대학과 정신개벽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에드가 모랭의 개념을 빌리면, “야만적인 과학기술문명”에 의해 초래된 지구위기를 탐욕을 비우는 정신개벽으로 극복해서 “지구문명”을 건설하자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인류세 시대에 “인류에게 주어진 새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