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퀘이커 평화주의자' 이행우 선생을 보내며
[기고] 평화통일운동가 이행우 선생의 '진주알 잇는 실' 같았던 삶
김성수 <함석헌 평전> 저자 | 2021-10-26
나는 1980년 대 초반 함석헌(1901-1989)을 처음 만나며 금방 '함석헌에 미친 사람'이 되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535546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565180)
1984년 5월 군대에서 제대하고 철도청에 복직한 나는 서울 명동 전진상교육관과 향린교회에서 매주 함석헌이 강의하는 노자와 장자 공부모임을 참석했다. 한 번은 노자 공부모임에서 바로 옆자리에 앉은 분이 퀘이커 교도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1985년 어느 날 그의 손에 이끌려 서울 신촌 봉원동에 있는 퀘이커모임을 처음 찾았다. 그곳에서 나는 예배 후 함석헌이 강의하는 성경과 퀘이커 공부모임에 참석할 수 있었다.
퀘이커 모임에 참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중년의 재미동포가 미국에서 한국 퀘이커 모임을 방문했다. 그는 예배 후 그의 생생한 '북한방문기'를 들려주었다. 그 재미동포가 이행우 선생(1931-2021)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한국전쟁 중 함경남도 북청에서 '혈혈단신'으로 월남한 '전쟁피난민' 출신이라 이행우 선생의 북한방문기에 온 시각을 곤두세우고 깊은 관심을 갖고 들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29329)
▲오른쪽 끝이 이행우 선생이다. ⓒ김성수 제공
당시는 광주학살로 손에 피를 묻히고 정권을 잡은 전두환 군사독재정권기라 북한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은 국가보안법 위반사항이었다. 그래서 이행우 선생은 전두환 정권에서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었다. 하지만 그가 재미동포라 전두환 정권은 그를 철저히 감시는 하되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하지는 못했다. 이행우 선생은 그 후에도 거의 매년 평생 40번 이상 북한을 방문했고 방한 할때 마다 퀘이커모임에서 북한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1950년대 후반부터 이행우 선생은 그의 스승 함석헌을 모시고 서울퀘이커모임에 참석했고 1960년엔 함석헌과 함께 서울퀘이커모임을 창립했다. 그리고 1968년 그는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퀘이커연구소 펜들힐로 유학을 갔고 그 후 가족과 함께 미국에 정착했다. 전주고등학교와 서울대 수학과 출신이었던 그는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곧 컴퓨터 전문가로 직장을 잡아 지난 2003년 73세의 나이로 현업에서 은퇴했다. 컴퓨터 전문가 1세대로 수입도 좋았지만 그는 그와 가족이 평생 살 집 하나 마련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평생 번 돈을 한반도 평화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에 썼기 때문이었다.
가족들과 함께 단란하게 휴가나 여행을 가기 보다는 그는 자비를 털어 미국, 북한. 일본, 중국, 유럽을 방문해 정치인, 관리, 시민활동가, 학자, 언론인들을 만나며 한반도 평화통일의 중요성을 이야기했고 국제회의를 개최했으며 그들이 한반도 평화를 위해 노력해 달라고 설득했다. 그 외에도 그는 자비를 털어 한반도 평화통일에 대한 영어논문집을 제작해 이들에게 배포했고 민주화운동으로 고난을 받고 있는 한국의 재야인사나 정치범들을 위해 미국에서 모금을 해 한국으로 돈을 송금해주었다.
1974년 한국민주화운동인사들과 그 가족들을 돕기 위해 '한국수난자가족돕기회'를 미국에 결성하면서 그는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한국의 민주화운동인사들이 거의 수입이 없는 실업 상태였기 때문에 재미동포들에게 모금활동을 하여 국내에 돈을 보냈던 것이다.
1982년에는 미국 퀘이커(AFSC) 대표단을 이끌고 북한을 방문해 북한 관리들을 만나 한반도 평화통일문제, 조미관계 개선문제, 북조선대표단을 미국에 초청하는 문제 등을 협의했다.
1986년 그는 한겨레 미주홍보원을 설립, 'Korea Report'라는 영문보고서를 발간해 대미홍보와 국제연대 활동을 전개했다. 그가 이 보고서를 발간하기 전에는,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라, 미국에서 한국문제를 분석한 영문 자료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미국 고위관리, 정치인, 학자. 언론인들이 그가 낸 보고서에 큰 관심을 보였고 미국사회에 한반도평화통일의 중요성에 대해 대단히 큰 영향을 미쳤다.
1987년엔 그는 미국의 지인들과 한국지원연대(Korea Support Network)를 결성, 한국 민주화운동을 지원하고 국제사회에 알렸다.
1989년엔 전국대학생협의회를 대표해 방북한 대학생 임수경이 문규현 신부와 함께 군사분계선을 넘어온 일이 있었다. 그 때 이행우 선생은 대학생 임수경을 무사히 한국으로 데려오기 위해 미리 문규현 신부와 함께 방북해 '임수경의 안전한 귀환을 위해' 북한당국의 협조를 구했다.
1994년에는 대기근으로 북한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아사했다. 그러자 이행우 선생은 기근으로 고통받는 북한동포들을 인도적으로 돕기 위해 미국 퀘이커들과 함께 방북해 북한의 농업을 지원하고 인적교류를 추진했다.
1995년 그는 미주평화통일연구소, 1998년에는 자주민주통일미주연합을 설립했다. 이런 단체들을 통해 이행우 선생은 한반도 평화통일문제에 대한 논문을 발간했다. 그리고 그가 발간한 논문들은 남북과 해외동포들 사이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는 그런 긍정적 반응을 바탕으로 다른 한반도 평화통일운동단체들과 적극적 연대활동을 벌였다.
이행우 선생의 이런 물밑 작업과 각고의 노력은 마침내 지난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을 가능하게 했고 한반도 평화분위기를 조성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이행우 선생의 한반도평화통일을 위한 보이지 않는 헌신적 봉사와 희생 덕에 마침내 지난 2000년 10월 김대중 대통령은 노벨평화상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늦게나마 그의 한국 민주화운동, 남북한 긴장완화, 한반도 평화통일 노력에 대한 공헌을 인정받아 지난 2011년 이행우 선생은 한겨레 통일문화상을 받았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583611)
그로부터 2년이 흐른 지난 2013년, 45년의 미국생활을 마치고 그는 한국으로 영구 귀국했고 곧 한국국적 회복을 신청했다. 하지만 당시 이명박 정권과 그 뒤를 이은 박근혜 정권은 블랙리스트에 오른 이행우 선생의 국적회복 신청을 받아들여 주지 않았다.
한편, 지난 2012년 8월 나는 북한 실향민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실의에 빠져있었다. 그러던 중 그 다음해인 2013년 귀국한 이행우 선생을 나는 매주 서울퀘이커모임에서 만나며 마치 아버지가 죽음에서 돌아온 것처럼 느꼈다. 그는 내가 이명박 대통령이 임명한 극우 인사 이영조 진실화해위원장을 상대로 고소한 법적소송에서도 큰 위로와 힘이 되어 주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379063)
그리고 그런 이행우 선생의 따스한 격려에 힘입어 나는 지난 2016년 마침내 이영조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 승소하는 결실을 맺기도 했다. (https://www.khan.co.kr/economy/economy-general/article/201605281843001
한편, 지난 2020년 8월 그는 광복회로부터 "한반도 분단극복과 통일운동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광복평화상'을 받았다.
올해 9월 나는 암으로 병상에 누워계신 이행우 선생께 문안인사차 영국에서 국제전화를 드렸다. 올해 3월 어머니를 보내고 코로나 때문에 어머니 장례도 참석 못해 힘들어 하던 내게 선생은, "성수, 힘내야지! 그리고 오래 살자!"라며 오히려 격려의 말씀을 주셨다. 그런 선생이 지난 10월 16일, 암으로 투병 생활 끝에 돌아가셨다. 그의 부인과 두 아들은 고인의 유언에 따라 비공개 가족장으로 장례를 진행한 뒤 그를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 모셨다.
함석헌 선생이 내게 정신적 할아버지와 같은 분이였다면 이행우 선생은 내게 정신적 아버지와 같은 분이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96447
이행우 선생은 달변가가 아니었지만 그 말씀의 내용은 늘 놀라웠다. 그의 가장 큰 무기가 '진실함'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평생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화려한 무대 뒤에서 남을 위해 조용히 일만 하셨다. 그는 아름다운 '진주목걸이를 이어주는 실' 같은 분이었다. 진주목걸이가 그 아름다움을 뽐내고 한 여인의 목에 당당하게 걸릴 수 있는 것은 그 진주 하나하나 속을 관통하여 이어주는 가느다란 '보이지 않는 실' 때문이다. 내가 보는 이행우 선생은 그런 분이었다. 그는 입이 아니라 삶의 모습을 통해 인간이 어떻게 남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몸소 본을 보여 주셨다. 그런 이행우 선생이 너무 그립다. 내년에 모국에 가면 반드시 어머니와 그의 묘지를 찾아가 머리 숙이고 목 놓아 마음껏 울고 싶다. 선생님, 너무나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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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행우 선생 : 1931년 1월 3일 전북익산 생. 1955년 서울대 문리과대학 수학과 졸업, 그 해에 해군장교에 임관, 해군사관학교에서 수학 교수. 1957년 군복무를 마치고 이리 남성고등학교, 서울 동북고등학교, 숭문고등학교에서 수학 교사, 한양대학교 출강. 종교는 퀘이커교. 1968년 미국퀘이커교단 초청으로 유학, 퀘이커교육기관인 펜들힐(Pendle Hill)에서 1년간 퀘이커교에 대하여 공부. 공부를 마치고 미국 필라델피아에 정착, American Bank(1969-1979), Burroughs Corp.(1979-1980), Polymer Corp.(1980-1986), Delaware Investments(1986-2003) 등에서 Systems Analyst로 근무. 2011년 한겨레통일문화상, 2020년 '광복평화상' 수상. 2021년 10월 16일 하늘나라로 가심.
▲이행우 선생 추도식 안내문